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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이 본 예수님의 모습
2016년 10월 23일
아름다운 솔샘교회 최봉석 목사
세배대의 아들 요한은 그 형제 야고보와 함께 예수님을 가까이 따르는 친밀한 제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그는 예수께서 가시는 곳, 중요한 곳 예를 들면 예수님의 모습이 변모한 산이나, 십자가의 죽음을 앞에 두고 기도하러 가신 겟세마네 동산이나 언제나 예수와 함께 했다. 그는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의 품에 안겨있다시피 한 제자였다: “예수의 제자 중 하나 곧 그가 사랑하시는 자가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누웠는지라”[요 13:23]. 또한 예수께서 모친 마리아를 요한에게 부탁하는 것을 보면(요 19:26-27), 그 친밀감의 정도를 가늠할 수 있다: “예수께서 자기의 어머니와 사랑하시는 제자가 곁에 서 있는 것을 보시고 자기 어머니께 말씀하시되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하시고 또 그 제자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어머니라 하신대 그 때부터 그 제자가 자기 집에 모시니라”[요 19:26-27].
그런데 요한이 예수님의 모습을 보고 그 분위기에 압도되어 납작 엎드러져 죽은 자 같이 되었다: “내가 볼 때에 그의 발 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 같이 되매...”[계 1:17].
요한은 분명히 예수님을 보았다. 그런데 그 모습은 예전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머리에서 발끝까지, 심지어 주님의 음성까지 놀라울 정도의 신성을 경험했던 것이다. 요한이 본 예수님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12 몸을 돌이켜 나에게 말한 음성을 알아 보려고 돌이킬 때에 일곱 금 촛대를 보았는데 13 촛대 사이에 인자 같은 이가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 14 그의 머리와 털의 희기가 흰 양털 같고 눈 같으며 그의 눈은 불꽃 같고 15 그의 발은 풀무불에 단련한 빛난 주석 같고 그의 음성은 많은 물 소리와 같으며 16 그의 오른손에 일곱 별이 있고 그의 입에서 좌우에 날선 검이 나오고 그 얼굴은 해가 힘있게 비치는 것 같더라”[계 1:12-16].
요한이 가장 먼저 본 것은 일곱 금 촛대였다(12절). 그리고 요한은 일곱 금 촛대 사이에 계신 예수님을 보았다(13절). 여기서 일곱 금 촛대는 일곱 개의 가지가 있는 촛대, 즉 메노라(menorah)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 일곱 개의 촛대는 그리스도의 주위에 원형으로 배열된 것”(David E. Aune, Word Biblical Commentary Volume, 52A, 요한계시록 1-5, 452쪽)이라는 견해가 설득력이 있는 것은 촛대 사이에 계신다는 것이 ‘촛대 사이에 다니시는 예수님’(계 2:1)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일곱 촛대가 금으로 된 것은 그것의 귀중성이다. 금은 귀한 것이다. 미국이 오래 전에 금본위제를 포기할 정도로 금은 가치 있고 귀한 것이다. 하나님은 교회를 ‘금 촛대’로 여기신다. 과연 오늘날 교회는 하나님 앞에서 ‘금 촛대’인가? 또한 촛대는 빛을 비추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교회의 사명은 세상의 빛이 되는 것이다. 오늘날 교회는 어두운 세상을 환히 비추는 빛으로 존재하고 있는가? 세상 사람들은 교회를 빛으로 보고 있을까? 오늘 우리는 촛대 사이에 다니시는 예수님의 마음을 알아야 한다. 교회는 본질적으로 천상에 속한 교회이다. 그러나 교회는 세상에 있다. 그래서 예수님은 촛대 사이에 계시면서, 부지런히 다니신다.
예수님은 교회의 머리이시고, 주님이시다. 예수님은 성도들의 모임 가운데 함께 계신다. “볼 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 28:20]. 이것이 얼마나 우리에게 큰 위로가 되는가? 교회는 음부의 권세가 이길 수 없는 것이다. 그렇지만 사단은 끊임없이 교회를 흔들어대고 있다.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미혹하고 혹은 핍박하고 있다. 이기는 교회가 되고 싶다면, 마지막의 마지막 때를 살아가는 성도들은, 요한이 본 것처럼, 반드시 촛대 사이에 다니시는 예수님을 보아야 한다. 그리고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한다. 촛대 사이에 다니시는 예수님의 다스리심에 순종하는 성도들이 될 때, 이기는 교회가 되기 때문이다.
