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그림 민화17-장생도와 창덕궁 벽화와의 비교
장생도와 백학도
이미 100여 년 전에 사라져 버린 민화와 궁중회화를 복원하는 일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전통의 발굴과 복원은 창조의 뿌리이다.
서구미술의 발전도 그리스 로마문명의 부흥인 르네상스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창조의 원리는 두 가지이다.
‘복제와 융합’이 그것이다.
복제는 완성된 형식이 있어야 가능하고 융합은 완성된 요소의 결합으로 이루어진다.
완성된 형식은 오랜 전통에서 나오는데 전통을 잃어버리면 복제가 되지 않아 창조를 할 수 없다.
요즘 잘나가는 삼성휴대폰과 같은 IT산업과 자동차 산업, 한류음악은 모두 미국에 뿌리를 두고 있다. 애플과의 끊임없는 특허마찰은 마케팅 측면이 강하지만 본질적으로 IT산업이 미국의 실리콘밸리에 기반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융합도 좋은 방식이지만 창조하지 못하면 빼앗기거나 도태하고 만다.
어떤 사람들은 청바지와 삼겹살도 우리의 전통문화로 인정해야 한다는 말을 한다.
절인 배추만 먹다가 고추가 수입되어 김치가 된 것을 예로 들면서 말이다.
김치가 우리의 전통음식이라는 것에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은 허접한 논리이고 비겁한 자기합리화에 지나지 않는다.
모든 문화는 외부환경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그것이 정치, 경제라면 더욱 그렇다.
서양의 미술, 일본의 미술, 중국의 미술을 수용하는 일은 나쁘지 않다.
청바지와 코카콜라를 먹는다고 친미가 되지도 않고 일본만화를 보고 초밥을 먹는다고 친일파는 아니다.
하지만 모든 사람들이 이런 것들을 즐긴다고 청바지와 초밥이 우리의 전통이 되겠는가.
수용한다는 그 말 자체에는 주체가 포함되어 있다.
중심, 주체가 없는데 어떻게 수용한다는 말인가?
김치는 고춧가루가 없어도 된다. 김치의 핵심은 고춧가루가 아니라 소금과 발효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백김치도 있고 물김치도 있는 것이다.
핵심이 곧 주체이고 중심이다.
우리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우리 전통이 사라지고 서구의 관점과 사상과 문화가 중심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그것도 자연스런 발전의 결과가 아니라 강압과 왜곡과 폭력에 의해서 억지로 만들어진 것이다.
이것은 우리민족의 뿌리가 르네상스에 있거나 미국의 할리우드, 일본 메이지유신에 있다는 말과 같다.
이것은 자신을 부정하는 행위이고 자신을 부정하는 사람은 정체성이 없는 사람이며 오로지 탐욕과 생존을 위해서는 무슨 행위도 저지를 수 있다.
조선의 궁궐은 유독 화재를 많이 당했다.
특히 1900년을 전후해서 빈번하게 일어난 궁궐의 화재 때문에 소실된 문화재가 부지기수였다.
1900년, 1901년, 1904년의 덕수궁 화재, 1917년 창덕궁 화재 따위가 그것이다.
궁중회화는 거대한 병풍이나 벽장문, 혹은 벽에 부착된 형태가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옮기기 쉬운 다른 문화재보다 피해가 클 수밖에 없었다.
화재로 소실된 창덕궁의 재건사업은 일제강점기인 1920년대부터 시작되었는데, 이 재건사업에는 일본 총독부가 깊숙이 개입하고 있었다.
일본식 건물로 궁궐을 재건하고 소실된 궁중회화를 복원하는 과정에서도 일본화가의 참여나 일본작품이 반입되었다.
이미 궁궐의 미술을 담당하던 도화서와 자비대령화원 제도는 폐지되었기에 궁중회화의 복원은 결국 뛰어난 개인 화가가 담당해야 했다.
