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배마실은 한국 최초의 방인 사제 성 안드레아 김대건 신부가 소년 시절을 보낸 곳이다. 무덤이 있는 미리내에서 산길로 30리, 찻길로 80리 거리에 위치한 골배마실에서 그 옛날 김대건 신부는 그의 나이 15세 때 신학생 후보를 찾아 헤매던 모방 신부에 의해 장래 조선 교회를 이끌 목자의 재목으로 선택된다. 그리고 사제가 되기 위해 마카오로 유학을 떠날 때까지 몸과 마음을 준비하며 어린 시절을 보냈던 곳이다.
김대건 신부가 태어난 것은 1821년 8월 21일, 지금의 충남 당진군 우강면 송산리인 솔뫼에서 그는 증조부 김진후, 조부 김택현, 부친 김제준, 모친 고(高) 우르술라 사이에서 둘째아들로 태어났다.
김 신부의 집안에 신앙이 스며든 것은 그의 증조부 김진후로부터 시작된다. 그가 면천 군수로 재직하고 있을 때 그는 내포의 사도로 불리는 이존창으로부터 복음을 전해 듣고 곧 벼슬을 버리고 신앙에 전념한다. 하지만 1791년 진산 사건으로 그는 옥에 갇히고 1801년 신유박해 때는 유배를 가기도 한다. 1805년 다시 붙잡힌 그는 결국 10년의 옥고 끝에 순교한다.
그로부터 7년 후 김대건 신부가 탄생하고 재복이라는 아명으로 7살까지 솔뫼에서 성장한다. 그러다가 김진후의 둘째 아들이자 김 신부의 조부인 김택현이 가세가 기울고 더 이상 신앙을 지키기가 어려워지자 가족들을 이끌고 바로 이곳 경기도 용인 땅 골배마실이라는 산골로 삶의 터를 옮겼다. 오랫동안 살아왔던 집과 땅을 떠나야 했던 이들의 피난길은 설움과 눈물로 가득 찼지만 이는 신앙을 지키겠다는 굳은 의지에서 나온 결단이었다.
선대의 신앙을 이어받은 김제준 이냐시오 성인은 모방 신부로부터 성세와 견진 성사를 받고 회장에 임명되어 전교에 힘쓰면서 자신의 아들을 사제의 길로 인도한다. 그 역시 1839년 기해박해로 체포돼 그 해 9월 26일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을 받고 순교한다.
마카오로 유학을 간 신학생 김대건은 아편 전쟁 때에는 마닐라로 피했다가 또다시 중국 땅 요동에서 공부하고 한때는 한만(韓滿) 국경을 전전하다가 서울로 돌아온 것이 9년 만인 1845년이다.
그는 겨우 5개월을 머문 후 상해로 갔다가 그 해 8월 17일 김가항 성당에서 페레올 주교로부터 사제로 서품된다. 10월 해로를 택해 국내에 잠입했을 때 그는 비로소 자신이 어려서 자라던 골배마실을 찾아 어머니 고 우르술라와 감격의 재회를 한다.
귀국 후 첫 사목지를 은이 마을로 정한 김 신부는 공소를 차려 용인 일대의 사목을 시작한다. 하지만 부친의 임종을 지키지도 못하고 모친 역시 귀국 후 잠시 얼굴을 대했을 뿐, 김 신부는 사제품을 받은 지 1년 만인 1846년 9월 16일 새남터에서 장렬한 순교로 일생을 마감한다. 1814년 김진후로부터 시작돼 김대건 신부까지 30여 년 동안 김씨 일가는 4대가 순교의 월계관을 쓰는 신앙의 명가가 된 것이다.
