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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벽선사와 배휴의 문답 2부
(완릉록과 혜명경)
일 러 두 기
황벽선사의 완릉록이란 황벽선사와 배휴와의 문답집인 전심법요의 후속편에 해당되며, 배휴가 완릉이란 곳에서 자사(도지사)를 지내면서 기록했기 때문에 완릉록이란 이름이 붙여졌다.
완릉록에 이어 중국의 화양선사가 1800년 경에 저술한 것으로 알려진 혜명경을 소개하고 있다. 혜명이란 단전을 의미하는데 참된 여래의 성품도 단전에서 품어 나오는 것이며 누진통도 단전으로 말미암아 이루는 것이며 사리도 단전으로 말미암아 연마되는 것이며 대도까지도 이곳 단전을 통해 이루어진다고 화양선사는 말씀하였다.
혜명경을 소개하는 것은 여태껏 바른 견해만을 설하고 계신 황벽선사의 말씀과 위배되는 것이 아닌가라고 반문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벽에 옷을 걸고자 하면 작은 못이라도 튀어나와야 걸 수 있듯이 우리는 너무 오랜 시간에 걸쳐 찾고 구하는 마음의 습성으로 길들여진 탓에 그러한 습성으로부터 단박 벗어나지는 못한다.
붓다도 위빠사나라는 호흡법을 수련하였고 제자들에게 권고하였으며 외도들이 찾아와 여러 가지 희론을 벌이고자 할 때에도‘나는 단지 호흡하는 빈 그릇’이라면서 자기주장을 펼치려는 외도들과의 논쟁을 삼갔던 것이다.
혜명경에 소개된 호흡법을 통해 무언가를 추구하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바른 견해를 늘 잊지 않기 위해서는 들이쉬는 호흡을 단전 밑으로 깊숙이 끌어내리고, 내 쉬는 호흡은 정수리부분으로 끝까지 밀어 올리면서 내쉬어야 한다.
생명체는 숨 쉬지 못하면 그 즉시 생명이 떠나기 때문에 깊이 들이마시고 내 쉬는 호흡법을 연마하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할 것이다.
화양선사는 혜명경을 소개하면서 이르길, 호흡이 임맥과 독맥을 지나는 법륜육후도 등의 도태도란 원래 능엄경 원본에 실려 있었으나 속된 승려들에 의해 도중에 삭제하여 전하지 않은데 있다. 이제 수도자들에게 여래의 진실한 도태의 공부가 있음을 밝히는 바라고 말씀하였다.
능엄경에서 오십 오위에 이르는 여러 수행위 중에서 도태도가 실려 있었을 법하지만 아마도 호흡법을 소개하면 방편에 집착한다고 생각되었기에 삭제시켰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숨을 쉬지 못하면 살아가지 못하는 존재인 까닭에 평소보다 깊이 숨을 쉬는 위빠사나를 행하는 것은 집착이라고 할 수 없다. 호흡이 길수록 마음도 안정되고, 육신의 건강도 챙길 수 있다면 굳이 마다할 이유는 없을 것이다.
무각합장
목 차
1. 도는 마음을 깨치는 데 있다 --------------------------- 7 2. 자기의 마음을 알자 ---------------------------------- 10
3. 기틀을 쉬고 견해를 잊음 ----------------------------- 19
4. 마음과 성품이 다르지 않다 --------------------------- 26
5. 모양 있는 것은 허망하다 ----------------------------- 31
6. 한 마음의 법 ---------------------------------------- 42
7. 모든 견해를 여읨이 무변신보살 ----------------------- 47
8. 한 법도 얻을 수 없다 -------------------------------- 57
9. 한 물건도 없음(無一物) ------------------------------ 60
10. 마음 밖에 다른 부처가 없다 ------------------------- 64
11. 보리의 마음 ---------------------------------------- 77
12. 수은의 비유 ---------------------------------------- 83
13. 무연자비 ------------------------------------------- 93
14. 정진(精進)이란? ------------------------------------ 98
15. 무심한 행 ------------------------------------------100
16. 삼계(三界)를 벗어남 ------------------------------- 104
17. 마음이 부처 --------------------------------------- 112
18. 여래의 청정선 ------------------------------------- 130
19. 양의 뿔 ------------------------------------------- 161
20. 여래의 심부름꾼 ----------------------------------- 167
21. 무분별지는 얻을 수 없다 --------------------------- 172
22. 견성이란? ----------------------------------------- 179
23. 한 생각 일어나지 않으면 곧 보리 ------------------- 195
24. 둘 아닌 법문 -------------------------------------- 202
25. 한 마음의 법 가운데서 방편으로 장엄하다 ----------- 207
26. 인욕선인 ------------------------------------------ 212
27. 한 법도 얻을 수 없음이 곧 수기 -------------------- 218
28. 법신은 얻을 수 없다 ------------------------------- 222
29. 마셔보아야 물맛을 안다 ---------------------------- 227
30. 참된 사리(舍利)는 볼 수 없다 ---------------------- 233
31. 일체처에 마음이 나지 않음 ------------------------- 237
32. 조계문하생 ---------------------------------------- 241
33. 계급에 떨어지지 않으려면 -------------------------- 251
34. 유행(遊行) 및 기연(機緣) -------------------------- 254
35. 술찌꺼기 먹는 놈 ---------------------------------- 262
36. 배휴의 헌시 --------------------------------------- 263
혜명경그림편 ---------------------------------------- 266
혜명경(慧命經) -------------------------------------- 274
혜명경 본문 ----------------------------------------- 285
불법의 최대의 진수인 선의 기밀에 대한 글 ------------ 300
진원이란 승려의 열세 가지 질문 ---------------------- 304
1. 도는 마음 깨치는 데 있다.
裵相公 問師曰 山中四五百人 幾人 得和尙法
師云 得者 莫測其數 何故 道在心悟 豈在言說 言說 祇是化童蒙耳
배휴가 황벽스님께 여쭈었다.
'산중(山中)의 사오백명 대중 가운데서 몇 명이나 스님의 법을 얻었습니까?'
대사가 말씀하셨다.
