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적 거리두기가 한창이다. 현대 도시인의 삶에서 사람의 집단과 멀어진다는 것은 자연과 가까워진다는 것이며, 그 거리두기의 이유란 다시 사회를 유지하기 위한 것이라는 점에서 결국 사람도 사회도 대자연의 순환 속에 존재하는 것이라는 걸 실감하는 요즘이다.
국립공원공단 집계에 따르면 올 상반기 북한산을 찾은 등산객은 전년에 비해 40% 이상 늘었다. 이렇게 폭발적으로 등산객의 규모가 늘어난 것은 과거 외환위기 때 이후 처음인 것 같다. 하지만 과거와 다른 점은 산에 가는 사람들의 연령대가 20여 년전 4~50대 중장년층이었던 것에 비해 20~30대 젊은 인구의 비중이 부쩍 늘었다는 것이다.
삼삼오오 모여 산을 오르는 젊은이들에게 그 이유를 물었다. 돌아온 대답은 간단했다. 다니던 헬스장이 문을 닫아서. 요즘 SNS에 등산이 유행이라서.
지난날 한국인들에게 산에 가는 이유를 물었을 때 가장 많은 응답이 ‘건강을 위해서’라거나 ‘사교를 위해서’였던 것을 생각해 본다면 요즘의 사회적 거리두기가 바꾸어놓은 풍경이란 본질의 변화라기보다 형식의 변화이며, 또한 사회적 거리두기가 만들어낸 또 다른 가상 사회의 생성이라고도 볼 수 있다.
과거 ‘산악회’라는 이름으로 관광버스를 타고 수십 명이 어울려 등산 뒤 막걸리 한잔을 하던 풍경은 요즈음에 와서 서너 명의 마음 맞는 ‘크루’들이 저마다 대중교통을 타고 마스크를 쓰고 모여 가벼운 레깅스 차림으로 산을 오르고 정상에서 가장 멋진 인증샷을 남겨 불특정 다수의 시선이 모이는 소셜 네트워크에 존재감을 알리는 형태로 변화한 것이다.
중장년 남성 유저가 가장 많은 페이스북과 젊은 여성 유저들의 비중이 비교적 높은 인스타그램에서 각각 ‘등산’이라는 단어로 검색했을 때 나오는 결과를 보라. 같은 산의 다른 풍경들 같지만 결국 세대를 관통하는 ‘건강’과 ‘사교’라는 한국적 등산문화의 키워드는 변하지 않았다. 따라서 지금의 산들에 사람이 넘쳐난다고 하여 특별히 우리의 산에 새로운 시대가 찾아온다고 호들갑을 떨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아웃도어 의류와 용품 시장규모는 한때 7조원을 넘기며 미국에 이어 세계 두 번째였다. 아웃도어 업계는 요즘과 같은 등산 유행을 보며 과거의 호황이 다시 찾아올지 내심 기대하기도 하지만, 실상 지난 20여 년의 가파른 성장곡선을 생각해보면 그 양적 팽창이 문화의 질적 변화를 이루어내지 못하고 결국 ‘산에서 음주 금지’라는 초유의 법률까지 나오게 된 배경이 되었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한다.
국립공원 대피소마다 삼겹살 굽는 냄새가 진동을 하고 주말 등산로 구석구석마다 얼굴 벌게진 사람들의 고성이 오가던, ‘높은 곳으로 올라간 카바레 문화’의 풍경은 사회적 거리두기로 인해 잠시 사라졌지만 결국 우리가 산에 가는 이유를 다른 데서 찾지 않는 이상 산이라는 공간을 새로 채워가는 젊은 세대들이 이곳에 언제까지 머물 수 있을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우리보다 등산의 역사가 오래되었고 산과 관련한 다양한 문화생산물들이 풍부한, 그래서 굉장히 상대적 개념이긴 하지만 이른바 ‘산악선진국’으로 불리는 나라의 등산동호인들이 산에 가는 이유를 ‘조망’에서 찾는다는 점에서 나는 그들의 등산이 높은 곳에 오르고 싶어 하는 인간의 본성에 더 가까운 활동이라고 본다.
물론 이를 일반화시켜 저들은 우수하고 우리는 열등하다는 말을 하려는 것은 아니다. 적어도 지금 산을 오르기 시작하는 젊은이들이 이 산에 배인 지난 역사를 알고, 발길에 차이는 풀꽃에 눈을 돌리고, 산정에 올라 자신이 빠져나온 ‘사회’를 바라보며 다시금 스스로의 존재에 대한 화두를 고민할 수 있기를 바라는 것이다.
서울의 진산 북한산은 그런 면에서 참 다행스런 공간이다. 시내에서 한 시간이면 어느 코스든 닿을 수 있는 접근성은 세계 어느 나라의 수도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북한산만의 가장 큰 이점이다. 여기에 주능선을 경계로 동서로는 천년고찰 화계사와 진관사가 자리하고 있고 남북으로는 승가사와 망월사가 있어 어느 쪽에서도 올라도 가람의 기운을 느낄 수 있다.
