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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心)과 성(性)
1. 마음의 종교
불교는 마음의 종교이다. 불교는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다.
불교에서는 하나님이 있냐, 없냐를 말하기 전에 하나님의 존재여부도 우리 마음의 문제라고 생각하는 종교이다.
인간의 모든 종교적 문제가 인간의 마음에 있다고 생각한다. 마음에 대한 이론이 굉장히 발달한 종교이다.
원시불교의 핵심은 무아론(無我論)이다. 무아(Anatman)는 모든 존재론적 실체를 거부한다. 하느님(God)도 나(Ego)도 모두 심적현상(心的現象:Psychological Phenomenon)일 뿐이다.
세계 어느 종교보다 마음에 대한 이론이 정교하다.
2. 심(心)과 성(性), 기(氣)와 리(理)
감히 정도전이 불교의 마음 이론을 비판하려 한다. 제목이 불씨심성지변(佛氏心性之辯)으로 되어 있다.
佛氏心性之辯
불교의 심과 성을 분변함
불교가 말하는 심(心)과 성(性)에 대해 비판을 하겠다는 뜻이다. 이것이 오늘의 주제다.
▶ 心者(심자), 人所得於天以之生氣(인소득어천이지생기).
[심(心)이라는 것은 인간이 하늘로부터 얻어서 생한 기를 말하고,]
▶ 性者(성자), 人所得於天以之生理(인소득어천이지생리):
[성이라는 것은 인간이 하늘로부터 얻어서 생한 리(理)다.]
우리 조선 사상의 이기론(理氣論)이라는 문제가 여기서부터 태동한다.
리기론(理氣論) : 우주의 근원을 리(理)에 두느냐, 기(氣)에 두느냐에 관한 조선사상사의 논쟁
심(心)은 우리가 하늘에서 얻어 가지고 태어난 기(氣)라고 했다. 성(性)은 우리가 하늘에서 얻어 가지고 태어난
리(理)라고 했다.
심(心)→기(氣)
성(性)→리(理)
기(氣)와 리(理)는 괴롭고, 복잡한 문제이다.
동양적인 세계관에서 이 우주는 기(氣)로 구성되어 있다. 예를 들면 여기의 책상, 펜, 고로쇠 물 등이 모두 기(氣)이다.
이런 기(氣)가 움직이는 법칙이 있는데, 그 법칙을 리(理)라고 한다.
이 세계를 구성하고 있는 것은 모두 기(氣)라고 생각했는데, 문제는 기(氣)만으로 세계가 설명되지 않았다.
기는 이 세계를 설명하는 하나의 원질적인 것이다.
기로 구성된 세계는 기(氣)가 움직이는 법칙이 있고, 그 법칙을 리(理)라고 한 것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우주는 기로 구성되어 있다. 그 기에는 반드시 질서가 있게 마련이다. 그 질서를 리라고 부른다.
자연과학에서 리(理)라는 것은 자연의 법칙이 된다. 물리학, 생물학 등에서 연구하는 것이다.
자연의 질서를 탐구하는 것은 과학이다. 우리 인간을 둘러싼 환경세계의 객관적 리(理)를 우리는 자연의 법칙(Law of Nature)이라고 부른다.
하늘도 아무렇게나 다니는 게 아니라, 운행의 법칙이 있다. 이 세계는 기로 되어 있는데, 그 기가 움직이는 어떠한 법칙이 있다. 그 법칙을 리라고 한다.
3. 기와 리의 관계
그런데 문제는 이 리(理)라고 하는 것이 항상 기(氣) 속에 있는 것일까? 아니면 기(氣) 바깥에 있는 것일까?
우리는 보통 리(理)가 기(氣) 속에 있으면서, 기에서 우러나온다고 생각한다.
@ 우리는 상식적으로 리가 기 밖에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기를 떠난 리(理)를 생각할 수 없다는 것은 자연과학적 태도(Scientific Attitude)이다.
그런데 그렇게 리(理)가 기(氣) 속에서 나오게 되면, 그 리(理)는 기(氣)에 의해 지배당한다.
@ 리가 기 속에만 있다고 한다면 리는 기에 종속될 뿐이다.
그래서 리(理)는 항상 불안정한 느낌이 들게 된다. 그리고 리(理)는 자연과학적인 법칙만을 말하는 게 아니라,
옛날에 리기(理氣)를 이야기할 때는, 항상 리(理)는 인간의 도덕적 품성과 관련이 있었다.
