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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역사에 큰 족적을 남긴 고승, 무학대사(無學大師) (上)
▲ 무학대사 진영(眞影,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들어가기 전에
우리 역사 속의 큰 인물인 무학대사(無學大師, 1327~1405), 내암(來庵) 정인홍(鄭仁弘, 1535~1626) 선생, 남명(南冥) 조식(曺植, 1501~1572) 선생, 신재(愼齋) 주세붕(周世鵬, 1495∼1554) 선생, 그리고 현대사에 와서는 전두환(全斗煥, 1931~ ) 전 대통령 등 이 기라성같은 인물들은 과연 누구일까.
이들은 이 땅에 태어나 국가와 사회 발전을 위해 역사에 큰 족적을 남긴 인물이자 모두 우리 고장 합천에서 태어났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신재 선생의 경우는 이웃인 함안 출생이란 설이 있지만 우리 고장 합천에 그 뿌리를 두고 있는 점만은 확실하다. 가히 합천은 ‘인물의 고장’이라 이를 만하다.
이들 가운데 필자는 고려 말 조선 초의 큰 스님이며 조선의 최초이자 마지막 왕사를 지낸 무학대사에 대해 특히 주목하여 왔다. 고려 말에 태어난 무학대사는 이성계를 만나 후일 임금의 자리에 오를 것이라고 예언하고, 조선 건국 후에는 한양을 수도로 정하는 데 기여하는 등 조선 건국에 초석을 쌓는 한편, 불교를 배척하고 유학을 숭상하는 조선시대 초기에 불교가 그나마 명맥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하는데 큰 밑거름이 되었다. 그만큼 무학대사는 우리 역사에 아주 뚜렷하게 기록을 남긴 큰 인물이라 할 수 있다.
필자는 불교신자이자 합천 대병이 출생지라는 점에서 대사와는 비록 작으나마 동질성을 갖고 있다. 거기에다 서울에서 공직생활을 하던 중에 무학대사의 주요 활동 근거지라고 할 수 있는 경기도 양주시 소재 회암사(檜巖寺)가 그리 머지않아 그 곳을 자주 오가며 무학대사에 대해 관심을 가질 수 있었던 유리한 환경을 갖고 있었다. 그러면서 자연히 우리 고향 합천 출신인 무학대사 부도비가 어떻게 이렇게 먼 곳인 양주 회암사에 세워져 있을까. 또 부도비에는 어떤 내용이 담겨져 있을까 하는 궁금증을 안고서 휴일을 이용해 바깥나들이 삼아 회암사를 수십 차례 방문하곤 했다.
그런 한편으로는 무학대사와 회암사에 대해 좀 더 알아가기 위한 방편으로 회암사를 사랑하는 모임인 ‘회사모’라는 단체에 가입해 여러 불교학자들과의 교류를 통해 무학대사에 대해 공부하는 한편, 필자의 출생지가 무학대사와 같은 경남 합천이고, 또 합천의 유적지에 대해서도 나름대로 소개하기도 했다.
그러나 필자가 무학대사나 불교에 대한 지식이 일천해 깊이 접근할 수 없는 한계를 지니고 있다. 또 대사 자신의 저술이 있긴 하지만 현재 전해오는 것이 없는데다 유학을 신봉하던 조선조에 유신(儒臣)들이 대사에 대한 평가에 매우 인색한 면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불교 내에서도 대사의 법맥이 끊겨 대사의 생애와 사상에 대해 제대로 재조명하지 못한 점도 그 한 이유가 될 것이다.
▲ 한국불교의 법맥도(2019.3.29, 불교신문). 무학자초스님(우측상단)은 그를 이은
함허득통으로 끝났음을 알 수 있다.
그런 중에도 다행히 회암사에 남아 있는 대사의 비석이 우여곡절 끝에 오늘날까지 오랜 세월을 버티어 서 있고, 「태조실록」(太祖實錄)같은 국가의 공식 기록과 「석왕사기」(釋王寺記), 「오산설림초고」(五山說林草稿) 같은 야사(野史) 또는 설화류(說話類)에 그의 흔적이 일부나마 남아 있어 무학대사에 대한 연구 자료로 크게 도움이 되고 있다. 여기에다 근래 황인규 교수의 「무학대사 연구」(無學大師 硏究)와 같은 노작(勞作)이 발간돼 여간 다행이 아닐 수 없다.
앞으로 관련 행정당국과 조계종 종단에서는 우리 역사에 큰 족적을 남긴 무학대사에 대해 더 많은 관심을 갖고 그의 생애와 사상을 재조명하는 한편 출생지에 기념관을 세우는 등 그의 업적을 현창하는데 노력해 주길 기대하는 바이다.
여기서는 불교학자들 중심의 이러한 기존 연구와 발간 자료 등에 기초하고 있으나 당초 기대한 만큼의 기본적인 자료를 구하는데 한계가 있으며, 또한 필자의 부족함에도 크게 기인하고 있다는 점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으로 향토사 연구와 함께 무학대사(이하‘무학’)에 대한 관심을 가진 분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램으로 이 글을 쓰기로 했다. 여기에서 게재할 순서는 다음과 같다.
<차 례>
들어가기 전에
Ⅰ. 무학대사의 생애와 업적
1. 출생
2. 출가에서부터 원(元)나라 유학까지
3. 원(元)나라 귀국부터 고려 말까지
4. 이성계와의 만남에서부터 조선 건국까지
5. 입적
Ⅱ. 무학대사의 불교계 위상과 선(禪)사상
1. 불교계에서의 위상
2. 선(禪)사상의 특징
마무리하며
<붙임>
가. 양주 회암사의 무학대사 비문
나. 무학대사 연보
Ⅰ. 무학대사의 생애와 업적
1. 출생
무학의 가계와 혈통에 대해서는 오랜 옛날이라 자세히 알 수 없는 실정이다. 경기도 북부의 양주(楊州) 회암사(檜巖寺)에 위치한 무학대사의 부도탑인 「묘엄존자탑명」(妙嚴尊者塔銘)에 따르면 경상도 삼기현(三岐縣) 출신으로 아버지는 박인일(朴仁一)이고, 어머니는 고성 채(蔡)씨이다. 어머니 채씨가 꿈에 아침 해가 품속에 들어오는 것을 보고 임신하여 1327년(충숙왕 14) 9월 20일에 ‘무학’을 낳았다고 한다. ‘무학’(無學)이라는 호(號)를 가진 그의 휘(諱)는 자초(自超)이며, 당호(堂號)는 계월헌(溪月軒), 시호(諡號)는 묘엄존자(妙嚴尊者), 회암사에 세워진 탑호(塔號)는 자지홍융(慈智洪融)이다.
본래 ‘無學’이란 뜻은 불교의 수행과정 가운데 가장 높은 단계를 의미하는데, 모든 번뇌를 없애고 소승증과(小乘證果)의 극위(極位)인 아라한과(阿羅漢果)를 얻는 경지에 오르면 더 배울 것이 없으므로 ‘무학’이라 부른다고 한다.
여러 자료를 살펴보면, ‘자초’가 살아 있을 때는 법명(法名)인 ‘자초’를 쓰고, 그가 입적한 이후에는 ‘무학’이라는 법호(法號)를 주로 쓴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독자들의 혼란을 막기 위해 이미 널리 알려져 있는 ‘무학’을 일관되게 통일하여 쓰기로 했다.
이 ‘무학’이 태어났을 당시의 고려는 원(元)의 지배를 받기 시작해, 고려의 왕들이 원 황실과의 관계에 따라 폐위되고 복위되기를 반복할 정도로 자주 바뀌는 등 매우 어수선한 시기였다. 무학의 아버지 박인일은 후에 「숭정문하시랑」(崇政門下侍郞)으로 추증되었는데, 이는 후에 무학이 왕사로 임명된 이후에 내려진 시호일 가능성이 높다.