'법을 얻은 사람은 그 수를 헤아릴 수 없다. 왜냐하면 도는 마음을 깨치는 데 있는 것이지 어찌 언설에 있겠느냐? 언설이란 다만 어린아이를 교화할 뿐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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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깨친다는 것은 무엇인가, 물드는 마음의 습성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마음이 물드는 습성을 지녔기에 보고 듣고 맛봄에 집착하게 되고 집착하면서 과거를 비교하며 좋고 나쁨을 가늠하고 취사선택의 의도를 일으키는 것이다.
좋은 것은 취하고 나쁜 것을 버리려는 의도를 지닌 탓으로 고통이 생겨난 것이다. 좋은데 헤어져야 하고 싫은데 만나야 하는 것이 고통이기 때문이다. 결국 취사선택의 의도가 아상이며 아상을 지님으로 해서 고통의 늪으로 빠져들었기에 무명의 존재가 된 것이다.
아상을 일으키는 원인이란 지금 현재하는 보고 들음을 통해 과거의 이미지와 비교하기 때문이며 과거의 이미지를 손쉽게 끌어올 수 있는 것은 언어가 대단히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언어를 사용하지 못하는 동물은 과거를 끌어올 수 있는 도구가 없기에 인간만치 아상이 깊지 못하다. 따라서 언어란 과거를 기억하며 미래를 꿈꾸는데 없어서는 안 될 매개체이다.
만일 언어가 없다면 기쁨과 슬픔에 대하여 마음이 큰 폭의 높낮이를 지니지 않는다. 기쁨과 슬픔이 교차하기에 인간은 희로애락에 발목이 잡혔으며, 그로 인해 기쁨을 추구하면서 슬픔을 회피하려는 나약한 심성을 지니게 되었다.
붓다는 어느 날 탁발을 나갔는데 마을 사람들이 이웃 마을에 잔치가 있어서 모두 떠나 텅 비어 없었다. 붓다는 탁발을 하지 못하고 정사로 돌아오던 중에 마음속에서 다음과 같은 생각이 일어났다.
지금쯤이면 혹시 마을 사람들이 돌아왔을지도 모르니 다시 마을로 가면 탁발을 할 수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떠올랐던 것이다. 붓다는 즉시에 말하길, 물러가거라. 악마여, 나는 너의 정체를 알고 있다고 하였다.
이와 같이 붓다께서 규정하는 악마의 존재란 과거를 기억하며 미래를 꿈꾸는 의도를 지닌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아상을 일컫는 것이며 붓다는 말씀하시길, 눈이 본 것, 귀로 들은 것 맛본 것 등에 매달려 집착하는 것이 악마의 갈고리다.
현명한 사람이라고 좋고 나쁜 것을 모르는 것이 아니다. 실은 어리석은 사람보다 더 잘 깨달아 안다. 그러나 보고 들은 것에 대한 집착을 일으키지 않기 때문에 그의 마음은 항상 안락하고 평화로운 것이라고 말씀하였다.
우리는 언어와는 떨어져 살 수 없을 만치 언어적 관념에 물들어버렸다. 물론 언어를 통해 인간의 의식은 신의 영역을 넘볼 정도로 무한정 확장되었다. 그러나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하고 정체된 것은 아상을 일으키는 용도로써 사용되는 까닭일 것이다.
아상이란 하고자 하는 의도를 지닌 것이며 아상으로 인해 타인과는 별개로 존재하는 나를 주장하고 있다. 나와 내 것에 매달릴수록 고립되면서 스스로의 벽을 높이 쌓아올리고 있다.
2. 자기의 마음을 알자.
問 如何是佛
師云 卽心是佛 無心是道 但無生心動念 有無長短 彼我能所等心 心本是佛 佛本是心 心如虛空 所以云 佛眞法身 猶若虛空 不用別求 有求皆苦 設使恒沙劫 行六度萬行 得佛菩提 亦非究竟 何以故 爲屬因緣造作故 因緣 若盡 還歸無常 所以 云 報化 非眞佛 亦非說法者 但識自心 無我無人 本來是佛
'어떤 것이 부처입니까?'
'마음이 곧 부처요 무심(無心)이 도이니라. 다만 마음을 내어서 생각을 움직인다든지, 혹은 있고 없음(有無), 길고 짧음, 너와 나, 나아가 주체니 객체니 하는 마음이 없기만 하면, 마음이 본래로 부처요 부처가 본래 마음이니라.
마음은 허공과 같기 때문에 말씀하시기를 '부처님의 참된 법신은 허공과 같다'고 하였다. 그러나 부처를 따로 구하려 하지 말 것이니, 구함이 있으면 모두가 고통이니라.
설사 오랜 세월 동안 6도(六度) 만행을 실천하여 부처님의 깨달음을 얻는다 하더라도 그것은 결코 완전한 구경(究竟)이 되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인연의 조작에 속하기 때문이다.
인연이 다하면 덧없음으로 돌아가고 만다. 그러므로 이르시기를 '보신과 화신은 참된 부처가 아니요 또한 법을 설하는 자가 아니다.'라고 하였다. 다만 자기의 마음을 알기만 하면 나(我)라고 할 것도 없고 또한 남(人)도 없어서 본래 그대로 부처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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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벽스님은 이르길, 마음이 곧 부처요 무심(無心)이 도라고 하였다. 무심이란 마음이 없다는 의미가 아니라, 다만 생각을 움직이려는 의도를 지녔다든지, 혹은 있고 없음(有無), 길고 짧음, 너와 나, 나아가 주체니 객체니 하는 상대적 관념을 벗어난 상태를 의미한다.
생각을 움직이려는 의도를 지녔다는 것은 보고 들음을 통해 좋고 나쁨을 구별하면서 취사선택의 뜻을 일으키는 것이다. 이처럼 좋고 나쁨을 구별하려는 것은 이것과 저것을 구분 짓는 상대적 관념에 젖어있기 때문이다.
상대적 관념에 물들었다는 것은 언어가 내면을 흘러 다니는 까닭이다. 언어는 항상 반대편을 동반하고 나타나기에 있다면 없음을 떠올리고, 길다면 짧은 것을 알아야 하고, 나라고 하면 나 아닌 너가 있어야 한다. 이처럼 이것과 저것이 제각각 반대편으로 자리 잡고 나타난 것이 언어적 관념이며 상대적인 세계이다.
