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원재 (追遠齋)
- 北峰公 諱 敏善 齋所
구미 광평동









조선 중기의 문신 북봉(北峰) 이민선(李敏善 : 1548년(명종 3) ~ ?)에게 제향하는 재사(齋舍)로, 1901년 건립되었다.
이민선의 후손들이 대대로 살아온 벽진이씨 집성촌인 경상북도 구미시 광평동 다송마을에 있다.
후손 이당화(李堂和)가 지은 상량문과 이재기(李再基), 이승오(李承午)가 지은 이건기(移建記)가 전해져 내려온다.
이민선(李敏善)은
조선 선조(재위 1567∼1608) 때 진사시에 합격하여 비안현감·양천현감을 지낸 후 후학양성에 전념하였다고 전해진다.
후에 병조참판에 증직되었다.
서기 1548년 10월 명종 3년에 탄생해 1626년 5월9일 인조 4년에 하세下世한 북봉공은 양천현령과 비안현감, 강음현령을 지내면서 세상에 충과 효를 실천했다.
북봉공은 선조때 벼슬이 통정대부 양천현령을 지낼 정도로 고고했으나, 전원을 즐기는 품성에다 벼슬에 뜻이 없고, 광해군이 형 임해군, 동생 영천대군, 외조 영흥부원군을 죽이고 모후인 인목대비를 선주유폐하는 패륜등으로 혼란한 정국에 식상한 나머지 기관벼슬을 버리고 1616년 71세의 노쇠한 몸으로 세아들과 함께 구미시 봉곡동으로 낙향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벽진이씨 북봉공 종중이 구미에 뿌리를 내리는 계기가 되었다.
북봉공이 비산강에서 뱃놀이를 하며 읊펐다는 자작시
지나온 걸음걸음 의연하건만
벌써 봄은 가고 가을이 왔네
강물을 유유히 흘러만 가고
학산은 변합없이 날 맞이하여
옛처럼 노는 날을 반기는구나
이날에 소선이는 적벽강 놀아나고
돌머리에 낚시하는 이백리어라
세월따라 인걸도 가고 없건만
반강의 풍월은 변함이 없네
북봉산 정자

현령(縣令) 이공(李公)의 묘지(墓誌)
공은 휘가 민선(敏善)이고 자가 계진(季進)이니, 벽진인(碧珍人)이다. 먼 선조에 휘 총언(悤言)이 신라에 벼슬하여 벽진장군(碧珍將軍)이 되었으며, 우리 조선조에 들어와 휘 약동(約東)이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가 되고 평정공(平靖公)이라는 시호를 받았으니, 바로 공의 고조(高祖)이다. 증조(曾祖)는 통덕랑(通德郞) 행 형조 좌랑(行刑曹佐郞)인 소원(紹元)이고, 조고는 증(贈) 통정대부(通政大夫) 통례원 좌통례(通禮院左通禮)로 무공랑(務功郞) 전옥서 참봉(典獄署參奉)을 지낸 유번(有蕃)이며, 선고(先考)는 증 통정대부 승정원좌승지 겸 경연참찬관으로 통훈대부(通訓大夫) 덕천 군수(德川郡守)를 지낸 석명(碩明)이다. 선비(先妣)는 숙부인(淑夫人)에 추증된 진주 하씨(晉州河氏)이니, 통덕랑 건원릉 참봉(健元陵參奉) 계운(繼雲)의 따님이며 문효공(文孝公) 휘 연(演)의 후손이다.
공은 가정(嘉靖) 무신년(1548,명종3) 10월 무신일에 출생하였다. 임오년(1582,선조15)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여 일찍이 성균관에 유학(遊學)하니, 유림(儒林)들이 모두 추존하였다.
