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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불 미식가와 식당 비교>
1)
불란서의 미식 문화와 레스토랑 문화는 우리와 매우 다르다. 19세기까지 미식가, 혹은 탐식가로 들 수 있는 뚜렷한 사례는 허균과 심노숭 정도다. 허균은 <도문대작(屠門大嚼)>을 통해 미식예찬론을 펴고 식품 품평을 했다. 조선 후기 효전 심노숭(1762∼1837)은 <효전산고(孝田散稿)>를 통해 다양한 미식 취향을 숨김없이 드러냈다. 효전은 까다로운 미식가로서 서울의 음식맛 취향을 강하게 드러내고 지방음식을 기피하였다. 찬비(饌婢)가 하는 요리가 마음에 들지 않자 서동(書童)을 발탁하여 서울 요리법을 가르쳐서 해 먹을 정도였다.
허균의 기록은 매우 소략한데, 심노숭의 기록은 매우 다채롭고 풍부하며 음식 탐닉이 소상히 기록되어 있다. 미식가 한 사람만 들라면 심노숭을 들어야 할 것이다. 이외에는 추사 김정희 등이 남긴 미식에 대한 욕구가 산발적인 기록으로 남아 있다.
소의 염통이라는 진귀한 식재료로 만든 ‘우심적(牛心炙)’을 소재로 한 시문을 남긴 이규보, 서거정 등등 몇 사람은 미식가로서보다 문학의 미식 상징의 소재로서의 접근성이 강하다. 고려조는 불교 숭상 정책으로 고기를 금했다가 원나라 간섭기 이후 고기를 먹기 시작했으므로 다양한 음식 발달에는 한계가 있었다. 일반적으로 고기를 많이 먹지 않으면 음식 발달이 제한된다. 이태리가 프랑스에 음식문화를 전한 이후 자신들은 정치 경제적으로 위축되어 탄수화물 위주의 식사를 함으로써 음식문화의 주도권이 넘어간 것도 이런 배경이다.
유교 배경의 조선시대에는 한양에서 고기를 적극적으로 먹으면서 난로회(煖爐會)를 열어 생고기를 즉석에서 구워 먹기도 했다. 유교는 식생활에서 절제를 요구했고, 제도적으로 신분에 따른 제한도 있었으므로 미식 취향을 공개적으로 쫓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식품이 풍부하지 않았던 것도 절제를 미덕으로 삼은 기풍과 부합된다. “먹음에 배부름을 구하지 않고”[食無求飽](《논어(論語)》 학이(學而)편), 맛을 따지지 않으려는 유교적 금욕 요구는 미식의 공론화나 기록을 저해했다고 할 수 있다.
전라도는 곡창지대의 풍요로운 식재료 덕분에 음식이 발달했고, 절제가 요구되는 학문이나 사상보다 여유를 즐기는 예술 취향으로 이어져 미식 추구 또한 상대적으로 일반화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경상도는 산간지역으로 곡물 생산이 충분하지 못하여 현실적으로 절제가 요구되는 데다, 유교적 색채가 더 강했으므로 음식 절제를 미덕으로 삼았다. 이것은 두 지역의 식품 종류 차이에서 오는 음식의 차이와 함께 음식 발달의 차이로 이어지는 요인이 된다.
따라서 불란서처럼 음식에 탐닉할 수 있는 사회적 여건이 미흡하였으므로 미식가의 배출이나 미식에 대한 연구와 기록은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식품 생산량이 증대한 조선 후기에는 이러한 분위기가 완화되어 심노숭같은 이가 나왔더라도 다른 사례가 많지 않은 것은 여전한 제약적 환경 때문이었다고 할 수 있다.
2)
우리의 식당은 주막(酒幕)이고, 술집과 숙박업을 겸했다. 주막은 주사(酒肆)·주가(酒家)·주포(酒舖) 및 객점(客店)이라고도 했다. 음식에 주력한 불란서의 레스토랑과 달리 주막은 처음부터 여관과 식당을 겸한 형태로 술을 같이 팔면서 안주를 겸해 식사를 하기도 했으므로 명칭에 ‘주(酒)’가 주로 사용되었다.
주막은 술집, 여관 외에도 일부는 심지어 우체국, 은행의 역할까지 담당했고, 한 방에 여럿이 잠을 자는 숙소 형식 덕분에 정보 교류의 장 역할도 수행했다. 메뉴는 술과 안주와 여러 가지 음식을 팔았는데 대표적인 음식은 장국밥이었다. 가장 대중적인 메뉴인 장국밥으로 봐서도 상층 소수문화가 아닌 일반 대중 문화라 할 수 있겠다.
