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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10. 4자 동아일보 발표, 동아꿈나무 재단 주관 특수교사 수기입선작
행복한 아이들의 행복플러스(+)연주회
서울정진학교 원로교사 박해평
1. 깃발을 올리기 위해
“이 세상 사람을 둘로 나눈다면 장애인과 비장애인으로 나누는 것이 아니라 행복한 사람과 행복하지 않는 사람으로 나눈다.” 이 말은 항상 행복에 겨워 웃고 즐거워하는 아이들의 모습들을 담아 ‘조금 느려도 괜찮아’라는 책을 펴낸 정문학교 교사들이 한 말이다.
벌써 7년 전, 2월경으로 되돌아간다.
정신지체 특수학교인 서울정문학교 교장으로 발령 받은 곳은 서울에서도 가장 개발이 늦은 마지막 달동네라는 서울 신림7동에 위치한 난곡이었다.
전철이 다니는 신림역에서도 버스로 2~30여분을 더 달려야 관악산 줄기로 이어진 삼성산 자락 서북쪽에 붙어 있는 교통이 매우 불편한 곳 중의 한 곳이었다.
유치부에서 초․중․고등부를 비롯하여 전공과까지 5과정 27학급 규모에 학생들은 모두 240여명, 교원 58, 행정실 직원 20여명이 정신지체 장애 아이들을 지도하고 관리하기에는 더 많은 손길이 필요했다. 하지만 이제 겨우 개교한 지 5년 남짓에 교통이 불편한 곳이니 자원봉사자며 도움의 손길을 구하기가 여간 쉽지 않았다.
‘서울정문학교가 이곳에 있다는 깃발이 있어야 이 깃발을 보고 찾는 이가 모여들 텐데 무슨 깃발을 올리나?’ 나는 고심 끝에 ‘그래 우리 아이들이 할 수 있는 숨은 재능을 찾아 이를 통해 장애인식도 개선하고 학교 발전을 추구하자’는 생각이 머릿속을 감돌고 있었다. 이 때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같은 서울의 정신지체 특수학교인 J교의 D 교장이었다.
“정문 학교에 음악교사가 필요치 않느냐?” 는 것이었다. 음악 전공 교사 한 분이 배치되어 있었지만 자녀 교육과 남편의 사업을 돕기 위해 캐나다로 동반휴직 중이어서 한 사람의 음악교사가 절실했었다. 하지만 추천하는 교사는 서울에 있는 교사가 아니라 경기도에서 근무하는 L교사였다. 언젠가 L 교사가 기악합주 지휘하는 모습을 보았었고 또 교감으로 근무했던 서울광진학교의 교가를 작곡했던 교사이기도 해서 익히 이름은 알고 있었기에 꼭 모시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았다. 그 분이라면 내가 생각하는 학교경영에 부합되는 적임자라고 생각한 것이다.
교장의 역할 중 제일 첫 번째로 꼽는 일은 교장이 의도한 일을 함께 이룰 사람을 기용하는 일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는 나는 이런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 길로 서울시교육청의 교원정책과로 달려가 “학교 발전을 위해 L교사가 필요 하니 서울로 전입시킬 수 있는 방법이 없겠느냐?”고 물었다.
타시도와의 1 : 1 교류라면 가능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얼마 전 경기도로의 전보희망자를 조사해 보니 단 한 사람도 없었다는 것이다. 나는 다급해지기 시작했다. 기회는 이 때인데 이런 기회를 놓치면 다시는 기회가 없을 것 같았다.
“장학관님, 한 번 만 더 조사할 수는 없을까요? 혹시 상황이 바꿔져 희망자가 나올 가능성도 있지 않겠습니까?”
나의 간절한 애원이 애처로워 보였던지 장학관님은 “그래요. 가능성은 희박하지만 교장님이 그렇게 간곡히 부탁하니 다시 한 번 더 해 봅시다.”