임진왜란이 평정된 뒤에 대가(大駕)가 서울로 돌아오자, 공은 첫번째로 성균관에 들어가 대성전(大成殿)이 불탄 것을 안타깝게 여기고는 상소를 올려 중건(重建)할 뜻을 청하니, 성상(聖上)이 이를 따랐다. 그리하여 다음 해에 문묘(文廟)가 이루어지니, 이것은 공의 힘이었다. 관학(館學)에서는 인하여 공을 천거해서 갑오년(1594,선조27)에 선공감 감역(繕工監監役)에 제수되고 을미년(1595,선조28)에 등급을 뛰어 사복시 주부(司僕寺主簿)에 제수되었다.
병신년(1596,선조29)에 나가 비안현(比安縣)을 맡았다가 임기가 차서 돌아왔으며, 임인년(1602,선조35) 강음 현감(江陰縣監)에 제수되었다가 2년 만에 체직되었다. 무신년(1608,선조41) 선조대왕국장도감 낭청(宣祖大王國葬都監郞廳)으로 특별히 서용(敍用)하는 명령을 받들었으며, 계축년(1613,광해군5) 의영고 주부(義盈庫主簿)가 되고 동년 여름 나가서 양천 현령(陽川縣令)이 되었다가 2년 만에 해임되었으며, 병진년(1616,광해군8) 가을 가솔을 이끌고 선산(善山) 땅으로 옮겨 우거(寓居)하였다.
공은 갑자년(1624,인조2) 4월 병에 걸려 병인년(1626,인조4) 5월 경술일 정침(正寢)에서 별세하니, 향년이 79세였다. 동년 9월 4일 금오산(金烏山) 아래 유좌 묘향(酉坐卯向)의 언덕에 장례하였다.
공은 먼저는 선비인 노사성(盧思聖)의 딸에게 장가들어 1남 2녀를 낳고 다시 참봉 김봉(金崶)의 딸에게 장가들어 2남 3녀를 낳았다. 장남 상질(尙質)은 음직(蔭職)을 이어받아 감목관(監牧官)이 되고 판결사(判決事)에 추증된 전결(全潔)의 딸에게 장가들어 2남 1녀를 낳았는바, 장남은 원(垣)이고 차남은 용(墉)이다. 장녀는 선비 박정실(朴鼎實)에게 출가하여 1남 수홍(守弘)을 낳았는데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차녀는 충의위(忠義衛) 유태화(柳泰華)에게 출가하여 3남 3녀를 낳았는데 장남은 숙(埱)이고 두 아들은 아직 어리다. 차녀는 참봉 이흠신(李欽臣)에게 출가하여 2남 2녀를 낳았고 차녀는 생원 최기맥(崔基銆)에게 출가하였으며 차녀는 생원 이순암(李純馣)에게 출가하여 3남 1녀를 낳았다. 차남 상일(尙逸)은 갑자년(1624,인조2)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으며 먼저는 첨정(僉正) 신달(愼達)의 딸에게 장가들고 다시 충의위(忠義衛) 이의(李檥)의 딸에게 장가들었으며, 차남 상달(尙達)은 군수 조윤희(曺胤禧)의 딸에게 장가들어 1녀를 낳으니, 당시 내외의 자손이 50여 명이었다.
공은 성품이 자상(慈祥)하고 지기(志氣)가 온화하여 남의 잘못을 말하지 않았으며, 또 술 마시기를 좋아하지 않았다. 공의 효도하고 우애한 행실과 돈후하고 화목한 기풍을 사람들이 많이 감복하였으며, 관청에서 근무하고 집안에 거처할 때에 오직 청렴과 근신함을 힘써 세 고을을 차례로 맡았으나 집안에한 물건도 없으니, 사람들은 평정공(平靖公 이약동(李約東)의 시호)의 유풍이 있다하였다.
