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동네 보리수나무
구 삼리
성문 앞 샘물 곁에 서 있는 보리수, 나는 그 그늘 아래 단꿈을 꾸었네! (뮐러 시, 슈베르트 작곡) 나의 허밍 콜이 골목길을 넓힐 때, 담장 너머로 백목련 나뭇가지마다 탐스러운 털 봉오리들이 입술을 살짝 벌렸다. 그 모습을 찍으려고 사진기를 요리조리 비틀면서 안간힘을 쓰는 한 남자를 보았다. 표정이 어찌나 진지해보여 혹 방해가 되지 않을까 조심조심 그분 곁으로 다가갔다.
“좋은 취미를 가지셨네요, 벌써 목련이 피려나 봐요.”
“네, 겨울인데 요즘 꽃은 철도 몰라요.” 목련꽃 대화 속에 우리 행운의 만남은 시작되었다.
정해문 회장님은 오륙 년 전 내가 서울에서 대전으로 이사를 와서 처음으로 친구가 된 분이다. 언젠가 미숙한 내 수필을 몇 편 드렸는데 꼼꼼히 읽으시고 답 글과 함께 순수비평까지 해주면서 유머 넘치는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나는 그때마다 글을 잘 써야 한다는 각오와 함께 보람도 느꼈다. 앞으로 남에게 감동을 주는 더 깊이 있고 아름다운 글쓰기를 해야겠다는 다짐도 했다. 언젠가 〇〇실버대학에서의 있었던 일이다. 회장님은 내 글을 인쇄해서 오십 여명의 학생들 앞에서 큰 소리로 읽었다. 그리고 생각지도 않은 깜짝쇼를 베풀어서 나의 얼굴을 붉어지게 했다. 이렇게 스스로의 자랑에 인색한 나를 일깨워 서슴없이 희망의 박수를 보내신 분이 있기에 나는 오늘도 열심히 컴퓨터 자판을 두드린다.
내년이면 팔순이 되시는 회장님은 다재다능하신 멋쟁이다. 어느 날 내가 본 그분 손자의 방에는 “일일부독 구중생 형극(一日不讀 口中生 荊棘)”이라는 안중근 의사의 격언 액자가 걸려 있었다. 친필로 써서 손수 벽에 걸어 놓고 손자 손녀들에게도 훈육하는 모습에서 그분의 가족 사랑이 남다르다는 것을 알았다. 또 특별하신 종교관에 가슴이 먹먹했다. 노구에도 2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성경(신‧ 구약) 66권을 완필해서 CBS방송국 60주년 기념 한국교회 성경 필사본 전시회에 출품했다. 그 투철하신 종교관은 내게 더 매력으로 다가온다. 하루하루 이웃에게 덕을 실천하는 그분을 보면서 나 역시 몸소 따를 수는 없지만, 조금씩 이웃과 사랑을 나누는 마음속 향기를 품으면서 나를 독려한다. 그러면서 회장님과 이웃이 된 것에 감사하며 살고 있다. 사십 여년의 공직을 마치고 온 동네를 두루 살피시고 나눔을 즐기며 일과로 삼는 분, 보리수나무 그늘로써 살아온 희생정신이 이 봄날에 새싹처럼 돋아난다.
늘 만면에 웃음을 띤 온화한 얼굴로 사람들을 대하는 회장님은 하나아파트 경로당에서 십이 년의 긴 세월 동안 회장을 연임했다. 연임 가운데 경로당 회원들은 물론 이웃 지인들의 병문안부터 일거수일투족을 살피고, 후학을 덕으로 몸소 실행한다. 온 동네 어른에서 아이들에 이르기까지 이 분과 마주칠 때면, 경건한 마음이 앞서 옷깃을 여며 고개를 숙인다.
