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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타의 세계 ④ 제1장 불타의 대지 – 인도 불교의 문화적 배경 제3절 도시(세존시대의 사회 격동) 1. 성도 바라나시 바라나시(베나레스) 거리의 가트에 서면 우리는 똑바로 동쪽을 향하게 된다. 가트란 강이나 연못 속까지 이어져 내려가는 계단을 설치한 장소인데, 힌두교도는 여기서 몸을 물속에 담근 채 목욕을 한다. 성스러운 갠지스 강을 따라 이 거리에는 크고 작은 50여개의 가트가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 히말라야 산맥에서부터 시작되는 이 강은 동남쪽 내지 동쪽으로 흘러 마침내는 벵갈만으로 들어가게 되는데, 이곳은 2,500km에 달하는 길 줄기 가운데서 남에서 북으로 물줄기가 나 있는 희귀한 장소이다. 바라나시는 이 강의 왼편 언덕에 위치하고 있다. 인도의 강은 자주 그 흐름의 방향이 바뀐다. 그 때문에 쇠망한 도시도 있다고 하지만 여기 바라나시만은 예로부터 강의 흐름이 변하지 않은 것 같다. 오히려 이 도시의 남쪽을 흘러서 갠지스 강으로 들어가는 지류인 아시 강의 강바닥이 변했다. 이 도시는 북쪽을 흐르는 바라나 강과 이 아시 강의 사이에 있기 때문에 바라나시라는 이름이 붙여졌던 것이다. 베나레스라는 말은 그 말의 음을 딴 영어 이름인데 독립 후 이 바라나시라는 옛 이름이 정식 명칭으로 부활되었다. 이른 아침 힌두교도들은 각 가트마다 넘치도록 모여든다. 때마침 동쪽에서 솟아오르는 태양을 향해서 물을 담은 항아리를 양손에 받쳐들거나 또는 양손 바닥으로 물을 떠서, 가야트리 찬가를 부르면서 그 물을 다시 강에 붓는다. 몸을 물에 담근 채 합장하고 신들에게 기도하는 지금의 광경은 어쩌면 기원 전에서부터 변함이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성스러운 갠지스 강의 흐름 중에서도 이 곳 바라나시는 가장 성스러운 곳으로 간주되고 있다. 여기서 한번 목욕을 하면 모든 죄와 더러움이 깨끗이 씻겨 정결해지기 때문에 사후의 생천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힌두교도에게 있어서 바라나시는 평생에 꼭 한번은 순례하여 목욕해야만 하는 성지이며, 따라서 이 강물에 발을 담근 채로 숨을 거둘 수 있다면 그 복은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다고 한다. 예나 지금이나 이 곳에는 인도 전역으로부터 순례자들이 모여들기 때문에 그 수는 연간 백만 명을 넘는다. 바라나시는 쉬바의 거리이기도 하다. 각 가트나 사원, 사당의 이름은 쉬바의 신화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이를테면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마니카루니카 가트’는 쉬바 신의 ‘보석 귀걸이 마니카루나’가 떨어진 곳이라고 한다. 또 이 거리에는 ‘황금의 사원’이라고 불리는 커다란 쉬바 사원이 있는데, 그 몸체는 링가(쉬바신을 상징하는 남근)로 되어 있다. 순례자들을 위하여 소형으로 만든 링가가 가트 근처의 토산품점에서 팔리고 있다. 목욕을 하고 돌아가는 인파 속에서도 힌두행자들은 반나체로 선정에 잠기거나 혹은 성전을 독송한다. 행자가 아닌 속인이라도 종교적인 사람은 이와 마찬가지이다. 가족과 함께 온 참배자들의 뒤를 따라 다니는 것은 아마도 갠지스 강 위에서 푸자 의례(신들에게 경의를 표하는 예배 형식)를 하도록 권하는 뱃사공들일 것이다. 신자들에게 공덕을 쌓도록 하기 위한 보시를 구걸하는 행위도 적지 않다. 