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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경제용어
사재감공인(司宰監貢人)
정의
조선후기 사재감에 속하여 생선·젓갈·땔감 등을 조달하던 청부상인.
개설
사재감(司宰監)은 고려시대 이래 어량(魚梁), 산택(山澤)에 관한 일을 맡아 보던 관서로 조선이 건국되고 태조대와 세조대 관제개혁이 단행된 후에도 계속 유지되었다.『경국대전』에 사재감은 정3품아문으로 어물(魚物)·육류(肉類)·식염(食塩)·땔나무[燒木]·횃불[炬火] 등을 관장한다고 기록되어 있었다. 다만 『대전통편』이 간행되는 시점에서 종4품아문으로 강등되었다.
조선전기에는 왕실 가족의 부양과 관서 행정에 필요한 여러 가지 물품을 각 도와 군현에 분정(分定)하여 중앙 각사에서 이를 개별적으로 거두어들여 썼다. 이를 각사자판(各司自辦) 혹은 각사지공(各司支供)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16세기 무렵부터 현물공납제에 여러 모순점이 발생하면서 1608년(광해군 즉위년)에 경기 지역을 시작으로 한 세기에 걸쳐 6도에 대동법을 확대하여 시행하였다. 대동법 시행 이후 중앙의 공물아문들은 공안에 근거하여 토산현물을 군현에 각각 분정해 거두어들이는 방식이 아닌, 중앙에 설치된 선혜청과 호조에서 공물가를 받아 소속 공인(貢人)들에게 지급해 주고 물품을 시중에서 구입해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사재감공인(司宰監貢人)은 대동법 시행 이후 사재감에 속하여 생선·젓갈·소목 등의 물품을 전문적으로 조달해 바치던 청부상인을 일컬었다.
담당 직무
『만기요람』에 따르면 사재감공인은 19세기 초에 청어·준치·조기·밴댕이젓·새우젓·알젓·건민어 등의 어물과 땔나무를 정부 관서에 조달하는 역을 졌다. 이에 대한 반대급부로 선혜청으로부터 원공미(元貢米) 6,742석 5두를 조달가로 지급받았으며, 1778년(정조 2)에 395석 5두[庚申加定米]를, 1802년(순조 2)에 1,390석 11두[壬戌加定米]를 각각 더 지급받았다. 이미 18세기 전반부터 사재감과 사도시 등에 공물가미를 증액할 때 선혜청의 원공미를 가정(加定)해 줄 것인지, 아니면 값이 싼 호조의 별무가미(別貿價米)를 지급해 줄 것인지에 대한 논쟁이 수차례 있었다. 1783년(정조 7)에는 호조에서 사재감공인에게 줄여 지급하였던 공물가미 800석 가운데 400석을 회복시켜 주었다. 사재감공인에게 책임지우는 별무는 늘어난 데 비해 호조에서 지급하는 공물가[別貿]는 턱없이 부족하다는 호소가 있었기 때문이다[『정조실록』 7년 2월 5일]. 사재감의 공물역은 18세기에 점차 확대되었으며, 이에 따라 19세기까지 공물가가 증액된 것으로 보인다.
변천
조선전기에 사재감은 각 군현에서 공물로 바치는 땔감과 어물 외에도 공조로부터 기인(其人)을 배정받았다. 이들은 경기 인근에서 져 나르는 땔감을 왕실과 정부 각사에 공급해 주는 역할을 하였다. 뿐만 아니라 시장(柴場)을 별도로 분급받아 자체적으로 땔감을 공급해 쓰기도 하였다. 그런데 대동법을 시행하면서부터는 현물로 수취하던 땔감과 어물을 공인들에게 책임을 지우는 방식으로 바뀌었다. 사재감공인은 선혜청의 공물가 지급 체계 속에서 19세기까지 유지된 것으로 보인다.
참고문헌
『경국대전(經國大典)』, 『대전통편(大典通編)』, 『만기요람(萬機要覽)』
최주희, 「17~18세기 왕실·정부의 연료소비 증대와 땔감조달방식의 변화」, 『역사와 현실』 94, 2014.
최주희, 「조선후기 宣惠廳의 운영과 中央財政構造의 변화―재정기구의 합설과 지출정비과정을 중심으로―」, 고려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4.
실록연계
『정조실록』 7년 2월 5일
사진인(私賑人)
정의
개인적으로 곡식을 풀어 기민(饑民)을 진휼한 사람.
개설
조선시대 정부는 흉년이 들었을 때 지방의 부유한 사람에게 가난한 백성을 구제하도록 장려하고, 개인의 곡식을 내어 빈민을 구제한 사람에 대해서는 진휼이 끝난 후 포상하였다. 이들은 구제한 사람 수나 기증한 곡식량에 따라 관직을 얻거나 공명첩을 받아 신분 변동을 도모하였다. 그러나 부민(富民)이라는 이유로 억지로 개인의 재산을 써 가며 진휼하도록 강요받기도 하였다.
내용 및 특징
1. 사진인의 등장 배경
조선시대 전 기간을 통해 가뭄·홍수와 같은 자연재해, 전란·화재와 같은 인재(人災)가 끊이지 않았다. 재정이 넉넉하지 않았던 조선 정부는 일반 백성을 대상으로 납속(納粟)이나 부민권분(富民勸分) 등의 정책을 통하여 단기간에 필요한 자금을 확보하고자 하였다[『숙종실록』 23년 1월 23일].
한편, 조선후기 상품화폐경제의 발달로 인하여 부민의 존재가 새롭게 부각되었다. 이들은 넓은 토지를 경작하거나, 농법을 개량하고 상업 작물을 재배하는 등 경제적 노력을 통해 부를 축적하였다. 또 장시(場市)나 포구에서의 상업 활동을 통해 이윤을 추구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축적된 부를 바탕으로 부민들은 납속을 통해 신역(身役)을 면제받거나, 흉년기에 개인의 재산을 내어 진휼하는 사진에 참여함으로써 정부로부터 포상을 받는 등 사회적 신분 향상을 꾀하기 위하여 노력하였다[『정조실록』 7년 1월 18일].
2. 사진인의 신분 구성
조선후기에 나타나는 사진인은 대체적으로 지방에서 경제적인 부를 가진 부민으로 인식되었다. 이들은 수령의 권유나 강요에 의해서 진휼사업에 참여하였고, 10석(石) 이상의 곡식을 납부하여 각 도 감사의 필진장계(畢賑狀啓)에 이름이 올라 정부에 의해 그 존재가 드러난 사람들이었다[『정조실록』 8년 4월 30일].
사진한 사람들은 양반만이 아니었다. 1783년(정조 7) 경상감사 이병모(李秉模)의 필진장계에는 흉년에 기민을 도운 보진인(補賑人)이 26명이 확인되었다. 스스로 자신의 재물을 바친 원납인(願納人) 3명을 제외한 23명의 사진인의 신분은 유학(幼學) 8명, 절충장군(折衝將軍)·가선대부(嘉善大夫)의 품직자 5명, 업무(業武) 2명, 한량(閑良) 2명, 양인 6명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특히 조선후기 1,000석 이상의 곡식으로 사진한 사람은 주로 중류 계층으로 분류되는 품직자·한량·향품 등이었다. 이들은 정부의 권분(勸分) 모집에 참여하거나 동원됨으로써 향촌사회에서 신분 변동을 꾀한 인물들이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권분의 주 대상이 되어 강제로 권분을 해야 했고 이로써 19세기 민란의 한 축을 형성하기도 하였다.
변천
영조대에 이르면 사진하거나 원납한 곡식량이 50석 이상인 자는 정부에서 포상하고, 50석 미만인 자는 본도에서 시상하도록 하는 원칙이 법제화되었다. 따라서 이들은 구제한 기민의 수나 기증한 곡식의 양에 따라 각종 공명첩을 받아 신역을 면제받았고, 또는 참봉(參奉), 수령, 군문(軍門) 장교(將校), 변장(邊將) 등에 임용되었다. 사진인은 이러한 과정을 통해 사회·신분적 지위 향상을 꾀하기도 하였다[『영조실록』 1년 9월 27일].