사실 이미 조사가 끝났고 다른 업무도 폭주한 상황에서 한 교장의 말만 듣고 이렇게 재조사를 한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은 아닐 거라고 생각했는데 학교 경영자를 믿고 애로점을 해소해 주시려는 김정중 장학관님이 더욱 존경스럽게 보였다.
하나님도 우리의 간절함을 어여삐 보셨는지 정말 기적과 같은 일이 일어난 것이다. 어떤 한 교사가 경기도로 전출하기를 희망해 온 것이다. 이렇게 해서 L 교사는 3월 정기 이동 때 서울로 전입되고, 당연히 서울정문학교의 음악담당 교사로 오는 것이 상례일 줄 알았는데 전혀 예상치 않는데서 또 하나의 걸림돌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교장 선생님! 저 다른 학교로 가렵니다. 예전부터 H 교장선생님과 잘 아는 사이인데 꼭 자기 학교로 오면 좋겠다하니 그 학교로 가겠습니다.”
너무나 황당한 L교사의 말에 무슨 말을 해야 할지 한 동안 말문을 열지 못했다.
나의 평소의 성격상 웬만하면 다른 사람의 말을 귀담아 들어주는 편인데도 난 반색을 하면서 한 마디로
“ 안 돼요. 그럴 수는 없어요. L 선생님이 어떻게 해서 서울로 전입되셨는지 알기나 하셔요? 선생님이 서울로 오실 수 있는 것은 누구 때문이라고 생각하세요? 선생님을 모시고 싶었다면 최소한 제가 한 것처럼 적극적으로 움직이셔서 알아 보셨어야 하는 것 아닌가요? 선생님도 어렵게 말씀하셨지만 저는 뚜렷한 목적을 갖고 모셔온 거 에요? 사실 난 그 말씀을 들었을 때 매우 섭섭했어요. 이번 일은 없었던 것으로 할 테니 다른 생각은 마세요.”
난 단호하게 거절했다. 이 선생님이 나로서는 어떤 역할을 할 선생님인데 절대 놓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2. 첫 선을 보이다
이렇게 서울정문학교에 발령받은 L선생님은 체념을 해서 인지 아니면 그게 순리라고 여겨서인지 별다른 불만족을 표하지 않고 주어진 자기 길을 충실히 가고 있었다. L교사가 발령받아온 후 서울정문실로폰 앙상블이 탄생되기까지의 과정을 더듬기 위해 당시 발행된 정문소식지(2003년 12월 20일자 9면)를 펼쳐본다.
<매주 화요일 5,6교시가 되면 어김없이 맑은 실로폰 소리가 흥겨운 리듬을 타고 음악실에서 흘러나옵니다. L음악선생님의 전자피아노 소리에 맞추어 학생들이 진지하고도 즐거운 얼굴로 실로폰 채를 두드려 스와니 강, 캐럴 메들리 등을 연주합니다. 짧은 연습기간에도 불구하고 학생들의 연주 실력은 수준급입니다. 음악적 자질이 보이는 초, 중등 학생들을 선발하고 실로폰 2개로 개별연습을 시작한지 몇 달, 드디어 지난 9월 비브라폰, 마린바, 공명 실로폰 등 17대의 새 실로폰이 들어오고 정식으로 「서울정문실로폰 앙상블」이라는 이름으로 발족하게 된 것입니다.
