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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옴긴글]
말틴 루터 이전의 종교 개혁자들
종교개혁이 루터 시대에 급작스럽게 일어난 것이 아니다 콘스탄티 누스 1세 황제가 기독교를 국교로 인정한 후 교회는 급성장하여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막강한 힘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자 점점 타락했고 1세기 말에 이르러서는 완전히 생명력을 잃어가게 되었다 그리하여 여러 개혁자들이 개혁을 시도하였으나 역부족으로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다 루터 이전의 개혁을 시도한 사람들 가운데 주요 인물들이 있다.
1. 브랜디 워딘(Thomas Brandwardin.)
영국의 토마스 브랜디워딘(Thomas Brandwardin. A.D.1290년-A.D. 1349년)은 영국의 신학자이며 수사학자이인 그는 A.D. 1349년에 켄터베리(Canterbury)의 대 감독으로 임명된 사람으로 흑사병으로 사망한 사람이다.
브렌디워딘은 주장하기를 인간의 구원은 제도가 아닌 인간의 행위가 아닌 하나님의 은혜로 되어진다고 했다.
2. 리미니의 그레고리
(Gregory of Rimini)
이탈리아의 리미니의 그레고리(Gregory of Rimini. A.D. 1358)는 이탈리아 철학자이며 어거스틴 수도원의 수도사로서 1358년에 사망한 사람이다. 이 사람도 주장하기를 인간의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에 있다, 고 주장했다
3. 존 위클리프(John Wycliffe, 1320년경 ~ 1384년)
1) 존 위클리프 (John Wycliffe)
존 위클리프(John Wycliffe, 1320년경 ~ 1384년)는 위클리프는 영국의 에드워드 2세 때 섹슨 혈통으로 태어났다.
개혁의 샛별’이라 불리는 그는 A.D. 1340년경 영국에 흑사병이 돌아서 잠시 학업을 중한것을 제외하고는 어린 시절부터 조기교육을 받았으며 옥스퍼드 퀸즈 대학에 진학하여 박사학위를 받았고, 계속해서 신학과 철학을 연구했다.
A.D. 1354년엔 메르톤 대학의 강사로 부임했고 A.D. 1360~1361년경엔 발리올 대학 교수로 사역했다. A.D. 1365~1367년경엔 옥스퍼드의 켄터베리홀 교수를 지냈다. A.D. 1366년에 성직자가 되었으며, A.D. 1374년에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위클리프는 옥스퍼드 대학의 유명한 신학 강사였으며, 위대한 성직자요 깊이 있는 대학 교수요 철학의 대가로 이름이 높았다.
위클리프는 기독교 신학자이며 영국의 철학자, 신학자로 존 후스에게 개혁에 큰 영향을 주었다. 마르틴 루터보다 150년이나 앞선 종교개혁의 시초로 개혁의 샛별이라 평가 받는다
2) 위클립의 개혁
(1) 교황청 부패를 지적 A.D. 1377년경 에드워드 3세가 사망하자 흑태자라 불린 장남 에드워드는 1년전에 이미 사망했고, 에드워드 3세의 장손자이며 , 흑태자의 외동아들 리처드 2세가 즉위하는데 10살에 불과한 미성년이라 에드워드 3세의 4남이며 리처드 2세의 삼촌인 랭커스터 공작(곤트의 존)이 섭정을 했다. 섭정은 영국 학계에서 위클리프의 명망을 듣고 궁정으로 초빙했다. 당시 유럽 정세는 교황청이 양분된 상태라 아비뇽과 로마에서 서로 정통성을 주장했었고 유럽 각 나라들이 서로 양측으로 갈라서서 외교전 중이었다.
위클리프는 교구장이 되어 로마 교황청의 부패를 탄핵하기 시작하였다. 교황의 권이를 반대햇다. 통치자들은 섬김받는 존재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본받아 섬기는 존재가 되어야한다. 지배자의 이득이 아닌 피지배자의 이득을 추구해야한다고 주장했다. 만약 그렇지 못한 통치차라면 하나님에 대한 반역이고 교회권력이 영적 한계를 벗어나 세속 권력을 추구하고 확장하는 것은 비신앙 적이라 했다. 당시 양쪽에서 세금만 뜯어가려는 두 교황청(아비뇽, 로마)에 신물이 났기 때문에 위클리프는 잉글랜드 통치자와 지배층에게도 지지를 받았다.
