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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평 성당, 원머리 성지
1. goodnews - 성지 - 대전교구, 신평 성당
http://maria.catholic.or.kr/sa_ho/list/view.asp?menugubun=holyplace&ctxtOrgCode=71&ctxtGyoguCode=12&Orggubun=71&ctxtHigh=&ctxtLow=&curpage=1&ctxtOrder= name1 &ctxtOrderType=&ctxtOrgNum=2298&PSIZE=20
<위 게시된 내용 중 주요 부분 소개>
순교자 박 마르코와 박 마티아가 머물던 거룩한 자리
지번주소 충청남도 당진시 신평면 금천리 907
도로주소 충청남도 당진시 신평면 신평길 63
전화번호 (041)363-6761 홈페이지 http://www.josephus.or.kr
신평 성당의 관할 구역인 원머리(당진군 신평면 한정리)는 성당에서 북쪽으로 약 3km 정도 떨어진 곳으로 병인박해(1866년) 당시 이미 상당히 큰 교우촌을 이루고 있었다. 원머리라는 지명은 바닷가에 둑을 쌓기 시작한 곳이라는 뜻에서 나온 언머리가 변형된 것으로 주로 염전과 논농사를 주로 하며 살던 박씨, 양씨, 조씨, 문씨 등이 신앙을 받아들여 복음을 전파함으로써 이미 병인박해 때 상당히 큰 교우촌으로 성장하였다.
마침내 이곳에도 박해의 광풍이 몰아쳐 1866년부터 1868년까지 3년여에 걸친 박해로 많은 순교자를 배출하게 되는데, 현재 한정리(원머리)에 유해가 안장되어 있는 박태진 마티아와 박선진 마르코는 무진년(1868년)에 수원 감옥에서 순교하였다.
순교자 박선진 마르코의 아우 박 요셉은 1920년대에 형의 순교에 대해 이렇게 말하였다. “마르코는 모친의 뜻을 따라 착실히 수계하면서 모친과 함께 동네 교우들과 연락하고 지냈다.” 신부님이 오시어 성사를 받으려하면 부친이 금하는 고로 이를 마음속으로 꺼리더니 무진년에 수원 포교에게 체포되어 잡혀 갈 때 그는 부모에게 하직하며 위로하되 ‘거기 가서 죽으면 육정의 박절함이 없을까 만은 주 명대로 위주하여 죽는 것이 구령에 편한 일이라, 부디 염려마시고 훗날을 조심하십시오.’라고 한 다음 사촌 형인 박태진 마티아와 함께 수원옥에 갇혔다.
모진 고문을 당할 때 박태진 마티아가 이를 못 이겨 배교하려 하자 박선진 마르코는 “천주를 배반하고 영벌을 받으려 하느냐?”고 형을 깨우쳤고, 이에 박태진 마티아는 배교한 것을 뉘우치고 옥에 갇힌 지 15일 후에 같이 순교하였는데, 죽은 후 외교인의 도움으로 시신을 찾아 이곳 원머리 박씨 집안 땅에 안장하였다. 이때 박선진 마르코의 나이는 33세였고 박태진 마티아의 나이는 52세였다. 그 후 박선진 마르코와 박태진 마티아의 묘는 1989년 4월 4일 신평 성당 구내로 옮겨 모시고 현양비를 세웠다.
이들 박씨 형제 외에도 순교로 신앙을 증거하고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낸 원머리(신평) 출신 19분의 순교자들에 대해 치명일기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양 도미니코 회장, 박 회장, 유 서방, 김동 4인이 정묘년(1867년)에 홍주(홍성) 감옥에서 순교하였으며, 최 베드로, 김 루치아, 김 마리아, 원 아나스타시아 4인이 무진년(1868년)에 홍주에서 같이 순교하였으며, 또 같은 해에 박 요한과 문 마리아가 해미에서 순교하였고, 원씨, 김 마리아 2인이 홍주에서 정묘년에 순교하였고, 최 아우구스티노, 홍 베드로닐라, 양정수, 양 아우구스티노, 홍 베드로, 한 마티아 6인이 병인년에 홍주에서 순교 치명하였으며, 같은 해 김백선이 해미에서 순교하였으니, 이곳 원머리에 얼마나 큰 신앙 공동체가 형성되어 있었는지를 알 수 있을 뿐 아니라 그들의 신심 또한 얼마나 깊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게 한다.