무학의 탄생지에 대해서는 충청도 서산군(瑞山郡)이라는 설도 있으나 경상도 삼기현(三岐縣)이 확실하다고 본다. 이 삼기현은 오늘날의 행정구역상 합천군(陜川郡) 대병면(大幷面) 일대로서, 무학이 이 대병면 성리(城里)에 소재한 악견산(岳堅山) 기슭의 합천댐 하류 황강변에서 태어났다고 지역 사회에서는 지금까지 구전(口傳)돼 내려오고 있다. 여기에다 조선 건국 초기 당시 유명한 학자인 변계량(卞季良)이 쓴 「묘엄존자탑명」이 무학의 제자 조림(祖琳)이 지은 행장(行狀)을 보고 썼기 때문에 무학에 관해 가장 정확한 정보를 담고 있다고 보며, 또 태조실록(太祖實錄)에도 ‘삼기현사(三岐縣司)를 승격시켜 감무(監務)로 삼았으니 왕사 자초(自超)의 본향(本鄕)이기 때문’이라고 기록돼 있는 점 등을 종합해 볼 때 우리 고장 합천 대병 출신이 틀림없다고 하겠다.
무학의 출생지로 알려진 오늘날의 대병면 성리 일대에는 악견산 뒤에 수 만평의 둔덕이 펼쳐져 있는데, 그 둔덕을 구리듬 또는 구리방이라고 부르고 있다. 그 구리듬 아래쪽 황강변 일대에는 무학샘(無學샘 ; 일명 호박샘), 구리듬 맞은편에 무학탄(無學灘), 7층 석탑의 잔재가 남아있는 무학사(無學寺), 그리고 무학대사가 심었다는 오래된 감나무와 함께 무학에 관한 설화가 지금까지 전해 내려오고 있다. 그러나 아쉽게도 1980년대 중반에 오늘날의 합천댐이 건설되면서 이러한 흔적들이 거의 멸실되고, 새로 개통된 황강변 도로가에 무학의 출생지임을 알려주는 안내판만이 초라하게 서 있다. 댐 건설 당시에 이러한 문화재 보호에 더 많은 관심을 가졌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이곳과 그리 머지않는 대병면 장단리(長湍里)의 귀목마을(조항동)과 서재밑마을(금성동)에는 밀양박씨 집성촌이 오늘날 위치해 있는데 무학과 관련된 집안인지는 그 내력을 알 수는 없다.
아무튼 이 회암사 부도탑에 따르면, ‘무학이 강보에서 벗어나자 문득 소제(掃除, 청소)를 하였고, 글을 배우기 시작한 뒤로는 남이 감히 앞서지 못할 정도로 영특했다.’라고만 기록되어 있다. 이 기록을 제외하고는 무학의 어린 시절에 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2. 출가에서부터 원(元)나라 유학까지
가. 출가
무학은 18세가 되던 1344년(충숙왕 복위5)에 출가하였다. 무학은 후에 지어진 법호이고, 출가할 때 받은 법명은 자초(自超)이다. 무학의 생존 당시에는 자초라는 법명(法名)을 주로 불렀으나, 그 후로는 주로 무학이라는 법호(法號)로 더 많이 불렸다.
무학의 어린 시절에 해당되는 14기 초의 고려는 원(元)의 지배하에 정치적으로 매우 혼란스러운 시기였고, 무학의 가계나 부모의 신분이 불분명하기 때문에 그의 출가배경을 명확히 알 수는 없다. 아무튼 당시의 어수선한 세상이 젊은 청년으로 하여금 세상사를 초월한 삶을 선택하게끔 만들었던 것으로 보인다.
무학의 출가 스승은 혜감국사(慧鑑國師, 1249~1319)의 상족제자인 소지선사(小止禪師)로서, 송광사(松廣寺) 내지 불교의 한 문파인 사굴산문(闍崛山門) 계열의 사찰로 출가하였다.
무학은 출가 후 참선수행에 들어갔다가 문득 깨달은 바가 있어 고승에게 점검을 받기 위해 용문산에 주석하고 있던 혜명법장 국사를 만나러 갔다. 이때 혜명국사는 무학에게 법(法)의 교시를 내리고, “바른 길을 얻은 자 아니고 누구이겠느냐?”는 말을 건넸다. 이는 무학이 선(禪)의 초입에 들어섰음을 인정하는 말이었다. 이후 혜명국사는 무학이 부도암에 살도록 하였는데, 하루는 암자에 불이 났는데도 무학만이 홀로 나무 허수아비처럼 고요히 앉아있어 사람들이 기이하게 여겼다고 전한다.
나. 원나라 유학
1346년 가을에 「능엄경」(楞嚴經)을 읽다가 깨달은 바가 있어 스승인 소지선사에게 돌아가 고하니 소지선사가 매우 기뻐하며 칭찬과 감탄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이때부터 잠도 자지 않고 밥 먹은 것도 잊은 채 참선에 전념하였다. 1349년에 진천(鎭川) 길상사(吉祥寺)에서 머물다 1352년(공민왕 1) 여름에는 묘향산 금강굴에서 수도하다 홀연히 깨닫는 바가 있었다. 스승을 찾아가 묻고 싶은 것이 간절해진 무학은 원나라로 들어가 점검을 받기로 했다. 이때 무학이 찾아간 이는 원(元)의 수도 연경(燕京)에 주석하고 있던 지공선사(指空大師 ; 이하 ‘지공대사’)였다. 수천리 길을 마다하지 않고 연경까지 간 것은 자신이 찾은 답을 점검하고 싶은 마음이 너무 컸기 때문이겠지만, 당시 고려의 수행자들이 원나라의 고승을 찾아가 점검을 받는 일이 13~14세기 당시 불교계의 하나의 유행이기도 했다. 원나라의 강남 정복으로 강남으로 통하는 길이 열리면서 주로 강남에 주석하고 있던 선승들을 만나 문답을 통해 인가(印可)를 받는 것이 주요 경력처럼 여겨졌는데, 당시 나옹혜근(懶翁慧勤 ; 이하‘나옹선사’)이 원에 머물고 있었던 것이나 태고보우(太古普愚), 백운경한(白雲景閑), 무학자초와 같은 스님들이 원나라에 유력(遊歷)한 것은 이러한 시대적 유행에 따른 것이다.
무학을 처음 본 지공대사는 그 자리에서 “고려 사람들을 모두 죽이겠구나.”라는 말을 건넸다. 이는 무학의 공부를 인정한다는 선어(禪語)였다. 이듬해 무학은 법천사(法泉寺)에 머물고 있던 나옹선사를 찾아갔다. 나옹선사는 무학이 한 눈에 깊고 큰 그릇임을 간파하고는 자신의 제자로 받아들였다. 후일 지공(指孔) – 나옹(懶翁) - 무학(無學)으로 이어지는 역사적인 만남이 이때 처음으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무령(霧靈)과 오대산(五臺山)을 유력한 뒤 무학은 나옹선사가 머물고 있던 서산 영암사(靈巖寺)를 다시 찾아갔다. 이곳에서 약 2년간 머물며 나옹선사의 지도아래 수행에 전념했다. 이곳에서 밥조차 잊은 채 참선에 몰두하자 나옹선사는 자초에게 “네가 죽었느냐.”하니, 무학은 웃으며 대답하지 않았다고 한다.
「묘엄존자탑」에는 당시 영암사에서 나옹과 무학의 일화가 다음과 같이 전한다.
