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거창유씨(居昌劉氏)를 본관으로 숙종 시대의 명의(名醫)유이태(劉以泰, 劉爾泰)
유이태(劉以泰, 劉爾泰) 약력
역사(歷史)는 영웅(英雄)과 權力을 가지고 있는 자(者) 그리고 가진 자(者)의 위주로 기술(記述)되어 왔었다. 영웅도 아니며, 힘이 없는 자(者) 그리고 가진 것이 없는 자(者)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절대권력(絶對權力)이 존재하였던 시대(時代) 일인지하만인지상(一人之下萬人之上) 자리인 영의정(領議政)에 있었던 분들도 그분들이 세상을 떠난 후 수 십년이 흐르면 세인(世人)들의 기억에 사라지고 만다.
신연당(新淵堂) 유이태(劉以泰, 劉爾泰) 선생께서는 권력(權力), 힘과 가진 것도 없었다. 그 분이 가진 것은 부모를 공경하는 효(孝), 나라를 위하는 충(忠), 형제를 위하는 우애(友愛), 神技에 가까운 의술(醫術)과 귀천(貴賤), 노소(老少), 親疏(친소), 남녀(男女) 그리고 민관(民官)을 구분하지 않은 고귀한 인품(人品) 밖에 없었다.
또한, 자신의 안위 보다는 가족 위하였고, 가족 안위 보다는 이웃을 위하였으며, 오직 헐벗고, 병마(病魔)에 고생하는 수많은 민초(民草)들을 치료하기 위하여 혼신의 힘을 다하신 新淵堂께서는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고 있다. 만일 新淵堂께서 부귀(富貴)와 권력(權力)을 탐하였으면 과연 지금까지 그분의 고귀(高貴)한 人品이 구전(口傳)으로 수백년을 전해져 왔을까 반문해 본다.
그 답변은 1934년 목판본 《마진편(痲疹篇)》을 펴낸 진주 회춘헌 약방 박주헌 선생이 쓴 《마진편(痲疹篇)》 발간 서문 “천민이나 아이들까지도 아직도 그의 명성을 말하고 있으니, 당시 선생의 넓은 덕망(德望)과 의술(醫術)을 상상할 수 있다.”
또 다른 저서 실험단방(實驗單方) 서문 "내가 평상시(평일)에 잡병에 대해서 경험한 것과 얻어들은 단방을 수시로 기록한 책으로 갖추어서 뒷날의 구명 치료의 방도로 하니 비록 의가전서와 같이 상세하지는 않으나 사람이 살아가는 데 날로 쓰이는 일에 만의 하나라도 도움이 될 가 한다.
(余觀人之一生 無病者盖鮮矣 然使病者 能知其調治之方 則必不至損傷之患 可不愼歟 余利平日 雜病之經驗 所得聞之單方 隨錄於一冊 以備來後救療之方 雖非醫家全書之祥 亦陽暮看下澣 麟西 劉爾泰)" 에 잘 나타나 있다.
신연당『新淵堂』은 조선 정조(正祖) 때의 명의(名醫)가 아니고 숙종 시대의 명의(名醫)로서 숙종 어의(御醫)를 지낸 것이 의약동참선생안《(議藥同參廳先生案 : 조선시대 의약동참 어의(御醫) 명부, 소장처 : 요령성 도서관)》에 나타나 있다.
조선왕조실록 숙종 39년(계사년) 12 월 16일에 『新淵堂』이 “전주에서 칭병하고 내의원에 도착하지 아니했다.”고 하여 벌을 주라는 내용이 언급되어 있다. 많은 분들이 이 내용만을 읽고 한양에 가지 않은 것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나 『新淵堂』은 한양에 빨리 도착하기 위하여 급히 가다가 다처서 숙종이 요구하는 기일에 도착하지 못했기에 때문에 벌을 주라는 내용이 숙종실록에 기록된 것 이다. 『新淵堂』은 한양에 도착하여 도수환(導水丸)이란 처방으로 숙종의 병을 고친 내용이 『新淵堂』 문집에 참봉 정중원이 쓴 글에 나타나 있다. 그 밖에 친구 분들이 쓴 글(天眼(천안)을 뵈웠다)이 문집에 수록되어 있다.