조선 시대 풍속화에서 이러한 주막의 모습을 볼 수 있다. 김홍도의 <주막>과 <노변야로>, 김득신의 <주막거리>, 신윤복 <주막도> 등은 주막을 그린 풍속화이다. 양반도 단촐한 밥상에서 국밥을 기울여 가며 열심히 먹는다. 김홍도 <주막>에서는 상투를 올리지 못한 常人도 자기 밥값을 계산한다. 주막은 누구나 이용하는 식당으로 보편적인 음식을 팔았다.
(김홍도 <주막> 그림)
주막은 시장이나 길 가는 나그네가 지나는 길목에 주로 있어서 나그네가 많이 이용하였다. 주막에서 밥을 먹으면 잠은 공짜로 잘 수 있었다. 당시는 과객 노릇과 과객을 맞는 접빈객이 보편적인 관습이었으므로, 과객 노릇이 어려운 경우에 주막을 이용했다. 과객으로 민가에 들러 밥과 잠을 해결하는 것을 ‘과객질’이라고 했다.
과객질은 상하층 모두 다 할 수 있었다. 홍명희의 <임거정>에는 박유복이란 인물이 전국을 이동하면서 거의 과객질로 잠자리를 해결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간혹 양반가에서 자기도 했지만, 보통은 자기와 비슷한 평민의 집에서 잠을 잤다. 가지고 다니는 양식이 있으면 주고 밥을 해줄 것을 청하기도 했다. 양반 상민 모두 과객을 재워줬다.
스님은 사찰을 거점 삼아 이동하였다. 사찰에서 밥과 잠을 해결하고 며칠 묵으면 노잣돈까지 아울러 해결하였다. 양반도 일부 사찰을 이용했으나 보통은 과객질을 했다.
과객은 신분에 따라 집주인에게 다른 처우를 받았다. 상하 과객이 동시에 들어오면 양반에게는 사랑을 내주며 칠첩반상을 대접하고, 상민에게는 ‘마방’을 내주며 ‘서홉밥’을 줬다. 대접은 다르지만 상하층 모두 과객질로 지역간 이동을 하는 점에서는 같다.
‘김삿갓’으로 잘 알려진 김병연은 삿갓을 쓰고 전국을 떠돌며 과객 노릇을 일삼았다. 특히 곡식이 풍부한 전라도를 자주 떠돌았는데 시를 써주고 숙식을 해결하였다. 김병연의 시에 “강산 떠돌며 구걸한 집이 천이나 되고 풍월시인 행장은 빈 자루 하나뿐일세”라는 대목은 떠돌며 과객질하는 당시 선비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
시를 짓는 문사를 대접하는 전통은 보편화 되었다. 실학자 이중환도 전국을 현지답사하며 지리서인 택리지(擇里志)를 저술하였다. 접빈객은 봉제사와 함께 사대부 여성의 중요한 덕목이었다. 접빈객에 소홀하면 집안의 평판이 나빠지는데 이것은 유교 지역사회에서는 매우 불명예스러운 일이었다.
주인은 과객에게 식사와 잠자리를 제공하는 호의를 베풀면서 과객이 가져오는 바깥세상 소식을 들었다. 장거리 이동이 쉽지 않은 농경사회에서 이들이 가져오는 타지 소식은 바깥세상과 연결되는 요긴한 통로였다. 과객도 주인과 호흡이 맞으면 문객이 되어 몇 달이고 신세를 지기도 했다.
과객질을 하면서 업무를 이행하는 직종도 있었는데 바로 암행어사다. 과객질로 끼니를 해결하고 잠자리를 제공받아야 그 지역 민심도 파악하고 문제도 발견할 수 있었다. 박문수는 과객질을 하려다가 백정에게 봉변을 당하기도 한다. 한 어사는 북관으로 암행을 갔다가 남편 따라 죽었다는 누이동생을 만나기도 한다. 과객질을 하러 들어간 집이 하인과 도망친 누이가 사는 집이었기 때문이다.
과객질을 하면 민가에서 집밥을 먹고 집잠을 잤으며, 과객질을 못하면 주막에서 국밥을 먹고 봉놋방에서 잠을 잤다. 박두세의 <요로원야화기>는 과거에 낙방하고 내려가던 시골양반이 주막 봉놋방에서 거만을 떠는 서울양반의 기세를 누르는 수작을 담고 있다.
그런 주막이 일제때 술을 사사로이 만들지 못하게 되자 사양길에 접어들었다. 그렇다고 주막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주막은 고속도로 휴게소가 되어 현재형으로 부활했다. 장거리를 이동하는 나그네가 들러 목도 축이고, 밥도 먹고, 쉬어가는 곳이니 주막과 다를 바 없다.
