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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글은 {페북} 그룹 {개혁 공감}에 2015년 1월 22일에 쓴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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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오웬 & 조나단 에드워즈
[일반(준비) 은혜와 구원(특별) 은혜는 그 정도뿐만 아니라 본질과 종류까지도 다르다.]
‘피터 마스터스 {영혼의 의사}’ 48~49쪽에서 피터 마스터스 목사님은 ‘육적 탄생(자연의 출생)은 영적 탄생(중생)을 아주 정확하게 말해 주는 예화’로 주장하십니다. 그리고 ‘존 머레이 {구속}’ [중생] 장에 적힌 “중생은 순간이다.”는 존 머레이 목사님 말씀을 가지고 {영혼의 의사} [제7장: 중생은 순간적인가, 연속적인가?]에서 ‘청교도 신학자들 중생론, 개혁 신학 중생론은 연속적인 중생론(줄여서: 연중론)이었다.’ 주장하시며 “순간 중생론(줄여서: 순중론)”의 “원조”로 존 머레이 목사님을 지목하며 존 머레이 목사님 중생론을 “변종”의 중생론, “미혹”의 중생론으로 정죄, 이단시하십니다.
{영혼의 의사}를 우리말로 옮기신 손성은 목사님 역시 존 머레이 목사님 중생론을 이단시하시며 “조나단 에드워즈도, 김홍전 목사도 연중론자다.”고 주장하셨습니다. ㅡ물론, 김홍전 목사님은 연중론자가 아니십니다.ㅡ 그리고 지난해 초에는 “순중론은 칼 바르트 신학 영향을 받았다.”고 주장하셨습니다.
칼 바르트(1886년~1968년)는 20세기 사람입니다. 그리고 이른바 “순중론의 원조” 존 머레이(1898년~1975년) 목사님 역시 20세기 사람입니다. 이 두 사람은 같은 시대의 사람들이기 때문에 손성은 목사님이 “순중론은 칼 바르트 신학 영향을 받았다.”는 주장을 입증하는 근거(텍스트)를 제시하시면 됩니다. 그러나 그 근거를 제시하지는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개혁신앙인이 “청도교 신학의 완성자”로 높이며 존경하는 조나단 에드워즈(1703년~1758년) 목사님은 18세기 사람입니다. 즉, 칼 바르트 신학이 태어나기 이전 사람입니다. 바꿔 말하면, 조나단 에드워즈 목사님 중생론은 칼 바르트 신학 영향을 절대 받을 수가 없습니다.
‘존 오웬 & 조나단 에드워즈 [일반(준비) 은혜와 구원(특별) 은혜는 그 정도뿐만 아니라 본질과 종류까지도 다르다.]’는 제목으로 쓰는 이 글은 ‘조나단 에드워즈 {은혜에 대한 강론}’에서 옮기는 글입니다. 이 강론은 ‘3 강’으로 이뤄져 있는데, 각 강론 제목은 [제1강: 일반 은혜와 구원 은혜는 그 정도뿐만 아니라 본질과 종류까지도 다르다.], [제2강: 구원 은혜의 특징은 무엇인가?], [제3강: 은혜의 원리가 하나님의 영으로부터 비롯되는 방식]입니다.
20세기 개혁신학은 ‘중생: 하나님만의 행위’와 ‘회심: 중생의 발현, 즉 중생에 따른 인간의 반응으로서 참된 믿음과 회개’를 구별했습니다. 그런데 조나단 에드워즈 목사님께 중생은 곧 회심을 뜻하는 말이었고 회심은 곧 중생을 뜻하는 말이었습니다. 물론, 구별하실 때도 있었습니다. 존 오웬 목사님도 마찬가지셨습니다. 제가 옮기는 이 강론에서 조나단 에드워즈 목사님께서 ‘새 창조로서 중생(회심)’을 설명하시면서 순간 중생(회심)을 강조하기 위해 “순간”, “즉시”, “동同시”같은 용어를 몇 번 쓰시는가를 세어 보시기를 바랍니다. “중생은 연속(점진)적이다.” 하시는 손성은 목사님이 무척 싫어하시는 말들인 이 말들에 제가 숫자를 적어 놨습니다. 배경색도 칠했습니다.
