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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삼경(會三經)
1923년에 출판되었다. 『삼일신고(三一神誥)』의 진리훈(眞理訓)을 불교의 묘법, 유가의 역학(易學), 도가의 현리(玄理)에 바탕을 두고 풀이한 것으로, 대종교 교리에 유·불·도 3교의 원리가 본래적으로 포함되어 있음을 나타내주고 있다.
책명은 『삼일신고』 진리훈의 찬(贊) 속에 나오는 “하나로부터 셋이 됨이여, 참과 가달이 나누이도다. 셋이 모여 하나가 되니[會三之一] 헤맴과 깨침 길이 갈리네.”라는 구절에서 따온 것이다.
내용은 삼신(三神)·삼철(三嚞)·삼망(三妄)·삼도(三途)·삼아(三我)·삼륜(三倫)·삼계(三界)·삼회(三會)·귀일(歸一)의 9편으로 나누어 풀이하였는데, 각 편마다 도형(圖形)으로 정리함으로써 이해를 편하게 하였으며, 인간의 공덕이 완전함에 이르러서는 마침내 트임에 돌아가니, “참함을 돌이키며 한얼이 된다(返眞一神).”고 하는 삼진귀일사상(三眞歸一思想)에 바탕을 두고 설명하였다.(한국문화대백과)
백포종사가 성통공완한 뒤 계시를 받고 지은 성전이다. 3신(神)·3철·3망(妄)·3도(途)·3아(我)·3륜(倫)·3계(界)·3회(會)·귀일(歸一)의 9편으로 나누어 <삼일신고>를 불교의 묘법(妙法)과 유교의 역학(易學)과 도교의 현리(玄理)의 철학을 곁들여 해설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 <회삼경> 없이는 <삼일신고>의 심오함을 이해할 도리가 없다.
백포종사는 유·불·선에 통달한 대철로서 이 유·불·선을 추려내어 정수를 뽑아 종합한 것이 <삼일신고>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 따라서 유·불·선과 야(耶)는 소아(小我)요 이것이 모여 하나가 된 근본이 대아(大我)이며 그 대아가 바로 <삼일신고>임을 밝히고 있다.
제1장 세 검(三) / 제2장 세 밝은이 / 제3장 세가달(三妄) / 제4장 세길(三途) / 제5장 세나(三我) / 6장 세 윤리(三倫) / 제7장 세 누리(三界) / 제8장 세모음(三會) / 제9장 하나로 돌아감(歸一) |
머리말
나는 다행하게도 우리 세 종사와 더불어 한세상에 태어났다. 그러나 오랫동안 친히 받들지 못한 것이 평생에 큰 유감이었다. 내가 선종사 문하에서 배운 사정은 아래와 같다.
홍암 대종사는 내가 경술년(1910년) 마지막 무렵 간동(諫洞)에서 처음 뵈었다. 12월 23일, 25일, 27일 사흘 밤을 홀로 모시고 역사와 대종교와 시국에 대한 교훈을 감격하게 들은 뒤에 "단애 윤세복"(檀涯 尹世復, 본명은 세린(世麟)이었음)의 새 호와 이름을 받고 대종교를 신봉하게 되었다.
이듬해 신해년(1911) 봄에, 시교의 책임을 지고 남만주로 떠나간 뒤로는 동서에 서로 떨어져 소식조차 오래 막혔다가 병진년(1916) 가을에, 무송(撫松)감옥(살인혐의로 을묘년 봄부터 18개월 동안 구금됨)에서 "죽고 삶이 몸뚱이 껍데기에 있지 않고 믿음과 의리는 오직 신명으로써 증거되느니라"(死生不在軀殼 信義惟證神明)라는 유서를 울며 받들었다.
무원종사는 내가 대종사를 뵈옵던 둘째날 밤, 곧 경술년(1910) 12월 25일 밤에 대종사의 소개로 잠깐 얼굴을 뵈었으나 말씀 들을 겨를은 없었다.그 뒤 총본사는 북만주 밀산(密山)으로부터 영안현(寧安縣) 남관(南關)으로 옮겼고, 나는 남만주 환인(桓仁)으로부터 무송현 지방에서 시교도 하고 교당도 마련하기 10여 년인 신유년(1921) 가을에, 서일보본사(西一道本司)의 전리(典理)로 임명받던 전후 몇 차례 왕복이 있었을 뿐이다.
그러다 두 해 뒤 계해년(1923) 겨울, 내가 화전현(樺甸縣)에서 낙상하여 치료하던 중 천만 꿈밖에 "상교 윤세복을 사교로 뛰어올리고 경각의 인장을 맡긴다"(尙敎 尹世復 超昇司敎 委任經閣 符印)라는 종사의 유명이 계셨다는 전보와 글월을 받잡고 허둥지둥 망곡식을 거행하였다.
백포종사는 나와 동갑인데, 입교한 교적부에 의하면 나의 후진이면서 또한 먼저 깨달은 이가 되시었다.
백포종사의 출생지는 함경북도 경원(慶源)이요, 나는 경상남도 밀양(密陽)이며, 또 옮겨 와 살던 곳이 백포종사는 동만주 왕청(汪淸)이요, 나는 남만주 환인(桓仁)이라, 남북이 서로 멀어 사귈 인연을 얻지 못했었다.
삼일운동 당시(1919년)에는 천산(天山) 뒷기슭 한가닥 산마루를 서로 격하여 백포종사는 화룡현(化龍縣)군사를 훈련하고, 나는 무송현에서 터전을 지킨 지 1년 남아에 오가는 사람 편에 소식은 서로 통했으나 끝내 한번도 만나보지 못한 채, 청산리(靑山里) 싸움에서 일본군을 무찌른 것과 당벽진(當壁鎭)에서 조천하신 소식을 교보로써 알고 북망 통곡할 뿐이었다.
내가 무원종사의 유명을 이어 갑자년 봄, 영안현(寧安縣)에서 출판한 종경(신고강의, 신리대전, 신사기, 회삼경)을 처음 받들어 읽고 백포종사의 공덕을 감탄하여 마지 못했으며, 세 분 종사께서 이미 다 조천하신지라, 경전의 뜻을 풀기 어려운 데가 있어도 물어볼 곳이 없음을 스스로 슬피 여기고 한탄했었다. 따라서 나의 앞길은 오직 거친 광야를 헤매는 외롭고 적막한 생애이었다.
내가 험악한 풍조에 밀려서 흥개호(興凱湖) 가에서 숨을 돌리고 경박호(鏡泊湖) 언덕에서 다리를 쉬면서 20여 년 보따리 장사를 하는데, 게다가 임오년 교변을 만나 봇짐은 왜적에게 다 빼앗기고 동지 열사람이 희생되었으며, 3년 동안 옥에서 고생하다가 드디어 해방의 종소리가 들리자 빈몸으로 옥문을 나서니, 어허! 손에 태극기를 들고 입으로 만세를 부르는 우리 동포가 떼를 지어 행진하는 것이야말로 정말 꿈 같은 경지가 아니고 무엇이랴!
내가 만주로 건너간 지 36년되는 병술년(1946) 봄에 압록강을 도로 건너 서울에 도착하니, 봄 추위는 아직도 혹독하여 눈에 뵈는 것이 처참하나 다만 태극기가 하늘에 날리고 만세 소리가 드문드문 귓전을 울리는 것이 새 봄의 기상이었다.
그러나 묵은 한과 새 근심을 이기지 못하는 내 몸은 차츰 병마로 더불어 벗하게 되었다.
이 해(1946년) 가을에, 경각 사무는 동지에게 위임하고 한때 휴향하던 중, 수십 명 청년들의 요청으로 몇 주일 동안 회삼경을 강의했으나 그마저 사정으로 다 마치지 못했었다.
나의 어지러운 생애는 1년을 지나고, 올해 봄부터 공무 틈틈이 앓는 사이사이 회삼경의 번역을 대강 탈고했으나, 주석과 해설이 밝고 자상하지 못한 곳이 많을 것이다.
나의 학식이 모자라는 탓이니, 뒤에 오는 동호자가 바로잡아 주기를 바라는 바이다.
또 이것은 나의 40년 동안 대종교 생활의 참담한 역경을 대강 서술한 것이어니와, 어질지 못한 나를 동정해 주던 뜻을 같이한 벗이 이제 몇이나 남았는고.
중광 40년(1948) 무자 3월 1일
단애 윤세복은 허당(虛堂)에서 삼가 적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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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삼경(會三經)
[해제] 이 경의 내용은 삼일(三一)의 원리를 강해한 것으로 대종교 교리를 과학적으로 증명한 것이다.
또 대종교는 유교•불교•도교의 세 교를 포함한 것인데, 이 경전은 실로 불교의 묘법(妙法)과 유교의 역학(易學)과 도교의 현리(玄理)에 관한 오묘한 뜻이 갖추어진 것이므로 혹시 [삼동계(參同契)]와 대조해볼지도 모르나 [삼동계]는 그 방술만을 탐구한 것이요, 이 경은 그 철리를 강술하여 인생철학으로 집대성한 것이다.
이 경의 명의를 설명한다면 삼일신고 진리훈 찬송에 있는 "하나로부터 셋이 됨이여 참과 가달이 나누이도다. 셋이 모여 하나가 되니 헤맴과 깨침 길이 갈리네"라 한 것의 본뜻을 취한 것이다.
백포종사 저(白圃宗師著)
[참고] "대종교의 종지가 세 교를 포함했다"한 것은 최고운(崔孤雲)의 난랑비(鸞廊碑) 서문에 일렀으되, 우리 나라에 현묘한 도가 있으니 가로되 풍류(風流)라, 교를 베풀어 낸 근원은 국선의 역사[仙史]에 갖추어 적혔거니와 실상은 세 교를 포함하여 모든 창생들을 교화하니, "들어와 어버이에게 효도하고 나가서 나라에 충성함 같은 것은 공자의 가르침이요, 허식이 없이 처하고 말없는 교를 행함 같은 것은 노자의 종지요, 모든 악한 일을 짓지 말고 착한 일을 햄하라 함 같은 것은 부처의 교화니라"고 적혀 있음을 말함이다.
이 경을 지으신 백포종사 서일(徐一)은 개천 4338년(1881) 신사생(辛巳生)이요 함경북도 경원(慶源) 사람이다. 31세에 대종교를 신봉하시고 4∼5년 동안에 교리를 밝게 아신 것이 많았으며 또 수만 명의 신도를 얻으신지라. 36세에 경각의 특선 사교(司敎)로 신령한 자리에 나가셨고 39세에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 총재로서 청산리 싸움을 격려하셨으며 41세 되던 신유년(1921) 8월에 밀산 당벽진(密山當壁鎭)에서 조천(朝天)하시었다.
제1장 세 검[삼신]
한얼님은 한울의 임자시니, 덕은 넓고 슬기는 발고 힘은 억세시어, 모습 없이 만드시고 말씀 없이 가르치시며 함이 없이 다스리시니라.
[원문대조]
신자는 천지주재(天之主宰)시니 덕부(德溥)하며 혜소(慧炤)하며 역강건(力强健)하사 무형이조하시며 무언이교하시며 무위이치)하시니라.
크시도다 한얼님의 도여! 하나이자 셋이니 주체로는 더없는 위에 사무치며, 쓰임으로는 더없는 끝에까지 다하시니라.
대재(大哉)라 신지도야여 즉일즉삼(卽一卽三)하여 체지(體之)에 이달무상하시며 용지(用之)에 이궁무예하시니라.
이 도가 한 번 변하여 여섯 가지 큰 형상을 이루니, 허공과 더움과 울림과 젖음과 차움과 굳음이라. 허공은 한울이 되고, 더움은 불이 되고, 울림은 번개가 되고, 젖음은 물이 되고, 차움은 바람이 되고, 굳음은 땅이 되니라.
사도일환(斯道一幻)에 육대성상(六大成象)하니 왈공진습한고(曰空熱震濕寒固)라 공위천(空爲天)하고 열위화(熱爲火)하고 진위전(震爲電)하고 습위수(濕爲水)하고 한위풍(寒爲風)하고 고위지(固爲地)니라.
한울은 비어서 휑하고, 불은 밝아서 환하고, 번개는 세어서 움직이고, 물은 평평하여 깊고, 바람은 고루 하여 퍼지고, 땅은 든든하여 가득 차니라.
천(天)은 허이충(虛以沖)하고 화(火)는 명이현(明以顯) 전(電)은 건이동(健以動)하고 수(水)는 평이심(平以深)하고 풍(風)은 화이변(和以?)하고 지(地)는 실이영(實以盈)이니라.
비었으므로 그 싸안음이 크고, 밝으므로 그 비침이 두루하고, 세므로 그 당김이 빠르고, 평평하므로 그 퍼짐이 넓고, 고르므로 그 기름[養]이 융화하고, 든든하므로 그 실음이 무거우니라.
허고(虛故)로 기포야대(其包也大)하고 명고(明故)로 기조야보(其照也普)하고 건고(健故)로 기인야신(其引也迅)하고 평고(平故)로 기윤야광(其潤也廣)하고 화고(和故)로 기양야융(其養也融)하고 실고(實故)로 기재야중(其載也重)하니라.
대저 여섯 가지 큰 것은 비유하건대 큰 풀무요, 한얼님은 만들어 내는 화공(化工)이시라. 있음과 없음이 서로 의지하여 진화하고 길러서 한얼님 공적을 이루니라.
부육대자(夫六大者)는 홍균야(洪鈞也)오 신자는 화공야(化工也)라. 유무상자)하여 일정일독(一亭一毒)하여 이신공성)하나니라.
이치는 없는 데로부터 일어나고, 자취는 있는 것으로 나타나니, 그러므로 다섯 가지 물건을 마련하여 형상이 있고, 다섯 가지 교훈으로 깨우치어 말씀이 있고, 다섯 가지 일을 베푸시어 함이 있느니라.
이종무기하고 적인유저(迹因有著)하니 시고(是故)로 재지고물이유형(裁之五物而有形)하고 고지오훈이유언(誥之五訓有言)하고 시지오사이유위(施之五事而有爲)니라.
다섯 가지 물건은 첫째 기는 것, 둘째 나는 것, 셋째 탈바꿈하는 것, 헤엄질치는 것, 다섯째 심는 것이니라. 발과 배로 기는 것은 땅에 알맞고, 깃과 줄지로 나는 것은 공중에 알맞고, 지느러미와 오리발을 헤엄질치는 것은 물에 알맞고, 날개와 발로 다니는 것은 공중과 땅에 알맞고, 뿌리와 씨로 심는 것은 물과 땅에 아울러 맞느니라.
오물(五物)은 일왈행(一曰行)이오 이왈저오 삼왈화(三曰化)오 사왈유(四曰游)오 오왈재(五曰栽)라. 이족복자(以足腹者)는 의호륙(宜乎陸)하고 이우착자(以羽 羽+足 者)는 의호공(宜乎空)하고 이기박자는 의호수(宜乎水)하고 이시족자(以翅足者)는 의공기륙하고 이근혜자는 수륙구의(水陸俱宜)니라.
다섯 가지 가르침은 첫째 한울, 둘째 한얼님, 셋째 한울집, 넷째 누리, 다섯째 참이치이니, 모두 다 있고 모두 다 싸안는 것을 한울이라 하고, 지극히 밝고 지극히 신령스러움을 한얼님이라 하고, 오직 착함과 오직 덕스러움을 한울집이라 하고, 변하고 바뀌어 한결같지 않음을 누리인데, 셋이자 하나임을 참이치라 하느니라.
오훈(五訓)은 일왈천(一曰天)이오 이왈신이오 삼왈천궁(三曰天宮)이오 사왈세계(四曰世界)오 오왈진리(五曰眞理)라. 진재진용(盡在盡容)을 위지천(謂之天)이오 지소지령)을 위지신이오 유선유덕(惟善惟德)을 위지천궁(謂之天宮)이오 환천불일(幻遷不一)을 위지세계(謂之世界)오 즉삼즉일(卽三卽一)을 위지진리(謂之眞理)니라.
다섯 가지 일은 첫째 곡식, 둘째 명령, 셋째 병, 넷째 형벌, 다섯째 착하고 악함이니, 심고 거둠을 제때에 하여 백성들이 주림이 없고, 시키고 본받음을 맞게 하여 백성들이 어긋남이 없 고, 좋은 방법으로 미리 손써서 백성들이 송사가 없 고, 상과 벌을 분명히 하여 백성들이 범죄함이 없느니라.
오사(五事)는 일왈곡(一曰穀)이오 이왈명(二曰命)이오 삼왈병(三曰病)이오 사왈형(四曰刑)이오 오왈선악(五曰善惡)이라. 가색이시(稼穡以時)하여 이민무기(而民無飢)하고 행효득의(行效得宜)하여 이민무위(以民無爲)하고 예시이도(預施以道)하여 이민무찰하고 간궤불흥하여 이민무송하고 권징필신(勸懲必信)하여 이민무범(而民 犯)이니라.
