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는 말
1. 서울에서 학업을 마치고 고향에 돌아와 차농사를 지은 지 서른 해가 지났다. 선친께서 세운 고려다원을 잇기는 하였으나 어디까지나 차가 좋아서 스스로 선택한 길이다. 1990년대에는 볼 만한 다서가 육우의 다경과 초의의 다신전이 고작이었고, 쌍계사나 화엄사 등지에 사원차의 편린만이 남아 있었다. 오늘날에는 우리의 고전 다서가 많이 복원되었고 중국 위주의 차학 이론도 많이 소개되었다. 그러나, 고리타분한 한중일의 고전 다서와 중국풍과 일본색에 물든 차학 이론에는 우리 차나무를 어떻게 기르고 따서 만들고 마시는 일에 관한 바람직한 해결책이 없다.
차농사가 생업이라 차를 제대로 만들어서 잘 팔아야 하고 공부 또한 게을리 할 수가 없으니, 어중잽이 같긴 해도 이론과 실제를 겸비했다고 자위하자. 2. 1990년대 초반에 대만차업개량장의 자료를 참조하여, 선친께서 정립한 우리 손덖음 녹차의 제법에 대만제 원통형 전동식 찻잎 덖음솥(초청기炒菁機)과 절강산 비빔틀(유념기揉捻機)을 적용시켜 생산성을 높혔다.
후반에는 중국의 고전다서전집과 차학총론서와 차학사전을 망라한 다서들과 각지의 각종 차들을 구하여 읽고 맛보면서, 우리 찻잎으로 만든 6대 다류를 완성하였다.
이론 없는 실천은 안개 속을 걷는 것과 같이 무모하고 실천 없는 이론은 사막의 신기루처럼 허황되다는 것을 일과 공부를 병행하며 깨달았다.
실제로 차를 만들어 보면 책대로 되지가 않는데, 이는 우리의 찻잎과 제다 환경이 중국의 그것과 다르기 때문이다.
하여간 이론이 없었다면, 힘만 들고 얻는 것은 적었을 것이다. 3. 예전에는 산사와 차교실과 전통다실에서 우리의 재래종 찻잎을 솥에서 덖고 멍석에서 비벼서 만든 덖음잎녹차가 우리차를 대표하였다. 요즈음 사무실에서는 주로 티백을 찾고 골목마다 들어선 카페에서는 커피와 홍차와 보이차들을 즐기고 우리 잎차는 괄시 당한다. 이는 우리차가 그동안 비과학적인 구식 이론에 집착하거나, 격식과 치장을 중시하는 형식주의에 매몰되거나, 제 것만 좋다는 편협한 소아주의에 안주한 후과이다. 수입품인 외국산 커피와 차들도 우리의 차생활을 풍성하게 하는 재료들이고 값싼 대중용 티백도 우리 차산업을 지탱하는 밑거름이다. 그렇지만, 우리차의 중심을 잡고 앞장서서 이끌 차는 우리의 재래종 찻잎으로 제대로 만든 고급 잎차이다. 우리의 고급 잎차는 가성비가 몹시 낮은데, 하루빨리 차 만들기(제다製茶)와 차 맛보기(품다品茶)에 대한 과학적인 이론을 정립하고, 효율적인 기계와 장비를 적용하여, 우리의 고급 잎차를 제대로 잘 싸고 넉넉히 만들어야 한다. 4. 전진과 후퇴를 반복하면서도 역사는 발전하기 마련이고, '요새 애들은 버릇이 없어'와 '세상이 말세야'라는 말은 유사 이래 늙은이들이 줄창 해오던 넋두리이다.
꼰대라고 지탄을 받는 우리 386도 한때는 몸을 던져 기성의 악폐에 항거하던 투사들이 아니었던가?
집안의 아이들에게 우리차를 가르치려 해도 마땅히 쓸만한 책이 없어서, 그동안 차를 만들면서 깨달은 생각들을 다듬고 있었는데, 요사이 우리차를 물어오는 젊은이들이 부쩍 늘어서, 미련함과 게으름을 떨쳐내고 이 글을 쓴다.
조악난삽하기가 그지없으나 우리차 사랑으로 보듬어주시고, 격려와 질정을 보내주시면 힘이 나겠다.
엄동의 칼바람이 밤새 북창을 두드리더니 어느새 닭 울음 소리가 들려온다.
