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 례 성 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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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략설명 | 마산교구 첫 본당이자 복자 신석복 마르코의 고향. |
주 소 | 경상남도 밀양시 하남읍 명례리 1122 |
전화번호 | 사무실: (055)391-1205 수녀원:391-3206 담당신부: 010-3166-0773(rijemin@hanmail.net) |
팩스번호 | (055) 391-1204 |
홈페이지 | http://cafe.daum.net/myungrye |
미사 안내 | 일~금요일: 11시 토요일: 하절기 16시, 동절기 15시 |
문화정보 |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526호(성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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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의 젖줄인 낙동강 변에 위치하고 있으며 밀양과 김해를 잇는 나루가 있었던 명례는 낙동강을 따라 박해를 피해 피난 와 정착한 교우들이 많았던 곳으로 1897년 영남지방의 네 번째 본당이자 경상남도의 첫 번째 본당이 설립된 곳이며 복자 신석복 마르코의 생가 터가 있는 마산교구의 영적 고향이며 신앙의 원천이다.
복자 신석복(申錫福) 마르코는 1828년 밀양시 하남읍 명례리 1209 번지에서 태어났다. 비교적 넉넉한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농사를 지으며 누룩과 소금행상을 하였다. 밀양과 김해를 연결하는 명례 나루터에는 사람들로 붐볐고, 낙동강을 따라 박해를 피해 온 정착한 교우들도 많았기에 신석복 마르코도 그들의 권면으로 신자가 된 듯하다. 형제들은 그가 순교할 당시 신자가 아니었지만 훗날 모두 입교했다.
1866년 병인년에 대대적인 박해가 일어나자 신석복과 동료 신자들을 잡으러 대구에서 포졸들이 내려와 그의 집을 덮쳤다. 그가 진해 웅천(창원 마포라고도 함)에 장사하러 갔다는 사실을 알고 강 건너에서 기다리다가 행상에서 돌아오는 그를 체포하여 밀양을 거쳐 대구로 압송했다. 천주교에 입교하여 마르코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은 지 10여 년쯤 되는 때였다.
그의 체포 소식을 들은 형제들이 돈을 마련하여 대구로 압송되어 가는 그를 뒤쫓아 가서 포졸들에게 돈을 주며 빼내려 했지만 오히려 그는 형제들에게 "일 푼전(分錢)도 포졸들에게 주지 말라."고 권고했다. 이로 인해 그는 밀양에서 하루를 머무는 동안 포졸들에게 무수한 형벌을 받았고 대구까지 끌려가는 동안 더한 능욕을 당해야만 했다. 대구서 처형되기 전에도 회유하는 관장에게 "저를 놓아주신다 하여도 다시 천주교를 봉행할 것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관장은 이 말에 화가 나서 더욱 혹독한 형벌을 가하고 며칠 감옥에 가두었다가 교수형을 집행했다. 1866년 3월 31일(음력 2월 15일)로 성토요일이었고 그때 그의 나이는 39세였다.
순교 후 그의 아들 신영순 이냐시오가 대구로 가서 포졸들에게 돈을 주고 부친의 유해를 찾아 모셔왔지만 박해의 여파가 자신들에게 미칠까 두려워하는 지방 유지들의 반대로 고향 땅에 안장할 수 없어 낙동강 건너 한림정 뒷산 노루목에 안장했다 그로부터 110여 년이 지난 1975년 12월 1일 진영 본당 신자들이 순교자의 묘가 야산에 있음을 안타깝게 여겨 본당 공원묘역(현 김해시 진영읍 여래리)으로 이장했다. 순교자의 이름이 한동안 신 이냐시오로 알려졌었는데, 이는 1895년 "치명일기"를 편집하는 과정에서 아들 신영순 이냐시오와 혼동한 까닭이다. 1925년 발간된 "병인치명사적"에서 마르코로 정정되었고, 교회사가들의 연구에 의해 이름 또한 신석복임을 확인했다.
