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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수 교수, 독일 본 의과대학교 종신교수
독일 본대학교 의과대학 이종수 교수
한국간호사 파독50주년을 축하하며 한국간호요원 독일 진출 개척기 회고
하나님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1960~1968년까지
1.300명 한국간호요원 독일에 초청
1959년 4월 나는 DAAD장학생으로 Düsseldorf대학에서 의학 공부를 시작했다. 나의 독일 도착은 1959년 3월 29일이였다.
1960년 4월부터 1961년 3월까지 일 년간
나의 간질환 치료 차 입원
유학 온 지 1년후인 1960년 4월, 나는 B형간염에 걸려 그 해 5월 Düsseldorf대학병원 제2내과에 입원했다. 병원에서 주는 식사가 너무 불편하여 1960년 6월, 간 검사치가 정상으로 되지 않았는데도 조기 퇴원을 원했다.
1960년 7월, 간 검사치가 예상밖으로 올라가 같은 병동에 다시 입원했다. 간 검사치를 보고 병원측과 장학재단 DAAD는 공부를 중단하고 집 (한국) 으로 돌아가라는 결정을 내렸다. 사형선고를 받은 셈이다. 눈 앞이 깜깜했다. 이 시점의 건강상태는 비행기를 타고 고향으로 돌아갈 정도가 못되어 나는 우선 병치료를 받기로 했다. 병명은 [치명적 B형간염] 이고, 이 병의 사망율은 당시 80~90% 였다. 그 후 근 일 년간 절망속에서 치료를 받고 1961년 3월에 다행히 완치되어 퇴원
하였다. 나는 일 년간 간수없는 감옥에서 수감생활을 눈물과 고독속에서 한 셈이다. 이어서1961년 4월에 남독 도나우강가에 있는 Niederaltei수도원에서 4주간 요양을 하도록 의료보험에서 보내주었다.
그 사이 건강상태가 양호해 1961년 여름학기부터 독일에서 공부를 계속하여도 좋다고 DAAD가 허락했다.
1960년 7월, 병상에서 고아들의 교육을 하나님께 약속
1960년 7월, 재차 입원했을 때 한국에서 어렵게 여권수속을 마치고 독일에 유학 온 나를 DAAD 에서 중단하라는 소식을 듣고 이런 상태로는 고국으로 돌아갈 수 없다고 생각했다. 병상에 누어 매일 밤을 지새워 가며 하나님께 기도했다
"하나님이 제에게 건강을 주신다면 한국의 고아와 어려운 사람을 위해 사회 봉사하겠습니다" 하며 거듭 기도했다. 그리고 약속했다.
7월 어느날 저녁 입원환자를 돌보고 있던 병동수간호사 엘리사벨여사가 세계 2차대전중에 동부전선의 종군경험담을 내게 들려주었다. 그러면서 여러 이야기 도중 우연히 독일의 간호사교육은 학비가 전혀 필요없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한국에서 전쟁 고아들에게 독일에서 간호교육을 받을 수 있는 길을 열어주면 그들은 세계각지에서 병자를 위하여 봉사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그 순간 내 머리속에 떠올랐다. 동시에 그 대가로 하나님께서 내 병을 완치시켜 주시기를 기대했다 .
1960년 8월 입원중 Frankfurt 감리교선교회장 방문
1960년 8월 저의 병세가 아주 심각한 줄 알면서도 거짓말을 하고 병실을 빠져나와 기차로 Frankfurt 있는 독일감리교 선교회회장을 방문하였다. 그의 집앞 나무 그늘에서 기다리고 있는 나를 보더니 그 분은 아프리카에서 온 사람들에게서 좋은 경험를 갖지 못했다고 하면서 나를 문전박대했다.
나는 - 한국사람들은 아프리카 사람들과는 다릅니다. 그러니 한국전쟁에서 고아가 된 2명만 독일에서 간호사교육을 받을 수 있는 길을 열어주세요 - 하는 말을 서투른 독일어로 반복했다. 낙담을 하며 Düsseldorf의 병실에 돌아왔는데 다음 날 간검사치는 더 악화되었다. 절망적인 나날이 계속되었다.
