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전한 마을: 한 지방대학교수의 자기 마을과 자기 학교에 관한 이야기
<머릿말>
김주사는 우성아파트에 들어가 자전거 거치대에 자기 자전거를 묶어 놓았다. “여기서부터는 버스를 타고 가야지.” 김주사가 버스에서 내린 곳은 객사(客舍)앞이다. 거기에서 한옥마을 쪽으로 4, 5분만 걸으면 헌책방들이 나온다. 삼례에 사는 김주사는 오늘 전주 시내로 헌책방 순례를 나온 것이다. 사람들은 여전히 김주사라고 부르지만 퇴직한지 몇 해가 지났다. 세상은 넓고 할 일은 없어서 김주사는 제법 자주 헌책방을 찾는다. 닥치는 대로 사지만 가벼운 수필집을 제일 좋아하는 편이다. 오늘 김주사가 뽑아들고 펼쳐본 책 역시 수필집이다. “어디 보자. 처음 보는 이름인데.” 책을 닫고 도로 꽂아 놓으려고 하는데, 얼핏 본 목차의 몇 글자가 잔상으로 남아 있었는지 뒤늦게 의식되었다. “가만 있거라. 이거 우리 고장 이야기 아닌가?”
김주사는 선 채로 약간 꼼꼼하게 책을 훑어보았다. 맞았다. 자기 고장 이야기다. 자기에게 익숙한 지명이 나오고 자기가 잘 아는 상호도 나온다. 그리고 자기 고장에 위치한 대학교도 나온다. 대학교가 자꾸 나왔다. “아, 반쯤은 마을 이야기고, 반쯤은 대학교 이야기구나.” 반가운 마음에 책을 사기로 결심했던 김주사는 망설이기 시작한다. 대학교 이야기는 흥미없기 때문이다. “반 쪽만 읽을까?” 김주사는 그렇게 하기로 결정하였다. 육천원이면 비싼 편은 아니기 때문이고, 아무에게도 읽히지 않은 채 인쇄소에서 곧바로 넘어왔는지, 새 책 같았기 때문이다.
여기에 실린 글은, 내가 지난 10년 동안 쓴 것들이다. 나는 수필이라고 불릴 만한 이런 류의 글들을 내가 쉰 살이 된 10년 전(2005년 경)부터 쓰기 시작하였다. 나의 고등학교 동창 까페에 많이 써서 올렸으며, (지금은 폐쇄된) 우석대학교 교육학과 홈페이지에도 써서 올렸고, 학교 신문과 교육전문지 등에 쓰기도 하였다. 여기에 실린 글은 그 중 ‘완전한 마을’이라는 제목에 합당하여 뽑힌 것들로, 삼례 이야기 아니면 우석대 이야기다. 여기에 실린 글 중에는, 수업 시간에 학생들에게 읽히기 위하여 쓴 글도 몇 편 있고, 아무 데도 발표하지 않고 누구에게도 읽히지 않은 채 컴퓨터 안에 저장해 두었던 글도 몇 편 있다는 점을 밝혀둔다.
내가 삼례와 우석대를 알게 된 것은 이런 글을 쓰기 10년 전인 1995년부터다. 그 해에 나는 학교에 부임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기 실린 글은 20년 동안 본 것을 10년 동안 쓴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공교로운 일이지만, 이런 류의 글을 쓰기 시작한 그 때쯤(2007년) 나는 가족의 일부를 대동하고 삼례로 이사를 내려왔다. 주소지도 삼례로 옮겼는데, 그 이후 나는 읍내에 있는 청소년 수련원의 수영장에 할인 요금(1,700원)을 내고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 그것만 달라진 것이 아니다. 나는 가급적 학교 바깥으로는 나오려고 하지 않는 무심한 학교 사람으로부터 점차 동네 아저씨로 변모해간 것 같다. 그와 더불어, 내 눈에는, 전에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게 되었으며, 나는 여기에 실린 것과 같은 글을 쓸 수 있게 되었다. 그 글들은 내가 이 마을에 적응한 과정을 보여준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김주사라면 ‘적응한 과정’ 대신에 ‘정을 붙인 과정’이라고 말하겠지만.
물론 김주사가 불평하는 나머지 반쪽이 있다. 김주사야말로 동네 아저씨로, 그가 학교 이야기에 관심을 가지지 않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덜컥 책을 구매한 후 방바닥에 드러누워 한 페이지 두 페이지 넘기다 보면, 김주사의 불평은 한층 더 고조될 것이다. 나머지 반쪽은 ‘학교 이야기’라고 말했지만, ‘공부 이야기’라고 말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책의 내용은, 앞서 말한 대로, 마을 이야기와 학교 이야기로 대별될 수 있으나, 사는 이야기와 공부하는 이야기로 대별될 수도 있다. 공부 이야기는, 물론, 학생들 및 동료 교수들과 나누고 싶은 이야기로, 그 이야기를 쓸 때 나는 캠퍼스 안의 그 인사들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김주사가 훨씬 더 한가하기를 바란다. 훨씬 더 한가하여, 공부 이야기 파트도 읽지 않을 수 없게 되기를 바란다. 새 책의 상태로건, 헌 책의 상태로건, 이 책이 학교 인사들 곁에 다가갈 기회는 그다지 많지 않을 것 같기 때문이다.