나옹이 하루는 무학과 더불어 섬돌 위에 앉아, “옛날 조주(趙州)가 수좌(首座)와 더불어 앉아서 돌다리를 보고 묻기를, ‘이것은 어떤 사람이 만들었느냐.’하니, 수좌가 답하기를, ‘이응(李膺)이 만들었습니다.’하였다. 조주가 ‘어느 곳을 향하여 먼저 손을 대었느냐.’하니, 수좌가 말이 없었다. “이제 누가 너에게 묻는다면 어떻게 대답하겠느냐.”하자 무학이 곧 두 손으로 섬돌아 잡아 보이니, 나옹이 문득 그치고 갔다. 그날 밤에 무학이 나옹의 방에 가니 나옹이 말하기를, “오늘에야 비로소 내가 너에게 속이지 않은 것을 알았다.”하였다. 뒤에 무학에게 말하기를, “서로 아는 사람이 천하에 가득하나 마음을 아는 사람이 능히 몇 사람이나 되겠느냐. 너와 나는 일가(一家)를 이루었구나.”하였다. 또, 도(道)가 사람에게 있으면 코끼리에게 상아가 있는 것과 같아서, 비록 감추고자 하나 될 수 없는 것이다. 다른 날 네가 어찌 남의 앞에 나서는 인물이 되지 않겠느냐.”하였다.
이 일화는 나옹선사가 무학을 매우 뛰어난 제자로 인정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이곳에서 2년여 머물며 나옹선사의 지도아래 공부하던 무학은 강소(江蘇), 절강(浙江) 등 중국 강남지역으로 유력을 떠나고자 하였다. 그러나 당시 중국 남부 지역에서는 몽고족이 세운 원(元)에 저항하는 한족(漢族)들의 반란이 끊어지질 않고 있었다.
무학보다 조금 앞서 원나라에 들어가 유력했던 고려의 선승들은 강남의 임제(臨濟) 법손들로부터 인가를 받았는데, 무학도 강남 지역의 고승들로부터 인가를 받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14세기 초 까지만 해도 강남 지역으로의 왕래가 가능했지만 14세기 중반에 이 길이 막히게 되면서부터 무학을 비롯한 고려의 승려들은 더 이상 강남 인가를 받을 수 없게 되었다. 이렇게 되자 무학은 발길을 돌려 고려로 돌아가기로 결심하고 귀국 직전에 다시 나옹선사를 찾아갔다. 귀국의 뜻을 밝히자 나옹선사는 손수 종이에 글을 써서 주었다.
일상생활을 보니 모든 기틀이 세상과 더불어 다른 데가 있다. 선악과 성사(聖邪)를 생각하지 않고 인정과 의리에 순종하지 않는다. 말을 내고 기운을 토할 때에는 화살과 칼날이 서로 버티는 것 같고, 글귀의 뜻이 기틀에 맞음은 물이 물에 돌아가는 것 같다. 한 입으로 손〔客〕과 주인이 글귀를 머금기도 하며, 몸이 불조(佛祖)의 관문을 통과하였다. 갑자기 떠난다고 하기에 “내가 게(偈)를 지어 송별한다.”하였다.
주머니 속에 또 다른 세계가 있음을 믿는다면
동서에 삼현(三玄)을 쓰도록 맡겨두어라.
누가 너에게 깨달은 바를 묻거든
눈을 내리감고 두 번 다시 말하지 말게나.
이 게송에는 앞으로 고승으로 이름난 이들을 만나게 될 무학에게 누가 진정한 스승인지 아닌지를 올바르게 판단하고, 그 길에서 정법(正法)을 찾아내기를 바라는 스승의 간곡한 당부가 담겨 있었다.
3. 원(元)나라 귀국부터 고려 말까지
가. 나옹과의 재회
원나라에서의 구도(求道) 여행을 마친 무학은 1356년(공민왕 5) 고려로 돌아왔다. 그가 귀국했을 무렵 중국에서는 강남을 중심으로 한족(漢族)들의 반란이 끊임없이 일어나 명(明)이라는 새로운 왕조 탄생의 조짐이 나타났다. 이러한 대륙의 새로운 질서재편의 분위기 속에서 새로 왕위에 오른 고려의 31대 공민왕(1351~1374년)은 오랜 원의 지배에서 벗어나 자주정책을 추진하는 등 개혁에 박차를 가했다. 공민왕이 추구한 개혁 대상에는 불교계도 포함돼 있었다.
무신집권기와 원의 내정간섭기를 거치면서 사찰과 권문세족의 결탁, 사원전의 방대한 점유 등으로 승가의 타락이 심한 상태였다. 이러한 문제점은 새로 떠오른 유학자들뿐만 아니라 불교계 내부에서도 지적되고 있을 정도였다. 공민왕은 이의 해결을 위하여 신돈(辛旽), 태고보우(太古普愚), 나옹선사 등과 같은 새로운 인물을 물색해 발탁했다.
나옹선사는 무학이 귀국한 지 2년 후인 1358년(공민왕 7) 고려로 돌아와 묘향산, 오대산 등의 여러 사찰을 돌아다녔다. 나옹선사의 귀국 소식을 접한 무학은 그 다음해 여름 나옹선사가 머물고 있던 양산(梁山)의 천성산(千聖山) 원효암(元曉庵)으로 찾아가니 나옹선사는 그에게 불자(拂子)를 주었다.
이 무렵 공민왕은 10여 년간 원에 유학하며 당대 최고의 선승들로부터 인가를 받고 지공대사 밑에서 수행한 나옹선사의 명성을 듣게 되었다. 이에 공민왕은 나옹선사를 개경으로 초청해 궁궐에서 법회를 열고, 이어서 고려 왕실이 중요하게 여기는 신광사(神光寺) 주지로 임명했다. 그만큼 나옹선사가 정치승이 아니라 높은 수행력과 화려한 이력으로 불교계 내부에서도 신망이 높은 상징적 인물로 인식하였던 것이다. 아무튼 이때부터 나옹선사는 고려 불교계의 핵심인사로 부각되고, 그의 문도들도 크게 늘어나기 시작했다.
나옹선사가 신광사 주지로 있을 당시에 무학도 그 절에 머무르고 있었는데, 나옹선사의 제자들 가운데는 무학을 경계하는 승려들이 있었던 같다. 이는 나옹 문도들 사이에는 보이지 않은 알력이 있었으며, 결국 무학은 나옹 문도들 가운데서 주류 세력으로 자리를 잡지 못했다는 것을 시사하고 있다. 결국 무학은 신광사를 떠나기로 결심하고 그 뜻을 나옹선사에게 비쳤다. 그러자 나옹선사는 무학에게 “법통을 전하는 데 있어서 옷과 바리때〔衣鉢〕는 말과 글귀보다 못하다.”하고, 시를 지어 말하길, “한가한 중들이 남이니 나니 마음을 일으켜서, 망령되게 옳으니 그르니 하고 말들을 하니, 매우 옳지 않다. 산승(山僧)이 이 네 귀〔四句〕의 송(頌)으로써 길이 뒷날의 의심을 끊는다.”하였다. 이때 나옹선사는 다음과 같은 게송을 읊었다.
그 몫을 나누어주어도 따로 헤아릴 곳이 있으니
누가 그 속의 깊은 뜻을 알까나.
그대에게 맡기기에 모두가 안된다고 하지만
내 말은 이미 공겁을 뚫고 지나갔노라.
이 게송에는 무학이 다른 제자들과의 불화로 인해 자신의 문하에서 떠나는 것이 못내 안타까운 나옹선사의 마음이 그대로 담겨있으며, 또한 스승으로서 제자에게 인가를 내렸다는 의미도 함께 담고 있었다.
나. 송광사 주석 전후
신광사를 떠난 무학은 황해도 고달산의 탁암(卓庵)을 비롯한 깊은 산속 암자에서 10여 년간 수행에 전념했다. 1373년에 송광사 주지로 임명되기까지는 무학의 행적이 거의 기록에 나타나지 않는다.