그렇기에 언어적 관념으로 이루어진 상대적 습성에 물든 마음으로는 이것과 저것이 달라야 하기에 좋고 나쁨을 비교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한 비교가 아상을 일으키는 원인이며 마음이 아상으로 물들었기에 마음이 본래로 부처이며, 부처가 나를 떠나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 본래 마음이라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우리들 본래 마음이 부처이면서도 아상에 물든 탓으로 마음이 부처임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마음을 다스리고 항복받아야 부처가 되는 줄 안다. 그러나 무언가를 구하고 얻으려는 의도를 지닌 탓으로 아상이 나타나게 된다.
우리가 마음을 항복받으려는 것은 모든 문제를 일으키는 아상으로 인한 것인데 여전히 의도를 지닌 아상으로 하여금 아상을 항복받으려는 것은 문제를 바로보지 못한 것이다.
남쪽을 북쪽으로 잘못 아는 미혹에 빠진 사람은 아무리 열심히 목표를 향해가지만 결국 잘못된 노력을 행하는 것이기에 원하는 바를 이루지 못한다. 그것이 무명이며 자신이 미혹에 빠진 것을 스스로 알지 못하면 무명에서 벗어날 기약은 없다.
그렇기에 마음을 깨친다는 것은 무언가 깨칠 마음이 있어서 실체를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의도를 일으키는 아상의 마음이란 본래 없음을 의미한다. 그것을 무위라고 하며 행위자가 존재하지 않음을 일컫는다.
아상의 소멸이란 마음과 싸워서 부처를 구하지 않는 것이며, 구하려는 바를 쉬고 또 쉬는 것이다. 설령 힘든 고행을 통해 높은 산을 오르듯 마음을 정복함으로서 부처를 구하고자 한다면 그것은 결코 완전한 궁극의 길을 성취할 수 없다고 황벽스님은 말씀하고 있다.
의도를 지닌 것들은 모두가 아상일 뿐이니 아상을 손에 쥐고 달린다면 아상 없음을 성취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붓다는 원각경에서 다른 경전에서는 논하지 않은 매우 의미심장한 말씀을 하였다.
‘선남자여, 일체 보살들과 말세 중생들이 먼저 비롯함이 없는 윤회의 근본을 끊어야 하느니라. 모든 생명체는 전부 음욕으로 인해서 목숨을 받은 것이니 윤회는 애욕이 근본이니라. 중생들이 목숨을 사랑하는 것이 도리어 탐욕의 근본에 의지함이니 애욕은 원인이요 목숨을 사랑함은 결과이다.’
‘갖가지 경계가 사랑하는 마음에 어긋나면 미워하고 질투함을 내어서 여러 가지 업을 지어 삼악도에 떨어진다. 탐욕이 싫어해야 될 것인 줄 알고 업을 싫어하는 도를 사랑하여, 악을 버리고 선을 즐겨하면 다시 천상계나 인간계에 태어난다.’
‘또한 모든 애욕이 싫어하고 미워해야 할 것인 줄 아는 까닭에 애욕을 버리고 버리는 법을 즐겨도 도리어 애욕의 근본을 도와서 문득 유위의 증상선과(增上善果)를 나투나니 모두 윤회하는 까닭에 성스러운 도를 이루지 못한다. 그러므로 중생이 생사를 벗어나고 모든 윤회를 면하고자 한다면, 먼저 탐욕을 끊고 갈애를 없애야 하느니라.’ 라고 말씀하였다.
우리가 살펴야 할 점은 성스러운 도를 이루고자 하여 탐욕과 갈애의 버리는 법을 즐겨한다면 그것도 또한 저것을 얻기 위해 이것을 버리려는 작위를 지닌 유위행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것이 생사의 바퀴를 돌리며 고통을 이어가는 마음이며 작위를 지닌 사유를 쫓아 마음이 일어난 것은, 모두가 육진이며 보고 들음에 앎을 일으켜 허망한 생각으로 인한 기운이니, 사실은 마음의 본체가 아닌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가 마음으로 일으키는 모든 것은 온 세상의 시작하고 마치고 생기고 멸하고 그침이 순환 왕복하는데도 갖가지로 집착하고 버리려는 의도를 나타내면서 무명의 늪을 전전하고 있다.
그러므로 황벽스님은 경에서 말씀한 비유를 들어 말하기를 '보신과 화신은 참된 부처가 아니요 또한 법을 설하는 자가 아니다.'라고 하였다. 즉 궁극의 길을 성취한다는 것은 보신이나 화신을 구함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이다.
보신이란 생각이며 화신은 육신에 해당된다. 육신의 감각기관을 통해 생각을 일으킨다고 하지만 육신은 물질이라 스스로 생각을 일으킬 수는 없다. 만일 육신이 생각을 일으킨다면 죽음이라는 현상은 생겨날 수 없다.
죽은 뒤에도 육신의 눈이 보고, 귀가 듣고, 입이 스스로 말한다면 무엇을 죽음이라고 할 것인가, 이와 같이 육신을 통해 생각을 일으키는 무언가가 존재하기에 마음이 생겨나서 법을 설하기도 하고 눈으로 보기도 하며 입을 움직여 말도 할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이 법신이며 법신은 허공과 같은 우리들 본성의 마음이다.
우리가 기쁨과 슬픔에 물들기도 하지만 슬픔과 기쁨이 번갈아 나타나는 것은 물드는 바가 없는 까닭이기도 하다. 만일 한번 물들면 지워지지 말아야 한다. 그렇다면 기쁨과 슬픔을 느끼기란 불가능하다. 마치 허공이 밤의 어둠으로 물든다면 어두우면 끝까지 어둡고 밝으면 끝까지 밝을 것이다.
그러나 허공은 밝음과 어둠에 물드는 바가 없기 때문에 밤과 낮이 교차할 수 있다. 우리가 물들지 않는 마음이면서도 물드는 것처럼 기쁨과 슬픔을 느끼는 것은 언어적 관념으로 행해지는 것이다.
그러나 언어적 관념도 언제까지나 붙들고 있을 수 없으므로 견딜 수 없을 것 같은 슬픔도 시간이 지나면 벗어날 수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어디에도 물드는 바가 없으며 한결같은 마음이 우리들 본래 마음이다.