숙종실록에도 숙종이 도수환이란 처방으로 병이 완쾌되었다는 기록 《숙종실록 055 40/05/03(계묘) / 임금의 환후가 심해 도수환을 올릴 것을 명하다》임금의 환후가 더하여 약방에서 입진하였다. 유천군(儒川君) 이정(李濎)이 홀로 도수환(導水丸)을 진복(進服)해야 한다는 의논을 주장하여 밖에서 제조(提調)와 힘써 다투고, 임금 앞에 나와서도 또 다투었다. 여러 어의(御醫)들이 비로소 모두 시험삼아 복용해도 무방(無妨)하다고 하니, 오늘부터 도수환을 올리라고 명하였다. 이 나와 있다.
『新淵堂』에 대해서 대부분 산부인과에 조예가 깊은 분으로만 이야기하고 있다.
『新淵堂』의 다른 저서 《실험단방과》, 《인서문견록》에 나타나 있드시 산부인과 뿐만 아니라 홍역, 침, 내과, 소아병, 종기, 독약, 나병 등, 여러 분야에 조예가 깊다. 침술 도구는 1940년대 까지 『新淵堂』 종손에게 전하여 왔었고, 침술의 대가로 알려져 왔었다.
의술 공부는 스스로 독학을 하여 터득한 의술임을 『新淵堂』의 저서 마진편 서문에 기록되어 있다.
『新淵堂』과 절친한 친구인 정중원(鄭重元 參奉)이 쓴 글 어릴 적에 미진이 있었던 연유로 팔을 꺾어 의사가 되리라고 결심하였다. 寶書를 한부 품에 안고 낮에는 읽고 밤에는 거듭 생각하여 삼년 만에 의술이 통하여 軒?( 헌원씨와 기백--> 의학, 의술)를 엿볼 수 있었다.
경험하여 마음으로 깨치는 것을 귀하게 여겼고 전수는 외부로부터 배운 것이 아니었다. 비로소 여항에서 시험하게 되었고 마침내 사방에서 알게 되어 倉公 (한나라의 명의. 성은 淳于 , 이름은 . 太倉의 우두머리였으므로 창공이라 함)의 문 앞에 운집하는 병자가 어찌 그렇게 많을 수 있는가. 들어서면 집안에 넘쳐나고 나서면 말이 먼지를 일으키며 달려온다. 적은 글이 전폭에 쌓이고 차례대로 늘어선 줄은 늘어놓기에도 번거롭다. 말소리가 이리저리 오가고 간절하고 급하게 부탁과 호소를 다툰다. 어지럽기가 사무가 바쁜 읍의 정청을 방불하며 가득찬 뜰에는 보내는 말이 많도다.
눈을 굴리며 빈번한 명령을 주목하고 귀를 기울이며 조그마한 소리도 놓치지 않는다. 명쾌하기가 포정(유명한 요리사. 소고기를 바르데 지극히 교묘하였다) 이 고기를 벨 때 긍경( 뼈에 붙은 살과 뼈와 살이 이어진 부분)에도 칼이 머뭇거리지 않은 것과 같았다. 평소 소원했던 이도 물리치지 않았으니 어찌 비천한 자라고 그냥 두었겠는가. 사람마다 물어오면 응하고 하나하나 증세에 따라 처방하였다.
에 나타나 있다. 또한 집안에 구전되는 이야기 또한 혼자서 의술을 배웠다고 하였다.
『新淵堂』 家門에서는 醫術을 家業이나, 공부한 사람이 없다고 전해져 왔었다.
따라서 『新淵堂』 當代에서 공부하여 醫術 活動을 편 것이다.
ꋮ 性 名 :유이태(劉以泰, 劉爾泰)
신연당께서는 그 이름을 가문에서는 劉以泰, 의서에는 劉爾泰로 사용하였다.
∙ 劉以泰 : 가문, 지인, 향리사람들이 칭하던 이름으로 족보, 문집, 孝行狀, 呈營狀, 조선왕조실록, 의약동참선생안 등에 실려 있다.
