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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의 별 산악회(불광동 천주교회 산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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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글 스크랩 고 김수환추기경
이테파노-2 추천 0 조회 21 10.09.14 14:37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故 金壽煥 樞機卿

 

 

김수환 (金壽煥, 1922년 5월 8일-2009.2.16)은

대한민국 성직자이며,

로마 가톨릭 교회 한국최초의 추기경이다.

세례명은 스테파노이다. 대구광역시 출신.

.

 

故 김수환  추기경

 

인생 덕목 (人生德目)

 

 

一.말 ()


말을 많이 하면  필요 없는 말이 나온다.
양 귀로  많이 들으며,  입은 세 번 생각하고  열라.


 

 

二.책 (讀書)


수입의 1%를  책을 사는데 투자하라.
옷이 헤어지면  입을 수 없어 버리지만...
책은 시간이 지나도  위대한 진가를 품고 있다.


 

 

三.노점상 (露店商)


노점상에서 물건을 살 때  깎지말라.
   그냥 돈을 주면  나태함을 키우지만....
부르는대로 주고 사면  희망과 건강을 선물하는 것이다.  


 

 

四.웃음 ()


웃는 연습을  생활화 하라.
웃음은  만병의 예방약이며...치료약이며...
노인을 젊게하고...젊은이를  동자(童子)로 만든다.

 

 

 

五.TV (바보상자)


텔레비전과  많은 시간 동거하지 말라.
술에 취하면  정신을 잃고... 마약에 취하면  이성을 잃지만
텔레비전에 취하면  모든게 마비 된 바보가 된다.


 

 

六.성냄 ()


화내는 사람이  언제나 손해를 본다.
화내는 사람은  자기를 죽이고 남을 죽이며
아무도 가깝게 오지 않아서  늘 외롭고 쓸쓸하다.

 

 

 

七.기도 (祈禱)


기도는  녹슨 쇳덩이도 녹이며
천 년 암흑 동굴의  어둠을 없애는  한줄기 빛이다.  
주먹을 불끈 쥐기보다  두 손을 모으고  기도하는 자가 더 강하다.
기도는 자성(自性)을 찾게하며  만생을 유익하게 하는 묘약이다.


 

 

八.이웃 ()


이웃과 절대로  등지지 말라.
이웃은  나의 모습을 비추어 보는  큰거울이다.
이웃이 나를 마주할 때..
외면하거나  미소를 보내지 않으면...
목욕하고 바르게 앉아  자신을 곰곰히 되돌아 봐야 한다.


 

 

九.사랑 (慈愛)


머리와  입으로 하는 사랑에는  향기가 없다.
진정한 사랑은  이해. 관용. 포용. 동화. 자기낮춤이  선행된다
"사랑이  머리에서 가슴으로 내려온는데  칠 십년 걸렸다."

 

 

 

 

 

 

[편집] 유년시절과 학업

.

  • 보통학교 5년 과정을 졸업한 김수환은
  • 대구 성 유스티노 신학교에 입학하였고,
  • 서울교구의 소 신학교였던 동성상업학교(지금의 동성고등학교)로 편입하여
  • 계속 학업을 하였다. 1941년 4월 김수환은 천주교 대구교구 장학생으로
  • 일본 상지대학 문학부 철학과에 입학하여 학업을 계속했으나
  • 독립투쟁에 더욱 관심을 갖게되었다.
  • 1944년 일본 학병으로 강제 징집 당하여
  • 일본 사관후보생으로 훈련을 받았으나
  • 이듬해 전쟁이 끝나면서 다시 상지대학에 복학하여
  • 1946년 12월에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다.
  • 서울 성신대학교(현 가톨릭대학교)에 편입하여 학업을 지속하다가
  • 1951년 9월 15일대구 계산동 성당에서 사제서품을 받고 천주교 신부가 되었다.
  • .

                                      

   故김수환 추기경. 사제품을 받고 난 후 김수환 추기 경이 어머니와 함께 찍은 사진. 김수환 천주교 추기경의 회고록 ‘추기경 김수환 이야기’에 수록.동아일보 자료사진.

 

 

[편집] 사목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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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9년 4월 추기경 서임식에서 교황 바오로 6세에게서
               추기경 반지를 받는 모습(로마 베드로 대성전).
         (사진=천주교 서울대교구 제공. 조선일보 DB) /조선일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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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추기경으로서의 사목

.