성직자들은 사람들의 영적 무지를 이용해서 세속적인 권력까지 움켜쥐고자 했다. 그리고 무엇이든지 구실만 있으면 세금을 부과해 교황청의 금고에 돈을 쌓았다. 그 돈은 교황청을 화려하게 꾸미고 교황과 교직자들의 사치스러운 생활을 유지하는 데 쓰였다. 그러기에 위클립은 참묵할 수 없었다.
(2) 교황의 권위를 반대했다.
교황 무오성(敎皇無誤性)을 반대햇다. 로마 가톨릭교회에서 교황이 전 기독교의 우두머리로서 신앙이나 도덕에 관하여 교황좌에서 장엄하게 결정을 내릴 경우(excathedra), 그 결정은 성령의 특은으로 보증되기 때문에 결단코 오류가 있을 수 없다고 하는 교리이다.
위클리프는 아비뇽 교황과 로마 교황의 권위 싸움은 교회의 전통이 성경의 가르침에 위배된다고 생각했다. 특히나 두 교황청이 성경해석 권한을 독점하는 잘못 된 요인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말했다. 또한 교황 무오설을 반박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들에게 주신것이지 부패한 성직자들이 독점하라고 준것이 아니다. 그리고 성경의 권위는 교황보다 위에 있다. 오직 성경만이 기독교세계의 유일한 표준이며 교황의 권위나 제도는 성경상 전혀 근거가 없다고 확신했다.
위클리프는 민중에게 복음의 진리를 전하기 위해 라틴어로 된 성서를 영어로 번역하여 마침내 1382년에 완성하였다.
(3) 화채설 반대.
위클리프는 빵과 포도주가 실제로 예수의 살과 피로 변한다는 카톨릭의 화체설(transubstantiation)을 부인했지만 성만찬의 성례적 중요성을 인정하면서 '유용한 표징'(an effectual sign)이라고 하였다.
그는 말하기를 "빵은 그 자체로 남아있고 그리스도는 빵 안에 실제로 현존한다. 그렇지만 이 현존은 질료 자체가 변화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하였다. 즉 빵은 그리스도의 몸이지만 빵 자체가 변화하는 것은 아니고 영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그 질료 자체는 빵으로서 남아있다는 잔류론(consubstantiatio)을 주장한 것으로, 빵과 그리스도의 몸이 동시에 존재한다고 본 것이다.위클리프는 화체설에서 물질이 그리스도의 시제적 살과 피로 변한다는 주장을 미신을 조장하며, 성육신 원칙을 부인한다고 주장했다.
(5)위클립의 순교.
교황 그레고리 11세는 다섯가지의 사항에 대하여 지불을 요구했으나 그 요구는 수락되지 않았다. 위클리프의 마지막 정치적 행동은 교회 안에서 신성하게 보호되던 사람들의 죄악에 대하여 그 신성의 장막에서 공식적으로 그들을 끌어내는 논쟁을 하였던 1378년에 있었다.
그 후 1381년 위클리프는 그의 개인적인 삶을 위하여 루터워스(Lutterworth in Leicestershire)에서 은퇴하였다.
A.D. 1377년에 교황의 칙서에서 그레고리우스 11세는 위클립의 과오를 18개 항으로 지적했는데 그 내용은 신학적인 것보다 정치적인 것이 대부분이었다. 위클리프는 옥스퍼드에서 A.D. 1381년경 그의 이론을 이단으로 선고했고 런던에서 열린 지역공의회에서도 역시 같은 입장이었다.
위클리프가 정죄받은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1) 주교나 신부는 죄 가운데서 임명하거나 헌신할 수 없다.
(2) 그리스도께서 미사를 세우셨다는 것은 복음에서 증명될 수 없다.
(3) 성직자들이 이 세상 재물을 갖는 것은 성경에서 모순되는 일이다.
(4) 로마 교회는 사탄의 회당이다.