참고로, {영혼의 의사} 120쪽을 보면 <존 오웬은 연속적 중생관을 가졌다>는 소제목이 있습니다. 그러나 1988년에 ‘여수룬’에서 펴낸 ‘존 오웬 {개혁주의 성령론}’ 200쪽을 보면 존 오웬(1616년~1683년) 목사님께서는 준비(예비) 은혜를 두고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굵은 글씨는 강조하려고 제가 굵은 글씨로 씁니다.
중생 사역에 관해 적극 생각해야 할 점이 있는데, 그것은 중생에 앞서 인간의 영혼에 분명히 예비 사역들(preparatory operations)이 일반적으로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성인의 경우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는 회개도 못한다. 마찬가지로 중생은 예비 사역들로 되는 것이 아니고 또한 예비 사역들이 이끌어내는 것도 아니다.
존 오웬 목사님 이 말씀은 제가 {개혁 공감}에 올린 글, ㅡ제가 “한국 교회 순중론 영의정 목사님”으로 높이는 예장 고신 강릉예명 박래구 목사님ㅡ ‘강릉예명 < 중생 전前에 예정된 자 마음 밭을 개간하시는 성령님의 준비 은혜는 일반(보통) 은혜일뿐입니다.>’ 논지와 같은 논지의 말씀입니다. 그런데 2007년에 ‘예영커뮤티케이션’에서 펴낸 ‘노병기 {거룩한 구원}’ [제26장: 조나단 에드워즈의 중생론]을 보면 다음과 같은 노병기 목사님 평가가 있습니다. 굵은 글씨는 제가 굵게 씁니다.
청교도 신학은 중생이라는 주제에 대한 집중적인 지향성 때문에 “중생의 신학”이라고 칭해 왔다. 특히, 에드워즈는 철저한 중생 체험의 필요성에 대해 가장 강력한 견해를 가진 사람 중 한 사람이었다. 에드워즈 중생론은 많은 점에서 존 오웬의 중생론을 닮았다. 조나단 에드워즈 중생론 특징은 ‘하나님 주권에 의한 성령(새로운 원리)의 주입’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점은 오웬의 중생론과 흡사하다. ‘죄에 대한 각성 상태가 먼저 와야 한다.’는 것과 ‘은혜의 주입에 의해 지각과 의지와 성향, 행동이 바뀌게 된다.’는 개념은 오웬과 똑같다.
‘중생은 순간이다.’는 조나단 에드워즈 목사님 강론을 옮기기 앞서, 혹시 연중론에 대해 모르시는 분들을 위해 연중론과 순중론 도식을 간단히 적습니다.
◈ 연중론
수태: 초기 중생(불완전 중생) → 열 달 간의 임신 기간: ‘믿을까 말까, 회개할까 말까?’ 갈등하며 회심(참된 믿음과 참된 회개)를 위해 ‘분투’하는 기간, 즉 회심을 위해 ‘구원의 신앙이 아닌 일반 믿음과 일반 회개’를 되풀이하며 ‘분투’하는 기간 → 출산: 회심(완전 중생)
◈ 순중론
준비 은혜: 외소(external calling, 일반 소명) → 특별 은혜: 내소(internal calling, 특별 소명) = 중생(회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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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나단 에드워즈
[제1강: 일반 은혜와 구원 은혜는 그 정도뿐만 아니라 본질과 종류까지도 다르다.]
···(전략)···
하나님의 성령께서는 참된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들 마음에도 어느 정도 영향력을 때때로 행사하십니다. 참된 성도들 경우처럼 모두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참된 그리스도인 아닌 사람들 마음에도 선한 경향을 가진 여러 가지 기질과 성벽性癖과 활동들이 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이러한 것들은 하나님의 성령께서 그들 마음에 끼치신 영향력이나 도움 때문입니다.
···(중략)···
제가 이제부터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크게 두 가지 내용입니다. 하나는 ‘특별 은혜 혹은 구원 은혜는 일반 은혜와 비교할 때 정도에서 차이가 날 뿐만 아니라 본질과 종류에서도 완전히 다르다.’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거듭나지 않은 자연인들 경우 성도가 되기에 합당한 정도의 미덕을 소유하고 있지 못할 뿐만 아니라 경건한 사람들에게서 볼 수 있는 은혜 자체를 전혀 소유 못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 두 가지 내용을 이제 입증해 보이려고 합니다.
