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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주는 불교를 더 알고 싶었다. ‘문자가 없는 경’의 세계를 체험하고 싶었다. 아예 절집에 머물며 제대로 공부해 보고 싶었다. 영주는 대원사를 자주 찾았다. 몸이 약해서 어릴 때부터 들렀던 절이었다.
영주가 요양(療養)이 아닌 정신적 수양(修養)을 목적으로 대원사를 드나들자 묵곡리 집 식구들은 불안했다. 아버지 이상언은 말수가 줄어들었다. 마침내 영주가 대원사에서 한 철을 나겠다고 하자 집안 분위기는 무겁게 가라앉았다. 가족의 불안감이 현실로 다가오고 있었다. 아버지는 장남과 눈을 맞추지 않았다. 가장의 마른기침 소리만 들어도 가솔은 화들짝 놀라곤 했다.
1934년 가을, 영주는 집을 나섰다. 대원사가 가장 가까운 절이긴 하지만 그래도 70리 길이었다. 이른 아침 이슬을 밟으며 떠나갔다.
“곧 돌아오겠습니다.”
영주는 혼잣말처럼 나직이 말했다. 아내 이덕명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머니는 그런 며느리를 바로 볼 수 없었다. 아버지는 끝내 내다보지 않았다. 경호강변은 어느새 삭풍(朔風)이 불고 있었다. 영주는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았다. 그렇게 스물세 살 청년은 대원사의 가을 속으로 들어갔다.
대원사는 지리산 동쪽 기슭 대원사계곡(유평계곡) 옆에 파묻혀 있었다. 계곡은 깊고 길었다. 선녀탕, 옥녀탕, 세심대(洗心臺), 세신대 등이 있음으로 미루어 불교적 설화가 깃들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설화는 세월에 떠밀려 멀리 바다로 흘러갔을 것이다. 대원사계곡과 그 주변은 약자들이 숨어든 피난처였다. 임진왜란, 동학혁명, 항일투쟁, 한국전쟁 등의 난민들이 숨어들어 화전 등을 일구며 생을 이어갔다.
지금의 대원사는 유명한 비구니 참선도량이다. 스스로 동국제일 선원이라는 9층 석탑 앞의 선원[탑전塔殿]이 그윽하다. 경내는 정갈하고 비구니의 맑은 미소가 밝게 부서지고 있다. 이 모든 것이 법일 스님의 원력이 이루어낸 불사라며 그 공덕을 중창사적비문에 새겨서 기리고 있다.
하지만 천년고찰 대원사도 부침을 거듭했다. 신라 진흥왕(548년)때 창건한 후 여러 차례 불에 탔다. 그러다 1890년 혜흔선사가 전각을 중건한 후에는 고승의 강경(講經) 소리가 그득했고, 선객과 학인이 몰려와 탑전에서 좌선을 했다고 전해진다. 그것도 어찌 보면 잠시, 1914년 화재로 전각이 소실되었다. 다시 주지 영태(永泰) 등 50여 명이 1917년 전각과 요사채 등 12동 184칸의 건물을 중건했다고 한다.
영주가 들락거릴 때의 대원사에는 대처승들이 살고 있었다. 1936년 영주보다 2년 늦게 대원사로 출가한 법일 스님은 당시 대원사에 대처승이 100여명 정도 기거하고 있어 비구니로서 토굴생활에 불편한 점이 많았다고 회고했다. 그러니까 영주가 대원사에 머물 때에도 많은 대처승들이 살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훗날 여순사건(1948년)때 국군의 박격포사격으로 대원사 전체가 불탔는데, 그 직전까지도 수는 많지 않지만 대처승이 기거하고 있었다.
“그 당시 주지는 마을에서 술도가를 운영하고 가족이 있으므로 절에 머무르지 않았다. 어린 학인과 속인 몇 사람이 절을 지키는 정도였다.”(성우 스님)
아무튼 대원사는 일제강점기는 물론이고 해방 후에도 대처승들의 절이었다. 작정하고 공부하러 들어간 그해 가을의 대원사 광경을 성철은 훗날 또렷하게 기억해냈다. 마당에는 속가의 옷들이 빨랫줄에 늘어져 있었고, 바람이 풍경을 울릴 때면 기저귀나 여자 속옷이 나부꼈다. 영주는 가자마자 단풍놀이 나온 경찰서장 일행과 대처승들이 벌인 질펀한 술자리를 목격했다. 승려들이 왜경에게 술을 따르고 함께 고기를 뜯었다. 중들의 얼굴이 대원사계곡에 떨어진 단풍보다 붉었다. 성철은 훗날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살생을 금하는 게 불교의 근본인데 경찰서장이 온다니까 중들이 법석을 떨며 큰 돼지를 잡고 술을 몇 통씩 메고 개천에 나가고 난리더군요.”
영주는 그런 중들이 싫었다. 이후 숱한 출가의 권유에도 망설인 이유는 타락한 승려들에 섞이고 싶지 않아서였을 것이다. 하지만 당시 술 마시고 돼지 잡는 사찰은 대원사만이 아니었다. 영주가 ‘증도가’와 ‘불교’를 처음 읽었던 1930년대 초반, 조선불교는 끝없이 추락하고 있었다.
일제강점기 불교의 가장 큰 문제는 ‘세속화’였다. 그것은 조선시대 억불정책보다 무서웠다. 일제는 대처식육(帶妻食肉)을 허용했고 대처승들은 버젓이 절에서 처자식을 거느리고 살았다. 승려들은 살이 올라 뒤뚱거렸다. 승려의 결혼은 차치하고 축첩이 문제가 되는 무엄한 시대였다. 이 땅의 선지(禪旨)를 붙들고 있던 선승들은 제 가슴만 치다가 마침내 더 이상 불법을 능멸하지 말라며 입을 열었다. 백용성 스님도 1926년 두 차례나 건백서를 제출하여 조선총독부의 불교정책을 비판했다.
“석가모니 이래로 비구의 대처식육의 설이 없는데 근래에 무치(無恥)한 무리들이 대처식육을 강행하여 청정한 사원을 마굴로 만들고 결과적으로 참선, 염불, 간경(看經) 등 까지도 전폐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용성 스님은 대처식육을 행하는 무리를 대적(大賊)으로 단정했다. 하지만 대처승들의 반격이 만만치 않았다. 일본 유학을 다녀온 승려들까지 합세하여 불교계는 대처식육논쟁에 휩싸였다. 고기 맛을 보고 쾌락에 젖은 무리들은 소리쳤다.
“인간의 본능은 원시시대 이래 변치 않았다. 육체는 활동과 가치의 원천이다. 인간을 위한 불교가 돼야한다.”
여자를 곁에 두는 것은 본능에 따름이고, 왕성한 종교활동을 하려면 고기를 먹어야 한다고 우겼다. 그들의 항변이 가소로웠다. 용성 스님은 다시 1932년 잡지 ‘불교’에 일제 강점기의 사원경제를 개탄하는 글을 실었다.