이 말은 새로 그려진 대부분의 궁중회화가 전통을 상실하고 심각한 훼손이 일어났다는 반증이다.
개인의 능력이 아무리 뛰어나다 하더라도 정통성을 검증할 방법이 없다.
도화서나 자비대령화원 제도는 뛰어난 화원이 모이는 조직이기도 하지만 이 기관에서의 작품은 모두 검증된 것이라는 점이다. 그래서 굳이 개인 서명을 할 필요가 없었다. 국가기관이면 국가에서 보증하기 때문이다.
1917년부터 1920년까지 창덕궁 재건 벽화에 참여한 화가들은 파란만장한 일생을 살았다.
전통화법을 배웠음에도 궁중회화가 몰락하는 과정을 지켜보았고 일본에 유학을 하여 일본화풍이나 서구 화풍을 받아들였다.
이들은 전통과 거대한 제국주의 광풍 사이에서 나름의 생존방법을 터득해 살아남은 작가들이다. 미워하는 사람도 있고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위로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화가라고 해서 식민지 시대를 비켜갈 수는 없었다.
일제 총독부에서 만든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입상을 하고 심사위원이 되어 권세를 누렸으며 친일행적으로 물의를 일으킨 작가도 있었다.
해방 이후에도 국전을 장악하고 미술대학의 교수로 재직하면서 수많은 제자들을 키워 화단에 막강한 영향력을 가졌다.
현재 한국화 화단에서 이들을 빼고는 화풍과 화법을 이야기하지 못한다.
어쨌든 현대 한국화 화단에서 궁중회화의 흔적을 찾기란 불가능하다.
부감법이나 여러 시점 구도, 청록산수 기법, 태점, 정형화된 화면구성과 견본채색 따위를 사용하는 한국화 작가는 찾기 어렵다.
궁중회화는 도화서, 자비대령화원 제도가 폐지되면서 우리 미술에서 철저히 외면당하고 사라졌다.
물론 이것은 일제의 의도가 깊숙이 반영된 결과이기도 하다.
창덕궁 재건 벽화는 궁중회화가 몰락하고 현대미술이 시작되는 중간 지점에 있다.
전통을 수용했지만 일본과 서구 화풍을 도입했고 작품제작의 주체가 도화서라는 조직에서 탁월한 개인으로 넘어가는 과도기이다.
비교의 기준은 장생도, 해학반도도의 형식이다.
궁중회화를 대표하는 전통적인 장생도와 창덕궁 재건 벽화를 비교하는 일은 흥미롭다.
이 과정을 통해 궁중회화의 완성된 형식이 어떻게 해체되는지를 조금이라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반대로 이 과정을 역으로 추적하면 제대로 된 궁중회화, 민화의 진면목을 볼 수 있는 행운을 얻을 지도 모른다.
[십장생/10첩 병풍/비단에 채색/210*552.3 삼성미술관 Leeum소장]
일단 장생도의 전형이 될 만한 그림을 중심으로 살펴보자.
핵심적인 부분은 시점의 변화이다.
즉 여러 시점을 사용하는지 아니면 단일 시점의 사용인지를 보는 것이다.
이것은 화면의 구성과 원근법의 사용하고도 관련이 있다.
시점의 변화는 곧 관점, 가치관의 변화와 맞닿아 있다.
기준이 되는 장생도의 특화된 그림인 ‘해학반도도’는 4차원적인 공간에 여러 시점이 결합되고 각각은 사물은 정형화되고 상징화 되어있다.
사물은 누구나 보면 알 수 있지만 실제 사실과는 다르다.
명암법과 원근법은 사용되지 않았고 선묘로 형태를 만들고 색칠도 한 공간에 한 가지 색만 칠하는 방법을 사용한다.
무엇보다 도화서 화원이나 자비대령화원들에 의해 집단적, 조직적으로 창작된 그림이라는 것이다.
