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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
우리 집은 부유했다. 부족한 것 없이 자랐고, 행복한 나날들을 보냈다. 그래, 그건 한때였다. 7살이 되던 날. 잘 나가던 아버지의 사업은 하루아침에 무너져 버렸다. 더 성공할 수 있을 거라는 욕심이 생겨 빚을 내고, 또 빚을 내고. 그렇게 여러 사업에 더 뛰어드셨다. 그것이 시발점이었다. 어머니는 능력 있고, 어디든 손을 벌리면 무수한 돈을 가져다주는 아버지를 굳게 믿고 계셨다. 그래서 어마어마한 빚을 안게 되어도 어떠한 의견도 내놓지 않았다.
사실 나는 그때의 부모님을 원망한다. 원망하지 않는 게 더 이상하겠지. 그때 말리지 그랬어. 아버지를, 말리지 그랬어. 그랬더라면 내가 힘든 학창시절을 보내지 않았어도 됐을 텐데. 철이 없던 나는 매일매일 부모님을 원망했다.
그렇게 아버지의 사업이 망하고, 우리 가족은 막대한 빚을 떠안게 되었다. 그 때문에 매일매일 알코올에 빠져 술을 마시고 다니는 아버지는 집에 들어오지 않는 날이 많았다. 들어오는 돈이 없자, 어머니는 결국 손발을 걷고 세상 밖으로 나오셨고 식당일, 목욕탕 청소, 일일 부업까지. 안 해본 일이 없었다. 혼자서 돈을 버는 게 쉽지만은 않았다. 어머니는 항상 새벽 늦게 들어오셨고, 나는 한창 부모님의 사랑을 받아야 할 나이에 혼자 밥을 해먹고, 혼자 잠을 청하곤 했다. 어머니는 항상 나에게 미안해하셨다. 하지만 난 항상 괜찮다고 했다. 힘들다고 한다면, 어머니는 더 힘들어할 게 뻔하니까. 나라도 짐을 덜어드리고 싶어서 거짓말을 하였다. 그 어린 나이에.
" 용선아, 엄마가 소시지 사 왔어. 쨘! "
어느 날, 어머니는 검은 비닐봉지를 제 눈앞에 보여주었다. 그 안에는 조그마한 소시지가 하나 들어있었다. 봉지째로 들어있는 것도 아닌. 달랑 하나. 하지만 난 그게 좋다고 또 앞니 빠진 이를 보이며 환하게 웃어 보였다. 며칠 전부터 고기가 먹고 싶다는 칭얼에 소시지를 사오신 거였다. 집 형편에 고기를 먹는다는 건 크나큰 사치였으니까. 나는 그런 어머니의 마음을 알고 있었다. 오랜만에 일찍 집에 들어오신 어머니는 다 낡아빠진 프라이팬에 기름을 두르고 소시지를 볶아 주었다.
그날, 집안 가득 퍼졌던 고소한 향을 아직도 난 잊지 못한다. 비록 원하던 고기는 아니었지만, 소시지만으로 감지덕지해야만 했던 나는 어머니와 한상에 둘러앉아 야금야금, 아끼면서 소시지를 먹었다. 물론 소시지는 전부 내 배 안으로 들어갔다. 어머니는 자긴 괜찮다며 소시지 전부를 제 밥그릇에 올려놓았기 때문이었다. 울컥이는 마음을 애써 부여잡고 꾸역꾸역 밥을 집어넣는데, 얼마나 슬펐는지 지금 생각해도 가늠이 되지 않았다. 결국 나는 그날 밤에 숨죽여 울음을 토해냈다. 그렇게 맛있던 소시지를 먹고도 기쁘지가 않았다. 이를 깨물곤 이불을 부여잡고 끅끅 대는데, 주무시던 어머니가 들을까 봐 모든 슬픔을 가슴 안으로 삼켜내야만 했다.