일곱 금 촛대는 일곱 교회를 의미한다고 예수께서 가르쳐주셨다. 이처럼 상징은 예수께서 가르쳐주신다. 예수께서 가르쳐주시지 않는 상징은 없다. 그러나 예수께서 가르쳐주시지 않는 것은 ‘비밀’(μυστήριον)이라는 말로 설명되었다. 예를 들면, 예수님 오른 손 안에 있는 일곱 별은 비밀에 속한 것이다. 그런데 예수께서 일곱 별이 상징하는 것이 일곱 교회의 사자들(ἄγγελοι)이라고 말씀해주셨다(계 1:20). 그러므로 요한계시록을 깨닫고자 함에 있어서 무엇보다 문자 그대로 이해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해석의 원칙임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어떤 상징이나 사건에 대한 설명들에 대해서 예수께서, 혹은 천사들이 해석해주지 않는 것은 굳이 해석하려고 하지 말고 넘어가는 것이 지혜로울 것이다.
내가 보고자 하는 사람이 누구인지를 아는 방법은 그 사람의 얼굴을 먼저 보면서 그 실체를 파악하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요한은 자신이 지금 보는 실체가 누구인지를 설명함에 있어서, ‘인자 같은 이’(13절)라는 말을 하고 있다. 예수님은 스스로에 대해서 ‘인자’(υἱὸς τοῦ ἀνθρώπου)라는 말을 즐겨 사용하셨다(마태 8:20, 9:6, 10:23, 11:19, 12:8, 12:32, 12:40, 13:37, 13:41, 16:13, 16:27, 16:28, 17:9, 17:12, 17:22, 19:28, 20:18, 20:28, 24:27, 24:30, 24:37, 24:39, 24:44, 25:13(사본의 차이), 25:31, 26:2, 26:24, 26:45, 26:64 등). 예수님은 ‘인자 같은 분’이 아니라, ‘인자’(the Son of Man)이시다. 그런데 왜 요한은 예수님에 대해서 ‘인자 같은 이’라는 말을 한 것일까? 학자들은 ‘인자 같은 이’라는 말의 배경에 대해서 다니엘 7장 13절을 제시한다: “내가 또 밤 환상 중에 보니 인자 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에게 나아가 그 앞으로 인도되매.” 사실 ‘인자 같다’는 말은 보는 사람의 주관적인 표현이다. 필자가 보기에 요한은 예수님이 자주 사용하셨던 개념, 인자라는 개념을 잘 알고 있었고, 또한 인자이신 예수께서 사실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밧모섬에서 환상 가운데 본 예수님의 모습은 예전에 요한이 친밀감을 가진 예수님의 모습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는 모습, 즉 상당히 위엄 있고 두렵기까지 한 신성함이 있는 모습이었기 때문에, 그러한 표현을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이제 요한이 본 예수님의 구체적인 모습을 살펴보자. 첫째, 예수님은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 계셨다(13절). 천사들은 몸이 없을까? 아니다. 다니엘 10장 5절 이하에 보면, 다니엘에게 보냄을 받은 천사의 모습은 눈도 있고, 팔과 발도 있는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었으며, 또한 무력한 다니엘을 손으로 어루만져 강한 힘을 불어넣기까지 했다. 천사는 그 모습이 어떤 모습이든지 간에, 신령한 몸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장차 우리들도 신령한 몸으로 변화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천사들이 옷을 입고 있는 것을 상상할 수 있다. 사실 그것은 성경의 기록이기도 하다: “흰 옷 입은 두 천사가 예수의 시체 뉘었던 곳에 하나는 머리 편에, 하나는 발 편에 앉았더라”[요 20:12]. 무엇보다 요한계시록 15장 6절에 보면, 일곱 재앙을 가진 천사들에 대한 설명이 있는데, 그들은 모두 “맑고 빛난 세마포 옷을 입고 가슴에 금 띠를 띠고”[계 15:6] 있었다. 한편 다니엘 10장 5절에 보면,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난 천사가 세마포 옷을 입었고, 허리에는 우바스 순금 띠를 띠었다는 말씀이 나온다. 