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의 6·25전쟁영웅
심 일(함남 단천)육군소령
춘천지구 전투의 영웅! 육탄공격으로 적 자주포 격파

국가보훈처(처장 박승춘)는 6·25전쟁에서 육탄공격으로 적 자주포를 격파한 춘천지구 전투의 영웅! 심일 육군소령을 6월의 6·25전쟁영웅으로 선정했다.
심일 소령은 5명의 특공대를 지휘, 수류탄과 화염병을 들고 육탄공격을 감행, 적 탱크형(SU-76) 자주포를 격파하여 개전 초 북한군의 남진을 지연시켜 국군의 한강방어선 구축과 UN군 참전의 시간확보에 결정적으로 공헌하였고, 이후 전 전선에서 아군이 북한군의 전차와 자주포에 육탄공격을 감행하게 하는 기폭제가 됐다.
심일 소령은 1923년 함경남도 단천에서 태어나 서울대 사범대 재학 중 육군사관학교에 입교, 1949년 5월 육사 8기로 임관했다.
6 ·25전쟁발발과 함께 심일 소위가 소속된 6사단 정면에는 공격 당일 춘천 점령의 임무를 부여받은 북한군 2군단 예하 2사단이 배치되어 있었다. 화천-춘천 축선을 허물기 위해 적은 모진교 남쪽 강변일대의 고지를 점령해 교두보를 확보하기 위해 고탄리 부근의 아군에 맹렬한 포격을 가했고, 모진교에서 적의 공격을 저지하는데 실패한 6사단 7연대의 전방부대는 계획된 주저항선으로 철수해 전투태세에 들어갔다.
이때 6사단 7연대 1대대 대전차포중대 2소대장으로 북한강을 따라 춘천에 이르는 길목인 곰나루터에 57㎜ 대전차포 2문을 배치하고 있던 심일 소위는 07시경 시야에 적의 자주포가 포착되고 마침내 500m 전방까지 접근하자 사격명령을 내렸다. 선두 자주포에 모두 명중하였으나 끄떡없이 남진을 계속하자 심 소위는 부득이 춘천 북쪽의 옥산포로 철수하여 소대를 정비하고, 14시경 적의 자주포가 옥산포로 밀려들기 시작해 100m 전방까지 접근하자 다시 사격을 가했으나 이번에도 적의 자주포를 격파하는데 실패했다.
이에 심 소위는 측면을 통한 육탄공격만이 가능하다고 판단하고 5명의 특공조를 선발·지휘하여 수류탄과 화염병을 지닌 채 길목에 매복하였다. 마침내 적 자주포가 접근하자 자주포의 포탑으로 올라가 수류탄과 화염병을 투척, 3대의 자주포를 파괴하였다. 순식간에 자주포가 화염에 휩싸이자 당황한 적 승무원들은 자주포에서 내려 도주하기 시작했으나, 매복중인 대원들에 의해 모두 사살되었고 뒤따르던 자주포는 방향을 바꿔 북쪽으로 도주했다.
이와 같은 심 소위의 특공작전은 공격당일 춘천을 점령하려던 적의 기도를 좌절시켜 6사단이 춘천을 2일간 방어하는데 큰 역할을 하여, 결과적으로 국군의 한강방어선 구축과 UN군 참전의 시간확보에 결정적으로 공헌하였다. 또한 이 사실은 삽시간에 전군에 전파되어 북한군 전차와 자주포에 대한 공포심을 떨쳐버리고 이후 전 전선에서 아군이 북한군의 전차와 자주포에 육탄공격을 감행하게 하는 계기가 됐다.
이후 심일 소령은 충북 음성지구 전투, 경북 영천304고지 전투 등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웠으며, 7사단 수색중대장으로 근무하던 1951년 1월 26일 강원도 영월지역 전투에서 정찰 도중 총격을 받아 28세의 나이로 산화했다.
정부는 그해 10월 심 소령(당시 대위)에게 위관급 장교로는 최초로 태극무공훈장과 함께 1계급 특진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