그렇게 하루하루, 눈물로 지새울 때 즈음에 또다시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들려왔다. 며칠 전부터 시름시름 앓던 어머니는 결국 몸져 누우셨고 단순 몸살일 줄 알았는데 상태가 심각해지자 나는 술을 마시고 밤늦게 들어온 아버지에게 엉엉 울며 매달렸다. 아빠, 아빠. 엄마가 많이 아파요. 근데 안 나아요. 제가 열심히 곁에 있어줬는데 낫질 않아요. 어떡해요. 눈이 탱탱 부을 정도로 흐느끼던 나를 아버지가 멍하니 바라보았다. 어렸지만 항상 강인한 모습을 보여줬고, 울지 않았던 내가 처음으로 다리를 붙잡고 서럽게 우니 아버지도 꽤나 충격이 컸었다. 그때서야 아버지는 허겁지겁 어머니의 상태를 보셨고, 다음날이 돼서야 근처 동네 병원에 들릴 수 있었다.
" 왜 이제서야 오셨어요. "
의사는 어머니의 상태를 확인하더니 짙은 한숨을 여러 번 내쉬었다. 손에 식은땀이 빼질 빼질 배어 가는 것을 느꼈지만 애써 침착함을 유지하고 있던 아버지와 나는 그다음으로 이어지는 말에 온몸이 사시나무처럼 떨려왔다.
" 스트레스성 위염이 위암으로 이어졌습니다. "
위암, 위암. 어린 나는 그 단어를 몇 십 번이나 읊조렸는지 모른다. 암이라는 병이 나쁜 거라는 걸 충분히 알고 있었다. 옛날에 TV에서 자주 봤었으니까. 하지만 그건 다른 집 이야기인 줄 알았다. 나와는 전혀 무관하고 앞으로도 일어나지 않을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제 어머니가 암이란다. 고쳐도 전위될 위험이 큰 암이란 병은 아버지와 저를 벼랑 끝까지 몰고 갔다.
" 어, 어떻게 해야 되나요. "
" 당장 입원 치료하셔야 합니다. 쯧쯧, 지금까지 어떻게 버티셨는지. 이미 말기에요. "
초기도 아닌 말기. 심장은 더더욱 아래로 곤두박질쳤다. 나는 아빠의 옷자락을 잡으며 말기가 뭐냐고 물었었다. 하지만 직감적으로 알았다. 말기가 더 나쁘다는 것을. 아버지의 동공은 퀭해졌다. 마치 혼이 나간 사람처럼 입술을 떼어내지도 않고 가만히 있다가 의사의 말만 주구장창 듣고 병원 밖으로 나왔다. 겨우겨우 걸음을 뗀 어머니도 그 어떠한 말도 하지 않으셨다. 우리 집안 형편상 입원은 불가능했다. 빚은 빚대로 쌓여있고, 당장 집 월세 내기도 빠듯한데. 입원비까지 대려면 정말 밖으로 쫓겨나게 생겼으니. 어머니는 입원을 하지 않겠다고 하셨다. 아버지는 어떻게든 돈을 구해서 수술을 받자니까 어디서 어떻게 돈을 구해올 거냐며 어머니는 있는 힘을 쥐어짜내 입을 열었다. 이미 사채까지 쓴 상태라서 다시 빚을 내기엔 위험부담이 컸다. 그 옆에서 가만히 모든 걸 듣고 있던 나는 입을 굳게 물었다. 어려도, 지금이 어떤 상황인지 전부 알았으니까.
" 그럼 약이라도 먹어야 해. 내가 돈 벌어올 테니까. 조금만 참아줘. "
아버지는 지난 자신의 과거를 후회했다. 허구한 날 술을 마시고 다니면서 혼자 일하던 어머니를 모른체했으니. 벌이라고 생각했다. 자신의 죄를 씻기 위하여 아버지는 어떻게든 일을 알아보려 무작정 집을 나가셨다. 버는 즉시 돈 부쳐줄 테니까, 용선아. 네가 어머니 좀 챙겨라. 이게 떠나기 직전 아버지의 마지막 말이었다. 그 어린 나에게 어머니를 맡겨 놓고 떠나버리셨다. 물론 아버지는 그 이후로 돈을 보내주셨다. 하지만 아주 작은 돈이어서 생활비를 보태는 데에도 벅찼다. 월세까지 나가려면 남는 게 없었으니까. 큰맘 먹고 산 약도 빠르게 떨어져서 계속 채워놓을 수가 없었다. 그래도 어린 저를 챙기겠다고 어머니는 아픈 몸을 이끌고 밥을 해주었고, 애써 미소를 지어 보이셨다. 자긴 괜찮다고. 내 간호 때문에 서서히 나아지고 있다는. 그런 거짓말을 하셨다.