몇주 후 나는 내가 찾아갔던 독일 감리교선교회장에게 나의 현재의 상태, 한국에 있는 전쟁고아의 현황, 한국의 빈곤한 사람들에 대한 긴 사연과 그리고 전쟁고아 2명의 독일간호사교육을 부탁하는 편지를 보냈다. 여러 달 답장을 손꼽아 기다렸지만 소식은 없었다. 불가능 하다고 생각했다.
1960년 12월말, 베르린에 있는 감리교부녀회장의 편지
나는 독일에서 두 번째 맞이하는 성탄절을 병원 병실에서 보내야 했다. 모두 고향에 가고 중환자 몇 사람만 병동에 남아있으니 너무나 적적했다. 나는 병실에서 몇 개의 성탄절 축하편지와 함께 아래 분으로 부터 한장의 편지를 받았다.
독일감리교부녀회장 루이세.숄쓰부인
Pauliner 가 30, Berlin-Lichterfeld
나는 이 편지를 병상에 누어 읽었다. 숄쓰부인은 한국 광주에 있는 전쟁고아와 빈곤층 자녀를 위해 설립한 고등학교에서 2명을 독일에서 간호사 교육을 시키기 위해 초대하겠으며 그에 필요한 모든 비용을 부담해 주겠다는 내용이였다. 감리교선교회장 방문 4개월 후 였다. 나의 기쁨은 말 할 수 없었다. 그 순간 하나님은 제게 건강을 주실 것이라는 확신을 얻었다.
1962년 첫 번째 2명의 한국간호학교 학생이 독일에 도착
한국과 독일에서 여권을 수속하는데 많은 시간을 필요로 했다. 1962년의 늦은 여름 간호학교학생 2명이 독일에 도착하여 Frankfurt 의 감리교병원 (Diakonischen Krankenhaus Bethanien) 에서 교육이 시작됐다. 이 것이 독일에 [ 한국간호요원 정착의 역사적 순간이다 ] 하겠다.
간호학교학생 교육을 시작한 6개월 후에 Frankfurt지역에서 이 두 간호학생에 대한 호평이 들렸다. 한국 여성은 부지런하고 영리하며 환자에 대해 천사와 같이 친절하다. Nürnberg 와 Hamburg에 있는 감리교병원에서 한국간호학교학생에게 흥미가 있다는 의사표시를 했다. 독일감리교 부녀회는 그 두 병원을 위해서도 재정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고 여권수속을 하는데 열심히 도왔다.
1962년, 나의 독일의사 면허를 위한 국가시험 합격
1963년부터 주야 병원근무
1962년에 나는 건강을 완전히 회복하지 못하였어도 예정보다 1년 늦게 독일의사 국가시험에 합격했다. 그리고 1963년 1월에 외과의사로서 Duisburg시에 있는 Bethesda 병원에서 근무을 시작했다. 150병상의 외과에 과장 1명, 상의(Oberarzt) 2명, 의사 4명이 근무했다. 나는 하나님께서 저에게 건강을 주실 것을 믿었다. 의사가 말 할 수없이 부족하여 나는 내 몸을 보살필 여유없이 무척 많은 수술을 해야했다.
감리교 병원에서 간호학생 53명 교육
그 후 한국간호학교 학생교육은 다음과 같이 감리교 산하의 3 병원에서 이루워졌다,
● Frankfut 의 감리교 병원에서
1962년 2명
1964년 11명
1967년 6명
● Nürnberg의 감리교 병원에서
1963년 4명 과 6명
1964년 9명
● Hamburg의 감리교 병원에서
1964년 9명
1965년 6명
이와 같이하여 독일에 있는 감리교병원에 53명의 한국간호학교학생이 교육을 받게 되었다. 오로지 독일감리교 부녀회의 도움에 의한 것이다.
1964년초에 독일연방정부 초청으로 독일루터교 병원에 14명 간호학생 도착
루터교병원과 첫 접촉
독일 Essen시에 있는 루터교병원 Huyssens-Stiftung이 감리교병원으로 부터 [한국간호학생교육에 만족한 경험을 했다] 는 소식을 들었다고 1964년초에 우리에게 연락이 왔다. 이 병원의 간호학교교장 Sommer여사가 자기 병원 간호학교에서 한국인 간호학생교육을 실시하고 싶은데 이에 필요한 모든 비용을 독일연방경제협력부(당시 후진국원조부)에 신청하겠다고 나에게 제안했다. 1964년 가을에 14명의 간호학교학생이 독일정부의 후원으로 독일에 왔다. 독일연방정부 초청이라 사증수속이 아주 빨리 진행됐다.