이들은 10월14일 난우초등학교 학예회 찬조출연 한 것을 시작으로 본교 학예회 및 관악문화관에서 열린 서울 정신지체 1지구 특별활동 학예발표회, 정신여고에서 열린「2003가을 서울학생동아리 한마당」 등 여러 행사에서 그 동안 갈고 닦은 기량을 마음껏 뽐내었습니다. (중략) 연말을 맞이하여 새로 연습하고 있는 ‘올드랭 싸인’의 서툴지만 아름다운 곡조가 가득한 음악실은 따뜻함이 가득합니다. 오늘도 연습에 열중하는 대견스러운 학생들의 모습에서 꿈이 가득한 정문의 미래를 보게 됩니다.〉
일단 선생님을 모셨으면 선생님이 의도한 뜻이 학교장이 구현코자 하는 목적과 일치 한다면 이의 실행을 위해 적극적으로 뒷받침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 나의 소신이었다. 빠듯한 학교 운영 예산으로는 마린바, 비브라폰, 연주용 실로폰을 거금 2~3천만 원을 드려 악기를 구비할 수는 없었다. 천우신조랄까, 치료용에 필요한 기자재를 사라며 특수학교에 3천만 원씩 교육부로부터 배시가 된 것이다. 치료 교육에 쓰일 웬만한 기구는 갖추고 있는 상태였기에 음악치료용으로 악기를 구입하는 데는 별 어려움 없이 구입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악기가 구입되고 L선생은 이반 전반 음악수업을 맡으면서 음악 방면에 관심과 잠재된 가능성 있는 아동을 발굴하고 틈을 내어 지도하는 것이었다. 사실 L선생은 성악을 전공했지만 아이들에게 기악을 택해 특기적성 지도를 하는 데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을 텐데 한 번도 묻지는 않았지만 아마 나와 같은 생각에서 일 것이다.
정신지체 등 발달지체 아이들이 합창 발표를 하는 경우가 있어 가끔 참관해 들어보면 이건 아닌데 하고 자주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었다. 어떤 경우는 성악을 한 성인들이 함께 부르는 데도 그 소리마저 죽이고 만 것이다. 음악이란 말 그대로 들어서 즐거움을 주자고 하는 건데 정말 못 들어줄 소리를 억지로 듣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하지만 악기를 가지고 한 경우는 달랐다. 그것은 악기가 갖은 절대음감이 있기에 불거나 터치만 하면 그 음가를 낼 수 있기 때문이다.
할 수 있는 아이들을 발굴하고 악기를 구입하는 동안 거의 한 학기가 소요되고 2학기에 들어서서는 본교 학예발표회 참가를 계기로 더욱 연습에 몰두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마침 통합교육을 하고 있는 난우초등학교에서 학예발표회를 한다하기에 당시 김수연 교장님께 우리 아이들이 실로폰 연주를 열심히 하고 있으니 한번 무대에 설 기회를 줄 수 없겠느냐고 했더니 선뜻 응해 주었던 것이다.
10월 14일, 난우초등학교 운동장에서 우리는 최초의 공연을 펼치게 된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많이 서툴고 조금은 부끄럽기도 한 순간으로 떠오르지만 빙 둘러선 수많은 아이들과 교직원, 그리고 여러 학부형들의 박수갈채를 잊을 수 없다. 이 정도가 정신지체 장애아동들의 수준인 걸로 대 만족이었지만 현재의 수준을 일반 아이들 뿐 아니라 대학에서 마린바를 전공한다는 학생의 수준 못지않게 건반을 두드리며 음악성을 발휘하고 있는 학생이 있다면 믿을 사람이 얼마나 될까?
참 무모한 출연이었지만 이를 계기로 본교 학예회 발표회는 자신 있게 올릴 수 있었다. 그 때의 뜨거운 박수는 앞으로 각종 대회나 의미 있는 행사에 당당히 나가서 우리 아이들의 솜씨를 뽐내며 장애인식 개선을 위해 크게 봉사할 수 있는 도구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3. 기회를 주세요.
우연한 기회에 국가・국회 조찬기도회 시 찬양 및 연주 팀을 뽑고 있다는 소식을 접할 수 있었다. 국회의원 등 국사를 위해 애쓰신 여러분들 앞에 우리 아이들도 배우면 변하고 달라질 수 있다는 점을 보여주고 싶은 욕심에서 행사를 주관하는 여의도 국회 사무실을 찾아갔다. 많은 사람들이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국가적 행사에 의미 있게 쓰이고 싶은 마음에서인지 선남선녀들이 줄서 있었던 것이다.