" 엄마, 많이 아파? "
" 아니야. 별로 안 아파. "
" ... 거짓말. "
" 정말인데? "
입이 대빨 나온 어린 나는 어머니의 티끌 하나 묻지 않은 미소에 꼬리를 내려야 했다. 그렇지만 시간은 나를 기다려 주지 않았다. 초반엔 그래도 어느 정도는 생활을 할 수 있었던 어머니는 얼마 지나지 않아 몸이 더 쇠약해지셨다. 밤마다 고통을 호소하며 배를 부여잡으셨고, 어머니는 제게 신음 소리를 들려주고 싶어 하지 않았는지 입술이 불어터지도록 깨물었다. 그걸 모르고 있지는 않았다. 다만, 모른척하고 있을 뿐이었다. 작은 두 손을 모으며 믿지 않은 신에게 기도를 하는 게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었다. 역시나 하늘은 제 편이 아니었을까. 어머니는 하루하루 지날수록 악화되어갔다.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던 나는 그저 그 모습을 바라만 봐야 했었다.
" 엄마, 엄마... "
몸져 누운 어머니를 하염없이 바라보며 나는 그 옆에 앉아 울먹거렸다. 간신히 다니고 있던 유치원도 갈 수가 없게 되었고, 나는 하루 종일 어머니의 곁에서 간호를 도맡아야 했다. 고사리 같은 손으로 수건을 찬물로 적셔내곤 꾹 짜냈다. 그리곤 그것을 어머니의 이마 위에 살포시 올려두었다. 그게 다였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그리곤 구석으로 가 얼굴을 무릎에 파묻고 있었다.
어느덧 오후로 넘어가는 시간대. 뱃속에선 꼬르륵, 거리는 소리가 울려왔다. 어머니도 아마 지금쯤 배고플 거라고 생각했다. 아무 말 하지 않고 그저 누워만 계셨지만.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 힘들어 보였다. 어머니가 움직이지 못하시니까, 이젠 제가 모든 걸 해결해야만 했다. 혼자서 밥을 하기에는 방법을 몰랐고, 벌써 쌀은 떨어진지 오래였다. 용선은 아랫입술을 질겅질겅 깨물다가 깊은 고민을 하는 건지 동공만 굴리고 있었다. 그러다 이내 무언가 결심을 한 듯 자리를 박차고 나가 집을 나섰다. 허름한 집문이 끼리릭 열리고, 용선은 다 낡아빠진 슬리퍼를 대충 구겨 신고선 급하게 어디론가 향했다. 탁탁, 거리는 소리가 골목길 일대를 작게 울렸다. 한창 다른 집들은 식사 중인지, 골목길에는 저 혼자뿐이었다. 거칠게 숨을 몰아 내쉬던 용선은 거의 무너져 내릴 것 같은 낡은 한 가게를 보았다. 어머니가 혼자 일을 하실 때 가끔 백원 이백 원씩 용돈을 받은 적이 있었다. 그 동전으로 사소한 군것질을 하곤 했는데. 이렇게 텅 빈 주머니로 오게 된 건 처음이었다. 사실 이때까지만 해도 정말로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하면서 내적 갈등을 심하게 했었다. 그렇지만 배고픔에 시달리고 있던 나에겐 그 고민조차 단 번에 지워버렸다.
살금 살금.
