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충청도 촌놈의 상경
제품개발의 성공비결은 조상님 유산
첫 번째 벽을 넘으며
IT 산업동향에 눈을 뜨며
첫 번째 벽을 넘으며
1970년대 시절은 산업화 붐이 최고조였던 시기로 박정희 대통령의 경제정책은 ‘조국 근대화의 기수’라는 기치아래 공업계 고등학교를 육성하고 산업일꾼을 양성하기 위해 온 나라가 산업현장이었다. 그래서 웬만한 인문계 고등학교 보다는 공고에 들어가는 것이 더 쉽지 않았다. 나는 중학교 시절 달달 외우는 주입식 공부를 좋아하질 않았다. 어려서부터 뭔가를 뜯어보고 고치는 것을 좋아했던 나는 인문계보다는 공고에서 내가 하고 싶은 공부를 하고 싶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무선통신 분야에 많은 것을 배우고 싶었다.
그렇게 뭔가를 뜯어보고 고치는 게 좋았던 나는 대전에 있는 계룡공고 통신과에 입학하게 되었고 타고난 손재주 덕분에 고등학교 2학년 시절에는 무선설비 기능사 2급 자격증을 땄다. 그 무렵 내가 딴 자격증은 3학년 선배들도 합격하기가 쉽지 않았다. 무선통신에 분야에 남다른 큰 관심과 애정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공고에서 무선통신 분야에 대한 기초를 다진 후 나는 공업대학에 입학할 수 있었다. 그리고 군복무도 공군 통신기술병으로 지원입대하게 되었다.
1984년 1월 4일 많은 눈이 내린 이른 아침에 부모님께 큰절을 올리고 군대에 가는 기분은 참으로 묘했다. 우연찮게 내가 군대 가는 날은 형님께서 전역한 날이었는데 나와 형님은 바톤 터치를 하게 된 것이다.
어려서 또래 친구들과 뛰어놀던 대전 둔산동의 공군 신병학교에서 기본군사훈련 6주를 받았다. 그리도 통신병 기술교육 12주를 받고는 평택의 7항로 보안단에서 청주 17전투비행단으로 배속되었다. 전투비행단에서는 레이더 정비병으로 복무했다. 군복무시에는 미군들이 운영하는 최첨단의 유무선 통신설비에 대한 교육으로 다양한 경험 또한 쌓을 수 있었다. 결국, 군복무를 통해서도 미래에 펼쳐질 IT 사업 부분의 기초를 다질 수 있었다.
흔히들 남자는 군대에 갔다 와야 사람이 된다는 말이 있듯이 전역 후 나는 도서관에서 살다시피 하면서 학업에 전념을 하게 되었다. 그 결과 복학 후에는 줄 곳 장학금을 타면서 좋은 성적으로 졸업하였고, 미래의 창업을 예견하듯 서울에 있는 중견컴퓨터 회사에 취직까지 하게 되었다. 충청도 촌놈이 서울에 있는 컴퓨터 회사에 취직을 하는 것은 당시 지방대 출신들에게 흔치 않은 일이었다. 그런데 상경을 앞두고 어머님의 표정은 기쁨보다는 어둡기만 했다. 집안 가세가 넉넉하지 못해서 서울에 월세방조차도 마련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상경하던 날, 어머니께서 쌈짓돈 10만원을 내 손에 꼭 쥐어주시면서,
“얘야 에미가 이것밖에 못해줘서 너무 미안하구나. 서울에서 직장생활 잘하고 밥은 꼭 잘 챙겨서 먹어야 한다.”
그렇게 어머니께서는 내 손을 잡고 울먹이셨는데 그 순간 나도 모르게 눈물이 주루룩 흘러 내렸다. 당시 여동생이 대학을 다니고 있던 터라 집안형편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렇게 쌈짓돈을 모아서 주신 10만 원으로 나는 서울행 기차에 몸을 실었다. 서울역에 도착하였을 때는 촌놈인 내가 과연 잘해 낼 수 있을까 두려움과 걱정도 많았다.
첫 봉급을 탈 때까지는 사무실에서 하루세끼 모두를 해결했다. 다행스럽게도 회사 구내식당은 하루세끼 모두를 제공했다. 잠은 회사근처 24시간 사우나를 돌면서 잤다. 어떤 날은 회사 업무용 차안에서 자기도 했고 또 어떤 날은 야근을 핑계로 사무실에서도 잤다. 양복은 물세탁이 가능한 것으로 달랑 한 벌 뿐이었는데 겨울이 다가오자 바람이 숭숭 들어왔다.
그렇게 몇 달 봉급을 모아서는 수원 성균관대학교 근처에 월세방을 구했는데 퇴근이 늦은 날에는 주인 아주머님께서 고맙게도 연탄불도 갈아 주시곤 했다. 아침 출근길, 서울 마포구 대흥동 4거리에 “종이 울리네 꽃이 피네 새들의 노래 웃는 그 얼굴 그리워라 내 사랑아 내 곁을 떠나지 마오” 서울의 찬가’가 울려 퍼질 때면 지방대 촌놈이었던 내가 무슨 산업일꾼이 된 것 마냥 벅찬 감격이 밀려오곤 했다.