관계자 앞에 나아가 내가 어떤 사람임을 대충소개하고 우리 아이들도 참여했으면 좋겠다는 뜻을 전하니 보시다시피 각 분야에서 뛰어난 분들도 서로 참여하겠다고 한 마당에 장애 아이들이 참여하는 것은 조금 곤란하다는 투로 말한다. “알겠습니다. 하지만 이런 기도회 행사까지 잘나고 잘한 사람만 해서야 되겠습니까? 여기 우리 아이들이 하는 모습을 비디오테이프에 담아왔으니 시간 있을 때 한 번 살펴보시고 괜찮겠다고 여겨지면 연락 주십시오.”
바쁜 분들한테 시간을 빼앗아가며 길게 설명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다. 서로가 필요하다면 쓰일 도구로 소개만 되는 것으로도 족하다는 생각을 안고 돌아왔는데 연락이 온 것이다. 행사관계자들과 비디오테이프를 살펴보았는데 참여시키는 것이 좋겠다고 의견을 모았으니 모월 모일 모시 여의도 렉스턴호텔로 오라는 것이다.
05년 3월1일 프린스호텔에서 펼쳐진 노00대통령도 참석한 조찬기도회에는 참석치 못했지만 행사전일 외국인과 주요 귀빈들의 준비 모임 행사에 초청을 받을 수 있었다. 학교 소식지에 실린 내용을 살펴보니 여의도 렉싱턴 호텔에서 개최된 [국민화합과 경제번영 및 세계평화]를 기원하는 제37회 국가조찬기도회에 초청받아 외국의 귀빈들과 국회의원 등 국가초찬 기도회임원(회장 정근모, 유재건)들이 함께한 만찬자리에서 연주를 하였다. 이 날 연주에서 비장애인도 연주하기 힘든 어메이징 그레이스, 영광 대한민국, 성자들의 행진 등의 곡을 메들리로 능숙하게 연주하자 이곳저곳에서 탄성과 함께 아낌없는 박수갈채를 보내주었으며 대회 측에서는 4월13일에 본교로 감사패를 전달해오기도 했다.
이러한 계기로 열린 우리당 「장애아동 초청 봄맞이 벚꽃놀이」초청 연주를 할 수 있었으니 4월18일 장애인의 날을 맞이하여 열린 우리당 정책위원회와 장애인 특별 위원회가 장애아동에게 희망과 꿈을 펼칠 수 있도록 격려하고 장애아동들의 연주와 합창을 감상하고 장애학교의 현안을 듣고자 마련한 자리에 실로폰 앙상블 팀이 초청되어 정세균 의원, 장향숙의원, 이목희의원 등 20여명의 국회의원들과 교사. 장애아동, 언론 관계자 등이 모인 가운데 어머님은혜, 고향의 봄, 영광 대한민국 메들리 등을 연주하였다.
그해 4월 19일에는 올림픽 공원 제2체육관 펜싱경기장에서 열린 전국장애인 장기자랑대회에 ‘영광대한민국, 성자들의 행진곡’을 연주하여 기량을 뽐내었다고 기록 되어 있다.
4. 모두 행복을 연주해요.
연주단이 탄생하고 3 여년이 지나 이 곳 저곳 50여회의 연주를 할 수 있었다. 점차 이름이 알려져 언제 연주를 해 줄 수 없겠느냐고 물어오는 경우도 가끔은 있지만 대부분은 아쉬운 듯 어떤 행사가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선 우리 아이들도 썩 잘할 수 있으니 한번 무대에 서 볼 수 있게 해달라고 애걸하듯 말할 때가 많았다.
이는 밝은 모습으로 연주하는 그 자체로 즐거워하는 우리 아이들을 무대에 올려 있는 모습 그대로를 보여주고 싶었다. 이를 통해 장애 아이들도 교육은 필요하며 교육하면 변화되고 있다는 모습을 보여 주어 장애인에 대한 잘못된 편견을 불식시키고 우리 아이들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인식을 심어주고자 했던 것이다.