대저 비롯하여 나는 것은 한울의 도요, 힘입어 기르는 것은 땅의 도리라. 그러므로 한울과 땅은 이치로써 서로 감응하여 만물이 그 성품을 타고, 기운으로써 서로 숨쉬어 만물이 그 목숨을 타고, 기틀로써 부딪쳐 만물이 그 정기를 타고 나느니라. 그러므로 조화는 이것을 태워 주는 것이요, 교화는 이것을 돌이키는 것이요, 치화는 이것을 행하게 하는 것이니라.
부시이생자(夫始而生者)는 천지도야(天之道也)오 자이육자(資而育者)는 지지도야(地之道也)니라 고천지(故天地)는 이리상감(以理相感)하여 이만물(而萬物)이 품기성(稟其性)하고 천지(天地)는 이기상식(以氣相息)하여 이만물(而萬物)이 품기명(稟其命)하고 천지(天地)는 이기상촉(以其相觸)하여 이만물(而萬物)이 품기정(稟其精)하나니라. 고조화(故造化)는 소이부차자야(所以賦此者也)오 교화(敎化)는 소이반차자야(所以返此者也)오 치화(治化)는 소이행차자야(所以行此者也)니라.
오직 사람은 만물 중에서 신령스럽고 빼어나서 위로는 한얼님에 합고, 아래로는 뭇별들에 응하므로 그 도가 한울과 땅과 더불어 셋이 되니라. 총명하고 슬기로움은 한얼님과 사람이 다름없으되, 사람에게는 세 가지 가달됨이 있는지라, 그러므로 혹시 미혹하며 느끼고 움직임은 사람과 만물의 차이가 없으되, 사람은 세참함이 웅근지라 그러므로 능히 깨닫느니라..
유인영수어물(惟人靈秀於物)하여 상합신명하며 하응성신(下應星辰)이라. 고기도여천지참(故其道與天地參)이니라. 총예명민(聰睿明敏)은 인신무이로되 인유삼망(人有三妄)이라. 시고혹미(是故或迷)하고 지각운동(知覺運動)은 인물무간(人物 間)이로되 인전삼진(人全三眞)이라 시고능오(是故能悟)니라.
뭇 사람도 깨달으면 밝은이요 밝은이가 돌이키면 한얼님이니, 그 비롯은 하나로서 같지 않음이 없고, 그 마지막엔 온갖 다름이 하나로 돌아가느니라.
중오칙철이오 철반칙신이니 기시야일막부동(其始也一莫不同)이오 기경야만수귀일(其竟也萬殊歸一)이니라.
삼백예순여섯이란 것은 "한울셈"의 크게 불어난 것이니, 그러므로 다섯 물 건이 불어서 삼백예순여섯 종류가 되고, 다섯 교훈이 불어서 삼백예순여섯 말씀이 되고, 다섯 일이 불어서 삼백예순여섯 일이 되느니라.
삼백육십육자(三百六十六者)는 천수지대연야(天數之大衍也)라 고오물(故五物)이 연이위삼백육십육종(衍而爲三百六十六種)하고 오훈(五訓)이 연이위삼백육십육언(衍而爲三百六十六言)하고 오사(五事)가 연이위삼백육십육사(衍而爲三百六十六事)라.
그러므로 삼백예순여섯 목숨을 기르고 삼백예순여섯 몸뚱이를 마련하고 삼백예순여섯 기틀을 돌림은 조화의 공적이요, 삼백예순여섯 뼈가 새로워지고 삼백예순여섯 혈로 기운이 통하고, 천지가 돌아가는 삼백예순여섯 도수에 맞는 것은 교화의 공적이요, 삼백예순여섯 행실을 지키고 삼백예순여섯 덕을 쌓고, 삼백예순여섯 일을 짓는 것은 치화의 공이니라.
고양삼백육십육명(故養三百六十六命)하며 재삼백육십육체(裁三百六十六體)하며 알삼백육십육기자(斡三百六十六機者)는 조화지공야(造化之功也)오 환삼백육십육골(換三百六十六骨)하며 주삼백육십육혈(湊三百六十六穴)하며 회삼백육십육도자(會三百六十六度者)는 교화지공야(敎化之功也)오 지삼백육십육행(持三百六十六行)하며 적삼백육십육덕(積三百六十六德)하며 주삼백육십육사자(做三百六十六事者)는 치화지공야(治化之功也)니라.
오직 밝은이는 이 셈에 의지하여 조화, 교화, 치화의 공적을 돕는 자라, 그러무르 큰 덕을 힘입어 보고 들음을 넓히고 큰 슬기를 힘입어 그 앎을 다학, 큰 힘을 힘입어 그 행함을 넓히느니라.
유철은 의차수(倚此數)하여 이찬공화자야(而贊功化者也)라 고자호대덕(故資乎大德)하여 이박견문(以博見聞)하고 자호대혜(資乎大慧)하여 이궁기지(以窮其知)하고 자호대력(資乎大力)하여 이광기행(以廣其行)하나니라.
보고 듣고 알고 행하는 것 그것을 일러 "한얼님의 기틀"이라 하나니, 그 한얼님의 기틀이 열리매 한울과 땅이 능력을 주는지라, 그러므로 구름과 비와 바람과 천둥을 가히 부릴 수 있고, 쇠와 돌과 물과 불을 가히 뚫어 막힘이 없나니라.
견문지행(見聞知行)을 시왈신기니 신기지발( 機之發)에 천지여능(天地與能)이라 고운우풍뢰(故雲雨風雷)를 가이구사(可以驅使)오 금석수화(金石水火)를 가이투이무애(可以透而 碍)니라.
대서 조화란 아버지의 도요, 교화란 스승의 도요, 치화란 임금의 도이니, 아버지의 도는 한임에게서 비롯되고, 스승의 도는 한웅에게서 비롯되고, 임금의 도는 한검에게서 비롯되니라.
부소위조화자(夫所謂造化者)는 부도야(父道也)오 교화자(敎化者)는 사도야(師道也)오 치화자(治化者)는 군도야(君道也)니 부도(父道)는 시호한임[始乎桓因]하고 사도(師道)는 시호한웅[始乎桓雄]하고 군도(君道)는 시호한검[始乎桓儉]하니라.
이 세 도는 사람도 또한 가졌지마는 다만 사람은 비롯이 있고 한얼님은 비롯이 없을 따름이니라.
차삼도자(此三道者)는 인역유지(人亦有之)로되 유인(惟人)은 유시(有始)오 이신은 칙무시이이니라.
오직 그 비롯이 없는지라. 그러므로 한울나라의 큼을 테두리하여 그 밖이 없고, 한울자리의 높음에 계시사 그 위가 없고, 참이치의 묘함을 발휘하사 그 먼저가 없고, 크고 작고 굵고 가늠을 거느리사 빠뜨림이 없으시나니, 그러므로 참함은 둘이 없고 한울은 그 하나도 없느니라.
유기무시야라. 고범위천국지대(故範圍天國之大)하여 이무외하고 어림천위지존(御臨天位之尊)하여 이무상하고 발휘진리지묘(發揮眞理之妙)하여 이무선(而 先)하고 통호홍섬거세(統乎洪纖巨細)하나니 고진무이오 이천무일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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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장 세 밝은이[삼철]
으뜸 밝은이는 성품을 통하고, 다음 밝은이는 목숨을 알고, 아랫 밝은이는 정기를 보전하나니, 통함은 빈 것을 이름이요, 앎은 밝은 것을 이룸이요, 보전함은 억센 것을 이름이라, 밝은이들이 이 세 가지 보배를 가졌으므로 능히 그 아름다움을 온전히 하느니라.
상철통성하고 중철지명하고 하철보정하니 통왈허(通曰虛)오 지왈명(知曰明)오 보왈건(保曰健)이라 철유차삼보라 고능전기미(故能全其美)니라.
빈 이는 한얼님으로 더불어 그 덕을 합하고, 밝은이는 한얼님으로 더불어 그 슬기를 합하고, 억센이는 한얼님으로 더불어 그 힘을 합하나니, 덕은 능히 어짊을 낳고, 슬기는 능히 지혜를 낳고, 지혜는 잣대질함(度)을 낳고, 날램은 저울질함(量)을 낳으며, 되질함은 용서함(恕)을 낳고, 잣대질함은 분별함(識)을 낳고, 저울질함은 옳음(義)을 낳느니라.
허자(虛者)는 여신합기덕하고 명자(明者)는 여신합기혜하고 건자(健者)는 여신합기력이라. 덕능생인(德能生仁)하고 혜능생지(慧能生智)하고 역능생용(力能生勇)하며 인생량(仁生量)하고 지생도(智生度)하고 용생권(勇生權)하며 양생서(量生恕)하고 도생식(度生識)하고 권생의(權生義)하니라.
성품의 모양은 ○(동그라미)요, 목숨의 모양은 □(네모)요, 정기의 모양은 △(세뿔)이니, 이것을 일러 "세 묘함"이라 하느니라.
성상원(性相○)하고 명상방(命相□)하고 정상각(精相△)하니 시명삼묘(是名三妙)라.
밝은이는 이것으로써 삼극(三極)의 형상에 응하나니, 밖이 둥글고 안이 빈 것은 한울의 높음을 형상한 것이요, 얼굴 바닥은 바르고 지름길이 곧은 것은 땅의 평평함을 형상한 것이요, 위가 홀수요 아래가 짝수인 것은 사람의 모양을 형상한 것이니라.
철인이지하여 내응삼극지상(乃應三極之象)하니 외권내공(外圈內空)은 상천궁야(象天穹也)오 면정경직(面正徑直)은 상지평야(象地平也)오 상기하우는 상인형야(象人形也)니라.
밝은이는 이것으로써 세 고름 법제를 정하니, 한 동그라미로 에워싸 되질하는 법이 비롯되고, 두 줄을 가로 세로 그어 잣대질하는 법이 생기고, 세 점을 서로 맞추어 저울질하는 법이 이루어지니라.
철인이지하여 내정삼평지제(乃定三平之制)하니 일권포위(一圈包圍)에 양제시의(量制始矣)며 이선종횡(二線縱橫)에 도제생의(度制生矣)며 삼점교칭(三點交稱)에 형제성의(衡制成矣)니라.
밝은이는 이것으로써 세 큰 도에 부합하니 구심(求心)과 원심(援心)으로 덕을 베품이 크고, 세로 다하고 가로 다하여 슬기의 베품이 넓고, 던져 맞히고 도로 맞혀 힘의 베품이 고르니라.
철인이지하여 내부삼대지도(乃符三大之道)하니 구심원심(求心援心)에 덕시부야(德施溥也)오 수진횡진(竪盡橫盡)에 혜시광야(慧施廣也)오 투사반사(投射反射)에 역시균야(力施均也)니라.
어진 이는 반드시 지혜가 있고 지혜로운 이는 반드시 날램이 있나니, 그러므로 지혜가 어짐에 대하여는 동그라미 안에 네모 같으며, 날램이 지혜에 대하여는 네모 안에 세뿔 같아서 하나는 크고 하나는 작아 스스로 같지 않으니라.
인자(仁者)는 필유지(必有智)하고 지자(智者)는 필유용(必有勇)이니라. 고지지어인(故智之於仁)엔 여원내방(如圓內方)하며 용지어지(勇之於智)엔 여방내각(如方內角)하여 일대일소자유부동(一大一小自有不同)하니라.
그러므로 날랜 이가 반드시 지혜 있는 것 아니며, 지혜로운 이가 반드시 어짐이 있는 것 아니니, 이것이 밝은이로서도 세 가지 차별이 있는 까닭이니라.
시이용자불필유지(是以勇者不必有智)며 지자불필유인(智者不必有仁)이니 차소이철유삼자별(此所以以?有三者別)하니라.
물건에는 작고 큰 것이 있고, 이치에는 굽고 곧은 것이 있고, 일에는 가볍고 무거운 것이 있나니, 여기에 그 취하고 버릴 바를 알면 도에 거의 가까우니라.
물유소대(物有小大)하고 이유왕직(理有枉直)하고 사유경중(事有輕重)하니 어사(於斯)에 지소추사(知所趨捨)면 서호근의(庶乎近矣)니라.
그러므로 물건을 느끼는 것은 되질함보다 더 큰 것이 없고 이치를 미루어 아는 것은 잣대질함보다 더 큰 것이 없고, 일에 응하는 것은 저울질함보다 더 큰 것이 없느니라.
고감물(故感物)은 막대호량(莫大乎量)하고 추리(推理)는 막대호도(莫大乎度)하고 응사(應事)는 막대호권(莫大乎權)하니라.
대저 베풀되 되질에 맞지 않으면 어진 것이 아니요, 자로 재되 잣대질에 맞지 않으면 지혜로운 것이 아니며, 행하되 저울질에 맞지 않으면 날램이 아니니라.
부시부적량(夫施不適量)이 비인야(非仁也)며 재불중도비지야(裁不中度非智也)며 행불칭권(行不稱權)이 비용야(非勇也)니라.
그러므로 작은 것을 미루어 큰 것에 미침은 용서함의 지극한 것이요, 굽은 바로 펴서 곧게 함은 분별함의 자세한 것이요, 가벼운 것을 버리고 무거운 것을 가짐은 옳음의 결단이니라.
시고(是故)로 추소급대(推小及大)는 서지지야(恕之至也)오 교왕질직(矯枉質直)은 식지심야(識之審也)오 사경지중(捨輕持重)은 의지결야(義之決也)니라.
크게 되질함은 능히 비어야 하고, 크게 잣대질함은 능히 밝아야 하고, 크게 저울질함은 능히 세어야 하나니, 비면 물건을 받음이 크고, 밝으면 물건을 분별함이 곧고, 세면 물건을 굄이 무거우니라.
대량(大量)은 능허(能虛)하고 대도(大度)는 능명(能明)하고 대권(大權)은 능권(能權)이라. 허칙수물야대(虛則受物也大)하고 명칙변물야직(明則辨物也直)하고 건칙지물야중(健則支物也重)하니라.
되질함은 범위가 있고, 잣대질함은 거리가 있고, 저울질함은 표준이 있나니, 범위를 정함은 중심을 세움에 있고, 거리를 미루어 아는 것은 이 위아래 사방을 맞춤에 있고, 표준을 세움은 중간을 잡음에 있느니라.
양유범위(量有範圍)하고 도유거리(度有距離)하고 형유표준(衡有標準)이라. 정범위(定範圍)는 존호건극(存乎建極)하고 추거리(推距離)는 존호혈구하고 입표준(立標準)은 존호절충(存乎折衷)이니라.
대저 이른 바 범위란 것은 둘레요, 거리란 것은 지름질이요, 표준이란 것은 점을 이름이니, 진실로 능히 복판점에 서서 둘레로 공간을 두르고, 지름길로 시간을 살피면 온갖 일 온갖 물건이 반 듯하게 질서가 있어, 겉과 속 멀고 가까움이 제대로 알맞지 않은 것이 없으며 그것을 일러 밝은이의 공과 능력이라 하나니, 비유컨대 둥근 물건이 테두리가 있고 중심이 있는 것 같거니와 참이치의 묘함이 또한 이와 같으니라.
부소위범위자(夫所謂範圍者)는 주야(周也)오 거리자(距離者)는 경야(徑也)오 표준자(標準者)는 점야(點也)라. 구능립호중점(苟能立乎中點)하여 주변공간하며 경찰시간(徑察時間)이면 사사물물(事事物物)이 정연유서(井然有序)하여 표리원근(表裏遠近)이 막불종요이중(莫不從容而中)하니 시왈철인지공능이니라. 비여원물(譬如圓物)이 유권(有圈)하며 유중심연(有中心然)하니 진리지묘역유시야(眞理之妙亦猶是也)니라.
이진 이는 활 소는 것 같고, 지혜로운 이는 고기 낚는 것 같고, 날랜 이는 말 모는 것 같으니, 활 잘 쏘는 이는 항상 바로 하기를 힘쓰고, 고기 잘 낚는 이는 항상 살피기에 힘쓰며, 말 잘 모는 이는 항상 조심하기에 힘쓰나니, 항상 하여 힘들지 않은 데 이르는 것이 도의 지극함이니라.
인자여사(仁者如射)하고 지자여조(智者如釣)하고 용자여어(勇者如馭)라. 선사자(善射者)는 무항정(務恒正)하고 선조자(善釣者)는 무항심(務恒審)하고 선어자(善馭者)는 무항신(務恒愼)하니 항이지어불면(恒而至於不勉)이 도지극야(道之極也)니라.
이 도란 것은 밖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제 몸에 있어서 밖으로 나타나는 것이니, 나를 미루어 남을 앎에 되질함이 있음은 바름의 닦음이요, 분별함에 잣대질함이 있음은 살핌의 지극함이요, 옳음을 행함에 저울질 함이 있음은 조심의 극진함이니라.
