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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의 졸개 김삼웅이 조작한 박정희 친일 날조에 대한 반박
사기꾼 김삼웅: 만주군관학교를 투철한 친일정신과 열성적 훈련으로 수석 졸업의 영광을 차지하며, 수석졸업의 영광으로 금시계를 선물로 받고 졸업생 대표로 천황찬양으로 가득한 답사를 피로 절규하듯 읽습니다.
반박: 1942년 3월 24일 만주일보의 보도에서도 확인되듯이 박정희는 전체수석이 아니라 만계 (조선인, 한족, 만족) 중 1등입니다. 여기서 박정희가 천황에 충성하겠다는 답사를 했다는 헛소문도 나게 되지만 실제 답사는 일본인 오까미 쇼히꼬(岡見尙彦), 고야마 시게요시(小山重嘉) 두사람이 했습니다. 박정희가 경례를 붙이는 그 유명한 군관학교 졸업사진 기사의 우측에서 13번째 줄에 정확히 두 일본인이 답사했다고 쓰여 있습니다. 김삼웅은 눈도 깜짝하지 않고 거짓말을 하고 있습니다.
사기꾼 김삼웅: 다카기 마사오는 군관학교를 졸업하고 관례대로 우등생에게 주어지는 일본육사 특전의 혜택을 누리게 되며 다카기 마사오는 남들보다 철저한 황군정신으로 몸과 마음을 닦고 열심히 공부한 것입니다. 졸업때는 조선인 출신으로는 유일하게 일본 육군 대신상을 받으며, 이로써 박정희는 완전한 일본인 다카기 마사오가 되었습니다. 대일본제국의 군인이 되었습니다.
반박: 일본육사 입교는 군관학교 우등생에게만 주어지는 특전은 아닙니다. 만주군관학교가 일본육군사관학교의 예과의 성격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陸軍士官學校 名簿編纂會에서 발간한 '陸軍士官學校名簿 五十期以降 非賣品’의 일본육사 57기 졸업생 1,268명 중에는 박정희(다까기 마사오 高木正雄)도 등재되어 있습니다만, 은사상 수상자 25명의 명단에는 없습니다. 자료 확인도 하지 않고 박정희가 일본육군대신의 상을 받았다는 허무맹랑한 소리를 하는 따라지 역사전공 교수 김삼웅, 이게 과거사 역사교육의 슬픈 현실입니다.
사기꾼 김삼웅: 훗날 다카기 마사오가 10.26으로 머리에 총 맞고 황천갔을 때, 주한 일본대사관의 한 일본외교관은 ‘‘대일본제국 최후의 군인이 죽었다.’’라고 하였답니다.
반박: ‘했다’도 아니고 ‘하였답니다’군요. 남에게서 들었다는 소리입니다. 완전한 김삼웅의 소설입니다. 일고의 가치도 없는 개소리입니다.
사기꾼 김삼웅: 다시, 다카기 마사오 소위는 만주 제8연대의 소대장으로 임명되어 모란강 부근의 영안으로 전출되었다가 화북지방의 열하 보병 제8군단에 배속됩니다. 간도에서 활약한 한인 독립군부대가 북만주로 이동할 때와 노령에서 활동하던 독립운동가들이 서쪽으로 진출할 때에 주둔하던 요충지였으며, 일본군에 대한 항일 투쟁이 끊이지 않았던 지역입니다.
항일세력은 팔로군, 군부군, 광복군, 조선의용군, 소규모의 유격대 등이었는데 다카기 마사오는 이곳에 임관한지 1년만에 중위로 진급합니다. 다카기 마사오는 열성적으로 항일부대를 토벌했던 공로로 승진이 빨랐던 것입니다.
반박: 박정희가 근무하게 된 만주군 보병 제8단은 원래 제2군관구 예하부대로 목단강성 목단강(모란강) 부근의 영안시에 주둔하다가 1943년 11월에 제5관구 예하부대로 변경되어 열하성 흥륭현으로 이동된 부대입니다. 군관구사령부는 승덕이고, 제8단은 흥륭현 반벽산에 주둔했습니다. 즉 박정희가 견습사관 훈련을 마치고 만주군 소위로 1945년 7월 15일 제8단 본부의 을종부관으로 부임했을 때 이미 부대는 반벽산에 주둔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부임도 하기 전에 간도에 주둔하지도 않는 부대에서 독립군을 토벌하다니 박정희가 귀신입니까?