(5) 신부나 집사가 교황청이나 주교의 허락 없이도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는 일은 합법적이다.
(6) 추기경들이 교황을 선출하는 일은 마귀가 고안한 것이다.”
위클리프는 가장 고집스럽고 돌이키지 않는 이교도로 선포되었다.
위클리프는 궁정에서 나올수 밖에 없었고, 은퇴하여 조용히 저술에만 집중했다. 생활고 때문에 왕실에서 하사한 전택이나 개인소유의 교구를 팔아치워야했다. 당시 교구 매매, 성직매매는 만연했기에 매우 일반적이었다. 그는 은퇴 후도 계속적으로 교회 안에서 자행되는 부패를 엄하게 공격하는 시리즈를 출판하였다.
A.D. 1382년 영국 교회에서 위클리프의 가르침을 정죄하고 그의 모든 저술들은 불태워졌다. 그 해에 위클리프는 뇌졸중으로 쓰러졌고 A.D. 1384년 12월 31일 두 번째로 발병한 뇌졸증으로 사망했다.
위클리프가 죽은 후 1403년 독일인 교수인 요한 휘브너는 위클리프의 작품을 발췌해 45개 항목을 만들어 이단적인 것으로 정죄했다.
A.D. 1415년 콘스탄트 회에서 그의 죄상을 267개항이나 나열하고 화형을 선언했고 그이 유골로 불태워 그 가루를 강물에 뿌리도록 결정하였다
그가 죽은후 31년이 지난 1415년, 독일의 보덴호수 에서 개최된 콘스탄츠 공의회에서 그는 이단으로 판결하고 그의 저작을 불태우고 그의 무덤을 파헤칠 것을 결정한다. 그의 죄는 라틴어 불가타 성경을 영어로 번역한 것이었다. 교황 마르티누스 5세는 위클리프가 죽은지 44년이 지난 A.D. 1428년 그에 대한 형을 집행하도록 명령했다. 마르티누스는 콘스탄츠 공의회에서 만장일치로 선출된 교황이었다. 새로운 교황의 명에 따라 부관참시와 함께 그의 뼈를 태운 후 남은 재를 에이번(Avon) 강의 지류인 스위프트(Swift) 강에 쏟아 부었다. 에이번강은 세번 강(River Severn)의 지류이다.
4. 존 후스(John Huss)
1) 존 후스는(John Huss A.D. 1373-A.D. 1451년)
존 후스는(John Huss)는 (A.D. 1373-A.D. 1451년)보혜미아(Bohemia)후슨넥(Husinec) 지방 농민의 아들로 출생했다. 그는 남 보혜미아 푸라하 카렐 대학을 졸업했고 A.D. 1393년 학사학위를 받았고 교수가 되었다. A.D. 1369년에 입문 석사 학위를 받고 A.D. 1406년 이후 대학 교양학부와 신학 학부의 교수를 역임했다. 성 미카엘 성당에서 설교했다.
A.D. 1401년에 철학부 학장이 되었고 1년 후 총장이 되었다. A.D. 1402년 3월 14일에 베들레헴 성당(Betlehem kaple)의 설교자가 되었다.
후스는 프라하 카렐 대학의 지도적 위치에서 체코인들로 하여금 독일의 힘에 맞서서 싸울 것을 독려했다. 도한 체코인 교수로서 라틴어 체코어 저술 생활을 했고 체코어 철자법을 개혁하여 그 문법이 오늘에 까지 이르게 되었다.
후스는 설교자로서 교수로서 설교와 저술로 가톨릭 신앙의 타락과 부패상을 비판하고 초대교회 순수한 신앙으로 돌아 갈 것을 가르쳤다. A.D. 1373-1451년 콘스탄스 회의 결정에 의하여 화형을 당했다
2) 존 후스의 주장
후스의 설교와 저술을 통하여 교회의 부패와 타락을 청산하고 기독교 정신으로 돌아 갈 것을 축구했다. 그는 말하기를 교회의 의미는 성례에서 찾기보다는 그리스도를 닮아 가는 데 있다고 했다. 면죄부 판매를 반대하고 성상 숭배를 배격했다. 또한 교황의 정대 권위를 반대하고 성경의 절대 권위를 주장했다.