역참에 주막을 겸한 휴게소는 한국의 독특한 여행 문화다. 미국 등 해외 교포들은 한국에 오면 휴게소를 매우 신기하게 여긴다. 장거리 자동차 여행이 보편적인 미국이지만 어디에도 이런 휴게소가 없다. 유럽이나 동남아시아 세계 어느 나라를 가도 우리 휴게소와 흡사한 곳을 만나기 힘들다.
교통편이 말이나 도보에서 자동차로 바뀌어서 술은 마시지 못하고, 며칠씩 걸리던 여행이 몇 시간으로 단축되어 숙박업이 제거된 것이 달라진 점이다. 트럭 기사를 위한 수면방도 있지만 주요 시설은 아니다. 물론 불란서에서도 이런 휴게소는 보지 못했는데, 주막이 아닌 레스토랑의 역사를 가진 때문이 아닐까.
3)
불란서에도 오베르쥬(Auberge)라는 숙소겸 식당이 있었다. 우리 주막과 비슷한데 그날 주인이 제공하는 음식을, 여행객들이 긴 식탁에 앉아 정해진 시간에 함께 했다. 작은 비스트로 등의 식당에서 ‘오늘의 요리’라고 써 붙이고 날마다 메뉴를 정하는 것은 여기서 유래한 것이다. 오늘날 오베르쥬가 식당 이름으로도 호텔 이름으로도 많이 쓰이는 배경이다.
식당 발달 이전에는 우리가 사찰을 숙소로 이용했던 것처럼 프랑스 여행자도 수도원을 이용해서 먹고 잤다. 중세 수도원은 나그네에게 잠자리와 음식을 제공하는 유일한 장소였다. 나그네들에게까지 포도주를 제공하기 어려워 수도사들이 맥주 양주를 시작했을 정도였다. 이렇게 시작된 알자스 맥주는 지금도 프랑스 전체 생산량의 절반 이상을 차지한다.
브리야 사바랭은 1782년경 음악 연주 초청을 받고 수도원에 가서 며칠 묵은 경험담을 썼다. 엄청나게 화려한 식사를 제공받는데, 만찬에서는 두 번째 코스에서 구이가 열네 가지가 나왔다고 했다. 저지대와 평지의 맛좋은 식재료가 동원되었는데 ‘혜택받은 땅들의 헌납’ 덕분이라고 했다. 밤참으로는 브랜디까지 대접받았다. 미식가 샤바랭 일행은 탄성을 지르며 음식을 맞았다. 수도원의 숙식 제공 분위기를 짐작할 수 있다.
실제로 수도원은 치즈와 포도주 발달에서 큰 몫을 했다. 이것은 성직자들 자신을 위한 일이기도 하기 때문이었다. 미사에서도 포도주가 사용되었지만, 실제로 포도주를 즐기는 교황도 많았다. 일군의 수도사들은 포도밭 관리에 전력을 쏟아야 했다. 기름진 식사와 육식을 삼간 사제들에게는 치즈가 중요한 단백질 식품이었으므로 많은 수도원에서 치즈를 직접 생산했다.
수도원은 좋은 잠자리와 음식을 제공할 수 있는 충분한 인프라를 구비하고 있는 것이다. 수도원의 숙소는 오텔르리라 하며 요즘도 방문자나 신자들의 편의를 위해 운영하며 예약도 가능하다. 우리 사찰이 직접 농사를 지어 식자재를 생산하며 요즘도 템플스테이를 운영하고 있는 상황과 비슷하다.
1765년 경에 파리에서 블랑제라는 사람이 '블랑제는 훌륭한 레스토랑을 팝니다"라는 간판을 내걸었다. 이때 레스토랑은 맛국물 부용을 의미한다. 레스토레(체력 회복)에서 파생한 레스토랑은 '힘을 내게 해주는 먹거리'라는 의미가 있다.
그러다 ‘레스토랑’을 파는 곳을 레스토랑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현대적 의미의 레스토랑은 1782년 보빌리에가 개업한다. 메뉴판을 만들고 궁정 요리 방식으로 서비스를 시작했다.
주막의 이름은 주인이 아닌 이용자가 편의상 지어 붙여 사용했다. 버드나무집, 감나무집 우물집 등등, 요즘도 도시 외곽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이런 상호는 주막의 전통을 이은 것이라 할 수 있다. 불란서 식당은 요리사의 중심 식당이므로 요리사의 이름을 붙이는 경우가 많다. 불란서는 공급자 중심, 우리는 수용자 중심의 명명 방식이다.