성리학자들은 기에 종속되지 않는 리의 독자성을 확보하려했다. 그것이 인간을 명령하는 도덕적 법칙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왜 우리는 도덕적으로 살아야 하느냐? 우리가 도덕적으로 사는 이유는, 인간에게 기(氣)만 있는 게 아니라,
리(理)가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도덕적인 리(理)에 의해 인간은 살아야 한다고 했다.
성리학에서는 자연의 세계와 인간의 세계가 연속적인 것으로 이해되었다. 존재(Sein)와 당위(Sollen)가 동차원에서 이해되었다.
만일 리(理)가 기(氣)에 의해 지배된다면, 리(理)가 불완전할 수 있다.
인간의 심성에 내재하는 리가 곧 인의예지(仁義禮智)였다.
그래서 리기(理氣)의 문제를 오히려 거꾸로, 리(理)는 기(氣)에 의해 지배를 받는 게 아니라, 리(理)는 인간이 독자적으로
원래부터 가지고 있는 것이므로 기에 의해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관점을 성(性)에서 확보하려는 게 유교의 입장이다.
이것이 맹자가 이야기 한 성선의 입장이라고 보면 된다.
성에 리가 내재한다고 생각한 이론을 우리가 성리학(性理學)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맹자의 성선은 인간의 도덕적 성품의 선천성을 강조한다. 따라서 기보다 리를 중시한 성리학은 맹자 성선설(性善說)의 적통을 잇고 있다.
4. 성선설과 성악설
인간에게는 본래 순선한 리법(理法)이 갖추어져 있다고 보는 것이 맹자의 생각이다.
심(心)은 인간의 의식현상 일반(Consciousness)
성(性)은 마음의 도덕적 핵심(Moral Core)
인간에게는 심이라는 의식현상이 있으며, 성이라는 어떤 핵심적인 것이 있다고 본다.
성(性)을 본래적으로 선(善)하다고 보는 게 맹자의 성선설이다.
그리고 성은 본래 악하다고 보는 것이 순자의 성악설(性惡說)이다.
성선설(性善說) : 맹자
성악설(性惡說) : 순자
순자(荀子)는 人之性惡(인지성악), 其善者僞也(기선자위야)라 했다. 즉 인간의 본래적인 성은 악하다고 했다.
인간은 배고프면 먹으려 하고, 추우면 따뜻한 것을 찾으며, 서로 싸우려고 하는 등 모든 욕심을 낸다.
그래서 본래적인 인간의 성을 따르게 되면, 인간 세상은 어지러워진다는 말이다.
우리가 보통 선하다고 하는 것은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것이라는 것이다.
人之性惡(인지성악), 其善者僞也(기선자위야)
-순자, 성악편-
순자는 인간을 이기적 욕망의 주체로 파악했다. 자연 상태에서 인간은 쟁탈(爭奪), 호색(好色), 호리(好利), 음란(淫亂)에 빠질 뿐이라고 생각했다.
其善者僞也(기선자위야):
선하다는 것은 인위적인 노력일 뿐이다. -순자-
이것도 일리가 있다. 인간의 성이 원래 악하기 때문에 오히려 예의라는 것이 필요하다. 예의라는 것은, 성인이
만들어내는 하나의 인위적인 것이라는 것이다.
凡禮義者(범예의자). 是生於聖人之僞(시생어성인지위), 非故生於人之性也(비고생어인지성야):
무릇 예의라는 것은 성인의 위선에서 나온 것이지, 모든 사람의 성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순자>
순자는 인간의 선을 적위(積僞)라고 했다. 위(僞)를 쌓아가는 거라는 말이다.
인간이 힘써야 할 것은 적위(積僞)다. 적위란 인위적 노력을 쌓아가는 것이다. 그것이 공부(工夫)다. -순자-
위(僞)는 정확하게 거짓이라는 말은 아니다. 이건 인위적이라는 말이다.
위(僞) : 거짓 위선이라기보다 인위적(人爲)의 위(僞)로 해석되어야 한다.
사람이 억지로 만들어서 되는 것이지, 자연 그대로 되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僞起而生禮義(위기이생예의):
인위적 노력이 일어나서 예의가 생겼다.
예의가 인간 본성 속에 있는 것은 아니다.<순자>
이런 이야기를 하면, 동양의 인간 본성에 대한 논의가 인간이 선하냐, 악하냐는 논의로 생각하기 쉬운데, 그게 전부는 아니다.
성선(性善), 성악(性惡)은 결코 인간의 본성을 선(God)과 악(Evil)으로 규정하는 논의가 아니다.