후스는 A.D.1512에 바울 서신 번역 주석을 통하여 성도의 구원은 선행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 것이 아니요 구원은 하나님의 거저 주시는 은혜라고 말했다.
후스는 교회의 부와 사치스러움은 사악함과 불신앙의 표징이라고 비판했고 성직자 청빈 생활을 강조했다. 교회가 온갖 비싼 성화들과 성직자의 예전복, 성작과 종과 오르간을 사용하여 행하는 의식들을 비판했다.
그리고 사제들만이 참예했던 성만찬 예식에 평신도들에게 허락했다. 오늘 이시대의 개신교 성만찬 예식은 여기에서부터 시작된 것이다.
후스의 교황권에 대한 주장을 요악하면 아래와 같다.
1) 만일 교황이 하나님의 율법과 복음을 아는 경건한 자들을 무시하고 인간적인 전통에만 눈을 돌린다면 이것은 교황을 거절해야 하는 표시가 된다.
2) 교황과 영적인 고위층들이 경건한 삶을 벗어나서 세상적인 일에 얽매여 산다면 이것이 교황을 거절해야할 표시가 된다.
3) 교황이 그리스도를 섬기는 일에 세상의 장사꾼들을 내세우고 자신의 세속적인 삶에만 욕심을 내어 교회를 압박하는 경우이다.
4) 만일 교황이 자신의 명령서를 통하여 구원을 필요로 하는 영혼들에게서 하나님의 말씀을 탈취 한다면 이것이 교황을 향하여 대항할 표시이다.
3) 후스의 순교.
후스가 타락을 청산하고 성경으로 돌아가자는 외침은 카렐 대학 교수들과 왕실 그리고 다수의 귀족들 대수의 대중들이 지지를 받아 점점 확산 되어 갔다. 그러나 고위 성직자들과 프라하의 독일인들은 반발했다. 그리하여 카렐 대학 안에 독일인 교수들과 체코 교두들간에 갈등이 시작되었다.
이 갈등은 A.D. 1409년 바츨라프 4세의 크트나호라 칙령으로 A.D. 1348년 카렐 4세가 국제주의적 원칙에 입각, 배분한 민족 구성이 재조정되어 대학의 주도권이 체코인 교수에게 돌아간 것이다. 독일인 교수들과 학생들은 이에 대한 항의로 학교를 떠나 라이프치히에서 새로운 대학을 설립했다.
A.D. 1414년 스위스의 종교회의가 열리게 되는데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비츨라프 4세의 동생 지기스문트(Sigismund Luxcemburg)가 안전을 보장하면서 후스가 회의에 참석 할 것을 요구했다. 후스는 이 참석 요구가 암살 음모일 것임을 알면서도 성직자 회의인 만큼 설마 죽이겠는가 하는 생각과 이 기회에 자기의 견해를 성직자들에게 이해시킬 기회로 생각하고 콘스탄스에 도착했다.
콘스탄스에 도착하여 후스가 가지고 있는 황제의 안전 통행장을 무시하고 얀 후스가 도착하자마자 법정에 세웠다. 그는 자신의 주장을 철회하지 않아 억울하게도 공의회에 의해 이단 판결을 받고 체포되었다. 후스는 감옥에 갇히게 되어 심한 고문을 당했다. 법정에서 끝까지 자신의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결국 A.D. 1415년 7월 6일에 화형 당했다. 그리고 약 1년 후 A.D.1416년에 후스의 친구이자 동역자인 제롬(Jerom)도 같은 장소에서 화형 시켰다. 그는 화형당하면서 "너희들이 거위(얀 후스)를 잡아 기어이 구워죽이고 있지만 백 년이 지나면, 백조가 나타나서 유럽을 뒤흔들 것이고 그 때는 구워 죽이지 못할 것이다!"라는 유언을 남겼다. 이 유언에 의하여 백조는 루터파의 상징 중 하나가 되었다.