시도비유자어외야(是道非攸自於外也)라 존호기(存乎己)하여 이현제외(而顯諸外)하나니 추서유랑(推恕有量)은 정지수야(正之修也)오 변식유도(辨識有度)는 심지지야(審之至也)오 행의유권(行義有權)은 신지진야(愼之盡也)니라.
어짐이 많고 지혜가 적으면 굳기만 하고 통하지 못하며, 지혜가 많고 날램이 적으면 꾸미기만 하고 단행하지 못하며, 날램이 많고 어짐이 적으면 세기만 하고 너그럽지 못하며, 어짐이 많고 날램이 적으면 기대어 서지 못하며 날램이 많고 지혜가 적으면 빠르기만 하고 밝지 못하며, 지혜가 많고 어짐이 적으면 자랑만 하고 진실하지 못하니라. 어짐과 지혜가 많고 날램이 적으면 꾀를 좋아하되 능히 행하지 못하며, 어짐과 날램이 많고 지혜가 적으면 건지기를 좋아하되 능히 살피지 못하며, 지혜와 날램이 많고 어짐이 적으면 나아가기를 좋아하되 능히 오래지 못하나니, 셋중에 하나만 모자라도 이는 통달하지 못함이라 이르니라.
인다지소(仁多智少)면 칙고이불통(則固而不通)하고 지다용소(智多勇少)면 칙식이부단(則飾而不斷)하고 용다인소(勇多仁少)면 칙맹이불관(則猛而不寬)하고 인다용소(仁多勇少)면 칙의이불립(則倚而不立)하고 용다지소(勇多智少)면 칙첩이불명(則捷而不明)하고 지다인소(智多仁少)면 칙긍이불성(則矜而不誠)이라 인지다이용소(仁智多而勇少)면 칙호모이불능행(則好謨而不能行)하고 인용다이지소(仁勇多而智少)면 칙호제이불능심(則好濟而不能審)하고 지용다이인소(智勇多而仁少)면 칙호진이불능구(則好多而能久)하나니 삼결기일(三缺其一)이면 시위미달(是謂未達)이라.
그러므로 통달한 어짐은 트임에 있고, 통달한 지혜는 앎에 있고, 통달한 날램은 보전함에 있어, 오직 어진 이라야 능히 좋아하고 미워할 수 있으며, 오직 지혜 있는 이라야 능히 옳다 그리다 할 수 있으며, 오직 날랜 이라야 능히 쾌하고 부끄러워할 수 있나니, 물건을 느끼고 일에 응함이 이것에 벗어나지 않느니라.
고달인(故達仁)은 존호통(存乎通)하고 달지(達智)는 존호지(存乎知)하고 달용(達勇)은 존호보(存乎保)니라. 유인(惟仁)이야 위능호오(爲能好惡)하며 유지(惟智)라야 위능시비(爲能是非)하며 유용(惟勇)이라야 위능쾌작(爲能快?)하나니 감물응사불외호시(感物應事不外乎是)니라.
뭇 사람들은 세 고른 법제에 어두워, 날마다 쓰면서도 마르잴 줄을 알지 못하므로 넓었다 좁았다 하여 도래에 맞지 않고, 길었다 짧았다 하여 곱자에 맞지 않고, 낮았다 높았다 하여 수평에 맞지 않느니라.
중매호삼평(?昧乎三平)하여 일용이불지재(日用而不知裁)라 고일관일협(故一寬一狹)하여 불중규(不中規)하며 일장일단(一長一短)하여 불중구(不中矩)하며 일저일앙(一低一昻)하여 부중준(不中準)하나니라.
그래서 내게 순종하는 이는 은혜로이 하고 나를 거스르는 이는 원수로 여겨, 좋아하고 미워함이 치우치며, 나와 가까운 이는 무리를 짓고 나와 서투른 이는 물리쳐서, 옳고 그름이 기울어지며 나를 기리는 이는 기뻐하고 나를 흠하는 이는 성내어서, 쾌하고 부끄러워함이 어긋나나니 이것을 일러 "아득함"이라 하느니라.
시이순아자(是以順我者)는 은(恩)하고 역아자(逆我者)는 수(讐)하여 호오편언(好惡偏焉)하며 밀아자(密我者)는 당(黨)하고 소아자(疎我者)는 척(斥)하여 시비의언(是非倚焉)하며 예아자(譽我者)는 희(喜)하고 훼아자(毁我者)는 노(怒)하여 쾌작여언(快?戾焉)하나니 차지위미(此之謂迷)니라.
그러나 뭇 사람의 처음은 밝은이와 차이가 없으나, 그 착하고 악함과 맑고 흐림과 후하고 박함에 잇어서 혹시 걸림이 있다 해도 착함은 본시덜함이 없는지라 돌이키면 곧 처음이 되느니라.
연중초는 무간어철이라 기어선악(其於善惡)과 청탁(淸濁)과 후박(厚薄)에 혹유구지자(或有拘之者)로되 진본무감이라. 반지칙초(返之則初)니라.
진실로 능히 뭇 사람들로 하여금 배워서 옳음을 알게 하여 그것을 넓히고 채우면 가히 날램에 이를 것이요, 날래면서 앎에 나아가 능히 살펴서 분별하면 가히 지혜에 이를 것이요, 지혜로우면서 용서를 행하여 능히 돌이켜 구하면 가히 어짐에 이를 것이니, 이것을 "다시 깨달음"이라 이름하느니라.
구능사중으로 학이지의(學而知義)하여 능확충지(能擴充之)면 가이지어용(可以至於勇)이오 용이즉식(勇而卽識)하여 능심변지(能審辨之)면 가이지어지(可以至於智)오 지이행서(智而行恕)하여 능반구지(能反求之)면 가이지어인(可以至於仁)이니 시명재오(是名再悟)니라.
밝은이의 착함에 돌이킴은 세 층 섬돌과 같으니, 그 올라 들어감에 미쳐서는 오직 한 방이니라.
철지반진야는 여삼등계(如三等階)하니 급기승이입야(及其陞而入也)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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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장 세 가달[삼망, 三妄]
한울이 베풀고 땅이 이어 사람의 도가 비롯되었고 아버님이 낳게 하고 어머님이 교화하여 아들의 도가 이루어졌으나, 행하고 달림이 같지 않아 헤맴과 깨침길이 갈리되, 돌이켜 나아가면 사람의 할 일을 다하느니라.
천시지승(天施地承)하니 인도시의(人道始矣)오 부생모화(父生母化)하니 자도성의(子道成矣)며 행주불일(行走不一)하니 미오판의(迷悟判矣)오 반이즉지(返而卽之)하니 인사필의(人事畢矣)니라.
한울의 도는 빈 것을 주장하고 땅의 도는 알참을 주장하니, 빈 것은 같지 않음이 없고, 알참은 다르지 않은 것이 없는지라. 비고 알참이 서로 같은 것은 착함이 되고, 다른 것은 가달이 되나니, 가달이 되면 갈래가 지고, 갈래가 지면 같지 않아, 혹은 돌이키며 혹은 그렇지 못해 재앙과 복이 섞이느니라.
천도주허(天道主虛)하고 지도주실(地道主實)하니 허무부동이오 실무불이라 허실상여(虛實相與)에 동자위진(同者爲眞)하고 이자위망(異者爲妄)하니 망칙기(妄則岐)오 기칙부제(岐則不齊)라 혹반혹부(或返或否)하여 앙경착언(殃慶錯焉)이니라.
생겨나는 기틀은 씨에 있고, 변화하는 기틀은 뿌리에 있나니, 뿌리가 오직 굳게 박혀야 꽃도 피고 열매도 맺느니라. 그러므로 사람의 도는 배태함에서 비롯하느니라.
생기재자(生氣在子)하고 화기재근(化氣在根)하니 근유고착(根惟固着)이어사 내화내실(乃華乃實)이라 고인도(故人道)는 시어배태(始於胚胎)니라.
그러므로 능히 그 씨를 보전하여 씨알에 해침이 없는 것을 "밑동을 바름[正本]"이라 이름하고, 맑게 기르고 두터이 심어 그 뿌리를 잘 보호하는 것을 "밑동을 세움[立本]이라 이름하나니, 밑동이 약하고서 끝이 강한 것은 없으며, 처음에 조심하지 않고서 능히 뒤에 잘 하는 것이란 드무니라.
고극보기자(故克保其者)하여 무해어인을 시명정본(是名正本)이오 청양후식(淸養厚植)하여 선호기근(善護其根)을 시명입본(是名立本)이니 본약이말강자부의(本弱而末强者不矣)며 미신궐초(未愼厥初)오 극선기후자희의(克善其後者希矣)니라.
사람의 낳는 것이 마치 싹이 흙에 있음과 같아 때는 이르고 늦음이 있으며, 흙은 기름지고 메마름이 있어 혹은 알곡이요 혹은 쭉정이라, 알곡은 좋은 땅에서 되고 쭉정이는 궂은 땅에서 되는 것이니, 오직 중간 땅에서는 알곡과 쭉정이가 섞이느니라.
인지생야여묘재토(人之生也如苗在土)하니 시유조안(時有早晏)하며 양유옥척(壤有沃瘠)하여 혹수혹박(或粹或粕)이라 수위정지(粹爲淨地)오 박위오지(粕爲汚地)니 유미지(惟迷地)는 칙수박(則粹粕)이 잡언(雜焉)이니라.
좋은 땅에 박히면 상등 뿌리가 되고, 궂은 땅에 박히면 하등 뿌리가 되나니, 상등 뿌리는 밝은이요, 하등 뿌리는 어리석은 이니라.
착어정지(着於淨地)하면 위상근(爲上根)하고 착어오지(着於汚地)하면 위하근(爲下根)하니 상근유철이오 하근유치(下根惟癡)니라.
뭇 사람은 중간 땅에 박혀 잡되고 순수하지 못하여 여섯 등품을 이루나니, 알곡이 많은 것이 셋이요 쭉정이가 많은 것이 셋이니라. 알곡될 성분이 많은 것은 변화하기 쉬우나, 쭉정될 성분이 많은 것은 제 맘대로 하기 쉬운데, 제 맘대로 하다가는 어리석은 이가 되고, 변화하면 밝은이가 되나니, 이것을 "중등 뿌리"라 이름하느니라.
유중착어미지(惟?着於迷地)하대 박이불순(駁而不純)하여 혼성육품(混成六品)하니 수다자삼(粹多者三)이라. 수다이화(粹多易化)하고 박다이임(粕多易任)하니 임가위치(任可爲癡)오 화가위철일새 시명중근(是名中根)이니라.
마음은 집과 같고 기운은 문과 같고 몸은 그릇과 같으니, 집 자리는 평평한 것이 제일이요, 문 자리는 화창한 것이 제일요, 그릇 자리는 안정한 것이 제일이니라.
심유택(心猶宅)이오 기유문(氣猶門)이오 신유기(身猶器)라 택지귀평(宅地貴平)하고 문지귀화(門地貴和)하고 기지귀강(器地貴康)이니라.
평평한 것은 넓고 비어서 좁고 막힘이 없으며, 화창한 것은 환하고 밝아 어둡고 그윽함이 없으면, 안정한 것은 완전하고 튼튼하여 비뚤어지고 이지러짐이 없느니라.
평칙탄허(平則坦虛)하여 무소착애( 所窄?)하고 화칙투명(和則透明)하여 무소암유하고 강칙완건(康則完健)하여 무소고유니라.
살되 정한 임자가 없음을 "흉한 집"이라 이르나니 문을 닫고 열지 않으며, 그릇을 감추고 쓰지 않으면 마침내 허물어짐에 이를 것이다. 어찌 조심하지 않을 것이랴!
거무정주(居 定主)를 시명흉택(是名凶宅)이라 합이불벽(闔而不闢)하며 장이불용(藏而不用)이면 경지어훼(竟至於毁)하나니 가불신여(可不愼歟)아.
가달이란 혼자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참함에 의지하여 나타나는 것이니, 그러므로 참함이 없으면 가달됨도 없고, 가달됨이 없으면 참함도 없는 것을 알 것이다. 둘이 서로 따라 붙어 잠시도 떠나지 아니하나니 만일 떠나면 사람의 도가 없어지느니라.
망불독존(妄不獨存)이라 의진이현(依眞而見)하나니 시고내지비진(是故乃知非眞)이면 무망이오 비망무진(非妄 眞)이라 양상연부(兩相緣附)하여 불가잠리(不可暫離)하니 가리(可離)면 무인도야니라.
그러므로 마음이 성품에 의지함이 마치 한울에 구름과 같아 한울이 비었으므로 구름이 나는 것이며, 기운이 목숨에 의지함이 마치 바람에 불과 같아 바람이 빠르므로 불이 타오르는 것이며, 몸이 정기에 의지함이 마치 자석에 쇠와 같아 자석의 힘이 강하므로 쇠가 끌리는 것이니라.
고심의성(故心依性)이 여천운연(如天雲然)하니 천광운등(天曠雲騰)하고 기의명(氣依命)이 여화풍연(如火風然)하니 화열풍취(火熱風驟)하고 신의정(身依精)이 여자철연(如磁鐵然)하니 자강철소(磁强鐵銷)니라.
착함이 나의 본마음이요, 맑음이 나의 본기운이요, 후함이 나의 본몸인데, 아득하여 악하게 되고 흐리게 되고 박하게 되니, 그러므로 아득함이 본시 그런 것이 아니라 환상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며, 깨달음이 갑자기 되는 것이 아니라 돌이킴에 따라 회복되는 것이니라.
선아본심(善我本心)이며 청아본기(淸我本氣)며 후아본신(厚我本身)이어늘 미지(迷之)하여 위악(爲惡)하며 위탁(爲濁)하며 위박(爲薄)하니 시고(是故)로 내지미비본연(乃知迷非本然)이라 인반내복(因返乃復)이니라.
누군들 제가 복되지 않으려 하리요마는 오직 착한 이라야 얻는 것이며, 누군들 제가 장수하지 않으려 하리요마는 오직 맑은 이라야 온전한 것이며, 누군들 제가 귀하지 않으려 하리요마는 오직 후한 이라야 이르는 것이니라.
숙불아복(孰不我福)이리오마는 유선자(惟善者)라야 득(得)하고 숙불아수(孰不我壽)이리오마는 유청자(惟淸者)라야 전(全)하고 숙불아귀(孰不我貴)리오마는 유후자(惟厚者)라야 치(致)하나니라.
마땅히 복되지 못할 데에 복되면 이는 도리어 재앙이며, 마땅히 장수하지 못할 데에 장수하면 이는 도리어 욕이며, 마땅히 귀하지 못할 데에 귀하면 이는 도리어 부끄러움이니라. 세 경지를 통틀어 아홉 가지로 나누나니, 복됨에는 편안함과 화순함과 덕을 좋아함이요, 장수함에는 순하게 받음과 전하여 이음과 향기를 끼침이요, 귀함에는 높은 지식과 빛나는 기림과 공적을 마침이니라.
부당복이복(不當福而福)이면 사반구의(斯反咎矣)오 부당수이수(不當壽而壽)면 사반욕의(斯反辱矣)오, 부당귀이귀(不當貴而貴)면 사반치의니라 총삼경(總三慶)하여 분구종(分九種)하니 복(福)엔 강녕(康寧)과 화순(和順)과 호덕(好德)이오 수(壽)엔 순수(順受)와 전습(傳襲)과 유형(流馨)이오, 귀(貴)엔 탁식(卓識)과 영예(榮譽)와 완공(完功)이니라.
편안함과 순하게 받음과 높은 지식은 자기만이 오로지 함이요, 화순함과 전하여 이음과 빛나는 기림은 남과 더불어 같이 함이요, 덕을 좋아함과 향기를 끼침과 공적을 마침은 한울에 짝함이니라.
강녕(康寧)과 순수(順受)와 탁식(卓識)은 전호기(專乎己)하고 화순(和順)과 전습(傳襲)과 영예(榮譽)는 여인동(與人同)하고 호덕(好德)과 유형(流馨)과 완공(完功)은 배호천(配乎天)이니라.
그런데 황금 비단의 부유와, 백 살의 장수와, 벼슬의 영화는 모두 가달이라. 아는 이는 경사라 이르지 않느니라.
연이금수지부(然而金繡之富)와 기이지구와 작록지영(爵祿之榮)은 망(妄)이라 지자불위경야(知者不謂慶也)니라.
마음은 오직 신령한 기틀이라. 고요하면 없어지고 움직이면 있는 것이니, 착함과 악함이 모두 이로 말미암아 지어지느니라. 어진 이라야 마르재어 착함을 착하게 여겨 반드시 나아가고, 악함을 악하게 여겨 반드시 물러나서 한울의 사랑을 얻어 비길 수 없는 복락을 누리느니라.