제가 너무 고단해요 하나님! 이 프로그램을 중단하면 않될까요?
1963년에 나는 아직 완전히 건강하지 않았다. 내게 아주 고단했든 한 해였다. 아침 8시부터 18시까지 수술해야했고, 겸하여 부상한 환자의 외래진료, 45병상의 병동일, 밤 당직 그리고 주말 당직을 하면서 한국간호학교 학생들을 보살펴야 했다. 너무 고단하여 한국인간호학교 학생들의 보살피는 일을 중단하고 싶었지만 내가 간염으로 오랜기간 병치료 받으면서 간절한 기도로 하나님께 했던 약속을 잊어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하나님이 보호해 주시지 않으시면 내 건강은 악화되어 간염이 간경화증으로 진행될 수 있다는 공포감에서 해방되지 못했다. 그렇게 되면 의사라는 내 직업을 포기해야 한다. 1963년과 1964년에 당직이 없는 일요일에 Nürnberg나 Hamburg 병원의 간호학생을 보살피고 돌아오는 경우 차 안에서 졸거나 길가에 차를 멈추고 잤든경우가 한 두번이 아니였다.
1964년 12월 한국의 졸업간호사를 요구 ( 달리는 차안에서
그만 하게 해 주시라고 하나님께 기도 )
Hamburg의 감리교병원의 간호원장의 요청으로 나는 1964년 12월초 어느 일요일 아침 일찍 어두움 속에서 Hamburg로 차를 몰았다. 당시 독일 병원에 의사가 대단히 부족하여 나는 쉬는 일요일만 한국간호학생들을 보살피는 일을 할 수 있었다. 새로 한국에서 Hamburg에 도착한 간호학교 학생들에게 문제가 있다는 사유였다. 이 날 따라 눈이 많이 내렸다. Hamburg병원에서 학생들과 점심을 같이하고 15시경 Hannover로 떠났다.
저녁 6시 (18시) 경 Hannover에서 독일루터교회 그리고 루터교병원협회 관계자들과 저녁식사를 같이 하면서 회의를 하자는 연락을 받았다. 회의 안건에 대해서는 통지를 못 받았다. 나는 여기서도 한국 간호학교학생에 대한 토론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Hamburg에서Hannover로 가는 고속도로는 이 날 따라 눈이 많이 내려 매우 미끄럽고 여기 저기 교통사고가 나서 나는 거북이 거름으로 달릴 수 밖에 없었다. 연속되는 과로 때문에 몹씨 피곤했다. 달리는 자동차 안에서 하나님께
„이제까지의 한국간호요원 초청이 제가 아팠을 때 했든 하나님과의 약속을 위해 충분하지 않을까요? 한국간호학교학생를 보살피는 일을 이만 끝 내면 어떨까요? 하나님께서 중지하도록 인도해 주세요! “ 기도했다.
저녁 8시경Hannover에 도착했다. 그 곳에서 사람들이 오후 6시부터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토론안건은 : 루터교병원들이 한국에서 200명의 졸업간호사를 원한다.
- 1964년 여름에 Essen루터교병원에 도착한 한국간호학생들이 병실에서 일 처리하는 능력으로 봐서 한국 졸업간호사는 독일에서 교육기간없이 바로 독일병원에 배치할 수 있다고 판단한다 -
루터교병원협회 대표자들과 고용계약조건을 협상하고 이 계약조건으로 한국정부의 허가를 받는 일을 날더러 하라는 것이다. 이 자리에서는 나는 한국사정을 전혀 알지 못하여 아무런 의견을 제출할 수 없었다. 눈 속에서 차를 몰며 월요일 새벽에 집에 도착했다. 집으로 돌아가면서 < 하나님 저에게 건강을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그런데 제가 꼭Hannover의 루터교에서 부탁한 일을 해야만 할까요? 너무 피곤하네요 >
1965년 정월부터 1966년 4월까지 독일과 한국사이의 지루한 협상
1965년 봄 나는 일방으로는 독일루터교병원협회 대표자들과 노동계약 (노동시간, 언어교육, 필요에 따라 한국에 돌려 보낼 일, 3년의 계약기간보장, 독일연방고용인 봉급규정에 의한 봉급지급 등등) 에 관하여 협상했다. 루터교병원협회 산하에는 신교 수녀님들이 경영하는 병원이 많아 협상이 아주 까다러웠다. 다른 한편으로 나는 한국의 보건사회부에 이 곳에서 협상한 노동계약을 제시하며 200명의 졸업간호사를 부탁했다. 1965년 중반 (여름)에 보건사회부는 한국에도 간호사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나의 요구를 거절했다.