이런 경우 담당 교사와 가끔은 의견을 달리하며 난색을 표한 경우도 한 두 번이 아니었다.
“당당히 초청받아 가야지 우리가 뭐가 아쉬워서 먼저 연주 하겠다”고 하느냐는 것이다. 더욱 연주회가 주로 밤에 많이 이뤄지고 국경일, 공휴일에 열리기 때문에 모처럼 쉬어야 하는 데 교장 입장만 생각하고 먼저 이곳저곳 말해놓고서 담당자에게 말하니 교사 입장에서는 못하겠다는 말은 못하고 억지로 하는 경우도 있었던 것이다.
한 번 행사를 하려면 연주용 실로폰 17대에 전자오르간, 전축, 스피커 등 여러 악기를 트럭에 실어야 하고 또 연주 장소에서는 그 많은 악기를 트럭에서 내려 2, 3 층으로 나르고 일일이 자리를 정하고 배치해야 하는 일을 음악 교사 혼자서 해야 하니 얼마나 힘들었겠는가? 사실 교장인 나 자신도 모처럼 쉬어야 하는 데 내가 연주하러 가자고 말했으니 아니 갈 수 있겠는가? 막상 말귀도 잘 알아듣지 못한 아이들을 데리고 악기를 나르는 등 동분서주하는 교사를 보고 교장이라고 그대로 보고만 있을 수 있겠는가? 트럭운전사며, 보조로 따라온 기사와 더불어 나 역시 팔을 걷어 부치고 악기를 나르고 세팅에 도움을 주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어떤 경우는 7층 까지 날라야 했는데 정말 비지땀이 비 오듯 흐르는 것은 물론 연주도 하기 전에 온몸이 피로로 지쳐버리는 감을 갖는 경우도 한 두 번이 아니었다.
실로폰 앙상블이 창단되고 처음 1~2년에는 주로 음악 교사가 준비된 곡을 연주하는 것으로 행사를 마무리했는데 음악교사 혼자서 반주하고 아이들 살피는 일에 몰두하는 것만으로도 벅찬 것 같고 또 내가 나서는 것도 조금 멋쩍어 그런 대로 진행했었다. 하지만 연주된 곡을 계속 듣는 것도 지루한 감이 있고 교장이 앞에 나와 조금 거들어 주는 것도 좋을 것 같아 학생들이나 또 잘 아는 청중들 앞에서는 내가 사회를 보면서 연주된 곡의 배경 설명과 이 아이들이 어떤 아이들이란 걸 설명해 주면 더욱 감동스런 반응을 보여 그 후로는 거의 후자와 같은 형태로 진행했었던 것이다.
‘그린그린 그래스 오브 홈’ 등이 연주될 때는 마이크를 잡고 낮은 목소리로 ‘지금 연주되고 있는 곡은 ’그린그린 그래스 오브 홈‘이란 곡입니다. 한 죄수가 창밖의 푸른 새싹이 돋아나고 있는 것을 보면서 자기의 잘못된 삶을 반성하며 언젠가 자유의 몸이 되면 내 고향에 돌아가 부모님을 잘 모시고 효도하면서 살아야지 이런 각오와 기대가 잠긴 아름다운 곡입니다. 3~4곡을 연주하고 나면 우레와 같은 박수를 보낸다. 그럴 경우 여러분께서 기뻐하며 열정적으로 박수해 주니 우리 아이들도 너무 힘이 나서 손을 올려 표시하는 군요. 여러분 이렇게 멋진 곡을 연주한 우리 아이들 앞에 서있는 저는 연주하는 면에서는 제가 장애인입니다. 우리 아이들은요, 지능지수로(통칭IQ) 말하면 50이하이거나, 대부분은 아이 큐 측정이 안 되니까 그저 ‘측불’이라고 합니다. 지능지수는 비록 낮지만 이런 어렵고 멋진 곡을 얼마나 멋지게 연주합니까? 그러니까 사람을 함부로 아이큐로 판단하거나 함부로 말을 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이 우리들을 목적과 의미를 두고 세상에 보냈다면 우리 아이들 역시 똑같은 목적을 갖고 이 세상에 보낸 것입니다. 이 아이들을 왜 세상에 보냈을 까요? 그것은 바로 우리 아이들을 통해 소위 정상인이라 부르는 우리들이 서로 사랑하며 순수하게 살라는 것입니다. 어떤 경우 개를 안고 유럽이다 멀리 해외여행은 가면서도 정말 가까이 있는 사람을 좋아하고 사랑하는가? 우리 아이들은 요, 처음 보는 사람도 먼저 달려가서 안고 좋아해요. 그런 마음을 우리들이 본받으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직 자기 유익을 위해 잔 머리 굴리거나 고의적으로 다른 사람을 악의 구렁텅이에 빠뜨리려는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이런 아이들에게 박수 한번 보내주시면 또 멋진 곡으로 보상해 드릴 것입니다. 그러면 또 우레와 같은 박수로 화답해 주었다.