심유령기(心惟靈機)라 정무동유하니 유선유악(惟善惟惡)이 개유시작(皆有是作)이라. 인자(仁者)아 재지(裁之)하여 선선필진(善善必進)하며 오악필퇴(惡惡必退)하나니 득천자애(得天慈愛)하여 향무등락(享 等樂)하나니라.
지혜로운 이가 기운을 기름에는 물건에 가리워지지 않으며 정에 부림받지 않나니, 맑은 구슬이 못에 있음과 같아 그 빛이 가리우지 못할 것이라. 그러므로 한울의 아름다운 명령을 즐거워하여 그 목숨을 온전히 하느니라.
지자지양기야(智者之養氣也)엔 불폐어물(不蔽於物)하며 불역어정(不役於情)이라 수연여주지재연(粹然如珠之在淵)하여 막엄기광(莫掩其光)이라. 고낙천휴명(故樂天休命)하여 이전기수(以全其壽)하나니라.
귀와 눈의 밝음과 손과 발의 빠름과 몸과 피부의 튼튼함을 이르되, 몸이 후하다 하는 것이니 날램의 덕이니라. 보고 듣고 알고 행하는 기틀이 이를 힘입어 펴내지 않음이 없는지라, 이것이 그 귀함이 되는 까닭이니라.
이목지총명(耳目之聰明)과 수족지예민(手足之銳敏)과 체부지충건(體膚之充健)을 시왈신후(是曰身厚)니 용지덕야(勇之德也)라 견문지행지기막불자시이발(見聞知行之機莫不資是而發)하나니 차기소이위귀야(此其所以爲貴也)니라.
참함은 고요함에서만 오로지 하고 가달됨은 움직임에서 생기나니, 움직임과 고요함이 그 떳떳함을 잃지 않음은 한울의 도이니라. 그러므로 몸이 망령되이 움직이지 않으면 기운이 피로하지 아니하며, 기운이 망령되이 움직이지 않으면 마음이 부림받지 아니하며, 마음이 망령되이 움직이지 않으면 정신이 고달프지 않느니라.
진전호정(眞專乎靜)하고 망생어동(妄生於動)하니 동정(動靜)이 부실기상(不失其常)은 천지도야(天之道也)라 고신불망동(故身不妄動)이면 칙기불로(則氣不勞)하고 기불망동(氣不妄動)이면 칙심불역(則心不役)하고 심불망동(心不妄動)이면 칙신불피(則 不疲)니라.
진실로 이같이 하면 떳떳함에 편안히 처하며 변함을 알아서 행하되, 고요하면 깊은 못과 같아 맑게 할 수도 흐리게 할 수도 없 으며, 움직이면 화한 바람과 같아 어지럽지도 않고 사납지도 않으며, 그치면 높은 멧부리와 같아 가히 옮기지 못할지라, 대저 그런 뒤에라야 도를 말할 수 있느니라.
구여시(苟如是)면 칙안상이처(則安常而處)하며 지변이행(知變而行)하대 정칙심연연(靜則深淵然)하여 징요부득(澄撓不得)하며 동칙화풍연(動則和風然)하여 불음불포(不淫不暴)하며 지칙교악연(止則喬嶽然)하여 불가이전이(不可以 轉移)라 부연후(夫然後)에 내가언도(乃可言道)니라.
뭇 사람들과 밝은이의 분별이 뿌리는 같지 않음이 아니로되, 땅이 좋고 궂음이 있어 뿌리 박음이 한결같지 않으며, 길이 바르고 비뚤어짐이 있어 다니는 것이 이에 갈라짐이라. 그러므로 같지 않은 것으로서 보면 그 사이가 한울과 땅일 뿐 아니로되, 진실로 같은 것으로서 보면 그 처음이 털끝만큼도 다르지 않느니라.
중철지별이 근비부동(根非不同)이나 연지유정오(然地有淨汚)하여 착지불일(着之不一)하고 도유정사(途有正邪)하여 행지내이(行之乃貳)라. 고이부동관(故以不同觀)하면 기간(其間)이 불시천양이오 구이동관(苟以同觀)하면 궐초불상호말(厥初不爽毫末)이니라.
대저 거울 앞에서 비침을 구함에는 먼지를 닦음만 같지 못하고, 등불을 대하여 밝은을 구함에는 심지를 긁음만 같지 못하니, 갈랫길에 당하여 참함을 찾음도 또한 이 같은지라. 아득한 길이 끝나는 곳에 바야흐로 "깨닫는 땅"에 이르며 망령된 생각이 끝날 때에 "참 누리"가 나타나리라.
부임경구감(夫臨鏡求鑑)이 막여마구(莫如磨垢)오 대등구명(對燈求明)이 막여척주(莫如剔炷)니 당기심진(當岐尋眞)도 역당여시(亦當如是)라 미도궁처(迷途窮處)에 방도오지(方到悟地)하며 망념진시(妄念盡時)에 내현진경(乃現眞境)이니라.
자욱한 티끌이 해를 가리워도 본시 밝음은 해치지 못하며 쌓인 안개가 허공에 비껴도 본시 빈 것은 해치지 못하나니, 티끌이 사라지고 안개가 걷히면 장애될 것이 없고, 전체가 다 드러나 본시 있는 형상대로 나타나느니라.
충진폐일(沖塵蔽日)이 불해본명(不害本明)이오 적무횡공(積霧橫空)이 불해본허(不害本虛)라 진소무파(塵銷霧罷)하면 무소류애하고 전체필로(全體畢露)하여 현고유상(現固有象)하나니라.
그러므로 참함에 나아가는 길은 돌이킴에 있고, 가달됨을 돌이키는 길은 변화함에 잇고, 변화해 가는 법은 한 곬으로 힘씀에 있느니라.
고즉진지도(故卽眞之道)는 존호반(存乎返)하고 반망지도(返妄之道)는 존호화(存乎化)하고 화행지법(化行之法)은 재호일의(在乎一意)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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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장 세 길[삼도, 三途]
하나를 한 번 하여 하나가 되니 참함이 이로 말미암아 얻어지고, 하나를 두 번 하여 둘이 되니 가달됨이 이로 말미암아 붙으며, 셋을 한 번 하여 셋이 되니 길이 이로 말미암아 지어지고, 셋을 두 번 하여 여섯이 되니 누리가 이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느니라.
일일 위일(一一爲一)하니 진유시수(眞有是受)하고 양일위이(兩一爲二)하니 망유시착(妄有是着)하며 일삼위삼(一三爲三)하니 도유시작(途有是作)하고 양삼위육(兩三爲六)하나니라.
하나면 오로지 되고 둘이면 짝이 되어, 두 물건이 마주서면 반드시 그 사이에 끼이는 것이 잇는지라. 그러므로 아울러 셋 이 되니 세 자리가 서서 사람의 일이 갖추어지느니라.
일칙전(一則專)하고 양칙대(兩則對)하여 이물병치(二物幷峙)면 필유개어기간(必有介於其間)이라 고호지위삼(故互之爲三)하나니 삼위입이인사비(三位立而人事備)니라.
물건이 밖으로 부딪침이 있으면 반드시 안에서 응하는 것이 있을지라 안팎이 서로 대하여 느낌이 되고, 또 들어가 갈마듦이 있으면 반드시 물러나 나오는 것이 있을지라 나듦이 서로 대하여 숨쉼이 되고, 또 속으로 사무침이 있으면 반드시 겉에서 맞대는 것이 있을지라. 겉안이 서로 대하여 부딪침이 되나니, 세 가지가 아울러 행하여 서로 섞여도 틀리지 않느니라.
물유격어외(物有激於外) 칙필유응호중야(則必有應乎中也)라 중외상대이위감(中外相對而爲感)하고 유입이대(有入而代)면 칙필유사이출야(則必有謝而出也)라 표리상대이위촉(表裏相對而爲 )하나니 삼자병행(三者幷行)하여 교호불착(交互不錯)하나니라.
길이 여섯 과목이 있어 세 가지로 나누면, "느낌길"은 여섯이니 깨달음과 살핌과 앎[知]은 알음[識]이 되고, 움직임과 추리와 결정함은 분별이 되며, "숨쉼길"은 여섯이니 당김과 갈마듦과 좇음은 들이쉼이 되고, 돌림과 물러남과 헤침은 내쉼이 되며, "부딪침길"은 여섯이니 받음과 이끔과 미침은 전함이 되고 일어남과 감[行]과 사무침[達]은 보냄이 되느니라.
도유육과(途有六科)하여 분지각삼(分之各三)하니 감도육(感途六)에 각찰지위식(覺察知爲識)이오 동추정(動推定) 위변(爲辨)이며 식도육(息途六)에 인대순위납(引代循爲納)이오 선사배위출(旋謝排爲出)이며 촉도육에 수도급위전(受導及爲傳)이오 발행달위송(發行達爲送)이니라.
대저 알음[識]과 들이쉼과 전함은 밖에서부터 안으로 오는 것이요, 분별과 내쉼과 보냄은 안으로부터 밖으로 나가는 것이니, 밖엣것은 손[客]이요 안엣것은 임자요, 오직 그 사이에 끼인 것은 종[奴]이니라.
부식납전(夫識納傳)은 자외 이내(自外而內)하고 변출송(辨出送)은 자내이외(自內而外)하니 외자객야(外者客也)오 내자주야(內者主也)오 유개어긴간자(惟介於其間者)는 노야(奴也)니라.
그러므로 깨닫되 살피지 아니하면 알 수 없고, 움직이되 추리하지 아니하면 결정할 수 없으며, 당기되 갈마들지 아니하면 좇을 수 없고, 돌리되 물러나지 아니하면 물리칠 수 없으며, 받되 이끌지 아니하면 미칠 수 없고, 일어나되 가지 아니하면 사무칠 수가 없느니라.
고각이불찰(故覺而不察)이면 칙무유지하고 동이불추(動而不推)면 칙무유정하며 인이부대(引而不代)면 칙무유순하고 선이불사(旋而不謝)면 칙무유배하며 수이부도(受而不導)면 칙무유급하고 발이불행(發而不行)이면 칙무유달이니라.
알음[識]과 분별하는 기틀은 머릿골 속에 있고, 내쉬고 들이쉬는 기틀은 허파에 있고, 전하고 보내는 기틀은 골수 속에 있느니라.
식변지기(識辨之機)는 존호노하고 출납지기(出納之機)는 존호폐(存乎肺)하고 전송지기(傳送之機)는 존호수(存乎髓)니라.
마음이 느낌을 주장하되 알음과 분별함을 맡은 것은 아니며, 기운이 숨쉼을 주장하되 내쉬고 들이쉼을 맡은 것은 아니며, 몸이 부딪침을 주장하되 전하고 보냄을 맡은 것은 아니니, 오직 그 주장하는 임자는 따로 있느니라.
심주감(心主感)하되 이사식변칙부(而司識辨則否)하고 기주식(氣主息)하되 이사출납칙부(而司出納則否)하고 신주촉하되 이사전송칙부(而司傳送則否)하니 유기소이주재자별유존언(惟其所以主宰者別有存焉)이니라.
갔다 왔다 하는 것을 길이라 이르나니, 가는 것은 이미 지나갔고 오는 것은 머물지 않는지라. 가고가며 오고와서 그 형세가 장차 다함이 없나니, 어제가 가고 오늘이 오는 것은 시간에 길이 있음이요, 여기서 가고 저기서 오는 것은 곳에 길이 있음이요, 처음이 가고 나중이 오는 것은 일에 길이 있음이라, 그러므로 감도 없고 옴도 없으면 천지만물이 없어지게 되리라.
일왕일래지위도(一往一來之爲途)니 왕자(往者)는 이과(已過)하고 내자(來者)는 부주(不住)라 왕왕래래(往往來來)하여 세장무진언(勢將 盡焉)하니 작왕금래(昨往今來)는 시유도야(時有途也)오. 차왕피래(此往彼來)는 처유도야(處有途也)오 시왕종래(始往終來)는 사유도야(事有途也)라. 고무왕무래면 만유혹기호식의(萬有或機乎息矣)리라.
그러나 감이 있고 옴이 있음도 모두 또한 가달됨에서 말미암음이니, 오직 하나요 둘이 없으면 무엇이 가고 무엇이 오리요. 그러므로 큰 허공이 아득하고 비었으매 본시 위아래가 없고, 큰 빛이 널리 비치매 본시 밤낮이 없고, 큰 울림이 고루 퍼졌으매 본시 첫끝 막끝이 없고, 참이치가 하나로 통했으매 본시 저와 내가 없느니라.
연유왕유래(然有往有來)도 솔역유망(率亦由妄)이니 유일무이면 하왕하래(何往何來)리오 고태허광막(故太虛曠漠)에 본무상하하고 대광보조(大光普照)에 본무주야하고 대진중화(大震中和)에 본무단예하고 진리관통(眞理貫通)에 본무피차니라.
이러므로 위니 아랫니 하므로 빈 데서 사이가 있게 되고, 낮이니 밤이니 하므로 때에 사이가 있게 되고, 첫끝이니 막끝이니 하므로 마침[極]에도 사이가 있게 되고, 저니 나니 하므로 물건에도 또한 사이가 있게 되니라.
시고왈상왈하(是故曰上曰下)에 공내유간(空乃有間)하며 왈주왈야(曰晝曰夜)에 시부유간(時復有間)하며 왈단왈예(曰端曰倪)에 극혹유간(極或有間)하며 왈피왈차(曰彼曰此)에 물역유간(物亦有間)이니라.
그러므로 도는 오직 하나라 가히 갈 것이 없 고, 도는 오직 비었으므로 가히 사이가 없느니라.
고도유일(故道唯一)이니 가이무왕이오 도유허(道惟虛)하니 가이무간이니라.
경계란 제가끔 스스로 구역을 지어 가히 넘지 못함을 이름이니 그렇잖으면 변칙이니라. 경사에 울지 않음과 조상에 웃지 않음 같은 것은 느낌에 있어 경계가 같지 않음이요, 불이 차가와지면 재가 되고 얼음이 더워지면 끓는 물이 됨은 숨쉼에 있어 경계가 같지 않음이요, 귀로는 빛을 못 보고 눈으로는 냄새를 못 맡는 것은 부딪침에 있어 경계가 같지 않음이니라.
경자(境者)는 각자위구(各自爲區)하여 불가유월지위(不可踰越之謂)니 부칙변의(否則變矣)라. 기여경지불읍(其如慶之不泣)과 조지불소(弔之不笑)는 감불동경야(監不同境也)오 화한칙회(火寒則灰)하고 빙열칙탕(氷熱則湯)은 식불동경야(息不同境也)오 이불견색(耳不見色)하며 목불후향(目不嗅香)은 촉부동경야니라.
정은 경계에 따라 변하고 경계는 일에 따라 옮겨져 다섯 가지 변화가 있으니, 경계가 만나져서 낳음이 되고, 경계가 이어져서 자람이 되고, 경계가 깎아져서 늙음이 되고, 경계가 막아져서 병이 되고, 경계가 멸하여져서 죽음이 되는 것이니 모두 아흔 과정이 있느니라.
정수경변(情隨境變)하며 경수사천(境隨事遷)하여 유오종환(有五種幻)하니 경우위생(境遇爲生)이오 경속위장(境續爲長)이오 경삭위소(境削爲肖)오 경애위병(境碍爲病)이오 경멸위몰(境滅爲歿)이니 총지유구십정(總之有九十程)하니라.
나고 자라는 것은 "나아가는 변화"라 이르고, 늙고 병들고 죽는 것은 "물러가는 변화"라 이르나니, 자기의 경계로서 보면 나아가는 것은 즐겁고 물러가는 것은 괴로우며, 맞선 경계로서 보면 잘 나아가는 것이 즐겁고, 잘못 나아가는 것은 괴로운 것이니, 이것을 일러 "그 있음을 빌어 나고 죽고 즐기고 괴로워하는 것이라" 하느니라.
생장(生長)을 위지진환(謂之進幻)이오 소병몰(肖病歿)을 위지토환(謂之退幻)이니 이자경관(以自境觀)하면 진자낙(進者樂)하고 퇴자고(退者苦)하나니 차지위가기유이생몰락고(此之謂假其有而生歿樂苦)니라.
농부가 곡식을 가꿈에 있어서, 싹은 자리기 원하고 가라지는 죽기를 원함은 다름이 아니라, 이것은 좋은 것이요 저것은 나쁜 것이기 때문이며, 저것이 자라면 이것이 병들기 때문이니, 경계에 대하여 취하고 버림도 또한 마땅히 이 같으니라.
전옹지치화야(田翁之治禾也)에 묘욕기장(苗欲其長)하며 유욕기몰은 무타라. 위기차량이피악(爲其此良而彼惡)하며 위기피장이차병야(爲其彼長而此病也)라. 대경추사(對境趨捨)도 역당여시(亦當如是)니라.