최대한 발소리를 죽이며 가게 안으로 들어선 나는 안쪽 방에서 TV 시청에 빠진 할아버지를 힐금 바라보고선 침을 꼴딱 삼켰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어댔다. 아까 너무 뛰어서 그런지 이마에는 땀이 송골송골 배어있었다. 너덜너덜한 옷소매로 대충 흐르는 땀을 닦아내고서 눈앞에 보이는 빨간 봉지를 빤히 응시했다. 저절로 침이 고였다. 이것만 있으면 오늘 저녁은 어머니와 함께 끼니를 해결할 수 있을 텐데. 나는 괜히 찔리는 마음에 다시 한 번 고개를 돌려 방 안쪽을 곁눈질로 훑어보았다. 아직까진 가게에 누가 온 지 모르시는 것 같았다. 나는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덜덜 떨리는 팔을 뻗어 봉지를 살짝 건드렸다. 혹여나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릴까 봐 얼마나 신중을 가했는지 모르겠다. 다행히 할아버지는 귀가 많이 멀어서 큰 소리가 아니면 제대로 듣지 못 했다. 용선은 그걸 알고 있었기에 과감하게 봉지를 붙잡아 옷 안으로 덥석 넣어버렸다. 그리곤 누군가에게 쫓기듯 재빠르게 가게를 벗어났다. 다리의 근육이 욱신욱신 거리며 통증이 밀려왔지만 멈출 수가 없었다. 근처 담벼락으로 가 일단 저는 몸을 숨겼다. 혹여나 할아버지가 들었을까 봐. 그래서 만약 저를 잡으러 온다면 순순히 자백을 할 생각이었다. 담벼락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진 곳에서 나는 달뜬 숨을 여러 번 내쉬었다. 폐까지 턱, 무언가가 막힌 느낌이었다. 처음 하는 도둑질에 모든 신경이 덜덜 떨리는 느낌이었다.
" 1... 2... "
나는 떨리는 심장을 부여잡고 최대한 빠르게 숫자를 세어 나갔다. 그 와중에도 가게 쪽을 힐끗힐끗 바라보며 상황을 지켜보았다. 숫자를 세는 동안 몸에 흐르던 땀들은 어느새 식어 있었다. 하지만 긴장감은 여전했다. 숫자가 100 근처까지 갔고, 그 이상을 넘어갔을 때에 세는 법을 까먹어 버벅거렸다. 그제서야 나는 쪼그려 앉았던 무릎을 펴내고서 품 속에 둔 봉지를 확인한 후 그대로 골목길을 벗어났다.
헥헥 거리는 숨소리가 가슴을 치고 올라왔다. 식었던 땀이 또다시 맺혔고 나는 그걸 신경 쓰지도 않은 채 바로 집으로 향했다. 그때의 발걸음은 아마 지금까지 살면서 가장 무거웠던 기억으로 남았다. 꽤나 오래전 일인데도 불구하고.
철커덕.
녹으로 번진 철문을 열어내고 나는 집안으로 들어갔다. 어머니는 아직도 누워 계셨다. 혹시나 잘못됐을까 봐 코에 손가락을 대고선 호흡을 확인했다. 이게 내 일과 중에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다행히 숨은 쉬고 계셨다. 안도감이 들어 어깨가 들쑥이도록 짙은 한숨을 내쉰 나는 까치발을 들어 찬장에 있던 냄비를 꺼내들었다. 그리고선 그 안에 물을 받아 가스레인지에 살포시 올려두었다. 어떻게 켜야 할지 몰라 몇 번을 돌린 끝에 불을 붙일 수 있었다. 그때의 내 얼굴엔 환한 미소가 걸려있었다. 비록 부당한 행위로 얻은 라면 한 봉지였지만, 그날 그 시절은 나에겐 잊을 수 없는 추억이 되었다. 기쁜 추억보다는 아픈 추억에 속해있지만.
모락 모락.
김이 올라오고 라면이 다 끓었을 무렵 불을 껐다. 얼마나 끓여야 할지 몰라서 어느 정도 물이 보글보글할 때 멈췄는데. 면이 굉장히 꼬들꼬들했다. 나는 어머니의 팔뚝을 흔들며 엄마, 엄마 하며 목소리를 내었다. 어머니는 그제야 꾹 감고 있던 눈꺼풀을 떠내었고 나는 작은 상을 끌고 와 라면을 그 위에 올려두었다.
" 엄마, 라면 먹어.