- 여헌선생문집 제12권 - 비명(碑銘) 묘갈(墓碣) 묘지(墓誌)
尤菴 송시열(宋時烈)(1607 : 宣祖40 ~ 1689 : 肅宗15)의 文集이다
송자대전(宋子大全) > 宋子大全卷一百六十四 > 碑
陽川縣令贈兵曹參判李公神道碑銘 幷序
余少也。因外舅都事李公。則聞陽川縣令李公行義。外舅嘗曰。余早失怙恃。育於母家。季舅陽川公憐而撫愛特甚。旣養而又敎之。余之長而上舍。皆季舅之賜也。余已知陽川公當於古人中求也。旣而與公胤子監司公遊。見其居喪有禮。在官淸愼。又知公家法非今世所有也。公以天啓六年丙寅五月九日歿。葬于善山治之南面金烏山下酉坐卯向之原。後三十八年。以監司公貴。朝廷贈公兵曹參判。配盧氏,金氏。俱贈貞夫人。先是監司公乞文於旅軒張先生誌公之墓。而愼齋金先生又記其表陰矣。今又以公贈旣隮亞卿。準格當有豐鐫于神道。俾余書其事。謹按故高麗上將軍怱言。太祖朝有大功。啓封於星州。其後遂爲星州人。至平靖公諱約東。以通才淸節。著名本朝。官至知中樞府事。是公高祖。是生諱紹元。登文科。卒官刑曹佐郞。是生承旨諱有蕃。是生郡守諱碩明。娶晉州河繼雲女。公其第三子。諱敏善。字季進。少以文藝爲業。年三十五。捷壬午司馬。文廟遭燼于寇亂。國家未遑重建。寇退。公首先入泮。倡多士疏請之。遂蒙允許。士論多之。薦補繕工監役。陞爲司僕寺主簿。遷義盈庫。出監比安。復令陽川縣。事皆修擧。旣而年齡漸高。益厭紛囂。自京師絜家南下。居于嶺表之善山。日與鄕人杖屨阡陌間。居與旅軒先生廬隔江相望。每佳辰令節。一棹相從。悠然有洛社之致。蓋公屢典縣邑。而家益寒儉。年旣耆艾。而精力堅悍。族姓險易異心。而戚疏皆親愛之。家有賢子。隆以追恩。則人又不侈其榮。而樂道其德曰。是宜其有是也。公可謂賢矣。余少時則可爲淺之爲知也。廬夫人。其考諱思聖。生男尙質。監牧官。女壻士人朴鼎實,柳泰華。金夫人考諱崶。生尙逸。卽監司公。尙達縣令。女壻參奉李欽臣,司藝崔基銆,持平李純馣。尙質男垣,墉。女爲呂漷妻。監司三男。墀縣監。坡郡守。埰都事。二女適郭之翰,金天燮。尙達男㙫縣令。埱,墇。女適吳相圭。朴鼎實男守弘府尹。柳泰華男墣,堉,埴。埴直長。女三人。李欽臣男命耆,命耇。女適李燁。李純馣男云泰,云康。女適參奉申翰宣。垣男志茂,志萬,志苾,志英。女二人。墉男志興。呂有三男。亨徵,明徵,裕徵。墀男志長,志望,志容,志寬。坡男志奭,志尹。埰男志安,志完,志憲。郭有二男。喜遠,喜慶。朴府尹男震煥。而正郞重輝,司諫增輝其出也。內外曾玄孫百九十餘人。外舅德泗其名也。銘曰。
星李麗初。肇自將軍。厥緖遙遙。平靖紹聞。四世而公。早攻斯文。爰升太學。値寇之焚。公倡多士。克上疏言。於樂泮水。復采其芹。入官試吏。皆著仁恩。旣倦于遊。厭其世紛。乃退而休。洛江之濆。杖屨逍遙。課我耔耘。屋宇窈靚。長我子孫。晩歲淸福。集我蓬門。七十而九。隨化歸根。有子立揚。屢典王藩。略苞山河。玉節朱幡。聖上褒嘉。聿追其原。貤以亞卿。號名斯尊。告慶于廟。篆事于墳。烏山峨峨。其水沄沄。惟此一丘。庶幾永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