그러나 그런 벅찬 감격과 희망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 나를 초라하게 만들었다. 지방대 출신으로서 냉엄한 현실을 느끼면서 사회생활 초년병이 감내하기에는 뛰어넘을 수 없는 벽이 존재함을 서서히 인식하게 된 것이다. 당시 회사의 대표이사부터 핵심경영진 모두가 서울대와 명문대 출신들이었다. 입사 동기생이라도 서울대와 명문대 출신들의 대우와 진급속도는 지방대 출신과는 비교가 되질 않았다.
지방대학교 출신 신입사원들의 아침 첫 일과는 단순한 복사심부름과 간부들 승용차에 기름을 채워오거나 세차장에서 차를 닦아오는 일들이 전부였다. 하지만 나에게 있어서 지방대 출신의 천대는 미래의 내 사업을 준비할 수 있도록 신선한 자극제가 되었다.
지금도 별반 다르지 않겠지만 출신성분에 따른 차별과 편견은 어느 회사 조직에서나 널리 퍼져있던 것이다. 우리사회에는 다양한 형태의 또 다른 벽들이 서로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느 회사나 마찬가지겠지만 부서의 회식자리는 나의 현 위치가 어딘지 확인할 수 있는 자리다. 누가 시킨 것은 아니지만 다들 알아서 서울대와 명문대 출신들 그리고 지방대 출신들이 나누어서 앉는다. 나처럼 지방대 출신들은 알아서 끝자리에 자리를 잡는다. 조직분위기 자체가 그런 식의 자리배치를 무언적으로 압도하기 때문이다. 가끔씩 마음씨 넉넉한 임원이 분위기를 위해 지방대 출신들을 가운데 자리에 배치하기도 했지만 가시방석에 앉은 것처럼 따갑기만 했다. 1차 회식 후 뒤풀이 술자리는 더 극명하게 달라진다. 출신성분에 따라 아예 뒤풀이 장소도 달랐기 때문이다. 나는 이런 보이지 않는 벽들에 화가 나면서 내 스스로가 오기에 발동을 거는 기회로 삼았다.
중학교 시절 무례하고 버릇없는 덩치 큰 녀석을 손에 짱돌을 쥐고 후려 팼듯이.
오기에 발동이 걸리자 나는 다른 직원들 보다 몇 배의 노력과 함께 차별화된 일들을 찾기 시작했다. 회사의 출근시간이 아침 8시 30분이었지만 나는 항상 한 시간 일찍 출근했고 일이 많은 날은 6시 전에 출근했다. 토요일에는 오후 늦게까지 회사에 남아서 한 주일 동안 처리했던 업무 중에서 혹시나 누락된 부분은 없었는지 재확인 하였다. 일요일 오전은 가족과 함께 근처 공원을 다녀온 후 오후에는 회사에 출근해서 최신제품들에 대한 기술자료를 수집하고 경쟁사 제품들에 대한 기술동향도 미리미리 숙지해 두었다. 일요일 오후는 직원들이 없어서 내가 무슨 준비를 하는지 아무도 알 수가 없었다.
그리고 타 부서의 원활한 업무협조를 위해서 관련 기술지원 부서의 책임자들과 진솔한 교류에도 최선을 다했다. 그래서 그런지 고객사에 장비를 납품하기 위해서 출고전표를 끊으면 최우선적으로 납품할 수 있었고 기술지원 요청이 들어오면 최단시간에 문제해결을 할 수 있었다. 한번은 신형 금융단말기 교체 건으로 회사가 온통 정신이 없었을 때,
“최과장님, 오늘 국민은행에 단말기 100대 꼭 내보내야 하는데 다른 은행들 납품분량이 만만치 않아서 걱정이네요.” 했더니 자재과 최과장은,
“조대리, 걱정마. 내가 조대리 물량은 미리 다 빼두었어.” 했다. 그리고 또 한 번은 금융결제원 CD 공동망 시스템의 업무개선에 필요한 소프트웨어 엔지니어의 기술지원이 급했는데 당시 핵심기술 인력의 부족으로 갑작스런 고객의 기술지원 요청은 여간 난감한 상황이 아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조대리, 금융결제원 김과장인데, 요즘 CD 공동망 거래량 증거로 시스템튜닝이 급한데 오늘 홍과장 좀 보내주었으면 좋겠는데...”
“아...네...김과장님, 오후에 홍과장과 함께 방문하겠습니다.” 하고는 관련 부서에 전화를 했다.
“홍과장님, 저 조대리인데요, 결제원에서 CD 공동망 시스템튜닝 한다고 급히 좀 와달라고 하는데요, 이를 어쩌면 좋지요?”
