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게 스며들어
#4
또다시 몰캉하고도 뜨거운 무언가가 날 탐해왔다. 날 집어삼킬 듯이 다가온 이 남자는, 어느새 나의 허리를 꽉 감싸 안으며 날 제 품에 가두고 있었다. 그런 그의 행동에 마치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나는 아무런 반응도 내보이지 않았다. 아니, 내보일 수 없었다. 그에 순순히 그 놀림에 응하고 있자, 머지않아 그가 내게서 멀어졌다.
"제대로 데려왔네. 등급도 좋고."
괜히 그 새끼가 얘를 데려오라고 한게 아니었어. 그치? 내 입술과 그의 입술 사이에 길게 늘어지던 하얀 실이 툭 하고 끊어졌다. 온 몸에 힘이 다 빠져나간 느낌이었다. 그에 겨우겨우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자, 익숙한 민윤기의 얼굴이 내 시야를 가득 채워왔다. 아니, 과연 지금 내 눈앞에 있는 민윤기가 내가 알던 민윤기가 맞는걸까. 평소와는 다른 머리칼과 분위기, 그동안 봐왔던 단정한 옷차림이 아닌 화려한 옷차림의 민윤기는 전혀 익숙한 모습이 아니었다. 그에 멍하니 그런 민윤기를 바라보고 있자, 김남준을 향해 웃던 민윤기의 시선이 다시 내게로 돌아왔다.
여전히 민윤기의 입가는 축축이 젖어있는 채였다. 자신도 그것을 알아차렸는지 붉은 혀를 내밀고선 찬찬히 제 입술을 쓸어햝았고, 그런 자신을 멍하니 바라보는 내게 싱긋 웃어보였다. 분명 익숙하게 나를 보며 웃는 민윤기였지만, 내가 알던 민윤기가 아니었다. 내가 아는 민윤기는 이런 화려한 피어싱따위는 하지도 않고, 이런 텅빈 눈동자로 날 바라보지도 않았으며, 이렇게 살갗을 다 드러내고 있지도 않았는데..!
"어딜 봐."
"어? 아니, 네?"
내 요동치는 시선을 읽은건지 고개를 갸우뚱해보인 민윤기가 내 시선을 따라 고개를 숙였다. 그리곤 내 시선의 끝이 제 맨몸이었다는 것을 깨닫고선 다시 나를 바라보았고, 남자 몸 처음 봐? 하며 입을 열었다. 아니요. 처음 본건 아닌데요. 그게, 윤기야 그게..
"됐고, 앉아 봐."
"........."
"어쭈, 씹네."
"네? 아니요. 제가 설마."
한참 민윤기에게서 쩔쩔매고 있을 때, 자신의 옆자리를 툭툭 두들긴 김태형이 날 부르며 앉으라는 턱짓을 해보였다. 그에 민윤기에게서 벗어나 허겁지겁 그 자리에 앉자, 들고있던 와인잔을 아무렇게나 내던진 김태형이 나를 향해 몸을 틀었다. 한박자 늦게 깨지는 와인잔 소리가 방안을 울렸다. 그에 그 소리를 들은 내가 화들짝 놀라자, 옆에 있던 김석진이 애 겁먹잖아. 적당히 해. 하며 입을 열었다. 그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니 너무나도 이질적인 모습의 김석진이 날 바라보고 있었다. 도대체 무슨...
#5
아무리 살펴봐도 이들은 조금전 각인나부랭이따위나 외치고 다니던 병신들이 아니었다. 그에 익숙하지만 낯선 이들 사이에서 쭈뼛쭈뼛거리고 있자, 날 이 자리에 앉힌 김태형이 먼저 입을 열었다.
"너 약 만드는 사람이라며. 그 가이딩 대신 먹는 약을 네가 만드는거야?"
"네.."
"그게 효과가 있긴 해? 우린 없던데. 그 새끼 말로는 우리가 불안정하다나 뭐라나.."
".........."
그 새끼? 그 새끼가 누구... 순간 입밖으로 내뱉을뻔한 물음을 애써 지워내고서, 김태형을 바라본 내가 마른 침을 꿀꺽 삼켜냈다. 그리곤 그럼 어떻게 가이딩 하시는데요? 하고 묻자, 방금 했잖아. 다시 알려줘? 하는 민윤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니요. 괜찮습니다. 아주 잘 알아들었습니다. 제가 괜한 말을.
"근데 넌, 우리가 누군지 알아?"