1. 차의 유래 사람들은 언제부터 차나무의 새순과 새잎으로 만든 차를 마셔왔을까? 4,5000년 전에, 불의 신이자 농사의 신이자 의학의 신인, 염제 신농이 온갖 풀을 맛보면서 중독되었다가 차를 먹고 해독되었다는 것이 '신농해독설'이다. 8세기 중엽 당나라의 육우가 지은 '다경'에는, 신농을 차의 비조로 삼고, 주나라와 춘추전국과 한나라와 위진남북조와 당나라로 이어지는 역대 차인들의 일화가 실려 있다. 불교계의 일부에서는 6세기 초반에 동래한 인도승 초조 달마가 면벽참선을 할 때 졸음을 이기려고 뜯어서 던진 눈꺼풀이 차나무로 자라났다는 '달마안피설'을 주장하기도 한다. 신화나 설화가 현실의 반영이기는 하지만, 곧이곧대로 믿어선 안된다. 육우는 다경에서 차가 '남쪽 지방의 아름다운 나무'라고 하였고, 저쟝부터 쓰촨까지의 장강 유역의 차들은 상술하고 있으나, 푸졘과 타이완과 광뚱과 광씨와 윈난의 차들은 소홀하다. 차나무와 동백나무 등의 조엽수림은 중생대에 중국의 서남부인 꾸이저우와 윈난과 베트남 북부와 버마를 아우르는 지역에서 발생하였다. 차가 차츰 동쪽으로 전파되면서 선사시대부터 일부 지역에서는 차를 마셨고, 중국전역으로 확대된 것은 7세기 이후인 것 같다. 8세기에는 한국과 일본에, 16세기에는 유럽에 전파되었다.
2. 우리차의 시작 우리나라 사람들은 언제부터 차를 마시기 시작했을까?
차는 차나무의 새순과 새잎으로 만드니, 우리 차나무의 시작부터 알아 보자. '신라의 중국차 도입설'은 정사인 삼국사기에 실려 있고, 예전부터 차에 대한 역사와 시문에서 자주 거론되어 왔다. 9세기 초, 신라 흥덕왕 때 당나라에 사신으로 갔던 대렴이 차씨를 가지고 와서 지리산에 심었고, 차는 선덕왕 때도 있었으나 이때부터 성행하였다는 것이 그 내용이다. '인도차 전래설'은 조선말부터 일제까지 살았던 이능화의 견해이다. 1세기 초, 가야의 시조 김수로왕의 왕비인 인도의 공주 허황옥이 차씨를 가져와 김해에 심었다는 것이다. '우리차 자생설'은 지리산이 고생대의 산이고 온대 기후에 속하여 해저로의 침강이나 빙하의 침식이 없었으므로 신생대 이전부터 차나무가 자생하고 있었다는 일제 말에 태어난 하상연의 주장이다. 최근에 대두된 '백제 도입설'은 중국 육조와 교류가 빈번하였던 백제가 신라보다 이르게 중국차를 도입했을 것이라는 설인데... '중국차 도입설'은 '우리차 시배지설'로 왜곡되어 통용되고 있으니 '중국 도입차 파종지설'로 바로 잡아야 한다. 다른 설들은 역사적 근거와 이론적 토대가 박약하다. 원조가 누구인지, 도입종인지 토종인지, 순종인지 잡종인지는, 편을 갈라 니전투구로 갑론을박해서는 안되고, 유전자 분석 등의 과학적 연구를 통하여 밝혀내어야 한다. 차농사꾼 입장에서는 그런 것들은 안물안궁이고, 육종과 재배법의 연구를 통하여 좋은 차나무를 공급받고 차밭의 조성과 차나무 재배에 대한 실질적인 교육과 지원을 애타게 바랄 뿐이다. 아래의 사진은 쌍계사 인근에 조성된 '우리차 시배지'의 풍경이다. 줄줄이 서 있는 비석들은 '신라유당사 김대렴공차시배추원비'와 '해동신라국다성원조 진감국사차시배추앙비'와 '차시배지비'와 '다도중흥삼사 초의만허고산추념비' 들인데, 왜곡과 조작의 기념비로 길이길이 보전하자.
3. 하동차는 야생차가 아니다. 야생이란 산하에서 저절로 생겨나 제멋대로 자란 것을 말한다. 차나무의 원산지인 중국운남이나 미안마의 밀림 등에는 야생차나무가 있는데, 향미가 들쑥날쑥하고 독성을 가진 것도 있어서, 제다의 원료엽으로 적당하지 않다. 하동야생차는 지리산 속의 깊숙한 원시림에서 차나무 군락지를 찾아내어 유전자 검사 등의 과학적 분석을 거쳐서 증명된 차나무가 아니다. 200년 전 초의스님은 동다송에서 '4~50리에 걸쳐서 비단처럼 펼쳐진 화개의 차밭은 우리나라에서 제일 넓다'라고 하였는데, 조선말과 일제와 미군정과 한국전쟁을 거친 1970년대의 화개에는, 사찰 주변과 바위 틈과 대나무 아래에 드문드문 살아 남은 차나무가 있었다.
1980년대에 부활하기 시작한 화개의 차밭은 200년 전의 성세를 넘어섰는데, 이는 험악한 돌산을 차밭으로 일구어낸 차농들이 노력한 결과이다.
씨를 뿌렸더니 저절로 자라나서 가끔 풀베기와 가지치기만 하고 농약치기과 비료주기를 하지 않으니 야생차가 맞다고 우기는 이들이 있는데,
친자연 농법은 야생이 아니다.
