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천교와 수제화거리>
서울은 가볼 데 천지인 곳이다. 구비구비 사연도 많고, 볼것도 많다. 특히 서울역 근처는 볼데 천지이다. 오늘은 근처 염천교와 그 옆 수제화거리를 돌아본다.
주소 : 서울시 중구 의주로 2가
방문일 : 2020.2.1.
염천교 수제화거리는 산업화 시기에는 수제화 생산의 중심지로서 전성기를 맞이했다가 수제화 공장과 상점이 성수동으로 이전하고, 값싼 중국산에 밀리면서 점점 쇠퇴하였다. 성수동보다 영세하여 유행에 예민하지 않은 남성화 중심으로 특화되어 있다. 실제로 이 거리에서는 주로 남성화가 눈에 띈다.
문재인 대통령이 신고 있었던 헤진 수제화가 화제가 된 적이 있었다. 청각장애인들이 만든 '아지오' 상표의 수제화였는데, 경영난으로 이미 폐업했던 구두 가게는 엄청난 사람들의 후원 속에서 다시 개업하여 가게를 꾸리게 되었다. 이 모든 과정이 화제가 되면서 수제화가 관심을 끌게 되었다.
이런 인연에서인지 문대통령은 올해 20년 1월에 성수동의 수제화 거리를 방문, 수제화 명인 유홍식의 가게를 들르기도 했다. 성수동은 '2012년 '수제화 산업지역특화지역'으로 지정되어 구두를 문화상품으로 삼아 상권도 살리고, 지역문화도 살려 관광과 산업을 함께 잡으려는 전략을 구사하고 있다.
수제 생산은 대부분 공장 대량생산에 밀리고, 공장 제품은 중국산 싼 제품에 밀려난다. 수제품은 1단계 발달과정에서 밀려나지만 디자인과 기능이 함께 한다면 전통과 문화가 힘을 보태므로 가능성이 있다.
네덜란드는 바다보다 낮은 나라인데, 그래서인지 뻘같은 습지가 많아 농사일을 하는 사람들에겐 신발이 늘 문제였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5,6백년 전부터 나막신 '클롬펀(klompen)'을 수작업으로 만들어 신었다. 클롬펀은 습기뿐 아니라 한기도 막아주어 농사일에 아주 유용한 신발이 되어주었다.
나막신은 우리만 신는 것이 아니다. 일본의 게다는 나무로 만들었지만 앞뒤가 터져 있으므로 우리 나막신과 네덜란드의 클롬펀과는 조금 다르다. 네덜란드와 우리는 똑같이 나막신을 신었다.
네덜란드의 한국학자 한 분이 한국의 나막신은 네덜란드에서 왔다고 주장한다는 것을 전해들었다. 그렇다면 제주도에 표류해 온 네덜란드인 박연이 전했다는 것인데, 박연이 표류해 온 해는 1627년인데 고려시대 문인 이곡(1298~1351)의 문집에도 나막신이 여러번 등장한다. 기원전 진나라 완부도 나막신에 밀랍을 묻혀 신었다는 말이 역시 이곡의 <가정집>에 나오는 걸 보면 중국에서도 일찍부터 신었다는 말이니 네덜란드 전파로는 보기 어렵지 않은가 싶다.
그러나 박연 이후 하멜이 제주도에 표류해와서 조선에 13년 동안 체류했다. 강진 '지역은 네델란드인 하멜일행이 1656.3 ~ 1663.2월까지 약 7년간 억류생활을 했던 곳이다. 하멜일행 33명은 이곳에서 생활하면서 몇몇은 결혼해 살기도 했으며, 생계를 위해 잡역을 하거나 나막신을 만들어 팔았고 춤판을 벌여 삯을 받기도 했다. 우리나라 나막신이 일본의 나막신과 달리 네델란드와 같이 통으로 만들어진 것을 볼때 이들이 나막신을 전래한 것이 아닌가 추측'(대한민국 구석구석)하기도 한다.
나막신 자체는 이전부터 있었던 것이라 해도 모양은 네덜란드 영향을 받았을 수 있다. 어디서나 요즘같은 신발이 없던 시절에는 나무 신발을 만들어 신었을 것이다. 우리도 초기에는 일본의 게다처럼 나무를 줄로 묶어 신었다가 차츰 굽이 있는 신발 모양의 나막신 모양새를 갖추게 되었을 것으로 추측되는데 이 과정에서 하멜을 통한 네덜란드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있다.
분명한 것은 우리도 해뜨는 날에는 짚신을, 비오는 날에는 나막신을 신었다는 것이다. 비가 오면, 짚신 장사가 울고, 해가 뜨면 나막신 장사가 웃는다. 짚신 장사와 나막신 장사를 아들로 둔 어머니는 매일 울어야 했다. 그러다 비가 오면 나막신이 팔리고, 해가 뜨면 짚신이 팔리니 항상 좋은 일 아니냐는 말을 듣고 어머니는 매일이 웃는 날이 되었다.