그러나 정부가 사진에 대한 포상 약속을 지키지 않는 경우도 많았다. 특히 숙종대에는 사진인의 관직 임용을 약속대로 이행하라는 조치가 빈번한 것을 보면 포상이 제때 시행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정부가 스스로 진휼을 돕도록 한다는 명분하에 부민 침탈의 수단으로 사진을 이용했음을 알 수 있다.
참고문헌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일성록(日省錄)』
『대전통편(大典通編)』
고석규, 『19세기 조선의 향촌 사회 연구: 지배와 저항의 구조』, 서울대학교 출판부, 1998.
문용식, 『조선 후기 진정(賑政)과 환곡 운영』, 경인문화사, 2001.
정석종, 『조선 후기의 정치와 사상』, 한길사, 1994.
문용식, 「조선 후기 수령자비곡의 설치」, 『조선시대사학보』 9, 1999.
서한교, 「19세기 진휼 정책과 납속 제도의 추이」, 『역사교육논집』 26, 2001.
서한교, 「영·정조대 납속 제도의 실시와 납속부민층의 존재」, 『조선사연구』 1, 1992.
안병욱, 「19세기 임술민란에 있어서의 「향회」와 「요호」」, 『한국사론』 14, 1986.
이세영, 「조선 후기의 권분과 부민의 실태」, 『역사문화연구』 34, 2009.
서한교, 「조선 후기 납속 제도의 운영과 납속인의 실태」, 경북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5.
실록연계
『숙종실록』 23년 1월 23일
『정조실록』 7년 1월 18일
『정조실록』 8년 4월 30일
『영조실록』 1년 9월 27일
산림천택(山林川澤)
정의
조선시대에 농경지 이외의 산·숲·내·못을 지칭하는 말.
개설
산·숲·내·못을 의미하는 ‘산림천택은 백성과 함께 더불어 해야 한다는[山林川澤 與民共之]’ 이념에 입각해 공유를 원칙으로 하고 사적인 점유를 금지하였다. 하지만 17세기 이후 궁방·아문·토호 등이 절수(折受)·입안(立案) 등의 방식으로 산림천택을 광범위하게 점유하여 심각한 사회문제와 국가 재정의 감축을 초래했다. 17세기 후반부터 18세기 초에 가시화된 정부의 대책은 오래되거나 규정 외의 절수지를 혁파하고 수세 규정을 정비하는 한편 면세 결수를 제한하는 방식을 주요 골자로 하였다. 1750년(영조 26) 균역법 실시로 궁방의 어염선(魚鹽船) 절수가 상당수 균역청(均役廳)으로 이속되었다. 정조가 즉위한 1776년에도 무토(無土)에 대한 대대적인 출세(出稅) 조치가 단행되고 도장(導掌) 파견을 금지하는 조치가 시행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많은 산림천택은 궁방·아문의 사적인 지배 영역으로 남아 있었다.
내용 및 특징 및 변천
산림천택은 산·숲·내·못을 뜻하는 것이지만 조선시대 용례는 농경지와 대응하여 농경지 외의 대지를 포괄하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여기에는 어전(漁箭)·염분(鹽盆)과 같이 단순히 대지가 아니라 대지와 결부된 생산시설까지 포함되었다. 이는 어전·염분과 같은 생산시설이 천택(川澤)·해택(海澤)이라는 대지의 부속물로 취급되고 있음을 의미하였다. 산림천택은 또한 ‘백성과 함께 더불어 해야 하는[山林川澤 與民共之]’ 이념적 지향을 바탕으로 하나로 묶이는 독특한 범주이기도 하였다. 이는 산림천택의 공유를 전제로 한 조선왕조의 제도와 이를 분할하여 사점(私占)하려는 세력 간의 긴장 관계를 반영하는 것이었다.
조선왕조는 국초에 산림천택의 사유화를 금지하였다. 이는 산림천택이 고려말에 권세가들에 의해 광범위하게 사점되어 왔던 현실을 타개하기 위한 것이었다. 권세가들이 전시과(田柴科) 체제의 동요를 배경으로 사적 지주제의 발달 과정에서 농경지는 물론 산림천택까지도 사적 지배 영역으로 편입하고 있는 상황을 문제로 제기한 것이었다. 조선왕조 정부는 산림천택에 대해 과전법(科田法)과 같은 체계적인 제도를 수립하지는 못하였지만 산림천택의 사점(私占)을 금지함과 동시에 국가가 필요로 하는 특수 산림을 설정하고, 산림천택제도에 대응하는 역 체계, 진상·공물제도, 잡역제도 등을 마련하였다. 정부는 산림천택의 공유라는 원칙을 바탕으로 민을 부역 징발하여 생산 활동에 종사시키거나 진상이나 공물의 형태로 생산물을 수취하였다.
산림천택의 사적인 점유가 전개되기 시작하는 16세기를 거쳐 17세기에 접어들면서는 궁방·아문·토호 등이 절수·입안 등의 형식으로 산림천택을 광범위하게 점유하는 행태가 빈번해졌으며, 이로써 국초의 원칙이 무색해졌다. 이렇게 점유된 산림천택에는 면세(免稅)와 면역(免役)의 특권이 부여되어 적지 않은 사회적 물의를 일으켰으며, 국가 재정의 감축을 가져왔다[『현종실록』 4년 4월 16일]. 산림천택에 대한 사적 점유가 심해지자 왕조 정부는 이에 대한 규제책을 실시하지 않을 수 없었다[『현종실록』 4년 11월 2일].
17세기 초부터 취해진 산림천택의 사적 점유를 금단하고 이전에 불법 점유한 것을 조사하여 혁파하는 조치가 이루어졌으나 가시적인 대책이 취해진 것은 17세기 후반에 접어들어서였다. 1672년(현종 13) 임자사목(壬子事目)에서는 궁방·아문·호세가(豪勢家)의 오래된 절수지를 혁파하도록 하고 염분(鹽盆)·어전(魚箭)·선척(船隻)·시장(柴場)·원당(願堂) 등에 대한 절수도 혁파하도록 결정하였다. 이 같은 원칙은 1688년(숙종 14) 다시 한 번 확인되었으며 1695년(숙종 21) 을해정식(乙亥定式)으로 확립되었다. 궁방의 200결 이상의 절수는 혁파하고, 대신 장토를 매입하도록 하였다. 실제로 1708년(숙종 34) 산림천택 중 문제가 되는 절수처를 일제히 조사하여 혁파하도록 하였다.
18세기에 접어들어서는 1717년(숙종 43) 어염선세의 수세 규정을 정비하였고 1720년(숙종 46) 경자양전(庚子量田)을 토대로 소유자가 있는 곳은 민결(民結)로 처리하고 수조안(收租案)의 면세결 외에 과다하게 파악된 토지는 세금을 내도록 조처하였다. 염분과 어전세는 직접 호조가 거두어 각사로 보내는 형태로 점차 변화하였다. 1729년(영조 5)에는 궁방과 아문의 면세결 액수를 확정하였다.
산림천택의 절수에 대한 가장 중요한 조치는 1750년(영조 26) 균역법(均役法)의 시행이었다. 균역법으로 아문과 궁방의 어전·어장·염분·선척 절수를 혁파하고 이를 균역청이 관장하여 어염선세로 수취하도록 규정하였다. 이후 정조는 즉위하자마자 궁방이 규정 외로 보유하고 있는 절수지에 대해 출세 조치를 취하고, 궁방의 무토(無土)를 반 가까이 혁파하였으며, 도장 파견을 금하였다. 도장 대신 각 읍 수령이 거두어들여 호조에 직접 납입하면 호조가 이를 궁방에 나누어 주는 형태로 바꾸었다. 이는 궁방이 무토에 대한 직접적 지배력을 크게 상실하고 산림천택의 상당 부분이 공적인 재정운영의 틀 속에 편입되었음을 의미하였다. 이러한 조치는 산림천택을 국가의 공적인 수취 체제의 틀 속에 편입시키기 위함이었으나 궁방·아문의 사적인 지배 영역은 여전히 광범위하게 온존함으로써 19세기에 접어들어 그 모순을 드러내기에 이르렀다.
참고문헌
김의환, 「17·18세기 염세정책의 변동-균역법 급대재원과 관련하여」, 『조선시대사학보』 6, 1998.