이러한 연주를 멀리는 수원에 있는 삼성전자 단지 내 삼성전기 공연장에서, 또 효성 그룹의 수 백 명의 사원들에게 들려주었을 때 아낌없는 박수와 호응하며 연주 때 마다 사원들이 마련한 선물이며 각각 성의껏 기금을 마련하여 학교 발전 기금으로 기탁했던 것이다. 그리고 삼성전기 사원들 중 자원봉사를 희망하는 이들은 토요일 날 전교생의 산행을 돕기 위해 멀리 수원에서 회사버스를 타고 서울의 난곡에 있는 학교까지 와서 자원봉사활동을 하는 것 이었다.
정말 몇 년 전 까지만 해도 자원봉사자가 부족해 쩔쩔매던 날들을 생각하면 세삼 이곳에 깃발을 세워야 이를 푯대삼아 가던지 올 거라는 나의 예상은 적중했다고 여겨지며 현재는 중・고등학교 학생은 물론 시니어클럽의 할아버지 할머니들까지 자원봉사자로 참가하고 있으니 이것이 바로 그 실증이 아니겠는가?
5. 우리도 꿈과 희망을 줄 수 있어요
어느 날 나는 L교사를 불러 “우리 이젠 한번 외부 장소를 빌려 실로폰 앙상블 발표회를 가져보는 것도 괜찮겠지요? 우선 괜찮은 장소를 잡아 예약부터 해두어야겠어요.” 이렇게 하여 정한 곳이 관악문화관이었고 12월경으로 예정했던 것이다. 이렇게 날짜를 잡고 그날 어떻게 연주하며 청중을 어떻게 동원할 것인가를 미리부터 준비하도록 독려했던 것이다. 아이들이 곡은 연주하지만 이런 기회에 우리 선생님들 솜씨도 선보이는 것이 좋을 것 같아 교사합창을 할 것을 여러 선생님들께 제안했다.
정문학교에 교장으로 부임할 때부터 매월 첫 주 월요일엔 교직원 생일축하 행사를 하였고 행사 진행 전 기타반주에 맞춰 ‘밝고 건전한 노래 부르기’를 해왔기에 합창을 해도 괜찮게 하리라 예상을 했기 때문이다. 선생님들도 기쁜 마음으로 응해주었고 10월부터서는 매주 수, 금요일에 모여 '그리운 친구, A Love until the end of time' 두 곡을 연습했던 것이다. 나 역시 교사들과 함께 베이스 파트로 연습에 열중했고 발표회 당일에도 무대에서 여러 선생님과 함께 즐겁게 노래했었다. 이 날 700여명의 객석을 꽉 메운 청중들을 시종 감동스런 모습으로 우리 아이들의 연주회 모습을 지켜보고 찬사를 보냈는가 하면 특별히 교사들의 합창에 가슴 뭉클한 감동을 받았다는 뒷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여기에는 안산의 선진학교 교장선생님을 비롯하여 시흥 능길, 강화 고창 등에서도 친구 교장들이 참석한 후 ‘아이들과 교사들이 한 마음 되어 행복한 모습으로 연주하고 노래하는 모습은 한 폭의 그림과 같다’고 말하는가 하면 동작지구 여러 초등학교 교장들을 대동하고 오신 이 수복 자율장학회 회장님은 일정이 있어 처음 시작하는 모습만 보고 가려고 했었는데 모든 걸 취소하고 ‘행복한 아이들의 행복을 더해주는 연주를 끝까지 들으니 이 밤이 무척 행복스럽다’고 고무적인 말을 해주었다.