불란서는 음식도 요리사, 공급자 중심의 상층음식이다. 요리사가 상층 음식 전문가니 식당도 상층음식이다. 주막에서는 술도 탁주, 음식도 국밥류로 소비자가 원하는 대중 음식이다. 대체로 상층 취향은 양반가 과객의 접빈객, 민중적 요구는 주막으로 양분되었다. 그러나 상업형 음식은 주막만이었으므로 식당 음식은 불란서와는 대조적인 민중형이다. 불란서 레스토랑은 남자 요리사가 전문성을 발휘한 솜씨로 손님을 끌었다. 주막은 여성인 주모가 직접 요리하며, 지나가는 나그네가 먹기 쉬운 국밥이나 안주를 만들었다. 나그네가 원하는 음식과 숙소가 상품이었다. 불란서는 공급자 중심, 한국은 소비자 중심의 대조적 영업형태다.
불란서 음식문화는 왕실, 귀족의 상층 음식문화가 식당과 요리사를 매개로 부르조아로 확대되었으나, 부르조아는 상층문화 지향층이었으므로 여전히 상층 음식문화는 고수되었다. 이러한 문화는 지방음식 개발과 손님의 전계층 확대 이후에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시간형 상차림과 오랜 시간 담소를 즐기며 4단계로 나누어 먹는 식사문화 등이 그것이다. 식당의 이러한 식사문화는 그대로 일반인 문화로 이어져서 2010년 유네스코에 등재되는 전통적 음식문화가 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문화가 곧 식당의 일반 음식 문화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이와 달리 한국 음식은 공간형 상차림으로 서비스 인력이 절약되며 한꺼번에 음식이 다 나오므로 먹는 시간도 절약된다. 특히 식당의 이러한 음식은 지금도 대중 음식으로 인기를 끌어 국밥집이 전주 해장국밥집을 위시하여 전국 도처에서 성업중이다.
불란서 식당은 음식 자체를 목적으로 시작했지만, 한국의 주막은 여행을 위한 부수적 수단으로 창출되었다는 점이 다르다. 좋은 식당을 찾기 위한 여행이 불란서에서는 일찍부터 가능해질 수 있게 사회적 인프라가 구비되어 있었던 셈이다. 한국에서는 누군가를 만나서 식사를 하는 것은 집 방문으로 해결했다. 음식을 위해 모이고, 음식을 위해 여행을 떠나는 것은 사실상 주막과 다른, 식당의 개념 변화가 일어난 근대 이후에야 가능해진 것이다.
한국은 1980년대를 지나 경제적 위상이 높아지고 전 국민이 자동차를 갖게 되어 교통의 편의성이 증대하였다. 국토의 크기가 자동차 여행에 적합하고 조금만 이동해도 좋은 식당을 만날 수 있는 사회적 인프라가 음식을 위한 여행을 활성화시켰다. 먼저 도심이 아닌 한적한 교외에 식당이 들어서서 식당 이동을 위한 간단한 드라이브가 유행했다. 그러다 멀리 있는 식당도 여행을 유발해서 도시간 이동을 수월하게 했다.
불란서는 위에서부터 아래로 내려오고 있고 한국은 아래로부터 위로 올라가고 있다. 아래로부터 올라가면서 저변에서 공감을 얻은 음식을 많이 만들어냈다. 김치 외에 단일 메뉴로도 국밥류, 비빔밥, 떡볶이, 김밥, 순대, 칼국수 등등 단품 음식에서 불고기, 삼계탕 등으로 올라가 한정식 등으로 다양화, 전문화되는 상향성을 보인다. 하지만 그 편차가 그리 크지 않다.
불란서는 위에서부터 내려오기가 잘 되고 있는가. 전채, 본식, 치즈, 후식으로 진행되는 단계별 복잡한 귀족 식사 오뜨뀌진에서 샐러드나 샌드위치 등의 간편식으로의 변화가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가. 이것은 장을 달리해 다시 살핀다.
#프랑스레스토랑 #주막 #수도원숙소 #오렐르리 #과객질
첫댓글 생소한 단어를 찾아가면서 재밌게 읽었습니다. 음식과 여행이 찰떡궁합이라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됩니다. 후편이 계속 이어지기를 바랍니다.
글이 좀 번다해서 수고롭게 해드렸네요. 꼼꼼하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한불음식문화 비교는 사실 얼토당토 않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누구나 문화를 경험하면서 자기 문화와의 거리로 재면서 이해하는 거라 음식에도 적용해 보았습니다. 여행에서 음식을 빼면 여행의 맛이 많이 감소하지요. 댓글로 쓰는 힘을 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