이 기간에 나옹선사는 공민왕의 명을 받아 새로운 엘리트 승려를 선발하는 과거격인 공부선(功夫選)을 시행하고, 그 다음해에는 공민왕의 왕사로 책봉되어 순천 송광사로 내려갔다. 무학이 기록에 다시 등장하는 것은 이때부터였다. 나옹선사는 여기서 약 3년간 주석하다 회암사로 옮겨가면서 자신의 후임으로 무학을 지목했다. 「묘엄존자탑명」에는 나옹선사가 이때 무학에게 의발을 전해주자 무학이 게송을 지어 사례한 것으로 나온다. 무학은 이때부터 약 3년간 송광사 주지를 맡은 것으로 보인다.
나옹선사가 송광사에서 회암사로 가게 된 표면적인 이유는 그의 스승인 지공대사의 유지를 받들어 삼산양수기(三山兩水記)를 실현시키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인도 출신 고승인 지공대사는 원나라에 머물다 금강산에 상주한다는 법기(法起) 보살을 참배하기 위해 1326년 봄에 고려에 들어왔다. 그는 약 2년 7개월 간 금강산 참배를 비롯해 전국을 유력하였는데, 마치 석가모니가 환생한 것처럼 고려 왕실을 비롯해 가는 곳마다 신자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고 한다. 이때 회암사를 지나가다 둘러보고는 이곳의 지세가 자신이 출가한 인도의 나란타사원(Nalanda-temple)과 똑같이 생겼음을 알고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후에 나옹선사가 원나라에 머물던 1357년 지공대사를 마지막으로 찾아갔을 때 “고려에 돌아가서 삼산양수간(三山兩水間)에 머물면 불법(佛法)이 크게 일어난다.”며 나옹선사가 고려의 나란타사를 재현하기를 당부한 바 있다.
나옹선사가 회암사로 가기 3년 전에 지공대사가 입적해 그의 유골이 원나라에서 고려에 들어왔고, 이를 모신 부도가 회암사에 마련되었다. 1373년에 공민왕이 나옹선사에게 회암사로 갈 것을 명한 것은 지공대사의 유지(遺志)를 받들어 회암사를 거점으로 불교개혁의 주역이 돼주길 바랐던 정치적 의미가 내포돼 있었다고 본다.
나옹선사는 회암사 주지로 임명된 후 1376년 봄부터 2년 동안 회암사 중창불사에 매진해 건물이 250여 칸에 이르는 등 고려에서 가장 크고 웅장한 사찰이라는 감탄이 터져 나올 정도로 면모를 일신시켰다. 그런데 회암사 낙성식을 개최할 무렵에 나옹선사가 정치적으로 궁지에 몰리게 되었다. 나옹선사의 강력한 후원자인 공민왕이 갑자기 시해 당하게 되고, 또 대규모 불사라는 비판을 받자 나옹선사의 정치적 입지는 매우 좁아졌기 때문이다. 나옹선사는 낙성식을 갖기 직전 송광사에 있던 무학을 회암사로 급히 불러 선방의 최고 책임자인 수좌(首座)를 맡기려 하였다. 하지만 회암사에서 나옹선사의 후임 역학을 제대로 하지 못할 것으로 예견한 탓인지 무학은 이를 완곡하게 거절하고, 나옹선사의 요청을 받아 편실(便室)에 머물렀다. 나옹선사는 결국 조정 대신들의 탄핵을 받아 밀양 영원사(瑩源寺)로 추방하라는 결정이 났다.
다. 나옹선사 입적 이후
1376년(우왕 2) 낙성식 직후에 추방 명령을 받은 나옹선사는 회암사를 떠나 경상도 밀양으로 향했다. 그런데 밀양으로 가던 도중에 나옹선사는 여주 신륵사(神勒寺)에서 갑작스럽게 죽음을 맞게 되었다. 이에 나옹선사의 제자들은 나옹선사의 장례를 치른 후 신륵사를 비롯해 나옹선사와 인연이 있는 여러 사찰에 사리탑을 세우고, 진영(眞影)을 봉안하기에 이르렀다. 나옹선사가 혼신을 다해 중창한 회암사에도 그의 부도와 부도비가 세워졌다.
이러한 과정에 지공대사와 나옹선사로 이어지는 적장자이며, 자신이 나옹선사로부터 직접 인가를 받은 법제자임을 자처한 무학의 역할은 눈에 별로 띄지 않았다. 이후 무학의 행적은 주로 설화에서만 등장할 뿐 공식 기록에서는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묘엄존자탑명」에는 ‘나옹이 세상을 떠나니 무학이 여러 산을 노니면서 뜻을 감추고, 남에게 알리고자 하지 않았다.’고 기록돼 있다. 다만 「신륵사대장각기비」(神勒寺大藏閣記碑)에는 무학이 관악산 청계사(淸溪寺)의 승려로 기록돼 있는 것으로 미루어 1383년경 경기도 의왕 소재 청계사에 머문 것으로 보인다. 외부로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이 시기에 무학으로서는 인생에서 가장 큰 일대 사건이 찾아왔다. 바로 조선왕조의 개창자 이성계와의 만남이었다.
4. 이성계와의 만남에서부터 조선 건국까지
가. 이성계와의 첫 만남
무학과 이성계의 첫 만남에 대해서는 여러 설화 속에 등장하지만 그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것이 후에 청허휴정(淸虛休靜. 서산대사西山大師)이 쓴 「설봉산석왕사기」(雪峯山釋王寺記)이다.
1384년(우왕 10) 함흥의 무장 이성계가 어느 날 저녁 잠깐 졸면서 꿈을 꾸었다. 거의 쓰러져가는 집에 들어가 서까래 세 개를 짊어지고 나왔다. 그 후에는 꽃이 떨어지고 거울이 깨지는 것이었다. 꿈에서 깨어나 보니 좋은 꿈같기도 하고, 나쁜 꿈같기도 하여 찜찜하고 답답하였다. 옆에 있는 한 노파에게 해몽을 해 달라고 부탁하였다. 그러자 그 노파가 말하기를 “여자가 어찌 대장부의 장래 일을 알겠습니까. 여기서 서쪽으로 40리길을 가면 설봉산 토굴에 어떤 이상한 승려가 이름을 감추고 솔을 먹으며 칡베 옷을 입고 사는데, 말과 행동이 비범합니다. 얼굴이 검기 때문에 흑두타(黑頭陀)로 불립니다. 그가 앉아서 움직이지 않은 지가 이제 아홉 해입니다. 그분에게 가서 묻는 것이 좋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설봉산 토굴에서 면벽 수행을 하고 있다던 그 승려가 바로 무학이다. 이성계로부터 꿈 이야기를 들은 무학은 경하하며 말하기를 “이는 모두 장차 군왕을 일으킬 꿈이요, 예사로운 꿈이 아닙니다. 서까래 셋을 짊어진 것은 곧 임금 왕(王)자를 의미합니다. 꽃이 떨어지면 그 후에 열매가 맺히고, 거울이 떨어지면 요란한 소리가 있지 않습니까. 꽃과 거울 또한 당신에게 왕업이 다가오는 것을 알려주는 의미입니다.”라고 하였다.
