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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식으로 인한 생사 윤회 과정
瑜伽師地論 1권(전 100권 중)
미륵보살 지음 / 현장법사 한역
☞ 유가사지론 瑜伽師地論의 유가/요가瑜伽는 요가 Yoga를 말한다. 여기에서 요가는 신체 건상을 위한 것이 아니라, 정신적 건강 즉 깨달음에 이르기 위한 과정을 말한다.
유가사/요가사瑜伽師는 요가를 가르키는 지도자를 말한다.
유가사지론 瑜伽師地論은 미륵보살이 지은 것으로, 인도의 브라만교에서 창시된 요가 Yoga는 신체적(하타요가), 정신적(라자요가)이며, 석가세존께서 6년 고행 이전 입산수도하기 전 단계에서 브라만 지도자들을 만나 수행하셨으나, 무색계의 비상비비상채非想非非想處 이상 이르지 못함을 아시고,
세존께서는 브라만의 요가 수행법을 버리고, 홀로 설산으로 들어가시어 보살도의 6년 고행(선정바라밀; 사마타)과 7일 동안 지혜바라밀(위빠사나)을 통해 정각을 이루시면서, 불교의 독특한 요가 Yoga(사마타, 위빠사나)가 정립되었는데, 이를 미륵보살이 유가사지론 瑜伽師地論(전체 100권)으로 저술하였다.
☞ 유가사지론에 나와 있는 심의식 心意識 가운데 사후에 다시 금생에 쌓았던 선악의 과보에 따라, 의식 작용에 의하여 다음 생이 결정(49일)되어 지는 과정을 발췌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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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선심(善心)의 죽음이라고 하는가? 云何善心死
마치 어떤 사람이 목숨이 끊어지려고 할 때 스스로 이전에 닦았던 선법(善法)을 기억하거나 혹은 다시 다른 사람이 그로 하여금 기억하도록 하기 때문에, 이러한 인연에 의해서 이때 신(信) 등의 선법(善法)이 마음[心]에 현행하는 것과 같으며, 내지 추상(麤想<; 사유(死有)의 마지막에 일어나는 선(善)과 불선(不善)의 명료한 생각을 의미>)이 현행하는 것과 같다. 만약 세상(細想<; 정사(正死)의 전찰나의 마음으로서 선(善)ㆍ악(惡)의 법을 기억하지 못하는 무기심(無記心)을 의미>)이 현행할 때는 선심(善心)이 곧 평등[捨]하여 오직 무기심(無記心)에만 머물게 된다. 왜냐 하면 그는 이때에 일찍이 익혔던 선(善)에 대해서도 기억할 수 없고 다른 사람도 또한 그로 하여금 기억하도록 할 수 없기 때문이다. 猶如有一將命終時,自憶先時所習善法,或復由他令彼憶念,由此因緣,爾時,信等善法,現行於心,乃至麤想現行。若細想行時,善心卽捨,唯住無記心。所以者何?彼於爾時,於曾習善,亦不能憶,他亦不能令彼憶念。
무엇을 불선심(不善心)의 죽음이라고 하는가? 云何不善心死
마치 어떤 사람이 목숨이 끊어지려고 할 때 스스로 이전에 익혔던 악법(惡法)을 기억하거나 혹은 다시 다른 사람이 그로 하여금 기억하도록 하기 때문에, 그는 이때 탐(貪)ㆍ진(瞋) 등과 함께하는 모든 불선법이 마음에 현행하는 것과 같다. 내지 추(麤)ㆍ세(細) 등의 상(想)이 현행하는 것은 앞에서 잘 설한 것과 같다. 猶如有一命將欲終,自憶先時串習惡法,或復由他令彼憶念,彼於爾時,貪、瞋等俱,諸不善法,現行於心,乃至麤、細等想現行,如前善說。