토산품 가게의 점원들이나 땅콩 장수들이 웅성거리고 또 한쪽에서는 아이들이 고함을 지르면서 달리는 등 소란과 혼잡으로 가득 차있는 가운데서도, 여기에는 불가사의한 조화와 아늑함이 있다. 인간이 영위하는 갖가지 삶의 양태는 오로지 신에 대한 기도 속에 쌓여 있다고 해야 할 것 같다. 여기에는 심상치 않은 ‘움직임’을 내부에 간직하고, 영원한 ‘고요함’을 지향하는 힌두교 특유의 세계가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몇 군데 가트의 곁에는 화장터가 있어서 사람들은 싫어도 죽음을 응시해야만 하게 되어 있다. 계속해서 운구되는 시체들은 화장터에서 화장이 된다. 밤의 장막이 내리깔리고 수면이 어둠속으로 그 모습을 감추며 화장터의 불꽃이 흔들릴 때, 사람들은 삶과 죽음을 초월하여 영원으로 이어지는 생명을 느끼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가트에 이르는 구불구불한 오솔길 양쪽에는 토산품점들이 늘어서 있다. 쉬바 링가의 초상이 팔리고 있는 것은 오히려 당연하지만 이와 함께 놋쇠로 만든 항아리, 접시, 바리 등과 직물류도 풍성하게 진열되어 있다. 사실상 예로부터 이 두 가지 제품은 이 지방의 특산품으로 유명하다. 세존도 왕자로서 귀하게 자랄 때는 이 지방에서 일부러 특산품 옷감을 주문해 입었다가 하는 이야기가 불교 경전에 전해지고 있다. 예나 지금이나 이 도시는 갖가지 수공업 제품의 산지로서 그리고 상업도시로서의 면모를 자랑하고 있다. 바라나시에는 학자와 종교인도 많이 모여든다. 이곳은 산스크리트 연구의 본고장으로서 여기서 학위를 받은 판디트(학승, 學僧)들은 매우 존경받고 있다. 이러한 상황은 세존시대에도 마찬가지였던 것 같아서 이 도시에서 동북방 약 7km 되는 지점에 있는 사르나트(녹야원)는 ‘리쉬파타나’라고 불렀다. 이는 ‘선인(仙人)이 모이는 곳’이라는 뜻이다. 보드가야에서 진리를 깨달은 세존이 일부러 찾아가서 맨 처음으로 법을 설한 곳도 바로 이곳이었던 것이다. 스스로의 종교적 경지와 가르침을 남에게 널리 펴서 그 보편성을 밝히는 장소로는 역시 이 성도 바라나시가 가장 적합했을 것이다. 2. 세존 시대의 동인도 1) 전제 왕국과 부족 국가 세존이 세상에 태어난 기원 전 6세기 내지 5세기 경에는 현대 인도의 4대 도시인 델리, 봄베이, 마드래스, 캘커타가 존재하지 않았다. 그리고 서사시 『마하바라타』에는 ‘인드라프라쉬타’라는 거리의 이름이 나오는데, 이는 지금의 델리에 해당된다. 그 후 많은 변화를 거치면서도 이 도시는 중세 이후 이슬람 왕조들의 활약 무대가 되었다. 현재의 수도이며 행정의 중심부인 뉴델리가 성립된 것은 근대의 일이다. 봄베이는 인도의 서방측 문호이지만 이곳이 서구와의 연결로 인하여 대도시로 발전한 것은 16세기 초엽부터였다. 캘거타는 동인도회사를 발판으로 한 영국의 인도지배의 근거지이지만, 이 또한 발전의 역사는 얼마 되지 않는다. 마드래스는 남인도를 대표하는 도시로서 이 역시 동인도회사의 초기에 그 근거지로 발전된 곳으로서, 그 기원은 17세기 전반 이상까지 거슬러 올라가지는 않는다.
원시 힌두교 시대(B.C.1000~ B.C.600, 즉 바라문교 시대) 후반부터 기원 전 300년 경에 이르는 시기는 사회ㆍ문화의 모든 면에 걸쳐서 극심한 변동이 일어났던 시기이다. 이보다 앞선 시대에 갠지스 강 상류와 중류 지역에 전개되고 있었던 것은 봉쇄적인 촌락을 주체로 하는 농경 사회였다. 이것은 가부장(家父長)적인 대가족을 단위로 하는 씨족ㆍ부족 사회로서, 경제적으로는 자급자족을 원칙으로 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사회는 시대와 함께 강력한 왕권을 가지는 국가군(群)으로 변모해 간다. 그에 따라서 왕도가 성립되고 행정ㆍ징세 기구도 구성되어 간다. 한편 특히 갠지스 강 중류 유역의 주변 지방에는 부족국가도 잔존하고 있었다. 