그 마음은 육신으로 몸을 받고 살아있는 순간에도 함께 하며, 육신이 소멸되어 생멸의 마음까지 흔적 없이 사라졌을 때에도 늘 변함없이 존재하고 있다. 우리가 그것을 알지 못하기에 무명의 존재로써 생사의 바다에서 허우적거리며 끝없는 고통을 받고 있는 것이다.
언어적 관념을 통해 생겨난 거짓된 마음을 내 마음인 줄 아는 까닭에 기쁨과 행복감에 물들고 싶어하며, 불행과 슬픔을 멀리하려는 아상의 마음을 내 마음인 줄로 굳게 믿으면서 무명이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다.
황벽스님은 이르길, 마음은 허공과 같기 때문에 찾고 구함이 있으면 모두가 고통이라고 하였다. 만일 본성의 마음이 우리들 마음이라면 물드는 바가 없을 것이다. 물드는 바가 없다는 것은 변해감이 없다는 것이며 변해감이 없다는 것은 언제나 늘 그대로인 것이다.
그렇다면 언제나 늘 그대로인 허공과 같은 것인데 허공을 우리가 무슨 재주로 손에 쥘 것이며 무엇을 가리켜 이것이 내 본성의 마음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허공은 변해감이 없으므로 언제나 그대로이다. 언제나 그대로인 것은 공간과 시간의 관념을 초월하여 존재한다. 즉 여기에는 있고 저기는 없다거나, 어제는 있었는데 오늘은 사라졌다거나 하는 것들은 모두가 공간과 시간의 영향을 받고 있는 것이다.
다만 어디에도 물들지 않는 본성이 자기의 마음이라고 알면 될 뿐 찾고 구하려는 것은 부질없는 망상일 뿐이니 고통만 더할 뿐이다. 사실 알고 보면 우리가 부질없는 망상분별이라 해서 떨쳐버리고 싶은 것도 허망하고 들뜬 마음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원각경에서 다시 말씀하셨다. ‘선남자여, 그러므로 일체 장애가 곧 깨달음이며 지혜와 어리석음이 통틀어 반야가 되며, 보살과 외도가 성취한 법이 한 가지 보리이며, 무명과 진여가 다른 경계가 없으며, 지옥과 천궁이 다 정토가 되며, 성품을 깨친 사람이나 못 깨친 사람이나 모두 불도를 이루며, 일체 번뇌가 필경 해탈이라, 법계 바다의 지혜로써 모든 상을 비추어 요달함이 마치 허공과 같으니, 이것을 여래가 원각에 수순하는 것이라 이름하느니라.’
‘이와 같이 깨달음이 허공에 두루하면 곧 불도를 얻으리라. 일체 여래의 원각이 청정하여 본래 닦아 익힐 것과 닦아 익힐 자도 없으나, 일체 보살과 말세 중생이 이를 깨닫지 못하므로 환법의 힘으로 닦아 익히므로 수많은 방편과 이십 오종의 선정이 있느니라.’
‘선남자여, 다만 모든 보살과 말세 중생이 일체시에 머물러서 망념을 일으키지 말며, 또한 모든 망심을 쉬어 멸하려 하지도 말며, 망상 경계에 머물러 알려고 하지도 말며, 알 것도 없음에서 진실함을 분별하지도 말지니라. 이것이 곧 원각의 성품을 수순함이니라’ 라고 말씀하였다.
비록 이와 같이 원각경에서 말씀한 것이나 황벽스님이 말씀한 바와 같이 ‘부처를 따로 구하려 하지 말 것이니, 구함이 있으면 모두가 고통이니라.’ 라고 하였지만 우리는 선뜻 그러한 도리를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만치 내 삶은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너무나 소중하기 때문에 남들이 할 수 없는 일을 해내야 하고, 남들이 가질 수 없는 것을 가져야 하고 인정받고자 하며 과시하려는 아상의 마음이 뿌리 깊게 존재하는 까닭일 것이다.
3. 기틀을 쉬고 견해를 잊음
問 聖人無心 卽是佛 凡夫無心 莫沈空寂否
師云 法無凡聖 亦無沈寂 法本不有 莫作無見 法本不無 莫作有見 有之與無 盡是情見 猶如幻 所以云 <見聞 如幻 知覺 乃衆生> 祖宗門中 祇論息機忘見 所以 忘機則佛道降 分別則魔軍熾
'성인의 무심은 곧 부처의 경지이지만 범부의 무심은 공적한 상태에 빠지는 것이 아닙니까?'
'법에는 범부와 성인의 구별이 없으며 또한 공적한 상태에 빠지는 것도 없다.
법이 본래 있는 것이 아니지만, 없다는 견해도 내지를 말라. 또한 법은 본래 없지 않으나, 있다는 견해도 내지 말라. 법이 있느니 없느니 하는 것은 모두 뜻(情)으로 헤아리는 견해로서, 마치 허깨비와도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말씀하시기를 '보고 듣는 것은 마치 허깨비와 같고, 사량하고 분별하는 것이 바로 중생이니라'고 하였다.
조사문중에 있어서는 오로지 마음을 쉬고 알음알이를 잊는 것을 논할 뿐이다. 그러므로 마음을 쉬어 버리면 부처님의 도가 융성해지고, 분별하면 마구니의 장난이 치성해지느니라.'
☞☞
비록 황벽스님이 마음에 대해서는 어떠한 토를 달지 말고 잊는 것이 옳은 일이라 할지라도 우리는 마음이 멈추지 않는다. 산만한 마음이 즉각 멈추어서 아상이 없는 상태로 동요하지 말았으면 하지만, 잠시라도 가만히 있으면 무료함에 빠지고 무언가를 하기 위해 마음이 움직이기 시작한다.
앞날에 대한 근심 걱정이 쉬지 않고 솟구치는 마음을 잊어버리고자 한들 어떻게 단칼에 잊을 수 있겠는가,
배휴는 묻고 있다. '성인의 무심은 곧 부처의 경지이지만 범부의 무심은 공적한 상태에 빠지는 것이 아닙니까?'
즉 생각 없음의 상태가 성인이라면 무심하여 부처의 경지라고 할 수 있지만 범부라면 공적한 상태에 빠지는 것이 아니냐고 묻는다.