“불교는 흡혈적, 사기적 종교이며 기생적 종교라 아편 독과 다름없다 하니 나는 조석(朝夕)으로 생각함에 수치스런 마음을 이길 수 없다.”
그러나 불교계를 혁신시키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사찰은 용성 스님의 표현대로 ‘음탕한 소굴’이 되어갔다. 오죽하면 일본인들이 조선불교의 타락을 걱정했겠는가. 승려들이 타락하니 백성들이 불교에서 멀어져갔다. 중이 나타나면 노려봤고, 아이들은 돌을 던졌으며 덩달아 개들이 짖었다.
조선불교는 억불정책에서 벗어났다고 환호하더니 결국 고삐 풀린 망아지가 되었다. 정체성을 잃고 이리저리 몰려다니다가 급기야 일본의 승복을 입겠다고 먼저 날뛰었다. 일제강점기의 한국불교는 참으로 비루했다.
일제강점기 조선불교의 타락상과 똑같은 궤적의 삶을 살아간 승려가 있었다. 바로 이회광(李晦光)이었다. 그는 조선왕조의 마지막 대강백(大講伯)이라 불렸다. ‘동사열전(東師列傳)’은 전국의 학인들이 이회광의 강론을 듣기 위해 풀덤불을 헤치며 몰려들었다고 전한다. 하지만 을사늑약 체결 후 20년 남짓 조선불교를 팔아먹었다. 승권을 쥐고 친일 행각을 벌여 ‘불교계의 이완용’이 되었다.
불교연구회 회장직을 맡아 불교계 핵심인물로 떠오른 이회광은 원종(圓宗)을 설립하여 조선불교를 일본 조동종과 합병하려 했다. 하지만 박한영, 한용운, 진진응 스님 등이 주축이 되어 원종을 부정하고 이회광 등 친일파를 규탄했다. 이회광의 야심이 일단 깨졌다.
1919년 3.1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났음에도 이회광은 이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 해 11월 일본으로 건너갔다. 청암사 주지 김대운, 실상사 주지 진창수, 대원사 주지 조영태(趙永泰) 등을 대동했다. (조영태는 영주가 자주 대원사에 들렀기에 마주쳤을지도 모른다.) 일본에서 돌아온 이회광은 조일(朝日)불교 연합책동을 벌였다. 그러나 승려들과 신도들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의 친일행각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크고 작은 비리에 연루되어 해인사 주지에서 쫓겨나자 ‘조선불교총본산을 설립하여 일선융화(日鮮融和)를 실천하자’고 떠벌렸다. 그러나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다. 조선총독부도 결국 그를 외면했다.
이회광의 말년은 쓸쓸했다. 몇 년 동안 잠적해 있다가 1933년 한강변의 조그만 절에서 생을 마감했다. 왜색에 물들어 살았던 그 많은 승려들도 이회광과 비슷한 최후를 맞았을 것이다. 이회광의 삶 속에 일제강점기의 조선불교가 들어 있었다. 그것은 거대한 지옥도였다.
하지만 어둠은 그 저편에 빛을 품고 있었다. 조선불교는 다시 일어서고 있었다. 영주도 스무 살을 지나서 ‘불교’를 구독했으니 불교에 대한 지식은 물론이고 만해와 용성 스님이 설파한 불교개혁론을 접했을 것이다. 이미 조선불교의 어두운 면을 훤히 들여다보고 있었을 것이다.
영주는 대원사에 들를 때마다 탑전이 마음에 들었다. 그 안에 들면 편안했다. 그 옛날 선승들이 대원사 탑전 안에서 깨달음을 구했으니, 그 기운이 영주에게 흘러들었는지도 모른다. 참선을 해보겠다며 탑전에 드니 주지가 펄쩍 뛰었다. 유발 속인이 어찌 탑전에 들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당시의 주지가 이회광을 따라 일본에 간 조영태였는지는 알 수 없다. 영주는 주지를 향해 일갈했다.
“당신들은 처자식 거느리고, 소 잡아먹고, 술장사 떡 장사까지 하면서 누구를 나무랍니까. 절에서는 공부를 해야지 어찌 살림을 하고 있단 말이요. 당신들이 그러고도 중이랄 수 있습니까. 그러면서도 웬 말이 그리 많으시오.”
그것은 조선불교에 대한 질타이기도 했다. 주지는 얼굴을 붉혔다.
김택근 법보신문 고문(언론인·시인)
출처: 법보신문
[김택근의 성철 스님 평전] 7. 홀로 든 화두, 속인으로 동정일여에 들다
『"‘서장’은 어림 850년 전에 깨쳤던 대혜가 청년 영주에게 선(禪)의 요체를 전하는 편지였다. 북송, 남송 교체기 피폐했던 시대의 대혜가 역시 일제강점기 궁핍한 시대의 조선 청년 영주에게 주는 가르침이었다. 영주는 대원사 탑전에서 불서를 보고 참선하는 방법을 익힌 대로 용맹정진했다. 24시간 내내 허리를 방바닥에 대고 눕는 일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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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이 깊어갔다. 계곡의 물소리가 가늘어지고 경내에는 낙엽이 수북했다. 영주는 탑전에 들지 못하고 대신 요사 작은 방에서 책을 보거나 사색에 잠겼다. 하지만 하루하루가 아까웠다. 갈 길은 먼데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낙엽 지는 소리에도 마음이 일어섰다.
산사의 가을밤은 일찍 찾아왔다. 어둠은 지리산 봉우리에서 빠르게 내려왔다. 대처승도, 그들의 아이들도, 또 객들도 일찍 잠자리를 폈다. 밤이면 고찰 대원사는 그야말로 적막강산이었다. 대중들이 일찍 잠자리에 든 것은 월동 준비를 마친 산사에 별로 할 일이 없기도 했지만 다른 이유도 있었다. 바로 지리산 일대에 호랑이가 나타나 사람을 해친다는 소문이 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영주도 갑자기 호랑이가 나타날까봐 무서웠다. 해가 지면 방안에만 있었다. 잠을 이루지 못하고 홀로 깨어있으면 가끔 달빛이 문틈으로 들어와 수북이 쌓였다. 문을 밀치면 별이 방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가을바람이 영주의 마음을 흔들었지만 호랑이밥이 될까봐 밖으로 나가지 못했다. 그런데 어느 날 보니 그런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졌다. 크게 깨쳐보겠다고 집을 나왔는데 호환(虎患) 정도를 두려워하다니 생각할수록 자신은 겁쟁이였다. 그날 밤부터 방문을 열어놓고 잤다. 성철은 마음속에서 호랑이를 몰아낸 일화를 이렇게 털어놨다.
“하루는 가만히 생각해보니 언제 나타날지 모르는 호랑이를 겁내서 떨고 있는 내 꼴이 우습다는 생각이 들었지. 호랑이에게 잡아먹힐 때는 먹히더라도 겁내지 말아야겠다 싶어서 그 뒤부터는 방문을 활짝 열어놓고 잤어. 그렇게 하루, 이틀, 사흘이 지나도 아무 일이 없었거든. 그 다음부터는 호랑이를 무서워하지 않아 낮이나 밤이나 마음대로 다녔어.”