5. 악과 오
노자 2장에 보면, 천하 사람들이 모두 아름다운 것을 아름답다고 아는데 그것은 사실은 惡이라고 했다.
天下皆知美之爲美(천하개지미지위미), 斯惡矣(사오의):
여기서 惡을 우리는 ‘악’하다고 읽을 수가 없다. 왜냐하면 ‘아름답다’의 반대말은 추한 것이기 때문이다.
아름다움(美) ⇔ 추함(惡)
추한 것은 악한 것이 아니다. 여자보고 못생겼다고 악한 년이라고 할 수는 없다.
惡은 어디까지나 미(美)의 반대말이다. 선(善)의 반대말은 아니다.
노자는 이어서 모든 사람들이 선한 것을 선하다고만 알고 있는데, 그것은 불선일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皆知善之爲善(개지선지위선), 斯不善矣(사불선의): 모든 사람들이 선한 것을 선하다고만 알고 있는데 그것은 불선(不善)일 수도 있다.
선의 반대어는 악(惡)이 아니고 불선(不善)일 뿐이다.
노자적인 세계관에서 볼 때, 모든 것은 양면성이 있다.
저 사람을 좋은 사람으로만 알고 있었는데, 그 사람은 좋은 사람이 아니라 나쁜 사람일 수 있다.
저 여자는 어제까지 굉장히 아름다운 줄 알았는데, 오늘 나한테 잘못하고 표변해서 추하게 보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런 걸 우리가 경험하게 된다.
아름다움의 반대를 악으로 읽을 수가 없다. 그래서 이것은 ‘추할 오’로 읽어야 한다.
미(美)⇔오(惡).
선에 대해서 반대는, 현대에 와서는 악이 되었지만, 불선이다.
선(善)⇔불선(不善)
선의 반대는 악이 아니라 불선이다.
동양인의 관념 속에서는 악이 없다. 선에 대해서는 선하지 않다는 것만 있다.
선(善) ⇔ 악(惡) (X)
불선(不善) (O)
선의 반대는 악이 아니라, 선의 반대는 불선이다. 저 사람 좋은 사람인 줄 알았는데, 악한 사람이라는 게 아니라,
알고 보니깐 좋지 않은 사람이라는 것이다.
저 사람이 악한 놈이라고 하는 것과 좋지 않다는 것은 다르다.
동양인의 관념 속에서는 실체로서의 악(惡)은 근원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악(惡)은 불선(不善)일 뿐이다.
좋지 않다는 것은 항상 좋아질 수도 있는 것이고, 좋은 상태를 일시적으로 내가 바꾸어 생각할 수도 있는 것이다.
좋지 않은 사람을 악하고 볼 수는 없다.
동양인들은 종교적으로 하늘에 천사와 악마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서양인들은 선과 악을 딱 나누었기 때문에
하늘에 천사가 있고 악마가 따로 있다.
그래서 선과 악이 이원적으로 구분이 되지만, 우리 동양인들에게, 선의 반대는 불선이며, 악이라고 하는 말은
동양 고전에 원칙적으로 없다.
惡은 대개 추하다는 것이다. 아름다움의 반대말이라는 것이다.
중국고전에서 악(惡)이라는 글자는 모두 오(惡)로 읽어야 한다.
악(惡)으로 읽는 것은 서양언어와 서양종교의 영향일 뿐이다.
그러면, 성선설의 반대는 성불선설(性不善說)만이 가능하다. 성악설에 대해서, 순자가 성악을 말한 적이 없다.
그것은 성오설이다.
순자(荀子)의 性惡은 성악이 아니라 성오다. 순자는 성악설을 말한 적이 없으며, 성오설만 이야기했을 뿐이다.
왜 인간이 그렇게 추한 행동을 하느냐 하는 것이다. 그러니깐 순자는 인간의 본성이 악하다고 규정한 적이 없다.
단지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왜 그렇게 추한 행동을 하느냐?
그 추한 행동을 하는 인간에게 어떻게 예의를 가르쳐서 선하게 만드느냐 하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순자의 성오설(性惡說)도 성선(性善)을 전제하지 않으면 성립할 수 없다.
순자의 성오설도 기본적으로 성선을 전제로 해야만 가능한 이론이다. 그래야만 인간의 교화가 가능한 것이다.
순자는 다음 글에서 이를 밝혔다.