지금 골배마실은 그 흔적이 없다. 다만 김 신부가 살던 생가터만이 골프장(양지파인리조트) 한 쪽에 보존돼 그의 동상과 야외제대 그리고 생가터 기념비만이 서 있을 뿐이다. 그리고 또 하나 김대건이 어릴 적 손길이 닿았다는 늙은 고욤나무 한 그루가 다른 나무들 사이에 무심하게 서 있을 뿐이다. [출처 : 주평국, 하늘에서 땅 끝까지 - 향내나는 그분들의 발자국을 따라서, 가톨릭출판사, 1996, 내용 일부 수정(최종수정 2015년 11월 28일)]
소년 김대건과 골배마실 성지
김대건의 본관은 김해이고, 증조부는 김진후(金震厚, 비오, 1739-1814)이며, 조부는 김택현(金澤鉉)이다. 부친은 김제준(金濟俊, 이냐시오, 1796-1839년) 성인이며 모친은 고 우르술라로 선대 때부터 여러 대에 걸쳐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여 충청도 솔뫼에서 살아왔다. 김대건은 1821년에 탄생하였고 아명(兒名)은 재복(再福)이며, 보명(譜名)은 지식(芝植)으로 관명(冠名)은 대건(大建)이다. 김대건의 가문에서 처음으로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인 사람은 증조부 김진후였다. 그는 1791년(신해박해)에 체포되어 1801년(신유박해) 때에 유배되었다가 1805년 다시 잡혀 충청도 해미에서 10년간의 옥중 생활을 하던 중 1814년에 순교하였다.
김대건과 그 가족들이 생활하였던 ‘골배마실’이라는 지명은 배마실이라는 동네 이름에서 유래되었다. 즉 배마실(현 양지성당 소재지)은 옛날부터 첩첩산중인데다 뱀과 전갈이 많이 나오는 지역이라서 뱀마을, 즉 ‘배마실’이라고 불러왔다. 그리고 김대건의 가족이 거주하던 집은 배마실까지 이어지는 골짜기 안에 있어 ‘골배마실’이라고 붙여졌다.
소년 김대건이 세례성사를 받게 된 때는 한국에 프랑스 선교사로서 처음 입국한 나 모방 신부로부터 15세 되던 해인 1836년 은이 공소에서였다. 그러나 소년 김대건은 세례는 받지 않았어도 곧바로 신학생 후보로 선발이 된 사실로 미루어 보아 가정에서 이미 교리 공부와 기도 생활은 착실히 배워 실천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1816년 이후 시작된 평신도 지도자들의 꾸준한 성직자 영입 운동이(매년 중국교회를 방문했던 시기) 무르익어 결실을 앞두고 있던 때였기에 소년 김대건은 성직자에게 직접 세례 성사를 받고자 하는 뜻을 갖고 기다렸음이 확실하다.
이처럼 골배마실 성지는 김대건의 소년 시절의 향취가 남아 있는 곳이요, 성소의 꿈을 키우던 장소이다. 조선 땅에 이제 곧 오실 신부님을 기다리며 기도하고, 교리를 익히고, 조선 교회의 미래를 위해 한 몸을 바치고자 하는 포부를 가슴에 담고 살았던 장소이고, 세례성사와 첫 영성체를 준비하면서 설레는 마음을 간직하고 생활했던 곳이다.
골배마실은 옛날부터 양지 교우(신자)들 사이에 김대건 신부의 가족들이 살던 집터로 구전되어 왔었다. 하지만 이곳을 발굴하게 된 때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골배마실 성지는 1961년 양지 본당 5대 주임이었던 정원진 루카 신부에 의해 발굴이 시작되어 돌절구와 갖가지 생활 도구, 즉 맷돌, 우물터, 구들장 등을 발견하면서 성지 개발에 착수하게 되었다.
그리고 1997년에는 40년 가까이 옛 모습 그대로 있던 성지를 새롭게 단장하게 되었는데, 새로이 청동으로 제작된 2미터짜리 성상을 모셔 7월 5일 대축일을 맞아 축성하였고 처음 골배마실 성지에 모셔졌던 성 김대건 신부 성상은 양지 성당 정원에 모셔 지금에 이르고 있다. [출처 : 은이 성지 홈페이지]
수리산, 골배마실, 은이 - 박해 시대의 교우촌
박해의 칼날을 피해 비밀리에 형성된 전국의 교우촌들은 영원한 본향(本鄕)인 천당길을 얻으려는 숨은 꽃(隱花)들의 보금자리였다. 그들은 이곳에서 신앙을 지켰으며, 순교를 향한 오랜 고통과 세월을 참고 기다려야만 했다.