제가 말을 잇자 어머니는 야윈 몸을 일으키곤 상 앞에 앉았다. 어디서 구했어, 사왔니. 라는 질문도 하지 않으셨다. 그 정도로 기력이 전부 빠진 상태던 어머니는 말없이 라면을 깨작깨작 입에 넣으며 슬픈 눈을 하고 계셨다. 어린 딸에게 밥을 얻어먹어야 한다는 자신의 처지 자체가 너무나 한심하고, 싫었던 건지. 몇 숟갈 들지도 않았는데 바로 누워버리셨다. 결국 남은 라면은 전부 내 뱃속으로 들어갔다. 끓일 때만큼은 뿌듯했는데, 그 마음이 순식간에 푹 식어버린 상태였다.
다음날, 나는 도둑질을 했다는 것 자체에 계속해서 찝찝한 기분이 들었다. 잠을 못 이룰 정도였으니까. 그래서 나는 어딜 가냐는 어머니의 갈라지는 목소리에 친구들이랑 놀러 간다고 거짓말을 하였다. 그리고 그 시간 동안 여기저기 쏘아 다니며 폐지를 줍고, 페트병을 주었다. 그것도 하루가 아닌 며칠 동안. 그것들을 얼마 되지 않는 돈으로 바꾸고선 할아버지 가게로 가 자초지종 모든 것을 자백했다. 엉엉 우니, 할아버지는 인자하게 웃어 보이시며 저를 용서했다.
이 계기로 나는 어떠한 일이 있어도 나쁜 짓은 하지 말아야겠다는 다짐을 하였다. 나에게도, 주변 사람들에게도 너무나 좋지 않은 행동이었으니까. 그런 일이 있고 난 후 마음은 전보다 많이 편안해져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난 8살이 되던 해에, 어머니를 잃었다. 약이라도 꾸준히 먹었으면 조금이라도 더 살 수 있지 않았을까. 나는 아버지를 끝없이 원망했다. 이게 다 아빠 탓이라며, 혼자 방구석에 쭈그려 앉아 울곤 했다. 아버지는 어머니가 돌아가고 난 그날이 돼서야 허겁지겁 집으로 돌아오셨다. 반 개월 만이었다. 아버지도 외지로 나가 꽤나 고생이란 고생은 다 했는지 깔끔했던 전 모습과는 달리 꾀죄죄한 모습으로 변해 있었다. 수염도 제대로 깎지 못해 엉망진창으로 나있었고, 얼굴에는 주름살이 잔뜩 잡혀 있었다. 하루하루 아버지를 원망했던 나는, 그런 모습으로 나타나자 이상하게도 할 수가 없었다.
" 용선아, 괜찮니? "
아버지는 저를 꼬옥 안아주었다. 쾌쾌한 냄새가 코를 찔렀지만, 그래도 여태껏 그리워하던 아버지의 향기였다. 원망은 했어도 마음 한구석에선 보고 싶다는 감정이 들었나 보다. 나는 아버지가 안아주고 나서야 세상이 떠나가도록 펑펑 울었다. 무어라 말을 꺼낼 수도 없었다. 울음이 울컥 울컥 쏟아져 나와 목구멍을 막아버렸으니.