이 협상은 내가 당시 Wuppertal-Barmen시립병원의 외과에 근무 중이라 주어진 많은 병원 일을 하면서 해야하기에 아주 서서히 진행됐다 (의사가 부족한 시기였으니). 이에 관한 독일루터교병원협회와 협상은 내가 쉬는 날에 Wuppertal에서 이루어 젔다.
나는 Bonn에 있는 한국대사관의 아드바이스로 대한민국 박정희 대통령님께 이러한 사실을 알리고 200명 졸업간호사 독일 취업 허가를 부탁했다. 그 후 얼마 안되어 한국보사부에서 간호사들의 독일 취업에 대한 노동계약을 보사부 한상태국장과 협상하라는 편지를 받았다. 당시에는 한국과 전화통화는 불가능하여 모든 것을 우편으로 연락했다. 또한 나는 한국에 나갈 항공요금도 없었다. 그 당시는 항공요금이 아주 비쌌다.
이 협상에서 다음 3가지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1) 루터교병원협회는 한국간호사가 독일어와 독일병원의 실태 모르니 첫 해의 봉급을 30% 삭감해야겠다는 의견에 한국 보사부측은 첫 달부터 100% 봉급을 주장했다.
2) 독일이 2차대전 후 부족한 노동력을 보충할려고 초대한 모든 외국인에게 적용한 것 처럼 왕복항공료금은 독일병원이 선불하고 한국간호사의 노년보험의 고용주분을 3년간 적립하여 상환한다.
3) 3년간의 고용계약을 내가 보장하고, 간호사가 3년이내에 해약할 때는 병원이 선불한 항공료금 및 기타 부채를 내가 책임지고 병원에 상환한다.
한국 보건사회부 및 독일 루터교병원협회 와 3가지 합의사항
루터교 사회사업본부와 루터교 병원협회는 나에게 개인 자격으로 이 사업전체를 처리하지 말고 루터교병원협회와 공동으로 사단법인체를 설립하고 그 회원에 한국에서 온 간호요원도 포함하여 모든 일을 루터교 병원협회와 공동으로 처리 또는 해결하라고 권유 함.
한국에서는 오로지 한국보건사회부가 한국해외개발공사와 공동으로 간호요원의 모집, 여권수속, 출국수속등을 담당하고 한국해외개발 공사는 선발된 간호요원의 명단을 우리에게 보내고 이 과정에서 발생하는 모든 경비는 한국해외개발공사가 부담한다.
독일에서는 독일루터교 병원협회의 대표자로 당시 라인지방 루터교 병원협회장 Esser (Bad Kreuznach)씨가 선발되어 독일에 오게될 간호요원의 노동허가 거주허가 및 기타 발생하는 모든 문제를 한국간호사가 근무할 해당 병원과 독일루터교 사회사업본부와 협력하여 해결한다. 그리고 Esser회장은 간호요원의 항공편 예약과 항공요금 지불등을 해당 병원과 상의하여 책임진다. Esser회장은 루터교 병원협회가 필요로 하는 간호요원의 수를 조사하여 나에게 알려주면 나는 이 를 한국보건사회부와 한국해외개발공사에 통보한다.
1966년 4월 서울에서 한국정부와 계약체결
독일루터교 병원협회대표 Esser회장과 나는 한국보건사회부와 합의사항에 관하여 계약체결을 해야했다.한국정부는 우리가 서울에 와서 보사부장관의 입회 하에 계약을 체결해야 한다고 통지해 왔다. 당시 항공요금이 빗싸서 루터교 병원협회가 부담하는 문제와 내가 Wuppertal 시립병원에서 휴가를 받는 문제로 한국에 가는 시기가 지연됐다.