우리는 이로써 예수님이 입으신 옷이 ‘발에 끌리는 맑고 빛난 세마포 옷’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가슴에 금띠를 띠었다. 한편 이 옷을 제사장의 의복으로 간주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Robert H. Mounce, The New International Commentary on the New Testament, REVELATION, 요한계시록, 홍성철 역, 생명의 말씀사, 87쪽). 왜냐하면, 일곱 재앙을 가진 일곱 천사들을 비롯해서 하늘의 군대들이 입은 세마포 옷이 제사장의 의복을 말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늘에 있는 군대들이 희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고 백마를 타고 그를 따르더라”[계 19:14]
요한이 인자이신 예수님을 인자 같은 분으로 본 것은 예수님의 직책의 변화를 보여준다고 보는 것이 더 좋다. 예수님의 초림 목적은 많은 사람을 죄에서 구원하는 것이며, 또한 히브리서 기자의 말씀대로 대제사장으로 오셨다(히 9:11). 그러나 다시 오시는 주님은 심판하시기 위해 오신다. 심판이 끝나야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입으신 옷은 일곱 재앙을 가진 천사들이나, 천군(天軍)들이 입는 옷과 동일한 의미를 가진다. 또한 세마포 옷은 장차 우리가 입게 될 옷이기도 하다: “그에게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도록 허락하셨으니 이 세마포 옷은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계 19:8]. 우리는 여기서 세마포 옷이 의를 나타내는 의복임을 알 수 있다. 정리하자면, 성도들이 입게 될 세마포 옷은 의로운 행실을 나타내며, 예수님과 하늘의 천군천사들이 입는 세마포 옷은 불의에 대한 정의로운 심판을 의미하는 것이다.
예수님이 세마포 옷을 입고 금띠를 띠었다고 했는데, 금띠는 금 촛대와는 의미가 다르다. 일곱 금 촛대가 세상에 있는 교회를 상징하는 것은 세상에서의 금의 가치와 귀중성을 뜻하지만, 예수님이 금띠를 띠신 것은 하늘에 있는 일반적인 물질을 말하는 것이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의 길이 맑은 유리 같은 정금이듯이(계 21:21), 옷에 띠를 띠게 하기 위해서 정금으로 만들어진 띠보다 더 좋은 것은 없을 것이다. 띠가 어떤 재질로 만들어졌느냐가 중요하기 보다는, 옷을 입고 띠를 띤 목적이 중요한 것이다.
띠에 대한 표현이 출애굽기에 유월절을 배경으로 가장 먼저 나온다. “너희는 그것을 이렇게 먹을지니 허리에 띠를 띠고 발에 신을 신고 손에 지팡이를 잡고 급히 먹으라 이것이 여호와의 유월절이니라”[출 12:11]. 출애굽기의 유월절을 배경으로 하는 띠를 띠라는 표현은 하나님과 애굽의 바로와의 전쟁을 앞두고 취해진 조치였다. 급히 먹어야 할 유월절, 하나님이 레디 액션하면 곧바로 행동을 취해야 할 긴급한 상황에서 띠를 띠는 것의 중요성을 발견하게 된다. 한편 제사장이 입는 거룩한 옷에도 띠가 포함되는데, 그 용도는 ‘매는’데 있었다(출애굽기 28장). 사도 바울은 골로새서 3장 14절에서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고 했다. 우리가 허리띠를 왜 하는가? 바지가 흘러내리지 않도록 고정시키는 것이다. 의복을 온전케 하는 것, 옷을 단단히 고정시켜주는 것, 어떤 일을 수행하기에 지장이 없도록 온전케 하는 것이다. 또한 바울은 에베소서 6장 14절에서 “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 띠를 띠고”라고 말씀하셨다. 영적전쟁을 하는데 있어 진리의 허리 띠가 중요함을 가르쳐 주셨다. 일곱 재앙을 가진 천사들이 금띠를 띤 것도 영적전쟁을 온전하게 수행하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옷을 입고 띠를 띠고 계신 것은 다시 오실 예수님의 모습을 보여준 것으로, 심판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영적 전쟁을 하기 위함인 것을 알 수 있다.