증거 1
그리스도께서 요한복음 3장 6절에 말씀하신 것을 볼 때 이것은 명백한 사실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중생重生에 관해 언급하시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육肉으로 난 것은 육肉이요 성령聖靈으로 난 것은 영靈이니,”
잘 보십시오. 그리스도께서 ‘육’과 ‘영’이라는 단어를 통해 무엇을 의미하시든지, 부인할 수 없는 명백한 사실이 여기에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입니까? 그리스도께서는 니고데모에게 신생新生의 필요성, 곧 ‘자연의 출생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출생’의 필요성을 보여주고자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연의 출생만을 경험한 사람의 경우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것을 마음에 전혀 가지고 있지 않다.’는 논지를 통해 ‘신생의 필요성을 입증하신다.’는 것입니다.
···(중략)···
이런 원리나 자질은 오직 출생에 의해서만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얻을 수 있는 출생은 자연의 출생이 아니며 자연의 출생일 수도 없습니다. 그것은 반드시 신생新生이어야만 합니다. 우리가 “거듭남”이라고 부르는 신생이어야만 합니다.
···(하략)···
증거 2
···(생략)···
증거 3
참된 성도도 아니고 구원받은 상태에 있는 것도 아닌 사람들은 성도들 마음 안에 있는 경건한 성품과 신적인 원리를 단순히 적게 가지고 있는 정도가 아니라 완전히 결여하고 있습니다.
···(하략)···
증거 4
···(생략)···
증거 5
···(생략)···
증거 6
···(생략)···
증거 7
···(전략)···
씨앗은 식물의 매우 작은 부분이요 식물의 맨 처음 성분입니다. 하나님의 씨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씨는 마치 겨자씨 한 알처럼 마음속에 거할 수도 있습니다. 분명히 존재함에도 숨겨져 있어서 그 존재와 모습이 드러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거의 대부분은 땅속에 묻혀 버린 것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씨는 사악함과 공존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가장 작은 분량으로 존재하고 맨 처음 시작하는 단계에 있는 거룩하고 신적인 성향들과 기질들도 죄를 범하는 상태와 공존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를 두고 “저도 범죄하지 못하는 것은······.”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중략)···
즉, 하나님의 씨가 그 속에 거하는 사람이라면 결코 죄인이나 악인으로 살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구원받지 못한 죄인 마음속에는 참된 경건이라는 신령한 나무가 결단코 자라날 수 없습니다. 결단코 그렇게 될 수 없습니다. 구원받지 못한 죄인 마음속에 있는 최고로 고상한 원리 안에서도 참된 경건이라는 신령한 나무는 결단코 자라날 수 없습니다.
증거 8
성경에서 회심回心을 상징하는 여러 가지 표현들을 볼 때 특별히 성경이 회심을 새 창조創造로 표현하고 있는 것을 볼 때 이것은 더욱 분명해집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것을 창조하신다.”고 말할 때 ‘창조’는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창조는 이전부터 존재해 왔던 것들을 이전보다 더 견고하고 더 완전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새로운 것을 전부 즉시① 만드시는 것입니다. 아무 것도 없는 가운데서 그렇게 만드시든지, 흙으로 사람을 지으셨을 때처럼 새롭게 창조하려고 하시는 대상과 전혀 다른 본성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그렇게 만드시든지, 완전히 새로운 것을 전부 즉시② 만드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창조입니다.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된 것이 아니니라.”[히 11:3]
성경은 사람 안에 이뤄진 구원 은혜를 일컬어 “새 사람,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부릅니다. 반면에 부패한 옛 본성을 일컬어 “옛 사람”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만일 경건한 사람 마음속에 있는 부패한 본성의 본질과 종류가 회심 이전에 마음속에 있던 부패한 본성과 다르지 않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경건한 사람은 결코 새 사람이나 새로운 피조물이 아닐 것입니다. 경건한 사람은 일 년 전에 구원 은혜를 경험했을 수도 있습니다. 또 인생의 여러 시점에서 그런 은혜를 이따금 경험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과거와 아주 조금씩만 차이가 날 뿐 결국은 과거와 동일한 상태에 있을 것입니다. 이런 경우 이 사람 안에 있는 은혜가 어떻게 “새 사람”이나 “새로운 피조물”이겠습니까? 절대 그럴 수 없습니다.