아까 내 이름은 어떻게 알고 있었던거야. 혹시 너 그 새끼랑 아는 사이인거야? 거의 눕다시피 소파에 앉아 이 모든 상황을 보고만 있던 김남준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 그에 김남준쪽으로 시선을 옮긴 나는, 웃통을 깐 상태의 적나라한 김남준을 보고서 곧바로 다시 시선을 돌려냈다. 그리곤 하하 웃으며 그,그 새끼가 누군데요..? 하며 물었고, 내 물음에 우리도 몰라. 하며 김태형이 답했다.
"얼굴도, 나이도, 성별도, 이름도 몰라 우린."
"......."
"언젠가부터 우린 모여 살면서 그 새끼의 명령을 따르고 있었고, 마땅한 호칭이 없어 그 새끼라 부르는 것뿐이야."
"........."
"넌, 김남준 이름을 어떻게 알고 있는건데?"
#6
김태형의 질문에 나머지 5명의 눈초리가 모두 내게로 향했다. 그에 극심하게 요동치는 두 눈동자로 주위를 살피자, 날 잡아먹을 듯한 눈빛들에 금방이라도 오줌을 지릴 것만 같았다. 겨우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며 그게.. 하고 입을 열자, 때마침 지지직 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에 다시 5명의 눈초리가 천장에 달린 스피커에게로 향하자, 곧이어 스피커에서는 지겹도록 익숙한 목소리들이 흘러나왔다.
'큰건이라더니, 아무도 없는데 무슨. 이제 서장님까지 우리 똥개훈련 시키는거야?'
'서장님도 잘못 아실 수 있지. 맨날 출몰하던 D구역에서 큰 폭탄 하나 터졌으니까 가보라고 하신걸꺼야.'
'근데 그 병신들은 또 뭐가 불만이길래 폭탄만 던지고 가. 시발 장난하는 것도 아니고.'
지민이의 목소리였다.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확 죽여버리고 싶을 정도로 귀찮은 목소리였는데, 여기서 들으니 반가워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그 탓에 나도 모르게 귀를 쫑긋 세워 그 소리들을 듣고 있자, 나와 마주앉은 김태형이 피식 웃어보였다. 그리곤 날 지그시 바라보며 많이 친했나봐. 하며 물었고, 그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자, 표정을 굳힌 김태형이 머리를 긁적이며 중얼거렸다. 거슬리네, 짜증나게.
'그나저나 얜 어디갔어. 나 가이딩도 못받았는데.'
'신발은 여기 있는데? 휴대폰도 여기 있고.'
'그럼 도대체 어딜 간거야. 휴대폰 없으면 못사는 애가.'
'....이건 뭐야? 이 화분 누가 깼어?'
'뭐?'
다시금 지지직 소리가 들리며 마지막 정국이의 목소리가 흐려지고, 곧이어 스피커가 꺼졌다. 그리고 그 스피커 속 목소리가 사라짐과 동시에 제 바지를 살핀 김남준은 아. 내가 깼구나. 미안해라. 하며 영혼없이 중얼거렸고, 김석진은 자리에서 일어나 작은 방으로 사라졌다. 그러자 맞은편에 앉아있던 정호석이 생각보다 일찍 들킨 것 같네. 쟤 없어진거. 하며 날 뚫어져라 바라보았고, 민윤기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상했어, 애초에 저쪽에 하나뿐인 가이드였잖아. 우리도 마찬가지고.
"왜 이렇게 시끄러. 쟨 또 누구야?"
아~ 그 새끼가 잡아오라던 약사? 한참 김태형의 싸늘한 시선을 받아내고 있을 때쯤, 저 멀리서부터 눈을 부비며 박지민이 다가왔다. 그 모습에 나도 모르게 반가워 박지민을 부르려던 나는, 눈을 부비던 손을 떼어내자 보이는 박지민의 파란 눈동자에 다시 기가 죽고 말았다. 맞아, 여긴 내가 아는 애들이 없는 곳이었지.
"얜 몇등급 정도 되는데."
"꽤 높아. S등급?"
"오, 웬일로 높은 애를 데려왔어. 이제야 좀 제대로 된 가이딩 한 번 받겠네."
그럼 실력 좀 볼까? 어느새 나의 코앞까지 다가온 박지민이 나의 입술을 제 입술로 덮어왔다. 그리곤 자연스레 나의 옆자리에 앉으며 내 뒷목을 손으로 감싸쥐었고, 자신의 쪽으로 끌어당기며 더 깊숙이 날 탐했다. 또다시 내 영혼까지 모든게 빨려나가는 기분이 들었다. 아니, 한번도 느껴보지 못한 무언가가 내게 스며드는 것 같기도 했다. 그에 멍하니 그와 입을 맞추고 있자, 그가 입을 맞춘 채 입꼬리를 올려 씩 웃어보였다.
"안 피하네, 재밌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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