학교 안의 인사가 이 책을 집어들었다고 하여 나에게 이익이 오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대뜸 “학자가 학술 논문을 써야지, 무엇 때문에 이런 잡문을 쓰느라 시간을 낭비하는가?” 하고 힐난할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좀 쉬고 싶었던 모양이다. 아니, 놀고 싶었던 모양이다. 공부만 시키고 놀리지 않으면 애를 망친다는 말도 들어보지 못했는가? 이 변명은 주로 사는 이야기 쪽에 해당될 것이다. 공부 이야기 쪽에는 약간 다른 변명이 가능하다. 물론 학자는 학술 논문을 쓰는 데에 전념해야 한다. 그러나 아무런 잡념 없이 그 일에 전념하며 지내다가, 화창한 어느 봄날이건, 쌀쌀한 어느 겨울날이건, 문득, 논문에 적은 주장을 자기가 정말로 믿고 있는지, 자기의 학문을 자기가 그대로 살아내고 있는지, 의혹이 생길 때가 있다. 학술 논문에 쓴 전문적 내용을 이런 잡문으로 번역해 보는 것은 이러한 의혹과 대결하는 데에 도움이 된다.
이것으로 변명이 될까? 하여간, 내 전공은 교육학(공부에 관한 학문)으로, (나로서도 이번에 알았지만) 여기에 실린 글들은 나의 교육학을 옮겨놓은 것이다. 그 글들은 약간 다른 방식으로 규정될 수도 있다. 그 글들은 내가 실지로 어떻게 공부해왔는지에 대한 기록이다. 즉 이 책의 ‘공부 이야기’는 “우리는 마땅히 어떻게 공부하여야 하는가”를 이야기할 뿐 아니라 “내가 사실상 어떻게 공부해 왔는가”를 이야기하기도 한다.
김주사가 정말로 훨씬 더 한가하여 공부 이야기 파트도 읽는다면, 그는 거기에서 무엇을 발견할까? 그 전까지 김주사는 학교 담장의 안 쪽을 기웃거려본 적이 없지 않은가? 동네 아저씨 김주사는 마을 이야기를 읽으면서, 학교 사람이 자기 마을을 알아본다는 사실에 놀랄지 모르는데, 학교 이야기를 읽으면서 한번 더 놀랄지 모른다. 그는 자기 마을에 있는 평범한 학교가 또 다른 완전한 마을, 혹은 거의 완전한 마을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릴지 모르는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김주사는 사는 이야기 파트에서, 한 사람의 중년 남자가 김주사 자기 마을에 정을 붙여온 과정을 읽어내듯이, 공부 이야기 파트에서도 하나의 과정이나 흐름을 읽어낼지 모른다. 김주사는 틀림없이 “이 저자는, 나로서는 납득하기 어려울 뿐 아니라 말귀를 알아듣기조차 힘겨운, 구름 잡는 이야기로 긴 세월 동안 허영을 부리더니, 갑자기 땅바닥에 떨어져 구조조정이니, 교수업적평가니 하는 민망한 문제로 애를 먹고 있구나” 하고 생각할 것이다.
정말이지 이 책은 내 이야기로구나. 내 마을에 관한 이야기, 내 학교에 관한 이야기지만, 결국 내가 살아온 이야기이며 내가 공부해 온 이야기로구나. 그러니 나로서는 동료들의 힐난을 무릅쓰고 이런 책을 낼 만하다. 그 동안 여기저기에 흩어져있던 글들을 찾아 다시 읽어보면서 한 덩어리로 묶는 작업을 하는 중에, 나는, 정말로, 지난 20년 동안, 이곳에서, 내가 어떻게 지내왔는지를 상당히 분명하게 알게 되었다.
2016, 2 삼례에서
첫댓글 교수님..
완전한마을 출간을 축하드립니다.
재미있게 읽고 있어요..
늘건강하시구요~^^
행복하세요~^^
교수님의 출간 소식
솔직히 우석대에 다시 와서야 알았습니다.
책 읽기 시작 한 날, 교수님 교육학개론 강의실에
자몽쥬스 올려두었습니다.그리고
완전한 마을 책을 다 읽은 오늘,
글을 써 봅니다. 재은 선생과 함께
새로 산 책들에 따스한 교수님의 친필 싸인
받고자 근일 찾아뵙고자 합니다 ^^
이 책으로 인해 삼례를 두 계절만 방문하는
신분이지만 완벽하게 4계절을 살아내는 기분이
드는 것은 왜일까요? 교수님! 늘 건강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