신평 성당은 2000년에 새 성당을 건축하면서 박선진 마르코와 박태진 마티아의 묘를 재정비하였고, 2009년 대전교구 성지위원회의 결정과 교구장 유흥식 라자로 주교님의 허가를 얻어 순교자 현양과 성지 개발을 위해 그 해 11월 3일 본래 두 순교자가 묻혔던 원머리로 유해를 다시 옮겨 모셨다. 그리고 현양비도 수정하여 다시 세우고 묘역 또한 재정비하였다. 아울러 20여 년간 두 순교자가 모셔져 있던 신평 성당 자리에 기념비를 세워 두 분의 믿음과 순교정신을 기리고 있다. [출처 : 신평 성당 홈페이지, 내용 일부 수정 및 추가(최종수정 2011년 11월 7일)]
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모바일용 요약 설명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신평 성당 내에는 1989년부터 2009년까지 11월까지 신평 원머리(한정리) 출신 순교자 박선진 마르코와 박태진 마티아의 묘소가 있었습니다. 2009년 순교자 현양과 원머리 성지 개발을 위해 두 순교자의 유해를 본래의 자리인 원머리로 재이장했습니다. 현재 신평 성당 내에 두 순교자의 묘소가 있던 자리에는 순교자 기념비를 세워 두 분의 정신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또한 2000년에 새로 건립된 성당 또한 곳곳에서 순교자들의 정신을 느낄 수 있도록 건축되었습니다.
미사시간 안내
주일미사 일 06:00 10:00 교중미사 15:00 어린이미사
평일미사 월 06:00 화 19:00 수 10:00 목 19:00 매월 첫 목요일 성시간, 성체강복
금 19:00 토 18:00 학생미사
* 미사시간이 변동될 수 있으니 성지나 관련기관으로 전화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2. goodnews - 성지 - 대전교구, 원머리 (신평 한정리)
http://maria.catholic.or.kr/sa_ho/list/view.asp?menugubun=holyplace&ctxtOrgCode=71&ctxtGyoguCode=12&Orggubun=71&ctxtHigh=&ctxtLow=&curpage=1&ctxtOrder= name1 &ctxtOrderType=&ctxtOrgNum=2832&PSIZE=20
원머리 출신 순교자 박선진 마르코와 박태진 마티아
지번주소 충청남도 당진시 신평면 한정리 233
전화번호 (041)363-6761 홈페이지 http://www.sinpyeongcatholic.or.kr
관련기관 신평 성당 관련주소 충청남도 당진시 신평면 신평길 63
대전교구 신평 성당 관할 구역인 원머리(충청남도 당진시 신평면 한정리)는 박선진 마르코와 박태진 마티아 두 분 순교자의 묘소가 있는 성지이며 초창기 박해 시대 때 많은 교우들이 피신하여 정착한 교우촌 지역이다.
원머리라는 지명은 바닷가 원을 막는 머리 부분이라는 뜻을 지닌 ‘언두리’가 원머리로 변형된 말이다. 이곳에는 1784-5년대 이존창 루도비코에 의해 주변 내포지역과 함께 삽교천 물줄기를 따라 신앙이 전해져 왔고, 그 당시 충청도 관찰사인 박종악의 수기(1791-2년)에 의하면 1790년대에 이미 신앙공동체가 형성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특히 원머리 지역은 아산만의 물줄기와 삽교천 하부의 물줄기가 만나는 곳이며 당시 밀물이 들어오면 사방이 바닷물로 둘러싸여 자연적으로 섬의 모양을 띄게 되었다. 따라서 천혜의 요지인 이곳으로 박해를 피해온 많은 교우들은 주로 염판(불로 바닷물을 지펴서 증유하여 소금으로 만드는 작업)과 옹기그릇을 구우며 생계를 유지했다.