대원사 다층석탑은 신라 선덕왕 때 자장율사가 부처님 사리를 모시고자 세운 것으로 알려졌다. 탑은 천 년이 넘었어도 그 자리에 의연했다. 세월에 그을려 피부가 검붉고 탑신이 조금 기울었을 뿐이었다. 그 앞 탑전(지금의 사리전)은 창건 이래 수많은 선승들이 정진했던 곳이니 대원사로서는 자부심이 서린 곳이었을 것이다. 그런 탑전에 유발 청년이 들어가 참선 공부를 해보겠다고 했으니 아무리 자신들이 대처승이라도 선뜻 허락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영주는 대원사에서 중국 대혜선사(1089~1163)의 편지글인 ‘서장(書狀)’을 정독했다. 대혜는 간화선으로 의심덩어리를 타파하여 대자유에 이르는 길을 체계화시켰다. 그것은 깨달음에 이르는 새 길을 낸 것이었다. ‘서장’은 대혜가 40명의 사대부와 두 명의 제자에게 보낸 편지를 묶은 것이다. 깨달음을 얻으려는 자들에게 화두를 참구하라는 가르침이 들어있다. 또 선 수행에 필요한 방법과 경계할 것들도 구체적으로 알려주고 있다. ‘서장’은 곳곳에 영주가 외우고 있는 ‘증도가’와 ‘신심명’의 글귀를 인용했기에 무릎을 치며 빠져들었을 것이다.
대혜는 화두 중에서도 유독 ‘개에게는 불성이 없다’는 ‘무자(無字)’ 화두를 들라고 강조했다. 무자 공안은 중국 당나라 때 어떤 학승이 조주 스님을 향해 “개에게도 불성이 있습니까.” 묻자 조주가 “없다”고 답한 것에서 비롯됐다. ‘구자무불성(拘子無佛性)’은 선종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화두이다. ‘부처님은 일체 중생에게 불성이 있다고 가르쳤는데 왜 조주는 개에게는 불성이 없다고 했는가’ 이를 의심하고 의심해가는 것이 무자 화두 참구였다. ‘서장’ 도처에 무자 화두가 등장한다.
‘무자 한 글자는 문득 생사 의심을 타파하는 칼입니다.’
‘화두를 참구하기를 ‘개도 불성이 있습니까?’ ‘없다’고 한 것을 보면 정히 이러한 때는 붉은 화로 위의 한 송이 눈과 같을 것입니다.’
‘지금 힘을 덜어서 고요하고 시끄러운 가운데서 한결같음을 얻으려고 한다면, 단지 조주 스님의 무자를 뚫으십시오. 홀연히 뚫으면 바야흐로 고요함과 시끄러움의 둘이 방해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 것입니다.’
‘청컨대 부질없는 알음알이의 마음을 무자 위에 돌려서 시험 삼아 헤아려 보십시오. 홀연히 헤아림이 미치지 못하는 곳을 향하여 이 한 생각을 타파하면 문득 이것이 삼세를 통달하는 자리입니다.’
‘만약 이 무자를 꿰뚫으면 부처님의 말씀과 조사의 말씀과 모든 노숙의 말씀과 천 가지 만 가지로 다른 것을 일시에 꿰뚫어서 남에게 묻지 않을 것입니다.’
‘당신이 조주의 구자무불성의 화두를 드는 것은 사람이 도둑을 잡는데 이미 숨은 곳은 알지만 다만 아직 잡지 못한 것과 같을 뿐입니다.’
‘티끌을 제거한다는 생각도 하지 말며, 감정의 티끌이라는 생각도 하지 말며, 차별 경계라는 생각도 하지 말며, 불법이라는 생각도 하지 말고, 다만 구자무불성의 화두를 들어야 합니다.’
‘때때로 조주 무자로 잡아 끌어서 오래오래 순수하고 익숙해지면 자연스럽게 무심하여 칠통(漆桶~옻칠을 하여 암갈색의 윤이 나는 통. 흔히 무명(無明), 또는 불법(佛法)에 무지한 승려를 비유함)을 타파하게 될 것입니다.’ (이상 전재강 역주 ‘서장’에서 옮김)
겨울 문턱에서 대원사에 변화가 있었다. 몇몇 승려들이 산문을 나섰다. 탑전에서 영주를 끌어낸 고집불통 주지도 산을 내려갔다. 새로 주지 대행을 맡은 스님은 젊었다. 영주와는 말이 통했다. 그는 진리를 찾아보려는 젊은이의 순수한 열정을 이해했다. 영주의 근기를 알아보는 안목도 지니고 있었다. 영주는 비로소 탑전에 들어 공부를 시작했다.
영주는 무자 화두를 들었다. ‘서장’을 보고 대혜의 가르침대로 따라했을 가능성이 높다. 대혜는 화두 참구에서 나타나는 경계를 알려주며 결코 물러서지 말라고 했다. 화두를 들고 있으면 이치에 맞지 않고, 문득 재미가 없고 마음이 답답해질 때가 오는데 그 때가 바로 목숨을 걸 때이니 이를 기억하라고 했다. 그런 경계가 바로 부처와 조사가 될 수 있다는 소식이 임박했음이니 결코 공부를 멈추지 말라 일렀다.
‘일상의 생활 가운데 차별 경계를 만나서 힘 덜림을 아는 때가 문득 힘을 얻는 곳이니, 힘을 얻는 곳이 힘이 지극히 덜리는 곳입니다. 만약 조금이라도 지탱하면, 결단코 이것은 잘못된 무리의 법이고 부처님의 법이 아닙니다. 다만 장구하고 원대한 마음을 판단해 가지고 구자무불성의 화두와 더불어 다가가십시오. 다가오고 다가감에 마음이 갈 곳이 없다가 홀연히 꿈속에서 깨어나는 것과 같으며, 연꽃이 피는 것과 같으며, 구름을 헤치고 태양을 보는 것과 같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때에 이르면 저절로 한 조각을 이룰 것입니다. (……) 또 고덕이 이르기를 “어리석은 사람은 경계를 없애고 마음은 없애지 않으며, 지혜로운 사람은 마음을 없애고 경계는 없애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전재강 역주 ‘서장’ ‘종직각에게 답함(答宗直閣)’)
‘서장’은 어림 850년 전에 깨쳤던 대혜가 청년 영주에게 선(禪)의 요체를 전하는 편지였다. 북송, 남송 교체기 피폐했던 시대의 대혜가 역시 일제강점기 궁핍한 시대의 조선 청년 영주에게 주는 가르침이었다.
영주는 대원사 탑전에서 불서를 보고 참선하는 방법을 익힌 대로 용맹정진했다. 24시간 내내 허리를 방바닥에 대고 눕는 일이 없었다. 누구의 가르침도 없었다. 하지만 도(道)에 들어간 옛 사람들이 남긴 인연들을 붙들고 있거나, 또 검은 산 귀신 굴 안에 들어 눈감고 앉아있는 것이 선(禪)수행이 아니라는 것쯤은 영주도 잘 알고 있었다. 영주의 공부하는 모습을 대처승들도, 신도들도 기이한 눈초리로 바라봤다.