예수님의 머리털을 보면, 흰 양털처럼 희다고 하였다(14절). 그런데, 다니엘 7장 9절에 보면, 옛적부터 계신 분이 보좌에 앉으신 장면이 나오는데. “그의 머리털은 깨끗한 양의 털 같고”라는 말씀이 나온다. 후자는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표현이라면, 전자는 그의 아들,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에 대한 표현이다. 삼위일체 하나님을 생각할 때, 성부와 성자는 같은 모습인 것이 당연할 것이다. 학자들은 예수님의 머리털이 흰 것에 대해서 많은 의미부여를 하려고 했다. 로버트 마운스는, 흰 머리털을 인자의 영원성을 암시하는 것으로 해석하는 고대의 주석자들의 견해와는 달리, 흰 머리는 존경을 의미한다고 말한다. 지혜와 위엄의 개념을 나타낸다는 것이다(88쪽). 한편 아우내 또한 “고대 근동의 노인들에 대한 태도와 일치하는 이 은유는 존경, 영예, 지혜, 높은 사회적 신분들과 같은 개념들을 전달한다”고 말한다(461쪽). 그러나 시간의 제한을 받는 나이 든 사람의 흰 머리의 의미를 영원하신 하나님과 비교하는 것은 옳지 않은 것 같다. 그저 래드(G. E. Radd)처럼, 하나님의 신성을 의미하는 것으로만 보는 것이 좋을 듯하다(반즈 신구약성경주석, 요한계시록, 이남종 역, 크리스챤 서적, 38쪽).
요한이 본 예수님의 눈은 불 꽃 같았다. 즉 요한은 예수님의 눈에서 불이 활활 타오르는 것을 본 것이다. 불꽃 이미지는 무엇보다 무언가를 불사르는 것을 말한다. 하지만, 예수님의 눈에서 불레이져(fire laser) 혹은 파이어빔(fire beam) 같은 것이 나와 대적들을 불사르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 보다는 보는 눈 이미지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좋겠다. 즉 예수님은 불 꽃 같은 눈으로 보고 계신다. 무슨 뜻인가?
켄들 이슬리(Kendell H. Easley)는 모든 것을 보고 계시는 예수님에 대해서, 그것이 ‘예수님의 무소부재하심’을 가리킨다고 말한다(HOLMANN New Testament Commentary, Revwlation, 요한계시록, 디모데 출판사, 37쪽). 사실 예수님의 불꽃같은 눈을 무소부재로 설명하는 것은 맞는 말이기도 하면서 틀리기도 하는 말이다. 틀리다는 말은 예수님이 승천 하셨으면, 이 세상에는 계시지 않는다는 말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모든 것을 감찰하시고 아신다. 사실 모든 것을 보시고 아신다는 뜻에서 사실 거기에 있는 것과 같다는 뜻에서 무소부재를 말하는 것이다.
요한계시록 2장에 보면, 두아디라 교회에 계시된 예수님의 모습 가운데 하나가 ‘불 꽃 같은 눈’이다. “두아디라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그 눈이 불 꽃 같고 그 발이 빛난 주석과 같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르시되”(18절). 우리는 왜 두아디라 교회에 계시된 예수님의 모습 중에 불 꽃 같은 눈을 말하고 있는 것일까에 주목할 필요가 있겠다. 그런데 그 설명이 20절에서부터 23절까지 나온다: “20 그러나 네게 책망할 일이 있노라 자칭 선지자라 하는 여자 이세벨을 네가 용납함이니 그가 내 종들을 가르쳐 꾀어 행음하게 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는 도다 21 또 내가 그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었으되 자기의 음행을 회개하고자 하지 아니하는 도다 22 볼 지어다 내가 그를 침상에 던질 터이요 또 그와 더불어 간음하는 자들도 만일 그의 행위를 회개하지 아니하면 큰 환난 가운데에 던지고 23 또 내가 사망으로 그의 자녀를 죽이리니 모든 교회가 나는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는 자인 줄 알지라 내가 너희 각 사람의 행위대로 갚아 주리라.” 예수님은 우리의 뜻과 마음을 살피신다. 그리고 우리의 행위를 지켜보고 계신다. 예수님은 불 꽃 같은 눈으로 교회를 감찰하고 계신다. 예수님의 불 꽃 같은 눈을 피할 수 있는 교회는 없다. 예수님의 책망을 들을 때, 깨닫고, 회개의 기회를 붙들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화가 임하는 것이다.