대저 물건이 사람을 느끼게 함에 반드시 스스로 갈래가 있으므로 혹은 순수하고 혹은 잡되어 열 여덟 경계가 나뉘어 다른 여섯 구역이 되며, 사람이 물건에 응함에 그 또한 갈래가 있으므로 혹은 어기고 혹은 순하여 맞선 구역이 일흔 두 인연이 되며, 인연을 따라 길이 굴러 떠나고 모임이 무상하니라.
부물지감인야(夫物之感人也)에 필자유기(必自有岐)라. 고혹수혹박(故或粹或粕)하여 십팔경(十八境)이 분위삼십육구(分爲三十六區)하고 인지응물야(人之應物也)에 역부유기(亦復有岐)라. 고혹위혹순(故或違或順)하여 대구위칠십이연(對區爲七十二緣)하며 수연도전(隨緣途轉)하여 이합무상하나니라.
알음과 분별의 일은 내가 임자가 되고, 손[客]은 밖에서 사귀며, 종은 그 사이에서 부려지나니, 가운데 있어 추리하고 살피면 가고 옴이 떳떳하지 않아, 그 다님에 세 가지 바퀴가 있으니 마음대로 함과 머무름과 변화됨이라. 아울러 스물 세 번 굴러서 온갖 기틀이 따라 움직이느니라.
식변지사(識辨之事)는 아위주(我爲主)하고 객교어외(客交於外)하며 노역어간(奴亦於間)하니 거중추찰(居中推察)이면 왕복미상(往復靡常)이라 기행(其行)이 유삼종륜(有三種輪)하니 왈임주화(曰任住化)라. 공이십삼전(共二十三轉)하여 이만기수동(而萬機隨動)이니라.
"맘대로 하는 바퀴"는 오직 아홉 번 구르나니, 그런 줄 모르면서 그렇다 함을 "입으로 순함"이라 하며, 그렇지 않음을 모르고서 그러함을 "맹종"이라 하며, 마땅히 그렇지 못할 것인데 그러하고, 마땅히 그래야 할 것인데 그러하지 아니함을 "반항"이라 하며, 그렇지 않으면서 그런 것 같이하며 그러하면서 그렇지 않은 듯 하는 것을 "거짓 희롱"이라 하며, 그러하지 않으려 하면서 그저 그러함을 "끌림"이라 하며, 그러하고자 하면서 감히 그렇지 못함을 "붙잡힘"이라 하며, 그러하기를 즐거워하지 아니하면서 아직 그러함을 "억지로 함"이라 하며, 그런 줄은 알면서 그러하기를 즐거워하지 않음을 "미련한 고집"이라 하며, 그런 줄은 알면서 능히 그러하지 못함을 "머뭇거림"이라 하나니, 이런 것들을 "뒤집혀진 바퀴"라 이르느니라.
임륜(任輪)은 유구전(惟九轉)하니 부지기연이연(不知其然而然)을 왈구순(曰口順)이오 부지기불연이연(不知其不然而然)을 왈맹종(曰盲從)이오 부당연이연(不當然而然)하며 당연이불연(當然而不然)을 왈반항(曰反抗)이오 불연이사연(不然而似然)하며 연이사불연(然而似不然)을 왈까롱(曰假弄)이오 불욕연이구연(不欲然而苟然)을 왈피견(曰被牽)이오 욕연이불감연(欲然而不敢然)을 왈철주오 불긍연이고연(不肯然而姑然)을 왈강위(曰强爲)오 지기연이불긍연(知其然而不肯然)을 왈견집(曰堅執)이오 지기연이불능연(知其然而不能然)을 왈우유(曰優遊)니 시명전도륜(是名轉倒輪)이니라.
"머무는 바퀴"는 오직 여덟 번 구르나니, 혹시 그렇기도 하고 혹시 그렇지 않기도 함을 "헤맴"이라 하며, 그러함으로 말미암아 그렇지 않음을 아는 것을 "비교"라 하며, 능히 그렇지 못하면서 그렇기를 기약하는 것을 "바람"이라 하며, 이미 그러한 그러함을 펴내는 것을 "못내 사랑함"이라 하며, 아직 그렇지 못한 그러함에 이르게 함을 "미루어 연구함"이라 하며, 이미 그러한 것과 장차 그러할 것의 서로 이음을 "연역"이라 하며, 아직 그러하지 못함을 상상하여 이미 그러했음을 추억하는 것을 "소급"이라 하나니 이런 것들을 "섞어 얽힌 바퀴"라 하느니라.
주륜(住輪)은 유팔전(惟八轉)하니 혹연혹불연(或然或不然)을 왈방황(曰彷徨)이오 유기연이지기불연(由其然而知其不然)을 왈비교(曰比較)오 불능연이기연(不能然而期然)을 왈공상(曰空想)이오 기필연어미연(期必然於未然)을 왈희기(曰希冀)오 발이연지연(發已然之然)을 왈추구(曰推究)오 기연장연지상속(旣然將然之相續)을 뫌연역(曰演繹)이오 상미연이추이연(想未然而追已然)을 왈소급(曰溯及)이니 시명착종륜(是名錯綜輪)이니라.
"변화하는 바퀴"는 오직 여섯 번 구르나니, 이미 그렇했으나 지금은 그렇지 않으며, 이미 그렇지 아니 했으나 지금은 그러함을 "뉘우쳐 고침"이라하며, 그렇기를 기약하지 않았는데 그러함을 "문득 만남"이라 하며, 그러할 바 아닌데 그러함을 "돌려 변함"이라 하며, 참아서 그렇도록 함을 "매우 힘씀"이라 하며, 마땅히 그러할 데에 그렇함을 "바로 닦음"이라 하며, 그렇게 함이 없으되 그렇게 함을 "꿰뚫음"이라 하나니, 이런 것들을 "따라 순한 바퀴"라 하느니라.
화륜(化輪)은 유육전(惟六轉)하니 기연이금불연(旣然而今不然)하며 기불연이금연(旣不然而今然)을 왈회개(曰悔改)오 불기연이연(不期然而然)을 왈선변(曰旋變)이오 인위지이실기연(忍爲之而實其然)을 왈강면(曰强勉)이오 당연이연(當然而然)을 왈정수(曰正修)오 무위연이연을 왈관철(曰貫徹)이니 시명수순륜(是名隨順輪)이니라.
윗등 사람은 곧장 "따라 순함"에 이르고, 그 다음은 "머무는 바퀴"에서 능히 "변화하는 바퀴"에로 구르고, 또 그 다음은 "맘대로 하는 바퀴"에서 "머무는 바퀴"에로 구르고, 또 거기서 "변화하는 바퀴"에로 구르나니, "꿰뚫음"에 미쳐서는 한 가지라, 이것을 "둥글게 통달하여 막힘 없는 바퀴"라 하느니라.
상자(上者)는 직도수순(直到隨順)하고 기차(其次)는 주능전화(住能轉化)하고 우기차(又其次)는 임전주(任轉住)하며 주전화(住轉化)하나니 급기관철(及其貫徹)하여는 일야(一也)라 시명원통무애륜이니라.
바퀴 구르는 법은 반드시 앞수레에 비길 것이니, 평탄한 길에서는 앞수레 길을 뒤에서 따르고, 험한 길에서는 앞수레 자국을 경계하면 저절로 따라 순하여 엎어질 근심이 없느니라.
윤전지법(輪轉之法)은 필의전거(必擬前車)니 도탄(途坦)엔 전철후계(前轍後戒)하면 자연수순(自然隨順)하여 무전복우하나니라.
뭇 사람들은 이 길을 가다가 중간에 멈추어 갈랫길을 만나 헤매는 자라, 맘대로 하고자 하면 쉬워서 내려가며, 돌이키고자 하면 어렵고 높으니 어려움을 피하고 쉬움을 따름은 사람의 떳떳함이니라.
중행차도이중지(?行此途而中止)하여 우기방황자야(遇岐彷徨者也)라 욕임칙이이하(欲任則易而下)하고 욕반칙난이고(欲返則難而高)하니 피난추이(避難趨易)는 인지상야(人之常也)니라.
한 옛날 한얼사람이 내려오실제 이것을 근삼하시사 세 법을 베풀어 백성들을 가르치시니 그침과 고룸과 금함이라, 제맘대로 달리는 자로 하여금 변화하게 하여 제가끔 "바른 길"을 따라 "참 경계"에 돌아가게 하시니라.
상고신인지강야에 우어시(憂於是)하사 설삼법이교민(設三法而敎民)하시니 왈지조금(曰止調禁)이라 사임자화(使任者化)하여 각순정도(各循正途)하여 귀우진계(歸于眞界)하나니라.
밝은이들이 정성으로 닦는 것은 기뻐도 얼굴빛에 나타내지 아니하며, 성내어도 기운에 부려지지 아니하며, 두려워하되 겁내지 아니하며, 슬퍼하되 몸을 탈내지 아니하며, 탐내되 청렴함을 잃지 아니하며, 싫되 뜻을 게을리하지 아니하나니, 이것은 느낌을 그치는 법이니라.
철인지성수야는 희불형색(喜不形色)하며 노불사기(怒不使氣)하며 구이불겁(懼而不怯)하며 애이불훼(哀而不毁)하며 탐불상렴(貪不傷廉)하며 염불타지(厭不惰志)하나니 차지감지법야(此止感之法也)니라.
풀과 나무는 산소가 많고, 숯과 송장은 탄소가 많고, 추우면 독한 병이 많고, 더우면 답답증이 많고, 번개는 마른 기운이 많고, 비는 젖은 기운이 많으니, 이 여섯 가지는 하나가 없든지 너무 갖춰서는 안 되느니라.
초목다산(草木多酸)하고 탄시다예(炭尸多穢)하고 한다독려(寒多毒?)하고 열다서울(熱多暑鬱)하고 전다조(電多燥)하고 우다습(雨多濕)하니 차육자(此六者)는 불가일무이극비야라.
너무 갖추면 사람으로 하여금 기운을 흐리게 하여 도리어 그 해를 받는데, 오직 "아는 이"라야 살펴서 능히 조심하고 절제하나니, 이것은 숨쉼을 고루 하는 법이니라.
극칙영인기탁(極則令人氣濁)하여 반수기해(反受其害)하니 유지자찰(惟知者察)아 능신절지(能愼節之)하나니 차조식지법야(此調息之法也)니라.
간사한 말을 귀에 들이지 않고, 아첨하는 빛을 눈에 대지 않으며, 코로 비린내를 맡지 않고, 입으로 시원함을 탐하지 않으며, 음(淫)하되 간악함에 이르지 않고, 다닥치되 살을 헐지 않나니, 이것은 부딪침을 금하는 법이니라.
교언불입이(巧言不入耳)하며 영색부접안하며 비불문성(鼻不聞腥)하며 구불탐상(口不貪爽)하며 음불격간(淫不格姦)하며 저불훼기(抵不毁肌)하나니 차금촉지법야니라.
진실로 능히 이 법을 행하면 가달 도적과 고통 마귀가 모두 변화하여 길하게 되고, 길이 맑아 먼지가 없으며 경계가 순하여 막힘이 없이 저절로 "뛰어 오르는 즐거움"을 얻느니라.
구능행차법(苟能行此法)이면 칙망적고마 진화위길(則妄賊苦魔盡化爲吉)하고 도징무구(途澄 垢)하며 경순무애하여 자연득초승락(自然得超昇樂)하나니라.
그러므로 마음이 평평하면 안팎이 같은 되질이요, 기운이 화하면 나듦이 같은 잣대질이요, 몸이 편안하면 겉과 속이 같은 저울질이니, 대저 그런 뒤에라야 가히 사이가 없어 "한 꿰임"에 이르느니라.
고심평칙중외(故心平則中外)가 동량(同量)하고 기화칙출입(氣和則出入)이 동도(同度)하고 신강칙표리(身康則表裏)가 동형(同衡)하나니 부연후(夫然後)에 내가이무간(乃可以 間)이오 이달호일관(而達乎一貫)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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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장 세 나[삼아, 三我]
"한울"은 나의 성품이요, "한울님"은 나의 신령이요, "한검[倧]은 나의 도이니, 세 가지 받음이 골라야 배가 비로소 나타나느니라.
천아성야(天我性也)오 신아령야오 종아도야(倧我道也)니 삼부균이아시저(三賦均而我始著)하나니라.
나란 본디 모습이 없지마는 변화로 말미암아 있게 되고, 내 몸이 둘이 없으나 쓰임에 따라서 셋이 되나니, 없음은 "바로 봄"이 되고, 있음은 "헛봄"이 되며, 혹 참되고 혹 가달되어 그 기틀을 알 수 없느니라.
아본무상이나 인환위유(因幻爲有)하고 아체무이나 수용위삼(隨用爲三)하니 무위정관이오 유작가관(有作假觀)이라 혹진혹망(或眞或妄)하야 막지기기(莫知其機)니라.
선천과 후천에 오직 내가 가장 크며, 비어서 싸고 있어 서로 통하여 사이가 없으나, 혹시 망령된 고집으로 말미암아 "머물러 막히는 것"이 있으니, 이는 본시 그런 것이 아니라 세 길의 미혹된 바이니라.
선천후천(先天後天)에 유아위대(惟我爲大)하고 허용공재(虛容空在)하여 상통무간(相通 間)이나 혹인망집(或因妄執)하여 유류애자(有留碍者)하니 차비본연(此非本然)이라 삼도소미(三途所迷)니라.
한얼님 도의 변화로 내가 씨알 속에 내려와 있어, 변하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아 등불이 서로 전함과 같으나, 혹시 사람된 바탕과 성품이 다름으로 말미암아 고르지 않은 것이 있으니, 이는 본시 그런 것이 아니라 세 인연의 얽힌 바이니라.
신도변화로 아강재자(我降在子)하고 불체불멸(不替不滅)하여 여등상전(如燈相傳)이나 혹인품수(或因品殊)하여 유부제자(有不齊者)하니 차비본연(此非本然)이라 삼연소전(三緣所纏)이니라.
한검은 오직 하나이니 도의 큰 근원[진종대도, 眞倧大道]이라, 예[古]도 없고 이제도 없이 해가 항상 비침과 같되, 혹시 주장을 세움으로 말미암아 같지 않은 것이 있나니, 이는 본시 그런 것이 아니라 시세에 따른 바이니라.
진종유일(眞倧唯一)이니 도지대원(道之大原)이라 불고불금(不古不今)하여 여일항조(如日恒照)로되 혹인입지(或因立旨)하여 유부동자(有不同者)하니 차비본연(此非本然)이라 시세소추(時勢所趨)니라.
일찍이 한얼 사람의 가르침을 베풀어 전통을 드리움으로부터 대[代]수는 멀고 세월은 오래되어, 내 길이 차츰 갈라지고 내 지혜가 날로 어두워져서 근본을 잊고 근원을 저 버린 자가 있게 되고, 한얼님께 오만하고 인륜을 해치는 자가 있게 되느니라.
월자(?自) 신인지설교수통으로 대원년구(代遠年久)에 아도점기(我道漸岐)하고 아지일매(我智日昧)하여 망본배원자유지(妄本背源者有之)하며 만신적륜자유지(慢 賊倫者有之)러라.
거룩한 이, 밝은이들이 때맞추어 일어나 시세 따라 순조롭게 인도하여 그 폐단을 바로 구하시니, 그러므로 풍속이 계급을 숭상하여 귀함으로써 천함을 능멸하니 이런 때는 "오직 나라는 봄"이 있고, 사람들이 권세와 이익을 따라 강함으로써 약함을 업신여기니 이런 때는 "나를 위하는 봄"이 있고, 세상이 방자함을 좋아하여 사사로써 공중(公衆)을 해롭게 하니 이런 때는 "내가 없다는 봄"이 있느니라.
성철시작(聖?時作)하사 인세리도(因勢利導)하여 광구기폐(匡救其弊)하시니 시고속상계급(是故俗尙階級)하여 이위능천(以貴凌賤)일새 시칙유독아관(時則有爲我觀)하고 인추세리(人趨勢利)하여 이강모약(以强侮弱)일세 시칙유위아관(時則有爲我觀)하고 세모방달(世慕放達)하여 이사해공(以私害公)일세 시칙유무아관(時則有毋我觀)하니라.
"오직 나"란 것은 스스로 높음을 주장함이요,"나를 위한다"는 것은 스스로 사랑함을 주장함이요, "내가 없다"는 것은 스스로 겸손함을 주장함이니, 스스로 높으므로 능히 평등되며, 스스로 사랑하므로 능히 자유로우며, 스스로 겸손하므로 능히 그 중심을 잡음이니라.