옛 선사들은 이르길, 좌선 수행을 하면서 아무런 생각 없이 공적한 상태에 빠져든 것을 가리켜 귀신굴에 빠졌다고 표현하였다. 아마도 배휴는 생각 없는 공적한 상태라면 귀신굴에 빠진 것과 같지 않느냐고 묻는 것이리라.
황벽스님은 배휴의 질문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씀하였다. '법에는 범부와 성인의 구별이 없으며 또한 공적한 상태에 빠지는 것도 없다. 법이 있느니 없느니 하는 것들은 모두 견해를 일으키는 허깨비와 같다고 말씀하고 있다.
배휴가 무심한 마음이란 말을 듣고 성인과 범부로 나누고 있음을 지적한 것이다. 생각 없는 무심한 상태가 성인이라면 부처라 할 수 있지만 범부에게는 공적한 상태가 되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만일 진리가 이 사람에게는 진리가 되고 저 사람에게는 거짓이 된다면 그것은 진리라고 부를 수 없다. 지금 배휴는 범부와 성인을 나누고 있기 때문에 황벽스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양변의 마음이 상대적인 관념이며 언어에 물든 마음이다. 그 마음으로는 황벽선사의 코앞에서 법을 들어도 깨닫지 못한다. 무엇이든 양변으로 나누려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진리의 법을 듣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경험과 기억에 비추어 해석할 뿐이다.
황벽스님은 다시 말한다. ‘그러므로 보고 듣는 것은 마치 허깨비와 같고, 사량 분별하고 인식하고 느끼는 것이 중생이니라. 그러므로 오로지 마음을 쉬어 버리면 부처님의 도가 융성해지고, 분별하면 마구니의 장난이 치성해진다’고 말씀하였다.
황벽스님의 말씀은 이치에 합당하지만 몰록 마음이 쉬어버리는 상태가 저절로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이다. 만일 황벽스님의 말씀처럼 우리가 마음을 다스리기 위한 어떠한 노력도 행하지 않는 것이 옳다고 생각해서 예전처럼 일상에 파묻혀 살아간다고 해도 마음은 결코 달라지지 않는다.
그렇다고 찾고 구하지 말라는 황벽스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마음을 쟁취하려는 노력에 심혈을 기울인다고 해도 그 또한 허공을 움켜쥐려는 것처럼 무모한 일에 지나지 않는다. 이래저래 난관에 봉착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황벽스님 역시도 마음을 깨닫기 전의 상태와 깨달은 상태가 존재한다.
이 상태에서 저 상태로 가려면 무언가를 행하지 않는다면 이룰 수 없는 꿈과 같다. 달마대사는 이르길, 아무 것도 추구하지 않는 마음으로 마음을 닦아야 한다고 하였다.
무엇 때문인가, 마음이란 본래가 텅 비었기 때문이다. 만일 텅 빈 마음인 줄 모르고 닦는다면 마음의 실체를 구하려는 것과 같아서 그러한 노력은 결국 좌절의 쓴 잔을 삼켜야 한다.
텅 빈 허공에서 무엇을 얻을 것이며 무엇을 취할 것인가, 그렇기에 붓다는 생멸심으로 수행의 근본을 삼는다면 모래를 삶아 밥을 만들려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
생멸심으로 마음을 닦고자 하는다는 것은 모양에 집착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렇기에 마음은 실체가 있으며 내가 붙잡을 수도 있으리라 생각한다. 그것은 이미 관념적으로 마음의 모양을 짓고 있는 것이다. 그 마음이 부수어지는 것을 마음이 쉰다고 말하는 것이다.
붓다는 수행의 결실을 얻으려면 그와 같은 생멸심이 아닌 깨어 있음을 통해 수행의 근본으로 삼아야 한다고 하였다. 깨어 있음이란 끊어짐 없는 본성의 마음이다.
우리가 말하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은 모두가 깨어 있음을 통해 드러난다. 본인이 무슨 말을 하고 있으며 무슨 생각과 행동을 하고 있는지도 아는 것은 알아차림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와 같은 알아차림이 깨어있음이며 본성의 마음이다.
마음과 깨어있음은 본질적으로 차원을 달리 한다. 마음은 나타나고 소멸하면서 변하는 과정을 겪지만 깨어있음은 변해감이 없다. 늘 부동의 상태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선사들이 공적한 상태로 수행에 전념하는 것을 가리켜 귀신굴에 빠졌다고 말하는 것은 깨어있음이 본성임을 보지 못한 까닭일 것이다.
그 본성은 골방에 가두어 놓고 죽자고 깨달음을 보려고 한 들 보여질 리가 없다. 보려는 그 마음에 의해 귀신굴로 빠져든 것이다. 깨어있음이란 공적하거나 공적하지 않다거나로 말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다. 그것은 언제 어느 때나 우리와 함께 하는 까닭이다.
깨어 있음을 통해 육신이 움직이고 감각기관이 활동하면서 생각도 일으키고 있다. 만일 육신의 움직임을 마음으로 일으킨다면 분노를 참아야 한다고 마음먹으면 즉각 참을 수도 있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삶이 고통의 늪으로 얼룩진 것이다. 무엇이든 내 마음대로 육신을 움직일 수 있다는 생각이 아상이다. 결국 육신과 마음이 따로 놀기 시작하면서 갈등도 생겨나고 혼란과 고통을 겪고 있다.
깨어있음이 부처라고 해서 그것을 찾고자 한다면 아무 것도 발견할 수 없다. 깨어있음에 대해서는 어떠한 말로도 설명되어질 수 없다. 왜냐하면 그와 같은 마음을 일으키는 순간 그것과는 이미 어긋난 길로 등지고 달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마음이 고요하여 공적한 마음도 알고 산만하여 공적하지 않은 마음도 우리는 알고 있다. 만일 마음만으로 내면의 모든 상태를 알 수 있다면 고요하여 공적하면 마음도 말했을 것이니 공적한 줄 몰라야 하고, 산만하고 바쁜 탓으로 공적하지 않은 마음이라면 마음은 다른 일에 열중하고 있을 테니 자신의 마음이 산만하다는 것도 알지 못해야 한다.