래드는 그것에 대해서 ‘모든 것을 감찰하시는 그리스도의 전지성을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하면서도, 계시록 19장 12절의 “그 눈은 불 꽃 같고”라는 말씀과 관련하여 ‘거룩하지 않은 모든 것에 대한 거룩한 진노와 결합된 그리스도의 전지성을 상징한다’고 결론을 내렸다(38-39쪽). 예수께서 모든 것을 보시지 않는다면, 정의로운 심판이 될 수 없을 것이다. 숨겨진 모든 죄를 찾아내는 예수님의 눈이다. 그 누구도 예수님 앞에서 죄를 숨길 수 없다. 죄를 버리지 않으면, 회개하지 않으면 망하는 것이다. 심판을 피할 길이 없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눈을 불꽃 이미지로 표현한 것은 모든 사람의 뜻과 마음, 그리고 행위를 온전하게 감찰하시는 예수님의 전지성을 통해서 모든 죄와 악을 하나도 남김없이 정의롭게 심판하시는 것을 보여준다.
그 다음에 요한이 본 것은 예수님의 발이다. 예수님의 발은 ‘풀무 불에 단련한 빛난 주석’ 같았다고 말한다(15절). 두아디라 교회에 계시된 예수님의 모습에 대한 설명가운데 나온다. “두아디라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그 눈이 불꽃 같고 그 발이 빛난 주석과 같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르시되”[계 2:18]. 아우내는 “빛난 주석과 같은 발”이라는 표현은 다니엘 10장 6절에 나오는 “그 팔과 발은 빛난 놋과 같고”를 암시한다고 말한다(462쪽). 요한이 신에 대한 말을 하지 않는 것을 보면, 요한은 확실히 예수님의 맨발을 보았으며, 그 모습은 빛나는 주석 같은 것이었다(맨발에 대한 논의에 대해서 아우내, 462쪽 참고). 빛난 주석으로 번역되는 헬라어 칼코리바노(χαλκολιβάνῳ)는 요한계시록에만 2회 나오는 개념으로, 그것은 놋쇠, 구리, 청동을 뜻하는 칼코스(χαλκός)와 향, 유향을 뜻하는 리바노스(λίβανος)의 합성어이다. 아우내는 “칼코스는 구리와 놋(아연과 구리의 합금)에 적용되지만, 청동(bronze, 주석과 구리의 합금)에 가장 흔하게 적용된다고 말한다(463쪽, 리바노스와 관련해서는 463쪽 참고). 즉 예수님의 발이 사람들의 발과 같지는 않았다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풀무 불에 단련한 빛난 주석’이라는 표현은 어떤 의미일까? 발의 이미지는 무엇보다 두 발로 서는 것이다. 계시록 10장에는 힘 센 천사가 한 발로 땅을 한발로 바다를 밟고 선 것에 대한 설명이 나온다(계 10:2, 5, 8). 예수님도 일곱 촛대 사이에 서 계셨으며, 또한 일곱 촛대 사이를 다니셨다.
하지만, 본문에서 발을 ‘빛난 주석’에 비유한 것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예수께서 단순히 서 계신 것을 말하고자 함이 아닐 것이다. 발은 서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지만, 또 하나의 특징이 있다. 그것은 밟는 것이다. 요한계시록 19장 15절에 보면 “그의 입에서 예리한 검이 나오니 그것으로 만국을 치겠고 친히 그들을 철장으로 다스리며 또 친히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의 맹렬한 진노의 포도주 틀을 밟겠고”라는 말씀이 나온다. 한편, 로버트 마운스는 풀무 불에 단련한 빛난 주석 같은 발은 예수님의 힘과 안정성을 나타낸다고 설명한다(89쪽). 그것은 예수님의 밟아 부숴버리는 ‘강한 힘’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미가서에는 우리의 죄악을 발로 밟으시는 주 하나님에 대한 말씀이 나온다. “다시 우리를 불쌍히 여기셔서 우리의 죄악을 발로 밟으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깊은 바다에 던지시리이다”[미 7:19]. 또한 하박국은 하나님의 진노로 세상 여러 나라들을 밝으셨다고 기록한다. “주께서 노를 발하사 땅을 두르셨으며 분을 내사 여러 나라를 밟으셨나이다”[합 3:12]. 그리고 말라기 4장 3절은 우리가 악인을 밟을 것이라고 말한다. “또 너희가 악인을 밟을 것이니 그들이 내가 정한 날에 너희 발바닥 밑에 재와 같으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말 4:3]. 회개하면 우리의 죄악을 발로 밟으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깊은 바다에 던지시지만, 만일 회개하지 않으면 우리는 큰 환난 가운데 던져질 것이다. 회개하느냐 회개하지 않느냐에 따라서 죄가 밟힐 것인지 아니면 우리가 밟힐 것인지가 결정된다. 주님의 발은 교회들과 함께 계시는 발이면서, 동시에 불 꽃 같은 눈으로 죄를 찾아내어 그것을 밟으시는 주님이시다. 그러기에 주님의 발이 얼마나 강한지 알 수 있다. 정리하면, 예수님의 발은 일곱 촛대 사이를 다니시는 발이며, 동시에 죄악을 밟으시는 발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성도라 할지라도 회개하지 아니하면, 그 죄로 인해 짓밟히게 된다.