∙ 劉爾泰 : 《마진편:》, 《실험단방》, 《인서문견록》 등 醫書에 사용되었다.
ꋮ 號 : 사용하셨던 號는 3개가 알려져 있다.
신연당(新淵堂) : 산청군 생초면 신연의 신연 지명에서 따 온 것이 新淵堂이다.
원학산인(猿鶴山人: 猿鶴洞은 거창군 위천면에 있는 지명이다.): 猿鶴山人은 猿鶴洞에서 따온 호가 이다.
∙ 新淵堂 : 스스로 지은 호로서 家門, 인척, 친구, 知人과 향리의 사람들이 부를 때 사용되었다.
∙ 猿鶴山人 : 醫書인 저서 《마진편》에 사용하였다.
∙ 麟西 : 醫書인 저서 《실험단방》, 《인서문견록》에 사용하였다.
ꋮ 字 : 백원(伯源)
ꋮ 本貫 : 거창유씨(居昌劉氏)
ꋮ 生 沒 年: 1652년(孝宗 3년 壬辰) ~ 1715년(肅宗 41년 乙未) 二月 二十七日
ꋮ 出 生 地 : 慶南 居昌郡 渭川面 司馬里
ꋮ 거주(활동)지 : 경남 산청군 생초면 신연리
ꋮ 관 직 : ∙ 숙종 어의(御醫) ∙ 경기도 안산 군수
ꋮ 품 계 : 숭록대부(崇祿大夫) (종1품)
ꋮ 묘 소 : 경남 산청군 생초면 갈전리 산35-1 번지 (명주동)
ꋮ 유 적 지 : 신연당과 관련된 유적지는 생가, 활동지, 서실, 약수터, 낚시터, 침바위 그러나, 서실은 구전과 문헌에만 나타나 있다.
1) 서실 : 가문과 생초면민 그리고 인근의 주민들은 신연당이 지은 서실이 있었다는 이야기는 있었으나, 실제로 있었는지는 확인되지 못했고, 그 위치 또한 어디인지 전해지지 않고 있었다. 신연당 문집을 본바 문장은 찾을 수 있었다.
『오공께서 만년에 棲息之計를 세우시고 서실을 創營하신 것이 이미 일년이 넘었는데 올 봄에 두창을 피하는 장소로 삼으셨다. 한 마을이 일제히 일어나 얼마 안되어 완성되니 오공께서는 서실을 얻게 된 것을 기뻐하셔서 여러 차례 내왕하셨다.』 글 朴季亮 박계량(字 : 汝明, 1686 ~ 1727) 반남박씨 족보 1981년 9권 25P
2) 약수터 : 신연당이 의술활동을 편 생초면 주변에는 오래전부터 산청, 함양, 진주 등의 사람들에게 알려진 유명한 2개의 약수터(오부면 오전리 황새봉 목 부위 아래에 있는 약수터와 금서면 왕산 중턱에 있는 약수터)가 있다.
- 찬샘이( 西出東流水 서쪽에서 물이 나와 동쪽으로 흐르는 물) (위치:열두모레이, : 산청군 오부면 오전리 산1번지)
- 장군수 (고증 : 姜戊成, 1918 ~ : 경남 산청군 금서면 화계리 652)
(왕산 약수터, 위치:왕산 중턱, 산청군 금서면 화계리 산20번지) 금서면 화계리 지방의 구전에 따르면 유이태 선생이 약을 달이기 위하여 장군에 약수를 담아 날랐다하여 ‘장군수 라고 부른다. 장군수 약수터는 유이태 선생의 저서 《마진편》의 通治에 나오는 산청현의 절 옆에 있는 샘으로 추정하여 볼 수 있다.