박준성, 「17·18세기 궁방전의 확대와 소유형태의 변화」, 『한국사론』 11, 1984.
송양섭, 「정조의 왕실재정 개혁과 ‘궁부일체’론」, 『대동문화연구』 76, 2011.
송양섭, 「균역법의 실시와 균역청의 재정운영」, 『영조의 국가정책과 정치이념』, 한국학중앙연구원, 2012.
정연식, 「균역법의 시행과 그 의미」, 『한국사』 32 , 국사편찬위원회, 1997.
김선경, 「조선후기 산림천택의 사점에 관한 연구」, 경희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9.
이욱, 「조선후기 어염정책연구」, 고려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2.
실록연계
『현종실록』 4년 4월 16일
『현종실록』 4년 11월 2일
산산창(蒜山倉)
정의
1745년(영조 21) 경상도 김해 명지도에서 생산되는 소금을 국가 재정에 활용하기 위하여 세운 관창.
개설
조선 정부는 1731년 경상도 김해 명지도의 소금 생산과 판매를 주관하여 많은 재정 효과를 보았다. 그러나 그 운영 과정에서 많은 비판과 어려움이 있었다. 이러한 문제를 해소하고, 정부 재정을 보충하기 위하여 설치한 것이 산산창이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극심한 흉년으로 국가의 재정이 부족해지자 이를 해결하기 위하여 1731년(영조 7) 12월 명지도에 공염제가 시행되었다. 정부는 소금 생산자에게 땔감과 식량 일부를 지급하고, 소금 생산 기간 동안 잡역을 면제해 주었다. 대신 생산된 소금의 절반을 수취하였다. 정부는 이러한 공염제의 운영으로 상당한 재정 효과를 보았다. 그러나 이와 같은 공염제는 오래 지속되지는 못하였다. 국가에서 소금의 생산과 판매를 주관하는 것은 ‘국가가 상인과 이익을 다투는 행위’라는 비판이 제기되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소금 생산을 관리하는 일 자체에도 여러 가지 어려움이 발생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명지도의 소금 생산을 국가 재정으로 활용하는 방안이 모색되었고, 그 결과가 1745년 산산창의 설치였다.
조선 정부는 산산창을 설치하면서 두 가지 명분을 내세웠다. 하나는 함경도 지역에 곡물을 공급하는 포항창의 곡식을 보충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호서와 호남 지방의 흉년에 대비하는 것이었다. 아울러 각종 권력 기간의 침탈에 노출된 소금 생산자를 보호하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
조직 및 역할
1745년 설치된 산산창은 비변사에서 관리하고, 실질적인 운영은 비변사에서 파견한 별장이 담당하였다. 경상감사는 소금을 유통하는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부정행위를 단속하는 역할을 맡았다. 그리고 산산창에서 쌀을 대여해 주고 소금을 거둘 때 부정을 막기 위하여 명지도와 녹도 거주민 2명을 양도도호수(兩島都戶首)로 삼아 관리하게 하였다.
산산창 설치 이후 명지도에서 소금을 확보하는 방식은 이전과 크게 바뀌었다. 이전에는 정부에서 명지도의 소금 생산과 판매를 모두 주관하였다. 그러나 산산창을 설치한 이후 정부는 명지도의 소금 생산에 관여하지 않았다. 정부는 환곡을 운영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소금 생산자에게 쌀을 빌려주고 그 대가로 소금을 거두었다. 그리고 그 소금을 낙동강 상류 지역에 판매하여 거기서 얻은 수익을 재정에 활용하였다. 즉, 정부에서는 매년 11월 산산창의 쌀 1,500석을 명지도의 소금 생산자에게 대여해 주어 소금을 생산하는 자금으로 사용하게 한 다음, 이듬해 2월에 쌀 1석당 소금 2석으로 계산하여 소금 3,000석을 거두었다. 그리고 그해 안에 소금 3,000석을 판매하여 쌀 3,000석을 확보하는 방식이었다.
변천
산산창이 설치된 지 15년 후인 1760년(영조 36)에 정부는 산산창을 운영하는 방법을 개정하였다. 그 내용은 별장 및 감영에서 파견하는 색고(色庫)를 혁파하고 산산창 운영을 김해부에 일임하는 것이었다. 이때까지도 최종 관리는 비변사에서 담당하였다. 그러나 1763년에는 그 관리마저 경상감영으로 이관하였다. 이후 산산창 운영에서 얻는 이윤은 감영의 재원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산산창에서 거둬들인 소금[公鹽]이 경상도 내륙지방에서 모두 판매될 때까지는 다른 상인이나 소금 생산자들의 소금[私鹽] 판매를 금지하였다. 이 때문에 경상도 내륙지방의 소금 공급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뿐만 아니라, 서리들이 소금 구매자들에게 비싼 값에 억지로 판매하는 폐단이 발생하였다. 그 때문에 대다수 관료들은 산산창 운영이 정부가 상인들과 이익을 다투는 행위라고 비판하고, 그 폐지를 주장하였다. 결국 산산창 운영을 통해 얻었던 재원을 보충할 다른 방법이 생기자, 1819년(순조 19) 산산창은 폐지되었다.
참고문헌
강만길, 「조선시대 공염제도고-명지도 염장을 중심으로」, 『사학지』 4 , 단국대학교사학회, 1970.
이욱, 「18세기 명지도 공염제 운영의 변화와 그 성격」, 『한국사연구』 120, 한국사연구회, 2003.
실록연계
상평염(常平鹽)
정의
중국 당나라 때 유안이 시행했던 소금 전매제 방식 중 하나.
개설
중국 당나라 때에 정부가 소금을 생산하는 지역에 관리를 두고 생산된 소금을 거둬서, 다시 이를 소금이 귀한 내륙지방까지 운반하여 저장해 두었다가 소금 상인이 끊어져서 소금 값이 오르면 시가보다 싼값에 상인들에게 소금을 판매하였다. 이렇게 소금을 관리·운영하는 방식이 상평(常平)의 원리와 같았기 때문에 상평염이라고 불렸다.
내용 및 특징
당나라 때 유안(劉晏)은 처음에 통상법이는 방식으로 소금 전매제를 시행하였다. 통상법이란 소금이 생산되는 지역에 관리를 파견하여 소금 생산자인 염호(鹽戶)가 생산한 소금을 거두어 그곳에서 소금상인에게 판매하고, 소금을 사들인 상인은 어디에서나 자유롭게 소금을 판매할 수 있는 제도를 말하였다. 즉, 상인이 소금의 운반과 판매를 담당하는 방식이었다. 그런데 소금 산지에서 멀리 떨어진 지역은 운송비가 많이 들기 때문에 이윤이 많지 않아 상인들이 소금을 운반하여 판매하려고 하지 않았다. 유안은 이를 보완하기 위하여 관에서 자금을 대어 소금 산지에서 멀리 떨어진 내륙지방까지 소금을 운반하여 저장해 두었다가, 소금이 귀해서 가격이 오르면 시가보다 싼 가격에 소금을 판매하는 방식을 취하였다. 이것이 상평염이라고 불리던 제도이고, 국가 재정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조선에서의 상평염 이해
조선은 본래 소금 전매제 시행에 매우 부정적인 입장을 취하였기 때문에 정부는 소금의 생산과 유통을 독점하지 않았다. 하지만 국가 재정 측면에서는 소금의 생산과 유통에서 얻게 되는 이윤을 확보하는 것도 중요하였다. 따라서 그 대안으로 받아들였던 것이 유안이 시행했던 상평염제였다. 조선건국 초기만 해도 상평염조차 소금 전매제로 이해하고, ‘국가가 백성과 이익을 다투는’ 제도라고 파악하여 부정적으로 인식하였다.
그러나 전쟁과 흉년 등으로 재정 수요가 급격하게 늘어나면서 소금에서 얻게 되는 이윤을 활용할 필요가 있다는 의견이 제기되기 시작하였다. 이때 소금 전매제라는 혐의를 피하고, 소금 공급을 원활하게 하고 내륙지방의 소금 값을 낮게 유지하여 국가와 백성 모두에게 이로운 정책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상평염제를 시행하였다. 그것이 선조와 광해군대 시행한 염철사(鹽鐵使)·염철조도사(鹽鐵調度使) 운영제였다. 그러나 이 제도를 시행하는 과정에서 많은 문제점이 노출되었고, 결국 소금 전매제와 다르지 않다는 비판이 설득력을 얻었다. 그래서 정부에서 상평염제를 활용하려는 시도는 마침내 좌절되고 말았다.