人之性惡(인지성악), 必將待禮義之化(필장대예의지화), 然後皆合於善也(연후개합어선야):
성오는 예의의 교화를 거쳐 성선이 된다. -순자-
사실은 동양 사상에 있어서는 인간의 본성이 본래적으로 ‘선(善)’하니 ‘악(惡)’하니 하는 논의는 사실 없다.
6. 정(情)과 성(性)
여기서 유명한 문제가 발생한다.
인간의 심(心)에는 어떤 의미에서 두 측면이 있다고 본다. 하나는 정적(情的) 측면이고, 또 하나는 성적(性的) 측면이다.
@심(心)
1. 情(감성) Sentiments
2. 性(이성) Moral Nature
인간에게는 감정이라는 것이 있다. 감정은 욕망의 주체이고 욕망의 세계이다. 정(情)의 세계에는 선악이 모두 있을 수 있다.
그리고 성(性)이라고 하는 것은 아주 순수한 선(善)만 있는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유명한 근세 유학의 문제는 심통성정(心統性情)이라는 것이다.
심통성정(心統性情) : 심(心)은 성(性)과 정(情)을 통괄한다.
- 장횡거
인간의 심이라고 하는 것은 정적인 측면, 성적인 측면이라는 양면이 있다. 그런데 인간의 심(心)은 이 둘을 다 거느리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 존재 속에서 심(心)이 성(性), 정(情)이라는 두 가지를 관리한다고 말할 수 없다. 주자학에서 이 말은
계속 논란이 되고 있다. 내가 생각하기에 결국 심(心)과 정(情)과 성(性)은 하나이다. 하나의 의식 현상이다.
심(心), 성(性), 정(情)은 셋으로 나누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의식현상이다.
이것 전체를 포괄적으로 말하는 게 심(心)이다. 그리고 인간이 산다고 하는 것은 심으로 사는 것이다. 마음이라는 것은
주체적인 능력이 있다.
인간의식의 작위적 주체는 어디까지나 심(心)이다.
성(性)은 능동적 촉발성(觸發性)을 갖지 않는 비작위적(無爲) 순수한 도덕적 이상(Moral Ideal)일 뿐이다.
그러나 그 심이라는 것이 어떤 때는 정적인 측면으로 나타나고, 어떤 때는 성적인 측면으로 나타난다는 이야기다.
세 개가 아니라, 동전의 양면처럼 하나의 심, 즉 일심(一心)인데, 그 일심에는 정적인 측면과 성적인 측면이 있다는 이야기다.
그런데 정도전이 왜 이런 이야기를 하냐 하면, 불교는 마음의 종교라서, 모든 것이 마음에 달렸는데,
마음에는 정(情)적인 측면이 끼여 있기 때문에 항상 문제가 많다고 보고 있는 것이다.
심(心)
정(情) ↔ 성(性)
기(氣) ↔ 리(理)
용(用) ↔ 체(體)
인욕(人慾) ↔ 천리(天理)
7. 과거제도와 주자학
고려 왕조는 불교 사회였고, 조선 왕조에 와서 유교로 그 패러다임을 바꾸려 했다.
불교는 개인주의적이다. 불교는 나 혼자 성불이 가능하다. 나 혼자 해탈이 가능하다.
불교는 철저하게 개인주의적 종교이다.
내가 득도하고, 내가 깨닫는 것이기 때문에 원칙적으로 목사님도 필요 없고, 교회도 필요 없다.
여러분들이 여러분의 마음을 다스려서 번뇌로부터 마음을 해방시키면, 그것이 곧 불교가 말하는 성불이고, 해탈이다.
불교 : 개인주의적 : Individualistic
유교 : 공동체적 : Communalistic
그래서 불교이론으로는 정치 이론을 만들기가 어렵다. 모두가 개별적으로 놀기 때문에 어렵다.
이러한 불교적 사회도 나름대로 잘 돌아가면 굉장히 훌륭할 수 있지만, 고려 말 사회는 워낙 많은 문제를 일으켰다.
그래서 새로운 왕조와 새로운 관료제를 만들어서 해결하려 했다.
그런데 정치적인 권력이 부여된 관료들이 얼마나 제대로 나라를 잘 다스릴 수 있느냐는 큰 문제였다.
어떻게 하면 이 사대부들에게 올바른 윤리의식을 주느냐는 큰 과제였다.
과거를 봐서 합격한 사람이 하루아침에 암행어사가 되었다. 이렇게 종이쪽지에 시험을 보는 것으로
그 사람에게 권력을 준다는 것은 참으로 이상한 제도이다.