《마진편》 通治:『山淸縣有一寺刹壬申冬闍梨患珍皆飮井水渴則復飮而無一人見敗者』
山淸縣에 절 하나가 있는데 임신년 (壬申年 : 1682년) 겨울에 중들이 麻疹(홍역)을 앓게 되었다. 그들은 모두 샘물을 마셨으며 갈증이 나면 또 마셨는데 실패한 사람이 1명도 없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제31편 산음현(山陰縣) 佛宇에 지곡사(智谷사 : 고려 예부상서 손몽주가 지은 중 몽월 및 진관의 두비가 있다.)와 왕대암(王臺菴 :『王臺菴 在王山』) 등이 있다. 금서, 유림, 휴천, 생초, 산청읍 등 모든 사람이 이곳을 王山寺로 오랜동안 불러 왔다. 왕대암 건물은 전해지지 않고 있다. 현재는 절터와 종암당 義雲 대사, 운암당 봉안대사의 부도가 남아 있다.
3)낚시터 (고증 : 민영채(192? ~ 2002 : 경남 산청군 생초면 신연리 송정) : 필소(위치 : 산청군 생초면 월곡리 압수):신연당께서 말년에 낚시를 즐겼다고 전해지는 곳이다.
4)침바위 (위치 : 거창군 위천면 서마리 산 번지) 고증 : 유경연(거창군 위천면 장기리)
어느 날 유이태 의원이 집에서 쉬고 있는데 커다란 뱀이 유이태 의원을 찾아와 병을 고쳐달라고 하여 뱀의 입을 벌려보니 뱀의 이빨 사이에 사람의 비녀가 꽂혀 있었다. 뱀의 이빨 사이의 비녀를 빼어주고 치료하여주니 뱀이 유이태 의원에게 병을 고쳐준데 대한 報恩코져 어느 날 유이태 의원을 방문하여 9개의 침을 전해주었다는 전설이 전해지는 바위이다. 이 침(針)들을 蛇針이라고 불렀으며. 이 바위를 위천 사람들은 침바우로 부른다.
ꋮ 가 계
고조부(高祖父) 의사공(義士公) 유명개(劉名盖 : 1548~1597) 동국여지승람, 안의읍지 및 존재실기 등재
정유재란시 안음座首로서 경남 안의 황석산성의 군량미 제공,
노비 백여명 제공하였으며, 안음 현감 존재 곽준, 전 함양순수 조종도와 순절한 의병장
조부(祖父) 유유도(劉有道 : 1600 ~ 1682) : 통정대부, 효자(孝子)로써 동국여지승람 및 안의읍지 등재
부친(父親) 유윤기 : 통정대부
외증조부(外曾祖父) 이의립(1572 ~ 1642, 강양이씨) :정유재란시 의병장, 行초계군수, 行경상좌도 수군절도사, 영사원종공신(寧社功臣), 가선대부 증병조판서,
외조부(外祖父) 이광훈: 조산대부 봉상시 판관
처조부(妻祖父) 조곤수(창령조씨) :단양군수 ,
장 인(妻父) 조익휘 : 성현도찰방
ꋮ 저 서 : 많은 의서가 전해져 왔으나 1940년대 초 종손집 화재로 인하여 의서 대부분 소실됨
1) 마진편(麻疹篇 : 홍역 전문치료서, 목판본)
신연당은 朝鮮시대 모든 의원들이 의학 모든 분야에 능통 하였듯이 모든 의학 분야에서 神技에 가까운 의술을 폈다.
숙종 시대에 해마다 한번씩 도성이나 시골에 소아병(마진)으로 인하여 많은 사람들이 죽는 것을 본 후 개탄하여 그 자신이 의원으로서 40여년 동안의 경험담을 책으로 만들어 가문과 향리의 이웃들에게 도움이 되고자 저술한 의서가 《痲疹篇》이다.
2) 《실험단방(實驗單方)》 : 종합의서, 필사본
《실험단방》 서문
『余觀人之一生無病者盖鮮矣然使病者能知其調治之方則必不至損傷之患可不愼歟余利 平日雜病之經驗所得聞之單方隨錄於一冊以備來後救療之方雖非醫家全書之祥 亦陽暮看下澣 麟西 劉爾泰』
『내가 평상시(평일)에 잡병에 대해서 경험한 것과 얻어들은 단방을 수시로 기록한 책으로 갖추어서 뒷날의 구명 치료의 방도로 하니 비록 의가전서와 같이 상세하지는 않으나 사람이 살아가는 데 날로 쓰이는 일에 만의 하나라도 도움이 될 가 한다. 인서 유이태』
3) 《인서문견록(麟西聞見錄)》 : 치료서, 필사본
《인서문견록》의 필사본 원본은 일본 행우서옥(杏雨書屋) 일본 대판시 전천구 13本町 2-17-85에서 소장하고 있다.
