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키높이 구두를 신는 행복한 남자다.

나는 키높이 구두를 신는 행복한 남자다. 신혼 때였다. 밖에서 일을 보고 귀가하니 아내의 친구들이 집에 모여 있었다. 신혼살림 구경을 하러 온 모양이었다. 인사를 하고 아내 옆에 앉아 결혼식 후일담을 나누고 있었다. 시간이 지나고 서먹함이 사라지자 친구 중 하나가 내 얼굴을 빤히 바라보며 손으로 입을 가리고 웃기 시작했다. 그러자 다른 친구들도 웃는 이유를 안다는 듯이 따라 웃었다. 짐작컨대 나 없을 때 내 이야기를 한 듯싶었다. 남자 체면에 왜 웃느냐고 꼬치꼬치 캐물어보기도 뭣해서 애써 침착한 척했다. 손을 가리고 웃던 친구가 얄미운 농담을 걸어왔다.“키가 향이(아내 이름)보다 별로 크지 않네요.”생각 같아서는 ‘댁네 남자들은 얼마나 큰 녀석들인지 한번 봅시다’라고 쏘아붙이고 싶었지만, 삐진 속내를 숨기고 대범한 척 능청을 떨었다. “그래도 걸을 때 코가 계단에 닿지는 않습니다.”그리고는 ‘즐거운 시간을 보내라’고 속에도 없는 인사를 하고 안방으로 물러났다. 안방에 혼자 앉아서 거실에서 하는 이야기를 들어보니 남자 키는 여자보다 한 뼘 정도는 더 커야 나란히 걸어갈 때 잘 어울린다는 둥, 상체보다 다리가 길어야 멋있다는 둥, 머리가 너무 크면 보기 싫다는 둥, 뚱뚱한 남자는 싫다는 둥, 시시콜콜한 수다가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도둑이 제 발이 저리다고 했던가. 그들의 대화가 내 귀에는 ‘그래 너는 키도 작고, 다리도 짧고, 머리도 크고, 거기다가 살도 좀 쪘잖아’처럼 들리는 듯했다.사실 나는 키가 작다. 거기다가 키에 비해 팔다리도 짧다. 이런 탓에 바지나 셔츠를 살 때 문제가 많다. 허리둘레에 맞추어 바지를 고르면 길이를 한 뼘은 줄여야 하고 다리 길이에 맞추면 사면 엉덩이가 들어가지 않는다. 셔츠를 살 때는 더 참담하다. 아예 내 몸에 맞는 기성복이 없다. 짧고 굵은 목에 맞추어 셔츠를 고르면 소매 길이가 너무 길고, 짧은 팔에 맞추어 사면 목 단추를 잠글 수가 없다. 볼품없는 몸매가 내 탓은 아니지만, 옷을 살 때마다 남들보다 몇 갑절은 발품을 팔아야 한다. 슬그머니 문 쪽으로 더 가까이 다가가 들어보니 아내도 함께 깔깔거리고 있었다. “나는 남자 키는 다 큰 줄 알았어. 친정아버지도 크고 남동생도 크고 동아리 선배들도 다 크잖아. 그래서 내 신랑이 이렇게 작은 사람이 될 줄은 몰랐어.” 그러자 한 바탕 폭소가 나뒹굴어지고, 눈에 콩깍지가 씌었다는 둥, 신랑이 그렇게 좋으냐는 둥 즐거운 빈정거림이 이어졌다. 아내는 내 편이라 단단히 믿었는데, 은근슬쩍 친구들 틈에 끼어 내 험담을 하다니 이건 배신이다 싶었다. 그런데 그때 옷걸이에 걸려 있는 구김살 하나 없이 늘씬한 아내의 바지가 옷걸이에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옆에 조금이라도 더 길게 입으려다 그만 구두 뒤굽에 밟혀 밑단이 끝이 해어진 안타까운 내 바지가 축 늘어져 있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아내의 바지가 조금 더 길어 보였다. 눈을 믿을 수 없어 바지를 방바닥에 내려놓고 대어보니 아니나 다를까 아내의 바지가 조금 더 길었다. 나는 한 번으로는 패배를 인정할 수가 없어 장롱 속의 바지 몇 장을 더 꺼내어 비교해 보았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아내의 친구들이 돌아가기를 기다렸다가 나는 다짜고짜 아내에게 소리를 내질렀다.“당신 바지 옷걸이에 걸지 마!”내 다리 짧은 분풀이를 아내에게 했다. 아내는 그날, 영문도 모르고 내 바지 옆에 있는 자신의 바지를 말없이 걷어치웠다. 그 일이 있고 몇 달이 지난 어느 날이었다. 아내와 함께 백화점에 갔다. 아내는 구둣가게에 나를 데려가더니 뒷굽이 반 뼘은 되어 보이는 구두 한 켤레를 내어 놓았다. 세칭 말하는 키높이 구두였다. 아내는 나에게 그걸 신겨 놓고는 옆에 다가와 나를 올려다보며 미소를 지었다. 갑자기 높아진 구두굽이 어색해 허리를 굽혀가며 뒤를 살피는데 옆에 서 있는 아내의 구두가 눈에 들어왔다. 처녀 적 꼿꼿하게 버티고 섰던 아내의 높은 구두 굽이 오간데 없었고 엉덩이를 바닥에 대고 털썩 주저앉은 앉은뱅이 단화였다. 그 날 이후로 내 바지는 반 뼘 길어졌고, 아내의 바지는 반 뼘 짧아졌다. 이런 연유로 우리 부부의 바지는 길이가 얼추 비슷하다. 이것이 나는 타고난 키보다 반 뼘 더 크게 인생을 살고, 아내는 가질 수 있는 반 뼘의 키를 포기하고 사는 사연이다.  사랑은 받는 것이 아니라 주는 것이라는 말이 있다. 그렇지만 돌이켜 보면 양보하고 희생하는 쪽은 늘 아내였다. 결혼을 하면서 직장을 그만 두었고, 내가 건강을 잃고 서너 해 동안 투병 생활을 할 때는 나를 대신해 가족의 생계를 꾸렸다. 아내의 인생을 잘라내어 모자란 내 인생을 채운 셈이다. 나 아니었으면 성큼성큼 큰 걸음으로 뽐내며 살았을 사람인데, 잰걸음으로 종종거리고 아등바등 사는 것 같아 안쓰럽다. 늦은 밤 현관에 놓인 가족들의 신발을 본다. 번들거리며 뒤꿈치를 들고 선 내 구두와 아이들 신발 뒤에 엉덩이를 바닥에 대고 현관문 쪽에 밀려나 있는 아내의 단화가 보인다. 오늘 보니 아내의 단화는 아들의 운동화보다도 딸아이의 꽃 장식 구두보다도 키가 작다. 이번 주말에는 아내와 함께 백화점에 가볼까 한다. 오래 전에 아내가 나에게 한 것처럼 구둣가게를 들러야겠다. 아내가 나지막하게 코를 골며 자고 있다. 아내는 피곤한가보다. 나는 혼자 깨어 아내의 구두를 보며 상념에 잠겨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