또 성경은 회심을 부활에 자주 비유합니다. 성경은 ‘자연인은 죄와 허물로 죽어 있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그들이 회심하게 될 때, 성경은 ‘그들이 하나님의 전능하고 효과 있는 능력으로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림을 받았다.’고 가르칩니다. 죄와 허물로 죽어 있는 상태와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림을 받을 상태 사이에는 ‘중간 지대’가 전혀 없습니다. 죄와 허물로 죽은 사람은 하나님의 생명을 조금도 가지고 있지 않은 것입니다. 반면에 하나님의 생명을 조금이라도 가지고 있는 사람은 분명히 살아 있는 사람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림을 받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주시는 생명은 ‘단순히 이전보다 더 위대한 생명’이 아니라 ‘완전히 새로운 생명’입니다.
또 성경이 회심을 신생新生이나 중생重生으로 상징하는 것을 봐도 분명히 그렇습니다. 출산出産이라는 것은 이전부터 존재해 오던 생명체를 이전보다 더 온전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생명체를 새롭게 낳은 것입니다. 출산을 통해 받게 되는 본성과 생명은 출산과 함께 비로소 처음 시작되는 것입니다. 새로운 생명체는 태어나는 그 순간③ 자신의 여러 가지 원리들을 처음 부여받게 되는 것입니다.
또 성경은 회심을 소경의 개안開眼으로 표현합니다. 소경은 개안을 통해서 이전에 자신에게 전혀 없었던 시력視力을 소유하게 됩니다. 회심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는 능히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을 만들 수 있으시다.”고 말합니다. 돌들이 단순히 돌로 존재하는 동안에는 돌일 뿐입니다. 단순한 돌에는 아브라함의 자손에게 있는 모든 자질들이 하나도 없습니다. 단순히 그런 자질들을 부족하게 소유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결여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회심을 두고서도 똑같은 방식으로 말합니다. 성경은 회심을 돌 같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주는 것으로 표현합니다[겔 36:26]. 회심하기 이전에 모든 사람들은 돌 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을 뿐입니다. 부드러운 마음이 가지고 있는 생기와 지각 능력이 전무한 돌 같은 마음만 가지고 있을 뿐입니다. 왜냐하면 회심하기까지는 돌 같은 마음이 돌 같은 마음 그대로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돌을 한 번 생각해 보고, 돌 같은 마음이 어떤 것일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돌 같은 마음보다 생기와 지각 능력을 더 크게 결핍하고 있는 것은 이 세상에 아무것도 없습니다.
지금까지 말씀드린 것을 종합해서 다음과 같이 몇 가지 사실을 추론해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추론1: 회심은 즉각④ 이뤄질 수밖에 없습니다.
회심의 준비 단계인 ‘지식, 개혁, 죄의 확신’은 점진적일 수 있습니다. 회심 이후에 따른 은혜의 역사도 점진적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완전 부패와 타락의 상태에서 건짐을 받아 은혜의 상태로 들어가고 그리스도를 구주로 모시게 되며 실제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수단인 회심이라는 이 은혜의 역사는 한순간⑤에 이뤄집니다.
회심이라는 이 은혜의 역사는 한순간⑥에 이뤄질 수밖에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앞에서 살펴본 대로 어떤 사람이 은혜의 상태로 들어오게 될 때 그 사람 안에 존재하게 되는 미덕이나 은혜는 회심하기 이전에 있던 모든 것과 그 본질과 종류에서 완전히 다릅니다. 그렇다면 이것으로부터 다음과 같은 결론이 자연스럽게 도출될 수밖에 없습니다. 어떤 사람이 실제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은혜의 상태 안에 들어오기 바로 직전까지도 그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자녀 안에 있는 진정한 선善과 참된 미덕이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회심이라는 이 은혜의 역사는 한순간⑦에 이뤄질 수밖에 없습니다.
성경에서 회심을 상징하고 있는 여러 가지 표현들도 회심이 한순간⑧에 이뤄지는 역사임을 말해 줍니다. 성경은 회심을 창조創造에 비유합니다. 아무것도 없는 가운데서 어떤 것을 창조하시는 일은 한순간⑨에 이루시는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면 그 말씀은 즉각⑩ 그대로 실현됩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면 그 명령은 즉각⑪ 효력을 발휘합니다.