1969년 3월 28일, 교황 바오로 6세는 김수환 대주교를 추기경으로 임명하였다.

이 때 그의 나이는 47세였고 당시 추기경중 최연소 추기경이었다.

.

김수환 추기경은 이후 30년 동안 천주교 서울대교구장으로 재임하면서

두 차례에 걸쳐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의장을 역임했고,

주교회의 산하 여러 분과 위원장과 전국 단체들의 총재를 맡았으며,

1975년 6월 1일부터 평양교구장 서리를 겸하였다.

.

1970년에는 아시아 천주교 주교회의 구성 준비 위원장으로 선출되었으며,

1967년 이후에는 한국 대표로서 여섯 차례에 걸쳐

세계 주교 대의원 회의에 참석하기도 하였다.

 

.

 

 

이 밖에도 김수환 추기경은 고위 성직자로서 한국의 종교뿐만 아니라

정치·사회·문화 등 여러 방면에 공헌한 업적을 인정받아

1974년 2월 서강대학교에서 명예 문학 박사 학위를 수여받은 이래

미국 노틀담 대학, 일본 상지대학, 고려대학교, 미국</! FONT> 시튼 힐 대학,

연세대학교, 타이완 후젠 가톨릭대학, 필리핀 아테네오 대학 등! 에서

명예 법학·철학·인문학 박사 학위를 수여받았다.

.

그러던 중 75세가 되던 1997년 김수환 추기경은 고령의 나이를 이유로

로마 교황청에 서울대교구장 사임 의사를 밝혔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후 그는 다시 여러 차례 사임 의사를 밝혔고, 1998년 4월 19일에는

아시아 특별 주교 시노드 참석차 교황청을 방문한 자리에서

다시 한 번 사의를 표명하였고, 결국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그의 청을 들어줄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여

1998년 5월 29일 서울대교구장과 평양교구장 서리직의 사임을 허락하였다.

.

  • 김수환 추기경은 교회가 공동선을 이룩하려면
  • 불의와의 타협을 거부해야한다고 하였으며, 그의 사상은 유신체제 아래에서
  • 탄압을 당하던 민주화 인사들의 인권을 위해서, 정의의 회복을 위해서 쓰여졌다.
  • 특히 1980년대 민주화운동에서 김수환 추기경은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
  •  
  • 그 결과 한국 천주교회는 정치적으로 많은 고난을 맞이하게 되지만
  • 사람들에게 천주교를 더욱 가까이 느껴질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 특히, 1987년 천주교 서울대교구에 빈민사목위원회를 두었고
  • 김수환 추기경 재임기간 중에 복지기관을 150개나 설립하는등
  • 어려운 사람들을 위하는 삶을 보여주었다.
  • .
  • 1970년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받았다.
  • .
  • 1998년 서울대교구장과 평양교구장서리를
  • 청주교구장 정진석 주교에게 물려주었으나 많은 왕성한 활동을 통하여
  • 아직도 사회 곳곳에 그의 영향이 끼치고 있으며,
  • 세계적으로도 최고령 추기경과 최장재임 추기경으로서도 명성이 높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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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김수환 추기경, 86번째 생일잔치. 사진 제공 평화신문

 

[편집] 최근 동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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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환으로 인하여 고령의 나이에 심신이 쇠약해져

강남성모병원에서 입원 치료를 받던 중, 2008년 10월 4일 오전 한 때,

호흡곤란으로 산소 호흡기에 의존했으나 지금은 정상을 회복하였다.

하지만, 언제 다시 돌발상황이 발생할지 알 수 없기 때문에 주의를 기울이고 있다.

2009년 2월 16일 오후 6시12분 선종(善終)하시다.

 

[편집]

.

  • 《하느님은 사랑이시다》(분도출판사, 1981)
  • 《평화를 위한 기도》(1981)
  • 《이 땅에 평화를》(햇빛출판사, 1988)

 

 

 

 

부디 天國에서 永生을 누리소서

 

 

  •  
한국 가톨릭계를 대표하는 김수환 추기경이 선종한 16일 오후 명동성당에서 김 추기경 시신이 유리관에 안치된 가운데 장례의식이 진행되고 있다. /연합

 

 

 

◇ 애도문 전문

친애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가 사랑하고 존경하는 김수환 추기경께서

16일 오후 6시 12분

우리 곁을 떠나 하느님 품 안에서 선종하셨습니다.