세존의 샤꺄족, 세존을 보존하고 또 자이나교의 개조인 마하리바를 배출한 브리지족(8개 부족의 연합 국가였음, 왓지 또는 밧지라고도 함) 등의 국가가 바로 그것이다. 이들은 전제군주 국가라기보다 일종의 공화정체를 가지고, 각 부족의 장로들이 모여서 제반 사항들을 의논했다. 그래서 이들은 토론의 장소인 공회당도 갖고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형태의 국가를 ‘상가’라고 하는데, 세존은 후일 스스로의 교단 운영에 이 상가의 운영 이념과 방법을 그대로 도입하고 있다. 불교 교단을 ‘상가’라고 부르게 된 것은 이러한 이유에 따른 것이다. 그러나 공화제 부족 국가는 점차 강력한 왕권 국가 에 흡수되어 간다. 흔히 이 무렵에 열여섯 국가가 있었다고 전해지고, 경전에도 ‘16대국’이라는 기록이 보이지만, 이들은 차츰차츰 코살라나 마가다 같은 강력한 대국에 병합되어 갔다. 샤꺄족의 국가는 세존 재세 중에 코살라에 멸망당하고 만다. 이 코살라도 얼마 후 마가다에 병합되며, 이것은 기원전 4세기에 이르러 인도 최초의 대제국인 마우리야 왕조의 성립으로 이어진다. 이처럼 세존은 정치적으로 볼 때 부족 국가가 해체되어 왕권 국가로 재편성되고, 동시에 인도의 봉건제도가 확립되어 가는 격동의 시기에 태어났던 것이다. 2) 동인도의 도시와 상인의 대두 경제적으로 볼 때도 당시는 극심한 변동의 시기였다. 기원 전 8세기경에는 철의 사용이 본격화되어 농기구와 그 밖의 갖가지 도구들이 그 성능을 개선할 수 있었다. 이에 따라서 농업과 수공업의 생산은 비약적으로 증대되었으며, 그리하여 자급자족의 범위를 넘어선 잉여 생산물은 상품화되지 않을 수 없었다. 여기서 상인들의 집단이 출현하게 된다. 교역을 위한 수륙 교통로가 개발되는 한편, 길목의 안전 확보를 위해서 상인과 왕권이 결부된다. 그리고 화폐 경제도 기원 전 7~6세기경부터 일반화되며, 물자의 집산지에 시장이 서고, 이를 중심으로 큰 도시가 발전해 나간다. 바라나시도 그 중의 하나로서 그 서쪽에는 캬우삼비가 있다. 북방의 코살라에는 아요댜와 함께, 경전에서도 유명한 쉬라바스티(사왓티, 사밧티, 한역은 사위성)가 성립되었다. 동방 마가다의 수도는 라자그리하(라자가하, 한역은 왕사성)이며, 그 북방 갠지스의 건너 편에 있는 브리지족(왓지족)의 도시 바이샬리(웨살리)도 상업도시로 유명하다. 이러한 도시와 도시 사이에 도로가 개통되어 상품을 운반하는 중개 상인의 왕래가 빈번해졌다. 세존이 교화의 무대로 삼은 곳은 주로 이러한 갠지스 강 중류 유역에서 동인도에 걸친 지역의 도시들이었다. 당시의 풍습에 따르면 수행자는 매년 우기에는 일정한 장소에 거주하도록 되어 있었다. 세존 성도후의 45년 동안 안거(安居)의 회수와 장소를 소사해 보면 쉬라바스티(사왓티)가 26회, 라자그리하가 5회, 바이샬리(웨살리)가 2회, 바라나시와 키우샴비, 그리고 카필라바스투(까삘라왓투)가 각 1회로 되어 있다. 이상에서 세존의 교화가 도시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나이 80이 되어, 스스로의 죽음을 예지한 세존은 그야말로 마지막 여행길에 나선다. 그것은 자신이 태어난 고향 카필라바스투로 향하는 여로였던 것 같다. 세존은 라자그리하를 출발하여 서쪽으로 길을 잡아 지금의 퍼트나 시(여기가 파탈리푸트로 발전한 것은 이보다 후대인 마우리야 왕조시대이다.)를 지나서 갠지스 강을 건넌다. 바이샬리, 파바를 지나 말라 인이 세운 부족 국가의 수도인 쿠쉬나가라에서 니르바나(열반)에 든다. 이곳은 바로 쉬라바스티(사왓티)에 이르는 길목이기도 하다. 세존 최후의 여행 길 – ‘니르바나 로드’ – 은 이와 같이 당시의 대도시를 연결하는 직통도로로서 세존의 발이 익은 길이었던 것이다. 대도시의 지도자는 왕후, 대신, 장군들이었으며 대상인들도 여기에 포함되었다. 이 무렵은 많은 상인 길드(Guild, 동업자 조합)가 성립되었다. 