또한 선심(善心)을 갖고 죽을 때[死時]는 안락하게 죽는 것이라서, 목숨이 끊어지려고 할 때에 몸을 핍박(逼迫)하는 극히 괴로운 느낌[極苦受]이 없다. 악심(惡心)을 갖고 죽을 때는 괴로워하면서 죽는 것이라서, 목숨이 끊어지려고 할 때에 몸을 핍박(逼迫)하는 매우 심한 괴로운 느낌[極重苦受]이 있다. 또한 선심을 갖고 죽는 자는 어지럽지 않은 색상(色相)을 보고 불선심을 갖고 죽는 자는 어지러운 색상(色相)을 본다. 又善心死時,安樂而死,將欲終時,無極苦受逼迫於身。惡心死時,苦惱而死,將命終時,極重苦受逼迫於身。又善心死者,見不亂色相;不善心死者,見亂色相。
무엇을 무기심(無記心)의 죽음이라고 하는가? 云何無記心死
즉 선(善)과 불선(不善)을 행한 사람과 혹은 행하지 않은 사람이 목숨이 끊어지려고 할 때, 스스로 기억할 수도 없고 다른 사람도 기억하도록 할 수 없어서, 이때에 선심도 아니고 불선심도 아니면서 죽으니, 이미 안락하게 죽는 것도 아니고, 괴로워하면서 죽는 것도 아닌 것이다. 謂行善、不善者,或不行者,將命終時,自不能憶,無他令憶,爾時,非善心、非不善心死,旣非安樂死,亦非苦惱死。
또한 선과 불선을 행한 보특가라(補特伽羅<; Pudgala, 삭취취(數取趣)라고 의역(意譯). 자주 윤회하면서 6도(지옥~천상)의 생, 유정(有情)이라고도 함>)는 목숨이 끊어지려고 할 때, 혹은 자연스럽게 앞서 익혔던 선과 불선을 기억하기도 하고 다른 사람이 기억하도록 한다. 그는 이때에 과거에 많이 익혔던 가장 강한 힘에 그 마음이 치우쳐서 기억하고, 그 나머지는 모두 다 잃어버리게 된다. 만약 평등을 갖추어서 자주 거듭 익혔던 사람일 경우는 그는 이때에 처음 것을 따라서 스스로 기억하거나 다른 사람이 기억하도록 하는데, 다른 마음을 일으키지 않고 이것<자주 익혔던 사(捨)의 평등심(平等心)>만을 버리지 않는다. 又行善、不善補特伽羅,將命終時,或自然憶先所習善及與不善,或他令憶,彼於爾時,於多曾習力最强者,其心偏記,餘悉皆忘。若俱平等曾串習者,彼於爾時,隨初自憶,或他令憶,唯此不捨,不起餘心。
그는(사인 死因) 이때 두 가지 인(因)의 증상력(增上力), 즉 희론(戲論)에 즐겨 집착하는[樂著]하는 인(因)의 증상력(增上力; 명언종자(名言種子)과 청정함[淨]ㆍ청정하지 않음[不淨]의 업인(業因)의 증상력(增上力; 업종자(業種子) 때문에 곧 목숨이 끊어지게 된다. 彼於爾時,由二種因增上力故,而便命終,謂樂著戲論因增上力及淨不淨業因增上力。
이전의<선(善)ㆍ악(惡)의 상(相)> 업이 끌어당긴 과(果)를 다 받고 나서 불선업(不善業)을 행한 사람은 마치 꿈속에서 무량한 종류의 괴이한[變怪] 색상(色相)을 보듯이, 바로 이때 <목숨이 끊어지려고 할 때> 이전에 지었던 모든 불선업(不善業) 소득(所得)의 불애과(不愛果)의 전상(前相)을 받는다. 이런 상(相 <이전에 지었던 모든 불선업소득(不善業所得)의 불애과(不愛果)의 전상(前相)> 에 의지하기 때문에 박가범(薄伽梵; 세존)께서 “이전에 악(惡)ㆍ불선업(不善業)을 짓거나 증장(增長)시킨 적이 있는 이는 이 때 <목숨이 끊어지려고 할 때> 마치 저무는 해가 산과 산봉우리에 걸려서 가려지고 거의 가려지기도 하고 아주 가려지는 것과 같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이와 같은 보특가라(補特伽羅(補特伽羅<; Pudgala, 삭취취(數取趣)라고 의역(意譯). 자주 윤회하면서 6도(지옥~천상)의 생, 유정(有情)이라고도 함>))는 밝음[明]에서 어두움[闇]으로 나아가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受盡先業所引果已,若行不善業者,當於爾時,受先所作諸不善業所得不愛果之前相,猶如夢中,見無量種變怪色相。依此相故,薄伽梵說:“若有先作惡不善業,及增長已,彼於爾時,如日後分或山山峯影等懸覆遍覆極覆。”當知如是補特伽羅,從明趣闇。