점차 영주를 보는 눈이 달라졌다. 기이한 눈초리를 거두고 경건하게 바라봤다. 탑전 근처에서 함부로 떠들지 않았다. 영주는 북풍한설이 몰아쳐도, 재를 지내러온 속인들이 떠들어도, 설경이 눈부시게 펼쳐져 있어도, 대처승들이 서로 싸워도 동요하지 않았다. 크게 의심하며 정진했다. 마음이 답답하고, 앉아있음이 한심하게 느껴질 때가 진정 무언가 이뤄지기 직전이라는 것을 믿었다.
어느 날 보니 화두라는 의심덩어리가 앉으나 서나, 고요하거나 분주할 때나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걷거나 세수하거나 밥을 먹을 때에도 공부가 되었다. 마침내 유발한 채 속인으로 동정일여(動靜一如)의 경지에 들었다. 헤아려보니 작심하고 화두를 든 지 어림 42일 만이었다. 물론 당시에는 그런 경지가 동정일여인지는 정확히 알지 못했다.
성철은 훗날 대원사에서의 얘기를 할 때면 신이 나서 목청을 높였다. 자신이 생각해도 그 때 일이 대견했다. 일타 스님과 공양 중에 탑전 얘기가 나오자 입에 넣었던 밥숟가락을 확 빼면서 말했다.
“마음이 다른 데로 도망가지 않았어. 동정일여가 되니까 정말 참선 부지런히 하면 도인되겠다 싶데.”
동정일여의 경지는 목숨을 내놓고 공부해야 이룰 수 있었으니 참으로 신비롭고도 벅찼다. 그러면서도 두려웠다. 영주의 인생이 달라졌다. 그해 겨울은 특별했다.
김택근 법보신문 고문(언론인·시인)
출처: 법보신문
[김택근의 성철 스님 평전] 8. 머리 긴 속인이 해인사 선방에 들었다
『"주지 고경의 배려로 유발속인 영주는 선방에 들었다.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당시 선방은 퇴설당(堆雪堂)이었으니 바로 ‘눈 쌓이는 집’이었다. 이 당우명은 선종 제2조 혜가 스님의 구도와 관련된 고사에서 유래된 것이었다. 퇴설당 벽에는 혜가의 설중단비도(雪中斷臂圖)가 걸려 있었다. 그동안 수많은 선승이 ‘눈 쌓인 집’에 들어 번뇌를 베어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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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인이 대원사에서 무섭게 정진하고 있다.”
소문은 바람처럼 빠르게 산문을 빠져나갔다. 하지만 대원사의 대처승들은 불편했다. 영주의 치열한 공부는 자신들을 돌아보게 만들었다. 젊은이가 탑전을 점거하고 ‘참선 시위’를 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대원사 대처승들은 큰절 해인사에 공문(편지)을 보냈다. ‘젊은이가 대원사 탑전에 들어 공부하고 있는 바 수행정진의 자세와 기세가 범상치 않으니 해인사로 데려가 크게 지도함이 좋겠다’는 내용이었다.
며칠 후 해인사에서 스님이 찾아왔다. 총무 최범술(효당 스님, 1904~1979)이었다. 범술은 이미 항일운동에 참여해서 몇 차례 옥고를 치른 바 있었다. 훗날 해방공간에서는 불교 교단의 총무부장을 맡았다. 제헌의원에 뽑힌 정치가였으며, 여러 학교를 세운 교육자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 또한 왜색에 물든 대처승이었다. 커다란 저수지가 오염되었으니 그 안에서 누가 멱을 감아도 맑을 수가 없었다. 청년시절에는 서릿발 같은 서원을 했겠지만 현실에 부딪혀 조금씩 무뎌져 갔을 것이다.
범술은 영주를 해인사로 이끌고 싶었다. 병약해 보이지만 흰 얼굴 속 커다란 눈동자는 사람을 빨아들였다. 해인사에는 당대의 선지식 백용성 스님과 제자 하동산 스님, 송만공 스님, 불교계 석학 김법린 등이 있었다. 그들이 영주를 보고 싶어 한다는 것이었다. 범술은 영주에게 간곡하게 권했다.
“해인사는 절도 크고 불법이 고여 있으니 같이 가면 어떻겠는가. 큰스님들이 자네를 보고 싶어하네. 함께 불법을 공부해서 불교를 일으켰으면 좋겠네.”
하지만 영주는 이를 간단히 뿌리쳤다.
“여기 대원사도 산이 깊고 조용해서 공부하기 좋습니다. 일부러 해인사까지 갈 필요 있겠습니까.”
범술 또한 물러나지 않았다.
“이곳과 해인사는 많이 다르다네. 팔만대장경을 모시고 있는 법보 종찰이 아닌가. 아마 자네는 새로운 세상을 만나게 될 것이네.”
그날 밤 영주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 자꾸 해인사가 떠올랐다. 큰절에서는 어떻게 살림을 하고, 승려들은 어떻게 살아가는지 궁금했다. 자신이 경험한 선의 경지가 어느 정도인지도 알고 싶었다. 대원사의 풍경소리를 붙들고 여러 생각을 했다.
‘해인사로 가면 영원한 자유를 찾을 수 있을 것인가. 범술 스님이 얘기한 것처럼 해인사에 들면 특별한 불법을 만날 수 있을 것인가.’
대원사에서 하룻밤을 묵고 범술은 떠나갔다. 영주는 또 여러 날 고민했다. 사실 큰절에서 ‘실세스님’이 다녀갔기에 대원사 승려들의 시선이 더욱 따갑게 느껴졌다. 마침내 짐을 꾸려 탑전을 나왔다. 1935년 새해가 밝은 지 얼마 되지 않아서였다.
해인사 가는 길이 불가에 드는 길임을 당시에는 알지 못했다. 들을 지나 계곡에 이르자 느낌이 이상했다. 단풍이 물에 비쳐 흐르는 물조차 붉다는 홍류(紅流)동 계곡은 겨울에도 범상치 않았다. 기묘한 바위들이 불쑥불쑥 나타났고, 붉은 소나무들이 청년 영주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물소리가 최치원 선생의 귀를 먹게 했다는 계곡은 엄동이라 그 소리까지 얼어있었다. 그래도 침묵의 기세가 비범했다. 농산정, 낙화담, 분옥폭포, 무릉교 등을 지나 해인사 경내로 들어섰다. 그렇게 지리산을 나와 가야산에 들어갔다.
해인사는 신라 화엄십찰(華嚴十刹)의 하나였다. 절 이름은 ‘화엄경’에 나오는 해인삼매(海印三昧)라는 구절에서 비롯됐다. 해인삼매란 어리석음의 바람이 잦아들고 번뇌의 물결이 멈추면 참 지혜의 바다(海)에 흡사 도장을 찍듯이(印) 우주의 참된 모습이 그대로 비치는 경지를 말한다. 해인사는 순응 스님과 그 제자인 이정 스님이 신라 애장왕(802년) 때 지금의 대적광전 자리에 창건했다고 전해진다. 그 후 균여, 의천 같은 고승을 배출했다. 해인사는 일제 강점기에도 통도사, 범어사, 송광사와 함께 선승들에게 방을 내주는 귀한 사찰이었다.