이러한 오랜 사찰들이 들어서게 된 배경은 북한산의 위치와 모습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서울시내 어디에서도 바라보이는 최고봉 백운대(836.5m)와 인수봉(810m), 만경대(800m)는 예로부터 세 개의 뿔, 삼각산(三角山)이라는 이름으로 불려왔다. 조선왕조가 도읍을 정하기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 신라의 진흥왕이 나라의 경계비를 북한산에 세우고, 백제는 북한산이 바라보이는 한강 가에 위례성을 쌓은 것을 보면 이 땅 어디에서도 북한산만한 풍경과 지리는 찾아보기 힘든 것이다. 이러한 일련의 정치사회적 결정들은 자연스레 민중의 산에 대한 숭배로 이어졌고, 때문에 북한산은 기복을 바라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던 것이다.
1745년 엮여진 <북한지(北漢誌)>에 따르면 고구려 동명왕의 아들 비류와 온조가 부아악(負兒岳)에 올라 살만한 곳을 살폈다는 기록이 나온다. ‘부아’를 한자로 읽으면 아이를 업고 있다는 뜻이지만, 향찰로 읽으면 ‘불’, 즉 ‘불두덩’, 남성의 성기라는 말이다. 생산과 풍요를 기원하는 고대인들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있는 곳이 바로 인수봉이다. 가장 긴 곳이 200여 미터에 달하는 매끈한 암벽은 오랫동안 사부대중들의 기도처였고, 이 주변으로 사찰들이 생겨나게 된 것도 자연스런 현상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북한산이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 전하는 결정적인 계기는 숙종 37년(1711) 만든 북한산성의 수축에 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은 조선왕조는 유사시 도성과 바로 연결되는 배후 산성의 필요성을 절감했고, 북한산성을 거대한 군사기지이자 왕의 피난처로 만들기 이른다. 산성의 축성 이후에도 사람들이 북한산을 드나들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왕의 행궁과 군대가 주둔하는 상황에서 과거와 같은 자유로운 왕래에는 제약이 따랐다.
북한산에 다시 사람들의 발길이 잦아진 건 구한말을 지나며 서구로부터 산을 오르는 행위 자체를 목적으로 하는, 이른바 ‘근대적 등산’이라는 행위가 소개되면서부터이다. 일제강점을 거치며 일본인 유지들의 모금으로 1927년 백운대에 철난간이 놓이고 1940년 도쿄올림픽을 앞두었던 일제가 우이동과 북한동, 정릉 일대 등 식민지 경관을 유원지화하며 북한산은 서울의 새로운 관광과 여가문화의 중심지로 자리 잡게 된 한편 시민들의 휴식처로 지금까지 이어왔다.
백운대를 오르는 가장 빠른 코스인 우이동에서 도선사까지 이르는 길의 이름은 도로명 주소로 바뀌기 전에는 ‘청담로’였다. 도선사는 1950년대까지 도선암이라 불리던 작은 암자였지만 성철 스님 등과 함께 봉암사 결사를 통해 불교정화운동을 펼치며 대한불교조계종을 재건한 청담 스님이 기거하며 중창불사해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청담의 지극한 인연 박정희와 육영수의 영정이 걸린 명부전과 우리나라 어느 사찰에도 없는 ‘호국참회원’을 지나면 나오는, 시도유형문화재 34호로 지정된 마애여래입상은 암만 다시 봐도 못생긴 미륵을 닮았다. 이렇듯 오래도록 사람이 드나들었던 북한산에서, 지난한 삶을 살아 버티며 누군가는 세상에 없는 미륵 하나쯤 이 깊은 산속에 새기고 싶지 않았을까. 우이천 물줄기를 따라 내려가다 보면 ‘만경폭’이라 기록된, 우이구곡 제1곡에 새겨진 ‘미륵’ 바위 글씨가 선명하다.
56억 8천만년 후에 지금의 이 거리두기 시대는 어떻게 기록될까. 작금의 이 사회에 태어난 사람이 타인과의 첫 번째 거리두기가 될 수능대입합격기원을 위한 불사가 한창이다. 누군가는 마스크를 쓰고 합장을 하고 누군가는 마스크를 쓰고 산을 오른다. 마스크 뒤에 가려진 저마다의 얼굴들은 무슨 표정을 짓고 있을까. 그 마스크 사이의 거리는 언제쯤 모두 사라져 탐함도 아낌도 없이 지혜와 위덕을 갖추고 안온한 기쁨으로 미륵의 모습으로 마주할까.
첫댓글 전철로만으로도 접근할수있는 세계 유일의 산
진산이며 모암이며 .... 그냥 오래된 친구
동판 틀속에서 부가가치를 창출하고 계신 미륵불은
그려 참 별로 이쁘지않지
이름만 이쁘지...
글 잘읽고 갑니다 역시 글의 기품이 있습니다 북한산의 기품이 더 와닿습니다 감사 합니다.
북한산을 더 알게 해주네요. 우리가 거기 오르는 건 우리 사이의 잡스러운 거리를 제해나가는 과정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좋은 글 고맙습니다.
역사적으로, 현실적으로 여러각도의 관점을 표현해주셨네요. 잘 읽었습니다. 좋은 글 계속 부탁합니다!
잘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