[백학도/김은호/비단에 채색/1920년/197*579/대조전 서쪽
이 그림은 대조전 서쪽 벽면에 있는 벽화이다. 그런데 벽화라고 하지 않고 비단에 채색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은 비단에 그림을 완성시킨 다음 벽에 부착했다는 의미이다.]
이당((以堂) 김은호는 안중식에게 사사 받았으며 구한말 어진화가로 유명한 화가이다.
도쿄미술학교에서 청강생으로 공부했으며 일본의 ‘제국미술전람회’에서 입상한 경력을 가지고 있다. 귀국 후 ‘조선미술전람회’에서 특선을 하고 심사위원까지 지낸 인물이다.
이순신 장군 영정, 논개 영정, 신사임당 영정을 그렸다면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알 것이다.
하지만 친일행적 때문에 끊임없이 논란이 되는 화가이다.
김은호의 서명이 들어가 있는 ‘백학도’는 해학반도도의 변형으로 보인다.
육지와 바다, 괴석과 학, 소나무, 영지, 대나무 따위는 해학반도도와 다를 바 없지만 해 대신에 달을 그렸고, 모란을 첨가했으며 거대하게 보이는 16마리의 학을 특화시켰다.
그림 자체만 보자면 굉장히 정교하고 잘 그려졌다.
소나무, 학, 모란은 사실적으로 그렸는데 반해 괴석이나 구름 따위는 궁중회화 전통의 청록산수 기법과 상징법을 사용했다.
사실적인 묘사는 보기에는 좋아도 전통의 입장에서 보면 이미 정형화된 그림을 해체하는 의미로 볼 수 있다.
그래서 기존의 전통그림과는 확연히 다른 부분이 많이 발견된다.
첫째, 공간이 뒤틀어져있다.
우측의 바다와 좌측의 육지의 구분이 어설프다.
바다는 넓은 공간은 만들고 있는데 이와 어울리지 않게 육지는 지나치게 근접된 공간이다.
그러니까 좌우측 공간이 서로 연결이 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둘째, 학이 지나치게 크게 느껴진다.
16마리의 학의 숫자는 별 문제가 아니다. 전통그림에서도 학의 숫자는 대략 4마리부터 16마리까지 다양하다. 하지만 화면의 중심에 배치한 경우는 드물다.
보통의 경우 장생도에 나오는 사물은 일정한 크기와 역할이 있다.
그래서 사슴이든 학이든, 거북이든 전체 화면 속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어 특정 사물이 강하게 드러나는 경우는 없다.
이렇게 학이 크게 보이는 이유는 두 가지이다.
하나는 실제 화면구성에서 학이 차지하는 공간이 넓기 때문이다.
한 마리의 학의 크기는 대략 1m 내외를 차지하는데 이 정도 크기의 학이 16마리나 들어가게 되면 당연하게 학이 중심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또 하나는 공간의 상대성 때문이다.
우측 바다의 공간은 넓게 표현되어 있는데 좌측에 비해 학이 상대적으로 거대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다.
학이 날아드는 방향으로 감상자의 시선이 따라 움직이는 점을 고려한다면 넓은 공간에서 크게 인식된 학은 정상인 공간 속에서도 여전히 크게 느껴진다.
셋째, 시점이 모호하다.
전통그림에서는 여러 시점을 사용한다.
그러나 이 그림의 시점은 엄밀하게 말하면 단일시점이다.
단지 단일시점처럼 보이지 않도록, 정말 교묘하게 화면을 구성하고 처리한 것이다.
그래서 얼핏 보면 구도가 전통그림과 별 차이가 나지 않아 보인다.
이 그림의 모든 시점은 1인칭, 눈높이를 가지고 있다.
좌측의 소나무나 흐르는 물, 모란, 앉아 있는 학의 모습은 현대 풍경화와 다르지 않다.