만약 이전에 불선업(不善業)의 과(果)를 다 받고 나서 선(善)을 닦은 이는 위와 서로 다르다. 이와 같은 보특가라는 어두움에서 밝음으로 나아가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若先受盡不善業果,而修善者,與上相違,當知如是補特伽羅,從闇趣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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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목숨이 끊어지려고 할 때에 악업(惡業)을 지은 사람은 식(識)이 소의(所依; 육신)의 위쪽부터 버리게 된다. 즉 위쪽부터 식기 시작하여[冷觸] 이렇게 점차 버려서 심처(心處; 심장)에 이르게 된다.又將終時,作惡業者,識於所依,從上分捨,卽從上分,冷觸隨起,如此漸捨,乃至心處
선업을 지은 사람은 식(識)이 소의(所依)의 아래쪽부터 버리게 된다. 즉 아래쪽부터 식기 시작하여 이렇게 점차로 버려서 마침내 심처에 이르게 된다. 다음에 식(識)이 심처를 버려야만 여기(心處)부터 식기 시작하여 두루 소의(所依;육신)로 번져나감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造善業者,識於所依,從下分捨,卽從下分,冷觸隨起,如此漸捨,乃至心處。當知後識唯心處捨。從此冷觸遍滿所依。
무엇을<생(生)을 중유(中有)ㆍ생유(生有)ㆍ본유(本有)의 세 가지로 밝히는 가운데에, 그 첫 번째로 중유(中有)에 대하여 스물 두 가지 문(門)> 태어남[生]이라고 하는가? 云何生?
아애(我愛; 中有의 因緣) 곧바로[無間] 이미 생겼기 때문에, 무시이래[無始]로 희론(戲論)을 즐겨 집착한[樂著] 인(因; 名言種子)을 이미 훈습(薰習)하였기 때문이다.由我愛無閒已生故,無始樂著戲論因,已熏習故,
그리고 청정함[淨]ㆍ청정하지 않음[不淨]의 업인(業因)을 훈습하였기 때문에, 그 소의(所依)의 체(體; 8식, 아뢰야식의 체)는 두 가지 인(因;<무시이래[無始]로 희론(戱論)을 낙착(樂著)한 인(因)과 정(淨)ㆍ부정(不淨)의 업인(業因)>)의 증상력(增上力)에 의하기 때문에 자기의 종자[自種子; 名言種子)로부터 즉 이곳 중유(中有)에 이숙(異熟<:선업(善業)으로 부르게 되는[所感] 가애(可愛)의 과보(果報), 또는 악업(惡業)으로 부르게 되는[所感] 불가애(不可愛)의 과보를 의미한다.>)이 곧바로[無間; <中有.>)태어나게 된다. 저울의(생사의 同時) 양쪽 끝이 오르락내리락 하는 시(時)와 같이 (생유[生有]는) 사유(死有)와 동시(同時)이다. 그래서(中有가 모든 根1을 갖추는 것) 이 중유(中有)는 반드시 감각기관들[諸根]을 갖춘다. 淨不淨業因,已熏習故,彼所依體,由二種因增上力故,從自種子,卽於是處,中有異熟,無閒得生,死生同時,如秤兩頭,低昂時等,而此中有,必具諸根。
악업(惡業; 中有의 相狀)을 지은 사람이 얻는 중유(中有)는 검은 양[黑羺]의 빛깔과 같거나 혹은 캄캄한 밤과 같으며, 선업(善業)을 지은 사람이 얻는 중유(中有)는 흰옷의 빛깔과 같거나 혹은 청명한 밤과 같다. 造惡業者,所得中有,如黑羺光,或陰闇夜;作善業者,所得中有,如白衣光,或晴明夜。