경로당을 빙 둘러치고 있는 무궁화는 손수 심었다. 그리고 황금색 태극 봉에 달린 태극기는 그분의 나라 사랑하는 마음을 닮아 언제나 나부끼고, 방학 때마다 충‧효‧예 교실의 깃발도 세로로 서서 펄럭인다. 무궁화와 태극기 그리고 후학을 그 분만큼 애틋하게 여기는 현대인들이 얼마나 되는지. 경로당 현관문을 열면 열 평 정도의 사무실에는 월회 때 쓰는 프로그램 문구부터 일상의 다양한 항목들이 촘촘하게 적힌 흰 칠판이 눈에 들어온다. 칠판에는 또 후학의 프로그램 준비도 세세하게 적혀있다. 요즘은 방학이라 충효‧ 한자교실에서 열두 명 정도의 초‧중‧고교 학생들이 눈동자를 반짝이며, 효와 예와 덕 공부에 여념이 없다. 그분은 백발의 노구에도 불구하고 하루도 빠짐없이 가르침에 힘쓰며 한자급수를 따는 학생에게는 상장과 장학금까지 주며 공부를 장려한다. 심지어 술을 드신 뒷날도 힘든 몸을 추슬러 아침 9시에는 분필을 잡는다. 이런 날엔 글씨가 약간 비틀거린다는 푸념이다. 후박(厚薄)을 가리지 않고 묵묵히 견디며 먼 미래의 나무 심기에 심혈을 기울이는 그분을 보면서, 나는 지금까지 사회를 위해 무엇을 했냐고 반문해본다.
1999년부터 하루도 빠짐없이 그분은 십여 년간 조선일보 생활한자를 스크랩했다. 그래서 3000회 기념 활용담 수기공모에도 참가하여 받은 상품 『세계문학전집』백 권을 손자손녀가 다니는 초등학교에 기증했다. 그 나이에 걸맞지 않게 늘 컴퓨터를 가까이 하고 인터넷을 사용하여 오늘의 뉴스, 여러 좋은 글귀들을 다운받아 칼라로 인쇄해서 월회 때마다 어르신들 교육용으로 나누어 주곤 한다. 경탄스러운 열정이 아닐 수 없다.
청춘이란 인생의 어느 시기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마음의 상태를 두고 말하는 것이다.
뛰어난 창조력, 불타는 정열
비겁함과 나약함을 떨쳐버릴 수 있는 용맹성
그리고 안이함 따위는 뿌리쳐 버리는
모험심을 가지고 살아가는 상태를 청춘이라고 하는 것이다
세월이 흘러가기 때문에 늙어가는 것이 아니다
이상을 상실했을 때 비로소 늙는 것이다
세월은 살갗에 주름을 만들 뿐이지만
정열을 상실했을 때 정신은 폐물이 된다.
사무엘 울만이 쓴 시이다. 시인이 이분을 만난다면 기뻐할 것이다. 시인의 시를 온전히 살려내고 있는 사람을 보게 될 것이니 말이다. 회장님은 십삼 년간 중병에 걸린 아내를 잘 간호했고, 그때 매일 밥을 씹어 어머니 입에 넣어드리며 효심을 실천한 막내아들을 먼저 보내고도 꺼지지 않은 열정은 놀랍고 아름답다. 오히려 위로받아야 할지도모를 그분이 무슨 힘으로 남들을 위해 봉사하고 삶에 대한 열정을 불태울 수 있을까. 우범지대 순찰과 학생들 등‧하교 길에 보안관의 봉사를 하다보면 하루 시간이 짧아 아쉽다는 한결같은 청춘, 그분의 삶이 나의 멘토가 된다.
동네 한 바퀴를 돌다보면 산책을 나온 그분과 마주칠 때가 많다. 어느 저녁 늦은 시간 조그만 가게 앞에서 오뎅과 옥수수를 잔뜩 사고 있던 그분, 혼자인데 왜 그렇게 많이 사느냐는 내 질문에 가게 주인의 삶이 힘겹다는 풍문을 들었기에 그렇게라도 해야 마음이 편하다고 했다. 가게 문이 닫힌 날은 주인에게 무슨 변고라도 있는지 노심초사 살피기도 한다. 섬세한 그 마음은 샘물처럼 흘러, 흘러 때로는 내게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을 일깨운다. 물론 외롭고 힘든 누군가의 가슴에도 흠뻑 가 닿기도 하겠지. 이웃에게 나눌 수 있음을 보람이라고 말하는 그분의 인생은 늘 푸른 상록수처럼 멋지다. 마을 어귀마다 우뚝 서 있는 수호신 나무 같다. 부처님이 깨달음을 얻기까지 함께 했던 보리수나무일까. 그 그늘아래 들어설 때면 산다는 것은 무엇이고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나도 모르게 생각하게 된다. 내 이 짧은 글로 다 표현하기 어려운 그분의 고고한 인품과 향기가 우리 동네 골목골목 스며들어 오래오래 샘물처럼 흐르기를 바란다.
구삼리: 통영 출생
한남대학교(대전)국어국문학과 졸업
국제문단문인협회‧ (사)한국문인협회 회원
공저:「우리 꿈을 향한 불꽃」외 다수
e-mail:ksl8814@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