" 미안하다, 아빠가 미안해. "
눈물이 주룩주룩 흘러내렸다. 너무나 어린 나이에 나는 크나큰 상처를 달고 살아야 했다. 어머니는 푸른색 빛이 일렁이는 바다에 한 줌씩 뿌려졌고, 나는 그 옆을 지키고 있었다. 그때는 눈물이 다 말라버려서 이젠 더 이상 울지도 않았다. 그냥 공허한 마음만 있을 뿐이었고, 이 현실이 믿기지 않은 것도 있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에는 시간이 걷잡을 수 없이 흘러갔다. 내 몸은 자라 어느새 10살이 되고, 13살이 되고, 중학교에 입학했다. 나는 어느 아이들과 다름없이 정말 활발하게 성장했다. 부모님이 한 분인데도 불구하고 그것 때문에 기죽거나 우울감에 빠지지 않았다. 오히려 더 밝게 지냈던 것 같았다. 그렇게 아무 탈 없이 4년이란 시간을 보내고, 나는 고교 2학년이 되었다. 이젠 내가 어엿한 18살이라니. 이젠 2년만 더하면 독립할 수 있는 성인이 되겠지. 마음속에서 뿌듯함이 몰려왔다. 그전에 성적이라도 잘 받아야 좋은 대학을 갈 텐데. 용선은 이때까지만 해도 구체적인 꿈이 없었다. 그냥 평범한 공무원이 되어서 안정적인 수입을 얻어야겠다는 생각만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운동은 그 누구보다 좋아했다. 체육시간만 되면 날다람쥐가 된 것 마냥 날아다녔으니. 오죽했으면 선생님들이 스포츠로 나가보라고 권유할 정도였다. 물론 내가 운동을 좋아했었지만 그쪽 계열로 가려면 돈도 많이 들고, 무엇보다 수입을 보장할 수 없으니 거절 의사를 밝히고 있었다. 만약 제 집안이 무너지기 전과 같았으면 난 운동 쪽으로 갔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였다.
" 와, 진짜 어떻게 성적이 더 떨어지냐.. 이건 또 어떻게 숨기지... "
오늘은 최근에 본 중간고사의 결과표가 나온 날이었다. 학교에서 이미 봤었지만 아직도 믿기지 않아 가방에서 굳이 성적표를 꺼내들고는 가자미처럼 쭉 찢어진 눈으로 숫자들을 훑어보았다. 다른 건 전부 봐주시는데, 성적이 떨어지면 아버지는 저에게 잔소리란 잔소리는 다 끌어모아 후두두 쏟아내었다. 아마도 하나뿐인 딸이고, 자신과 같은 삶을 살지 않길 바라는 마음에서 인 것 같은데. 용선은 영 공부 쪽으론 머리가 굴러가지 않았다. 당장 1년 후면 수능을 준비해야 될 나이인데. 이 성적표를 어디에 숨길지부터 생각하는 꼴 하고는. 용선이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콧바람이 얼마나 셌는지, 바닥까지 닿을 정도였다. 뭐 계속 보면 답이 생기는 것도 아니고. 용선은 잡고 있던 성적표를 다시 욱여넣고선 올곧게 가방을 메었다.
하지만 그때였을까. 누군가 제 어깨를 툭, 하고 가볍게 치며 잽싸게 튀어나갔다. 용선이 뭐야, 저 사람. 하며 혼자 중얼거리다가 수상쩍은 복장에 눈썹을 실룩였다. 그리곤 때마침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 도둑 좀 잡아달란 외침이었다. 순식간에 이 상황이 무엇인지 파악이 끝난 용선은 멍하니 그 장면을 보고 있던 한 야구부 남학생의 공을 낚아챘다. 빨리 알아차렸으면 어떻게든 달려가서 붙잡았을 텐데. 거리가 너무 벌어졌다. 이 상태에서 쫓다가는 결국 놓쳐버리고 말 터. 그래서 용선은 더 현명한 방법을 생각해 내었다. 그 짧은 순간에.
후우-
작게 심호흡을 내쉬던 용선은 무어라 말을 거는 남학생을 무시한 채 그대로 온몸에 힘을 주곤 야구공을 강하게 내던졌다. 공은 아주 빠르게 바람을 가르며 남자를 향해 가고 있었다. 빠악, 하는 뼈가 부딪히는 소리나 났다. 으, 아프겠네. 근데 어쩌겠어. 도둑놈은 벌을 받아야지. 용선이 손을 털었다. 어릴 적 자신도 도둑질을 한 기억이 있어서 그 후론 이런 불의는 참지를 못 했다. 물론 저 남자와 비교하면 아주 귀여운 수준이었지만. 용선이 손으로 흘러내린 옆머리를 쓸어 귓바퀴에 걸어두었다. 경찰은 금방 왔다. 삐용 거리는 사이렌 소리가 거리 일대를 울렸고 나는 여러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이게 뭐지. 나 연예인이라도 된 건가. 왠지 기분이 머쓱해져 어색하게 웃음으로 마무리를 지었다.