드디어 1966년 4월 하순에 서울에서 정의섭 보사부장관, 한상태 의정국장 그리고 한국개발공사 사장과 위의 합의사항의 이행에 관하여 계약이 체결됐다. 동시에 200명 졸업간호사의 여권수속, 독일병원 배치 그리고 사증신청 등등이 이뤄졌다. 1966년 6월 제1차 졸업간호사가 Köln/Bonn공항에 도착했다.
그 후 다음과 같이 우리는 한국 간호요원을 독일에 초청했다
1966년 200명 간호사
1967년 200명 간호사 600명 간호보조사
1968년 200명 간호보조사
1967~1968년 50명 간호학교학생 및 기타 (독일감리교병원으로 온 53명 외에)
1.300명을 보살피는 어려움은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시련
우리는 이상과 같이 한국간호요원을 1960년부터 1968년 까지 총 1.300명을 독일에 초대하여 독일루터교 사회사업본부 및 독일루터교 병원협회와 공동으로 보살폈다. 1968년에 도착한 간호요원의 3년 계약이 완료되는 1971년 까지 보살폈다.
1.300명이라는 많은 간호요원들이 언어, 생활습관이 다른 독일에 왔으니 수 없이 많은 문제들이 발생할 것을 예상했다. 그러나 예기치 못한 어려운 문제들은 나를 너무 어려운 곤경에 처하게 하기도 했다. 나는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이 저에게 주신 시련이라고 믿고 처리했다.
인도주의적 견지에서 800명의 한국간호보조사 초청
당시에는 한국에 보건복지부가 인정한 간호보조사라는 직업이 없었다. Esser 회장과 내가 1966년 4월 한국 보건사회부와 계약체결차 서울에 갔는데 눈이 불편하여 진료차 안과의원에 방문하게되었다. 그 개업의원에서 일하고 있는 보조간호원을 만났는데 이 때 보조간호원이 “ 우리 같은 사람도 독일에 가서 일 할 수 없겠어요 ? ” 하며 의원에서 일하는 보조간호원은 전연 간호에 관한 교육을 받지 않고 대부분이 시골에서 도시로 나와 개업의원에서 배우고 일하면서 개업의를 돕고있다. "동시에 부모의 생활이 어려워 적은 봉급이나마 부모생활을 위해 보내고 있다 “ 라고 자신의 입장을 설명했다,
이 말에 감동한 나는 독일에 돌아와 독일루터교 사회사업본부 총재와 이 보조간호원을 구제할 것을 상의했다. 한국보사부는 갑짜기 의료법을 개정할 수 없으니 도와주고 싶으나 보조간호사 자격증을 발행 못 한다고 내게 연락해 왔다.
나는 루터교사회사업본부및 독일정부와 협상하여 3년 이상 한국의 의원에서 근무한 사람으로 한국해외개발공사에서 내과, 외과 , 간호학과 를 각각 1개월씩 3개월 교육받은 사람을 독일에서 간호보조사로 인정해 주겠다는 독일정부의 허가를 받았다. 이렇게 하여 우리가 초청한 간호보조사는 800명에 달한다.
나는 루터교병원협회와 절충하여 이와같이 독일에 온 한국간호보조사가 간호보조사의 봉급을 받고 근무하면서 동시에 간호학교 교육을 받을 기회를 얻어 독일간호사면허를 취득할 수 있도록 했다.
나는 의사다. 의사로서의 직업에서 성공해야 한다
나의 치명적인 간염에서 내게 세로운 생명을 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보답하는 마음으로 이와같은 한국간호요원 독일초청문제에 나의 많은 시간과 노력을 할여했지만 의사인 나는 내 직업에 평생 충실하여 나의 전공 분야에서 성공해야 한다는 것을 일시도 잊지않았다.
1966년 나는 Wuppertal-Barmen의 시립병원 외과에 근무하면서 1967년부터 Bonn대학병원으로 옮겨 세계의학계에서 활략해 보려고 결심하고 그 준비차 학술논문 2편을 독일의학지에 발표했다.