해인사는 영주의 생각보다 크고 근엄했다. 스님들의 걸음걸이부터 달랐다. 무엇보다 장경판전이 아무 장식도 없이 소탈하게, 또 긴 세월 무탈하게 서 있음이 미더웠다. 장경판전이 대적광전 뒤에 있음은 해인사가 팔만대장경의 가르침을 머리로 받들고 있음이었다. 영주가 범술 스님을 찾았지만 보이지 않았다. 다른 곳으로 떠났다고 했다. 대뜸 주지스님을 찾아갔다.
“대원사에서 왔습니다.”
“오라, 바로 그 청년이구만.”
주지는 환한 표정으로 맞았다. 당시 주지는 이고경(李古鏡, 1882~1943) 스님이었다. 강경(講經)이 유려하고 몸가짐이 반듯했다. 성철은 훗날 당시의 고경을 “화엄학에 밝은 유명한 스님”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그래, 그렇게 열심히 공부를 했다면서 해인사에서는 어떤 공부를 해보려 하는가?”
“중은 싫지만 부처님을 좋아하게 됐습니다. 참선을 해서 그 분의 가르침을 제대로 알고 싶습니다.”
주지는 무례한 유발청년을 지긋이 쳐다보더니 이내 미소를 머금었다.
“일단 나와 한 밤 자면서 얘기해 봅시다.”
그렇게 주지 방에서 하룻밤을 묵게 되었다. 두 사람은 서로에게 호기심이 일었다. 영주는 큰 절의 산중 생활이 궁금했다. 고경은 새삼 유발청년이 대견했다. 불교계는 인재가 필요했다. 그러나 이제 막 불교 속으로 들어가는 청년에게 부처님 얘기만 할 수는 없었다. 현실을 알려줘야 했다.
“나라꼴도 그렇지만, 불교도 주인이 없다네. 이리저리 손을 타고 있으니 큰일이야. 부처님 법을 모시고 있는 여기 해인사도 그리 맑지만은 않다네.”
고경도 영주도 쉽게 잠을 이루지 못했다. 영주는 주지의 고뇌가 손에 잡힐 듯했다. 다음날 고경이 원주를 불러 영주를 선방에 들게 하라 일렀다. 그러자 원주는 순간 표정을 바꾸었다.
“속인을 선방에 들인 일은 없습니다. 하물며 선승과 함께 나란히 앉아 참선을 하게 한다니, 이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주지도 물러서지 않았다.
“이 청년은 다르네. 다 그만한 뜻이 있으니 따르게.”
원주는 주지와 영주를 번갈아 보더니 획 돌아섰다.
“알 수 없는 일이네. 나를 따라오시오.”
고경은 처음부터 영주의 그릇을 알아봤다. 해인사에는 고경을 따르는 승려들이 많았다. 그래서 오히려 말년이 험했다. 해인사 대중이 고경을 다시 주지에 선출했지만 총독부는 승인을 해주지 않았다. 종권은 친일파 대처승에게 넘어갔다. 친일승들은 고경이 눈에 가시였다. 강원에서 한국사를 가르치며 항일정신을 고취했다는 혐의로 밀고했다. 왜경은 고경과 임환경(林幻鏡 1887~1983) 스님, 그리고 젊은 승려들을 잡아갔다. 고경은 모진 고문을 당했다. 형사들은 한 번 묻고 열 번을 때렸다고 한다. 고경은 끝내 옥에서 입적했다. 그리고 죽어서도 친일승이 장악하고 있는 해인사에 들지 못했다. 1943년 새해 합천 남정강 강변에서 다비식이 있었다. 말이 ‘다비’였지 그저 송장 태우기였다. 후미진 겨울 강가에서 조선불교가 불타고 있음이었다. 이를 지켜보는 지인들은 가슴을 쳤다. 날카로운 강바람은 몸보다 마음을 후볐다. 시신을 태우며, 또 재를 쓸어가며 강바람도 소리쳤다. 흡사 울음 같았다.
주지 고경의 배려로 유발속인 영주는 선방에 들었다.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당시 선방은 퇴설당(堆雪堂)이었으니 바로 ‘눈 쌓이는 집’이었다. 이 당우명은 선종 제2조 혜가 스님의 구도와 관련된 고사에서 유래된 것이었다.
혜가의 속명은 신광(神光)이었다. 달마가 소림사에서 면벽좌선하고 있다는 소문을 듣고 몇 번이나 찾아가 가르침을 청했다. 그러나 달마는 쳐다보지도 않았다. 어느 날 신광은 눈 오는 밤 소림사 마당에 서 있었다. 새벽이 되자 눈이 무릎까지 쌓였다. 그러자 비로소 달마가 물었다.
“눈 속에 그토록 서 있으니 무엇을 구하고자 함이냐?”
“바라건대 감로의 문을 여시어 어리석은 중생을 구해주소서.”
“부처님 도는 오랫동안 수행해야 얻을 수 있는데 어찌 작은 지혜와 가벼운 마음으로 참다운 법을 바라는가. 헛수고일 뿐이다.”
달마의 말을 들은 신광은 홀연 칼을 뽑아 자신의 왼쪽 팔을 잘랐다. 눈 위에 선혈이 뚝뚝 떨어졌다. 달마가 말했다.
“부처님들은 법을 위하여 자신의 몸을 잊었다. 팔을 잘라 내놓으니 이제 도를 구할만 하다.”
달마는 신광에게 혜가라는 새 이름을 지어 주고 법을 전했다.
퇴설당 벽에는 혜가의 설중단비도(雪中斷臂圖)가 걸려 있었다. 그동안 수많은 선승이 ‘눈 쌓인 집’에 들어 번뇌를 베어냈을 것이다. 영주가 이를 바라봤다. 그림이 묻고 있었다.
“눈 오는 밤, 너는 팔을 자를 수 있겠는가.”
김택근 법보신문 고문(언론인·시인)
출처: 법보신문
[김택근의 성철 스님 평전] 9. “이제 자네가 세상에 머물 곳은 없다네”
『"영주는 날을 잡아 백련암으로 올라갔다. 훗날 자신이 그곳에 머물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지만 처음 본 백련암은 정겨웠다. 동산은 영주에게 여러 가지를 물었다. 영주의 답을 들으며 동산은 고개를 끄덕이고 지긋이 쳐다봤다. 이윽고 나직이, 하지만 단호하게 말했다. 중이 되시게. 감전된 듯 아무 말을 못하고 있는 영주에게 동산은 몇 마디를 보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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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인사 퇴설당에서도 화두를 들었다. 선방 대중들의 묵언이 호통보다 무겁고, 고함보다 예리했다. 죽비소리에 자신만의 마음을 펼쳤다. 그러면 ‘눈 쌓이는 집’ 퇴설당에 보이지 않는 눈이 내렸다. 영주는 비로소 선객들이 하나가 되어 만들어낸 고요 속으로 들어갔다.