그러나 네덜란드의 육지는 언제나 바다보다 낮았다. 웃을 날이 없이 언제나 클롬펀을 신어야 하는 것이다. 클롬펀은 국민신발이 되었고, 급기야는 풍차와 함께 나라의 상징이 되었다. 수요가 많아지고 산업화가 되자 클롬펀은 공장에서 대량으로 생산되어 1930년대 이후 수공업이 현저하게 위축되었다.
하지만 아직도 신발장인은 4대 5대째 물에 젖은 포플러 나무를 깎아 수제 나막신을 만든다. (EBS 세계테마기행, 유럽 속 작은 거인, 베네룩스3국 참조)나만의 독특한 문양을 넣을 수 있고, 독특한 색깔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수제 클롬펀은 신발을 넘어 예술품이 되고 관광객들에게는 기념품이 되었다. 풍차의 고장 잔세스칸스에 가면 나막신 박물관이 있고, 만드는 과정을 직접 보는 워크숍도 진행한다.
나막신은 다 헤져도 버리지 않는다. 헤어지면 새집도 되고, 화병도 되고, 장식품도 된다. 나막신을 신고 추는 나막신댄스도 있다. 하나도 버릴 게 없는 나막신은 아직도 농부들의 작업화이며, 관광객을 위한 문화상품이다.
똑같이 맞은 1930년대의 기계화로 우리는 고무신을 만들어 나막신을 다 버렸는데, 그들은 기계화로 클롬펀을 만들어 문화상품으로까지 승화시켰다. 나막신은 그들에게 현재의 신발이고 우리에게는 과거의 신발이다.
네덜란드는 클롬펀을 처음부터 지금까지 그대로 신고, 우리는 게다에서 나막신으로 고무신으로 갔고, 일본은 초창기의 게다를 지금도 그대로 신는다. 변화를 빨리 수용하는 성향이 나막신에도 반영되었다. 대체로 수입과 전통이 융합하지 않고 병행하는 일본은 게다가 그대로다. 신발에서도 문화적 특성이 나타난다.
우리 수제화는 어떤가. 문대통령이 띄워주고, 지자체가 띄워주고, 이처럼 장인거리를 지정해 문화적인 의미를 강조해준다. 부활해서 네덜란드 클롬펀처럼 문화적 상품으로 롱런할 수 있을까. 자리는 깔아준 셈이니 관련 종사자와 우리 소비자가 합동해서 해낼 숙제가 되었다. 클롬펀도 벤치마킹하면서 문화적 힘을 왕성하게 끌어내보자.
*염천교
기능이 문화와 만나는 수제화의 또 하나의 공간이 성수동과 이곳 염천교 수제화 거리다. 염천교는 서울역 옆에 서울역에서 나오고 들어가는 기차가 지나야 하는 철길 시작점 위에 있는 다리이다. 서울로 들고나는 모든 사람이 지나는 길목인 셈이다.
그래서인지 많은 사람이 염천교를 기억하며, 많은 드라마와 영화 속에서 주요 배경이 되기도 하였다. 노래로도 불리고 영화로도 재생되는 염천교는 서울 사람들의 일상과, 서울에서 방사선처럼 뻗어나가는 삶의 공간을 사는 한국 사람 모두에게 익숙한 공간이다.
염천교는 화약을 제조하는 염초청이 있어서 염청교, 또는 염초청교라고 불렀다. 발음이 와전되어 염천교가 되었는데, 이것이 그대로 지금의 공식 이름으로 쓰인다. 염천교 외에 염춘교라는 이름으로도 와전되었는데, 이미자의 노래에는 염춘교라고 되어 있다. 아직도 염춘교라 하는 사람들이 많다.
영화는 '울며헤진 염춘교' , LP판은 '울며헤진 염천교' 라고 되어 있다. 입으로 전달되며 와전되는 명칭을 두 갈래의 제목이 잘 보여준다. 박구 감독의 영화는 부모와 사별하고 상경한 남매가 해마다 한번씩 만날 것을 다짐하고 염춘교에서 헤어진다. 김지미, 황해, 최남현이 주연했고, 주제가도 가요사에서 획을 그은 바 있다. 1966년에 나온 노래로 이미자가 불렀다.
작사는 박시춘이 했다. 박시춘은 오향영화사를 만들어 영화도 만들었는데 이 영화도 바로 그가 만든 것이다. 영화와 주제가 작곡을 함께 한 것이다.