하지만 이후 조선에서는 상평염제도를 소금 전매제와는 무관하게 이해하였다. 염분세로 얻은 소금을 상평의 방식으로 운영하는 것으로 이해하게 되었다.
참고문헌
『경세유표(經世遺表)』
박평식, 『조선전기 상업사연구』, 지식산업사, 1999.
佐伯富, 『中國鹽政史の硏究』, 法律文化社, 1987.
이수건, 「서애 류성룡의 사회경제관」, 『대구사학』 12·13, 대구사학회, 1977.
이욱, 「16·17세기 ‘소금專賣制’ 시행론과 性格」, 『조선시대사학보』 21, 조선시대사학회, 2002.
김호종, 「조선후기 염업사연구」, 경북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88.
서북경략사(西北經略使)
정의
1882년 평안도와 함경도 지역의 안정과 조선과 청국 간 국경 문제를 조정하기 위해 임시로 정한 직함.
개설
1882년(고종 19) 10월 12일 의정부에서 청국과 조선 양국 간 변경 시장의 운영에 관한 논의를 위해 설치한 직함으로, 부호군(副護軍) 어윤중(魚允中)이 임명되어 약 2년간 임무를 수행하였다[『고종실록』 19년 10월 12일].
담당 직무
서북경략사는 관서(關西)와 관북(關北)의 정치, 군사 분야에 집중적인 개혁을 단행하였다. 대략 2년에 걸쳐 개혁정책이 시행되었다. 1883년 4월 어윤중은 평안도 압록강 변의 방비에 대해 보고하였다. 그는 관서의 강변에 설치한 각 진보(鎭堡)가 대부분 영락하여 군사들도 몇 명 안 되므로 지방 관리와 부근의 각 진(鎭)에서 단속하고 망을 보아야 한다고 했다. 또한 군사적인 요충지의 형편을 살펴 기존 진보들을 개편하자고 했다[『고종실록』 20년 4월 4일]. 이에 따라 경흥(慶興)의 아오지(阿吾地)는 조산(造山)에 합치고, 경원(慶源)의 건원(乾原)은 아산(阿山)에 합치고, 온성(穩城)의 미전(美錢)은 황척파(黃拓坡)에 합치고, 영달(永達)은 유원(柔遠)에 합치고, 종성(鍾城)의 방원(防垣)은 동관(潼關)에 합치고, 단천(端川)의 이동(梨洞)은 혁파하였다. 그리고 갑산(甲山)의 진동(鎭東)과 운총(雲寵)은 혜산진(惠山鎭)에 합치고, 삼수(三水)의 나난(羅暖)은 인차(仁遮)에 합치게 하였다[『고종실록』 20년 11월 23일]. 진보의 혁파와 더불어 지휘관의 거취도 조정하였다. 같은 해 4월 19일에 의정부에 올린 장계에서는 함경도 북병영의 병마절도사인 북병사(北兵使)가 임시 설치된 진영으로 옮겨 다니며 주둔하는 것이 변경 방어에 도움을 주지 못하면서 육진(六鎭) 등에 부담을 주고 있으므로 폐지하자고 했다. 북병사가 이동해 다니며 주둔하는 것이 군사 지휘에 크게 도움이 되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고종실록』 20년 4월 19일]. 또 8월에는 북병사의 거취를 변경하게 되었으므로 육진의 친기위(親騎衛) 도시(都試)도 본영(本營)의 도시에 의거하여 9월 보름 전에 마감했다[『고종실록』 20년 8월 27일].
이 외에 어윤중은 11월에는 자신이 직접 조사한 내용을 보고했다. 덕원부(德源府)가 원산(元山)과 15리(약 6㎞) 떨어져 있어서 원산의 항구 사무 처리와 분쟁에 대한 단속을 맡기에 곤란하다고 하면서 덕원부를 원산 근처로 옮기고, 해당 도의 감영(監營)에서 받던 원산수월세(元山手越稅)는 덕원부에 소속시키자고 했다. 또한 남병사군영(南兵使軍營)에서 새로 설치한 연군(鍊軍) 부대 250명의 운영에 필요한 비용 마련을 위해 훈련도감에서 취하던 모곡을 받게 하도록 했다[『고종실록』 20년 11월 23일]. 모곡(耗穀)은 환곡(還穀)을 돌려받을 때 비축 과정에서 축나는 부분을 보충하기 위해 1/10을 더 받던 곡식이다. 11월에는 의주에서 모은 무인(武人)들의 자제 150명을 백마산성(白馬山城)에 모아놓고 병학(兵學), 산수(算數), 활쏘기, 말타기, 보행법을 가르쳐주었으며, 관북에서 250명을 모아 남병영에서 훈련시키고 있다고 하였다. 어윤중은 새로 모집한 군사들을 호분위(虎賁衛)와 충무위(忠武衛)로, 장령(掌令)은 위장(衛將), 병사(兵士)는 위사(衛士)라고 호칭하며, 과거 여부를 떠나 다 승진할 수 있는 조건을 줄 것이라고 하였다[『고종실록』 20년 11월 24일].
어윤중은 관북 지역의 폐단 중에서 가장 큰 것이 환곡이라고 보았다. 환곡의 폐단은 백성들이 안착하지 못하고 흩어지는 원인이므로 군영과 고을에서 모곡으로 받아 쓰던 것은 모두 과세와 납부에 편리하게 토지[結]와 호(戶)에 배당하여 거두도록 하였다[『고종실록』 20년 4월 19일].
어윤중은 청국과의 외교적 사안도 담당하였다. 1883년 12월 3일 어윤중과 봉천전영익장(奉天全營翼長) 진본식(陳本植)은 청국 봉천(奉天)과 조선 변경 백성들 간의 무역 규정인 봉천여조선변민교역장정(奉天與朝鮮邊民交易章程)에 조인하였다. 주요 내용은 무역에 관한 것이지만, 제1조에 조선이 청국의 속국(屬國)이라는 것이 명시되었고 양국 간의 무역은 국제 무역 규정과는 관계없다고 하였다. 즉 청국을 중심으로 하는 중화질서체제에서 발효되는 국내법이라고 설명하였다. 또한 조선의 사신이 북경에 갈 때 청국 중앙정부에 보고하는 것이 아닌 봉황성 지방정부를 통해 일을 진행해야 하며, 외교문서상에 조선은 반드시 ‘천조(天朝)’ 혹은 ‘상국(上國)’이라는 글자로 존대해서 써야 한다고 하였다[『고종실록』 20년 12월 3일].
뒤이어 반년이 지나지 않은 1884년(고종 21) 5월 26일 청국 길림지방정부와 조선 대표인 어윤중 사이에 조선상민수시무역장정이 체결되었다. 조약에서는 청국과 조선의 종번관계를 밝히면서 도문강, 즉 두만강이 양국의 국경임을 무역조항에 삽입하였다. 어윤중이 청국과 무역장정에 조인하면서 당시 양국 간 민감하였던 국경 문제까지 포함시키는 것을 용인한 이유는 알 수 없다. 다만 이 장정으로 인해 회령 건너편 화룡골에 청국 세무국이 설치되었으며 양국 간 국경을 두만강으로 인정하는 결과를 가져와 훗날 감계회담과 간도 영토 문제가 거론되는 빌미가 되기도 하였다. 또한 15조에는 외교문서에 조선이 청국을 상대로 ‘천조’ 혹은 ‘상국’, ‘중동(中東)’, ‘중조(中朝)’라는 용어를 사용해야 한다고 하여 조선을 청국의 속국으로 인정하는 문제를 야기하였다[『고종실록』 21년 5월 26일].