그 우두머리는 슈레슈팅 또는 슈레니(조합장)라고 일컬어졌다. 그리고 많은 노비를 거느리는 대가족의 장을 가하파티(장자, 자산가, 거사)라고 한다. 그들은 훗날 단순한 조합장이나 가장의 개념에서 벗어나서 일종의 사회 신분으로 고정되어 갔다. 이 시점에 이르면 이미 한 시대 이전의 부족 사회와 재산 공유의 촌락은 해체되고 만다. 그들은 당시의 신흥 자본을 대표하는 사람들이어서 사회의 상층 계급을 형성하고 있었다. 그들의 부유함을 알 수 있는 유명한 일화가 있다. 석존은 쉬라바스티(사왓티)의 수닷타(아나타삔띠까, 급고독 장자) 장자의 귀의를 받아 정사(精舍)를 기증받게 된다. 그 땅은 본래 코살라의 제타(제따, 기다, 祇多) 태자 소유였기 때문에 장자는 토지의 구입을 신청하면서 자신이 필요한 땅의 넓이에 깔 수 있을 만큼의 황금을 태자에게 그 대가로 제시했다고 한다. 이 일화를 통하여 우리는 당시의 경제적 발전과 상인들이 누렸던 부의 일단을 엿볼 수 있다. 제타 태자는 장자의 열의에 감동하여 이 땅을 무상으로 기증했다고 한다. 이렇게 해서 여기에 ‘제타원 정사’가 만들어졌다. 한역에서 말하는 기다원정사, 줄여서 기원정사라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고대 인도의 한 왕자는 이리하여 멀리 북아시아에까지 그 이름이 전파되어 각처에 기록을 남기게 되었다. 세존과 창부라는 것은 어쩌면 묘한 배합으로 생각될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최후의 여행 길에 나선 세존이 암라팔리라는 창부의 공양을 받고 설법을 했다는 일화가 한 경전에서 아름답게 묘사되어 있다. 그녀는 바이샬리(웨살리)의 고급 창부였다. 아름답고 교양을 갖추었으며, 재산도 많이 모은 그녀는 이 도시의 상류층에 속하는 사람들과 교류를 가졌다. 세존이 이 도시에 온 것을 안 그녀는 재빨리 식사 공양의 약속을 세존에게서 얻어낸다. 이 말을 전해들은 시내의 유력 인사들은 많은 돈을 내어 놓겠으니 공양의 권리를 양보하라고 그녀에게 부탁한다. 그러나 암라팔리는 이를 거절하고 손수 식사를 마련해서 세존에게 공양했으며, 그리하여 시내의 유력 인사들은 몹시 아쉬워했다는 일화이다. 3) 도시 문화의 새로운 양상 바이샬리(웨살리)는 세존의 활약 무대인 동인도에 있었는데, 이 도시는 브리지족(왓지족) 중의 릿차비 족이 세운 도시이다. 이 무렵은 힌두 문화가 끊임없이 동인도와 남인도로 전파되어 새로운 부족ㆍ종족을 자신의 세력권 속으로 흡수해 나가던 시기이다. 새로운 관습과 의례 및 종교가 끼어들어 힌두교의 가치관을 다양하게 만드는 자극적 요소들은 특히 이 곳 동인도에서 현저했다. 브리지족(왓지족)은 분명히 비아리아계의 사람들로서 특이한 복장과 습관을 가지고 있었음을 바라문교와 불교의 양 문헌들이 증언해 주고 있다. 바라문적인 색채가 짙은 갠지스강 중류 유역과는 별개인 신흥 동인도의 문화를 대표하는 사람들로 인하여, 바이샬리(웨살리)의 거리는 활기가 넘치는 상업 도시가 되었다. 세존이 이곳을 몇 번이나 방문했는지는 확실치 않다. 세존 자신도 절대적인 비호를 받았기 때문에 이 거리를 매우 사랑했었던 것 같다. 암라팔리가 행한 공양의 일화를 남긴 이 거리를 떠날 때 세존은 뒤를 돌아다 보면서 “내가 바이샬리를 보는 것도 이번이 마지막이구나.”하는 감회를 남겼다고 한다. 사회의 상류층이 누리는 호화로운 생활을 장식해주는 꽃이라고 할 수 있음직한 고급 창부는 그 후 인도의 도시에 필수적인 요소가 되었으며, 또한 이들이 문학이나 예술에 미친 영향도 적지 않다. 시대적으로 보아서 약간 후대의 일이긴 하지만, 서력 기원 이후의 수세기 동안 서인도의 도시들은 서방 여러 나라들과의 무역으로 막대한 부를 축적한 호상(豪商)과 귀족들이 화려한 도시 생활을 영위하고 있었다. 