오늘날 이곳은 제방과 둑을 쌓으면서 논과 밭이 만들어져 과거의 역사를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은 오로지 100년 이상의 역사를 가진 공소들뿐이지만, 얼마나 많은 교우들이 이곳에서 힘든 삶을 살아왔는지를 잘 엿 볼 수 있는 유서 깊은 교우촌 지역이다.
현재 남은 것은 공소의 허름한 건물들뿐이지만 하느님과 진리를 위해 생명을 바쳐 신앙을 증거한 장한 순교자들과 이런 오지에서 오랫동안 오고가는 사람 없이 황량한 바닷바람과 관아의 눈을 피해 살아온 많은 교우들의 삶의 흔적이 시대의 한파와 변화 속에서 그 참된 가치가 묻혀왔다. 그러다가 2014년 8월 프란치스코 교황의 한국 방문을 계기로 성지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면서 가치가 새롭게 조명되었고 그 해 전대사 성지로 선포되었다.
순교자 박 마르코의 아우 박 요셉은 1920년대에 형의 순교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마르코 형은 모친의 뜻을 따라 착실히 수계하면서 모친과 함께 동네 교우들과 연락하고 지냈다. 신부님이 오시어 성사를 받으려 하면 부친이 금하는 고로 이를 마음속으로 꺼리더니 무진년(1868년)에 수원 포교에게 체포되어 잡혀 갈 때 그는 부모에게 하직하며 위로하되 거기 가서 죽으면 육정의 박절함이 없을까 만은 주 명대로 위주하여 죽는 것이 구령에 편한 일이라, 부디 염려마시고 훗날을 조심하십시오.”라고 한 다음 그의 사촌 형 박 마티아와 함께 수원으로 붙잡혀 끌려갔다.
모진 고문을 당할 때 사촌 형 박 마티아가 매를 못 이겨 배교하자, ‘천주를 배반하고 영벌을 어떻게 받으려 하느냐?’고 했고, 이에 박 마티아는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15일 후에 같이 순교했다. 병인박해 순교자 증언록에 의하면 외교인 서덕행이 모진 매를 맞아가며 시신을 찾아 이곳 원머리로 운구하여 가족에게 넘겼고 현 묘역에 안치했다고 한다. 이때 박 마르코의 나이는 33세였고 박 마티아의 나이는 52세였다. 이후 서덕행은 순교자 박 마르코의 매제가 되었고, 사후 그의 공을 기리고자 후손들이 순교자 묘역 옆에 안장하였다.
원머리의 신앙 유산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순교자들의 무덤이다. 1868년 수원에서 순교한 두 분의 시신이 다행히 이곳 박씨 집안의 야산에 묻혀 큰 변고 없이 내려왔고, 그 후손들이 대를 이어 묘를 관리해 왔기에 오늘날까지 보존되었다. 이렇게 보존된 두 순교자의 유해는 1989년 신평 성당 구내로 이장되었다가 2009년 본래의 진토가 있던 원머리 묘역으로 다시 이장되었다. 그 사이 원머리 묘역에는 순교자 유해가 없었음에도 빈 무덤을 보존하고 있었기에 원형을 회복하는데 큰 어려움이 없었다. 또한 이 땅이 교구에 기증됨으로써 명실상부한 교회 공동체의 유산이 되었고, 원형 그대로 보존되어 내려오는 순교자 묘로서의 가치를 지닌 유명한 성지가 되었다.