세계적으로 이런 시험 제도는 중국에서 처음 태어났다. 서양에서 온 것이 아니다. 오히려 서양 사람이 배워간 것이다.
관리등용제도로서의 과거(Examination)는 중국문명의 유니크(Unique)한 시도였다.
사람이 문장을 쓰고, 그것을 평가해서, 그 다음날로 바로 그 전날까지 아무것도 아니었던 사람에게 권력을 준다는 것은
굉장히 이상한 제도이다. 사람을 과연 그렇게 평가할 수 있느냐는 논란이 있다.
오늘날까지도 고시의 문제점이 바로 그런 것이다.
어제까지 별 볼일 없던 사람들도 열심히 법조문만 외워가지고, 고시만 패스하면, 그 다음날로 사람을 죽이고,
살릴 수 있는 권력을 갖게 되는 것이다.
세계적으로 관리 등용 방법은 과거제도 이외에는 추천이 있다.
@ 인재등용의 심층구조
시험(Examination)
추천(Recommendation)
추천제도 그 사회가 잘 돌아갈 때는 좋은데, 연줄을 쓰는 등 주관적이 되면, 현실 속에서 굉장히 문제가 많다.
문란해지기 쉽다.
그래서 고려 때부터 중국에서 과거제도를 들여왔다. 추천제보다는 객관적인 시험을 보는 과거제가 좋다고 판단한 것이다.
신라시대에 있었던 화랑이라는 것은 시험을 봐서 뽑은 게 아니었다. 화랑을 모아서 산수를 구경시켜주고, 사람들을
훈도시켜서 훌륭하게 나라를 이끌어 갈 수 있는 김유신이며, 관창 같은 사람이 나왔다. 그 당시에는 과거 같은 것은 없었다.
고려 시대부터 인재 선발이 문란해지니깐 그나마 과거제도가 좋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알고 있듯이
객관적으로 볼 때, 종이쪽지 하나를 보고, 권력을 준다는 것이 굉장히 불안했다.
이렇게 과거제도를 통해서 관료를 생산하는 제도에 대해서, 주자라는 분은, 새로운 관료제도가 성립하려면, 이들에게
권력을 주는 동시에 철저한 윤리의식을 의무 지우지 않으면 위험하다고 보았다.
주자학(ChuHsiism)의 목표는 사대부 관료 계층에게 철저한 도덕적 가치를 심어주기 위한 것이다. 주
자철학은 기본적으로 공무원 교육철학이었다.
따라서 모든 사대부들에게 정(情)보다는 성(性)을 더 강조했다.
너희들은 인의예지(仁義禮智)가 원래적으로 갖추어진 인간이다. 그러기 때문에 너희들은 성(性)에 따라서만
행동해야 한다고 했던 것이다.
성은 리적인 세계이고, 정은 기적인 세계이다. 기가 센 사람은 감정의 기복이 심하다.
마음대로 감정적으로 움직이는 게 기(氣)다. 그
래서 기를 강조하는 주기론자가 되면, 인간의 감정적인 것에 대해 관대해진다.
그런데 주리론자가 되면, 감정에 관대하지 않게 된다.
주기론자(主氣) : 감정에 대해 관용(Liberal)
주리론자(主理) : 감정에 대해 엄격(rigoristic)
따라서 새로운 관료제를 확립하려면, 대개 주리론자로 갈 수밖에 없다. 사대부들의 엄정한 윤리의식을 강조한다.
기가 리를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이 원래 가지고 있는 리(理)가 기(氣)를 지배하는 인간이 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게 주자학이다.
8. 불교의 심과 성
불교에도 심(心)과 성(性)에 대한 논의가 많이 있었다.
불교도 심(心)에 대해 본성(本性)을 말한다.
그 본성을 자성청정심(自性淸淨心)이라 불렀다.
불교에서 인간의 마음은 청정한 것인데, 오염이 되어 인간의 번뇌가 일어난다고 했다.
인간의 마음에는 정심(淨心, 깨끗한 마음)과 염심(染心, 더러운 마음)이 있다. 그러나 결국 이 정심(淨心)과 염심(染心)이 한마음(一心)이다.
그 번뇌를 벗어나면 다시 청정한 마음이 되는 것이다. 불교는 마음이 오염되어서 번뇌로 들끓는 마음도 깨달아서
확 뒤집으면, 청정한 것이 된다고 하였다.
번뇌즉보살(煩惱卽菩薩), 번뇌가 곧 보리다.
불교는 심과 성을 이원화(二元化)시키지 않는다.