그 후 독일 베젤의 존(John of Wessel. A.D. 1420년-A.D. 1489년)은 독일의 신학자이며 형제단(후스의 개혁사상을 지향하는 단체)의 일원으로 개종한 후 이단으로 정죄되어 옥사했다 이는 화체설을 반대하고 면죄부 판매와 성상 숭배를 반대하고 성경 권위를 주장했다
이탈리아 사보나롤라 (Girolmo Savonarola. A.D. 1452년-A.D. 1458년) 이는 이탈리아 도미닉 수도원의 수사 출신이며 프로렌스에서 이단으로 정죄되어 화형을 당하였다 이는 교황의 부도덕성에 대하여 설교했다
4) 후스 이후 개혁
후스가 죽은 후 개혁은 멈추지 않았다. 존 후스에게 가해진 부당한 처사를 본 체코인들은 공포를 느꼈으며, 공포는 곧 분노가 되었다. A.D. 1415년 가을이 되자 체코의 귀족들은 콘스탄츠 공의회의 결정을 거부하는 결의문을 발표하였다. 공의회의 결정을 거부한다는 것은 곧 가톨릭에 반기를 든다는 뜻이었다. 후스파 일원들은 후스가 그랬듯이 성만찬에서 평신도에게도 포도주를 주었다. 성경대로 살 것을 다짐한 후스파의 수는 날이 갈수록 늘어났고, 가톨릭의 탄압도 후스파의 의지를 꺾을 수는 없었다.
A.D. 1419년, 강경 후스파들이 동료 후스파들의 석방을 요구하며 시의원들을 창문 밖으로 내던지는 1차 프라하 창문 투척사건 이 발생했고 얼마 후 후스파는 체코의 흐름을 주도하는 세력이 되었다.후스의 처형은 체코인들의 강한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체코 땅에는 혁명의 기운이 감돌기 시작했다. 1415년 가을에는 여러 귀족들이 콘스탄츠 종교 회의의 결정을 거부한다는 결의문을 발표하고, 후스의 가르침에 따라 체코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끝까지 수호하겠다는 선언문을 발표했다.
후스의 처형은 로마 가톨릭교회에 대한 도전과 봉기의 신호였으며, 프라하 대학교 교수들과 체코 대중들의 환영을 받았다. 이들은 성만찬 때에 신약성서의 최후의 만찬 이야기에 근거하여 빵과 포도주를 모두 나누었으며(그 전에는 성직자들에게만 포도주를 나누는 것이 허용되었는데, 후스가 살아 있을때 지지자들이 후스의 허락을 받아 이를 채택하기 시작했다), 포도주를 담은 성작은 후스주의 운동의 상징이 되었다. 결국 후스주의와 로마 가톨릭 사이의 갈등은 깊어졌고 A.D. 1419년 7월 30일 프라하의 노베메스토에서 얀 젤리프스키(Jan Zelivsky)가 주도하는 강경파 후스주의자들이 동료 후스주의자들의 석방을 요구하며 시 의회 의원들을 시청 창문 밖으로 던지는 제 1차 창문투척사건이 발생했으며, 며칠 뒤 바츨라프 4세가 죽자 후스주의자들은 보헤미아를 장악하게 된다.A.D. 436년 가톨릭 측과 평화 협정을 맺게 되고 교황과 보헤미아 왕에게 순종하며 가톨릭 의식을 받아들이되, 성찬식에서 빵과 포도주를 모두 받는 기존 후스파의 방식은 인정되는 것으로 타협을 보았다. 이런 형태로 17세기경까지 존속되었으나, 30년 전쟁 직후 합스부르크의 반종교개혁 압력을 견뎌내지 못했다. 이후 후스파 교회는 지하로 숨어들어갔고 시골지역에서 낮에는 가톨릭 미사를 보고 밤에는 개신교 예배를 보는 진풍경이 일어나기도 했다.
요제프 2세때 관용 칙령이 반포되고 나서야 후스파는 다시 양지로 나오는 것이 허락되었다.오스트리아-헝가리 해체 직후 체코슬로바키아 공화국에서 후스파 교회는 완전한 신앙의 자유를 인정받았고, '체코 복음주의 형제단'(ČCE)이란 이름의 칼빈파와 루터파의 연합 교단으로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