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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남성과 결혼한 식민지 조선여성, 나의 외할머니
[페미니즘으로 보는 식민/분단/이주] 조선인이자 일본인 김연순의 여정(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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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즈끼 스미에 2020-01-15
※ 일다는 식민-전쟁-분단의 역사와 구조를 여성주의 시각으로 재구성하는 기획기사를 연재합니다. 다양한 페미니스트 연구자들이 식민지배와 내전, 휴전으로 이어진 한국 현대사가 낳은 ‘여성의 이동’, 군 성폭력과 여성동원 등의 젠더 이슈를 제기하고, 사회구조와 여성 주체들 사이의 긴장을 드러내며 전쟁/분단/이주를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을 제공합니다. -편집자 주
“어제 할머니 꿈꿨어. 소녀였던 시절의 모습이었는데, 땋은 머리에 빨간 댕기를 달고 강가에서 재밌게 놀고 계셨어.”
외할머니의 유골 몇 조각을 청풍호수 근처 강으로 산골한 다음 날 아침, 엄마의 첫마디다. 외할머니 생가는 청풍호 바닥에 있다. 이나다 렌준(稲田連順)/김연순(金連順). 1913~2007년 향년 94세, 나의 외할머니. 조선인으로 태어나 일본인 외할아버지와 결혼한 그녀는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일본 국적자였다. 그 까닭은 무엇일까?
나의 석사 논문(『조선인/일본인 외할머니의 여정: 가족사를 통해 바라보는 일본과 코리아』 2018년, 성공회대학교 NGO대학원 비정부기구학전공)은 그 수수께끼 풀기로부터 시작되었다.
1. 식민지 조선에서 태어난 외할머니의 성장 과정
제적부를 보면 외할머니 가족은 아버지(김일룡)와 어머니(김단옥), 큰오빠, 작은오빠, 언니, 본인(연순), 거기에 큰오빠의 아내와 자녀, 작은오빠의 아내와 자녀, 그리고 딸(나의 어머니 진숙)이 가부장인 김일룡의 손자로 기재되어 있었다.
외할머니가 태어난 1913년의 조선은 이미 일본의 식민지였기에, 외할머니는 태어나면서부터 일본의 외지 호적에 기재되어 일본 국적을 가졌다. 증조부 김일룡은 농사를 지었던 것 같다. 증조모 김단옥은 읽고 쓸 줄 알아 동네 여성들에게 책을 읽어주었다고 하는데, 젊었을 때 증조부에게 납치당해서 결혼했다고 한다. 아마 약탈혼의 일종인 ‘보쌈’(사람을 보자기에 싸서 납치해 결혼하는 습속, 정식 결혼을 못 한 하층민이나 과부를 대상으로 행해졌거나, 양반가의 액땜을 위해서도 이용되었다는 설명이 있다. 두산백과 참조)으로 추정된다.
외할머니는 학교에 거의 다니지 못했는데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학교에 입학했지만, 수업 중 유희(춤을 췄다)를 한 것을 알게 된 아버지가 “여자가 사람들 앞에서 유희나 하고… 괘씸하다. 그런 것을 가르치는 학교에 다니게 둘 수 없다.”고 말했고, 그 한마디에 이후 외할머니는 학교에서 배울 수 없었다고 한다.
외할머니가 학령기였던 1920년 당시 조선인 남녀 아동의 보통학교 ‘완전한 불취학률’(학교에 입학하지 않음)은 90.9%로 남자는 85.2%, 여자는 96.9%이다. 이 시기는 여학생 불입학(완전 불취학)이 일반화돼 있으며, 설사 취학했더라도 ‘중도퇴학(부분 불취학)’이 대부분이었다. 김부자 도쿄외국어대학 교수(국제사회학)는 여성들의 생활사에서 그 요인을 다음과 같이 유형화하고 있다.(金富子. 『植民地期朝鮮の教育とジェンダー:不就学をめぐる権力関係』. 世織書房. 2005)
1) 가난 등 하층 계급에 속함: 계급 요인
2) 집안에 여성 교육에 대한 부정적인 젠더 규범이 강함: 젠더 요인
3) 결혼에 교육은 불필요하다는 유교적 여성관: 여성 요인
4) 총독부의 여성 교육 확충정책 이전에 학령기를 맞이했음: 민족 요인
5) 보통학교 이외의 교육기관의 취학을 2, 3의 이유로 반대했음: 젠더 요인
이 시대 식민지 조선의 많은 여성이 그랬듯 외할머니도 가부장제와 유교적 도덕 규범 속에서 소녀 시절을 보냈다. 어머니가 남긴 수기를 읽어보면, 외할머니는 당시 친척이 하는 요릿집에서 바느질 솜씨를 팔며 일손을 거들고 있었다. 조부모들은 그때쯤 만난 것 같다. (연구 과정에서, 나의 어머니가 외할아버지의 친자식이 아니라 외할머니가 할아버지를 알게 되기 전에 헤어진 조선인 남자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딸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즉, 외할머니는 당시 비혼모였다.)