좌선의 몸가짐이 의젓했다. 한번 앉으면 미동도 하지 않았다. 절집 식구들이 보기에는 절밥 얻어먹으며 유발한 채 면벽하고 있음이 꼴불견이었다. 그래도 영주는 여여부동했다. 그러자 대중들이 영주를 향한 삐딱한 시선을 점차 거둬들였다. 정진하는 모습을 기특하게 바라봤다. 방선(放禪) 시간에는 다가와 말을 걸기도 했다. 영주의 공부 소식에 오히려 산중이 유쾌해졌다.
김법린(金法麟, 1899~1964)은 특히 영주에게 관심을 보였다. 그는 훗날 문교부 장관과 동국대 총장을 지냈다. 그는 왜색에 물든 한국불교를 혁신하려는 뜨거운 가슴을 지니고 있었다. 이미 서울 탑골공원서 열린 3·1만세운동에 참여했고, 부산 범어사로 내려가 만세운동을 주도하기도 했다. 1929년 봄에는 조선어학회가 주관하는 조선어편찬회의 준비위원을 맡았다. 특히 불교계 항일비밀 결사체인 만당(卍黨)을 결성하기도 했다.
만당은 1930년 5월경 결성됐다. 불교계 청년운동의 선봉에 섰던 김법린은 한용운의 뜻을 받들어 이용조, 김상호, 조학유 등과 함께 부처님 앞에 타락한 조선불교의 개혁을 맹세했다. 만당의 선언문은 지금 들어봐도 비장하다.
“보라, 2천년 법성(法城)이 허물어져 가는 꼴을! 들으라, 2천만의 동포가 헐떡이는 소리를! 우리는 참을 수 없는 의분에서 감연히 일어났다. 이 법성을 지키기 위하여, 이 민족을 구하기 위하여! 향자(向者)는 동지요, 배자(背者)는 마권(魔眷)이다. 단결과 박멸이 있을 뿐이다. 우리는 안으로 교정을 확립하고 밖으로 대중불교를 건설하기 위하여 신명을 다하고 과감히 전진할 것을 선언한다.”
만당은 비밀을 엄수하고 당에 절대 복종하는 사람만 선발했고, 당원은 전국에 80여 명이 있었다. 김법린의 권유로 최범술도 만당에 들어왔다. 김법린, 최범술 등이 포진하고 있던 해인사는 항일 독립운동과 불교개혁의 산실이었다. 해인사 젊은 승려들은 범어사와 함께 3·1만세운동을 전국 사찰 중에서 가장 큰 규모로 전개했었다. 만당 구성원들은 불교계 개혁을 부르짖었고, 불교개혁은 독립운동과 직결되어 있었다. 나라가 독립되지 않고는 불교계 개혁이란 있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청년들이 품고 있던 가슴 속의 격정은 폭풍이 되지 못하고 소멸했다. 만당의 실체가 발각되어 결국 23명이 붙잡히고 그중 2명은 옥사했다. 김법린도 붙잡혀 옥고를 치러야 했다. 그렇다고 그들의 불사(佛事)가 그냥 사라지겠는가. 그 인연은 훗날 해방공간에서 새바람으로 불교계를 깨웠다.
영주가 해인사에서 만난 김법린은 저명한 강사였다. 1935년 다솔사와 해인사의 강원이 합병되어 김법린은 해인사 강원의 원장으로 있었다. 당시 대중들은 김법린, 최범술 등이 만당의 핵심요원이란 것을 알지 못했다.
김법린은 영주에게 이것저것을 물었다.
“불교를 어디서 배웠는가.”
“혼자서 공부했습니다.”
김법린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독학으로 터득했다 보기에는 식견이 비범했다. 더욱 놀란 것은 영주의 책읽기였다. 불교관련 서적을 내주면 단숨에 독파했고, 그러면서도 핵심을 정확히 꿰뚫었다. 교학에 밝은 김법린은 그런 영주가 탐이 났다.
“우리 함께 교(敎)를 배워보면 어떻겠나.”
책 욕심이 많은 영주에게 불서를 내밀며 강원에 들어 학승이 될 것을 권유했다. 또 일본 유학을 함께 다녀오자는 제의도 했다. 하지만 영주는 김법린의 은근하면서도 집요한 눈빛을 뿌리쳤다.
“저는 마음을 깨치러 왔습니다.”
영주는 참선 수행만이 영원히 사는 길이라 확신하고 있었다. 이미 논리가 또 다른 논리를 낳는 논리의 허망함을 간파하고 있었다. 비상(砒霜)을 품고 진리를 찾아 헤매인 젊은 날의 방황을 김법린은 물론 알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김법린은 이미 영주가 상당한 경지에 이르렀음은 한눈에 알아봤을 것이다. 영주는 이미 선불교란 교외별전(敎外別傳)임을, 진리는 문자가 아닌 마음속에 있음을 믿고 있었다.
대원사 승려들이 탑전에서 정진하는 속인을 해인사에 보고한 것이나, 또 큰절에서 살림을 도맡고 있는 최범술이 직접 찾아온 것이나, 또 주지 고경이 속인을 퇴설당 선방에 들인 것은 모두 ‘사건’이었다. 이로 미루어 보며 당시 영주는 영원한 삶을 찾아가는 길을 알았고, 이미 그 길로 제법 깊이 들어섰음을 알 수 있다. 그랬기에 훗날 대원사 탑전에서 ‘동정일여’에 들었다고 얘기했을 것이다. 다만 성철은 당시 일들을 곧잘 ‘지나가는 말’로 반추했다. 그 이후 더 혹독하고도 특별한 수행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퇴설당에 해인사의 노장들이 찾아왔다. 그들은 영주의 신상에 대해서 묻고, 또 이것저것을 떠보았다. 영주 또한 스님들에게 바람직한 참선 수행법을 비롯하여 불교 전반에 관한 의심들을 묻고 또 물었다. 그러나 돌아온 답은 시원치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동산 스님(1890~1965)이 큰절로 내려왔다. 동산은 설악산 봉정암에서 효봉, 청담 등과 안거를 지낸 후 백련암에 머물고 있었다. 동산의 설법이 당대 제일이라는 칭송이 자자했다. 음성 또한 티가 없고 고왔다. 법문을 하면 장소가 어디든 신도들로 넘쳐났다. ‘아무리 가난한 절도 동산이 법회를 열면 3년 먹을 양식이 들어온다’고 할 정도였다. 주로 ‘증도가’와 ‘신심명’을 설했다.
영주는 동산 스님을 보는 순간 매료되었다. 아무리 봐도 도무지 싫지가 않았다. 그리고 오래 전에 어디선가 본 것 같았다. 인연이었다.
‘저 스님이라면 내 의심을 풀어줄 수 있겠지.’
영주는 퇴설당을 찾은 동산에게 거침없이 물었다. 다른 선객들이 듣기에도 당돌했다.
“제가 혼자 공부하여 무자 화두를 들었는데 바른 길로 들어섰는지요? 스님이 보시기에 완전한 깨달음은 어떤 경지인지요?”