요한은 그 다음에 주님의 음성을 들었다. “그의 음성은 많은 물 소리와 같으며”(15절). 에스겔43장 2절에 보면 하나님의 음성이 많은 물소리 같다라는 표현이 나온다. “이스라엘 하나님의 영광이 동쪽에서부터 오는데 하나님의 음성이 많은 물 소리 같고 땅은 그 영광으로 말미암아 빛나니.” 계시록에 보면 요한이 하늘에서 나는 소리를 들을 때 많은 물 소리 같다고 여러 번 말했다. “내가 하늘에서 나는 소리를 들으니 많은 물 소리와도 같고 큰 우렛소리와도 같은데 내가 들은 소리는 거문고 타는 자들이 그 거문고를 타는 것 같더라”[계 14:2]. “또 내가 들으니 허다한 무리의 음성과도 같고 많은 물 소리와도 같고 큰 우렛소리와도 같은 소리로 이르되 할렐루야 주 우리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가 통치하시도다”[계 19:6]. 이것은 요한이 들을 때 사람들이 듣기에 평범한 사람의 음성이 아니었던 것이다. 알아들을 수 있는 소리이긴 한데 무언가 특별한 소리처럼 들렸는데, 표현하자면, 그것이 마치 많은 물 소리 같았다는 것이다. 래드는 그것에 대해서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뜻하는 말이라고 간단히 설명한다(15절), 아마도 래드는 음성이 말씀이고, 주의 말씀은 능치 못하심이 없기 때문에 그러한 설명을 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을 해본다. 한편 마운스는 경외감을 거대한 폭포의 능력을 연상시킨다고 말한다(89쪽). 그것은 이 세상에 속한 음성과 천상에 속한 음성의 차이일 것이다. 따라서 주님의 음성이 그저 친근감 있고, 편안하게 들려지는 사람의 음성이 아니라, 무언가 신비롭고 두려운 마음이 들게 하는 신적인 음성으로 들렸을 것이다.
그리고 나서 요한이 본 것은 예수님의 오른 손에 있는 일곱 별이다. 일곱 별은 비밀에 속한 것이지만, 예수께서 일곱 별들은 일곱 교회의 사자들이라고 가르쳐주셨다. 하지만, 구체적으로 사자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파악하는 것은 쉽지 않다. 비밀이기에 많은 견해들이 대두되어 복잡하기만 하다. 예수께서 비밀이라고 말씀하신 것을 굳이 파헤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단지, 일곱 별이 예수님의 오른 손에 있다는 말의 의미를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겠다. 직역하면 예수께서 일곱 별을 오른 손에 가지고 계셨다는 뜻이다. 일곱 별이 예수님의 오른 손 안에 위치한 것인데, 그 의미는 예수님이 일곱 별을 소유하고 계신다는 뜻일 수도 있고, 예수님이 오른 손으로 일곱 별을 붙들고 계신다는 뜻일 수 있다. 그렇다면 다시 돌아와서, 예수님이 일곱 촛대 사이를 다니시는 것으로 본다면, 일곱 교회의 사자들을 천상의 존재로 보는 것보다는 지상의 존재로 보는 것이 더 나을 듯하다. 왜냐하면, 일곱 교회의 사자가 천상의 존재라면, 반드시 이기는 교회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주께서 택하시고 세우신 종들(목회자, 감독 등)로 보는 것이 좋겠다. 이길 수도 있고, 질수도 있는 연약함을 가진 주의 종들, 그래서 주께서 오른 손으로 붙들어주시지 않으면 안 되는 종들 말이다. 주님의 오른 손 안에 있는 별들... 이 얼마나 위로와 격려가 되는 말씀인가! 하지만, 동시에 두려움을 주는 말씀이기도 하다.