2. 일본인 외할아버지와의 결혼
메이지 정부 관료의 집에서 태어난 외할아버지는 세 딸 이후에 그토록 바라던 아들이었다. 후계자로서 엄격하게 길러진 것에 대한 반항인 건지, 학생 시절 방탕하게 요시와라(유곽)에 틀어박힌 채 살았던 적도 있는 것 같다. 외할아버지가 “요시와라에서 다도와 꽃꽂이를 배웠다.”라고 말했던 것을 기억한다.
외할머니의 큰오빠가 조선전력에 근무하고 계셨는데, 외할아버지는 당시 그곳 과장이었다고 한다. 외할아버지가 외할머니의 큰오빠를 통해 외할머니 집에 하숙하게 된 것이 먼저인지, 기생집에서 알게 된 것이 먼저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학창시절 요시와라에 틀어박혔던 “전력”을 가진 외할아버지가 기생집에 드나든 것은 있을 수 있는 일이다.
두 사람의 결혼에 양쪽 가족들은 맹렬히 반대했다. 도쿄의 가족들은 “조선인과의 결혼은 허락할 수 없다. 어떤 형태로든 결혼을 한다면 의절이다”라며 반대했다. 친척 니토베 이나조(新渡戸稲造, 1862~1933, 일본의 교육자·사상가. 저서로 『Bushido: The Soul of Japan』이 있으며, 일본이 조선을 도와줄 필요가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조차 조선인에 대한 멸시감을 갖고 있던 시대다. 조선인에 대한 차별이 일반적이었던 당시, 하물며 상대는 아이를 동반한 싱글맘이다. 조부모의 결혼은 받아들여질 수 없었다. 외할아버지는 후자의 길을 택하고 이나다(稲田) 가문에서 의절당했다.
한편 이 시기(1937년경) 외할머니의 고향 충청도에서는 항일의병운동이 한창이었다고 한다. 일본인에 대한 반감도 강했으리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외할머니 증언에 따르면 “쪽발이에게 시집 보낼 수 없다!”며 증조할아버지가 격노하여 결혼 승낙을 받으러 찾아간 외할아버지의 머리를 담뱃대로 때렸다고 한다. 이마에 피를 흘리면서도 외할아버지는 꾹 참았다. 당시 식민지에서 일본인과 조선인의 사회적 위치를 생각하면, 조선인이 일본인을 다치게 하는 일은 큰일이었음에 틀림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견뎌낸 외할아버지의 결혼에 대한 결의가 예사롭지 않다.
장인의 허락을 받을 수 없음을 깨달은 외할아버지가 외할머니의 큰오빠를 회유하여 아군으로 끌어들인 것 같다. 외할머니의 큰오빠는 증조할아버지를 설득하려다 증조할아버지에게 맞았다고 한다. 간절히 원하고 끈질기게 설득한 끝에, 증조할아버지는 큰아들에게 “네 여동생을 살리든 죽이든 마음대로 해라”라고 말하며 뜻을 꺾으셨다고 한다. 가부장제가 강했던 시절 가장의 권위가 맏아들에게 넘어간 모습이라고도 보인다.
모진 반대를 이겨낸 조부모는 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리고 온천으로 신혼여행을 떠났다. 결혼사진 속 외할아버지는 턱시도 차림이고 외할머니는 거무스름한 한복을 입고 계신다. 친척들 얘기로는 일본인 외할아버지와 조선인 외할머니의 결혼이야기가 읍에서 화제가 되었다고 한다. 거기에는 일본인과 결혼하는 아이를 동반한 여성에 대한 호기심이 있었을 수도 있고, 일본인과의 결혼에 대한 반감 즉 반일감정도 뒤섞여 있었을 것이다.
결혼식 전후로 추정되는 무렵, 도쿄의 증조모로부터는 “조선인이라 적에 넣을 수 없다.”는 편지가 왔다고 한다. 조부모의 혼인 신고와 어머니의 입양 신고는 도쿄의 증조모가 세상을 떠나고(1937년) 4년 뒤인 1941년 7월 28일에 한 것으로 되어 있다. 약 4년간은 서류상으로는 내연 관계였다는 것이다. 이후 혼인 신고와 입양 신고를 통해 외할머니와 어머니는 외할아버지의 내지호적에 편입되었다. 이것이 조선인이었지만 평생 일본 국적이었던 할머니의 수수께끼의 답이다.
