챈들러 스타일
매일 무얼 하며 지내냐고요? 쓸 수 있을 때는 쓰고, 쓸 수 없을 때는 안 쓰죠. 대개 아침이나 이른 오후 무렵에 글을 씁니다. 밤이면 무척 현란한 생각들이 떠오르는데 지속은 안 돼요. 오래 전에 그 사실을 깨달았죠. 작가들이 영감을 기다리지 않는 법에 대해 쓴 소소한 글들을 늘 보고 있습니다만, 비가 오나 날이 맑으나, 숙취에 시달리든 팔이 부러졌든, 그 사람들은 그저 매일 아침 여덟시에 자기들의 작은 책상에 앉아 할당량을 채우지요. 머리가 얼마나 텅 비었건 재치가 얼마나 달리건, 그들에게 영감따윈 허튼 소리. 찬사는 보내지만 그들이 쓴 책은 조심스럽게 피하겠습니다.
나로 말하자면, 나는 영감을 기다리는 편입니다. 굳이 영감이라고 명명할 필요는 없지만요. 생명력을 지닌 글은 모두 가슴에서 나온다고 생각해요. 한편으로는 대단히 피곤하고 지칠 수도 있는 고된 일이지요. 의도적인 노력이라는 측면에서는 전혀 일이 아니지만. 중요한 건, 전업 작가라면 적어도 하루에 네 시간 이상 일정한 시간을 두고, 그 시간에는 글쓰기 외에는 아무 일도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겁니다. 꼭 글을 써야할 필요는 없어요. 내키지 않으면 굳이 애쓰지도 말아야 합니다. 그저 창밖을 멍하니 바라보거나 물구나무를 서거나 바닥에서 뒹굴어도 좋아요. 다만 바람직하다 싶은 다른 어떤 일도 하면 안 됩니다. 글을 읽거나, 편지를 쓰거나, 잡지를 훑어보거나, 수표를 쓰는 것도 안 돼요. 글을 쓰거나 아니면 아무 일도 하지 말 것. 학교에서 규칙을 지키는 것과 마찬가지 원칙입니다. 학생들에게 얌전히 있으라고 하면 심심해서라도 무언가를 배우려 하죠. 이게 효과가 있답니다. 아주 간단한 규칙이에요. 첫째, 글을 안 써도 된다. 둘째, 대신 다른 일을 하면 안 된다. 나머지는 저절로 따라오게 마련입니다.
나는 매스컴의 관심이 싫습니다. 지금까지 많은 인터뷰를 해왔지만 시간 낭비였다고 생각해요. 인터뷰에 내 이름을 달고 나인 척 나오는 남자는, 대개 내가 알지도 못하는 웬 비열한 놈이더군요. 나는 어쩌다 미국 속어에 호감을 갖고 있는 지적인 속물인데, 라틴어와 그리스어를 익히며 자랐기 때문입니다. 미국 말을 마치 외국 언어처럼 배워야 했죠. 속어를 문학에 사용하는 것은 그 자체로 연구감입니다. 나는 문학에 쓸 만한 속어가 딱 두가지라는 걸 깨달았죠. 언어 속에서 스스로 자리 잡은 속어와 작가가 만들어 낸 속어. 나머지는 인쇄되기도 전에 사라져 버립니다. 하지만 그 문제에 대해서는 이쯤에서 그만두는 게 낫겠어요, 그렇지 않으면 일주일 내내 편지를 써야 할 테니까. (1949년 3월 18일)
* 챈들러의 팬을 자처하는 무라카미 하루키가 이 글을 들어 젊은 시절, '챈들러 방식'이라는 제목의 소소한 에세이를 쓴 적이 있다. 하루키는 다시 한번 읽어 보고 싶지만 출처가 기억나지 않는다고 했는데, 바로 이 편지다.
나는 어떻게 글을 쓰게되었나- 레이먼드챈들러 저, 안현주 엮음, 북스피어 p 55-57
첫댓글 성취를 이룬 작가들의 이야기를 듣다보면 공통점이 있다. 글쓰기 방식이야 영감에 의존하든, 철저한 시놉시스를 작성한 후 계획적인 글쓰기를 하든 그 방식의 차이와는 상관없이 온전하게 글쓰기에 투자하는 시간을 갖고 있다는 점이다. 챈들러는 전업작가라면 하루의 네 시간은 온전히 글 쓰는 곳에 투자하라고, 그것이 직접 쓰든 아니면 생각을 하든 개의치 않지만 온전한 시간을 투자하라고 이야기 한다. 하루 네 시간이라면 챈들러는 그나마 양반이다. 훨씬 더 지독하게 글에 몰입하는 작가들의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챈들러는 그런 면에서 어쩌면 천재 쪽에 가까울 수 있겠다. 하루 한 시간 이라도 글에 몰입하고 있는가 나에게 묻는다.
수필 봄날 회원입니다. 이글을 우리 카페에 옮겼답니다. 아마도 많은 울림이 되었을 것입니다.
녜! 잘하셨습니다. 밑줄 긋고 싶은 문장에 좋은 글 있으면 올려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