이 외에 어윤중은 백두산 인근 간도의 영유권 주장을 위해 애쓰기도 하였다. 1883년(고종 20) 청나라가 함경도 경원부 등지에 공문을 보내 9월 안에 토문(土門) 이북과 이서 지방의 조선 사람들을 모두 쇄환(刷還)하라고 요구하였다. 해당 지역의 조선인들은 백두산정계비를 직접 답사한 후 종성부사 이정래(李正來)에게 자신들이 개간한 토지가 정계비에 명시된 토문강과 두만강 사이의 조선 영토라고 주장했다. 때마침 경원부에 있던 어윤중은 ‘종성 사람 김우식(金禹軾)에게 조사시킨 결과 조선 백성들의 주장이 맞는다’고 거듭 확인했다.
변천
1884년(고종 21) 5월에 통리군국사무아문(統理軍國事務衙門)에서 평안도와 함경도의 변경 시장 문제에 대하여 청국 대표 형부낭중(刑部郞中) 팽광예(彭光譽)와 어윤중이 길림조선상민수시무역장정(吉林朝鮮商民隨時貿易章程)을 체결하고 그 내용을 보고한 지도 오래되었으므로 그 직무를 없애자고 하여 서북경략사는 없어졌다[『고종실록』 21년 5월 9일].
참고문헌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일성록(日省錄)』
국사편찬위원회, 『고종시대사』, 1967.
이태진, 『고종시대의 재조명』, 태학사, 2000.
실록연계
『고종실록』 19년 10월 12일
『고종실록』 20년 4월 4일
『고종실록』 20년 11월 23일
『고종실록』 20년 4월 19일
『고종실록』 20년 8월 27일
『고종실록』 20년 11월 23일
『고종실록』 20년 11월 24일
『고종실록』 20년 4월 19일
『고종실록』 20년 12월 3일
『고종실록』 21년 5월 26일
『고종실록』 21년 5월 9일
선반미(宣飯米)
정의
조선시대 궁중에 상직(上直)하는 관료 및 궁중에서 상주하며 근무하는 궁녀들에게 공급해 주던 쌀.
개설
조선시대에는 궁중에 숙직하는 관료 및 궁중에서 상주하며 근무하는 궁녀들에게 식량용 쌀을 제공하였는데, 이때 필요한 쌀을 선반미라고 하였다. 이 중에서 궁중에 숙직하는 관료들에게 지급하는 선반미는 다양한 이유로 정지되는 경우가 많았음에 비해 궁중에서 상주하는 궁녀들에게 지급하는 선반미는 월급처럼 정기적으로 지급되었다. 궁녀의 선반미는 공상아문을 통해 공급되었으며, 그 결과 대동법 같은 공상 방법에 큰 영향을 받았다.
내용 및 특징
선반미는 선반(宣飯), 즉 식량 제공에 필요한 쌀이라는 의미였다. 궁중에서 숙직하는 관료에게 지급되는 선반미는 불규칙하였다. 나라에 흉년이 들거나 다른 이유로 선반미가 부족할 때는 선반미를 지급하지 않을 때가 많았다. 조선초기에는 숙직하는 관리를 당상관과 당하관으로 구분하여 당상관은 밥그릇에 높이 담고 당하관은 평평하게 담아 구분하였다[『연산군일기』 9년 5월 13일]. 그러다가 연산군대에 들어 당상관과 당하관의 차이를 없애고 모두 쌀 1되를 선반미로 하였다. 한편 궁중에 상직하는 관료들뿐만 아니라 산릉(山陵)에서 수직하는 관료들에게도 선반미를 지급하였다[『영조실록』 즉위년 11월 5일].
관료들에게 지급하는 선반미는 불규칙했던 데 비해, 궁녀들에게 지급하는 선반미는 월급처럼 정기적으로 지급되었다. 조선시대에 궁녀는 궁궐에 상주할 뿐만 아니라 궁중에서 정기적으로 근무하였기 때문이다. 궁녀에는 상궁·시녀·무수리·파지·수모·방자·유모 등 다양한 종류가 있었으며 이들에게는 선반미를 비롯하여 의전이 지급되었다. 의전은 1년에 두 차례 지급하는 옷값이었다. 『만기요람』에 의하면 궁녀는 중전·대비전 등 전궁(殿宮)별로 배속되어 선반미와 의전을 받았다. 예컨대 왕비에게 소속된 유모와 상궁 등에 지급된 선반미와 의전을 살펴보면 품질이 중급 정도 되는 쌀인 중미(中米)가 652석 12두 9승, 두부콩 328석 13두 6승, 감장(甘醬)이 84석 11두 3승, 간장이 6석 11두 8승, 등법유(燈法油)가 6석 11두 8승, 대구 102마리, 조기 54,363개, 정포 7동(同) 10필, 목화 115근 5냥 등 의식 생활에 필요한 물자가 포함되었으며, 그 양이 적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변천
조선전기에 궁녀의 선반과 의전 등은 현물 납부제도인 공납제(貢納制)를 통해 공급되었다. 이 같은 공납제는 대동법(大同法)이 시행되면서 크게 변하였다. 임진왜란 이후 대동법이 시행되면서 현물로 납부하던 공물(貢物)을 쌀로 환산하여 징수하고 중앙 각사에서 필요로 하는 물품은 공인(貢人)을 통해 납품하게 되었던 것이다. 조선시대 전 기간에 걸쳐 중앙의 각사 중에서 공상과 직간접으로 관련되는 관서는 사옹원·내자시·내섬시·사도시·사재감·내수사·사온서·의영고·장원서·사포서·사축서·내시부 등 12개였다. 위의 관서 중에서 사온서·사축서는 조선후기에 폐지되었다. 그러므로 조선후기에 궁중의 공상과 관련되었던 부서는 10개였다. 그중에서 내시부·내수사·사옹원·장원서를 제외한 6개의 관서가 궁중 공상과 직결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이 6개의 관서를 공상6사(供上六司)라고 통칭하였다.
대동법이 시행되기 이전에는 위의 공상아문에서 공물을 현물로 직접 받아 궁중에 납입하였지만 대동법 시행 이후에는 호조와 선혜청에서 정부 재정의 일부를 공상아문에 조달하였고, 이 재정을 가지고 공상아문에서는 공상에 필요한 물품을 공인들로부터 구입하여 조달하였다. 이에 따라 궁녀의 선반과 의전 같은 공상 역시 정부 재정을 담당한 관아인 호조 및 선혜청이 공물의 일부를 왕실재용으로 공상6사에 조달하고, 이 재정을 가지고 공상6사에서 선반과 의전을 조달하는 방식으로 바뀌게 되었다.
참고문헌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일성록(日省錄)』
『육전조례(六典條例)』
『공선정례(貢膳定例)』
『만기요람(萬機要覽)』
신명호, 『궁녀』, 시공사, 2004.
田川孝三, 『李朝貢納制の硏究』, 東洋文庫:東京, 1964.
德成外志子, 「朝鮮後期의 貢物貿納制」, 『역사학보』 113, 역사학회, 1987.
조영준, 「19세기 왕실재정의 운영실태와 변화양상」,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8.
『한국역사용어시소러스』, 국사편찬위원회, http://thesaurus.history.go.kr/.
실록연계
『연산군일기』 9년 5월 13일
『영조실록』 즉위년 11월 5일
선혜청정례(宣惠廳定例)
정의
영조대 중반에 지출례인 횡간을 보완하기 위하여 편찬된 정례서의 한 종류.
개설
영조는 재위 20년에 들어서 국가의 의(儀)·전(典)·예(例)를 정비하는 작업에 착수하였다. 1744년(영조 20)에는 『속오례의(續五禮儀)』를 편찬하였으며, 1746년(영조 22)에는 『속대전(續大典)』을 간행하였다. 그리고 1749년(영조 25)부터는 지출례(支出例)인 횡간(橫看)을 보완하는 거질의 『탁지정례(度支定例)』를 편찬하였다. 정례서(定例書)를 편찬하는 과정에서 영조는 그동안 왕실과 중앙 관서에서 경비 물자를 남용하거나 쓸데없이 지출하는 부분을 찾아내어 각(各) 전(殿)·궁(宮)별, 관서별로 지출 물품을 정비함으로써 지출 증대가 누적되는 상황을 예방하는 한편, 정례를 준거로 지출 구조를 일원적으로 통제하는 장치를 마련하였다.
