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트 체육을 거쳐 K리그 선수가 될 수 있는 확률은 얼마나 될까. 유럽 축구를 보며 눈이 높아진 우리로서는 K리그에서 뛰는 선수들이 그리 대단해보이지 않겠지만 따지고 보면 대단한 사람들이다. 수만 명에 이르는 축구선수 중 K리그에서 뛰는 이들은 500~600명뿐이다. 공부로 치면 서울대학교에 가는 것보다 희박한 확률이다. 김병지처럼 마흔을 넘긴 나이에도 K리그에서 활발한 활약을 한다는 건 확률적으로만 보면 기적에 가깝다.
흔히들 엘리트 체육을 거치면서 축구선수로 성공하는 꿈을 꾼다. 하지만 축구선수로 성공하려면 타고난 재능과 상상을 초월하는 노력, 거기에 운까지 따라줘야 한다. 실제로 고등학교 때까지 축구선수로 활동한 학생 중 약 60%는 대학 진학에 실패한다.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책상에 앉아 본 적이 없는 ‘무늬만 학생’인 이들이다. 이들은 공부를 해 본 적도 없고 학창 시절 추억도 없다. 2008년 국내 주요 언론에 보도된 평균 석차 백분율을 보면 운동하는 학생들의 고등학교 석차 백분율 성적은 100명 중 82등이었다. 그들은 그렇게 사회로 나와 방황한다.
학원 축구의 어두운 단면
대한축구협회가 이런 문제점을 보완하기 위해 야심차게 시작한 초중고 주말리그제가 3년째를 맞았다. 어릴 적부터 축구에 ‘올인’하는 게 아니라 다양한 진로 선택의 기회를 주기 위해 ‘공부하는 축구선수’를 키운지 벌써 3년이 됐다. ‘운동기계’에서 공부와 축구를 병행하는 ‘학생’이 된 그들은 얼마나 많이 달라졌을까. 또 초중고 주말리그는 얼마나 정착이 됐을까. 오늘은 듣기만 해도 배부르고 행복해지는 소식을 전하려 한다.
그동안 학원 축구는 이벤트성 대회에 집중했다. 특정 시기에 특정 지역에 몰려 토너먼트 방식으로 대회를 치르는 게 전부였다. 단기전이다보니 선수들의 경험 축적과 실력 향상은 당연히 뒷전이었다. 구타가 만연했고 판정 문제가 수도 없이 불거졌다. 심판 매수도 알게 모르게 일어났다. 어떻게든 오늘 경기를 이겨 성적을 내야 하는 게 그들의 과제였다. 대회 성적은 곧 상급 학교 진학의 가장 중요한 척도가 됐다. 경기가 끝나면 판정에 불만을 품은 학부형들이 심판을 찾아가 따지는 일도 부지기수였다.
이에 대한축구협회는 개혁의 칼을 들었다. 정규수업 시간 중 훈련 및 축구대회 참가를 금지시키고 합숙훈련도 전면 폐지했다. 대신 수업이 없는 주말에 리그를 실시하도록 했다. 1년에 무려 대한축구협회 예산이 100억 원 이상 드는 초대형 프로젝트였다. 2009년 59개 권역에서 576개 팀이 초중고 주말리그에 참가했지만 일각에서는 “시기상조다”, “유예기간이 필요하다”는 의견도 나왔다. 익숙했던 학원 축구 시스템을 하루아침에 갈아엎는 것에 대한 걱정이었다.
지난해 3월 서울 종로구 계동 중앙고등학교에서 열린 2010 전국 초중고 축구리그 개막전에서 중앙고와 대동세무고의 경기 모습. 경기는 물론 양 팀 응원전도 뜨거웠다. (사진=연합뉴스)
주말리그, 공부와 축구 병행을 위한 선택
하지만 리그가 시작되니 이는 기우에 불과했다. 평일 수업시간에는 일반 학생과 마찬가지로 공부를 하고 방과 후 훈련을 한 뒤 주말에 경기를 치르는 시스템이 서서히 정착됐다. 학교에서는 축구부 선수 가운데 성적이 부진한 학생이 있으면 아예 리그 출전 자체를 금지하거나 따로 보충수업을 시키는 특별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지난해 인천 남동초교 2학기 중간고사에서는 전교 10등 중 세 명이 축구부 학생이었고 안양 덕천초교에서는 축구부 학생이 만점으로 전교 1등을 차지하기도 했다. 경희고등학교 김현은 공부와 축구를 병행해 서울대학교 체육교육학과에 합격했다.
축구부 운영비용도 줄었다. 전국대회가 크게 줄면서 고등학교 축구부 기준으로 1년에 3천만 원 정도를 아낄 수 있게 됐다. 이 비용은 겨울 동계훈련에 투입된다. 권역별 리그 우승팀끼리 겨루는 왕중왕전 참가 팀들의 체제비는 대한축구협회가 전부 지원한다. 주말 방과 후 경기에 재학생과 동문 선배, 학부모들이 벌이는 열띤 응원전도 새로운 볼거리가 됐고 학교 내 밴드부와 힙합 동아리, 풍물패 등이 선보이는 축하 공연도 이제는 초중고 주말리그의 익숙한 풍경이 됐다. 단순한 축구 경기를 넘어 학교와 지역 사회의 축제가 되고 있는 셈이다.