" 누나, 정말 멋졌어요! "
상황이 일단락되고, 사람들이 점차 자신들이 가던 길로 걸음을 돌렸을 때 즈음, 야구복을 입은 한 남자아이가 여전히 그 자리에 남아있었다. 아, 그러고 보니 이 아이의 공을 멋대로 써버렸구나. 나는 그제야 자신이 한 짓을 깨달아 어떻게 사과를 해야 할지 뻘쭘해 있었다. 뒤늦게나마 공을 주우려고 남자가 잡혔던 부근을 눈으로 훑었지만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고 없었다. 아무래도 경찰들이 오고 가고, 사람들이 몰려오다 보니 공이 어만 곳으로 굴러가버린 것 같았다. 깊게 한숨을 내쉰 난 검지로 볼을 긁적이며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 미안해. 공을 멋대로... - "
" 아니에요! 나쁜 놈 잡는 게 먼저였으니. 전 괜찮아요. "
" 뭣하면 내가 하나 사줄까? "
소년은 괜찮다며 손사래를 쳤지만 나는 그래도 마음이 편치 않았다. 자신의 손때가 묻은 공일 텐데. 그리고 그 공이 이 소년에게 어떠한 추억이 깃들어있을지 모르는 거니까. 이래저래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래서 하나 사줄까, 라는 말로 어떻게든 이 불편한 마음을 풀려고 했는데. 소년은 오히려 세차게 거절을 하였다. 오히려 소년의 눈은 반짝반짝 마치 사슴같이 영롱하게 빛나고 있었다.
" 정말 괜찮겠어? "
" 네. 어차피 공은 학교에 많아서요. 그거 가져다 쓰면 돼요. "
" 그렇구나. 혹시 뭐, 중요한 공이었거나. 그런 건 아니지? "
침이 꼴깍, 목울대를 일렁이며 넘어갔다. 아무렇지 않게 넘어가는 걸 보니 별다른 무엇이 담겨있을 것 같지 않았지만. 그래도 혹시나 해서 물어보았다.
" 지금까지는 없었죠. 아마 오늘부터 생겼지 않았을까요? "
" 응? "
" 음... 누나가 저 남자를 잡는 데에 쓰였으니까. 아주 멋진 의미가 생겼을 거예요! "
소년은 이 시대에 볼 수 없는 순수한 아이였다. 마치 새하얀 도화지 같은 느낌이었다. 어디 하나 때묻지 않은 그런 아이. 그래서 나도 모르게 미소가 담뿍 입가에 걸렸다. 말도 예쁘게 하고, 생각하는 것도 귀엽다고 생각했다. 심각한 표정을 짓다가 푸스스 웃어 보이니 소년은 고개를 갸웃이며 의미 모를 표정을 지어 보였다.
" 너 되게 맑구나. "
" ... 예? "
" 맑아 보여. 모든 게. "
" 그래요? 왠지 부끄럽네요. "
" 그 마음 변치 말고 끝까지 가져갔으면 좋겠네. "
" 누나도요! "
" 나? "
" 네! 만약 저였다면 아무것도 못 하고 어버버 거렸을텐데. 누나는 몸이 먼저 나갔잖아요. 마치 누군가를 지켜야 하는 보디가드 같았어요. "
보디가드 같았다는 소년의 말에 용선이 두 눈을 크게 끔뻑였다. 단지 불의를 보며 참지 못하는 성격에 무작정 행동한 건데. 이런 칭찬을 받아도 되나 싶었다. 그런데 나는 이 말의 계기로 보디가드에 대한 생각을 더 깊게 할 수 있었던 것 같았다. 정말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는 직업이었는데. 용선은 그렇게 소년과 가벼운 인사사를 한채 헤어지고 집으로 돌아가 한동안 가만히 머리를 굴렸다. 아버지가 뭣 때문에 그렇게 멍 때리냐. 라고 물어보았지만 아무것도 아니라며 작게 미소만 지어 보였다.