“아. 네. 그래요, 사실 오늘 전국투자금융에 기술지원 나가기로 했는데요, 그 쪽 고객에게 양해를 구하고 조대리 요청사항부터 하지요.” 했다. 이렇게 관련부서의 업무협조는 필수였다.
뿐만 아니라 나는 고객을 챙기는 일에도 능동적으로 움직였다. 대부분의 직원들은 제품에 어떤 하자가 생기거나 고객들이 방문을 요구해야 고객을 찾아가는 게 일반적이었지만, 나는 회사에 특별한 일이 없는 한 내가 담당하던 국민은행과 금융결제원은 일이 있거나 없거나 매일 찾아갔다. 항상 고객들을 만나면 제품사용에 대한 불만은 없는지 회사에서 능동적으로 챙겨야 할 일들에 대하여 내 스스로가 먼저 챙겼다. 꼭 최고가 되려고 한 것만은 아니었지만 나는 내 스스로가 능동적으로 일하기를 좋아했다. 마당 쓸려고 빗자루를 들었으면 이왕이면 말끔하게 쓸어야 하듯.
그렇게 몇 년이 지나자 나에 대한 고객들의 신뢰는 날이 갈수록 탄탄해졌다. 그런 세월을 지나다 보니 고객들은 우리회사 임원보다도 일개 대리였던 내 말을 더 믿기까지 했다.
“조대리는 된다는데, 이상무는 왜 안된다는거죠?”
고객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오면 인사권을 가지고 있는 상관에게 밉보이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지만 난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그리고 내가 가끔씩 몸살이 나거나 지방은행에 출장을 가서 고객을 방문하지 못하는 날은 고객들부터 가슴 뿌듯한 전화를 받았다.
“조대리, 오늘 무슨 일 있어? 왜 안 오는데?”
“조대리 오면 점심같이 먹으려고 다들 기다리고 있어. 닭한마리 집에다 토종닭 좋은걸루 부탁해 두었거든.”
“오늘 우리 팀원들 닭 먹으러 가는데 매일 오다가 안 오니까 부장님이 궁금하다고 전화 좀 해보래.”
이렇게 나는 고객들이 챙겨주고 궁금해 하는 사람이 되어갔다. 물론, 내가 모든 고객들에게 인정받고 사랑받는 사람은 아니었다. 모 거래처의 경우 그들이 도입하려는 제품이 우리회사 제품과 경쟁관계에 있었는지 김과장은 나의 방문에 항상 경계를 하는 눈치였다. 제품도입에 관련된 말은 아예 꺼내지도 않았다. 내가 점심식사를 권유하면 선약이 있다고 했고 그의 사무실에서 커피 한잔하는 시간조차도 여의치 않았다. 은행의 업무특성상 시스템 도입에 관한 구매담당 과장은 의사결정에 중요한 영향력을 끼친다. 그래서 그의 협조는 필수적이었지만 그와 말조차 쉽게 꺼내기가 어려웠다.
‘어떻게 하면 그의 마음속에 내가 있을까’ 몇 날 며칠을 고민하다 김과장의 집 근처로 이사를 가기로 결심했다. 당시 전세를 살았는데 재형저축을 담보로 대출을 받아서 조그만 집을 살 기회를 잡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이사하던 날 이삿짐을 들이는 내 모습을 보고는 김 과장은 한동안 멍하니 쳐다보기만 했다. 그런데 그날 저녁 김과장은 화장지와 세제 하나를 사들고 우리 집에 찾아왔다.
“조 대리, 내가 당신한테 졌다, 야... 지독하다 지독해, 이사까지 오다니”라고 말하면서 환하게 웃는 얼굴로 악수를 청해왔다.
그리고는 “자, 이젠 우리 이웃인데 앞으로 잘 지내보자”라며 내 등을 두둘겨 주기까지 했다. 뿐만 아니라 인간적인 측면에서도 서로를 배려하고 격려해 주는 이웃사촌이 될 수 있었다.
이처럼 남들과 다르게 차별화된 6년간의 처절한 몸부림으로 200명 영업직원들 중에서 매출실적 1위를 달성하였고, 금융기관 기술영업을 통해서 고객들과 신뢰의 기반을 다지게 되었다. 그러면서 우리나라 금융전산망시스템 업무를 이해하고 숙지하게 되었다. 그리고 고객들이 향후 전산시스템을 어떻게 발전시켜 가려고 준비하고 있는지, 무슨 애로사항들이 있는지 자세히 알게 되었고 금융기관뿐만 아니라 이 나라 IT업계의 전반적인 기술발전 추이를 내다볼 수 있는 안목이 생기게 되었다. 결국 오기발동으로 최단시간 내에 다양한 경험을 할 수 있었고 관련정보를 숙지할 수 있는 촉매제가 되었다. 현실의 벽을 뛰어 넘으려는 나의 이런 노력은 미래의 꿈을 펼칠 수 있는 토대가 된 것이다.
첫댓글 감동이 큽니다.
과찬의 말씀입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