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근대 화단의 거목 이당 김은호의 아낌없는 사랑
제자모임 후소회 한국화단 족적남긴 작가들 대거참여
현대적 감각 구현 부단한 시도 ‘독특한 작품세계 구축’
자연을 작가의 재창조…‘사유원형 시리즈’ 작품 선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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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주봉 화백’은 이당(以堂) 김은호의 마지막 제자이다. |
[일요주간 = 정선모 작가] 코로나19로 인해 모두들 암울한 시간을 보내고 있을 즈음, 종로5가에 있는 이정 장주봉 화백의 작업실을 찾았다. 마침 그림을 그리고 있었는데 화가의 붓이 지나간 자리마다 꽃분홍 모란이 송이송이 피어났다. 먹구름이 잔뜩 긴 세상에 화가의 붓이 스치니 순식간에 화사한 꽃밭으로 바뀐다. 마치 창조주가 태양을 만들어 캄캄한 혼돈의 세상을 밝은 빛으로 가득 채우는 것을 목격한 듯 경이롭다.
● 이당 김은호 화백의 마지막 제자다. 이당 선생과의 인연은?
▼ 20세 되던 해 한국 근대 화단의 거목 이당 선생님을 처음 만났다. 당시 70세를 넘긴 선생님께서는 무작정 찾아간 내게 “내 그림을 따라 그려보라.”고 하셨다. 매일 선생님 댁을 찾아가 내주신 과제를 그렸다. 제자 사랑이 유별하신 분이셨지만 재능보다 사람 됨됨이를 더 중요하게 생각하실 정도로 참교육자요, 철저한 예술정신을 가르치신 예술교육자라고 생각한다.
예술가는 품성이 올바르지 않으면 세상을 어지럽히는 사람이 된다며 늘 예와 격을 강조하셨다. 본인의 아호인 이정(以汀)도 당신의 아호인 이당(以堂)의 이(以) 자를 넣어 직접 지어주실 정도로 각별한 사랑을 받았다. 이당 선생님이 돌아가신 후엔 이당기념관 관장을 맡아 10여 년 동안 운영했다.
이당 선생님의 제자 모임인 후소회(後素會·1937년)는 현대 미술계에 큰 영향을 준 작가들이 대거 참여하고 있는데, 그동안 회원전과 공모전 개최 등을 통해 한국 화단의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고 자부한다. 지금도 이당 선생의 예술혼을 이어받은 후소회 활동은 계속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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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유원형~금강운해’ 금강산의 사계 중 비온 후 안개 서림을 표현. |
● 그림 제목이 ‘사유원형’ 시리즈인데, 각별한 의미가 있을 것 같다.
▼ 작가의 사유는 자연에서부터 비롯된다. 자연이라는 대상을 재해석하여 작가의 시각으로 응집 또는 분해하는 과정을 통해 진정한 자아를 찾아나가는 여정이 바로 ‘사유원형’ 시리즈 작품들이다.
작가의 사유체계를 통해 인식한 대상물이 감성적 접근으로 형상화될 때 비로소 하나의 작품이 탄생하는 것이다. 사유와 감성이 적절한 조화를 이룬 작품에 설득력이 부여될 수 있다고 본다. 대상을 해체하고 분해하여 새롭게 해석해 나가는 과정 속에서 다양한 기법이 생성된다.
이러한 기법으로 표현된 작품은 기존의 한국화를 바탕으로 하면서도 현대적 감각이 분출되어 나만의 독특한 작품세계가 형성되는 것이다. 앞으로도 새로운 표현방법을 위한 과감한 시도는 끊임없이 이어질 것이며, 그 과정에서 어떤 작품이 탄생될지 기대하는 것도 큰 즐거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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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유원형~향원익청’ 노을에 물든 황금빛 황혼을 몽환적으로 표출. |
● ‘新세한도’나 ‘연꽃’ 시리즈와 같은 그림을 통해 투사되는 함축적 메시지는?
▼ ‘세한도’는 추사가 제주도로 유배 갔을 때 북경에서 귀한 책을 구해다 준 제자 이상적에게 답례로 그려준 작품이다. 이상적의 인품을 추위에도 아랑곳없이 청청한 소나무로 표현한 것을 재해석하여 ‘신세한도’ 시리즈를 그렸다. 유배당한 후 외면했던 사람들에게 받은 상처와 이상적에 대한 고마움을 현대적으로 표현한 작품으로, 작은 이익을 위해 쉽게 변절하는 세태 속에서 굳건히 의리를 지키는 모습을 표현하고 싶었다.