무학은 이성계를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며 말을 이어 나갔다. “공께는 군왕의 기상이 있습니다. 공은 오늘의 일을 절대 입 밖에 내지 마시고, 지금 이 자리에 절을 하나 세워 ‘석왕사’(釋王寺)라 하시면 지극한 공덕이 될 것입니다.” 또 이르기를, “큰일은 빨리 서두르면 오히려 성공하지 못하니 앞으로 3년을 기약하여 오백성재를 개설해 은밀히 기도하면 훌륭한 승려가 반드시 나타나 왕업을 도울 것입니다. 만약 공이 나의 말을 믿지 않는다면 일을 이루지도 못할 뿐만 아니라 반드시 화를 입게 될 것이니, 부디 열 번 조심하시길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이성계가 자리에서 물러나오며 “삼가 가르침을 받들겠사오니 바라옵건대 대사께서는 자비로써 저의 큰일을 도와주십시오.”라고 하자, 무학은 고개를 끄떡여 대답을 하였다. 그 후 1년 안에 이성계는 그 토굴 자리에 석왕사를 창건하였고, 3년간 오백재를 올렸다.”
이러한 설화에 따르면, 무학과 이성계가 처음 만난 시기는 1384년으로 무학이 58세, 이성계가 50세가 되던 해이다. 그로부터 4년 뒤인 1388년에 ‘위화도 회군’이 발발하면서 이성계는 고려 최고의 권력자로 떠올랐고, 이때부터 이성계의 새 왕조 개창이 공론화되기 시작했다.
또한 이 시기에 무학은 함흥 석왕사(釋王寺)를 비롯해 남해 보리암(菩提庵), 의정부 회룡사(回龍寺), 순창 만일사(萬日寺), 무주 북고사(北固寺), 임실 상이암(上耳庵) 등 전국의 여러 곳에 기도처를 마련해 왕조 창업을 축원하는 기도를 올렸다.
이성계 역시 조선왕조 개창 전후로 여러 불교행사를 실행하였다. 이는 자신의 원력을 확고하게 세우고, 또 한편으로는 대부분이 불교신자인 고려인들의 민심을 얻기 위한 방편으로 보인다.
고려 말에 무학은 수차례 왕조로부터 국사(國師) 제의를 받았으나 그때마다 거절한 바 있다. 이는 나옹선사의 입적 이후 더 이상 고려왕조에서는 희망을 찾을 수 없다고 판단했음을 보여준다. 또 이성계와의 만남을 통해 이성계에게 새 왕조 건설을 적극 권유하고 지지했음을 짐작해 볼 수 있다.
나. 조선 최초의 왕사 책봉
‘위화도 회군’의 성공으로 고려에 충성하는 최영(崔瑩) 장군과 정몽주(鄭夢周) 등의 세력을 차례로 무력화시킨 이성계와 신진사대부 세력은 마침내 1392년 8월, 숭유억불(崇儒抑佛)을 이념으로 하는 새로운 조선 왕조를 개창했다.
새 왕조는‘억불(抑佛)’을 내세웠음에도 불구하고 개국 초기의 흐트러진 민심을 수습하고, 또 불교계를 장악하기 위해 불교계의 대표적인 인물들을 왕사(王師)와 국사(國師)로 각각 발탁하였다. 태조 이성계가 왕위에 오른 후 처음으로 맞이하는 생일을 계기로 그해 10월 9일 무학을 왕사로 모시고, 이어 2년 후에는 천태종 승려 조구(祖丘)를 국사로 모셨던 것이다. 원래 고려에서 왕사와 국사는 국왕과 백성들을 연결시키는 상징적 존재로, 왕을 비롯한 지배층과 하층민인 백성들로부터 신망을 동시에 받는 인물을 발탁하였다.
태조는 왕사와 국사 임명에 이어 당대의 고승들과 함께 새로운 왕조의 개창을 알리고, 어수선한 민심을 통합하기 위한 여러 불교행사들을 벌여 나갔다. 그 대표적인 행사로는 해인사탑(海印寺塔) 대장경 봉안을 비롯해 개성 연복사탑(演福寺塔) 중창, 삼화사(三和寺) 등 수륙재(水陸齋) 설행, 진관사(津寬寺) 수륙사 설치 등을 들 수 있다.
그런데 태조는 평생 불교를 신봉하며 살았지만 당시 승려들의 파계와 부패상을 지켜보며 불교 교단에 대해서는 매우 비판적인 생각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각 사찰의 규모와 사찰이 보유하고 있는 땅과 노비가 얼마인지를 조사해 보고하라고 지시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태조는 불교가 새 왕조의 백성들을 통합하기 위해 좋은 방편이 될 수 있었다고 보았다. 그 일환으로 오랜 벗이자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한 무학을 왕사로 임명해 그동안의 고마움과 함께, 향후 불교계를 잘 이끌어주기를 바랬다.
태조는 왕위에 오른 후 처음 맞는 1392년 10월 9일부터 11일까지 3일간 무학을 초청하여 궁궐에서 선(禪) 설법(說法)을 가졌다. 이 자리에서 그는 각별히 존경하던 무학을 왕사로 모셨다. 새 왕조를 개창한지 3개월만이다. 이처럼 자신이 왕이 된 후 처음 맞는 생일에 무학을 왕사로 봉하는 의식을 치른 것만 보아도 태조가 얼마나 무학을 깊이 신뢰하고 정신적으로 의지하였는지를 알 수가 있다. 태조는 무학에게 「王師 大曹溪師 禪敎都摠攝 傳佛心印 辯智無碍 扶宗樹敎 弘利普濟 都大禪師 妙嚴尊者」(왕사 대조계종사 선교도총섭 전불심인 변지무애 부종수교 홍리보제 도대선사 묘엄존자)라는 긴 이름의 시호를 내렸다.
이날 태조는 고승 200여 명을 왕궁으로 모셔 공양을 올리고, 무학에게 선(禪)을 설법하게 했다. 특별히 오교(五敎) 양종(兩宗)의 승려들이 모두 참석한 자리였다.
무학이 법석에 올라 불자(拂子)를 일으켜 세워 대중에게 보이며 말하기를, “이것은 삼세(三世) 제불(諸佛)의 말씀에도 도달하지 못하였고 역대 조사의 전(傳)에도 이르지 못한 것이니, 어찌 대중들이 도리어 알겠는가. 마음과 말로서 가늠하고 견주고 설명하는 자가 어찌 우리 선종에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이어 임금에게 고하기를, “유교에서는 ‘인(仁)’이라 말하고, 불교에서는 ‘자비(慈悲)’라고 말하지만, 그 쓰임새는 한 가지입니다. 백성을 보하기를 갓난아기와 같이 한다면 곧 백성의 부모가 될 수 있는 것이요, 지극한 인과 큰 자비로써 나라를 다스린다면 자연히 임금의 목숨은 끝이 없고 임금의 자손들은 영원할 것이며, 사직(社稷)이 강녕할 것입니다. 지금 개국의 시작에 이르러 형법(刑法)에 빠진 자가 한 둘이 아닙니다. 원컨대, 전하께서 모두를 하나같이 사랑하시고 모두 용서하셔서 모든 신하와 백성들로 하여금 함께 인수(仁壽)의 지경에 이르게 한다면 이것은 우리 국가의 무궁한 복일 것입니다.”고 하였다.
이 법문에 감동을 받은 태조는 사형(死刑), 유형(流刑) 이하의 죄수들을 일대 사면하는 조치를 내렸다.
태조의 처음 맞는 생일에 무학을 왕사로 봉하고, 고승들을 초청해 큰 법석(法席)을 연 것은 태조가 불교계의 대표자로 무학을 임명했음을 불교계 내외에 천명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무학은 이로부터 입적할 때까지, 조선의 첫 왕사이자 마지막 왕사로 13년간 재임하였다. 불교국가로서의 상징적 제도였던 국사와 왕사 제도는 그 이후 조선에서 폐지되었다.
다. 회암사 주석
무학을 왕사로 봉한 지 3개월이 지난 후인 1393년 2월에 태조는 직접 무학과 함께 회암사로 향했다. 이는 회암사를 왕사인 무학의 하산소(下山所), 즉 왕사가 머무는 주석처로 삼겠다는 뜻이다. 이 회암사는 개경이나 한양에서 모두 가깝고, 또 지공대사 – 나옹선사 - 무학으로 이어지는 법맥의 상징 사찰이기 때문에 무학으로서는 더할 나위 없는 하산소로 여겨졌던 것으로 보인다.