염춘교는 영화도 드라마도 많이 찍은 곳이다. 사실 서울역이 나오는 영화에는 많이 나올 수밖에 없다. 서울역에서 헤어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서울 아이들은 어머니가 염춘교 다리밑에서 주워왔다고 하는 말을 많이 듣고 자랐다. 서울역 근처라는 지리적 위치 탓인지 예로부터 거지나 부모없는 부랑아들이 진을 치고 있던 곳이다. 특히 6.25후 어려운 시절에는 더욱 그러하였다. 화려한 서울역과 바로 아래 염춘교의 슬픈 대비가 시대의 아픔을 명징하게 보여주던 곳이었다. 드라마 <왕초 김춘삼>의 주 촬영지가 이곳인 이유, 아이를 버린다는 곳이 이곳인 이유를 알 수 있을 듯하다.
덕분에 젖먹이 어린이에서부터 회자정리의 연인에서부터 고달프게 살아가는 서민에서부터, 우리에게 염춘교는 익숙한 공간이다. 지금의 염천교는 1978년에 건설되었다. (서울지명사전 참조) 일상에 익숙한 공간 염천교를 건너면 수제화거리다.
*수제화거리
<울며헤진 염춘교>
부모도 잃은 남매 정든고향 하직하고
낯은 서울역에 손가락에 맹서걸고
2년 후 추석날밤 염춘교에 달이뜨면
돈 벌어 만나자고 울며헤진 멍든가슴
아이무슨 슬픈운명 하늘아래 두 남매
광화문 네거리에 신문파는 내동생아
서울의 처마밑엔 비바람만 야속쿠나
낮에는 여공살이 밤이면은 미용학원
이 험한 세파에도 희망안고 살았건만
아, 그희망 잃은순정 갈곳없는 두 남매
*수제화거리에 자리잡은 구두가게는 간판마저 고전적 수제방식으로 제작된 것이라 한다.
<대동여지도>를 만든 고산자 김정호가 이곳에 살았다는 비석이 수제화거리가 끝나는 교차로에 세워져 있다.
이제는 아픈 추억이 담긴 거리가 수제화거리로 보존되고 있다. 나막신은 사라졌지만 이렇게 보호받는 수제화는 네덜란드의 클롬펜이 될 수 있을까.
*염천교
*염천교 건너기 전 맞은편에도 수제화 전문점이 눈에 띈다.
*서울역
강우규(1855~1920) 동상. 일본총독을 암살하기 위해 서울역에서 수류탄을 던졌으나 실패하고, 일본경찰 등 37명을 사상시킨 독립운동가다. 현장에 있는 그의 동상은 아직도 서울을, 우리를 지켜주는 것 같다.
하얼빈에서 안중근 의사가 거사를 일으킨 것과 닮았다. 하얼빈역에 2014년 개관한 기념관에는 관련 사진이 전시되어 있고, 기념식 등의 행사가 진행된다. 안중근을 기리는 현장성 담은 기념방식이 위로가 된다. 여순 감옥, 한 두평 크기의 작은 방과 사형이 집행되었다던 감옥 내 언덕배기 공간을 보고 가슴이 무너져 내렸던 기억이 새롭다. 시신들을 옮겼다던 망태기, 맨정신으로는 기억하기 힘들다.
상해 훙코우 공원에는 윤봉길 의사 기념관이 있다. 20대 젊은 나이에 나라를 위해 순절한 그 절절한 애타심에 목이 메인다. 무심한 인파 속 번잡한 공원이지만 기념관은 한가한 곳에 자리하고 있다. 하지만 아직도 서려 있는 그 결기가 아직도 멀리서 나라를 지키는 것만 같다.
우리는 선현들에게 참 많은 빚을 지고 산다. 그 마음의 빚이 대한민국을 이렇게 일으켜 세웠을 것이다. 이제 인류를 세워야 될 차례 아닐까.
*애환이 서린 서울역사를 헐지 않고 문화공간으로 보존하고 있다. 그 옆으로 현 서울역사가 보인다.
오늘 서울역 광장은 한가하다. 신종코로나 덕분이다. 어쩌다 보이는 사람들도 모두 마스크 차림이다. 서울역도 특별한 날, 특별한 시간이다.
서울역에서 오른쪽 남산 오르는 길
*서울스퀘어
한때는 서울역 정면에 있는 이 대우빌딩이 서울역보다 더 독한 인상을 남겼었다. 서울에 도착하면 대우빌딩이 서울을 대표해서 마음을 가다듬게 만들었다. 대낮에도 코베어가는 서울에 왔으니 조심해야지, 압도되는 빌딩 앞에서 맘을 추스리게 했던 빌딩. 아마도 상경하는 많은 사람들 기억 속에 네모나고 위압적인 이 빌딩의 인상이 남아 있을 것이다.
이제는 많은 건물들 속의 하나로 평범하게 물러나 있는 듯해서 서울의 변화가 역으로 감지된다. 이제는 이름도 서울스퀘어, 아예 이름도 바뀌어버렸으니 서울이 변화가 얼마나 깊고 큰지, 거기서 기죽지 않는 사람들의 크기도 얼마나 커졌는지 헤아릴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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