독아주자존(獨我主自尊)하고 위아주자애(爲我主自愛)하고 무아주자겸(毋我主自謙)하니 자존고(自尊故)로 능평등(能平等)하며 자애고(自愛故)로 능방임(能放任)하며 자겸고(自謙故)로 능집중(能執中)이니라.
그 공적이 이룸에 미쳐서는 제가끔 돌아가 의지하는 데가 있으므로 "오직 나"란 것은 "깨달음"에 돌아가 의지하여 "적멸(寂滅)의 즐거움"이 있게 되고, "나를 위함"이란 것은 "그윽함"에 돌아가 의지하여 "날아오르는 즐거움"이 있게 되고, "내가 없음"이란 것은 "거룩함"에 돌아가 의지하여 "모두 같이하는 즐거움"이 있게 되느니라.
급기공성(及其功成)하여 각유귀의(各有歸依)라 고독아(故獨我)는 귀의각(歸依覺)하여 유적멸락(有寂滅樂)하고 위아(爲我)는 귀의현(歸依玄)하여 유비승락(有飛昇樂)하고 무아(毋我)는 귀의성(歸依聖)하여 유대동락(有大同樂)하나니라.
"적멸"을 구함은 마음을 밝혀 성품을 봄에 있고, "날아오름"을 구함은 기운을 길러 성품을 단련함에 있으며, "모두 같이함"을 구함은 몸을 닦아 성품을 따름에 있느니라.
구적멸(求寂滅)은 존호명심견성(存乎明心見性)하고 구비승(求飛昇)은 존호양기련성(存乎養氣煉性)하고 구대동(求大同)은 존호수신솔성(存乎修身率性)이니라.
이에 "오직 나"만이 서서 전제(專制)함이 무너지고, "나를 위함"이 생겨 간섭함이 없어지며, "내가 없음"이 일어나 폭행이 쉬느니라.
어시(於是)에 독아입이전제괴(獨我立而全制壞)하고 위아출이간섭(爲我出而干涉)이 폐(廢)하고 무아기이폭행(毋我起而暴行)이 식(熄)하니라.
그러나 도는 항상 머물지 아니하여 때가 맞으면 행하고 때가 지나면 그치나니, 뒤에 일어나는 자는 그때 그때의 적당함을 알지 못하고 그 변함에 대응하지 못하나니, 그 끝 머리의 폐단이 가히 다시 막지 못할 것이 있느니라.
연(然)이나 도불상주(道不常住)하여 시중칙행(時中則行)하고 시과칙지(時過則止)하나니 후기자 미달시의(後起者未達時宜)하고 부제기변(不制其變)하니 기말류지폐 유불가부알자의(其末流之弊有不可復閼者矣)라.
그러므로 스스로 높음의 끝은 세상을 싫어함에 쏠리고, 스스로 사랑하는 끝은 자기를 이롭게 함에 쏠리고, 스스로 겸손함의 끝은 글만 하여 약함에 쏠리느니라.
시이(是以)로 자존지극(自尊之極)은 추어염세(趨於厭世)하고 자애지극(自愛之極)은 추어리기(趨於利己)하고 자겸지극(自謙之極)은 추어문약(趨於文弱)이니라.
세 가지 폐단의 쌓임이 오직 지금이 가장 심하여, 혹시 참된 내가 자포자기하며, 혹 망령된 내가 스스로 높아지며, 나는 옳고 남은 그르다 하여 온 세상이 모두 그러하니라.
삼폐지적(三弊之積)이 유차시 이심(惟此時爲甚)하니 혹진아자포(或眞我自暴)하며 혹망아자고(或妄我自高)하고 아시인비(我是人非)하여 거세도도(擧世滔滔)로다.
이따금 어질고 밝은 선비가 간혹 일어나 이를 바로잡으나, 베푸는 방법이 완전하지 못하여 한편을 막으면 한편은 터져서 갈수록 더욱 넘치니, 이것이 바로 어린 아들이 우물에 빠지는 날이니라.
간유준예지사 혹기이교지 연(間有俊睿之士或起而矯之然)이나 시술불완(施術不完)으로 일옹일궤(一壅一潰)하여 거익범람(去益汎濫)하니 차정유자정륜지일야(此正孺子井淪之日也)라.
오직 우리 한배님께서 거룩하시게 위에 계셔서, 차마 언덕에서 바라만 보지 못하시고, 이에 "큰 밝은이"에게 명령하사 다시 "삼일"의 이치를 밝히시니, 큰 도가 거듭 빛나서 세상이 환하게 되시니라.
유아(惟我) 천조 황황재상(皇皇在上)하사 불인안시(不忍岸視)하시고 원명대철(爰命大?)하사 부천삼일지리(復闡三一之理)하시니 대도중광(大道重光)하여 환연어세(煥然於世)하니라.
크도다 삼일의 이치여! 그 가르침은 곧 한울과 한얼님과 한울집과 누리와 참이치의 다섯이요, 그 법은 곧 그침과 고름과 금함의 셋이요, 그 테두리는 곧 "세나[三我]"를 거느려 하나로 함이니라.
대재(大哉)라 삼일지리(三一之理)여 기훈(其訓)은 칙(則) 천(天)과 천궁(天宮)과 세계(世界)와 진리(眞理)의 범오(凡五)이오 기법(其法)은 칙(則) 지(止)와 조(調)와 금(禁)의 범삼(凡三)이오 기범위(其範圍)는 칙(則) 통호삼아(統乎三我)하여 이일지(而一之)니라.
대저 마음을 밝힘은 느낌을 그치는 것이요, 기운을 기름은 숨쉼을 고르는 것이요, 몸을 닦음은 부딪침을 금하는 것이니라.
부명심(夫明心)은 소이지감야(所以止感也)오 양기(養氣)는 소이조식야(所以調息也)오 수신(修身)은 소이금촉야(所以禁 也)니라.
성품을 보아 맑아허 막힘이 없는 데 사무치고, 성품을 단련하여 봄[見]도 들음[聞]도 없는 자연에 이르며, 성품을 따라 모든 느낌이 나타나기 전까지에 미치나니, 이것을 "성품 통하는 문"이라 이르느니라.
견지(見之)에 달호청정이무애하며 연지(煉之)에 초호희이이자연(超乎希夷而自然)하며 솔지(率之)에 극호중화이미발(極乎中和而未發)하나니 시위통성지문(是而通性之門)이니라.
크다는 것은 내가 능히 스스로 큰 것이 아니라 한울이 내게 주신 바요, 나란 것은 내가 능히 스스로 사사로운 것이 아니라 한얼님께서 사람에게 공변되게 한 바이니, 나의 큰 것이 망령됨이 아니요, 나의 나된 것이 사사로운 것이 아니니, 이것은 내가 그 큰 것을 오로지 한 바이니라.
대자(大者)는 비아소능자대(非我所能自大)라 천지소부어아자(天之所賦於我者)오 아자(我者)는 비오소능자사(非吾所能自私)라 신지소공어인자( 之所公於人者)니 아대비망(我大非妄)이오 아아비사(我我非私)라 차(此)는 아지소이전기대야(我之所以專其大也)니라.
과거의 나는 비롯이 없고 미래의 나는 마지막이 없으며, 현재의 나는 머물지 않나니, 비롯이 없으므로 위가 없고, 마지막이 없으므로 다함이 없고, 머물지 않으므로 떳떳함이 없느니라.
선아무시하고 후아무종하고 현아부주(現我不住)하니 무시고로 무상이오 무종고( 終故)로 무진이오 부주고(不住故)로 무상이니라.
그러므로 세로 보매 차등 있는 내가 있고, 가로 보매 평등한 내가 있고, 두루 보매 공동한 내가 있느니라.
시고(是故)로 수관(竪觀)에 유등차아(有等差我)하고 횡관(橫觀)에 유제등아(有齊等我)하고 편관(遍觀)에 유공동아(有共同我)하니라.
무엇을 차등이라 이르느뇨? 높게로는 할아버지와 낮게로는 아들 손자들이 모두다 나 아님이 없으며, 무엇을 평등이라 이르느뇨? 귀하게로는 임금과 높은이와 천하게로는 종들이 무두다 나 아님이 없으며, 무엇을 "공동"이라 이르느뇨? 작게로는 집과 나라와 크게로는 온 누리가 모두다 나 아님이 없느니라.
하위등차(何謂等差)오 존이조종(尊而祖宗)과 비이자손(卑而子孫)이 막비아야(莫非我也)며 하위제등(何謂齊等)고 귀이왕공(貴而王公)과 천이조예(賤而?隸)가 막비아야(莫非我也)며 하위공동(何謂共同)고 소이가방(小而家邦)과 대이세계(大而世界)가 막비아야(莫非我也)니라.
그러므로 사람이 처세함에 있어서, 나의 낮음으로써 높은 이를 범하지 말고, 나의 귀함으로써 천한 이를 능멸하지 말고, 나의 사사됨으로써 공변된 것을 업신여기지 말아야 나의 본분이에서 다하게 될지니라.
고(故)로 인지처세야(人之處世也)에 물이아비범존(勿以我卑犯尊)하며 물이아귀능천(勿以我貴凌賤)하며 물이아사멸공(勿以我私蔑公)이면 아지본분(我之本分)이 진호시의(盡乎是矣)니라.
능히 나의 본연의 참함을 아는 것을 일러 "본성이 통해짐"이라 하고, 능히 나의 당연히 할 바를 다 행하는 것을 일러 "공적이 완성됨"이라 하나니, 알면서 행하지 않으면 아는 것이 아니며, 알지 못하고 행함은 행하는 것이 아니니라.
능지아본연지진(能知我本然之眞)을 왈성통(曰性通)이오 능행아당연지극(能行我當然之極)을 왈공완(曰功完)이니 지이불행(知而不行)이 비지야(非知也)오 부지이행(不知而行)이 비행야(非行也)니라.
그 오직 밝은이일진저! 스스로 높되 넘지 아니하며, 스스로 사랑하되 빠지지 아니하며, 스스로 겸손하되 눌리지 아니하여 때가 오기 전에 알고 때가 이르자 행하는 것은 오직 밝은이만이 하나니, 그 도는 셋이자 하나임에 있을 따름이니라.
기유철인호인저 존이불유(尊而不踰)하며 애이불류(愛而不流)겸이불억(謙而不抑)하여 선시이지(先時而知)하고 후시이행자(後時而行者)는 유철(惟?)이 능지(能之)하나니 기도(其道)는 존호삼이일이이(存乎三而一而已)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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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장 세 윤리[삼륜, 三倫]
사람에게 세 질서가 있으니, 첫째는 사랑이요 둘째는 예(禮)요 셋째는 도(道)이니라. 사랑의 윤리는 하늘로부터 받음이요, 예의 윤리는 사람으로 말미암아 정함이요, 도의 윤리는 한울과 사람이 함께 함이니라.
인유삼륜(人有三倫)하니 일왈애(一曰愛)오 이왈례(二曰禮)오 삼왈도(三曰道)라 애륜(愛倫)은 자천부(自天賦)하고 예륜(禮倫)은 유인정(由人定)하고 도륜(道倫)은 천인동(天人同)이니라.
윤리를 엮어 아홉으로 나누니, 사랑은 아버지와 아들 형과 아우 일가친척이요, 예는 임금과 백성 남편과 아내 이웃과 마을이요, 도는 스승과 제자 친한 벗과 겨레이니라.
착종륜서 분지위구(錯綜倫序分之爲九)하니 애(愛)는 부자(父子)와 형제(兄弟)와 친척(親戚)이오 예(禮)는 군민(君民)과 실까(室家)와 향당(鄕黨)이오 도(道)는 사도(師徒)와 붕우(朋友)와 종족(種族)이니라.
아버지와 아들은 사랑의 벼리요, 임금과 백성은 예의 벼리요, 스승과 제자는 도의 벼리니, 세 가지는 윤리의 큰 것이니라.
부자(父子)는 애지강(愛之綱)이오 군민(君民)은 예지강(禮之綱)이오 사도(師徒)는 도지강(道之綱)이니 삼자(三者)는 이륜지대야(彛倫之大也)니라.
아버지는 사랑하고 아들은 효도하고, 임금은 옳고 백성은 충성하고, 스승은 바르고 제자는 공경하느니라.
부자(父慈)하고 자효(子孝)하며 군의(君義)하고 민충(民忠)하며 사정(師正)하고 도경(徒敬)하나니라.
사랑은 능히 은혜를 온전히 하고, 옳음은 능히 어짐을 일으키고, 바름은 능히 착함을 이끌며, 효도는 능히 즐거움을 이루고, 충성은 능히 공변됨을 다하고, 공경함은 능히 덕을 숭상하느니라.
자능전은(慈能全恩)하고 의능흥인(義能興仁)하고 정릉도선(正能導善)하며 효능치예(孝能致豫)하고 충능진공(忠能盡公)하고 경능상덕(敬能尙德)이니라.
형과 아우, 지아비와 지어미, 친한 벗과 일가친척, 이웃과 마을겨레들은 이것을 일러 "여섯 벼릿줄[六紀]이라 이르나니, 모두 벼리에 거느린 바 되어 서로 이끄느니라.
형제(兄弟)와 부부(夫婦)와 붕우(朋友)와 친척(親戚)과 향당(鄕黨)과 종족(種族)은 시명육기(是名六紀)니 통지어강(統之於綱)하여 호상제설(互相提?)이니라.
형과 아우는 기운을 같이 탔고, 지아비와 지어미는 살기를 같이하고, 친한 벗은 뜻을 같이하며, 일가와 친척은 정의를 같이하고, 이웃과 마을은 풍속을 같이하고, 겨레는 혈통을 같이하느니라.
형제(兄弟)는 동기(同氣)하고 부부(夫婦)는 동거(同居)하고 붕우(朋友)는 동지(同志)하고 친척(親戚)은 동의(同誼)하고 향당(鄕黨)은 동속(同俗)하고 종족(種族)은 동포(同胞)니라.
기운을 같이 타고 서로 우애하며, 살기를 같이하여 서로 화합하며, 뜻을 같이하여 서로 믿으며, 정의를 같이하여 서로 친목하며, 풍속을 같이하여 서로 사양하며, 혈통을 같이하여 서로 그리워하느니라.
동기상우(同氣相友)하며 동거상화(同居相和)하며 동지상신(同志相信)하며 동의상목(同誼相睦)하며 동속상양(同俗相讓)하며 동포상회(同胞相懷)니라.
우애하니 형과 아우가 차례가 있고, 화합하니 내외가 좋아지고, 믿으니 처음과 끝이 한결같고, 친목하니 친하고 섬김이 사이가 없고, 사양하니 어른과 젊은이가 분별이 있고, 그리워하니 먼 데 가까운 데 사람들이 모두 같이 돌아오느니라.
우칙곤계 유서(友則昆季有序)하고 화칙내외 득의(和則內外得宜)하고 신칙종시 여일(信則終始如一)하고 목칙친소 무간하고 양칙소장(讓則少長)이 유별(有別)하고 회칙원근(懷則遠近)이 동귀(同歸)니라.
사람은 혼자 살지 못하는 것이라 그러므로 무리가 있으며 무리는 차별이 없을 수 없는지라 그러므로 계급이 있으며, 계급은 차등이 없을 수 없는 지라 그러므로 위아래가 있느니라.
인불가이독처(人不可以獨處)라 고(故)로 유군언하며 군불가이무차(?不可以 差)라 고(故)로 유계언(有階焉)하며 계불가이무등이라 고(故)로 유상하언(有上下焉)이니라.
위에 있어 밝지 못함을 어둡다 하고, 아래 있어 밝지 못함을 어리석다 하나니, 어두우면 가리우고 어리석으면 덮이는 지라, 덮이고 가리우면 사람의 도가 또한 장차 막히리라.
재상불명왈혼(在上不明曰昏)이오 재하불명왈매(在下不明曰昧)라 혼칙폐(昏則蔽)하고 매칙몽(昧則蒙)하나니 몽폐(蒙蔽)면 이인도역장호색의(而人道亦將乎塞矣)리라.
그러므로 아들이 장대하되 가르치지 아니함을 미련하다 이르며, 백성이 빠지되 건지지 아니함을 악하다 이르며, 사람들이 혼미하되 이끌지 아니함을 사특하다 이르며, 어버이가 늙되 봉양하지 않음을 패역(悖逆)하다 이르며, 나라가 위태롭되 그 어려움을 구하지 않음을 어지럽다 이르며, 도가 떨어지되 그것을 붙들지 아니함을 게으르다 이르느니라.
시고(是故)로 자장불교(子壯不敎)를 위지완(謂之頑)이오 민익부증(民溺不拯)을 위지포(謂之暴)오 인미부도(人迷不導)를 위지특(謂之慝)이며 친로이불고기양(親老而不顧其養)을 위지패(謂之悖)오 국위이부제기난(國危而不濟其難)을 위지란(謂之亂)이오 도추이불욕기원(道墜而不欲其援)을 위지만(謂之慢)이니라.