일제시대 일본인 의사가 《인서문견록》을 수집하여 일본에 가지고 갔다고 한다. 일본인 의사는 죽기 전에 《인서문견록》을 행우서옥(杏雨書屋) 기증하였다고 한다. 《인서문견록》은 海外影印本으로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ꋮ 의술활동지역 : 산청을 중심으로 경상좌우도, 남원, 무주, 장계, 전주 지역 및 한양
ꋮ 역사적 업적 : 조선왕조의 소아병 사망률을 낮추는데 의의가 있음.
ꋮ 의술 공부 ∙ 의술을 다른 사람으로부터 전수를 받지 않고 보서(寶書)를 혼자서 공부하여 의술을 통달한 유의(儒醫)
ꋮ 의술 행적 :
∙ 자신의 안위보다는 환자의 안위를 먼저 생각하면서 치료를 하였다.
∙ 관직(숙종 어의, 안산군수)을 사양하고 산청에서 오직 민초를 치료함
∙ 자연의 이치에서 모든 약을 처방하였음
∙ 출생년도(出生年度)에 따라 처방
∙ 심리 치료 시도
∙ 일세를 흔들 정도의 신기에 가까운 의술
∙ 300년 전부터 현재까지도 치료에 관하여 구전되어 오고 있음.
∙ 중국의 명의 편작에 비유되었음.
∙ 가는 곳 마다 많은 사람들이 구름과 같이 모였음.
∙ 귀천을 구분하지 않고 병에 걸려거나 증세를 적어서 오는 사람을 치료
∙ 친소(親疎)에 관계없이 치료함.
∙ 민관(民官)을 구분하지 않고 치료하였음.
∙ 남녀(男女)노소(老小)을 구분하지 않고 치료하였음.
∙ 나병 치료를 시도하였음
∙ 치료 후 돈을 받지 않은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ꋮ 역사적 의의 : 동의보감에서 천연두와 홍역에 대한 이해가 충분치 못하여 박진희의 두창경험방(천연두)과 같은 책들이 출간되었다. 이처럼 홍역에 대한 새로운 이해들이 조선후기에 나오기 시작했다. 유이태의 《마진편》이 그러한 서적이다. 특히 숙종대 후반 이후 홍역의 발생이 급증하기 시작하면서 오히려 천연두보다는 홍역이 더욱 문제가 될 정도가 되었다. 홍역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기 때문이다. 홍역을 치룬다는 이야기 등이 아마도 조선후기에 생긴 말들일 것이라고 추측한다. 유이태의 《마진편》 의의는 홍역에 대한 새로운 처방들을 집중적으로 소개하였다는 점이다 글쓴이 : 김호 박사 (서울대 규장각 특별연구원).
ꋮ 일상 행적 :
∙ 자신과 가족보다는 제족(이웃)이나 타인을 위함
∙ 선행, 효자, 청빈한 생활 영위
∙ 부귀영화(富貴榮華)를 탐하지 아니했음
ꋮ 孝行 및 善行
《마진편》 서문 『내가 일찍이 곡례(曲禮) 의 여러편(篇)을 읽다가, 부모를 섬기는 사람은 의학을 몰라서는 안된다는 구절에 이르러 책을 덮고 탄식하였다. 이에 분연히 뜻을 둔지 40여년이 흘렀다.』을 보면 부모를 섬기기 위하여 의학을 혼자서 공부했다는 것이다.
ꋮ 후 학 :
말년에 서실을 지어서 후학을 가르쳤다고 되어 있으나, 제자들이 누구인지는 전해지지는 아니했다. 신연당 문집에 제자로 추정되는 두 사람의 이름이 나온다.