또한 이 중유는 매우 청정한 천안(天眼)이 작용하게 된다[所行]. 그는<중유(中有)에 대한 스물 두 가지 문(門) 가운데에, 그 여섯 번째로 죽을 때 아애(我愛)가 현행(現行)하는 것과는 다름을 밝힘>) 이때 이전의 아애(我愛)와 같은 종류[類]로는 다시 현행하지 않는다. 식(識;<중유(中有)에 대한 스물 두 가지 문(門) 가운데에, 그 일곱 번째로 중유(中有)의 당생(當生)의 형(形)을 밝힘>) 이미 머무르기 때문에<식(識)이 이미 중유의 몸을 받아서 아뢰야식(阿賴耶識)이 상속하여 머무르기 때문에 자아(自我)의 단멸(斷滅)을 두려워하여 자체(自體)의 아애(我愛)를 집착하지 않지만 경계에 대한 애(愛)를 일으킨다는 뜻>) 그래서 경계에 대해서 희론(戲論)의 애(愛)를 일으키며 태어날 곳에 따라서 곧 그 형류(形類)의 중유가 생긴다. 又此中有是極淸淨,天眼所行,彼於爾時,先我愛類,不復現行,識已住故。然於境界,起戲論愛,隨所當生,卽彼形類中有而生。
또한) 중유의 눈[眼]은 마치 천안(天眼)과 같이 장애가 없어서 오직 태어날 곳[生處]에만 이른다. 마치<중유(中有)에 대한 스물 두 가지 문(門) 가운데에, 그 아홉 번째로 중유신(中有身)이 가는 곳>) 신통(神通)을 얻은 것과 같아서 나아가는 곳에 장애는 없지만, 역시 오직 태어날 곳[生處]에만 이른다. 又中有眼,猶如天眼,無有障㝵,唯至生處,所趣無礙,如得神通,亦唯至生處。
또한 이 눈에 의해서 자기와 같은 종류의 중유(中有)의 유정(有情)을 보고 그리고 자신이 태어날 곳을 본다. 又由此眼,見己同類中有有情,及見自身當所生處。
또한 악업을 지은 사람은 눈으로 아래를 청정하다고 보고 얼굴을 숙이고 가며, 천취(天趣)로 가는 이는 (머리를) 위로 하며, 인취(人趣)로 가는 이는 (머리를) 옆으로 한다. 又造惡業者,眼視下淨,伏面而行,往天趣者,上,往人趣者,傍。
또한(中有의 壽命) 이 중유가 만약 아직 태어날 연[生緣]을 만나지 못할 경우에는 꽉 찬 7일 동안 머무르지만, 태어날 연[生緣]을 만났을 경우에는 결정할 수 없다. 만약 7일이 되어도 아직 태어날 연[生緣]을 만나지 못할 경우에는 죽어서 다시 태어나 7일 동안 머물게 되고, 이와 같이 계속하여, 아직 태어날 연[生緣]을 만나지 못했을 경우에는 49일 동안 머물게 된다. 이 이후부터는 결정적으로 태어날 연[生緣]을 만난다. 又此中有,若未得生緣,極七日住,有得生緣,卽不決定。若極七日,未得生緣,死而復生,極七日住。如是展轉,未得生緣,乃至七七日住,自此已後,決得生緣。
또한(中有 種子) 7일에 죽어 버린 이 중유는 혹은 곧 이것의 종류(인간)로 태어나고, 혹은 나머지 업이 전전하기 때문에 중유(中有)의 종자(種子)가 계속할 경우(中有)에는 곧 다른 종류로 태어난다. 又此中有,七日死已,或卽於此類生,若由餘業可轉。中有種子轉者,便於餘類中生。
또한(趣向의 相) ‘악업(惡業)을 지었다’란 양ㆍ닭ㆍ돼지 등을 잡는 것을 말한다. 그 한 가지에 따라도 불율의<不律儀; 계율(戒律)에 반하는 행위(行爲)에서 생기게 되는 악(惡)의 무표색(無表色)을 말함>의 중동분(衆同分)에 머무르기 때문에 나락가(那落迦)를 부르는 악(惡)ㆍ불선업(不善業)을 짓고 증장하게 된다. 그는 이때 마치 꿈속과 같이 스스로 그 업을 받게 되는 태어날 곳[生處]에서 도리어 이와 같은 종류의 유정(有情)과 양 등을 잡는 일을 보게 되는데, 전에 익혔던 것이기 때문에 기뻐서 내달린다. (이때) 바로 태어날 곳[生處]의 경계[境]의 물질[色]에 의하여 장애를 받아 중유(中有)는 사라지고 생유(生有)가 이어서 일어난다. 그것(中有)이 없어지려고 할 때는 앞서 사유(死有)와 같이 어지러운[紛亂] 색(色; 變怪相)을 본다. 又造惡業者,謂屠羊、鷄、猪等,隨其一類,由住不律儀,衆同分故,作感那落迦惡不善業,及增長已。彼於爾時,猶如夢中,自於彼業所得生處,還見如是種類有情及屠羊等事,由先所習,憙樂馳趣,卽於生處,境色所礙,中有遂滅,生有續起。彼將沒時,如先死有,見紛亂色,如是乃至生滅道理,如前應知。<유가사지론 1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