무학이 회암사에 주석하면서부터 이 회암사는 조선 왕실불교를 대표하는 기도처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1393년 이성계의 첫 부인으로 사별한 신의왕후(神懿王后) 한(韓)씨의 기일(忌日)에 태조가 회암사에 거둥하여 승려들에게 공양을 한 이래 크고 작은 왕실 불사가 회암사에서 이뤄졌다. 태조는 국가나 왕실에 크고 작은 변고가 있을 때마다 회암사에 신하를 보내 소재의식(消災儀式)을 열도록 했다. 또 왕실에 환자가 발생하거나 상(喪)이 있을 때에도 신하를 보내 구병의식(救病儀式)을 베풀었다. 이러한 전통은 무학이 입적한 후에도 세조, 중종 등 조선 중기까지 이어졌다.
▲ 조선 초기에는 최대 왕실사찰이었으나 억불책(抑佛策)에 따라 16세기 후반에 유생들에 의해 화재로 폐사된 것으로 알려진 회암사의 터(32만㎡ 면적, 국가사적 128호)
한편, 무학이 회암사에 주석하고 있는 동안 왕실에서는 두 차례 피바람이 일었다. 개국에 공을 세운 다섯째 아들인 이방원(李芳遠)이 이성계의 둘째 부인 신덕왕후(神德王后) 강씨(康氏) 소생으로 세자에 책봉된 방석(芳碩) 등 이복동생들을 살해한 「제1차 왕자의 난」(1398년, 태조 7)을 일으키자 이에 크게 상심한 태조는 둘째 아들인 방과(芳果, 정종定宗)에게 왕위를 물러주고, 그로부터 2년 후에 또 형제간에 「제2차 왕자의 난」(1400년, 정종 2)이 일어나 정종(定宗)도 물러나는 변고가 발생했다. 이에 태조는 아들인 태종 이방원에게 화를 삭이며 수년간 경기도와 강원도 등지의 사찰을 떠돌아다니며 지냈다.
1401년(태종 1) 11월에 태조는 태종 몰래 밤중에 동두천 소요산(逍遙山)에 있던 행재소(行在所)로 갔다가 얼마 뒤에는 아예 회암사 경내에 궁실을 짓고 이곳에서 머무르겠다고 선언했다. 왕자들의 두 차례 난으로 지친 태조는 무학에게 의지할 정도로 무학을 신뢰했다.
결국 조정에서는 회암사 경내에 태조의 궁실을 짓고, 더불어 회암사 전체의 중창공사에 들어갔다. 회암사 내에 태상전(太上殿)이 마련되면서 회암사는 태조의 행궁 역할을 하게 되었다. 이후 사신들이 회암사를 방문해 태상왕(太上王)이 된 태조 이성계에게 인사를 올렸고, 태종도 회암사로 직접 행차해 문안인사를 올리곤 했다.
태조가 회암사에 행궁을 설치한 후 무학으로부터 계(戒)를 고기와 술을 금한 채 수행생활을 이어나갔다. 갑자기 고기를 금한 탓인지 크게 수척해진 태조의 모습을 보고 태종은, “만약 태상왕께서 고기를 드시지 않는다면 내가 왕사에게 허물을 돌리겠다.”며 무학을 협박하기도 했다. 무학으로부터 이 소식을 전해들은 태조는 “국왕이 나처럼 부처를 숭상한다면 내가 마땅히 고기를 먹겠다.”고 제안했다. 당시 태종은 긍정의 대답을 대신해 술을 올렸고, 이에 태조가 크게 기뻐했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태조가 회암사에 머물 당시 회암사에 대해서는 지원을 아끼지 않았으나 태종은 사찰이 소유하는 토지와 노비를 몰수하는 등 대대적인 탄압 조치를 취했다. 그러나 이 소식을 접한 태조가 크게 노하여 고기를 더 이상 먹지 않겠다고 선언하자 태종은 며칠 만에 이를 백지화 시키고 말았다. 그 후 무학과 태조가 세상을 떠나자 태종은 결국 사찰에 대한 토지와 노비를 몰수함에 따라 불교가 크게 위축될 수 밖에 없었다. 그런 가운데 무학은 당시 불교계를 보호하기 위해 스스로 방패역할을 자처하였음을 보여주는 하나의 사건이었다.
라. 한양 천도
조선의 한양 천도에도 무학은 나름대로 일정한 역할을 한 것으로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다. 1392년 8월 왕위에 오른 태조는 한양으로 천도할 것이라고 밝히고 한양에 궁궐을 짓게 하였다. 그런데 그 이듬해 1월 태실증고사(胎室證考使) 권중화(權仲和)가 전라도 진동현(珍同縣)의 산수형세도(山水形勢圖)와 계룡산(鷄龍山) 도읍지도(都邑地圖)를 올리자 태조는 충청도 계룡산의 지세를 직접 살펴보기로 하였다. 신하들을 데리고 개경을 떠나 계룡산으로 향하던 태조는 도중에 회암사에 들러 무학도 함께 동행할 것을 요청하였다. 이때의 상황에 대해 「묘엄존자탑명」에는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계유년에 태조가 풍수를 살펴 수도를 세우고자 하여 무학에게 수가(隨駕)를 명하였다. 무학이 사양하니 태조가 무학에게 이르기를, “지금이나 예전이나 서로 만난다는 것은 인연이 있는 것이다. 세상 사람의 터를 잡는 것이 어찌 도사(道師)의 눈만 하겠는가.”하였다. 계룡산과 지금의 신도(新都)를 순행(巡幸)할 때, 무학이 항상 호종하였다.
위 글에 따르면 태조는 풍수지리에 대한 무학의 안목을 높이 평가하고 있었고, 신도(新都) 후보지를 순행(巡幸)할 때마다 무학의 자문을 구한 것으로 보인다. 계룡산에 도착해 도읍 후보지의 높은 언덕에 올라 지세를 두루 살피던 태조는 함께 온 무학에게 의견을 묻자, 무학은 “능히 알 수 없습니다.”라며 직답을 회피했다. 신도로서는 탐탁지 않은 것으로 여겼던 것으로 보인다. 결국 그해 11월에 경기도 관찰사 하륜(河崙)이 계룡산 일대가 좁은 편이라 도읍지로서 적당하지 않다고 강력하게 주장해 도중에 중단되었다.
이렇게 되자 새로운 수도 후보지는 자연히 한양으로 좁혀지게 되었는데, 오늘날의 안산(鞍山) 아래의 신촌(新村) 일대와 북악산(北岳山) 아래가 관심대상으로 떠올랐다. 신촌 일대를 살펴 본 무학은 자신의 견해를 전혀 밝히지 않았다. 인왕산(仁王山)에 올라 그 아래의 경복궁 일대를 살펴 본 뒤에는, “여기는 사면이 높고 수려하며 중앙이 평평하니, 성(城)을 쌓아 도읍을 정할 만합니다.”라고 자신의 견해를 밝혔다. 그러면서도 여러 사람의 의견을 수렴하여 정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며 매우 겸손한 자세를 취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조선의 새로운 도읍지는 인왕산을 주산(主山)으로 하여 동향(東向)으로 하자는 무학의 주장과 북악산을 주산으로 하여 남향(南向)으로 하자는 정도전(鄭道傳)의 주장이 서로 대립하였다. 이와 관련한 야사류의 이야기가 오늘날에 전해진다.