제8단은 만리장성 북쪽 반벽산에 주둔해 있었기 때문에 만리장성 남쪽의 중공 팔로군과는 접전한 적이 없습니다. 김삼웅이 암시하는 간도특설대와 일본 북지나 방면군이 주력인 철석부대가 만리장성 남쪽 북녕로지구를 중심으로 중공 팔로군 제11, 12, 13단과 접전을 벌렸는데 박정희는 간도특설대에 근무한 적이 없습니다. 박정희의 제8단은 별다른 전투없이 해방을 맞이합니다. 김삼웅은 도서관에서 자료도 뒤지지도 않고 이런 저런 책에서 짜깁기를 하거나 주워들은 것만으로 책을 썼기 때문에 아마도 자신이 거짓말을 하고 있는지도 몰랐을 것입니다. 한마디로 학자적 태도도 양심도 팽개친 불쌍한 학문돌팔이입니다.
사기꾼 김삼웅: 일본은 만주 서남부와 중국북부에 투입할 용맹한 부대를 선발하여 특수부대를 만듭니다. 다카기 마사오는 중국북쪽 (열하성 만리장성 남방 평곡,북경 동북방)로 투입되어 항일 세력과 치열한 격전을 벌였으며, 여기서 혁혁한 공(수많은 항일 독립군을 때려잡음)을 세웁니다. 조선인의 간도특설대, 러시아인의 찬야부대, 몽고인의 기야부대 등등이 있었는데 간도특설대가 가장 강력했다고 합니다. 다카기 마사오가 소속한 간도특설대 요원들이 얼마만큼 항일군의 토벌에 커다란 공을 세웠는지를 대변해주는 이야기입니다.
반박: 위에서 설명한대로 박정희는 제8단의 을종부관으로 명령을 받아 전달하거나, 부대 단기를 관리하는 본부근무를 했습니다. 그리고 간도특설대에는 간 적이 없습니다. 간도특설대에 근무한 79명의 조선인 명단에 박정희는 없고, 그 많은 조선인들이 한결같이 박정희는 본 적도 없다며 간도특설대 근무사실을 부인합니다. 김삼웅은 일본 북지나 방면군이 1945년 1월 철석부대를 조직하면서 간도특설대가 록평에서 옮겨온 사실과 시간을 헷갈려 박정희가 근무한 것으로 착각을 했거나 아니면 박정희를 음해할 목적으로 억지를 쓰는 것입니다. 아마 후자쪽이겠지요.(滿洲國軍, 蘭星會, 1970, 738페이지 참조) 김삼웅은 역사를 자신의 출세를 위해 사용한 비열한 역사 장사꾼에 불과합니다.
사기꾼 김삼웅: 다카기 마사오는 1945년 8월 15일 이후에는 어떤 행동을 하였을까? 패잔병의 낭패감을 맛보며 절망에 빠진 것도 잠시, 다카기 마사오는 곧바로 변신을 시도합니다. 일본군복을 벗어 던지고 민간복으로 같아 입고 만주군의 부대를 탈영하여 피난민으로 가장하여 피난민 대열에 끼어 들어 북경으로 들어가 광복군 대열에 합류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유리한 상황에만 빌붙는 기회주의자의 전형을 볼 수 있습니다. 게다가 이후에 다카기 마사오는 좌익계열의 장교가 되고 여순 사건 연루자로 체포되지만, 천명이 넘는 동료들을 밀고하여 죽음으로 몰아 넣고 저 혼자 살아 남습니다.
다시 반공주의자로 변신하여, 기회주의자란 무엇인가를 일반 국민들과 자라나는 청소년들에게 완벽하게 보여 줍니다. 원래 이런 인간이니 일본 패망 후 곧 바로 광복군으로 위장하여 합류하는 것은 아주 쉬운 일이었으며, 독립운동가들을 적극적으로 토벌하던 일본의 진짜군인 다카기 마사오가 광복군 흉내를 낸 것입니다.