" 보디가드라... "
흐응, 거리며 콧소리를 내던 용선은 잘 돌아가지도 않는 중고 컴퓨터 본체를 켜 딸각이는 마우스 소리와 함께 인터넷을 훑어보았다. 어느샌가 나도 모르게 보디가드가 되는 법, 점수 커트라인, 대학교 학과 등등. 모든 것을 섭렵하고 있었다. 공부에 영 머리가 없었던 저는 어느 정도 성적이 좋아야 된다는 정보에 땅이 꺼지도록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나 모든 진로는 공부가 기본이 되어야 하는구나. 흐린 눈으로 네X버 지식인을 바라보고 있을 때 아버지가 아, 맞다. 하며 제게 말을 걸어왔다.
" 용선아, 너 오늘 성적 나오는 날 아니니? "
" ... ... ! "
아씨. X됐다.
조용히 이 하루를 넘어가려고 했더니만 아버지는 역시나 놓치지 않으셨다. 미간을 좁히며 작게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나는 곁눈질로 아버지를 흘겨 보았다. 어두운 그림자가 제 앞에 우뚝이 솟아나 있는 것 같았다. 땀이 빼질 빼질. 등에 잔뜩 스며들고 내 동공은 길을 잃은 나그네마냥 심하게 떨려오고 있었다. 정말, 이번까지 망친 성적을 내민다면 난, 아마 모가지가 댕강 따여서 대문 앞에 걸리게 될지도 몰라.
" 기묭서언~? "
아버지의 고개가 옆으로 꺾인다. 이건 마치 공포영화의 한 장면 같은데. 나는 불안함에 입술을 물어뜯으며 어쩔 수 없이 가방에서 꾸깃꾸깃해진 성적표를 꺼내 아버지에게 내다 받쳤다. 그리곤 한동안의 침묵. 나는 이 침묵이 가장 싫다. 1분이 마치 1년 같은 느낌이었다. 달달달. 떨지도 않는 다리까지 떨어가며 나는 아버지를 올려다보았다.
" 성적이 아주... "
아버지의 눈썹이 실룩 탐탁지 않게 움직인다. 이제 곧 잔소리 폭탄을 받겠지. 어쨌든 성적이 나오는 날마다 매번 들었으니 이번에도 그냥 한 귀로 듣고 흘리자. 난 혼자 자신을 달래며 눈꺼풀을 꾸욱 닫아냈다.
텁.
하지만 들려와야 할 잔소리는 들려오지 않고, 따스한 온기가 제 정수리에서 느껴졌다. 조심스레 눈을 떠낸 나는 아버지의 손이 머리 위에 놓여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엥, 갑자기 왜 저러시지. 낯선 이 분위기에 나는 입을 꾹 다문 채 아버지를 빤히 응시했다.
" 하지만 이번만 봐줄게. 너 오후에 멋진 일을 했더라? "
" ... 네? "
" 아빠가 다 봤지. 장 보고 집 가는 길에 말이야. "
" ... ... 아... "
" 역시 우리 딸 답네. "
환하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물론, 제가 아닌 아버지가. 오랜만에 보는 아버지의 해맑은 미소에 제 마음이 사르르 녹고 있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이후에 저런 미소는 보이지 않으셨는데. 울컥, 가슴속 깊숙한 곳에서 감정이 치밀어 올랐다. 불의를 참지 못하고 달려든 나를- 아버지는 뿌듯하게 바라보셨다. 혹여나 제가 해코지를 당하지 않을까 하고 걱정하는 게 부모님의 마음인데. 전혀 그러지 않으셨다.
그때 나는 다짐했다. 정말로 할까, 이 길로 들어가 볼까. 하며 아리송했던 마음이 이제야 올곧게 굳어졌다. 사람들을 지키는 사람이 되겠다고. 그 누구보다 멋진 경호원이 되어서 아버지를 더 웃게, 그리고 제 자신을 더 당당하게 드러내보기로.
" 다음 생이 있다면, 전 다시 어머니와 연을 맺고 싶어요. 그리고 그땐 지켜줄 거예요. 제 한 몸 다해서. "
마지막으로 돌아가신 어머니를 위해서 읊조렸더니 아버지가 환하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런 날이 온다면, 정말로. 정말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