1967년 4월 Bonn대학병원 외과로 옮겨와 혼자서 30병상을 맡았다. 이 해에 800명의 간호요원이(전년까지 합하면 1.100명) 독일에 도착했는데 나는 대학병원에서 병동일 외에 종일토록 수술을 해야하고 밤당직을 그리고 당직이 없는 밤에는 의과대학 학생들과 같이 의학연구차 동물실험, 동시에 학술논문을 작성하여 세계의학지에 발표했다.
이 해 말엔 Bonn대학병원에 신설된 집중치료병동의 병동장직을 맡았다.
겸하여 1.100명의 한국간호요원들이 독일 전국에 분산되어 있으니 하루가 멀다하고 발생되는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지옥과 다름없는 내 생활이였다. 잠이 그리운 나날이였다. 그러나 하나님은 내게 건강을 주셔서 1967년 불철주야로 일 할 수있었다.
1968년에 한국간호요원 200명이 독일에 추가로 도착하여 1.300명을 보살펴야만 했다. 이 와중에도 1968년 수개월간 Bonn대학병원에서 나를 미국에 유학보냈다. 미국Denver에 있는 Colorado 대학병원 Starzl 교수 아래에서 그리고 LA 의 California대학병원 Terasaki교수 밑에서 장기이식에 관한 연구를 했다. 미국에서 돌아오자마자 Bonn대학병원 외과의 간이식 팀장직을 맡았다. 1969년 6월에 유럽대륙 최초의 간이식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얻고 같은 해 Bonn대학 의학부에 교수자격 인증 하비리타치온(Habilitation) 논문을 제출하여 1970년 통과되었다. 1971년에는 남부독일 Ulum에 있는 의과대학에서 교수로 초빙받았다. 그러나 나는 Bonn에 일하기로 결정했다. 외국에서 온 의사인 내게 이와 같은 기회가 부여된 것은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에 의하지 않고는 불가능하다. 이 모두가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선물이라고 오늘까지 감사드리며 살아온다.
1960년 하나님과의 약속을 준수하기 위해 많은 한국간호요원 독일진출의 길을 개척하는데 어려움과 고생은 형용할 수 없이 많았지만 하나님은 또한 의사로서 세계의학계로 도전하며 성공해 가는데도 많은 은혜를 베풀어 주셨다.
1969년 하나님은 저와의 약속에서 저를 해방시켜 주셨다
1966/1967년에 독일경제가 악화되어 1968년 독일연방노동청은 외국인 근로자의 고용을 억제했다. 이로 인하여 한국간호요원의 독일 취업은 일시적으로 1969년부터 독일정부가 허가하지 않았다. 1971년부터 한국정부가 직접 이 사업을 진행했다. 나는 훗 날 1969년의 독일연방노동청의 외국인취업중지 조치는 1960년 병실에서 하나님께 약속했던 과제에서 나를 해방시켜 주실려는 하나님의 예지가 아닐까 생각한다 (뜻밖에도 나의 간이식수술도 1969년에 이뤄졌다).
만학도인 나에게 대학병원에서 환자, 연구와 교육을 위해 헌신을 할 수 있는 기회와 현재의 고령에도 일할 수 있는 건강을 하나님께서 주셔서 결실있는 57년을 독일에서 의사로서 또한 의학자로서 보낼 수 있어 감사드린다.
특히, 저와의 인연으로 독일에 오신 한국간호요원 여러분들이 이 땅에서 건강하고 행복한 여생을 보내시기를 기도한다.
2016년 3월 3일 본대학교 의과대학교수 이 종 수
부탁; 56년전의 일을 기억에서 더듬어 쓰니 숫자에 다소 오류가 있을 수 있습니다. 제가 한국간호요원의 보살피는 일을 끝낸 1971년까지의 회고를 썼습니다.
[출처] 파독간호사 독일 진출 50주년에 부쳐-이종수 교수|작성자 코티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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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참 좋은 자료 고맙습니다
그렇지요!
어쩌다가 찾았습니다.
다 읽어 보시면 초창기 역사가 다 기록돼 있습니다.
문제는 천여명의 간호사들이 파견인지 아닌지를 판가름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