불교라는 이론도 굉장히 좋은 이론인데, 이것을 잘못 해석하면 항상 도덕적 해이를 가져올 수 있다.
불교는 理的인 세계의(眞如門)와 氣的인 세계(生滅門)를 이원화(二元化)시키지 않는다. 근본적으로 초윤리적(Trans-ethical)이기 때문에 도덕적 해이를 가져올 수도 있다.
정도전이라는 사람은 주자학에 기초해서 불교를 비판하고 있다. 인간의 심과 성을 구분하지 않고, 심이 곧 성이고,
성이 곧 심이 될 수 있다는 이야기는 곤란하다고 생각했다.
인간의 마음에는 항상 환원될 수 없는 도덕적 핵심인 성이 있다고 하였다.
내가 보기에 정도전의 주장이 이론적으로 꼭 맞다고 볼 수는 없다. 하지만 이러한 정도전의 이론이 조선왕조를
만들어 갔고, 그래서 조선 왕조는 상당히 도덕주의적 나라가 된 것만은 틀림없다.
조선 왕조는 주리론적 전통을 고수했고 따라서 매우 규범윤리적 사회가 된 것만은 확실하다.
9. 주자학
주자학은 다음과 같은 한 마디로 요약이 된다.
存天理(존천리), 去人慾(거인욕):
내 몸에 하늘의 이치를 보존하고 사람의 욕심을 버린다. -주자-
주자학이 이 명제를 절대로 벗어나지 않는다.
인간이 존재한다는 것은, 항상 천리를 내 몸 속에 보존하고, 인욕을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인욕과 천리를 구분하고 있다.
천리(天理)=도심(道心),
인욕(人慾)=인심(人心).
그런데 주자가 이런 말도 했다. 인간이 배고플 때 먹고 마시는 것도 천리다.
그러나 맛있게 먹으려 하고, 많이 먹으려는 욕심을 내는 것은 인욕이라고 했다.
飮食, 天理(음식천리); 要求美味(요구미미), 人慾也(인욕야):
-주자어류-
그러니깐 주자도 그렇게 황당하게 도덕주의적인 사람은 아니었다.
주자는 인욕 속에 천리가 있다는 말도 했다.
人慾中自有天理(인욕중자유천리). -주자어류-
주자가 말하는 천리와 인욕의 구분은 무욕(無慾), 유욕(有慾)의 구분이 아니라 공(公)과 사(私), 시(是)와 비(非),
정(正)과 사(邪)의 구분인 것이다.
천리, 인욕의 구분은 무욕, 유욕의 구분이 아니라 公과 私, 是와 非, 正과 邪의 구분이었다.
인욕과 천리의 문제는 욕심이 있고, 없고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이 사적인 것을 버리고, 공적인 데로 가야하고,
그릇된 것을 버리고, 바른 곳으로 가야하고, 사특한 것을 버리고, 올바른 길로 가야한다는 것이다.
주자는 모든 공직자에게 사(私)를 버리고 공(公)을, 비(非)를 버리고 시(是)를, 사(邪)를 버리고 정(正)을 추구할 것을 강력히 요청하였다.
주자학의 가장 큰 명제는 새로 구성된 과거제도의 의해서 형성된 관료들이 어떻게 인욕을 버리고, 천리로 가느냐이다.
이것이 주자의 요구였다.
天理人慾雖同時竝有之物(천리인욕수동시병유지물), 然自其先後公私邪正之反而言之(연자기선후공사사정지반이언지), 亦不得不爲對也(역부득불위대야):
- 주자문집-
오늘날 우리나라도 관리의 부패가 큰 문제이다.
과거부터 관리가 되려고 하면, 천리를 존하고, 인욕을 거하는 그러한 능력이 없는 사람은 관리가 되면 안 되는 것이었다.
人欲을 버리고 天理를 따르는 보편적 가치를 실천할 수 없는 사람은 공직자가 될 수 없다. 공직자는 시험에 의해서만 권력을 부여받는 자가 아니다. -주자-
10. 월인석보
세종대왕이 월인천강지곡이라는 것을 지은 것은 모두 알고 있을 것이다.
<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
세종이 지은 악장체(樂章體)의 찬불가(讚佛歌). 부처님의 중생교화를 예찬.
세종은 월인천강지곡을 지었고, 그의 아들인 세조는 석보상절을 지었다. 여기에 상당한 아이러니가 있다.