조부모가 혼인 신고를 낸 1941년의 ‘내선 결혼’ 통계 『조선 총독부 통계 연보』(격년판)를 보면, 일본인 남성과 조선인 여성의 혼인 건수는 조선 전체로는 71건, 조부모가 혼인 신고를 한 강원도에서는 3건이다. 그중 1쌍이 7월 28일에 한 나의 조부모의 혼인 신고일 가능성이 높다. 일본 남성과 조선 여성의 혼인 건수가 적은 것에 관해 최석영 국립극장 공연예술박물관 관장은 세 가지 이유를 들었다.(최석영, 『일제의 조선연구와 식민지적 지식생산』 2012년)
첫째, 당시 일본인들은 여권 없이도 조선으로 올 수 있었기 때문에 일본인 가족을 동반하여 오는 경우가 많았다.
둘째, 조선 여성이 일본인에게 가진 강한 거부감을 생각할 수 있다.
셋째, 조선에 거주하는 일본인들이 지배 의식을 가졌고, 조선총독부의 장려(‘내선일체’라는 미명하에 ‘내선결혼’을 추진하여 조선인과 일본인의 융화를 꾀하려고 했다)에도 불구하고, 조선인과의 ‘혼혈’을 기피하는 경향이 있었다고 생각된다.
이 밖에도 일본 남성과 결혼하려는 조선인 여성에 대한 조선 국내의 반발도 간과할 수 없는 요인 중 하나였다고 분석하고 있다.
일본인 외할아버지와 결혼하기 위해 외할머니에게 상당한 각오가 필요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결혼한 이유에 대해 생전 외할머니는 “할아버지에게 청혼을 받았기 때문”이라고만 하셨다. 예상되는 여러 장애보다 애정이 컸는지, 아니면 아이를 데리고 결혼하기 어려운 자신의 상황을 생각했을 때 경제력이 있는 일본 남자와의 결혼으로 계층상승을 도모하려 했는지, 두 가지 요인이 겹쳤는지 그 까닭을 이제는 확인할 길이 없다.
3. 민족과 젠더, 출신계층 차이에서 오는 괴로움
결혼한 조부모는 어머니를 증조부모에게 맡기고 1939년 10월경 시미즈구미(清水組, 현 시미즈 건설. 당시 일본 토목건설업계 5인방었던 대형 토목 건설회사) 하청 일을 하러 중국 톈진으로 떠났다. 그 후 외할아버지는 베이징에서 일본거류민단의 호적계(관청에서 호적에 관한 일을 맡아보던 부서) 관련된 일을 하다가, 이윽고 딸(어머니)도 중국에 불러 가족 3명의 생활이 시작되었다. 그 후 외할아버지가 일본군과 관계된 토목공사를 맡게 되며 장자커우, 네이멍구, 허베이성, 타이위안, 탕구 등 중국을 떠돌아다니는 생활이 시작되었다.
할아버지의 기세가 좋을 때는 중국인 가사도우미를 두었을 정도로 외할머니는 조선인이나 중국인보다 상위의 ‘일본인’으로서 우아한 생활을 했다. 그러나 외할아버지와의 결혼으로 신데렐라가 된 그녀에게 이러한 생활은 또 다른 의미에서 큰 대가를 요구했다. 외할아버지와의 결혼으로 들어간 일본인 사회에서 조선인에 대한 냉대와 차별에 시달리게 된 것이다. 거기에 일본인과 조선인, 중국인, 지배와 피지배, 침략자와 피침략자 사이의 복잡하고도 미묘한 긴장감이 있었음도 생각할 수 있다.
어머니가 남긴 수기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아빠의 친구 중, (아빠에게) 중국행을 권한 사람이 어느 날 여행 선물을 회사 사람과 아이들에게 각각 나누어 주었다. 나는 몰랐지만, 심한 차별 속에 어머니가 그때까지 여러모로 쌓였던 것들이 폭발했다고 해야 할까, 인내심이 한계에 달해 그 사람에게 이의를 제기한 것 같다. 상대도 안 되지만 끝내 화가 났던 엄마는 그 사람에게 손을 대고 말았고, 심한 말다툼 끝에 결국 아버지는 회사를 그만두게 되었다.” 경제적으로 불안정해진 생활 속에서 그들에게 스트레스가 쌓여 갔다. 부부 사이에 미묘한 응어리가 생기기 시작한 것 같다.