평지보다는 산지가 밀식보다는 산식이 화학비료보다는 유기질비료가 유농약보다는 무농약이 기계채엽보다는 손따기가 친자연적이고, 친자연적으로 재배한 차나무의 잎으로 만든 차가 맛 좋고 안전하다.
4. 가마솥 덖음차는 우리의 전통차일까? 과거로부터 이어온 전통은 현재에 개량하여 미래로 전해야 할 진실되고 유익한 가치이다.녹차는, 쪄서 익힌 다음 덩이지어 말린 덩이차에서, 덖어 익힌 다음 비벼서 낱낱이 말린 잎차로, 개변되어 왔다. 오늘날 중국은 덖음녹차를 주로 만들고, 일본은 찐녹차가 주류인데, 우리는 두 가지가 공존한다. 중국은 덖음녹차를 차오찡뤼차(炒菁綠茶초청녹차)라 부르는데, 완성찻닢을 차예(茶葉차엽)라 부르고 원료찻잎을 차찡(茶菁차청)이라 부르므로 찻잎 덖기를 초청이라고 하는 것이다. 일본은 찐녹차와 그것을 우려마시는 행위를 센짜(煎茶전차)라 부르는데, 쪄서 만든 찻닢을 우려서 마시면서 달여 만든 차를 달여 마신다고 하는 것은 과거의 낡은 잔재이다. 중국의 호북에서는 은시옥로라는 찐녹차가 옛날부터 났었고, 경도에서 해가림재배를 하여 만든 찐녹차인 우치옥로를 일본인들은 최고급 녹차로 여긴다. 일본에서도 일부 덖음녹차가 생산되는데, 부초차(釜炒茶)라 부른다. 그렇다! 가마솥덖음차이다. 일본인들이 가마라 부르는 솥인 부(釜)는 바닥이 편평하고 원통이 붙어있어서 삶거나 데치거나 시루를 올려놓고 찌기에 적합하고, 찻잎을 덖기에는 반구형의 노구솥인 과(鍋)가 유용하다. 공간이 정신을 고양하는 지는 잘 모르겠으나, 도구는 생산을 제고하는 요소임이 틀림없다. 그런데? 그냥 '덖음녹차'라 하면 될 것을, '지리산 야생 아홉번 덖고 아홉번 비벼 만든 전통 가마솥덖음녹차'라고 부르면 없었던 향미가 무담씨 생겨날까?
5. 잭쌀은 우리의 전통 발효차가 아니다. 차나무의 싹이 뾰쪽하게 돋아난 것을 아(芽)나 창(槍)이라 부르고, 그것이 자라서 펼쳐진 잎을 엽(葉)이나 기(旗)라고 부른다.송조의 웅번은 차싹이 차의 원료로 가장 좋다고 하면서 소아(小芽)라 부르고 작설(雀舌 참새 혀)과 응조(鷹爪 매 발톱)처럼 생겼다고 하였다.
조선조의 시문과 사서에서는 작설이 차의 통칭으로 쓰였다. 200년 전, 칠불사에서 다신전의 원전을 베껴 갔던 초의는 '칠불사의 스님들은 늦게 딴 찻잎을 햇볕에 말려서 솥에다 풀풀 끓여서 마시는데, 붉고 탁하면서 쓰고 떫으니 비속한 솜씨로 차를 버려 놓았다'고 비난하였고, 쌍계사의 만허가 만든 차를 맛 본 추사는 '용정의 첫물차만큼 좋다'라고 칭찬하였다. 우리차가 긴 암흑기를 거치는 동안에 음풍농월하던 고상한 다풍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화개와 악양의 민가에서 만들어 마시던 잭쌀이 우리차의 명맥을 이었다. '우리 차의 명맥은 민간의 황차에 의하여 이어져 왔습니다. 해남 강진 지역의 정다산차(丁茶山茶)나 화개지역의 작설차(雀舌茶)는 그 지역 주민들에게는 급체나 감기를 다스리는 상비약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구례, 사천 등지에도 그 지역 특유의 발효차가 있었습니다. 화개가 고향인 저는 해마다 겨울이면, 부뚜막이나 온돌방에서 시들리고 띄워서 만든 「잭쌀」(작설의 화개지역 사투리)의 다향이 화로불 위에서 피어나던 기억을 문득문득 떠올리곤 합니다. ... 머지않아 차시장이 개방되면 중국산 발효차가 물밀듯이 들어올 것이 뻔하니, 우리는 서둘러 우리 땅에서 나는 차잎의 성질에 알맞고, 우리의 입맛에 맞는 좋은 발효차를 만들어내어야 합니다.' 위 글은 2001년에 제가 <다담>지에 기고한 ‘황다론(黃茶論)’의 일부이다. 지금은 잭쌀이나 우리황차 같은 빛바랜 유산에 얽매어 있을 때가 아니다.
이제부터라도 커피와 인도산 홍차와 중국산 육대다류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우리녹차와 우리발효차를 속히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이어집니다) <240131 하동화개 고려다원 월강다회주 하춘수 배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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