그러나 마음이 스스로 아는 것 아니기 때문에 자신이 어떤 마음을 먹고 있는 지도 알아차리는 것이다. 그래서 남을 귀신같이 속일 수는 있어도 자신을 스스로 속일 수는 없다. 알아차림이 지켜보는 까닭이다.
그와 같이 우리와 늘 함께 하는 지켜봄인데 그것을 찾아 나선다면 점점 멀어질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다. 그래서 옛 선사들은 마음이 공적한 상태로 달마대사처럼 벽을 보고 수행하다보면 언젠가는 깨달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수행자들을 보면서 ‘귀신굴에 빠져 있다’고 말했을 것이다.
그러나 옛 선사들도 귀신굴에 안 빠져있던 선사들은 없다. 황벽스님도 매화꽃향기를 풍기려면 마음의 고삐를 단단히 부여잡고 추운 겨울을 한바탕 지내야 한다고 하였다.
게송으로 말씀하시길.
번뇌를 멀리 벗어나는 일이 예삿일이 아니니
승두를 단단히 잡고 한바탕 공부할지어다.
추위가 한 번 뼈에 사무치지 않았다면
어찌 코를 찌르는 매화향기를 얻을 수 있으리오.
달마대사도 오직 마음을 지켜봄으로써 진리의 문으로 들어섰다고 하였다. 그러나 진리에는 문이 없다. 과거형의 언어적 관념으로는 접근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다만 깨어있음이 본성의 마음이고 본성의 마음이 곧 우리 자신이라면 이런 저런 방법을 취하면서, 자신을 벗어나려는 모든 노력은 부질없는 허황한 일인지도 모른다.
4. 마음과 성품이 다르지 않다
問 心旣本來是佛 還修六度萬行否
師云 悟在於心 非關六度萬行 六度萬行 盡是化門接物度生邊事 設使菩提眞如 實際解脫法身 直至十地四果聖位 盡是度門 非關佛心 心卽是佛 所以 一切諸度門中 佛心 第一 但無生死煩惱等心 卽不用菩提等法 所以道 佛說一切法 度我一切心 我無一切心 何用一切法 從佛至祖 不論別事 唯論一心 亦云一乘 所以 十方諦求 更無餘乘 此衆 無枝葉 唯有諸貞實 所以 此意難信 達磨來此土 至梁魏二國 祇有可大師一人 密信自心 言下 便會卽心是佛 身心俱無 是名大道 大道 本來平等 所以 深信含生 同一眞性 心性不異 卽性 卽心 心不異性 名之爲祖 所以云 認得心性時 可說不思議
'마음이 본래로 부처인데 6도 만행을 다시 닦아야 합니까?'
'깨달음은 마음에 달려 있는 것이지 6도 만행과는 상관이 없느니라. 6도만행이란 그저 교화의 방편으로써 중생을 제도하는 쪽의 일 일뿐이다.
설령 보리심이나 진여(眞如)와 실제의 해탈법신과 나아가 10지 4과 등의 성인의 지위에 도달한다 할지라도 모두가 교화 제도하는 방편의 문일 뿐이어서, 부처님의 마음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느니라.
마음이 곧 그대로 부처이니 교화 제도하는 모든 방편문 가운데서 부처님의 마음이 으뜸이니라. 다만 생사, 번뇌 따위의 마음만 없으면 보리 등의 법을 쓸 필요가 없다.
그러므로 말씀하시기를,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모든 법은 나의 모든 마음을 제도하시기 위함이로다. 나에게 일체의 마음이 없거니, 어찌 일체법을 쓰리오'라고 하였다.
부처님으로부터 역대 조사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다른 것은 말하지 않으셨고, 오직 한 마음만을 말했을 뿐이며, 또한 일불승(一佛乘)만을 말하셨을 뿐이다.
그러므로 말씀하시기를 '시방을 두루 살펴보아도 다시 다른 승(乘)이 없나니, 지금 여기에 남아 있는 대중들은 곁가지와 잎은 없고 오로지 모두 잘 익은 열매들뿐이로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 뜻은 쉽게 믿기가 어렵다. 달마스님이 이 땅에 오셔서 양나라와 위나라, 이 두 나라에 머물렀는데, 오직 혜가스님 한 분만이 자기의 마음을 가만히 믿고 말끝에 문득 마음이 곧 부처임을 알았었다.
몸과 마음이 모두 함께 없음을 이름하여 큰 도라고 하느니라. 큰 도는 본래로 평등하기 때문에, 모든 중생들이 하나의 참 성품으로 같다는 것을 깊이 믿어야 한다.
마음과 성품이 본래 다르지 않으므로 성품이 곧 마음이니라. 마음이 성품과 다르지 않은 사람을 일컬어 조사(祖師)라고 한다. 그러므로 말하기를, '마음의 성품을 알았을 때 비로소 불가사의하다고 말할 수 있도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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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휴는 마음이 쉬는 경지를 이해하지만 어떻게 해야 마음이 쉬는지를 알지 못하고 있다. 그렇기에 다음과 같이 묻는다.
'마음이 본래로 부처인데 6도 만행을 다시 닦아야 합니까?' 즉 본래 부처인 마음이라면 어째서 자신은 부처가 아니냐는 물음과 같다. 그렇기에 어떤 수행을 통해 마음을 닦아야 하느냐고 묻는 것이다.
황벽스님은 배휴의 마음이 요동침을 바라보고 있다. 방법에 매달려 있기 때문이다. 방법에 매달려 있다는 것은 여전히 마음의 습성에 물든 것이다.
결과에 관심을 가질 뿐이며 이것과 저것 중에서 어떤 것을 택해야 자신의 입장에 맞는지를 가늠하고 있다. 황벽스님은 배휴의 깨달음에 대한 집착이 불길처럼 타오르는 것부터 잠재워야 한다. 그래서 말한다. ‘깨달음은 마음에 달려 있는 것이지 6도 만행과는 상관이 없느니라.’
6도 만행이란 그저 중생을 제도하는 방편일 뿐이며, 부처님의 마음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느니라. 마음이 곧 그대로 부처이니 모든 방편 가운데서 부처님의 마음이 으뜸이니라. 다만 생사, 번뇌 따위의 마음만 없으면 보리 등의 법을 쓸 필요가 없다. 모든 법은 마음을 제도하기 위함이니 마음이 없다면 어찌 일체법을 쓸 필요가 있겠느냐고 하였다.