요한이 그 다음에 본 것은 예수님의 입에서 좌우에 날 선 검(ῥομφαία)이 나오는 모습이었다(16절). “롬파이아(ῥομφαία)라는 용어는 보통 자르기도 하고 찌르기도 하는 장검을 언급하여 사용된 반면에, 마카이라(μάχαιρα)는 단도를 나타내는데 사용되었다”(D. E. Aune, 466쪽). 아우내는 “그리스도의 입에서 검이 나온다는 표현은 검이 말, 즉 그리스도가 하는 말을 나타내는 은유임을 시사한다. 말은 종종 칼과 비교되며, 날카로움에 대한 강조는 말의 효력 또는 권능을 나타낸다”고 말한다(467쪽). 히브리서 4장 12절은 하나님의 말씀과 좌우에 날선 검을 비교하여 설명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아우내의 설명은 옳다. 사실 그러한 예수님의 모습은 버가모 교회에 계시된 예수님의 모습이었다. “버가모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좌우에 날선 검을 가지신 이가 이르시되”[계 2:12]. 버가모 교회를 향하여 예수께서 책망하실 때, 그 중요한 내용은 바로 교훈의 문제였다. 첫째는 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었고, 둘째는 니골라당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었다. 회개하지 아니하면, 예수께서 그 검으로 친히 그들, 회개하지 않는 자들과 싸우실 것이다(계 2:16). 한편 계시록 19장에 보면, 예수께서 그 검으로 만국을 치실 것이고, 대적들이 그 검에 의해 죽임을 당하게 된다는 말씀이 나오고 있다. “그의 입에서 예리한 검이 나오니 그것으로 만국을 치겠고 친히 그들을 철장으로 다스리며 또 친히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의 맹렬한 진노의 포도주 틀을 밟겠고... 그 나머지는 말 탄 자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검에 죽으매 모든 새가 그들의 살로 배불리더라“[계 19:15, 21]. 그래서 마운스는 ”19장은 그리스도의 재림을 묘사하는데, 그의 입에서 날카로운 검이 나온다. 이 묘사에서 검은 저항할 수 없는 거룩한 심판의 능력을 상징한다... 궁극적으로 승리할 것은 바로 그리스도의 말씀이다“라고 말한다(90쪽). 즉 예수님의 입에서 나오는 좌우에 날선 검은 교회를 향해서는 잘못된 교훈과 싸우시는 예수님의 진리의 말씀을 나타내며,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들, 끝내 회개하지 않는 자들에 대해서는 무섭게 심판하시는 말씀을 나타낸다.
요한이 마지막으로 본 것은 예수님의 얼굴이 해가 힘 있게 비치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16절). 이것에 대해서 래드는 “승천하신 그리스도의 영광에 대한 요한의 표현방식”이라고 말한다(39쪽). 한편 마운스는 “해가 힘있게 비취는 것 같은 높이 들린 그리스도의 얼굴을 묘사함으로써 절정에 이른다”고 말하면서도, 옵시스(ὄψις)라는 헬라어가 3회 사용되었는데, 요한복음에서는 얼굴을 뜻하기도 하고(요 11:44), 외모를 뜻하기도 하기 때문에(요 7:24) “근본적으로는 얼굴을 가리키나 그것에만 제한시켜서는 안된다”고 말한다. 그는 변화산에서 그 모습이 변형된 예수님을 예로 들면서 “그리스도에게는 그 모습 전체를 둘러싸고 있는 어떤 광채가 있었다”고 말한다(90쪽). 한편 아우내는 얼굴이 해같이 비치는 것에 대해서 “신의 현현 또는 천사의 현현에서 존엄, 신성 또는 초월성을 나타내는 은유”로 자주 사용된다고 말하면서, 그는 이사야 5장 30절 “빛은 구름에 가려서 어두우리라”는 말씀을 참고하여, “힘 있게”라는 말이 구름에 가리지 않은 햇빛을 나타낸다고 설명한다(468쪽). 그러나 요한이 본 예수님의 모습에서 구름이 가리지 않아서 해가 힘 있게 비치는 것 같다고 말한 것이 아니다. 정리하면, 예수님의 얼굴이 해가 힘 있게 비치는 것 같다는 말은 부활 승천하신 예수님의 거룩한 영광, 즉 존귀하신 예수님의 영광의 능력을 말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