또한 우측의 괴석과 바다도 1인칭, 눈높이 시점인 것은 같으나 그 공간감에 비해 학이 상대적으로 크게 보임으로써 마치 위에서 아래로 본 느낌이 드는 것이다.
좌측과 우측의 공간감이 다르기 때문에 나타난 착시현상이 마치 여러 시점으로 보이게 하는 것이다.
[이 두 그림은 쌍으로 기획된 것이다. 대조전 동쪽에는 ‘봉황도’, 서쪽에는 ‘백학도’를 배치했다. 각각은 독립적인 그림이지만 해와 달을 분리해서 장생도를 둘로 쪼갠 효과를 냈다.]
넷째, 태점(胎點)이 무시되거나 일본식 이끼로 보인다.
전통그림에서 태점은 아주 중요한 요소이다.
그림 속에 찍혀있는 무수한 점은 생명이 시작되는 점, 생명이 잉태하는 부분을 뜻하는 태점이다. 태점은 소나무 이파리에도, 모란 이파리, 나무 몸통과 가지, 바위, 땅 할 것 없이 어디든 나타나고 마치 별빛처럼 보이기도 하고 새싹처럼 보이기도 한다.
‘백학도’에서의 태점은 조금 모호할뿐더러 이끼처럼 보인다. 소나무 이파리로 연결되는 부분에 있어야 할 태점이 없고, 소나무 몸통의 태점은 누가 봐도 이끼에 가깝게 표현되어 있다.
다섯째, 달의 등장과 파도의 표현이 이상하다.
일월오봉도에서도 알 수 있듯이 하얀색은 달, 빨간색은 해를 표현한 것이다.
우측 상단에 둥글고 하얗게 그려진 것이 달이다.
처음에는 해의 또 다른 표현인가 유심히 보았지만 당대 최고의 화가가 달과 해를 구분하지 못했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다.
장생도에서는 해를 그리지 달은 그리지 않는다.
해를 단독으로 그리거나 해와 달이 함께 있는 그림은 있어도 달만 그리는 경우는 처음 본다.
그러니까 이 ‘백학도’에 달만 그린 것은 대조전 동쪽 벽화인 ‘봉황도’와 짝을 이루기 때문이다.
동쪽 벽화인 ‘봉황도’에는 붉은 해만 그려져 있고, 서쪽에는 밤 풍경, 즉 달만 그려 넣은 것이다.
다시 말해 하나의 완결된 그림인 ‘장생도’ 혹은 ‘해학반도도’를 둘로 쪼개어 분리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엄청난 파격이고 전통에 대한 도전이다.
또한 파도의 표현이 일본식이다.
둥근 물결부분에 너울을 그려 넣은 것도 그렇고, 파도가 부서지는 모습도 기존의 그림과 달리 양식이 무너지고 있다.
이당 김은호의 [백학도]는 개인 작가의 역량이 최대한 발휘된 그림이다.
꼼꼼한 필지와 사실적인 묘사는 이전의 장생도와는 확연히 다른 모습이다.
기술과 기법적인 면만 보면 장생도보다는 [백학도]에 시선이 끌리기 마련이다.
그만큼 시선을 흡수하는 표현 기량은 놀랍다.
형식은 곧 내용을 담는 그릇인데 형식이 변한다는 것은 내용이 변한다는 것과 동일하다.
궁중회화를 대표하는 장생도는 조선 500여 년의 회화적 전통과 내용이 함축되어 있다.
그것은 아무리 뛰어난 개인이라도 쉽게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김홍도도 바꾸지 못하고 정선도 바꾸지 못한다.
오랜 세월 동안 기존의 전통과 현재의 변주가 치열한 토론과 논쟁을 통해 조금씩 변화하는 것이다.
[백학도]는 사실적인 묘사, 학의 큰 움직임과 공간의 교묘한 배치로 역동적인 화면을 창조했다.
하지만 이런 능력이 장생도의 탄탄한 형식을 무너트리는데 큰 역할을 했던 것도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