그 중의 하나인 웃자이니의 거리를 무대로 쓰여진 유명한 희곡 『작은 흙수레』(무릿차 카티카)의 여주인공은 바산타세나라고 하는 마음씨 착한 창부이다. 같은 무렵에 쓰여진 것으로 생각되는 『카마수트라』는 이러한 도시의 상류층 인사들 – 특히 젊은이들 – 이 알고 있어야 할 지식을 가르쳐 주는 교과서적인 책이다. 그리고 여기서도 창부는 도시의 불가결한 요소로 소개되고 있다. 이처럼 도시 문화에 익숙해진 이들의 의식은 “시골에 잠깐 머무르기만 해도 시대감각과 미적 감각을 상실하고 만다.”고까지 단언하게끔 되었다. 한편 바라문 계통의 한 법전은 “도시인은 해탈할 수 없다.”고 독설을 토하면서, 전통적인 미풍양속을 지키지 않는 도시인들에 대한 반감을 표시하고 있다. 생활 형태가 다른 도시와 농촌, 양자 간의 차이는 종교와 문화에 대한 자세에 있어서도 커다란 차이를 보여 주고 있다. 농경지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촌락은 인간관계나 습관도 고정적으로 되어 간다. 한편 상공업을 주체로 하는 도시는 훨씬 유동적이 될 수 있다. 세존이 세상에 나온 시대는 도시 문화가 한창 그 성립도상에 있던 일대 격동기였다고 할 수 있는데, 이 시대에는 종래의 촌락 주체의 문화와는 다른 새로운 문화적 상황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즉 국왕이나 장자들의 세족적 권력과 재력 앞에서는 바라문의 사회적 우위도 여지없이 무너지고 말았던 것이다. 이와 함께 주술을 기본으로 하는 전통적인 제식의 효험에도 차차 회의가 일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그 효험을 독점한 바라문의 종교적 권위도 옛 자취를 찾아볼 수 없게끔 되었다. 4성을 꼽는 순서에 있어서도 신흥 세력을 대표하는 동 인도의 도시를 무대로 한 불교나 자이나교의 문헌에서 크샤트리야를 먼저 들고 바라문을 그 다음에 든 것도 당시의 사회상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세존을 둘러싸고 있는 유력한 신도들을 살펴봐도, 세존이 바라나시에서 교화를 시작했을 때 최초로 교화된 속인은 이 거리에 사는 장자의 아들들이었다. 쉬라바스티(사왓티)의 수닷타(아나타삔띠까, 급고독)장자가 세존을 알게 된 것은 라자그리하에 있는 동서인 장자의 집을 여느 때처럼 방문했을 때의 일이었다. 동시에 마가다의 국왕 빔비사라와 코살라의 국왕 푸라세나짓트(빠쎄나디, 한역은 파사익) 등도 세존을 여러모로 보호하며, 가르침을 받고 있다. 세존 자신도 비록 작기는 하지만 부족 국가의 왕자로 태어난 도시인이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세존이 농촌에는 전혀 가지 않았다거나 시골 사람들은 전혀 교화의 대상으로 삼지 않았다는 것은 아니다. 결국 세존 자신의 환경이나 당시의 사회적 상황으로 말미암아 세존의 인간적 교섭은 사회의 상류층에서 주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불교는 그들의 새로운 의식이나 관습, 생활 문화 속에 그 뿌리를 내려갔다. 다시 말해서 불교는 도시형의 종교였던 것이다. ▶ 푸자(pūjā, 供養) 언어학적으나 의례적으로나 푸자라는 말은 원래 신들에게 물과 꽃, 또는 향 같은 것들을 공양하며 경의를 나타내는 의식을 말한다. 이것은 드라비다인의 문화에서 유래된다거 전해지고 있는데, 이미 서력 기원 이전에 아리아 문화의 정수였던 공양 의식(야즈냐)을 대신하는 중요한 예배 형식으로 대두되고, 그후 전인도에 전파되어 오늘날에 이르고 있는 것이다. (출처 : 佛陀의 世界 / 中村元 著, 金知見 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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