『吾公晩有棲息之計創營書室己有年餘』
∙ 朴季亮 박계량(字 : 汝明, 1686 ~ 1727) 반남박씨 족보 1981년 9권 25P
『오공께서 만년에 棲息之計를 세우시고 書室을 創營하신 것이 이미 일년이 넘었는데』
門下樞衣問幾年
優恩厚澤一身偏
平生孝睦爭推譽
擧世踈親並不捐
曉月惟餘人共訝
春風吹盡榻空懸
微誠愧乏涓埃報
獨對孤蘭呌彼天
∙ 權德中
『門下에서 옷깃을 여미고 배우기를 몇 년이었나
도타운 恩澤이 이 몸에 치우쳤네
평생 효도하고 화목하니 다투어 추천하여 칭송했고
세상의 친한 이와 소원한 이 모두 버리지 않았네
밝은 달이 홀로 남아 사람들과 함께 칭송하네
봄바람이 부는데 의자는 홀로 걸려있네
진실로 조금도 보답하지 못함을 부끄럽게 여기며
홀로 쓸쓸한 난간에 기대어 저 하늘에 절규하노라』
ꋮ 구전 이야기
-산신령과 의서
-태아와 탯줄
-소년과 지네
-新淵堂과 침술 내기
-신연당과 어린아이
-농군과 뱀독
-X-레이 풀
-낙태기
-처녀와 여우
-新淵堂과 사침(蛇針)
-출산 촉진제와 新淵堂 아들
-효성과 劉以泰湯
-4대 독자와 3대 과부
-낙반비배토
-孝道는 名醫를 凌駕한다.
-찬샘이와 심리치료
-유이태와 여우 처녀
-출천지효자(出天地孝子)
한국구비문학대계에 실려 있는 명의(名醫) 유이태(劉以泰) 구전이야기
- 경북 경주 월성군 외동면 입실 경로당, 1979.4.5, 박동준. 남. 73. 유이태탕
- 북 경주 월성군 현곡면 가정 1리 가정, 1979.2.24, 김원락, 남 61. 명의(名醫) 유이태
- 경북 성주군 대가면 설화 옥성 1동 여수동, 1979.4.19, 공덕진, 남 “72. 명의(名醫) 유의태
- 경북 경주 월성군 현곡면 가정 1리 가정, 1979.2.24.,이석춘, 남 79. 명의 유이태
- 경남 거창군 위천면 남산리 금곡, 1980.11.21. 유윤봉, 남 “72. 신연당 유의태
- 경남 거창군 남상면 17 무촌리 지하, 1980. 12. 1. 이민호, 남.55. 명의(名醫) 유이태
- 경남 의령읍 중동, 1982.1.9. 남길우, 남 .67. 명의 유희태 (1)
- 경남 의령읍 중동, 1982.1.9. 남길우, 남 .67. 명의 유희태 (2)
- 경남 의령읍 중동, 1982.1.9. 송판용, 남 76 명의 유희태 (3)
- 경남 의령군 칠곡면 외조리 중촌, 1982.1.30, 전용재, 남 64 명의(名醫) 유의태와 공주의 이상한 병
- 경남 진양군 금곡면 검암리 차현, 1980.8.9. 류성만, 남 • 72. 명의 유희태
- 경남 진양군 미천면 오방리 상촌, 1980.8.4. 박헌장, 남 ∙ 69. 유명한 의원
- 경남 하동군 악양면 정서리 원정저, 1984.7.20. 이종기, 남 ∙ 77. 명의 유이태
- 경남 의령군 칠곡면 외조리 중촌, 1982.1.30. 전용재, 남 ∙ 64. 무식장이가 고친 난치병
- 경남 의령군 칠곡면 설화 외조리 중촌, 1982.1.30., 전용재, 남 ∙ 64. 배밑(航底)의 흙으로 고친 난치병
- 전북 군산시 군산역앞, 1982.7.31. 이창섭, 남 ∙ 70. 소문난 의원
- 전북 완주군 운주면 장선리 중촌 한약방, 1980.1.31. 이순근, 남 ∙ 79. 중국 천자의 병을 고친 조선 의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