태조는 크게 기뻐하여 스승의 예로써 대접하고, 이내 정도(定都)할 곳을 물었더니 무학이 바로 한양을 점쳐 말하기를
“인왕산을 진산으로 삼고, 백악과 남산을 청룡 백호로 삼으십시오.”라고 하였다. 이에 정도전이 난색을 보이며 말하기를
“자고로, 제왕은 모두 남면(南面)하고 다스렸다는 말은 들었어도 동향(東向)하였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습니다.”하니, 무학이 말하기를
“내 말을 듣지 아니하면, 200년이 지나서 내 말을 생각할 것입니다.”하였다.
이 이야기에서 주목되는 부분은 풍수지리와 관련된 대목이다. 즉 도읍의 주산을 어디로 잡고, 궁궐을 어느 방향으로 놓을 것인가의 문제가 그것이다. 결국 정도전의 주장대로 되었지만 무학은 자신의 말을 듣지 않으면 훗날 화를 크게 당할 것이라고 경고하였다고 한다. 실제 확인할 수 없는 말이지만 그의 주장대로 200년 후에 「임진왜란」이라는 큰 참화를 당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어쨌든 실록에는 무학이 한양으로 도읍지를 정할 때 자신의 견해를 크게 드러내지 않고 소극적인 의견을 밝힌 것으로 나타나지만, 무학이 한양 정도(定都)에 참여한 일을 계기로 후대에 수많은 설화의 주인공이 되었다.
태조 이성계는 한양으로 천도 후에는 자신과 그의 후손들이 묻힐 길지를 물색하는데 심혈을 기울여 대신들과 함께 여러 곳을 찾아 다녔다. 그러다 결국 현재의 건원릉(健元陵) 터를 잡게 되었다. 이 터를 잡는 데는 풍수지리에 밝은 무학의 도움이 컸다고 한다. 왕궁으로 함께 귀환하다 어느 고개에서 “이제야 걱정을 덜게 되었다.”고 말했다고 하여 생겨난 이름이 오늘날의 망우리(忘憂里)다.
이 밖에도 정종과 정인왕후의 능인 후릉(厚陵)의 위치도 무학이 그 터를 정했다고 하며, 한양 천도 후에 한양의 동서남북 네 곳에 비보(裨補) 사찰을 두기도 했다 한다. 또 서울의 왕십리(往十里), 무학재(無學재) 등의 여러 지명도 무학과도 관련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무학과 관련해 가장 널리 알려진 이야기가 이성계와의 돼지 논쟁이다.
하루는 수창궁(壽昌宮)에서 태조 이성계가 무학대사와 한가하게 이야기를 나누다 먼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대사, 오늘은 서로 농(弄)을 하기로 합시다.”
“그럼 전하께서 먼저 하시지요.”
“내가 보기에 대사는 돼지로 보이는 구려.”
“제가 보기에 전하께서는 부처님으로 보이십니다.”
“아니, 서로 농을 하자고 해놓고 어찌 아첨하는 말을 합니까.”
“아닙니다. 돼지 눈에는 돼지만 보일 뿐이고, 부처 눈에는 부처만 보일 뿐입니다.”
이 한마디에 태조 이성계가 한 순간에 돼지가 되고, 돼지로 불렸던 무학대사는 부처가 된 셈이다. 기가 막힌 반전(反轉)이다. 깨달음을 얻은 선사(禪師)의 선기(禪機)가 번뜩이는, 가히 우리 역사상 가장 최고의 해학(諧謔, 위트)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마. 무학의 부도 설치
태조는 자신의 정신적 지원자였던 무학을 끔찍이 아꼈던 것 같다. 그래서 자신이 무학보다 먼저 세상을 떠날 것을 걱정해서인지 재위 중이던 1397년(태조 6) 회암사에 무학의 부도(浮屠)를 미리 만들게 했다. 위치는 오늘날의 회암사 오른쪽 둔덕에 있는 지공대사와 나옹선사 부도 아래였다.
▲ 조선 태종 7년(1407)에 세워진 회암사의 무학대사홍융탑(보물 제388호)과
그 앞의 쌍사자 석등. 탑 뒤로 무학대사의 스승인 나옹선사와 지공대사의 부도가 세워져 있다.
이어 본격적으로 불교에 대한 탄압에 앞장섰던 태종 때인 1405년(태종 5) 9월에 무학이 입적하자 그의 유골을 부도탑에 안치시켰다. 그리고 1410년(태종 10)에는 태종은 무학에게 「묘엄존자」(妙嚴尊者)라는 시호(諡號)를 내리고, 문신 변계량(卞季良)에게 명하여 비명(碑銘)을 짓도록 했다. 이것은 태조의 뜻을 받은 선왕(先王) 정종의 요청을 태종이 받아들인 것이다. 당시에는 신진 사류인 유생들은 불교 사원전이나 노비의 축소는 물론이거니와 불교 자체를 배척하던 분위기가 팽배하던 때였다. 왕사였던 무학의 탑을 파괴하고 유골을 흩어버리라고 주장하며, 심지어는 무학에게 왕사로서 내렸던 법호까지 철폐를 왕에게 요구할 정도였다.
이러한 어려움을 딛고서 무학의 부도와 탑은 약 400년을 견뎌오다 한 차례 수난을 당하기도 했다. 조선 후반의 순조(純祖) 때인 1821년(순조 21)에 유생 이응준(李應竣)이라는 자가 이곳이 명당이라고 하여 자신의 아버지 묘를 조성하기 위해 탑을 무너뜨려 땅에 묻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를 보고받은 순조는 조선을 개국한 태조와 관련된 일이라며 경기관찰사에게 복원하라고 명하였다. 이에 지공선사의 비는 문정공(文靖公) 이색(李穡)의 후손인 목사 의현(義玄)이 다시 썼으나 다행히 무학의 비는 크게 훼손을 당하지 않아 전의 각자(刻字)인 공부(孔俯)의 글씨를 모방하여 새기도록 하였다. 비문에 추가된 기문은 김이교(金履喬)가 짓고 글씨는 김용(金鏞)이 새겼다. 1828년(순조 28) 다시 세워진 이 탑은 총 높이 340㎝, 높은 사각받침 위에 높이 223㎝, 폭 28.5㎝의 비신(碑身)의 크기로 오늘날 문화재로 그 가치를 인정받아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51호로 지정돼 있다.
▲ 회암사의 오른쪽 능선에 있는 무학대사비의 전경. 총 높이 340㎝.
오른쪽은 1410년 처음 세워진 비석에 쓰였던 사각 받침과 그 위에 연꽃잎 형태의 지붕이며,
그 뒤에는 무학대사홍융탑과 쌍사자 석등이 위치해 있다.
아무튼 회암사에 무학의 부도와 탑이 세워진 것은 큰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다. 무학은 스스로 지공대사와 나옹선사의 법통을 계승한 제자이자, 이들의 가르침을 조선으로 전한 교두보라고 자처했다. 비록 무학이 나옹의 입적을 전후해 나옹 문도들로부터 홀대를 받은 바 있지만 조선 초에 왕사로 임명된 후 회암사에 주석하면서 지공대사와 나옹선사의 유지를 이어받아 조선으로 전해준 명실상부한 계승자로서의 위치를 확고하게 다질 수 있었다. 따라서 이러한 무학의 의중을 파악한 태조가 무학에게 해준 마지막 선물이 바로 회암사 부도였으며, 이로써 고려 말 조선 초 「지공-나옹-무학 3대 화상(和尙)」이라는 이름을 역사에 올리기에 이르렀다.