『선혜청정례』는 『탁지정례』 로 편찬된 『각전각궁례(各殿各宮例)』·『국혼정례(國婚定例)』·『상방정례(尙方定例)』·『각사정례(各司定例)』 중 왕실의 공상례(供上例)에 해당하는 『각전각궁례』와 짝을 이루는 정례서였다. 왕을 비롯한 궐내 왕실 가족을 부양하기 위하여 정기적으로 바치는 생활 물자를 『각전각궁례』와 『선혜청정례』에 각각 나누어 기재해 놓았다. 영조는 1749년에 『각전각궁례』를 편찬한 후에 1750년(영조 26)부터 『선혜청정례』를 수정하도록 지시하여 1752년(영조 28)에 최종 수정하여 간행하였다[『영조실록』 26년 1월 6일].
내용 및 특징
『선혜청정례』는 『각전각궁례』와 마찬가지로 왕을 필두로 왕대비[慈殿]와 왕비[中宮殿] 이하 봉보부인(奉保夫人)에 이르기까지 총 19처의 왕실 구성원에게 바치는 공상(供上) 물자를 정리해 놓았다. 『선혜청정례』의 편재 방식은 『각전각궁례』와 거의 동일한 형식을 띠었다. 다만 『선혜청정례』에는 『각전각궁례』에 없는 공상 물자의 단가(單價)와 각 전·궁별 공상가(供上價) 총액을 기재해 놓았다. 선혜청은 대동세를 거두어서 공인들에게 공물가로 지급하는 재무 관서였기 때문에 『선혜청정례』에는 『탁지정례』와 달리 값을 기재해 놓은 것이 특징이었다. 왕실 공상에 관련된 제반 물품은 선혜청에서 재원을 조달하여 마련하였다.
그런데 영조가 『각전각궁례』를 간행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에서 『선혜청정례』를 편찬한 데에는 다른 이유가 있었다. 이는 같은 시기에 추진된 균역법(均役法)과 관련이 깊다. 균역법은 양인 장정[良丁]에게 부과된 군포를 2필에서 1필로 감해 주는[減匹] 대신 결전(結錢)과 어염선세(魚鹽船稅)·선무군관포(選武軍官布) 등을 거두어들여 군문과 여타의 관서에 급대(給代)해 주던 조치를 말하였다.
영조는 『선혜청정례』의 서문에서 “오늘날 백성을 위하여 감포(減布)한 후 포 1척과 곡식 1되를 아껴 쓴 후에야 국가가 명맥을 이을 수 있고, 신뢰가 이어질 수 있다. 아! 균역청을 설립한 후에 한결같이 모두 말하기를 구차하다고 하나 나는 그렇게 여기지 않는다. 왜인가 하면 이것은 도신, 수신의 사물(私物)이 아니라 곧 공물(公物)이어서이다.”라고 하여 『선혜청정례』의 간행이 균역법 시행과 관련을 맺고 있음을 시사하였다.
영조는 군포를 2필에서 1필로 줄인 조치 이후 군문을 비롯한 중앙 관서의 반발과 재정 부족이 가시화되는 상황에서 재정 절용을 몸소 실천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왕실의 공상을 두 차례 이정하는 작업을 지시한 것이다. 그런데 『선혜청정례』에 수록된 물품은 『각전각궁례』와 달리, 왕실에 예를 표하는 진상(進上) 물자가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영조는 『선혜청정례』의 간행을 통해 왕실의 위엄을 받드는 물품을 스스로 줄임으로써 ‘익하지정(益下之政)’, 즉 아랫사람을 이익 되게 하는 정치를 표방하고 감필의 명분을 얻는 정치적 효과를 거두었다.
변천
『선혜청정례』는 『탁지정례』와 함께 19세기까지 중앙 경비의 지출례로 계속 활용되었다. 특히 『선혜청정례』는 대동법 시행 이후 각 도에서 현물로 봉진(封進)하던 진상 물자를 시중에서 조달해 쓰게 되는 경향을 파악하기에 좋은 자료였다.
영조대 『탁지정례』와 『선혜청정례』의 편찬은 정조대에 각 도의 현물진상을 이정한 『공선정례(貢膳定例)』로 이어졌으며, 이로써 왕실과 정부 관서에서 소비하는 각종 경비가 18세기 말까지 계속 정비되어 갔다.
참고문헌
『탁지정례(度支定例)』
『선혜청정례(宣惠廳定例)』
최주희, 「18세기 중반 定例類에 나타난 王室供上의 범위와 성격」, 『장서각』 27, 2012.
최주희, 「영조대 중반 균역법 시행논의와 『宣惠廳定例』의 간행」, 『한국사연구』 164, 2014.
실록연계
『영조실록』 26년 1월 6일
설점수세(設店收稅)
정의
정부가 광산에 제련장과 부대시설을 제공하고 경영에는 민간자본을 참여시켜 광물의 일부를 세금으로 거둔 제도.
개설
설점수세제는 1651년(효종 2) 호조에 의해 채택되었다. 하지만 은광개발이 투기적 성격이 강한 데다가 부상대고(富商大賈)를 유치할 만큼 은광개발의 분위기가 조성되지는 못한 상태였다. 1687년(숙종 13) 실시된 설점수세제는 호조가 군영문 소관 은점(銀店)을 흡수하여 수세권을 독점한 후 부상대고를 별장(別將)으로 파견하여 관리·수세하도록 한 조치였다. 호조는 생산시설과 각종 자재를 공급하였다. 1775년(영조 51) 이후에는 수령수세제가 적용되었다. 수령수세제 하의 설점수세는 상업자본에 의한 광산개발을 한층 촉진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내용 및 특징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조선왕조 정부는 국방비와 중국과의 외교 비용을 충당하기 위하여 은광개발에 주력하였다. 하지만 농민들이 부역을 기피하고 민간자본이 영세하여 광산개발은 부진을 면치 못하였다. 이러한 문제점을 타개하고자 1651년(효종 2) 호조에 의해 설점수세제(設店收稅制)가 채택되었다. 이는 민간자본을 광산개발에 참여시키고 정부는 광산에 제련장과 부대시설은 물론 채굴에 필요한 재목·연료를 제공하여 광물 중 일부를 수세(收稅)하고자 한 조치였다. 하지만 당시 은광개발은 투기적 성격이 강한 데다가 당시 부상대고(富商大賈)를 유치할 만큼 은광개발이 활성화되지는 못하였다.
1687년(숙종 13) 실시된 설점수세제는 호조가 군영문 소관 은점(銀店)을 흡수하여 수세권을 독점한 후 부상대고를 별장으로 파견하여 관리·수세하도록 한 조치였다[『영조실록』 7년 10월 10일]. 별장은 호조로부터 허가를 받아 현지 조사를 실시한 후 노동력을 모집하여 채굴에 착수하였다. 설점이 끝나면 점소(店所)에 머물지 않고 서울에 거주하다가 세금을 거둘 때에만 현지에 내려왔다. 호조는 생산시설과 각종 자재를 공급하였고 두목(頭目)은 은점의 실질적 관리경영자로서 채굴과 제련 작업을 지휘 감독하여 생산한 은을 관장하고 분배하는 일을 전담하였다. 별장은 호조에 납부하는 세은(稅銀)과 자기 몫의 은을 받아 갔다. 채굴에 따른 세금은 은군(銀軍) 1명당 은 5전씩 산정되었으며 별장은 설점과 수세업무를 담당한 대가로 총 생산량의 2/3가량을 차지하였고 1/3가량이 두목과 은장(銀匠)·은군의 몫으로 배분되었다. 은군은 주로 농촌에서 유리된 빈민들이었다.
18세기 후반에 접어들자 별장의 관리·감독 하에서 운영되던 설점수세제는 점차 쇠퇴하고 마침내 혁파되었다. 지방의 토호와 상인 등이 수령과 결탁하여 잠채(潛採)·사채(私採)를 자행하면서 별장제의 폐지를 획책하였다. 또 호조가 설점수세권을 독점한 후 재정원을 잃은 각 군문과 감영이 자의적인 잡세 부과를 일삼은 것도 한 원인이었다[『순조실록』 28년 9월 5일].