경제 문제와 민족 갈등, 거기에 더해 두 사람 사이의 출신계층 문제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식민지 조선의 주변부에서 가부장제와 유교적 도덕 관념에 묶여 학교에 가지 못했던 외할머니와, 도쿄의 대학 출신 엘리트였던 외할아버지의 문화적 소양에는 큰 차이가 있었다. 어머니 말씀에 따르면, 외할아버지가 읽고 쓸 줄 모르는 외할머니에게 글씨를 가르치려고 노력한 것 같은데, 외할머니가 한자는커녕 히라가나도 못 외워서 숟가락을 던져버렸다고 한다. 그래도 글씨를 못 쓰면 불편할 것 같아서 겨우 가타가나를 외운 것 같다. 생전 외할머니가 투표하러 가기 전 손바닥에 가타카나로 후보자 이름을 적었던 것을 기억한다.
내가 초등학생 때, 내가 읽던 책을 보고 외할머니가 “커버를 씌워 아껴라”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 말을 들은 외할아버지가 외할머니에게 “네가 말하지 않아도 얘는 그런 것쯤은 잘 알고 있다”며 질책하듯이 말한 적이 있다. 그 말을 들은 외할머니가 눈을 내리깔고 아무 말 없이 외로워하던 모습과 그 뭐라 할 수 없던 분위기를 기억한다. 나는 어린 마음에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 사이에 눈에 보이지 않는 큰 벽 같은 것을 느꼈고 매우 불편했다. 지금 생각하면 그것이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의 나고 자란 환경의 차이에서 오는 부부간의 위계였을지도 모른다.
두 사람의 출신계층 차이가 외할머니에게 큰 콤플렉스와 스트레스를 주었음을 상상할 수 있다. 외할아버지는 외할머니의 조선 요리를 즐겨 드시는 등 조선 문화에 대한 이해는 있었다고 생각하지만, 한편으로 자신이 자란 곳의 관습을 외할머니에게 주입하려 했던 것 같기도 하다. 서양식 스타일의 식습관이나 가족이 차려입고 다 같이 외출하는 등은 외할머니에게 새로운 세계의 즐거움이었던 동시에 민족적, 계급적 문화 충격과 혼란을 주었을 것이다. 자유주의자였던 외할아버지도 한계가 있었던 것 같다. 민족의 차이를 극복하고 맺어진 부부의 열정은 시간이 흐르면서 일상에서 반복되는 차이로 인해 조금씩 큰 스트레스로 바뀌어 간 것 같다.
이런 외할머니의 스트레스는 자식(어머니)에 대한 학대라는 형태로 나타났고, 근처에서 소문날 정도로 심했다. 10세 전후의 아이가 가장 믿고 의지할 모친에게 학대받았을 때의 아픔과 괴로움, 그리고 그것을 못 본 척하고 피하는 아버지에 대한 불신감, 이런 것들을 생각하면 당시 어머니가 얼마나 무력감과 고독감에 시달렸을지 짐작할 수 있다. 친구도 적고 의지할 친척도 없던 고독 속의 생활을 감내하며 길러진 어머니의 강인함과 고독감은 이후 그녀의 인생에 큰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그 후 외할아버지가 가출하며 모녀 둘만의 생활이 시작된다. 잠시 일본인 부부의 두부 가게에서 일하며 입에 풀칠을 했지만 생활고 탓인지 외할머니는 어머니를 데리고 고향 조선으로 돌아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외할아버지가 병에 걸렸다는 소식을 전하러 온 일본인의 간청에, 외할머니는 어머니를 데리고 다시 중국의 외할아버지 곁으로 간다. 일본 남성과의 결혼이 외할머니의 삶의 여정에서 첫 번째 결단이라고 하면, 가출한 남편을 찾으러 간 이때가 두 번째 결단이리라.
다시 일본군 관련 공사를 도급받은 외할아버지의 위세는 좋아지지만, 군과 함께 이동하는 것은 연합군의 공격 표적이 될 위험도 따랐다. 세 가족은 1943년 7월 29일 탕구에서 미군의 공습을 받았고 간신히 살아남는다. 1943년 8월 5일 영사의 권고로 세 사람은 외할머니의 고향인 조선 충북 제천으로 이주했다. (하편에서 계속)
[필자 소개: 쓰즈끼 스미에. 1952년생. 히로시마현 내에서 중학교 교사로 평화인권교육을 했다. 인권을 기초로 한 성교육의 내용으로 일본군 성노예제 문제를 다뤘다. 시민활동으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을 지원하는 활동(관부재판을 지원하는 후쿠야마 연락회 대표 등)을 해왔다. 2013년 연세대학교 어학당에서 본격적으로 한국말을 배우고 2016년 성공회대학 NGO대학원에 입학했다. 2019년부터 사회학부 박사과정에 재학 중. 요즘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이옥선 할머니의 생애사를 다룬 만화 『풀』의 일본어 출판(1월 말 예정)을 준비하고 있다.]
기사입력 : 2020-0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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