어화 벗님네야
우리 본향 찾아가세.
인간 영복(永福) 다 얻어도
죽고 나면 허사되고,
세상 고난 다 받아도
죽고 나면 그만이라.
아마도 우리 낙토(樂土)
천당밖에 다시 없네.
(최양업 신부의 천주가사 '사향가' 중에서)
그러나 그 대부분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홀연히 형성되었다가 배교자나 포졸들의 눈에 띄어 갑자기 사라져 버린 것이 우리 교우촌이었다. 다행인 것은 현재까지도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있는 곳이 곳곳에 남아 있고, 신앙 후손들에게 그 신심이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1830년대 최양업(토마스) 신부의 부친 최경환(崔京煥, 프란치스코) 성인에 의해 교우촌으로 가꾸어진 수리산(修理山, 안양시 안양 3동의 뒤뜸이 마을). 성 김대건(안드레아) 신부가 성장한 골배마실(용인군 내사면 남곡리)과 이웃 '숨은 이들의 마을' 은이(隱里) 교우촌. 이 두 지역은 경기도에서도 가장 유명한 교우촌이자 카타콤바와 같은 박해 시대의 비밀 교회로서 신앙을 이어 나가는 원동력이 되었다. 1836년 초 수리산에서는 최양업이 교우들의 추천으로 신학생으로 선정되었고, 얼마 뒤에는 골배마실에 살던 김대건도 신학생으로 선발되어 함께 마카오로 유학을 떠나게 되었다.
수리산이나 골배마실 골짜기는 땅이 척박하였으므로 신자들 대부분이 화전이나 담배 농사를 지어 생활을 꾸려가야만 했다. 그러니 생활에 여유가 있을리 없었지만 그들은 언제나 새 신자들을 환영하였고,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는 그들이 생활 터전을 마련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또 신부의 방문이 있을 때면 여럿이 모은 공소전(公所錢)을 바쳐 교회 사업을 도왔으며, 아침 저녁으로 함께 모여 기도하는 것을 일상 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일로 생각하였다. 이것이 바로 초대 교회로부터 내려오는 나눔과 섬김의 전통이었다.
1839년의 기해박해 때 이곳은 모두 포졸들의 습격을 받게 되었다. 당시 수리산의 회장 최경환은 이미 순교를 각오하고 있던 터였으므로 태연히 그들을 맞이하였다. 뿐만 아니라 아내 이성례(李聖禮, 마리아)에게 음식을 준비하여 대접하도록 한 뒤 교우촌 신자들과 함께 오랏줄에 묶인 채 포도청으로 끌려갔다. 그리고는 무지한 형벌을 여러 차례 받은 뒤 그 상처 때문에 옥중에서 순교하고 말았다. 반면에 최양업 신부의 모친 마리아는 두 살짜리 막내 자식에 대한 육정(肉情, 모정)을 이기지 못하고 배교하였으나, 이내 잘못을 뉘우친 뒤 끊어지는 육정을 억누른 채 순교를 맞이하였다.
그러나 훗날의 시복 과정에서 마리아는 첫 번째의 배교로 제외되고 말았다. 그러나 어린 자식 때문에 일시 배교했으나 이를 뉘우치고 순교한 사실은 오히려 조선의 전통에서 본다면 모정과 신앙을 모두 지킨 모범적인 순교임이 분명하다. 따라서 앞으로의 시복 과정에서는 마땅히 마리아를 다시 '하느님의 종'에 포함시키지 않으면 안된다.