반박: 해방 후 구 일본군이나 만주군에 근무하던 조선인이 광복군이 되는 것은 흔한 일이었고 임시정부와 광복군은 해방이전부터 그런 정책을 꾸준히 추진했습니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1940년 9월 17일에 창설된 광복군은 군대꼴을 갖추려고 김학규 장군이 초모(모집)공작에 나서는 등 끊임없이 노력했지만 해방당시까지 고작 300명 정도만을 모았을 뿐입니다. 해방공간에서 임시정부의 권력강화를 위해서도 광복군의 확대개편은 절실한 과제였고, 구 일본군이나 만주군 소속의 조선인의 광복군 편입에 필사적이었습니다. 김삼웅은 대단치도 않은 만주군 중위 출신의 광복군 편입을 무슨 기회주의처럼 각색하고 있습니다. 역사학자 E. H. 카가 김삼웅이를 보았다면 뺨싸대기를 올려 부쳤을 것입니다.
박정희는 만주군 시절에 공산주의 사상을 가진 민족주의자인 만주군관학교 선배 최남근의 영향을 받았고 국군에 편입되어 최남근의 선후배인 만군출신과 동료의 신분으로 어울립니다. 게다가 1949년 10월 6일 박정희의 인격형성에 큰 영향을 끼친 존경하는 셋째형 박상희가 대구폭동의 여파로 경찰에게 살해됩니다. 그 영향의 반동으로 한때 좌익과 어울려 곤욕을 치렀지만 6.25 발발 후 얼마든지 북으로 갈 수 있는 기회가 있었음에도 남하하여 국군에 합류함으로써 진심으로 전향했음을 행동으로 증명했습니다. 이것이 박정희 좌익경력의 전부입니다.
사기꾼 김삼웅: 5.16 쿠데타로 집권한 뒤에도 틈만 나면 주일 대사관을 통하여 입수한 일본 사무라이 영화를 관람하고 일본 검도를 즐기는 것이 다카기 마사오의 취미 생활이었으며, 또한 당시 조선일보 주필 선우휘씨 등과 청와대에서 술을 마시며 일본천황의 교육칙어를 번갈아 외우는 내기나 시합을 하곤 했습니다. 다카기 마사오의 일본제국주의에 대한 지독한 향수를 엿 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그래도 이런 것은 얌전한 행위에 속합니다. 중앙일보 기사를 보면, 가관입니다. “…계엄선포 한 달 전쯤인가(1971. 10. 17 계엄이 선포되었다) 박대통령이 나를 불러요.(여기서 ‘나’는 강창성 전 보안사령관) 집무실에 들어갔더니 박대통령은 일본군 장교 복장을 하고 있더라고요. 가죽장화에 점퍼차림인데 말채찍을 들고 있어요. 박대통령은 가끔 이런 복장을 즐기곤 했지요. 만주군 장교시절이 생각났던 모양입니다. 다카기 마사오 중위로 정일권 대위 등과 함께 일본군으로서 말달리던 시절로 돌아가는 거죠. 박대통령이 이런 모습을 할 때면 그분은 항상 기분이 좋은 것 같았어요.”
반박: 이런 류의 삼류소설은 자극적인 이야기 지어내기 좋아하는 일본의 저널리즘이 많이 만들어 냈는데 이미 거짓으로 판명나서 누구도 믿질 않고 있는데도 새로 입문한 얼치기 민족주의자들에 의해서 아직도 돌아다니고 있습니다. 선우휘 이야기는 그야말로 평가할 가치조차 없는 ‘카더라’이고 강창성의 증언이라는 것도 강창성씨가 수차례에 걸쳐 부인했던 사안입니다. 김삼웅이 더러운 스토커임을 드러내는 증거일 뿐입니다.
사기꾼 김삼웅: 5.16후 우방 각국에 친선사절을 보냈는데 제일 먼저 보낸 곳은 일본이며, 다카기 마사오 대통령이 가장 먼저 방문한 나라는 일본이며, 최초로 대외정책을 밝힌 기자회견의 주제는 한·일 교섭의 재개이며, 다카기 마사오 대통령의 일본 방문중 동경의 한 요정에서 다음과 같은 망언을 하여 동석했던 일본인 조차 놀라게 했다고 합니다. ‘‘.... 나는 정치도, 경제도, 모르는 군인이지만 명치유신 당시 일본의 근대화에 앞장섰던 지사들의, 나라를 위한 정열만큼은 잘 알고 있다.그들 지사와 같은 기분으로 해볼 생각이다.’’ 라고, 물론 유창한 일본어로. 허긴 이 부분만 떼어 놓고 보면 이해 못할 것도 없지만, 그래도 이런 자가 18년간 대통령을 해 먹었다 생각하니 많이 창피합니다.