1775년(영조 51) 이후 적용되기 시작한 수령수세제는 상업자본에 의한 광산개발을 한층 촉진시켰다. 별장제 하의 설점수세제가 호조의 자체 자금으로 점소(店所)를 설치하고 별장이 수세하는 방식이었던 반면, 수령수세제 하의 설점수세는 물주(物主)가 호조의 허가를 받아 점소를 설치하여 운영하고 당해 지역의 수령이 호조가 정한 세금을 수납하는 방식이었다. 물주로서 부상대고들은 채광시설과 자금을 투자하고 혈주(穴主)나 덕대(德大)들이 직접 광산을 경영하였다. 혈주나 덕대는 광산개발이나 현지의 사정에 밝은 사람들로서, 물주의 자본을 유치하여 점소를 설치하고 임노동자를 광군(鑛軍)으로 고용하였다. 덕대와 혈주는 물주의 몫과 임금을 제외한 나머지를 차지하였다. 이같이 수령수세제 하의 설점수세는 물주가 자본을 투자하고 혈주·덕대 등이 광군을 고용하여 광물을 채취함으로써 그 이윤을 분배하는 형태로 운영되었다.
참고문헌
유승주, 『朝鮮時代鑛業史硏究』, 高麗大出版部, 1993.
세관(稅關)
정의
1878년(고종 15) 이래 수출입 화물의 검사, 관세 부과 및 검역 사무를 맡던 정부기구.
개설
조선 정부는 초기에 근대적 관세에 대한 지식이 없어 개항 이후 몇 년간 무관세(無關稅)를 유지하다가 1878년 처음으로 부산 두모진(豆毛鎭)에 세관을 설치하여 관세를 징수하였다. 이후 1882년(고종 19) 미국과 조미수호통상조약을 시작으로 조선세관은 관세주권을 인정받게 되었으나 점차 일본 등 제국열강의 방해로 자주권이 크게 훼손되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조선은 1876년(고종 13) 2월 개항 이후 수년간 무관세(無關稅)로 유지되었다. 이는 조선 측 통상당국의 근대 세관제도에 대한 무지와 일본의 간계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러던 중 문제점을 인식한 조선 정부는 우선적으로 조선인들에게 만이라도 수입세를 징수하기로 결정하고 관세 규칙과 세율을 제정했다. 이에 따라 처음으로 부산 두모진에 세관을 설치하여 1878년 8월 10일부터 내국상인들에게 일정 비율의 관세 징수를 시작하였다.
그러나 일본 대리공사 하나부사 요시타다〔花房義質〕는 군함과 함께 부산항에 입항하여 수세를 중지하지 않으면 무력으로 저지하겠다고 현지 관리들을 위협하였다. 동래부사 윤치화(尹致和)가 이를 거절하자 일본은 육전대를 상륙시키고 두모진 일대에서 함포를 쏘는 등 무력시위를 단행하였다. 이에 굴복한 조선 정부는 징세중지를 명하였고 12월 4일자로 두모진세관 폐쇄를 일본 측에 통보하였다.
일본 정부는 이 사건을 빌미로 피해 보상 등을 포함한 8개 조항의 요구안을 제시하였다. 이에 조선 정부는 일본의 요구안 중 일본인이 대구 약령시에 참여할 수 있게 한다는 제7항을 뺀 나머지 7개 항을 수락함으로써 두모진세관 수세사건은 일단락되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조선 정부는 관세주권 회복을 위해 일본 측에 새로운 통상장정의 체결을 요구하였지만 당분간 세관제도는 정착되지 못한 상태로 수년을 거듭하였다.
조직 및 역할
1883년(고종 23) 7월 25일 한일통상장정과 해관 세칙이 체결되었는데, 수입물품은 품목에 따라 생필품은 5%, 사치품은 25~30%, 일반상품은 8~10%의 수입세 부과, 수출품은 일괄적으로 5% 이내의 수출세를 부과하되 홍삼만 15%로 규정하고, 면세대상품목도 정하였다. 이 조약으로 7년 간의 대일 무관세 시대는 공식적으로 끝났다. 이에 따라 조선 정부는 독일인 묄렌도르프(Paul George von Möllendorff)를 고용하여 조선해관을 설치하고 부산·인천·원산 등의 개항장에 해관(海關)을 설치하였다.
변천
조선 정부는 1881년(고종 18) 8월 수신사 조병호(趙秉鎬)를 일본에 파견하여 새로운 35개 조항의 통상장정 체결을 요구하였다. 이중 관세 관련으로 수출세의 자주적 세율 지정, 수입세는 물품에 따라 최소 5~35%의 과세 부과 규정을 제시하였다. 그러나 일본은 이에 냉담하였고 결국 조병호 일행은 성과 없이 귀국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중 조선 정부는 1882년 5월 미국과 조미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하였다. 이는 조선의 관세주권이 처음으로 인정받게 된 계기였다. 수입물품은 10~30%의 수입세를, 수출품은 5%의 수출세를 부과하도록 규정하였다. 조선 정부는 이후 영국·독일과 이와 유사한 통상조약을 체결하게 된다.
그러나 일본과는 임오군란으로 당분간 협상을 진행할 수 없었기 때문에 통상과 해관세 관련 논의는 이후 1883년 7월 한일통상장정으로 마무리되었다. 그러나 이 조약은 10월 8일 일본공사 다케조에 신이치로〔竹添進一郞〕와 묄렌도르프가 비밀리에 인천, 부산, 원산 3항의 해관세 징수사업을 일본 제일은행 부산지점에게 위탁계약 형식으로 넘겨줌으로써 왜곡되었다. 이후 1889년(고종 26) 10월 영국인 존슨(J. C. Johnson)이 인천세무사로 취임한 후 세관업무는 정상화되어갔고 관세제도도 정비될 수 있었다.
조선해관은 외아문(外衙門) 관할 아래 두고 총세무사(總稅務司)가 관리하도록 하였다. 그 후 1895년(고종 32)에는 각 세관을 탁지부(度支部) 관할로 이속시켜 총세무사에 영국인 재정고문 브라운(M. Brown)을 임명하였다. 이후 통감부가 개설되고 1908년 1월 1일 칙령으로 「관세국관제」가 실시되어 탁지부 대신 관리 하에 독립관청으로 관세국이 신설되고 총책임자로 관세총장을 두면서 관세에 관한 업무는 이곳에서 총괄하였다.
참고문헌
『承政院日記』
『한국관세사』, 한국관세협회, 1969.
『한국관세사』, 한국관세연구소, 1985.
박상태, 『관세정책의 변천과 평가』, 한국조세연구원, 1997.
장병순, 『한국세정사』, 보성사, 1973
속영장인(屬營匠人)
정의
지방의 영문에 속하여 각종 군기와 수공품을 제작·수리하던 장인.
개설
조선시대 장인(匠人)은 중앙과 지방관아의 수공품을 제작 담당하던 역인(役人)의 일종이다. 『경국대전』에는 “경공장(京工匠)과 외공장(外工匠)은 장적(帳籍)을 만들어 공조(工曹)·본사(本司)·본도(本道)·본읍(本邑)에서 보존한다.”고 하였는데, 속영장인(屬營匠人)은 지방 감영과 병영 등에 속한 외공장의 하나로 여겨졌다.
1436년(세종 18)에 함길도도절제사 김종서(金宗瑞)가 변방의 방어를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하여 영문(營門)의 위치를 부거성에서 용성으로 옮기자는 보고를 하였는데, “군영에 소속된 장인들은 모두 단천(端川) 이북의 백성들로서 왕래하기에는 거리가 너무 멀어 이들로 하여금 군기를 정련(精鍊)하게 할 수 없다.”고 언급하였다[『세종실록』 18년 4월 27일]. 병영에 속한 장인들은 영문 내에 비치된 무기와 갑옷을 수리하는 등의 일을 맡았는데, 거리가 너무 멀어 맡은 일을 제대로 할 수 없다는 지적이었다. 속영장인에 관한 기사가 많지 않아 영문에서 이들을 어떻게 파악하고 관리하였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조선후기 들어 지방의 영문에 속한 장인들은 손쉬운 역인 헐역(歇役)을 지는 자들로 인식되어 영장인(營匠人)에 투속(投屬)하는 사례가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현종대에는 각 도에 공문을 보내 각영(各營)에서 한가로이 노는 장인의 문안(文案)을 만들어 조사해 보고하고, 도망갔거나 죽어서 생긴 결원을 채우게 하라는 명령이 내려지기도 하였다[『현종실록』 15년 8월 10일].