‘연꽃’은 ‘꽃 중의 군자’라고 예찬한 송나라 주돈이(周敦頤)의 말처럼, 그 상징하는 바가 매우 크다. 진흙에서 자라도 맑고 향기로우며, 줄기 속이 텅 비어도 꼿꼿함을 유지하는 모습에 누구나 매료당할 것이다. 어떤 상황에서도 품격을 잃지 않는 연꽃을 다채롭게 표출하는 작업을 통해 내면이 지닌 아름다움을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하고 싶어 ‘연꽃’ 시리즈를 계속 제작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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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유원형~원무’ 기러기가 창공에서 춤추고 노래하는 화합을 묘사. |
● ‘기러기 작가’라는 별칭이 있을 정도로 기러기 그림이 범상하고 독특하다.
▼ 물론 스승의 영향력이 컸지만, 원무(圓舞) 시리즈로 표현했다. 둥글게 춤추고 노래하는 기러기 무리가 마치 교향악을 연주하는 듯 화합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기러기가 상징하는 것은 바로 ‘사랑, 화합, 질서’이다.
모든 인간은 평등하고 존귀하다는 걸 정형화된 묘사보다는 활달하고 기운이 생동하는 동세(動勢: 조각이나 회화 작품에서, 마치 움직이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를 통해 표출하고 싶었다. 그러나 즐겨 기러기를 소재로 다루다 보니 ‘기리기 작가’란 세평이 들리고, 그 말이 마치 한 가지 소재만 잘 다룬다는 뜻으로 각인된 것 같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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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유원형~무위’ 연꽃을 통해 세상을 투시. 판화를 접목하여 모든 형상의 존재를 다양한 색채로 추상적으로 구성. |
● 전통 화풍에 안주하지 않고, 끊임없이 다양한 기법을 시도하는데?
▼ 예술가는 창조자와 같다. 끝없는 실험을 통해 자기만의 독창적인 표현기법을 찾아내어야 한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사유를 통해 자신이 선택한 소재를 분리하고 조립하며 완성하는 가운데 보다 예술적 표현으로 의도한 바를 드러내는 작업이 바로 화가가 할 일이다.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모습을 묘사하는 작업은 늘 새로움을 느끼게 한다. 지금도 영감이 수시로 떠올라 아침에 눈을 뜰 때마다 설렌다. 그리고 싶은 것이 너무 많아 가슴 벅찰 때가 많다.
실은 올 3월 28일, 프랑스 파리 개선문 근처의 시청 홍보실에서 한 달간의 초대전을 앞두고 있었는데 코로나19 바이러스로 인해 무기 연기되었다. 작품 70점이 이미 그곳에 가 있다. 지금의 상황이 진정되면 전시회가 열릴 것으로 보인다. 파리 시민들이 작품을 보고 어떤 반응을 보일지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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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유원형-新 세한삼우’ 엄동설한에 꿋꿋하게 푸르름과 향기를 피어내는 ‘매화, 대나무, 소나무’의 삼우(三友)를 통해 지조와 절개, 의연한 모습을 표출. 현대적 구성으로 색채를 대담하게 혼용. |
● 화가로서의 삶의 편린(片鱗)과 묵상의 추억은? 그리고 대선배로서 한 말씀!
▼ 인천에 있는 이당기념관 관장 시절에 많은 향토 예술가와 진지하게 ‘신포동 문화’를 이끌었다. 어둠이 깔리면 노을주 한 잔에 예술계 비판과 작품 비평으로 난상토론을 벌이며 보다 수준 높은 예술 발전을 위해 노심초사했다. 당시 정신적으로 삶의 지평을 열어준 선배 문인, 화가, 음악가, 연극인, 사진가 등 수많은 예술가들과 교우한 기억을 잊지 못한다.
현대가 글로벌 시대라서 그런지 서양적인 것이 현대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우리 것, 내 것이 현대적이고 세계적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한국화의 고유한 독창성을 살리며 보다 창의적으로 발전해 나가는 것이 우리의 과제이다. 전통의 기반 위에 새로운 형상성과 시대성을 반영, 우리만의 세계를 구축하여 표출하는 데 화가들은 더욱 집중해야 할 것이다.(도서출판 SUN 정선모 대표)
■ 이정(以汀) 장주봉 프로필
現) 한국미술협회 상임 자문위원
前) 대한민국 미술대전 심사위원장
前) 인천광역시미술대전 운영위원장
대한민국 미술의 해 문화부 장관상
유네스코 문화유산 초대전 개최
[출처] 이당 김은호의 마지막 제자 ‘장주봉 화백’ |작성자 림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