이 날 연주를 감상하고 이곳저곳에서 축하금을 보내주었다. 어떤 면에서는 이 발표회도 중요하지만 나는 이 후의 행사에 더 뜻을 두고 있었다. 이 아이들은 그동안 싫든 좋든 선생님이 하자고 하면 그대로 순종하며 잘 따라 주었고 실로폰에 대한 지식이 아주 없는 상태에서 이렇게 훌륭한 연주를 할 수 있다는 것은 어쩌면 기적이요 그 공은 이들과 이를 지도한 L교사에게 돌리는 것이 마땅했기에 위로 차 남도순회 연주를 기획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가까운 친구 등 사업하는 고향 지인들에게 이러한 뜻을 전하고 행사 전후로 학교발전 기금으로 기탁하면 이를 잘 활용하겠노라고 귀띔했던 것이다. 이 행사로 약 천 여만 원 상당의 학교 발전기금이 들어왔고 그 해 방학을 맞이하여 보성, 장흥, 목포로 남도순회 공연을 떠날 수 있었던 것이다.
첫날 보성의 미력초등학교 공연장에는 보성초교 학생, 노동초교 학생들이 함께 달려와 우리들의 공연을 지켜보고 있었으며 공연이 끝난 후 미력초등학생들이 가야금 연주로 우리 연주단을 환영해 주었던 것이다.
연주가 끝나고 밤에는 동양에서는 제일 크고 화려하다는 보성 녹차 밭의 대형트리에서 반짝이는 불빛에 환호하며 오랜 만에 우리 아이들과 함께 함성을 지르며 한 밤을 즐길 수 있었다.
캄캄한 밤이지만 온통 종려나무로 가로수를 장식한 보성에서 장흥까지의 남해안 도로를 달리는 우리는 마치 이국이라도 온 듯한 기분이었고 장흥 옥섬에서의 해수탕욕은 하루의 여독을 충분히 날리고도 남음 있었다.
다음 2시부터서는 목포대학생선교회 회관에서 연주하기로 계획 되었기에 장흥 관광호텔에서 준비된 전복죽으로 아침 식사를 대신하고 곧바로 목포를 향해 길을 떠났다. 약 300여명의 대학생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러부미 텐더, 스와니 강, 어머니이징 그레이스, 그린그린 그래스 오브 홈’ 등 우리의 연주에 그들은 매료되기에 충분했다. 그들의 뜨거운 박수와 호응은 어디에서도 느낄 수 없는 그야말로 연주자와 청중이 혼연 일체되는 너무나 감격스러운 광경이었다.
우리들의 연주는 예정시간을 훨씬 넘겨서 까지 연주했지만 아무도 만류하는 이가 없었다. 서로가 아쉬움을 간직한 채 밤에 공생원이라는 보육원의 연주가 계획되었기에 우린 악기를 챙겨 회원들이 흔들어주는 손끝을 지켜보면서 유달산으로 달렸다. 공연에 앞서 유달산을 올라보도록 나의 스케줄엔 이미 의도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정말 오랜 만에 목포 시내를 내려다 본 나의 감회는 남달랐다.