이 묘는 2009년부터 한국 교회에서 진행 중인 ‘조선왕조 치하의 순교자와 증거자’의 제2차 시복 추진으로 인해 그 가치가 더 주목받게 되었고, 2013년 주교회의 춘계 정기총회에서 안건의 제목을 ‘이벽 요한 세례자와 동료 132위’로 변경해 그해 4월 26일 교황청 시성성으로부터 예비심사 관할권 승인 교령을 받은 2차 시복 추진에 원머리 출신의 두 순교자가 대상자로 포함되어 그 중요성이 더욱 부각되고 있다. [출처 : 신평 성당 제공, 내용 일부 수정(최종수정 2016년 9월 5일)]
____________________ 모바일용 요약 설명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신평 성당의 관할 구역인 원머리(당진시 신평면 한정리)는 성당에서 북쪽으로 약 3km 정도 떨어진 곳으로 1866년 병인박해 당시 이미 상당히 큰 교우촌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원머리라는 지명은 바닷가 원을 막는 머리 부분이라는 뜻을 지닌 언두리가 원머리로 변형된 것으로 박해를 피해온 교우들이 염판과 옹기그릇을 구우며 살던 교우촌이었습니다. 이곳에도 박해의 광풍이 몰아쳐 1866년부터 1868년까지 3년여에 걸친 박해로 많은 순교자를 배출하게 되는데, 원머리에 유해가 안장되어 있는 박선진 마르코와 박태진 마티아는 무진년(1868년)에 수원 감옥에서 순교했습니다.
사촌지간인 두 형제의 순교 후 그들의 시신은 외교인 서덕행에 의해 고향 원머리의 박씨 집안 땅에 안장되었다가 1989년 4월 4일 신평 성당 구내로 옮겨 모시며 현양비를 세웠습니다. 신평 성당은 2000년 새 성당을 건축하면서 두 순교자의 묘를 재정비하였고, 2009년 11월 3일 순교자 현양과 성지 개발을 위해 본래 두 순교자가 묻혔던 원머리 묘역으로 유해를 다시 이장했습니다. 그리고 현양비도 수정하여 다시 세우고 묘역 또한 재정비했습니다. 아울러 20여 년간 두 순교자가 모셔져 있던 신평 성당 자리에 기념비를 세워 두 순교자의 믿음을 기리고 있습니다. 두 순교자는 현재 한국교회에서 진행 중인 ‘이벽 요한 세례자와 동료 132위’ 시복 추진 대상자로 선정되었습니다.
미사시간 안내
주일미사 일 06:00 미사 일정은 신평 성당 것입니다.
10:00 교중미사
평일미사 월 06:00 동절기 미사 없음 화 19:30 동절기 19:00
수 10:00 목 19:30 동절기 19:00, 매월 첫 목요일 원머리 성지 도보순례
금 10:00 토 18:00 주일미사(어린이 미사)
* 미사시간이 변동될 수 있으니 성지나 관련기관으로 전화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3. 천주교 대전교구 - 60주년 행사자료
http://www.djcatholic.or.kr/home/pds/60th_notice.php?enter=v&idx=12886&page=1&s=&k=
<위 게시된 내용 중 주요 부분 소개>
2-1. 2차 도보 성지 순례 : 공세리 성당→신평 성당 →솔뫼 성지 중에서
신평 성당
신평면 지역의 복음 전래는 상당히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두세(C. Doucet, 丁加彌) 신부가 충청도 지역의 사목을 담당하고 있던 1883년에 이미 신평면 한정리(寒井里, 또는 원머리)와 매산리(쇠터 또는 새터)에 공소가 설립되어 있었고, 1886년경 한정리 공소와 매산리 공소의 신자수는 각각 117명과 119명에 이를 정도였다. 그러므로 신평면의 복음 전래는 1883년 훨씬 이전에 이루어진 것이 확실하다. 이들 두 공소는 1890년 양촌(陽村) 본당 설립과 함께 이 본당 소속이 되었다가 1899년에 합덕(合德, 현 구합덕) 본당 관할이 되었으며, 이후 신자수가 늘어남에 따라 금천(金川)공소·음셈리(현 신평면 매산리)공소·신당리(新堂里)공소·거산리(巨山里)공소·초대리(草垈里)공소·운정리(雲井里)공소로 각각 설립되어 이 공소들을 중심으로 활발한 신앙 생활이 전개되었다. 1960년 11월 신합덕 본당이 설립되자 이곳으로 소속이 바뀌었고, 1975년에 이 8개 공소가 통합되어 ‘신평 본당’으로 승격되었다.