1963년 12월 17일 다카기 마사오 대통령 취임식에 참석한 일본의 자민당 부총재 오노는 기자회견에서 다음과 같은 걸작의 말을 합니다. ‘‘...박정희 대통령과는 부자 사이 같은 관계로서 아들의 경축일을 보러 가는 것은 무엇보다도 즐겁다.’’ 라고. 사실 자민당의 보수 세력은 다카기 마사오와 군대생활을 같이 했던 일본제국의 동료 및 상관들이었습니다.
일본군국주의 세력의 정신적 유대는 대일 굴욕회담을 (한일협정) 성사시키며, 여기서 식민지 지배 피해에 대한 거의 모든 권리와 주장을 포기합니다. 또한 1973년 서울 지하철 차량부정도입 사건을 저지르고, 일본에서 지하철차량 186량에 대한 매매계약을 체결하였는데, 일본에서 3,204만엔하는 가격을 6,350만엔이란 두 배 정도나 비싼 가격으로 계약하였습니다. 이것은 만주군 출신 선배들의 로비와 정치자금의 리베이트가 작용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반박: 해방 후 최대의 사안은 먹고 사는 일이었는데 6.25 이후 전후복구와 함께 그것은 지상명령과 같았습니다. 잘난 민족주의자 이승만은 한일회담을 십년이나 끌어오면서 배상금 30억을 고집했습니다. 그 당시의 일본의 외화보유고 총액이라는 게 1957년에 5억달러, 1958년에 8억달러, 1959년에 10억달러 정도였습니다. 30억달러를 현금으로 내놓으라는 이승만은 한마디로 한일국교정상화는 안 되도 좋다는 뱃보였고, 경제개발 따위는 관심도 없이 민족주의자로 비쳐지면 그걸로 족했습니다.
혁명으로 집권한 박정희는 경제개발에 필요한 자금을 대일 청구권으로 대체했고, 개인보상 대신 경부고속도로 건설, 포항제철 건설 등에 썼다는 것은 누구나 다 인정하는 사실입니다. 그런 와중에 박정희도 인정하듯 ‘굴욕적 외교’를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후세 사람이 박정희가 친일파여서 그렇게 했다고 평가하든지 굴욕을 참고 경제개발자금을 얻기 위해서 그렇게 했다고 평가하든지 자유입니다만 없는 사실을 덧붙여 박정희를 폄하하려 해서는 안 됩니다. 분명한 것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풋내기 김종필의 능력만으로는 한일회담과 청구권 협상은 타결되기 어려웠다는 것입니다. 지하철 도입도 청구권 자금의 사용이 일본의 기계류 수입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던 결과입니다.
결론입니다. 사기꾼 김삼웅은 친일청산을 외칠 자격이 없는 사이비 민족주의자이고, 역사연구의 기초부터 무시하는 양심없는 학문사기꾼에 불과합니다. 그 댓가로 독립기념관장이 되었다는 것이 오히려 대한민국의 수치입니다. 역사는 거짓으로 깨끗해 지지 않습니다.
출처 : 네이버 '대긍모'카페
+ 오카모토 미노루라는 개소리에대한 반박
김대중 졸개, 김삼웅- 박정희 대통령이 오카모토 미노루라고 조작
박정희대통령이 오카모토 미노루(악명높은 왜놈)라고 주장하고 있는 사이비 사학자(史學者) 김상웅
* 오카모토 미노루는? 1929년의 광주학생사건(光州學生事件)('학생의 날') 사건에서 공(?)을 세운 사이비교육자인 한 왜놈으로 악명이 높다.