바. 함흥차사
회암사에 행궁(行宮)을 마련한 후 무학과 함께 지내던 태조는 돌연 함흥으로 발길을 돌렸다. 후대에 함흥차사(咸興差使)라는 설화가 전해지는 계기가 된 사건이다. 조선 후기 영조 때 실학자 이중환(李重煥)이 쓴 「택리지(擇里志)」에는 이 함흥차사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태조께서 크게 노하여 정종에게 왕위를 물려준 다음, 가까운 신하를 거느리고 함흥으로 가버렸다. 그 후 오래지 않아 정종이 태종에게 왕위를 양위하였다.
태종이 왕위에 오른 뒤에 태조에게 궁으로 돌아오기를 청하는 사신을 보내면 태조는 사신이 오는 대로 모조리 베어 죽였다. 이러기를 무릇 10년이나 되니 임금이 걱정하였다. 그리하여 태조가 세력을 잡기 전 마을의 친구였던 박순(朴淳)을 사신으로 삼아 함흥에 보냈다.
박순은 먼저 새끼 달린 암말을 구해 가지고 가서 망아지는 태조가 있는 궁문과 마주 보이는 마을 어귀에 매어두고 어미 말만 타고 갔다. 궁문 밖에 이르러서는 말을 매놓은 다음 들어가 태조를 뵈었다. 궁문은 그리 깊숙하지 않았다. 그러는 동안에 망아지는 어미 말을 바라보면서 울부짖었고, 어미 말도 또한 뛰면서 길게 소리쳐서 매우 시끄러웠다. 태조가 괴이하게 여겨서 물었다. 박순이 따라서 아뢰었다.
“신이 새끼 딸린 어미 말을 타고 오다가 망아지를 마을에다 매어놓았더니, 망아지는 어미 말을 향해 울부짖고, 어미 말은 새끼를 사랑하여 저렇게 울고 있습니다. 지각없는 동물도 저와 같은데 지극하신 자애를 가지신 성상께서 어찌 주상의 심정을 생각지 않으십니까.”
태조는 감동하여 한참 있다가 돌아가기를 허락하였다. 그리고 덧붙이기를 “너는 내일 새벽닭이 울기 전에 이곳을 떠나서 오전 중으로 빨리 영흥의 용흥강을 지나도록 하여라. 그렇지 않으면 그대는 죽음을 면치 못하리라.”하였다. 박순은 과연 그날 밤에 말을 달려 되돌아갔다.
태조가 여러 번이나 사자를 베어 죽였으므로 태조를 모신 여러 관원과 조정의 여러 신하들은 서로 사이가 좋지 않았다.
이튿날 아침에 여러 관원이 박순을 베어 죽이기를 청하였지만 태조는 허락하지 않았다. 그래도 여러 차례 고집하므로 태조는 박순이 이미 영흥을 지나갔으리라 짐작하고 허락하면서, “만약에 용흥강을 지났거든 죽이지 말고 돌아오라.”고 하였다.
사자가 말을 빨리 달려 강가에 도착하니 박순이 방금 배에 타는 참이었다. 사자는 박순을 뱃전에 끌어내어 베어 죽였다. 박순은 형(刑)을 받을 때 사자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신은 비록 죽으나 성상께서는 식언(食言)하시지 말기를 원합니다.”태조는 그의 뜻을 불쌍하게 여겨서 곧 서울로 돌아간다는 명을 내렸다.
태종은 이를 의리로 여겨서 박순의 충성을 정표(旌表)하고 그의 자손을 녹용(錄用)하였다.
이 함흥차사 이야기에서는 박순(朴淳)이 태조의 부하에 의해 죽임을 당했으며, 그의 설득에 마음을 바꾼 태조가 다시 한양으로 돌아간 것으로 전해진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실제와는 거리가 멀다.
당시 함흥 일대에서는 「조사의(趙思義)의 난」이라는 역모사건이 발생했다. 조사의는 신덕왕후 강씨의 친척으로 1402년(태종 2)에 신덕왕후와 왕세자 방석(芳碩)의 원수를 갚고, 태조에게 충성을 바친다는 명분을 내걸고 난을 일으켰다. 그 배후에는 함흥에 여전히 뿌리 깊은 지지기반을 갖고 있던 태조가 있었다.
그런데 함흥차사에서 나오는 박순은 사실 「조사의의 난」을 수습하기 위해 함흥으로 갔다가 반란세력에 의해 살해당한 것이었다. 이 반란세력은 한양으로 진격하던 도중에 관군에게 격파당하고 만다.
하지만 실록에는 이 「조사의의 난」과 태조의 환궁이 별개의 사건처럼 짧게 기록하고 있다.
태상왕이 역마를 타고 함주(咸州)로 향하였다. 임금이 왕사 무학을 태상왕의 행재소에 보내었으니, 무학은 태상왕에게 공경하고 믿는 자이기 때문에, 주상의 뜻을 상달하여 속히 환가(還駕)하기를 청하도록 하였다.
태조가 「조사의의 난」을 지지 또는 주도했다고 공식적으로 언급할 경우에는 태조의 정통성이 크게 흔들릴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이 난이 실패로 돌아간 직후 함흥에 머물던 태조를 모시고 다시 한양으로 돌아온 이는 무학이었다. 태조의 신임이 매우 두텁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태종의 요청을 받아서였다. 이때가 1402년(태종 3) 11월이었다. 함흥에서 돌아온 태상왕(太上王)은 이후 거의 연금이나 다름없는 상태가 되었고, 무학은 회암사로 돌아갔다.
사. 입적
함흥에서 회암사로 돌아온 이듬해인 1403년(태종 4) 1월, 무학은 모든 직책을 내려놓고 금강산으로 들어갔다. 아마도 죽음을 예감하고서 마지막 시간을 보내기 위해서였으리라. 진불암(眞佛庵)에 머물던 무학은 1405년(태종 5)에 옮겨 갔다가 그해 9월 11일, 이곳에서 입적했다.
무학의 입적 소식이 전해지자 태조는 태종에게 청하여 시호(諡號)를 내리고, 생전에 미리 만들어 놓은 회암사 부도에 비명을 새겨 넣게 하였다. 무학의 비명인 「묘엄존자탑명(妙嚴尊者塔銘)」은 당시 최고 문필가였던 예문관제학(藝文館提學) 변계량(卞季良)이 썼다. 비명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닦고 닦아 우뚝하신 스님의 도덕
평범 인생 범부(凡夫)들은 알 수가 없네.
평산처림(平山處林) 법(法)을 이은 선각(禪覺, 懶翁禪師의 시호)의 적손(嫡孫)
조선국을 개국(開國)하신 태조(太祖)의 스승.
스님께선 평상시의 모습 그대로
천진난만한 아이처럼 꾸밈이 없네.
눈이 푸른 종사(宗師) 만나 법(法)을 나눌 땐
삼엄하게 활과 칼이 버팀과 같네.
평생 동안 소지품은 삼의일발(三衣一鉢)뿐
온화하고 겸손함은 상불경보살(尙不輕菩薩).
존중(尊重)함은 본체만체 돌보지 않고
마치 본래부터 타고나신 그 천성(天性).
가나오나 어딜 가든 모두가 내 집
선지식(善知識)이 있는 곳엔 원근(遠近)을 불문(不問).
이 세상에 태어날 때 불수(佛壽)를 받아
세속 나이 79세요 법랍(法臘)은 61.
태어날 땐 어디에서 떠나 왔는가
아침 해가 떠오르는 태몽(胎夢)을 꿨고.
돌아갈 땐 어딜 향해 가시었는가.
공중(空中)의 불정연화(佛頂蓮花)에 서서 계시다.
전국 곳곳 문도들이 힘을 합하여
조림대사(祖琳大師) 행장(行狀) 모아 주청(奏請)하였네.
천지지간(天地之間) 만물(萬物) 중에 굳은 것으론
돌보다 더 오래감은 보지 못했네.
곱게 갈은 비석돌에 비문(碑文)을 새겨
미래제(未來際)가 다하도록 영원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