담당 직무
조선전기에는 중앙관서와 지방관아에서 각종 수공품을 제작·수리하는 장인의 정원을 장부에 정해 놓고 각 읍에서 차출하여 역을 지게 하였다. 그리고 결원이 생기면 양인·사천(私賤)을 막론하고 적임자를 찾아 충당하도록 하였다. 사옹원 소속 사기장(沙器匠)과 같이 전문적인 기술력을 필요로 하는 장인의 경우, 자손 대대로 같은 역을 지도록 법전에 명시해 놓았지만, 대다수의 장인은 나이가 60이 되면 대부분 역을 면하는 신역(身役)과 다를 바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역 자체가 군역보다 헐한 역종(役種)인 경우, 세력 있는 자들이 투속하는 경우가 많았다. 영장인의 경우도 감영의 각종 수공품을 제작·수리하는 업무를 맡았지만 다른 역에 비해 역 부담이 덜하여 투속의 대상이 되었다. 이에 숙종대에는 각 도 감영에 모속(冒屬), 즉 불법으로 소속된 장인들을 모두 면직시키고 어린아이[兒弱]로 군역에 충정(充定)된 자들로 대신하게 하는 조치가 취해지기도 하였다[『숙종실록』 즉위년 9월 24일] [『숙종실록』 7년 11월 11일].
변천
숙종대에 양역 변통 논의가 이어지면서 각 영에 속한 장인들을 혁파하여 군역에 충당시키려는 노력이 계속 이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방 영문의 규모가 커지고 행정이 확대되면서 영장인은 조선후기까지 역종이 계속 유지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참고문헌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대전회통(大典會通)』
실록연계
『세종실록』 18년 4월 27일
『현종실록』 15년 8월 10일
『숙종실록』 즉위년 9월 24일
『숙종실록』 7년 11월 11일
송정(松政)
정의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산림정책 중 하나로 소나무 관리와 관련된 정책을 일컬음.
개설
소나무는 배나 시체를 넣는 관곽(棺槨)을 만들 때뿐 아니라 궁궐을 지을 때도 사용되었기 때문에, 국가에서 중시하였다. 이 때문에 송정은 조선시대 전 기간 동안 국가에서 일관되게 추진하였다. 그 내용은 소나무가 자라는 데 좋은 환경을 가진 특정 산림을 지정하여 보호하고 개인의 이용을 제한하는 것이었다.
내용
조선 정부에서 송정의 대상으로 삼은 최초의 산림은 서울 도성 주변의 한양 금산(漢陽禁山)과 외방의 금산(禁山)이었다. 한양 금산은 풍수지리의 영향 하에 도성의 숭엄함과 기맥 보호 등을 위하여 설정되었으며, 외방 금산에 비해 강력한 산림보호정책이 이루어졌다. 그렇기 때문에 조선전기의 금산제도가 후기에는 봉산제도(封山制度)로 바뀌었음에도, 한양 금산은 도성 금산·도성 사산(都城四山)이라는 명칭으로 그대로 유지되었다.
조선전기의 외방 금산은 조선용(造船用) 소나무를 공급하기 위한 의송지(宜松地)의 선정에서부터 비롯되었다. 의송지는 연해 지역의 섬이나 곶 중에서 소나무가 잘 자라는 지역을 선정하였다. 의송지로 정한 산림은 기존에 심어져 있는 소나무의 이용을 금하고 새로 소나무를 심은 다음, 해당 지역의 수령 등에게 잘 보호하게 하였다. 그런데 금산에서는 개인의 이용을 금지하는 범위를 구체적으로 설정하지 않았다. 즉, 금산의 범위는 연해 지역 30리라는 모호한 규정만 있었고, 관리 책임 소재도 분명하지 않았다.
변천
조선후기 들어 금산제도는 급격히 붕괴되기 시작하였다. 그것은 전란과 이로 인하여 야기된 사회경제적 변화 때문이었다. 16세기 말에서 17세기 초반까지 전란으로 인하여 산림이 감소되었고, 전란 이후 복구 과정에서도 목재가 남벌되었다. 게다가 산림에 대한 사적 점유의 확대, 산림 소유권의 성장 및 화전(火田)이 널리 성행하였다. 또 금산제 자체의 결함도 붕괴의 중요한 원인이었다. 구체적으로 어느 경계까지 벌채를 금지하는지가 분명하지 않았다. 이로 인하여 연료나 땔감을 구하려고 금산의 목재를 남벌하는 행위가 널리 일어났다.
1675년(숙종 원년)에 시작되어 1684년(숙종 10)까지 금산에 대한 정비가 이루어졌다. 전국적으로 의송산이나 황장산 등이 정해졌고, 그곳은 표식을 세워 봉산(封山)으로 지정되었다. 이렇게 정한 의송산은 장부에 기록하여 중앙에서 관리하였다. 봉산을 지정하여 보호하는 나무는 소나무에 국한되지 않았다. 참나무와 밤나무로까지 확대되었고, 같은 소나무 중에서도 관곽에 사용되는 황장목(금강송)은 특별히 황장봉산으로 지정하여 보호하였다. 다시 말해 조선 정부가 사용하고자 하는 용도와 나무 종류에 따라 산림을 구분하여 보호하였다.
조선시대 송정의 이념은 ‘산림에서 생산되는 목재를 국가와 백성이 공동으로 이용함으로써 왕도정치를 구현’하는 것이었다. 또 송정의 정책 목표는 ‘국가에서 필요로 하는 목재를 원활하게 공급’받는 것이었다. 그런데 조선후기 들어서면서 이념과 목적이 충돌하기 시작하였다. 조선전기는 국가와 백성이 산림에서 얻고자 했던 임산물에 대한 경합이 그리 크지 않았던 반면, 조선후기는 금산이나 능원 등에까지 궁방이나 권세가·일반 백성의 침범이 잦았다. 따라서 산림에 대한 국가의 배타적 이용과 수익의 필요성이 증대되었다. 그 결과 백성의 이용을 배제하는 ‘국용 목재의 지속적 공급’을 정책 목적으로 수립하였다. 그리고 이를 위하여 봉산이라고 하는 국가직속 용도림을 설정하여 소나무 등을 보호하고 육성하는 방식으로 바뀌었다.
국용 목재를 안정적으로 공급하기 위하여 제정된 봉산의 기능은 18세기 중반 이후 점차 축소되기 시작하였다. 결정적인 이유는 대동법의 실시와 함께 국가의 공납체계가 변하였기 때문이다. 국용 목재의 공급을 담당하였던 봉산 등의 산림에서는 굵은 목재를 충당하였을 뿐, 서까래와 같은 일반 규모의 자재는 시장에서 구입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경향은 19세기 들어 더욱 가속화되었고, 봉산 등에서 국용 목재를 공급하는 기능은 점차 축소되었다.
이와 더불어 조선후기 송정에도 정책이 전환되었다. 산림 이용을 규제하는 형태의 산림관리에서, 필요한 산림을 보호하고 육성하는 산림관리로 바뀐 것이다. 봉산제도를 시행하고 그것이 효과가 있으려면, 국가에서 필요로 하는 소나무를 봉산에서 육성해야 했다. 이를 위해서는 금표 안에서의 화전 경작이나 실화(失火), 도벌(盜伐), 분묘 설치 등을 금지하는 정책과 함께, 우수한 소나무 종자와 묘목을 조성하는 적극적인 자원 조성의 정책도 병행해야 했다. 그러나 안면도처럼 국가가 특히 중요시한 일부 봉산을 제외하고는, 적극적인 자원 조성의 정책보다는 이용을 금지하는 정책이 송정의 중심이 되었다. 이러한 소극적인 산림정책은 큰 효과를 보지 못하였다. 궁방이나 권세가들이 산림을 사점하고 또 국가의 통제력이 약화되고 있는 현실에서 개인의 이용을 억제하는 정책으로는 백성들의 저항과 불법행위를 막아낼 수 없었다. 이 때문에 18세기 말에는 산림자원을 적극 조성하였을 경우 해당 관리의 인사고과에 반영하거나, 신역을 면제하는 등 산림육성을 조장하는 산림관리로 정책이 전환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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