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은 재창작 되는 묘지명. 근래에 새로 세운 것으로 보인다.
자헌대부(自憲大夫) 이조판서(吏曹判書) 죽산안공노생지묘(竹山安公魯生之墓)
간좌(艮坐)
공(公)의 이름 휘(諱)는 노생(魯生)이요. 자(字)는 춘곡(春谷)이며 호(號)는 죽계(竹溪) 또는 이재(伊齋)시다. 고려(高麗) 때 지금의 국무총리인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지낸 신죽산안씨(新竹山安氏) 시조 죽성군(竹城君) 안원형(安元衡)의 장손(長孫)이며 정당문학대승상(政堂文學大丞相) 흥녕군(興寧君) 면(勉)의 장남(長男)이시다.
공(公)께서는 고려 공민왕 이십일년에 진사(進士)에 급제한 후 군자소윤서북면찰방별감(軍資少尹西北面察訪別監)이 되어 임금의 특명으로 명(明)나라와의 밀무역을 엄히 단속하여 국경지대의 기강을 바로 잡아 큰공을 세우셨고 문하사인보문각제학(門下舍人寶門閣提學)과 지금의 도지사인 경기도 안렴사(京畿道安廉使)를 역임하셨다. 또한 공(公)께서는 학식과 인격이 고매하여 목은 이색(牧隱李穡) 포은 정몽주(圃隱鄭夢周) 도은 이숭인(陶隱李崇仁)같은 대학자들과 교분이 두터웠으며 특히 목은 문중(牧隱門中)과는 삼세(三世)에 걸친 심후한 세교(世交)로 목은(牧隱)이 말하기를 우리 조정에서 과거(科擧)를 설치한 이래 부자(父子)와 형제(兄弟)가 서로 삼대(三代)에 이어 등과(登科)한 집은 죽계안씨(竹溪安氏)와 우리 한산이씨(韓山李氏)뿐이라고 하면서 안문(安門)의 고풍(高風)을 읊은 죽계시(竹溪詩)를 지어 찬양하였다. 이처럼 공(公)의 학문은 당대를 풍미하였으며 특히 중국에 사신으로 가서 지은 조천시(朝天詩)는 문장의 수려함이 뛰어나 널리 세상에 알려져 있다.
고려를 이은 조선왕조 태조(朝鮮王朝太祖)가 정삼품(正三品) 이조참의(吏曹參議)를 제수하였지만 출사하지 않고 절개를 지키려 하였으나 왕(王)이 집현전 제학(集賢殿提學)으로 임관하고 계속 불러 공(公)께서는 호(號)를 이재(伊齋)라 개명하며 수락하였으니 이는 중국 탕왕때 명재상 이윤(伊尹)의 고사를 거울삼아 개인의 안락을 접고 나라와 백성을 위해 자중자애하며 소임을 다하여야 한다는 충(忠)과 효(孝)에 근본을 둔 결단이었으리라. 이어서 사간원 사간(司諫院使諫) 철원부사(鐵原府使)와 진주목사(晉州牧使)를 거쳐 태종 원년(太宗元年)에는 지금의 도지사인 경상도 관찰사(慶尙道觀察使) 외교부 차관보급인 예조참의(禮曹參議) 법무부 차관보급인 형조참의(刑曹參議) 내무부 차관보급인 이조참의(吏曹參議) 그리고 충청도 관찰사(忠靑道觀察使)와 경기도 관찰사(京畿道觀察使)를 역임하시는 등 오랫 동안 화려한 요직을 두루지내셨다. 공(公)이 경상도 관찰사 재임중 곡물(穀物)을 저장하기 위한 창고제도(倉庫制度)를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실시하여 백성을 굶주리게 하지 않는 등 선정을 폈으므로 태종십이년에는 나라를 위한 공적을 크게 치하하며 왕(王)이 직접 도포를 하사한 바도 있다.
공(公)께서는 만년에 경기도 파주시 조리면 장곡리 방하동에서 사셨고 나라에서 지금의 국장(國葬)인 예장(禮葬)으로 예우해주셨으며 군부인 인천이씨(郡夫人仁川李氏)와의 슬하에 삼남(三男)을 두셨으니 장남 복초(復初)는 좌찬성(左贊成)을 차남 복지(復志)는 영해부사(寧海府使)를 삼남 복언(復言)은 경기감사(京畿監司)를 각각 지내는 등 가문(家門)이 계속 융창(隆昌)하더니 후에 공(公)에게 정이품(正二品)에 해당하고 지금의 내무부 장관 문교부 장관 겸 육군참모총장격인 자헌대부 이조판서 홍문관 예문관 대제학 겸 오위도총부 도총관(資憲大夫吏曹判書弘文館藝文館大提學兼五衛都摠府都摠管)에 추증(追贈)되셨다.
귀(貴)하고 장(壯)하다. 죽산안씨(竹山安氏) 선대(先代)이시여. 우리는 이처럼 빛나는 혈통(血統)의 후예임을 자부(自負)하며 서로 돕고 정진(精進)하여 융성(隆盛)의 길을 가야할 것이다. 천지신명(天地神明)이시여. 자랑스런 조상(祖上)의 영령(英靈)들이시여. 저희 가문(家門)을 보호하소서. 종원(宗員)들의 뜻을 모아 삼가 이 비(碑)를 세운다.
서기 이천팔년 삼월(西紀二千八年 三月)
죽성군 이십일세손 택 삼가 지음(竹城君 二十日世孫 택 삼가 지음)
진실은 다음과 같다.
회양부사 안후[安復初안복초] 묘갈명
淮陽府使安侯墓碣銘
공의 휘는 복초(復初)이고, 성은 안씨(安氏)이며, 죽주인(竹州竹山人)이다.
고(考)의 휘는 노생(魯生)이며, 가정대부(嘉靖大夫) 인녕부윤 집현전제학(仁寧府尹集賢殿提學)을 지냈다.
조(祖)의 휘는 면(勉)으로 통훈대부(通訓大夫) 광주 교관(光州敎官)을 지냈다.
증조의 휘는 원형(元衡)으로 중대광(重大匡) 광산군(光山君)이다.
<중략>
장남 맹손(孟孫)은 공보다 먼저 죽었고,
차남 철손(哲孫)은 개성부 경력(開城府經歷)이고,
삼남 신손(信孫)은 예문관 대교(藝文館待敎)이다. 이들은 모두 힘써 학문을 닦아 과거에 급제하였으므로 사람들이 원대하게 뻗어나갈 것으로 기대하였다.
장녀는 사정(司正) 장맹원(張孟元),
차녀는 언양현감(彦陽縣監) 서거광(徐居廣),
삼녀는 생원 최정평(崔井平),
사녀는 부사정(副司正) 이효강(李孝綱)에게 시집갔다.
맹손은 호장(戶長) 조균(趙均)의 딸에게 장가들어 2남을 두었으니 치중(致中)과 치화(致和)다.
경력(철손)은 필선(弼善) 최유종(崔有悰)의 딸에게 장가들어 1남을 두었으니 종도(從道)이다.
대교(신손)는 상호군(上護軍) 이사민(李士敏)의 딸에게 장가들어 2남을 두었다.
외손은 12명이나 모두 어리다.
[오원 註] 오늘날 신죽산안씨족보에는 (붉은 글자 부분에) 전혀 다른 사람들이 자손으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그런고로, 서울 퇴계로 동물병원에서나 통용되는 犬譜가 되었다는 것. 곧 환부역조(換父易祖)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