<석보상절:釋譜詳節 1447>
수양대군(세조)이 지은 석가모니의 일대기. 영웅적 일생을 찬탄하는 서사시
이 둘을 합쳐서 월인석보라고 부른다.
석보상절이라는 것은 부처님의 일생을 드라마타이즈해서 언문으로 만들어 놓은 일종의 시다.
그리고 월인천강지곡이라는 것도 부처님의 공덕이 달과 같이 모든 삼라만상에 비치는 것을 찬양한 시다.
월인천강(月印千江)은 달이 천 개의 강에 도장처럼 박힌다는 말이다.
그런데 정도전과 같은 사람들은 불교를 배척하고 패러다임을 완전히 유교로 바꾸려고 노력했는데, 조선왕조에서
가장 위대하다는 세종임금이 공자의 일생을 찬양하는 글을 지어도 시원찮을 판에 불교를 찬양하는 서사시를
지었다는 것은 이상하기 그지없다.
왜 그랬을까?
왕조라는 것은 하루아침에 왕의 명령으로 나라가 싹 바뀌는 게 아니다. 역사책을 보면, 1392년에 조선왕조로
챕터가 바뀌고, 그 다음부터는 전부 조선왕조로 아는데, 일반 민중들은 왕조 창건을 알지 못했다.
이성계가 왕이 됐는지 안됐는지도 모른다. 조선 왕조 초기는 어떤 의미에서 조선왕조로 보면 안 된다. 그냥 고려였다.
세종때까지만 해도 고려라고 생각해야 한다. 1392년부터 진짜로 조선왕조가 된 것이 아니었다.
정도전 같은 사람들은 개혁을 하고, 세상을 바꾸려고, 불씨잡변과 같은 글을 쓰고 피눈물 나게 노력했지만,
세상은 그렇게 쉽게 움직이지 않았다. 개혁이라는 것은 그렇게 어려운 것이다.
정도전 같은 사람이 그렇게 노력하고, 조선왕조가 유교를 이념으로 표방했지만, 민중들은 아직 감이 안 왔다.
향교를 세웠지만, 향교가 무엇인지 몰랐고, 갈 생각도 안 했다. 오히려 가고 싶은 곳은 절이었다.
세종 때 와서도 집현전을 만들고 학사들을 중용하며, 유교를 진흥시키려 애썼다.
하지만 왕 본인은 집현전 학사들의 이야기만 들을 수 없었다.
민중들은 불교를 그리워했다.
그래서 그 사람들을 위로하고 그 사람들에게 어필하는 왕정을 하기 위해서 할 수 없이 또다시 타협했다.
세종이 <월인천강지곡>을 지었다는 것은 역사적으로 보면 완전한 후퇴였다.
세종이 <월인천강지곡>을 지었다는 것은 일종의 타협이요, 개혁의 후퇴를 의미하는 것이다.
개혁이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이건 후퇴였다. 역사의 패러다임을 바꾼다는 것은 그렇게 다이나믹하고 어렵다.
11. 佛氏心性之辨
▶ 是其心如天上之月(시기심여천상지월), 其應也如千江之影(기응야여천강지영), 月眞而影妄(월진이영망), 其間未嘗連續(기간미상연속):
[이것은 그 마음은 하늘 위의 달과 같고, 그 마음의 응함은 천강(千江)의 달 그림자와 같으니, 달은 참된 것이요,
그림자는 헛된 것이어서, 그 사이에 일찍이 연속됨이 없는 것이다.]
정도전의 이야기는 달은 존재하는 사물이라고 인정할 수 있다. 그러나 천강(千江)에 비춰진 것은 다 그림자며
헛것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천강에 비춰진 달은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왜 우리가 허한 세계를 자꾸만 인정하려 하는가? 그림자에 불과한 것이다. 거기에 뭔 얼어빠진 부처님의 공덕이 있느냐?
다 그림자며 허망한 것이라고 비판하고 있다.
이것은 그 마음이 하늘 위의 달과도 같고, 그것이 응하는 것은 천강의 그림자와도 같은 것이다.
달은 실제의 사물이지만, 천강에 비춰진 것은 달이 아니라 허망한 그림자일 뿐이다.
달과 그림자 사이에는 연속성이 없는 것이다. 혼동하지 말라는 것이다.
불교는 감각적 세계를 허환(虛幻)으로 간주한다. 정도전은 현상과 실제의 이원성을 본질적으로 거부한다. 그래서 월인천강(月印千江)의 노래는 픽션(fiction, 허구)일 뿐이라고 비판한다.