팀이 늘어나고 있다는 점도 기분이 좋다. 2002년 한일월드컵 이후 급격히 늘어났던 초중고 팀은 2004년 580개로 절정에 올랐다 이후 하락세로 접어들었다. 하지만 2008년 532개로 다시 팀이 늘더니 지난해에는 638개, 올해에는 660개 학교가 축구부를 운영하고 있다. 지난해 609개 팀이 참가했던 초중고 주말리그는 올해 무려 630개 팀(초등학교 306곳, 중학교 187곳, 고등학교 137곳 등)이 참여해 5,677경기를 치르는 대장정에 돌입했다. 지난해 실시한 갤럽 조사에서 지도자 82.4%, 학부모 81.9%가 주말 리그제에 대해 긍정적인 평가를 했다.
상문고 축구부의 아름다운 도전
특히나 초중고 주말리그에서 아름다운 도전을 하는 학교가 있어 소개하려 한다. 서울 상문고등학교에 관한 이야기다. 상문고는 보인고와 중동고, 언남고, 배재고 등 축구 명문학교와 함께 초중고 주말리그 고등부 서울 동부 권역에 속해 있다. 지난 시즌 4득점 242실점으로 18전 전패하며 10개 팀 중 최하위에 머무르고 말았다. 골득실에서 앞서기 위해 상대팀은 최약체 상문고를 상대로 봐주는 법이 없다. 하지만 상문고 선수들은 항상 밝은 표정으로 이야기한다. “주말마다 축구를 할 수 있어 행복해요. 다음 경기에서는 꼭 이기고 싶어요.”
상문고는 흔히 말하는 ‘강남 8학군’에 속해 있다. 학구열이 뜨겁기로 유명한 지역이다. 지난해 초 처음 축구부를 만든다는 소식에 한 학년에서 50명이 넘는 학생이 지원을 했다. 물론 선수로서의 경험은 일천한, 반에서 공 좀 찬다는 친구들이었다. 이 중 30명을 추려 축구부를 창단했고 아시아축구연맹(AFC) A급 지도자 자격증을 소지한 김응규 코치를 데려와 학생들에게 체계적으로 축구를 가르쳤다. 재미있는 사실은 축구선수로서의 재능만 선발 기준으로 둔 게 아니라 성적까지 반영해 선수를 뽑았다는 점이다. 이들은 학교 수업에 100% 참여하고 수업이 끝난 뒤 매일 한 시간씩 훈련한다.
상문고 축구부에는 자체 조항이 있다. 지난 번 시험보다 석차가 떨어지면 경기에 나설 수 없다는 조항이다. 다른 학교 축구부에서 뛰다 적응하지 못해 상문고로 전학 온 전정호군은 성적이 바닥권이었지만 1학기 기말고사에서 547명 중 186등을 차지하는 놀라운 발전을 이뤘다. 이들에게 경기 결과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함께 모여 축구를 할 수 있고 축구를 더욱 열심히 하기 위해 공부에도 집중하는 이 환경이라면 더 바랄 게 없다. 만약 초중고 주말리그가 없었다면 상문고 축구부처럼 즐겁게 공 차는 학생들은 찾아볼 수 없었을 것이다. 상문고는 올 해에도 현재 4전 전패 무득점 38실점했지만 언제나 주말마다 웃으며 축구를 한다.
‘공부하는 축구선수’는 계속 키워야 한다
아직 초중고 주말리그는 가야할 길이 멀다. 일요일 경기를 치르게 되면 학생들은 평일 수업과 토요일 경기 준비, 일요일 경기 이후 또 다시 월요일부터 수업을 받게 돼 휴식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공식적으로는 합숙이 폐지됐다고 하지만 학교 밖에 마련한 숙소에서 편법적으로 합숙을 하는 사례도 있다. 또한 방과 후 훈련을 위한 조명시설이나 학교 인조 잔디 운동장 설치, 지도자 처우 개선과 같은 남은 과제도 앞으로 정부와 축구계가 함께 풀어나가야 한다. 과거처럼 주말리그 성적으로 특례입학 기준을 마련한다면 주말리그가 과열될 가능성도 있다. 주말리그가 즐거운 건 경기 결과와 성적에 대한 부담감 없이 신나게 축구를 즐길 수 있다는 데 있다.
초중고 주말리그가 실시된다고 해 당장 유럽 무대에서 뛸 재목이 나오는 건 아니다. 초중고 주말리그는 어쩌면 축구로 성공의 길을 걷는 이보다는 축구로 실패한 이들의 인생까지 책임져주는 시스템이다. 성공한 축구선수 한두 명에 목매는 시스템에서 탈피해 이처럼 축구를 사랑하는 모든 이가 즐길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됐다는 점이 무척 뿌듯하다. 우리는 지금 박지성을 보며 열광하고 있지만 한 명의 박지성이 나오기까지 실패한 수만 명의 어린 축구 선수들은 잊고 살았다. 이제는 ‘공부하는 축구선수’를 키워 축구를 즐기는 이들 모두가 행복해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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