한국의 가톨릭 신자들과 김수환 추기경의 선종을 애통해하는

모든 분들께 위로의말씀을 드립니다.

우리 모두 마음을 모아 하느님께서 김수환 추기경을

영원한 생명의 나라로 받아주시기를 기도합시다.

김수환 추기경께서는

항상 우리 사회의 큰 어른으로서 빛과 희망이 되어 주셨습니다.

김수환 추기경께서는

가톨릭 신자뿐 아니라 모든 한국인의 '사랑과 평화의 사도'로서

하느님께 받은 사명을 충실히 수행해 오셨습니다.

특히 우리나라가 힘들고 어려웠던 시절

김 추기경님의 존재만으로도 큰 위안이 되었습니다.

김수환 추기경께서는

노환으로 고통을 받으시면서도 마지막 순간까지

미소와 인간미를 잃지않으셨습니다.

김수환 추기경께서

마지막 순간까지 세상을 향해 외치셨던 메시지는

인간에 대한 사랑과 그리스도의 평화와 화해였습니다.

평소에 김수환 추기경께서 바라던 대로

이 땅에 평화와 정의가 넘치도록
마음을 모아 김수환 추기경의 선종을 애도하고 기도해주십시오.

이 시대의 성자인 김수환 추기경님을 우리에게 보내주신 하느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자비로우신 하느님, 친히 주님의 일꾼 김수환 추기경을

거룩한 교회의 목자로 세우셨으니인자로이 굽어보시어,

말과 모범으로 신자들을 보살피다가 세상을 떠난

김수환 추기경이 마침내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하소서. 아멘."


 

 

 

 

 

 

************

 

 

 

[김수환 추기경 추모]

 

추기경님도 행복하셨으면 좋겠습니다

-김수환 추기경님 가시는 길에

 

                                               나태주 시인

 

믿음 다르고

생각과 마음 다르고

비록 얼굴 뵈온 일 없어도

추기경님은 우리의 영원한 추기경님

잠시나마 당신 같은 어른과 함께

같은 땅에서 같은 바람 마시고 산 것이

더없는 영광이요 감사였습니다

병든 이들과 핍박받는 이들과

버림받고 가난한 이들과 더불어

지극히 낮게 가난하게 살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음이 가장 마음 아프셨다는

한없이 높은 마음의 어른

마지막 고요한 숨결 남으실 때까지

‘미안합니다’ ‘고맙습니다’란 말씀

입에 달고 사셨던

우리 옆집 할아버지 같았던 성자

마지막으로 주신 당신 말씀

‘평생 과분한 사랑을 받았습니다.

서로 사랑하고 용서하십시오’

저희들 내일도 여전히 다투고 불화하고

어리석게 살겠지만 때로 그 말씀 떠올리며

조금은 잘 살아보려고 애쓸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드리지 않아도 아시지요?

어제 몹시 추운 겨울날 저녁 어스름

지구라는 별의 동방에 작지만 아름다운 나라

오랫동안 가난하고 버림받은 자의 하늘이었던

한 사람이 당신 나라로 가시었습니다

조금은 먼지바람 날리고 흐릿한

황색의 햇빛이 사선으로 비치는 가느른 길

조선종 어리고 순한 노새의 잔등에

여든 일곱 해를 살아 지치고 늙은 인간의 몸을 얹고

하나님의 선하신 백성 한 분 그 나라로 가시었습니다

추기경님!

당신과 더불어 이 땅의 사람들

오래 따뜻하고 행복했음을 당신도 아시지요?

오늘, 당신 선종하셨다는 소식 듣고

많은 사람들 뜨거운 눈물 뿌려 인간의

이별을 아쉬워하고 있습니다

저희들 눈물로 하여 추기경님도 잠시

평안하시고 행복하시었으면 좋겠습니다

좋으신 당신 이 땅에 보내주셨던

하나님께 감사드리며

추기경님 안녕히!

하나님께도 안녕을!

 

나태주 시인

서울신문/2009.2.18

 

 




 

 

 

 

 

 

 

 

 

 
▲ 사진은 1969년 박 대통령의 초청을 받아 청와대에 들어갔을 때
만난 어린시절 박근혜 의원(추기경 김수환 이야기)./연합뉴스

김병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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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산 김창숙과 김수환 스테파노


                                                                         송 재 소(한문학자)

명동의 기적. 김수환 추기경을 애도하는 인파가 4일간 40만 명에 달했다고 한다. 새벽 6시부터 자정 무렵까지 강추위에 떨며 4,5시간을 기다려야 추기경의 마지막 모습을 잠깐 볼 수 있을 뿐인데,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다녀간 것을 ‘명동의 기적’이라 불러도 좋을 듯싶다.