우애하지 않으면 같은 혈육끼리 해치고, 화합하지 않으면 집안이 흩어지고, 믿지 않으면 사귀는 정이 끊기고, 화목하지 않으면 육친이 쇠망하고, 사양하지 않으면 질서가 어지럽고, 그리워하지 않으면 뭇 사람들의 마음이 떠나느니라.
불우칙골육(不友則骨肉)이 잔(殘)하고 불화칙가도(不和則家道)가 삭(索)하고 불신칙교정(不信則交情)이 식(息)하고 불목칙육친(不睦則六親)이 쇠(衰)하고 불양칙질서(不讓則秩序)가 문(紊)하고 불회칙중심이 이(離)니라.
그러므로 평상시에 처하고 비상시에 응함을 그물 들 듯 하나니, 벼리는 무너지고 벼릿줄이 든든한 법이 없으며, 벼릿줄은 늘어지고 그물코가 팽팽해지는 수도 없느니라.
고(故)로 처상응변(處常應變)을 여거망연(如擧網然)하니 미유강퇴이기진자야(未有綱頹而紀振者也)며 미유기이이세목(未有紀弛而細目)이 능장자야(能張者也)니라.
천륜은 정을 주장하고, 인륜은 정의를 주장하여, 정은 갈라져 나눔이 많고 정의는 구태여 합함이 많으니, 갈라지면 합하기 어렵고 구태여 하면 나뉘기가 쉬우니라.
천륜(天倫)은 주정(主情)하고 인륜(人倫)은 주의(主誼)하여 정다기분(情多岐分)하며 의다구합(誼多苟合)하니 기칙난합(岐則難合)이오 구칙이분(苟則易分)이니라.
그러므로 천륜에 순하고 인륜에 응함에 마땅히 그 처음을 삼갈지니, 정은 갈라져 옮기지 아니하며, 정의는 구태여 고집하지 않아, 오랠수록 더욱 굳게 되어야 이에 가히 한덩어리를 만들어 이루느니라.
시고(是故)로 순천응인(順天應人)에 의신궐초(宜愼厥初)니 정불기천(情不岐遷)하며 의불구집(誼不苟執)하여 구이익견(久而益堅)이라야 내가주성일단(乃可做成一團)이니라.
사랑은 어질고 용서함에서 나고, 도는 지혜와 앎에서 나고, 예는 날램과 옳음에서 나나니, 어질되 용서가 없으면 사랑을 능히 베풀지 못하며, 지혜롭되 앎이 없으면 도를 능히 행하지 못하며, 날래되 옳음이 없으면 예를 능히 쓰지 못하느니라.
애생어인서(愛生於仁恕)하고 도생어지식(道生於智識)하고 예생어용의(禮生於勇義)하나니 인이무서면 칙애불능시(則愛不能施)하며 지이무식이면 칙도불능행(則道不能行)하며 용이무의면 칙례불능용(則禮不能用)이니라.
그러므로 되질함에 의하여 미룸을 이르되 "넓게 사무침[溥達]"이라 하고, 잣대질함에 따라서 폄을 이르되 "널리 건짐[普濟]"이라 하고, 저울질함에 맞추는 것을 "절차와 문채[節文]"라 하느니라.
고(故)로 의량이추(依量而推)를 위지부달(謂之溥達)이오 수도이전(隨度而展)을 위지보제(謂之普濟)오 집권이중(執權而中)을 위지절문(謂之節文)이니라.
사랑은 어버이로 말미암아 비롯되는 것이므로 반드시 감해 내림이 있고, 예는 차례로 말미암아 생겨나는 것이므로 반드시 계급이 있으며, 도는 다 같이 돌아감에 말미암음이라 그러므로 반드시 만남이 있느니라.
애유친시(愛由親始)라 고(故)로 필유쇄(必有殺)하며 예유서생(禮有序生)이라 고(故)로 필유계(必有階)하며 도유동귀(道有同歸)라 고(故)로 필유우(必有遇)니라.
그러므로 베풀기를 차등이 있게 하여 원망이 없고, 씀에 분별이 있게 하여 거스르지 않고, 행함에 때가 있어 서로 어기지 않느니라.
시고(是故)로 시지유차(施之有差)하여 이무원하고 용지유별(用之有別)하여 이불패(而不悖)하고 행지유시(行之有時)하여 이불상위(而不相違)하나니라.
아버지와 아들로부터 형과 아우로, 형과 아우로부터 친척에게, 친함에서부터 성김에 미치는 것이요, 임금과 백성으로부터 이웃과 마을로, 이웃과 마을로부터 남편과 아내에게로, 위로부터 아래에 이르는 것이며, 스승과 제자로부터 친한 벗으로, 친한 벗으로부터 겨레에게로, 가까움에서부터 먼 데로 가는 것이니라.
부자이형제(父子而兄弟)와 형제이친척(兄弟而親戚)은 자친급소자야(自親及疏者也)오 군민이향당(君民而鄕黨)과 향당이실까(鄕黨而室家)는 달하자야(自上達下者也)오 사도이붕우(師徒而朋友)와 붕우이종족(朋友而種族)은 자이행원자야(自邇行遠者也)니라.
그러므로 "사랑의 질서"는 한 집에 통하고, "예의 질서"는 한 나라에 통하고, "도의 질서"는 누리에 통하나니. 그 지극함에 이르러서는 다 같이 하나에 돌아가느니라.
고(故)로 애륜(愛倫)은 달호일가(達乎一家)하고 예륜(禮倫)은 달호일국(達乎一國)하고 도륜(道倫)은 달호세계(達乎世界)하나니 급기지야(及其至也)하여는 동귀우일(同歸于一)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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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장 세 누리[삼계, 三界]
순수한 착함을 "한얼님 도"라 하고 순전한 악함을 "마귀의 업"이라 하고, 착함도 있고 악함도 있음을 "사람의 일"이라 이르니라.
순선(純善)을 위지신도(謂之 道)오 순악(純惡)을 위지마업(謂之魔業)이오 유선유악(有善有惡)을 위지인사(謂之人事)니라.
한얼님은 윗 누리가 되고 마귀는 아랫 누리가 되어 그 길이 서로 반대라. 그러므로 한얼님 누리는 크고 마귀의 누리는 작으며, 한얼님 누리는 밝고 마귀의 누리는 어두우며, 한얼님 누리는 즐겁고 마귀의 누리는 괴로우니라.
신위상계하고 마위하계(魔爲下界)하여 기도상반(其道相反)이라. 고(故)로 신계는 대(大)하고 마계(魔界)는 소(小)하며 신계는 명(明)하고 마계(魔界)는 암(暗)하며 신계는 낙(樂)하고 마계(魔界)는 고(苦)하니라.
사람은 두 누리에 이웃하여 헤매고 깨침이 같지 않으므로 혹은 제 마음대로 하고, 혹은 변화하여 떨어지고 올라감이 스스로 떳떳한 법칙이 있느니라.
인(人)은 인어량계(隣於兩界)하여 미오부동(迷悟不同)이라. 고(故)로 혹임혹화(或任或化)하여 일타일승(一墮一陞)이 자유상경(自有常經)이니라.
착함은 어디로부터 나느뇨? 오직 내 마음이며, 악함은 어디로부터 오느뇨? 또한 오직 내 마음이라, 그러므로 내 마음이 없을 때에는 한얼님도 머무를 수가 없고, 내 마음이 없는 곳에는 마귀도 감히 이르지 못하느니라.
선종하생(善從何生)하고 유아심(惟我心)이며 악종하래(惡從何來)이오 역유아심(亦惟我心)이라. 고(故)로 무아심시엔 신부득주하고 무아심처엔 마불감지(魔不敢至)하나니라.
헤매어 그칠 줄 모르는 것을 "제 마음대로 함"이라 이르며, 깨달아 변할 줄 아는 것을 "변화함"이라 이르나니, 제 마음대로 하면 구르고, 구르면 떨어지며, 변화하면 뛰어나고, 뛰어나면 오르나니, 이를 일러 "길 가름"이라 하느니라.
미불지지왈임(迷不知止曰任)이오 오이지변왈화(悟而知變曰化)니 임즉전(任卽轉)하고 전즉타(轉卽墮)하며 화즉초(化卽超)하고 초즉승(超卽陞)하나니 시지위판도(是之謂判途)니라.
뛰면 바른 섬돌이 되고 떨어지면 재앙의 섬돌이 되나니, 하나는 위로 한얼님 누리에 닿고, 하나는 아래로 마귀의 이웃에 사귀어져 제가끔 일만 개의 섬돌이 있으니, 한 가지 착함을 지으면 능히 한 섬돌씩 뛰어 오르고, 한 가지 악함을 지으면 반드시 한 섬돌씩 떨어지느니라.
초위정계(超爲正階)오 타위려계(墮爲?階)니 일칙상접신계하고 일칙하교마린(一則下交魔隣)하여 각유만급(各有萬級)하니 조일선야(造一善也)엔 능초일계(能超一階)하고 조일악야(造一惡也)엔 필타일계(必墮一階)니라.
착함이 있으면 반드시 권장하며, 악함이 있으면 반드시 징계함은, 한울과 사람이 한 이치라. 그러므로 사람 나라에는 상과 벌의 법이 있고, 한울 나라에는 화와 복의 징험이 있느니라.
유선필권(有善必勸)하며 유악필징(有惡必懲)은 천인일리(天人一理)라. 고(故)로 인국(人國)은 유상벌지전(有賞罰之典)하고 천국(天國)은 유화복지징(有禍福之懲)이니라.
그러므로 한울에는 세 마을이 있어 한얼님의 사랑을 나타내고, 또 여섯 옥이 있어 한얼님의 형벌을 베푸나니, 세 마을은 첫째 한얼님이 계신 곳, 둘째 신령의 마을, 셋째 밝은이의 마을로서, 한얼님이 계신 곳은 가운데 있고 두 마을은 앞에 있어, 지극히 높으며 엄숙하고, 지극히 화려하고 장엄하며, 상서론 빛이 뭉게뭉게 피어서 가히 이름 짓고 형상하지 못할지니라.
시고(是故)로 천유삼부(天有三府)하여 이창신애하고 우유육옥(又有六獄)하여 이시신주(以施 誅)니라. 삼부(三府)는 일왈 신부오 이왈 영부)오 삼왈 철부(三曰?府)니 신부는 거중(居中)하고 이부(二府)는 재전(在前)하여 지존이엄(至尊而嚴)하며 극려이장(極麗而壯)하고 상광(祥光)이 애애(靄靄)하여 불가명상(不可名狀)이니라.
여섯 옥은 첫째 "굳은 옥"이요, 둘째 "굽는 옥"이요 셋째 "흔드는 옥"이요, 넷째 "잠기는 옥"이요, 다섯째 "떨리는 옥"이요, 여섯째 "어두운 옥"이니라. "굳은 옥"은 막히고, "굽는 옥"은 뜨겁고, "흔드는 옥"은 울리고, "잠기는 옥"은 젖고, "떨리는 옥"은 춥고, "어두운 옥"은 캄캄한데, 막히므로 무릎을 누르고 몸을 죄며, 뜨거우므로 뼈를 사르고 기름을 태우며, 울리므로 몸이 비틀리고 근육이 오그라들며, 젖으므로 배가 부어서 앓으며, 추우므로 살이 얼어 터지며, 컴컴하므로 마음과 눈이 함께 어지러워지느니라.
육옥(六獄)은 일왈노옥(一曰牢獄)이오 이왈항옥(二曰?獄)이오 삼왈탕옥(三曰?獄)이오 사왈침옥(四曰?獄)이오 오왈능옥(五曰凌獄)이오 육왈명옥(六曰冥獄)이니 노옥(牢獄)은 색(塞)하고 항옥은 열(熱)하고 탕옥은 진(震)하고 침옥(?獄)은 습(濕)하고 능옥(凌獄)은 한(寒)하고 명옥(冥獄)은 유(幽)하니 색고(塞故)로 압슬핍체(壓膝逼體)하며 열고(熱故)로 연골분고(燃骨焚膏)하며 진고(震故)로 체연근척(體?筋?)하며 습고(濕故)로 두복창통(?腹脹痛)하며 한고(寒故)로 기육동렬(肌肉凍裂)하며 유고(幽故)로 심목구현(心目俱眩)니라.
"현재세상"을 "몸 앞"이라 이르고 "오는 세상"을 "몸 뒤"라 이르니, 몸 앞은 떠 사는 누리가 되고 몸 뒤는 길이 사는 누리가 되느니라.
현세(現世)를 위지신전(謂之身前)이오 내세(來世)를 위지신후(謂之身後)니 신전(身前)이 위부생계(謂浮生界)하고 신후(身後)를 위영생계(謂永生界)니라.
착함과 악함의 갚음이 또한 두 누리로 나뉘어, 빠르면 응함이 몸 앞에 있고 더디면 응함이 몸 뒤에 있나니, 몸 앞의 일은 사람들이 모두 보지만 몸 뒤의 일은 오직 밝은이만이 살피느니라.
선악지보 역분양계(善惡之報亦分兩界)하여 속칙응재신전(速則應在身前)하고 지칙응재신후(遲則應在身後)하니 신전지사(身前之事)는 인개견지(人皆見之)로되 신후지사(身後之事)는 유철이 찰지(察之)니라.
그러므로 착하고도 몸의 즐거움을 누리지 못한 이는 반드시 오랜 미래의 즐거움이 있고, 악하고도 다행히 몸의 괴로움을 면하는 이는 반드시 오랜 미래의 괴로움이 있느니라.
고(故)로 선이미향신락자(善而未享身樂者)는 필유영생락(必有永生樂)하고 악이행면신고자(惡而幸勉身苦者)는 필유영생고(必有永生苦)니라.
무릇 사람이 일을 짓되 망령으로 한결같지 않아 순함도 있고 거스름도 있으니, 순하면 이치에 합하게 되고 거스르면 이치에 어기게 되는 지라, 한편은 트이고 한편은 막혀서 길하고 흉함이 거기따라 나타나느니라.
범인주사(凡人做事)하되 망이불일(妄而不一)하여 유순유역(有順有逆)하니 순위합리(順爲合理)오 역위패리(逆爲悖理)라. 일통일애(一通一碍)하여 길흉(吉凶)이 수현(隨見)하나니라.
어버이께 효도하고 형과 아우에게 우애하고 일가친척에게 화목함은 이를 "사랑의 순함"이라 하며, 나라에 충성하고 남편과 아내가 화합하고 이웃과 마을에 사양함은 이를 "예의 순함"이라 하며, 스승을 공경하고 벗을 믿고 겨레를 그리워함은 이를 "도의 순함"이라 하나니, 이것이 모두 한울이치에 합하고 사람 일을 다함이니라.
효친(孝親)하며 우형제(友兄弟)하며 목친척(睦親戚)은 시명애순(是名愛順)이오 충국(忠國)하며 화실가(和室家)하며 양향당(養鄕黨)은 시명예순(是名禮順)이오 경사(敬師)하며 신붕우(信朋友)하며 회종족(懷種族)은 시명도순(是名道順)이니 차개합천리진인사자야(此皆合天理盡人事者也)니라.
아첨하고 미혹시켜 사람이 위태함에 떨어짐을 즐거워하는 것을 "기쁨의 거스름[喜逆]"이라 하고, 공갈하고 짓밟아 사람의 외롭고 약함을 위협하는 것을 "두렵게 함의 거스름[懼逆]"이라 하고, 모함하고 이간질하여 사람의 죄 받지 않음을 마음 상해하는 것을 "슬픔의 거스름[哀逆]"이라 하고, 성내어 구타하고 사람을 나쁜 말로 모욕하는 것을 "성냄의 거스름[怒逆]"이라 하고, 속이기를 좋아하고 거짓을 베풀어서 사람의 재물을 빼앗는 것을 "탐함의 거스름[貪逆]이라 하고, 질투하고 비방하여 사람의 명예를 헐뜯는 것을 "싫어함의 거스름[厭逆]"이라 하나니, 이것은 다 한울이치를 어기고 물욕을 좇는 것이니라.
첨유고혹(諂諛蠱惑)하여 낙인점위를 시명희역(是名喜逆)이오 공갈능력(恐喝凌轢)하여 협인고잔(脅人孤孱)을 시명구역(是名懼逆)이오 무함리극(誣陷離隙)하여 상인무고를 시명애역(是名哀逆)이오 진원구욕(嗔怨毆辱)하여 모인리매를 시명노역(是名怒逆)이오 호기시사(好欺施詐)하여 편인물재(騙人物財)를 시명탐욕(是名貪逆)이오 질투비방(嫉妬誹謗)하여 훼인예망(毁人譽望)을 시명염역(是名厭逆)이니 차개패천리순물욕자야(此皆悖天理循物慾者也)니라.