성경은 회심을 부활에 비유합니다. 죽은 자들이 다시 살아날 때 그 일은 한순간⑫에 이뤄집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은 지 나흘이나 지난 나사로를 무덤에서 불러내셨을 때도 그 일은 한순간⑬에 이뤄졌습니다. 나사로가 다시 살아난 일은 점진적으로 이뤄진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나사로야, 나오너라!” 말씀하셨고, 그 말씀과 동시⑭에 나사로는 다시 살아났습니다. 나사로는 그리스도의 음성을 듣자마자 즉시⑮ 다시 살아났습니다.
그리스도께서도 요한복음 5장 25절에서 회심이 한순간⑯에 이뤄지는 역사임을 말씀하셨습니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이 말씀은 회심의 역사에 관한 말씀으로 이해해야만 합니다. 창조 사역에서 하나님께서는 무無에서 어떤 것을 불러내십니다. 그러면 그것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즉각⑰ 응답합니다. 부활에서 죽은 자들은 하나님 부르심을 듣습니다. 그러면 그들은 즉각⑱ 다시 살아납니다. 하나님께서 부르시자마자 죽은 자들은 즉각⑲ 순종합니다. 이와 같이 회심의 역사가 즉각⑳이기 때문에 성경이 회심을 표현하는 명칭 가운데 자주 사용되는 것으로 “부르심”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로마서 8장 28절에서 30절을 보십시오.
···(중략)···
이와 같은 성경구절들에서 “부르심”은 다른 뜻이 아닙니다. ‘부르심’은 그리스도께서 죄인을 구원에 이르도록 회심케 하실 때 이루시는 역사입니다. 방금 전에 인용한 여러 성경구절들을 볼 때 분명히 회심은 점진적으로 이루시는 역사가 아닙니다. 즉각㉑으로 이루시는 역사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 위대한 능력으로 강력한 말씀을 발하실 뿐입니다. 그러면 그것은 즉각㉒ 이뤄집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죄인을 부르실 뿐입니다. 그러면 죄인의 마음은 즉각㉓ 응답합니다.
···(하략)···
추론 2: 그러므로 여기에서 우리는 회심과 관련해 한 가지 사실을 더 깨닫게 됩니다.
‘사람의 본성적인 모든 능력과 영혼의 모든 원리들이 활발하게 활동하고 그것을 옆에서 도와주는 세력이 있을지라도, 그렇게 해서 사람의 본성적인 모든 능력과 영혼의 모든 원리들이 현저하게 향상된다 할지라도, 사람은 자기 자신의 힘과 노력을 통해 스스로 회심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런 방법을 통해 성취되는 것은 점진적인 습득일 뿐 순간㉔으로 일어나는 변화도 아니고 그 직전까지 그 사람의 인격 안에 있던 모든 것과 본질이나 종류가 완전히 다른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중략)···
그러므로 여기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자연스럽게 얻게 됩니다.
마음에 심겨지는 구원 은혜는 사람이 자기 안에 이미 소유하고 있는 모든 재능을 활용하는 것만으로는 이뤄질 수 없습니다. 양심을 크게 각성케 하는 권고가 사람의 본래 가지고 있는 재능을 아무리 크게 자극한다고 할지라도, 그것만으로는 구원 은혜가 이뤄질 수 없습니다. 그럴 수 없습니다. 사람이 자신의 본성적 원리들을 활용하는 가운데 외부로부터 아무리 많은 도움을 받을지라도, 그것만으로는 구원 은혜가 이뤄질 수 없습니다. 이 모든 것을 능가하는 어떤 것이 개입하지 않는 한, 다시 말해 하나님의 직접 개입이나 역사가 없는 한, 사람이 자기 안에 이미 가지고 있는 모든 재능을 다 활용한다 할지라도 그것만으로는 마음에 심겨지는 구원 은혜가 이뤄질 수 없습니다. 은혜는 하나님의 직접 역사임에 틀림없고, 따라서 “영혼에 이루시는, 하나님 전능하신 능력의 산물이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 조나단 에드워즈 {기독교 중심: 이신칭의론과 은혜론} 이태복 역 (서울: 개혁된 신앙사, 2002)
305쪽~337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