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진(碧珍)은 경상북도 성주군의 통일신라때 행정구역명이다. 신라때 본피현이라 하다가 757년에 신안현으로 개칭하였고, 통일신라때 벽진군으로 개칭하였다. 그후 여러 차례의 변천을 거쳐 1895년 성주군 벽진면으로 남아있다. 벽진이씨(碧珍李氏)의 시조 이총언은 신라말에 벽진군 태수를 지내고 왕건을 도와 고려 창업에 훈공을 세워 삼중대광으로 벽진장군에 올랐다. 그리하여 후손들은 이총언을 시조로 받들고 본관을 벽진으로 삼게 되었다. 벽진장군 총언의 아들 영(永)이 대제학과 지경산부사를 역임했고, 그의 아들 방회(芳淮)는 추밀원사를 역임하여 가세를 일으켰다. 가문의 대표적인 인맥으로는 시조 총언의 10세손으로 공부사를 지낸 옹(雍)의 맏아들 견간(堅幹)이 고려 3대에 걸쳐 주요 관직을 역임하였고 <산꽃의 말(山花之語)>이란 시로 이름을 떨쳐 <산화선생(山花先生)>이라 불리웠다. 한편 병조 판서 심지(審之)의 아들 맹전(孟專)은 승문원 정자와 사간원 우정언을 거쳐 거창 현감으로 나가 선정을 베풀어 청백리로 이름이 높았으며, 수양대군이 왕위를 찬탈하자 이를 개탄하여 벼슬을 버리고 고향인 선산 강정리로 돌아가 은거한 후 청맹(靑盲)으로 행세 하면서 대궐을 향해 앉지도 않았으며 손님을 거절하교 두문불출하기를 30년이나 계속했다. 맹전의 아우 계전(季專)은 성종때 경기 관찰사와 병조 판서를 역임한 후 기로소에 들어갔으며, 참판 신지(愼之)의 손자 승언(承彦)은 성종때 한성 참군을 지냈다. 현령 덕손(德孫)의 아들 약동(約東)은 사헌부 감찰과 지평, 성균관 직강 등을 지내고 제주 목사로 나가 선정을 베풀었다. 그가 제주를 떠나오는 뱃속에서 뱃사람들이 금으로 만든 갑옷을 그에게 바쳤다. 섬사람들이 성금을 모아 만든 것으로 배를 타기 전에는 받지 않을 것 같아 뱃사람들에게 맡겨 전해주도록 한 것이었다. 약동은 그 금갑옷을 받아 바다에 던져 버렸는데, 이 금갑옷이 던져진 바다 여울목을 투갑연(投甲淵)이라 하며 지금도 그곳 섬사람들에게 전해지고 있다. . 호조참판 엄의 아들 후경(厚慶)은 학행이 뛰어나 영남에서 이름난 유학자로 추앙을 받았으며, 희선(喜善)의 아들 상길(尙吉)은 절행으로 유명했다. 상길은 광주목사로 나가 선정을 베풀어 명성을 떨쳤으며, 회양부사와 안주목사를 지냈고 후에 공조판서에 이르러 기로소에 들어갔다.
그밖의 인물로는 구한말에 척화양이지론(斥和攘夷之論)의 국수적 이론으로 가장 의로운 인맥을 형성한 화서 항로(恒老)가 유명했다. 3세에 [천자문(千字文)], 6세에 [십구사략(十九史略)], 12세에 [상서(尙書)]를 읽었다는 거학 항로는 1809년 한성시에 합격했으나 벼슬에 뜻을 두지않고 학문 연구에만 진력했다 화서는 전라 도사와 지평, 장령 등을 역임했고 공조참판에 승진, 경연관이 되었으나, 당시의 실세 대원군의 실정을 반대하여 노여움을 샀다. 그후 다섯 차례나 내려진 벼슬을 사양하는 사직상소에서 시폐의 시정을 강력하게 촉구했고, 현실적이고 실천적인 학자로서 조선 말기 성리학의 결론을 맺었다.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오적신(五賊臣)>의 처형을 강력하게 상소했던 우면(愚冕)과, 대구 고등검사장으로 검찰행정의 기초 확립에 이바지했던 우익(愚益), 대구대학장을 지낸 우창(愚昶), 자모의 병환을 단지주혈(斷指注血)로 간병했던 종기(宗基) 등과 더불어 의절과 학맥의 전통 가문인 벽진이씨를 더욱 빛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벽진이씨(碧珍李氏)는 남한에 총 19,807가구, 80,662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