배휴의 입장에서는 속이 타들어 갈 것이다. 어떻게 해야 부처를 이루고 깨달음을 얻어야 하느냐고 묻는데, 황벽스님은 계속 방편이란 어리석은 중생을 제도하기 위한 것이라고만 말씀하고 있다.
만일 황벽스님이 배휴에게 이러저러한 방편을 행하면 깨달음을 얻을 것이라고 말한다면 깨달음을 얻은 조사라고는 말할 수 없다. 무언가 깨달음의 실체를 인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배휴가 황벽스님이 던져준 방편을 취해 깨달음을 얻고자 죽자고 달린들 몸만 고달플 것이다.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무언가가 필요한 배휴에게 방편이 무슨 필요가 있느냐며 딴 소리만 늘어놓고 있는 황벽스님이 답답하기도 할 것이다. 시원하게 속이 뻥 뚫리도록 해결책을 제시해 주었으면 하는데도 영 풀리지 않고 속은 답답하다.
황벽스님은 안절부절 속이 타는 배휴를 아랑곳없이 배휴의 의도와는 다른 말씀만 하고 있다. ‘부처님으로부터 역대 조사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오직 한 마음만을 말했을 뿐이며, 몸과 마음이 모두 함께 없음을 이름하여 큰 도라고 하느니라.’고 말씀하신다.
배휴가 듣고자 하는 것은 ‘큰 도란 몸과 마음이 모두 함께 없음을 이름한다’는 것이 아닐 것이다. 무언가 있어야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있지만 몸과 마음이 모두 없다면 도무지 어찌 할 방법도 떠오르지 않을 것이다.
배휴의 머릿속은 온통 깨닫고 싶은 마음뿐일 것이다. 이처럼 방법에 매달리게 되면 다른 것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다. 그런 상태에서는 어떤 방법을 제시하더라도 덥석 물게 된다. 결국의 아상의 먹이가 될 뿐이다.
황벽스님이 배휴와의 문답에서 어떤 방법도 제시하지 않은 것은 그것이 궁극의 길이기 때문이다. 마음이 무언가를 갈구한다는 것은 아상의 마음이 불타기 때문이다.
만일 깨달음이 얻을만한 무언가가 있다면 배휴는 아상의 마음으로 깨달음을 취하려 할 것이다. 그러나 아상의 손바닥에 놓여질 수 있는 것은 깨달음이라고 할 수 없다. 아상의 불구덩이로 쓸려갈 것이기 때문이다.
5. 모양 있는 것은 허망하다
問 佛度衆生否
師云 實無衆生如來度者 我尙不可得 非我 何可得 佛與衆生 皆不可得
云 現有三十二相及度衆生 何得言無
師云 凡所有相 皆是虛妄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 佛與衆生 盡是汝作妄見 只爲不識本心 作見解 作佛見 便被佛障 作衆生見 被衆生障 作凡作聖 作淨作穢等見 盡成其障 障汝心故 摠成輪轉 猶如 放一捉一 無有歇期 一等是學 直須無學 無凡無聖 無淨無垢 無大無小 無漏無爲 如是一心中 方便勤莊嚴 聽汝學得三乘十二分敎 一切見解 摠須捨却 所以 除去所有 唯置一牀 寢疾而臥 祇是不起諸見 無一法可得 不被法障 透脫三界凡聖境域 始得名爲出世佛 所以云 <稽首如空無所依 出過外道> 心旣不異 法亦不異 心旣無爲 法亦無爲 萬法 盡由心變 所以 我心空故 諸法空 千品萬類 悉皆同 盡十方空界 同一心體 心本不異 法亦不異 祇爲汝見解不同 所以差別 譬如諸天 共寶器食 隨其福德 飯色 有異 十方諸佛 實無少法可得 名爲阿뇩菩提 祇是一心 實無異相 亦無光彩 亦無勝負 無勝故 無佛相 無負故 無衆生相
云 心旣無相 豈得全無三十二相八十種好 化度衆生耶
師云 三十二相 屬相 凡所有相 皆是虛妄 八十種好 屬色 若以色見我 是人 行邪道 不能見如來
'부처님께서 중생을 제도하십니까?'
'정말로 여래께서 제도할 중생은 없느니라.
나(我)도 오히려 얻을 수 없는데 나 아님이야 어찌 얻을 수 있겠느냐! 부처와 중생을 모두 다 얻을 수 없느니라.'
'현재 부처님의 32상(相)과 중생 제도가 분명히 있는데 스님께서는 어찌 없다고 말씀하십니까?'
'경에서 말씀하시기를, '무릇 모양이 있는 존재는 모두가 허망하니, 만약 모든 모양을 보되 모양이 아닌 줄을 알면 곧 여래를 보게 되느니라'고 하셨다.
부처니 중생이니 하는 것은 모두 네가 허망하게 지어낸 견해로서, 오로지 본래의 마음을 알지 못한 탓으로 그 같은 잘못된 견해를 내게 된 것이니라.
부처의 견해를 내는 순간 바로 부처에 끄달리고, 중생의 견해를 내는 순간 중생에 끄달린다. 범부다 성인이다 하는 견해를 내고, 더럽느니 깨끗하다느니 하는 견해를 내는 등이 모두 그 장애를 받느니라.
그것들이 너의 마음을 가로 막기 때문에 결국 윤회하게 된다. 이것은 마치 원숭이가 무언가를 들었다 놨다 하느라고 쉴 때가 없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진정한 배움이란 모름지기 배울 것이 없어야 한다. 범부도 성인도 없고 깨끗함도 더러움도 없으며, 큼도 없고 작음도 없으며 번뇌도 없고 인위적 작위도 없다. 이와 같은 한 마음 가운데서 바야흐로 방편으로 부지런히 장엄하는 것이다.
설혹 네가 3승 12분의 가르침과 모든 이론들을 배운다 하더라도, 그 모든 것을 다 버려야 한다. 그러므로 '가진 것을 모조리 없애 버리고 오직 침상 하나만을 남겨 두고 병들어 누워 있다'고 한 말은 바로 모든 견해를 일으키지 않음을 말한 것이다.