순교자 신석복 마르코에게는 아내와 세 명의 자녀가 있었는데 순교할 때 큰 아들은 16살이었다. 순교자의 부인은 그 후로도 오랫동안 명례에서 살았다. 큰아들 이냐시오는 네 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그 중 막내인 신순균 바오로는 후에 사제가 되었다(1935년 수품, 1948년 선종 대구 성직자 묘지에 안장). 세월이 흐르면서 교회가 시성시복 기도를 바치는 동안 교회의 무심 속에 그의 생가 터는 낯선 이에게 팔려나가 축사로 변했고 대부분의 순교자 가족은 전국으로 흩어졌다. 4대와 5대 후손 몇 명이 지금 명례에서 농사를 짓고 있다.
순교자 신석복 마르코는 2014년 8월 15일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광화문에서 시복되었다.
복자 신석복 마르코가 순교하던 해 강성삼 라우렌시오가 충청도 홍산에서 태어났다. 김대건, 최양업 신부에 이어 우리나라의 세 번째 사제이자 한국 땅에서 처음으로 사제품을 받은(1896년 서울 약현 중림동 성당) 강성삼 라우렌시오 신부는 1897년 현재 부지에 네 칸짜리 집을 매입하여 부임하고 사목을 시작하였다. 안타깝게도 1903년 37살의 나이로 이곳에서 지병으로 선종하였다.(1866-1903년) 1926년 부임한 권영조 신부는 이곳에 ‘기와로 된 성당’을 새로 짓고 1928년에 축복식을 가졌으나 이 성당은 1936년 태풍으로 전파하였다. 1938년 신자들이 부서진 조각을 모아 현재의 모습으로 축소 복원하였다. 남녀 신자석이 칸막이로 분리돼 있는 성당 내부는 초기 신자들의 신앙 모습과 영성을 느끼게 해 준다. 감실 위 십자가 위에 모셔진 원죄 없이 잉태된 마리아상은 1936년 태풍으로 성당이 무너졌을 때도 하나도 다치지 않고 여전한 모습으로 순례자들을 맞이하고 있다. 아마 우리나라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명례성당 만의 귀한 성모상이다. 강성삼 신부가 돌아가시고 나서 명례 성당은 차례로 마산, 삼랑진, 진영 본당의 공소가 되었다가 1996년 수산 본당이 설립되면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운명을 맞았지만 성당 바로 옆 축사가 복자 신석복의 생가 터임을 알게 되면서 성지로 조성되고 있다.
마산교구는 2008년, 복자 신석복 마르코의 생가 터와 명례 성당(1897년) 주변을 성역화하기로 하고 명례성지조성추진위원회를 허가하여 이듬해 위원회(위원장 이제민 신부)를 구성하였다. 그에 앞서 2007년 4월 성지 입구의 한옥을 매입하고 보수하여 강성삼 신부의 세례명을 따라 라우렌시오의 집으로 명명하였다. 2009년 8월부터 매주 토요일 미사를 봉헌하다가 2011년 1월 7일부터 명례성지 담당신부가 상주하게 되면서 매일 미사를 봉헌하고 있다. 2011년 낯선 이에게 팔려나가 축사로 변했던 복자의 생가 터를 매입하고 야외 돌제대를 설치했다. 현재 성당의 규모로는 순례자들을 모두 수용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같은 해 6월 안명옥 주교 주례로 사제관과 생가 터를 축복하였고 명례 성당이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526호로 등록되었다.
2017년 가을에는 복자 신석복 마르코의 생가 터에 아담하고 단순한 기념 성당(이로재 대표 건축가 승효상 설계)을 지어 봉헌할 계획이다. 명례 성지는 복자 신석복 마르코의 기념성당을 건립하는 것을 비롯해 명례를 신앙선조들의 삶과 신앙을 느낄 수 있는 공간으로 조성하고자 복음화 학교를 열었으며 복자 신석복 마르코의 정신을 따라 ‘녹는 소금 운동’을 펼치고 있다.
“당신은 세상의 소금입니다.”
“당신과 세상의 평화를 위하여 녹는 소금이 되겠습니다.”
첫댓글 고맙습니다.
아주 많이 도움이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