* 김상웅은? 김대중 추종하는 사이비 사학자로서, 박통이 오카모토 미노루라고 주장, 그 공으로? 노무현 정권때 독립기념관 관장을 맡게됨
필자(김병희)는 홈페이지[http://home.megapass.co.kr/~gimbyngh/]를 가지고 있어서, 지구촌 사람이면 누구든지 마음대로 와서 구경도 하고 글도 쓸 수 있게 하고 있는데, 오늘 새벽에는 "이상유"라는 분이 오셔서 쓴 글에서 다음과 같은 사연을 보았다 ["…"은 수십 자씩 생략했음을 뜻함]:
"저는 서울에서 근무하는 교사 이상유입니다. … 저는 박정희 대통령에 대하여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 박 대통령에 대한 근거 없는 음해가 많았지만, … 오카모토 미노루라는 다른 창씨 명도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너무도 악질적입니다. … 그러다가 인터넷을 검색하던 중 정말 우연치 않게 박사님과 고민철 씨가 게시판에서 주고 받은 글을 보게 되었는데, 그 곳에는 제가 그렇게도 오랫동안 찾아다니던 오카모토 미노루의 비밀이 상세히 설명되어 있었습니다. … 순간 박대통령을 음해에 앞장서던 김삼웅이 떠올라 치를 떨었습니다. 김삼웅은 독립기념관장을 하던 중에도 신촌의 서점에서 가끔 만나기도 하였습니다. … 이제 박대통령이 오카모토 미노루라는 음해가 사실이 아니라는 확실한 근거를 가지게 되어 얼마나 기쁜지 모르겠습니다. 모두가 박사님의 소중한 증언 덕분입니다. … 홈페이지 어딘가에 오카모토 미노루의 사진을 올려놓았다는 글이 있던데 찾을 수가 없군요. 알려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위의 이상유님 글을 요약하면
박정희 대통령의 창씨 명이 타카키 마사오(독립군을 비밀리에 도와준 사람으로 독립군사이에 유명) 와 오카모토 미노루(김상웅이 주장)라는 설이 있는데 있는데, 오카모토 미노루는 노무현 정권때 독립기념관장으로 임명된 김삼웅이 박정희를 음해하려고 조작한 것이라는 것이다.
참으로 기가 막힌다. 사이비사학자에게 독립기념관장이란 중책을 누가 천거해서 누가 임명(누구긴 누구야... 김대중아냐?)했는지는 모르지만, 꼴두기가 어물전 망신시키는 꼴이군. 필자는 다음과 같은 회답을 보냈다:
이상유님 보세요
혜서 잘 읽었습니다. 교육 동지를 만났군, 반갑습니다.
더욱 박정희 대통령의 참모습을 아시려고 주야 분투하신다니, 전교조 무리들이 많다는 곳이라 진흙 속에서 구슬을 만난 느낌입니다.
박정희군은 저의 죽마고우인지라, 그가 오카모토(岡本) 운운의 일본식 이름을 가진 일이 없음을 잘 알고 있는데, 어느 엉터리 사학도가 그런 발설을 한 모양입니다.
오카모토라는 대구사범 교유는 광주학생사건 때 우리 조선인학생들을 때려잡아 수훈 갑인 자로서, 당시의 조선총독이 대구사범 학생감으로 특진시켰기에, 박군(박정희)이나 저를 포함한 우리 대구사범 조선인 학생들은 전원이 그를 개나 돼지처럼 악종으로 보았답니다.
그 사학자(김상웅-김대중 추종자), 그 자는 틀림없이 친북정권의 수하로서 박 대통령을 음해하려는 의도로, 그 악종의 성을 박군의 일본식 성으로 둔갑시킴으로써, 국민들의 박대통령에 대한 추모의 정을 말살 내지는 희석시키려는 음모의 발로로 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제가 자서전을 쓰면서 그 오카모토 학생감에 관해서 여러 번 언급은 했지만, 모두가 교육자다운 모습은 없고, 시종일관 조선인 학생의 사상동향에서 민족정신을 뽑아, 독립운동의 씨를 말리려는 그의 더러운 수작을 폭로했을 뿐이었고, 귀하께서 말씀하신 그의 사진을 올린 기억은 없습니다.
여불비례
2008.11.13 울산 일산진에서 김병희
http://home.megapass.co.kr/~gimbyng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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