동산은 이상한 놈의 발칙한 질문이 싫지 않았다. 대답 대신 빙긋이 웃으며 한마디 했다.
“백련암으로 놀러오게”
영주는 날을 잡아 백련암으로 올라갔다. 훗날 자신이 그곳에 머물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지만 처음 본 백련암은 정겨웠다. 동산은 영주에게 여러 가지를 물었다. 영주의 답을 들으며 동산은 고개를 끄덕이고 지긋이 쳐다봤다. 이윽고 나직이, 하지만 단호하게 말했다.
“중이 되시게.”
감전된 듯 아무 말을 못하고 있는 영주에게 동산은 몇 마디를 보탰다.
“속인으로는 선방에 오래 머물 수 없을 것이고, 또 나간들 어디를 가겠는가. 이제 자네가 세상에 머물 곳은 없다네. 중이 되어 제대로 참선해서 지금 들고 있는 의심을 끊어보시게.”
사실 영주는 해인사에서도 절집 살림에 관한 부정적 인식을 씻어내지 못하고 있었다. 대원사와는 다르긴 하지만 해인사도 대처승들이 절 살림을 맡아 꾸려가고 있었다. 영주는 온통 깨달음에 관심이 있었지, 중이 될 마음은 없었다. 그래서 대원사에서도, 해인사에서도 속인 차림으로 당당했던 것이다. 그런데 큰스님이 출가를 명령하고 있었다. 동산은 불명까지 지어서 내밀었다.
‘성철(性徹)’
그렇다면 동산이 불가에서는 다소 어울리지 않는, 오히려 속가에서 흔한 ‘성철’을 내림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물론 모든 불명에는 연(緣)이 있지만, 전후를 살펴볼 때 실로 각별한 의미가 있어 보인다. 어림해서 지은 것이 아니라 동산의 치밀한 계산에서 나왔을 것이다. 그것은 ‘자성(自性)을 확철(確徹)하게 깨쳐 성불하라’는 뜻이었다. 동산은 영주가 이미 한 경계에 이르렀음을 간파하고 있었음이 분명해 보인다. 그렇기에 성철이란 이름에는 부단히 정진하여 대철대오(大徹大悟)하라는 동산의 바람이 들어있음일 것이다.
하지만 영주는 중이 되겠다는 대답을 안 하고 물러나왔다. 머릿속에서는 성철이란 이름이 계속 맴돌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동산이 백련암에서 큰절로 내려왔다. 주장자를 비껴들고 동안거 법문을 했다.
“여기 길이 있다.
아무도 그 비결을 말해주지 않는다.
그대 스스로 그 문을 열고 들어가기 전까지는.
그러나 그 길에는 문이 없다.
그리고 마침내 길 자체도 없다.”
영주의 마음이 움직였다. 그것은 영주에게 주는 법문이었다. 문자가 없는 경은 결국 문 없는 문이었다. 조주의 무자화두가 문득 환해지는 듯했다.
영주는 출가를 결심했다. ‘성철’로 살아가기로 했다.
김택근 법보신문 고문(언론인·시인)
출처: 법보신문
[김택근의 성철 스님 평전] 10. “중이 못되면 급히 죽을 사주랍니다”
『"영주는 곧장 백련암을 찾아갔다. 동산 스님을 뵙고 절을 올렸다. 스님은 속가를 다녀온 영주를 그윽한 눈길로 바라봤다. 그래, 결심하였는가? 예, 스님. 저를 제자로 받아주십시오. 아하 올해는 백련암에 봄이 일찍 오겠구먼. 그렇게 동산 스님의 제자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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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주는 봄날 묵곡리 집으로 돌아왔다. 아니 돌아옴이 아니었다. 더 멀리 떠나기 위해 잠시 들른 것이었다. 속가에는 숱한 인연이 고여 있었다. 그 인연 속으로 들어가 인연을 끊어야 했다. 그러나 그것이 어디 쉬운 일이던가. 식구들은 이미 영주가 지리산에서 가야산으로 옮긴 후 선방에 들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집안 안팎의 분위기는 돌을 얹은 듯 무겁게 가라앉았고, 아버지 이상언의 심기는 하루도 편치 않았다. 사실 영주의 ‘산속 공부’는 묵곡리 전체의 관심사였다.
영주는 해질 무렵 대문을 밀쳤다. 어머니는 버선발로 뛰어나왔다. 안방에 들어가 아버지에게 큰 절을 올렸다. 그런 아들을 아버지는 물끄러미 바라봤다. 어머니와 며느리는 함께 밥상을 차리며 안방 쪽으로 귀를 세웠다. 전에도 그랬듯이 부자는 말이 없었다. 할 말이 쌓여 산을 이뤘지만 아버지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영주가 밥상을 물리자 어머니가 들어와 호롱불을 밝혔다. 아버지는 몇 번이나 마른기침을 했다. 이윽고 입을 열었다.
“얘기는 드문드문 들었다. 네가 한다는 공부가 정녕 석씨(釋氏)를 따르겠다는 것이냐? 집을 떠나겠다는 것이냐?”
“예. 산에 들겠습니다.”
“사내는 모름지기 공맹을 익혀 사람의 길을 가야지, 어찌 산속에 들어 해괴한 귀신들을 따르겠다는 거냐. 대대로 유림인 우리 이씨 집안에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단 말이냐?”
영주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다시 한숨과 함께 혼잣말을 했다.
“장남이 삼강오륜을 저버리고 허무한 적멸지도(寂滅之道)에 들겠다니 죽어서 조상을 어찌 대할 것인가. 혈육의 인연을 끊고 불효불충의 길로 들어선다니 이를 어찌 할 것인가.”
“다시 묻겠으니, 정말 석씨에 의지해서 빌어먹을 작정이냐?”
영주는 그래도 말이 없었다. 침묵만이 호롱불에 무심히 타들어갔다. 이윽고 영주가 해인사에서부터 준비해 온 거짓말을 풀어놓았다.
“아버님, 저는 중이 못 되면 급히 죽을 사주랍니다.”
아버지 이상언의 안색이 바뀌었다.
“대체 어느 놈이 사람의 운명에 대해 포악질을 해대는 것이냐?”
“저를 본 스님들이 한 입처럼 말했습니다.”
어머니는 신음을 뱉었고, 아버지는 끝내 돌아 앉아 버렸다. 성철은 훗날 당시를 떠올리며 이렇게 회고했다.
“거짓말을 했지요. 나를 그냥 두면 곧 죽는다는데 어떻게 하겠어요. 부모들이 그런 데 제일 약하거든.”
그날 밤 영주는 아내 덕명과 잠자리에 들었다. 비단금침에 누우니 지난날의 향과 촉(觸)이 살아났다. 인연을 찾아가 인연을 끊겠다는 것은 어림없는 일이었다. 다시 인연만을 만들 뿐이었다. 속히 떠나가야 했다. 다음 날 영주는 부모에게 큰절을 올렸다.
“앞으로 오랫동안 뵙지 못할 것 같습니다. 부디 건강하십시오.”