한 법도 가히 얻을 것이 없어서 법의 장애를 받지 않고, 삼계의 범, 성의 경계를 훌쩍 벗어나야만 비로소 세간을 벗어난 부처님이라고 하느니라. 그러므로 말하기를 '허공처럼 의지할 바 없음에 머리 숙여, 외도의 굴레를 벗어난다'고 하였다.
마음이 이미 다르지 않기 때문에 법 또한 다르지 않으며, 마음이 하염 없으므로 법 또한 하염이 없다. 만법이 모두 마음으로 말미암아 변한 것이다. 그러므로 나의 마음이 비었기 때문에 모든 법이 공하며, 천만 가지 중생들도 모두 다 같은 것이다.
온 시방의 허공계가 같은 한마음의 본체이니, 마음이란 본래 서로 다르지 않고 법 또한 다르지 않건만, 다만 너의 견해가 같질 않으므로 차별이 있게 되느니라. 비유하면 모든 하늘사람들이 다 보배 그릇으로 음식을 받아먹지만 각자의 복덕에 따라 밥의 빛깔이 다른 것과 같다.
시방의 모든 부처님께서는 실로 작은 법도 얻은 것이 없으니, 이것을 이름하여 무상정각이라 한다. 오로지 한 마음일 뿐, 실로 다른 모양이 없으며, 또한 광채가 빼어날 것도 없고 나을 것도 못할 것도 없다. 나을 것이 없기 때문에 부처라는 모양이 없고, 못할 것이 없기 때문에 중생이라는 모양이 없다.'
'마음이야 모양이 없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어찌 부처님의 32상(相) 80종호(種好)와 중생을 교화하여 제도하는 일이 전혀 없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32상은 모양에 속한 것이니, '무릇 모양 있는 것은 모두 허망하다'라고 한 것이요, 80 종호는 색깔에 속한 것이니, '만약 겉모습으로 나를 보려 하면 이 사람은 삿된 도를 행하는 것이니 여래를 볼 수 없느니라'고 하신 것이다.
☞☞
도저히 참을 수 없었던지 급기야 배휴는 속마음을 털어놓는다. '부처님께서 중생을 제도하십니까?'
제도할 방법은 말하지 않고 원론만 늘어놓는 황벽스님에게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던진 말인 듯하다. 그렇다면 중생을 제도하시는 부처님처럼 황벽스님도 저를 제도해달라는 말이다. 그래도 황벽스님은 꼼짝도 하지 않고 여전히 아상으로 불타는 배휴를 지켜보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정말로 여래께서 제도할 중생은 없느니라. 나도 오히려 얻을 수 없는데 나 아님이야 어찌 얻을 수 있겠느냐! 부처와 중생을 모두 다 얻을 수 없느니라.'
배휴는 다시 묻는다. '현재 부처님의 32상(相)과 중생 제도가 분명히 있는데 스님께서는 어찌하여 없다고 말씀하십니까?' 아마도 배휴는 황벽스님이 자신을 낱낱이 읽고 있다는 생각을 감 잡지 못하고 있다.
황벽스님은 이르길 '만약 모든 모양을 보되 모양이 아닌 줄을 알면 곧 여래를 보게 되느니라'고 하셨다. 부처니 중생이니 하는 것은 모두 네가 허망하게 지어낸 견해로서, 오로지 본래의 마음을 알지 못한 탓으로 그와 같은 잘못된 견해를 내게 된 것이니라.
그러므로 어떤 견해라도 일으키는 순간 모두 그 장애를 받느니라. 그것들이 너의 마음을 가로 막기 때문에 결국 윤회하게 된다. 이것은 마치 원숭이가 무언가를 들었다 놨다 하느라고 쉴 때가 없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고 하였다.
황벽스님은 배휴의 마음이 원숭이처럼 방법에 매달리며 쉴 새 없이 움직이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 이처럼 마음이 오락가락 하므로 그 마음으로 인해 무명의 꿈속을 전전하는 것이다.
만일 꿈속을 벗어나려는 방법을 찾는다면 자신이 꿈속에 있음을 알지 못하는 것과 같다. 꿈인 줄 알면 꿈에서의 모든 움직임을 묵묵히 지켜볼 것이다.
그러한 지켜봄의 자리에서는 꿈이 들어서지 못할 것이며 지켜봄이 본래부터 내 마음인 줄 안다면 허덕거리는 마음도 멈출 것이다. 그러면 더 이상 꿈이 만들어지지 않는다.
세상의 이곳저곳을 둘러보면서 무언가를 얻고 구하기에 여념이 없다는 것은 자신이 꿈꾸고 있음을 알지 못한 까닭이다. 그렇기에 견해를 짓고 의도를 일으키는 아상을 행하고 있는 것이 꿈속임을 스스로 알지 못하면 꿈속을 벗어나기란 불가능하다.
배휴도 지금 자신이 아상의 꿈속에서 허우적거린다는 것을 전혀 눈치 채지 못하고 있다. 자신을 제도해줄 방법을 구하기 때문이다. 황벽스님은 배휴가 무언가를 구하려는 방법을 취하기보다는 불타오르는 견해를 쉬어야 한다고 다음과 같이 말한다.
‘진정한 배움이란 모름지기 배울 것이 없어야 한다. 범부도 성인도 없고 깨끗함도 더러움도 없는 한 마음 가운데서야 비로소 방편으로 부지런히 장엄하는 것이다. 설혹 네가 3승 12분의 가르침과 모든 이론들을 배운다 하더라도, 그 모든 것을 다 버려야 한다.
모든 견해를 일으키지 않으며 한 법도 가히 얻을 것이 없어서 범부와 성인의 경계를 훌쩍 벗어나야만 비로소 세간을 벗어난 부처님이라고 하느니라. 그러므로 말하기를 '허공처럼 의지할 바 없음에 머리 숙이며, 외도의 굴레를 벗어난다'고 말씀하였다.
황벽스님은 배휴에게 이르길, 범부도 성인도 없고 깨끗함도 더러움도 없는 한 마음 가운데서야 비로소 방편으로 부지런히 장엄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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