초대 주임 이종대 신부는 원머리 공소에서 경작하던 간척지 7,636평을 매각하여 성당 건축 기금을 마련한 뒤 현 성당 부지에서 공사에 착수, 1976년 3월 성당(89평)과 사제관(32평)을 완공하고 봉헌식을 거행하였다.
4대 주임 윤여홍 신부는 원머리 공소 출신으로 무진년(1868년)에 순교하여 원머리에 안장되어 있던 박선진(마태오)과 박 마티아의 유해를 1989년 4월에 성당 내로 이장하였는데, 이는 대전교구 성지 보존·개발 작업의 일환으로 실시된 것이었다.
1999년 9월 기공식을 거행한 뒤 이듬해 11월 2층 성당(710평)을 신축하여 봉헌식을 가졌다. 한편 2000년 9월에는 성당 내에 이장했던 두 순교자의 현양비를 봉헌하였다. 이처럼 신평 본당 신자들은 자신이 속한 지역의 순교자들에 대하여 강한 자부심을 느끼며 순교 신심을 본받기 위하여 다양한 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신평 순교자 묘 (사촌 형제, 박선진 마르코와 박 마티아 순교자 묘)
현 당진군 신평면 한정리 지역인 원머리, 새터, 용성이라는 곳에 병인박해 시 이미 교우촌이 형성되어 있었다. 원머리에는 적어도 1850년대에 교우촌을 이루고 있었다.
이곳은 염전과 논농사를 주로 하며 살던 곳으로 박씨, 조씨 등이 박해 때 복음을 전파함으로써 교우촌이 형성되었다. 순교자 박 마르코는 본래 원머리 사람으로 열심인 모친으로부터 신앙을 받아들였다. 그의 아우 박 요셉은 1920년대에 형의 순교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마르코는 모친의 뜻을 좇아 진실히 수계하면서 모친과 함께 동네 교우와 연락하고 지냈다. 신부 오시어 성사를 받으려 하면 부친이 금하는 고로 이를 꺼리더니 무진년(1868년)에 수원 포교에게 체포되기에 이르렀다. 본래 그의 집은 세간이 있고 본읍에 권두가 조금 있었다.
수원으로 잡혀갈 떼 그는 부모께 하직하며 위로하되 ‘거사 가서 죽으면 육정의 박절함이 없을까만은 주 명대로 위주하여 죽는 것이 구령에 편한 일이라. 부디 염려 마시고 훗날을 조심하십시오’ 라고 한 다음 그 사촌 마티아와 함께 수원 옥에 갇혔다.
수원에서 고문을 당할 때 마티아가 이를 못 이겨 배교하려 하자 마르코는 ‘대주를 배반하고 영벌을 받으려 하느냐?’고 깨우치도록 하였으니, 이에 마티아는 배교함을 뉘우치고 성교함을 바로 설명하였다. 옥에 갇힌 지 15일 후 포교들은 그들을 교(絞)하여 죽였는데, 죽은 후 시체를 찾아 본 곳(원머리)에 장사하니 시체 정결함이 산 이와 같았다 이 때 마르코의 나이는 33세었고 그의 사촌 마티아의 나이는 50세였다. 1989년 4월 4일 신평 성당 구내로 옮겨 모셨다.