사람들은 왜 이렇게 추기경에게 열광하는 것일까? 어린 시절, 자라면 장사를 해서 25세에 가정을 꾸리고 30세에는 어머니에게 인삼을 사드리겠다는 소박한 꿈을 지녔던 소년이 47세의 나이로 세계 최연소 추기경이 되어 그동안 걸어왔던 성직자로서의 큰 걸음이 사람들에게 깊은 감동을 주었을 것이다.

신부님, 신부님, 우리 신부님

나 개인적으로는 추기경의 인간적인 풍모가 가슴에 와 닿았다. 추기경은 회고록에서 이렇게 말했다. “결혼해서 오순도순 살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도 해봤다. 굴뚝에서 저녁밥 짓는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시골 오두막집 풍경, 얼마나 정겨운 풍경인가.” 추기경인들 어찌 인간적인 고뇌가 없었을까. 이런 인간적인 고뇌를 솔직하게 털어놓는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분은 또 추기경 임명 소식을 전해 들었을 때의 감회를 이렇게 술회하기도 했다.

   한국교회가 세계교회에서 인정받았다는 사실이 가장 기뻤다. … 그러나 한편으로는 ‘도망갈 길이 정말 막혔구나’하는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 일본 유학, 사제서품, 주교임명 등 신상에 어떤 변화가 일어날 때마다 결국에는 그 변화를 받아들이면서도 마음 한 구석에서는 ‘도망갈 방법이 없을까’라는 궁리를 떨치지 못했다 .

물론 ‘도망간다’는 것이 성직자의 길을 포기한다는 뜻은 아니었을 것이지만 이 얼마나 솔직한 고백인가. 이런 인간적인 면모 때문에도 사람들은 그에게 이끌렸을 것이다. 그동안 신문과 인터넷에 소개된 수많은 일화 이외에 비교적 덜 알려진 이야기 한 토막을 여기서 소개하고자 한다.

몇 년 전 성균관대학교의 심산사상연구회에서 추기경에게 심산상(心山賞)을 수여하기로 결정한 일이 있었다. 이 상은 독립투사이자 성균관대학교의 설립자인 심산(心山) 김창숙(金昌淑)선생의 업적을 기려서 제정한 상인데, 수상자 선정 과정에서 적지 않은 내부의 진통이 있었다. 심산선생은 저명한 유학자이다. 유학자인 심산선생 이름으로 주는 상을 기독교인이 받아서 되겠느냐는 논란이 있었던 것이다. 우여곡절 끝에 수상자를 추기경으로 결정하고 추기경의 의사를 타진한 결과 추기경은 수상을 흔쾌히 수락하셨다.

종교가 장벽이 되지 않은 사랑의 베풂

그런데 심산상을 수상한 사람은 심산선생의 기일(忌日)에 묘소를 참배하는 것이 관례로 되어 있었다. 묘소를 참배하려면 유교식으로 절을 해야 하는데 추기경에게 그걸 강요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추기경은 거리낌 없이 절을 했고 모두들 놀랐다. 후일 기독교계에서 이것이 문제가 되자 추기경은 “이 어른이 살아계셨다면 마땅히 찾아뵙고 절을 했어야 하는데 돌아가셨으니 묘소에서 절을 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은가”라 말했다고 한다. 참으로 감동적인 말씀이 아닐 수 없다.

추기경으로부터 받은 감동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성균관대학교의 심산사상연구회는 교수들의 자발적인 모임이어서 재정이 넉넉하지 못했다. 교수들의 회비와 기타 찬조금으로 운영하던 터이라 그 때 상금이 고작 7백만 원이었다. 이런 사정을 간접적으로 전해 들으셨는지 추기경께서는 후일 사람을 시켜서 조그마한 상자를 보내왔는데 그 안에는 상금 7백만 원에 3백만 원을 더한 일천만 원의 돈이 들어 있었다.

추기경은 이런 분이었다. 그분에게는 유교와 기독교의 장벽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사람이 사는 세상에서 사람들에게 아낌없는 사랑을 베풀고 가셨기에 오늘 이 땅의 사람들이 그토록 그 분의 선종(善終)을 아쉬워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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