길 떠나는 영주를 아버지는 내다보지 않았다. 어머니와 아내 덕명은 그 뒷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봤다. 영주는 이후 한 번도 속가에 들르지 않았다. 혈육들이 세상을 떴을 때도 묵곡리에는 얼씬도 하지 않았다. 아들의, 지아비의 성품을 잘 알고 있었던 두 여인 또한 그것이 마지막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덕명은 영주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네 살배기 딸을 끌어안았다. 어머니는 문득 천왕봉 쪽을 올려다봤다. 지리산은 봉우리마다 잔설을 이고 있었다.
아버지는 홀로 가슴을 쳤다. 자식이래서가 아니라 아들 영주는 누가 봐도 영민했다. ‘천자문’을 따라 읽는 것이 기특하여 무릎에 앉히고 가르쳤더니 금세 외워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행여 몰라 주제를 주어보면 나름의 글을 지어 공손하게 받쳤다. 그 때의 기쁨을 어디에 비유하겠는가. 또한 하는 짓이 반듯했고, 마음은 드러나지 않게 넉넉했다. 당연히 선비가 되어 나랏일을 봐야 했다. 나라를 빼앗긴 무도한 세상이어서 그 뜻을 펴지 못한다면 학자로서 유풍(儒風)을 일으켜야 했다. 알고 있어도 드러내지 않는 장남이 얼마나 듬직했던가.
어쩌면 자신보다는 자식을 믿고 살아온 세월이었다. 그러나 창졸간(倉卒間)에 늙은 아버지를 남겨 두고 아들은 떠나가 버렸다. 아들을 불가에 뺏겼으니 이제 유림들을 무슨 낯으로 보며 서원이나 향교에 나가 어찌 배례할 수 있을 것인가. 조선시대 중은 노비, 무당, 상여꾼, 기생, 백정, 광대와 더불어 천민이었다. 자식이 돌팔매를 맞으며 동냥질 할 것을 생각하니 기가 막혔다.
“내 일찍이 사람의 도리를 가르쳤거늘, 집 떠날 자식인 줄은 꿈에도 몰랐다.”
아버지의 분노는 아들을 잡아간 석가모니를 향해 분출했다. 식솔에게 경호강에 그물을 치게 하고 물고기를 잡아오도록 했다. 펄떡이는 물고기를 집어넣고 끓이도록 했다. ‘산목숨을 죽이지 말라’는 첫째 계율을 조롱하며 살생으로 삿대질한 셈이었다. 나름 석가에 대한 복수였다. 저녁마다 매운탕을 들며 눈을 부릅떴다.
“석가야, 그래 나를 지옥으로 보내 보거라.”
그러나 어머니 강 씨는 아버지와 달랐다. 강 씨는 남은 물고기를 물통에 담아 경호강에 놓아주었다. 어머니는 짚이는 데가 있었다. 자신이 시집 올 때 세운 소원을 떠올렸던 것이다. 손녀 딸 불필은 할머니 강 씨의 소원을 이렇게 기억하고 있다.
“할머니는 묵곡리로 시집 오던 날 가마에서 내린 뒤 ‘이 세상에서 제일가는 큰 인물을 낳겠다’는 원을 세웠다고 한다. 큰 스님을 가진 할머니는 항상 바른 마음과 단정한 태도로 태교에 임해서 뒤틀어진 오이나 무를 먹지 않았고, 울퉁불퉁 못생긴 과일도 먹지 않았으며, 평상이나 마루에 앉을 때에도 모퉁이는 피했다. 행여나 나쁜 것을 보거나 듣게 될까 열 달 동안 대부분 밖에 나가지 않고 집 안에서 지냈는데, 아침저녁으로 온갖 정성을 기울이며 세상에서 제일가는 아들을 점지해 달라고 천지신명과 조상님께 기도드렸다.”
영주는 다시 가야산에 들었다. 홍류동에서 해인사로 들어가는 길을 걸으며 흡사 다른 세상으로 들어가는 느낌을 받았다. 그것은 영원 속으로 들어가고 있음이었다. 지난 번 지리산 대원사에서 건너올 때는 미처 보지 못했던 것들이 눈에 들어왔다. 살아있는 것들은 물론이요, 바위와 흐르는 물도 말을 걸어왔다.
영주는 곧장 백련암을 찾아갔다. 동산 스님을 뵙고 절을 올렸다. 스님은 속가를 다녀온 영주를 그윽한 눈길로 바라봤다.
“그래, 결심하였는가?”
“예, 스님. 저를 제자로 받아주십시오.”
“아하 올해는 백련암에 봄이 일찍 오겠구먼.”
그렇게 동산 스님의 제자가 되었다. 큰절 퇴설당에서 수계득도식이 있었다. 이영주라는 속명을 버리는 날이었다. 계(戒)는 부처 가문의 구성원이라면 누구나 받들어야 하는, 육화(肉化)시켜 지녀야하는[受持] 의무였다. 그것은 생사의 기나긴 밤을 밝히는 등불이요, 고통의 바다를 건너는 배였다. 대중들 앞에서 성철이 계를 받았다. 지난날은 부처를 좋아하고 구도의 여정을 동경했지만, 이제 부처를 섬기고 그 삶과 가르침을 따라야 했다.
속세의 인연들이 들어붙은 머리카락이 잘려나갔다. 영주의 무명초가 잘려나가자 못생긴 성철의 머리통이 드러났다. 성철은 거울에 비친 울퉁불퉁한 머리통을 봤다. 이제 그 머리통을 감싸줄 그 무엇도 있을 수 없었다. 그 무엇도 감춰서는 안 되었다. 성철이란 선승이 태어났다. 1936년 3월3일, 세상 나이로 25세였다. 성철은 출가시를 지었다.
하늘에 넘치는 큰 일들은
붉은 화롯불에 한 점의 눈송이요
바다를 덮는 큰 기틀이라도
밝은 햇볕에 한 방울 이슬일세.
그 누가 잠깐의 꿈속 세상에
꿈을 꾸며 살다가 죽어가랴
만고의 진리를 향해 모든 것 다 버리고
초연히 나 홀로 걸어가노라.
미천대업홍로설 彌天大業紅爐雪
과해웅기혁일로 跨海雄基赫日露
수인감사편시몽 誰人甘死片時夢
초연독보만고진 超然獨步萬古眞
불교사에 이런 출가시를 남긴 승려가 있었던가. ‘꿈에서 깨어 만고의 진리를 향해 홀로 걸어가겠다’는 결기가 만지면 베일 듯 선명하다. 탈속(脫俗)의 비장함이 스며있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인간적인 따스함이 묻어나온다. 출가시는 요즘도 집 떠나는 이들에게 영감을 주고 있다. 성철은 동산 스님의 둘째 상좌였다. 하지만 나중에 맏상좌(성안 스님, 속명 유성갑)가 제헌의원에 당선되어 환속하는 바람에 첫째 상좌가 됐다. 이로써 용성-동산-성철로 이어지는 한국 불교계의 선맥이 출현했다.
김택근 법보신문 고문(언론인·시인)
출처: 법보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