한울에 합함은 한얼님을 섬기는 바요 물욕을 좇음은 마귀를 섬기는 바라, 하나는 근본에 돌아감이요 하나는 근원을 저버림이니, 그러므로 순한 일을 짓는 이는 몸 뒤에 스스로 "세 마을"에 오르고, 거스르는 일을 짓는 이는 모 뒤에 스스로 "여섯 옥"에 떨어지느니라.
합천(合天)은 소이사 신야오 순물(循物)은 소이사 마야(所以事魔也)니 일칙반본(一則返本)이오 일칙배원(一則背源)이니라. 시고(是故)로 주순사자(住順事者)는 신후(身後)에 자승삼부(自陞三府)하고 주역사자(做逆事者)는 신후(身後)에 자타육옥(自墮六獄)이니라.
한얼님 마을이 밖에 있다 이르지 말라. 구하지 않을 망정 구할진대 가깝게 가슴에 있고, 마귀 누리가 막힘이 많다 이르지 말라. 변화시키지 않을 망정 변화시킬진대 티끌 만한 것도 빠뜨려지지 않느니라. "위의 마을"과 "아래 옥" 사이에 터럭 하나도 용납되지 아니하나니, 착한 도를 행하면 마귀누리에서 곧 "세 마을"을 볼 것이며, 악한 업을 쌓으면 한얼님 누리에서도 곧 여섯 옥을 보느니라.
막왈신부재외(莫曰身府在外)하라 불구(不求)언정 구지(求之)인대 밀이방촌(密邇方寸)이오 막왈마계다장(莫曰魔界多障)하라 불화(不化)언정 화지(化之)인대 부루섬진(不漏纖塵)이니라. 상부하옥(上府下獄)이 간불용발(間不容髮)하나니 행선도(行善道)하면 마계(魔界)에 즉견삼부(卽見三府)하고 적악업(積惡業)하면 신계에 즉견육옥(卽見六獄)이니라.
그러므로 "세 마을"의 즐거움을 이루고자 하는 이는 마땅히 먼저 한얼님을 구할 것이요, "여섯 옥"의 괴로움을 벗어나고자 하는 이는 반드시 마땅히 마귀를 변화시킬 것이니, 한얼님을 구하는 길은 나의 정성이 둘이 아니어야 하고, 마귀를 변화시키는 방법은 내 생각이 오직 하나이어야 하느니라.
시고(是故)로 욕치삼부지락자(欲致三府之樂者)는 의선구신(宜先求 )이오 욕탈육옥지고자(欲脫六獄之苦者)는 필당화마(必當化魔)니 구신지도는 아성무이오 화마지방(化魔之方)은 아사유일(我思惟一)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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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장 세 모음[삼회, 三會]
○□△(원방각) 세 가지는 온갖 형상의 근원이요, 셈이 그로 말미암아 일어나는 바이니라.
○□△[원방각(圓方角)] 삼자(三者)는 만상지원(萬象之源)이오 수지소유기야(數之所由起也)라.
그 주체는 ○ 동그라미 여섯과 □ 네모 넷과 △ 세뿔 셋이요, 그 쓰임은 ○ 동그라미 여섯과 □ 네모 여덟과 △ 세뿔 아홉이요, 그 공약수는 ○ 동그라미 하나와 □ 네모 두 개 △ 세뿔 셋이니라.
기체(其體)는 원육방사각삼(○六□四△三)이오 기용(其用)은 원육방팔각구(○六□八△九)오 기율(其率)은 원일방이각삼(○一□二△三)이니라.
그 까닭은 무엇이뇨? 셈으로써 말하면 ○ 동그라미는 하나로써 비롯하고 □ 네모는 둘로써 비롯하고 △ 세뿔은 셋으로써 비롯하며, 형상으로써 말하면 ○ 동그라미는 여섯으로써 이루고 □ 네모는 넷으로써 이루고 △ 세뿔은 셋으로써 이루나니, 그러므로 한 번 여섯과 한 번 넷과 한 번 셋이 주체가 되고, 한 번 여섯과 두 번 넷과 세 번 셋이 쓰임이 되느니라.
기고(其故)는 하야(何也)오 이수칙원이일시(以數則○以一始)하고 방이이시(□以二始)하고 각이삼시(△以三始)하며 이상칙원이육성(以象則○以六成)하고 방이사성(□以四成)하고 각이삼성(△以三成)하나니 고(故)로 일육(一六)과 일사(一四)와 일삼(一三)이 위체(爲體)오 이일육(而一六)과 이사(二四)와 삼삼(三三)이 위용(爲用)이니라.
○ 동그라미의 두 번 여섯과 □ 네모의 세 번 넷과 △ 세뿔의 네 번 셋이 모두 서른 여섯을 얻으니, 이것이 태초에 한 번 불은 셈이 되니라.
원지이륙(○之二六)과 방지삼사(□之三四)와 각지사삼(△之四三)이 공득삼십유륙(共得三十有六)하니 시위태원일연지수(是爲太元一衍之數)니라.
선천의 셈은 하나로 비롯하여 다섯으로 중간이 되고 아홉으로 끝마치며, 후천의 셈은 둘에서 비롯하여 여섯으로 중간이 되고 열에 끝마치나니,그러므로 하나 다섯 아홉은 "세 홀수"라 하고, 둘 여섯 열은 "세 짝수"라 하느니라.
선천지수(先天之數)는 시일중오(始一中五)하여 이종어구(而終於九)하고 후천지수(後天之數)는 시이중륙(始二中六)하여 이종어십(而終於十)하나니 고(故)로 일오구(一五九)를 위지삼기(謂之三奇)오 이륙십(二六十)을 위지삼우(謂之三?)라.
홀 수는 가지런하지 않고 짝수는 맞서니, 가지런하지 않은 것은 어긋지고 맞서는 것은 합하는 지라. 그러므로 세 짝수 태초에 맞게 합하는 도수가 되느니라.
기칙부제(奇則不齊)하고 우칙대대하니 부제자(不齊者)는 차(差)하고 대대자(對待者)는 합(合)이라 고(故)로 삼우위태원회합지도하나니라.
그러므로 두 번 불어[二衍] 일흔 둘이 "작음"이 되고, 여섯 번 불어 이백 열 여섯이 "중간 모음"이 되고, 열 번 불어 삼백 예순이 "큰 모음"이 되느니라.
고(故)로 이연이칠십이(二衍而七十二)이 위소회(爲小會)하고 육연이이백십육(六衍而二百十六)이 위중회(爲中會)하고 십연이삼백육십(十衍而三百六十)이 위대회(爲大會)하니라.
한얼님이 내리심은 "큰 모음"에 합하고, 하늘로 돌아가심은 "중간 모음"에 합하고, 거듭 빛나심은 "작은 모음"에 합하니, 앞의 한얼님과 뒤의 밝은이가 그 부합함은 하나이니라.
신강은 인호대회(印乎大會)하고 반어(返御)는 인호중회(印乎中會)하고 중광(重光)은 인호소회(印乎小會)하니 전신후철이 기부일야(其符一也)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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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장 하나로 돌아감[귀일, 歸一]
"여섯 가지의 큰 것"이 있은 뒤에 한얼님의 도가 드러나고, 착하고 가달됨이 있은 뒤에 사람의 도가 나타나므로 "윗 하늘"과 "아랫 하늘"이 그 이치는 통하느니라.
유륙대연후(有六大然後)에 신도창하고 유진망연후(有眞妄然後)에 인도저(人道著)하나니 상천하천(上天下天)이 기리통야(其理通也)니라.
큰 동그라미와 작은 동그라미가 몸은 비록 가지런하지 않으나 그 도수는 한가지요, 큰 네모와 작은 네모가 지름길은 비록 같지는 않으나 비례는 순하니, 사람의 한얼님에 대한 것도 또한 이 같으니라.
대원소원(大圓小圓)이 체수부제(體雖不齊)나 기도칙동(其道則同)하고 대방소방(大方小方)이 경수부등(徑雖不等)이나 기비칙순(其比則順)하니 인지어신에 역유시야(亦猶是也)니라.
그러므로 사람은 마땅히 한얼님의 도를 본받을 따름이라, 날로 쓰는 일과 물건의 크고 가늘고 정하고 거침이 이 도 가운데서 변화로 나오는 것 아님이 없나니, 진실로 행하되 그 궤도를 좇지 않으면 갈림 경계가 백 가지로 나오느니라.
고(故)로 인당법신도이이라. 일용사물(日用事物)의 홍섬정조 막불차도중(洪纖精粗莫不此道中)의 환출래자(幻出來者)니 구행이불순기궤(苟行而不循其軌)면 기경(岐境)이 백출언(百出焉)하나니라.
한울과 땅 사이의 변화는 물 불 바람 번개뿐이요, 성품과 몸 가운데서 변화하여 옮김은 목숨 정기 마음 기운뿐이니, 이 움직이는 기틀이 있어 한울과 사람의 도를 행하는 바이니라.
천지간변화(天地間變化)는 수화풍전이이(水火風電而已)오 성신중환천(性身中幻遷)은 명정심기이이(命精心氣而已)니 유차동기(有此動機)하여 소이행천인지도야(所以行天人之道也)니라.
한울은 빔으로써 용납하고 몸은 알참으로써 싸니, 빈 것은 모습이 없는지라 그 큼이 헤아릴 수 없고, 알차면 몸이 있는지라 그 큼이 한정이 있으므로 있는 것으로써 없는 것을 싸려면 능히 막히지 않음이 없느니라.
천(天)은 이허용(以虛容)하고 신(身)은 이실포(以實包)하니 허칙무형이라. 기대무량이오 실칙유체(實則有體)라 기대유한(其大有限)이니 고(故)로 이유포무면 이능무애자 선의니라.
대저 밝은이가 도를 닦음도 반드시 "여섯 가지 큰 것"의 이치를 따를 지라, 섞여 얽히고 변화되어 모두 서른 여섯 가지의 묘한 변화의 모습이 있으니, 혹시 취하고 혹시 버려 제가끔 그 뜻을 다하느니라.
부철인지수도야는 필의륙대지리(必擬六大之理)라. 착종변환(錯綜變幻)하여 공유삼십륙종(共有三十六種)의 묘화상(妙化相)하니 혹취혹사(或取或捨)하여 각극기취(各極其趣)니라.
이러므로 한울이 크게 빈 것을 보아 이로써 본성을 통하여 덕에 합하며, 불이 크게 밝은 것을 보아 이로써 목숨을 알아 지혜에 합하며, 번개가 지극히 센 것을 보아 이로써 정기를 보전하여 힘에 합하느니라.
시고(是故)로 관천태허(觀天太虛)하고 이지통성합덕(以之通性合德)하며 관화대명(觀火大明)하고 이지지명합혜(以之知命合慧)하며 관전지건(觀電至健)하고 이지보정합력(以之保精合力)이니라.
물이 물결치지 않는 것을 보아 이로써 느낌을 그쳐 마음이 평온하며, 바람이 심하지 않는 것을 보아 이로써 숨쉼을 고루하여 기운이 화하며, 땅이 옮기지 않는 것을 보아 이로써 부딪침을 금하여 몸이 편안하니라.
관수불파(觀水不波)하고 이지지감심평(以之止感心平)하며 관풍불음(觀風不淫)하고 이지조식기화(以之調息氣和)하며 관지불천(觀之不遷)하고 이지금촉신강이니라.
땅이 한울을 받든 것을 보아 이로써 몸을 닦아 본성을 따르며, 바람이 한울에 다니는 것을 보아 이로써 기운을 길러 본성을 단련하며, 물이 한울을 비치는 것을 보아 이로써 마음을 밝혀 본성을 보느니라.
관지승천(觀地承天)하고 이지수신솔성(以之修身率性)하며 관풍행천(觀風行天)하고 이지양기연성(以之養氣煉性)하며 관수영천(觀水映天)하고 이지명심견성(以之明心見性)이니라.
땅에 불이 흔들리는 것을 보아 이로써 몸을 편안히 하여 목숨을 세우며, 바람이 불을 불리는 것을 보아 이로써 기운을 더하여 목숨을 늘이며, 구름이 해를 가리우는 것을 보아 이로써 마음을 거두어 운명을 기다리느니라.
관지탕화(觀地?火)하고 이지 않신립명(以之安身立命)하며 관풍취화(觀風吹火)하고 이지익기연명(以之益氣延命)하며 관운폐일(觀雲蔽日)하고 이지렴심사명(以之斂心俟命)니라.
땅에 울림이 있는 것을 보아 이로써 몸을 안정하여 정기를 굳히며, 바람이 천둥을 달리는 것을 보아 이로써 기운을 이끌어 정기를 인도하며, 구름이 번개를 감추는 것을 모아 이로써 마음을 잡아 정기를 쌓느니라.
관지유진(觀地有震)하고 이지정신고정(以之定身固精)하며 관풍구뢰(觀風驅雷)하고 이지인기도정(以之引氣導精)하며 관운장전(觀雲藏電)하고 이지잠심축정(以之潛心1蓄精)이니라.
번개가 물에 느끼는 것을 보아 이로써 정기를 모두어 마음을 맑게 하며, 불이 물을 찌는 것을 보아 이로써 목숨을 돋우어 본 마음을 잡으며, 한울에 구름이 노는 것을 보아 이로써 본성을 너그러이 하여 마음을 펴느니라.
관전감수(觀電感水)하고 이지취정담심(以之萃淡心)하며 관화증수(觀火蒸水)하고 이지호명조심(以之護命操心)하며 관천운유(觀天雲遊)하고 이지관성서심(以之寬性舒心)이니라.
번개가 바람을 일으키는 것을 보아 이로써 정기를 떨쳐 기운을 누르며, 불이 바람을 이끄는 것을 보아 이로써 목숨을 바로 하여 기운을 순하게 하며, 한울에 바람이 부는 것을 보아 이로써 본성을 불러 기운을 고르느니라.
관전기풍(觀電起風)하고 이지양정억기(以之揚精抑氣)하며 관화인풍(觀火引風)하고 이지정명순기(以之正命順氣)하며 관천풍허(觀天風噓)하고 이지연성조기(以之衍性調氣)니라.
구름이 바람을 타고 다니는 것을 보아 이로써 마음을 너그러이 하여 기운을 바로 하며, 바람이 흙에 화하는 것을 보아 이로써 기운을 정제하여 몸을 단속하며, 땅이 물에 젖는 것을 보아 이로써 몸을 불리고 마음을 편안하게 하며, 물이 땅을 무너뜨리는 것을 보아 이로써 마음을 고요히 하여 몸을 가지며, 땅이 바람을 받는 것을 보아 이로써 몸을 단정히 하여 기운을 엉키게 하며, 바람이 물에 다니는 것을 보아 이로써 기운을 맑게 하여 마음을 누르느니라.
관운가풍(觀雲駕風)하고 이지관심정기(以之寬心正氣)하며 관풍충토(觀風沖土)하고 이지정기속신(以之整氣束身)하며 관지함수(觀之涵水)하고 이지윤신념심(以之潤身恬心)하며 관수비지하고 이지정심지신(以之靜心持身)하며 관지수풍(觀地受風)하고 이지단신응기(以之端身凝氣)하며 관풍행수(觀風行水)하고 이지정기진심(以之靖氣鎭心)이니라.
한울에 해가 쬐는 것을 보아 이로써 본성을 닦아 운명을 믿으며, 뜨거움이 번개를 일으키는 것을 보아 이로써 목숨을 편안하게 하여 정기를 감추며, 천둥이 한울에 울리는 것을 보아 이로써 정신을 가다듬어 본성을 보존하며, 한울에 천둥이 있는 것을 보아 이로써 본성을 길러 정기를 모으며, 번개가 불을 붙이는 것을 보아 이로써 정기를 단련하여 목숨을 순하게 하며, 불이 공중에 맹렬한 것을 보아 이로써 목숨을 이루어 본성을 다하느니라.
관천후일(觀天煦日)하고 이지수성신명(以之修性信命)하며 관열기전(觀熱起電)하고 이지 않명장정(以之安命藏精)하며 관뢰진천(觀雷震天)하고 이지려정존성(以之勵精存性)하며 관천유뢰(觀天有雷)하고 이지양성회정(以之養性會精)하며 관전발화(觀電發火)하고 이지련정순명(以之煉精順命)하며 관화열공(觀火烈空)하고 이지고명진성(以之考命盡性)이니라.
밝은이의 변화해 감이 비록 이와 같이 여러 가지 묘한 법이 있으나, 그 공적이 완전함에 미쳐서는 마침내 통함에 돌아가나니, 이를 일러 "참함을 돌이켜 한얼님에 하나가 된다"고 이름이니라.
철지화행이 수유여시종종묘법(雖有如是種種妙法)이나 급기공완(及其功完)하여는 경귀어통(竟歸於通)하나니 시지위반진 일신이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