한편 골배마실에 살던 김대건의 부친 김제준은 사위 곽(郭) 씨의 밀고로 체포되어 순교하였으며, 아내 고 우르술라는 동냥으로 목숨을 부지해야만 하였다. 그러니 첫 번째 방인 사제가 되어 귀국한 뒤 모친을 뵙게 된 아들 김대건의 마음이 어떠했을까? 김대건이 골배마실로 돌아와 모친과 함께 생활하면서 은이 공소를 중심으로 활동한 것은 1845년 말부터 다음해 부활절까지였다. 그러다가 그는 황해도 지방의 해로를 개척하러 나갔다가 체포되어 새남터에서 순교하였다.
최경환과 김제준이 순교한 뒤 그들의 시신은 가족들에게 거두어져 수리산 자락과 골배마실 인근에 각각 안장되었다. 그러나 최경환의 무덤이 후손들에 의해 가꾸어져 온 반면에 김제준의 무덤은 잊혀지고 말았다. 이후 최경환의 유해는 1930년에 발굴되어 명동 대성당 지하 묘지에 안치되었으며, 본래 무덤 자리와 교우촌은 1965년부터 사적지로 조성되기 시작하였다. 또 골배마실에는 1962년 양지 본당 신자들에 의해 김대건 신부상이 건립되었고, 은이 공소 터는 최근에 일부가 매입되어 사적지로 조성되고 있는 중이다. [출처 : 차기진, 사목, 1999년 5월호]
교우촌 골배마실
수리산이 성 최경환과 최양업 신부의 신앙이 서려있는 곳이라면, '골배마실'은 김제준(金濟俊, 이냐시오) 성인과 김대건 신부의 신앙이 잠들어 있는 곳이다. 김대건 신부의 가족이 고향인 충청도 솔뫼를 떠나 서울 청파동을 거쳐 용인 땅에 정착한 것은 대략 1827년경이었다. 당시 그의 가족이 정착하여 교우촌을 일군 곳은 골배마실이 아니라 남쪽 산너머에 있는 '한덕골'(寒德洞, 경기도 용인군 이동면 묵4리)이었다.
앞에서 말한 최경환의 형 최영겸도 1832년 무렵에 이곳 한덕골로 이주해 왔으며, 1839년 이후에는 최양업 신부의 넷째 아우인 최신정(델레신포로)이 이 집에서 성장하였다. 지금의 한덕골은 용인읍에서 미리내 방향(남쪽)으로 가다가 6km 쯤에서 왼쪽으로 올라간다. 이곳에서 다시 원천(샘골) 부락을 지나면 영보 수녀원과 신원 컨트리클럽 간판이 나타나고, 더 왼쪽으로 가다보면 한덕골 본동이 나타난다.
김제준은 그 후 가족들을 이끌고 1835년 무렵에 한덕골에서 골배마실로 이주하였다. 이 골배마실은 본래 한덕골에서 북쪽으로 뻗은 산과 어은이 고개를 넘으면 곧바로 갈 수가 있었는데, 지금은 이 길이 막혀 버리고, 양지 방면에서만 들어갈 수가 있게 되어있다. 한편 골배마실 서쪽에 있는 '숨은 이들의 마을'인 '은이'는 지금으로부터 약 160년 전에 형성된 교우촌으로, 이곳 형제봉 아래는 박해 때문에 떠돌게 된 경기도와 충청도 교우들이 모여 비밀리에 신앙 공동체를 이룩한 곳이다.
모방 신부는 1836년 초에 김제준의 방문을 받고, 7월경에 골배마실을 들러 김대건을 신학생으로 선발한 뒤 은이 공소에서 성사를 집전하였다. 이처럼 이동면의 한덕골, 내사면의 골배마실과 은이 공소는 일찍부터 교우촌으로 일구어진 곳이며 김대건과 최양업 두 신부 집안과 관계가 깊은 곳이었다. 또 한덕골에는 김 신부의 조부인 김택현과 숙부인 김제철의 무덤, 최 신부의 중백부인 최영겸의 무덤이 있었고, 1839년에 체포되어 순교한 김제준 성인의 무덤도 골배마실 어딘가에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지금 이들의 무덤을 찾을 길은 없다. [출처 : 차기진, 사목, 1998년 6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