세종 때에 비교해서, 유학적인 문제의식에서 정도전은 훨씬 더 과감하게 앞으로 나가 있다.
허망된 그림자 적인 세계하고 실제 세계를 나누어 생각해서는 안 된다. 모든 것은 실(實)해야 한다.
그림자를 받아들일 수 없다고 비판하고 있다.
故曰(고왈), 釋氏虛(석씨허), 吾儒實(오유실); 釋氏二(석씨이), 吾儒一(오유일) ;釋氏斷絶(석씨단절), 吾儒連續(오유연속), 學者所當明辯也(학자소당명변야): 그리고서 말하기를 “석씨는 허하고 우리 유가는 실하다. 석씨는 둘이고, 우리 유가는 하나다. 불가는 단절적이지만 유가는 연속적이다. 배우는 자들이 어찌 이것을 명확하게 분별하지 않을까 보냐!
이어서 물건을 저울에 다는 비유를 하고 있다.
▶ 如持無量之衡(여지무량지형), 稱量天下之物(칭량천하지물), 其輕重低昻(기경중저앙), 惟物是順(유물시순), 而我無以進退稱量之也(이아무이진퇴칭량지야):
[마치 눈금이 없는 저울을 가지고 천하의 만물을 저울질하는 것과 같아, 그 가볍고 무겁고, 내려가고 올라가는 것은
오직 물건에 따를 뿐, 자기가 진퇴(進 退)하여 칭량(稱量)함이 없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눈금이 없는 저울대를 가지고 천하의 사물을 저울질하겠다는 것과 같은 것이다.
저울 쟁반에 올려진 물건이 가벼운가, 무거운가, 저울대가 내려가는가, 올라가는가, 이것을 그냥 물건에만 맡겨둔다면,
내가 추를 움직여서 그 사물의 무게를 잰다는 행위가 없게 되는 것이다.
▶ 故曰(고왈), 釋氏虛(석씨허), 吾儒實(오유실); 釋氏二(석씨이), 吾儒一(오유일) ;釋氏斷絶(석씨단절), 吾儒連續(오유연속), 學者所當明辯也(학자소당명변야):
[그러므로 석씨(釋氏)는 허무이고 우리 유가(儒家)는 진실이며, 석씨는 둘이고 우리 유가는 하나이며, 석씨는
간단(間斷)이 있고 우리 유가는 연속(連續)되는 것이라 하는 것이니, 배우는 자는 마땅히 밝게 분변(分辨)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나는 말한다. 석씨는 허하고 우리 유가는 실하다. 석씨는 둘이며, 우리 유가는 하나다.
석씨는 단절이고 우리 유가는 연속이다. 배우는 자들이 어찌 이것을 명확하게 분별하지 않을까 보냐!
釋氏二(석씨이), 吾儒一(오유일) ;
불교는 2원론적 분열이 있다.
釋氏斷絶(석씨단절), 吾儒連續(오유연속),
불교는 단절적이며, 유교는 연속적이다.
12. 유교의 현실주의
정도전의 불교비판은 단순한 불교비판이라기 보다는 우리 인간의 이원(二元)적 사유에 대해서 본질적인
도전장을 내고 있는 것이다.
정도전의 불교비판은 불교라는 특정종교의 비판이라기보다는 인간의 2원론 사유 전체에 대한 비판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를 자꾸 허망하게 생각하고, 그것을 넘어서는 어떠한 진실한 세계가 있을 거라는 생각,
이 생각에서 우리는 벗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유교 : 현실주의 : 인간세의 윤리
불교, 기독교 : 초월주의 : 윤회, 열반/ 지옥, 천당
그러기 때문에 유교적인 세계관은 굉장한 현실주의가 있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제가 불씨잡변을 해석하면서, 쓴 마지막 부분을 읽겠다.
읽는 것으로 강의를 마친다.
삼봉의 언어는 어디까지나 삼봉의 고유 문제의식 속에서 피어난 그 자신의 언어요, 이 조선 땅의 역사현실이 잉태시킨 언어다. 여태까지 우리는 살아있는 우리 조상의 언어를 너무도 읽지 못했다. 그들의 살아 움직이는 삶, 그 자체를 살아있는 그 모습대로 구성할 능력이 우리에게 없었기 때문이었다. 여기에 바로 우리가 인류의 가장 위대한 사상가, 혁명가의 한 사람으로서 삼봉을 재조명해야 하는 당위성이 있는 것이다. 삼봉의 유혼(幽魂)은 아직도 조선의 푸른 창공을 배회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