순교자 박마르코(선진), 박 마티아
한국 초기 교회 공동체들이 심한 박해를 받을 무렵(1801년부터 시작된 신유박해로 추정됨) 서울과 수원지역에서 신앙생활을 하던 박 씨들이 박해를 피해 숨어살기 좋은 원머리(현 신평면 한정리)로 이주하였다. 생업으로는 주로 염전을 개척하여 소금 장사를 하였다.
1866년부터 시작된 병인박해의 영향이 이곳 원머리에까지 이르러 2년 후 무진년(1868년)가을에 수원의 포졸들이 신자들을 체포하려 왔다. 그들은 벼 타작을 하던 두 박 씨를 신자들과 함께 체포하여 수원으로 압송하였다. 배교를 요구하며 심하게 매질하고 고문하였다. 두 분 중 한 분(박 마티아)은 잠시 배교했었으나 곧 통회하고 순교하였으며 다른 한 분(박 마르코)은 처음부터 끝까지 신앙을 고백하며 순교하였다.
포졸들이 원머리에까지 찾아오게 되었던 경위를 자세하게 알 수 없으나, 혹시 서명삼의 부친 서씨의 간접적인 개입이 있었을 개연성이 추정된다. 서씨는 마을에 살던 한 총각이었다는 구전도 있고, 포졸 출신이었다는 구전도 있는데, 그는 신자들이 포졸들로부터 압송되고 얼마 지나 박씨집에 찾아와 순교자 박 마르코의 여동생과 결혼을 약속받는 조건으로 두 순교자의 시신을 찾아올 수 있었기 때문이다. 혹시 사전 계획이 있었는지, 아니면 결혼하고자 갑자기 용기를 발휘했는지 명확하지 않다.
아무튼 그는 순교자들의 시신을 찾아왔고, 결국 순교자의 여동생과 결혼하였고 신자가 되었다. 그가 여사울에서 본래 살아왔다고도 전해지고, 원머리에 살다가 여사울로 이사했다고도 전해진다. 그의 묘소는 근래에 이르기까지 두 순교자들의 묘 바로 옆에 위치해 있었으나 지금은 이장되었다. 서씨의 아들 서명삼은 원머리 박씨가문에 가끔 왕래하였으며 그를 통해서 증언을 들었던 이들이 생존해 있다.
증거자료: 치명일기 373항-374항
증언자들: 박영진(순교자들의 형제 및 사촌형제, 박인근의 3대손)
박갑득의 부인 윤귀순(마리아)
순교자 박선진(마르코)과 박마티아는 원머리에서 출생하였으며 종형제이다. 원머리에는 박해시대인 1850년대에 이미 교우촌이 형성되었고, 박마르코의 부친은 외교인이었으나 모친이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여 입교하였으며, 모친의 뜻을 따라 착실히 수계하면서 신앙생활을 하였다.
그러나 일부 외교인들의 방해로 마음놓고 신앙생활을 할 수 없는 상황에서 1868(무진)년 포교에게 체포되어 수원 감옥에 갇혔으며 옥에 갇힌지 15일 후 순교하였는데 그 때 박마르코는 33세였고, 박마티아는 50세였다.
순교 후 외교인의 도움으로 그 시신을 찾아 원머리 박씨 집안의 땅에 안장하였다가 1989년 4월4일 신평 성당 내로 이장하였으며 2000년 새 성전을 신축하면서 묘역을 다시 정비하였다.
박마르코가 수원으로 잡혀갈 때 부모에게 하직인사를 드리면서 “천주님의 뜻대로 천주님을 위하여 죽는 것이 영혼을 구하는 일이니 너무 염려하지 마십시오.”라고 위로하였다.
또한 박 마티아가 모진 고문을 못 이겨 배교할 뜻을 바치자 “주님을 배반하고 영원한 지옥 벌을 받으려 하느냐?” 고 깨우쳐 함께 순교하니 그 믿음은 모든 신앙인의 귀감이 되고 있다.
-신평성당(041-363-67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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