멀리 검푸른 서남해를 분주히 드나들며 뱃고동을 울리는 여객선을 뒤로 한 채 바로 산 밑으로 나의 시선은 두리번거렸다. 빨간 지붕을 하고 있는 그 곳은 바로 오늘 저녁 우리들이 연주할 공생원에 이르렀다. 어느덧 약 40여 년 전, 매일 이 유달산을 오르내리며 공생원의 고아들과 먹고 자면서 황00이라는 고아를 가르치며 아르바이트하며 학교를 다녔던 옛 생각에 나는 주르르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
공생원 원장은 당시 교육대학생 때 내가 아르바이트하며 가르쳤던 정00라는 학생이었다. 당시 초등학교 2학년이었다. 그날 밤 나는 마이크를 들고 다른 곳에서와는 달리 사뭇 떨리는 음성으로 “여러분! 여기 서 있는 이 사람도 여러분들과 똑 같이 40여 년 전 이곳에서 먹고 자고 생활했던 사람입니다. 항상 꿈을 잃지 말고 자기가 주어진 자리에서 열심히 공부하고 일한다면 반드시 좋은 일이 있을 것입니다.
오늘 여기서 연주한 우리 아이들은 비록 장애는 가졌지만 자기가 잘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열심히 연습하고 즐겁게 생활하니까 오늘 여러분에게 이렇게 아름다운 선율로 좋은 선물을 하고 있지 않습니까? 여러분! 우리도 언젠가 누구에겐가 아름다운 선물을 줄 수 있도록 푸른 꿈을 간직하고 열심히 생활하고 공부합시다.” 나의 마이크 소리를 뒤로하고 우리 아이들이 연주하는 ‘올 드랭 사인’은 언젠가 다시 만날 것을 기약하며 아쉬운 작별의 시간을 알리고 있었다.(끝)
감사합니다(박해평) 2010.11.30
오랫만에 형님 카페에 들어가 많은 걸 느꼈습니다.
알차게 삶을 꾸려 나가시는 모습이 멋있고, 존경이 더 합니다.
에머슨이 '무엇이 성공인가?' 했는데 바로 형님같은 분이 성공한 분입니다.
저의 부족한 면을 드러내고, 또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 여러 사안이 담긴 그대로
전달메일로 올립니다. 음악이 들렸으면 좋을 텐데 어쩔지 모르겠네요.
여러모로 베풀어 주신 점 감사드립니다.
카페 한 줄 메모장에 흔적 남겼습니다.
첨부된 시도 기회있을 때 살펴 주세요.
행복하세요.
박해평 올림
존경하옵는 교장선생님!
가을입니다.
이런 가을엔 숲속 길을 가다가도
들길을 가는 중에도,
아니 맴도는 잠자리 떼를 보면서도
문득 시가 읊어지는 계절입니다.
마음 속에 간직한 명시들을
등산하면서 또는 여행 중에나
연수 중에 들려주면 그렇게들
좋아하는 것을 봅니다.
'연수'라는 말만해도 딱딱하게만 여기는데
쉬어가는 연수로 잠시 머리도 식히며
인생도 생각해 보고, 교육, 삶을 관조하면서
다시금 희망으로 아이들을 바라보며 내일을
기쁨으로 열어간다면 그 또한 좋은 연수가
아닐까요?
학부모, 교직원, 혹은 주위의 어떤 모임이든
시를 낭송하면서 노래도하며(샹송,명곡 등)
그리고 제가 쓴 - 소봉골댁 큰 아들 핫바지가
당신멋져를 말하다 -를 통해 한 교육자의 삶과
달려온 길을 말할 것입니다.
서울교육 연수원에 등록된 지정강사이기 때문에
연수비는 학교에서 부담 안해도 됩니다.
첫댓글 * 박해평교장님의 그을 잘 읽었습니다. 세상에는 행복한 사람과 행복이 덜한 사람으로 나눈다구요. 정말 행복한 이는 사랑을 아는 이일 것입니다. 사랑이 많으신 박교장님, 그리고 소교장님께 항상 감사함을 배웁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