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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경주김씨 개관 (곡성신문 사장 박정하 기고)
경주(慶州)김씨의 시조(始祖)는 신라시대 비운의 마지막 왕이었던 경순왕(敬順王 897~978)으로부터 비롯된다.
경순왕의 세속적인 이름은 부(傅)로 신라 김씨시조(金氏始祖) 1세(一世) 김알지(金閼智)의 28대손이다. 후백제의 견훤이 신라를 침공하여 경애왕을 살해하자 927년 11월 경애왕의 뒤를 이어 신라 56대 왕으로 즉위한 인물이다.
신라 초기 최고관직인 대보(大輔)벼슬에 오른 김알지(金閼智)는 서기 60년 (신라 탈해왕 4년) 신라의 서울인 서라벌(금성) 서쪽 계림(鷄林 또는 始林)의 숲속 나뭇가지에 매달려있던 금궤(金櫃)에서 태어났다는 전설이 전해온다. 탈해왕은 ‘하늘이 준 아들’ 그리고 금궤에서 나왔다고 하여 성씨를 김(金)씨로 사성(賜姓)하엿다.
‘알지’는 향찰(향찰: 순 우리말을 한자의 음과 훈을 빌어 표기하던 신라시대의 문자)로 표기한 것으로 ‘아이’ ‘아기‘를 일컫는다.
당시 탈해왕(脫解王)은 ‘알지’를 태자로 책봉했으나 후에 알지는 이를 사양하고 왕위에 오르지 않았으며 그 6대손인 ‘미추(味鄒)’가 김 씨로써는 처음 왕위에 올랐다.
경순왕은 신라 김씨 36대 왕으로 즉위한 후 9년간 기울어져가는 나라 정치를 바로 잡고 도탄에 빠진 백성을 구하고자 노력하였으나 도처에 지방호족들을 비롯한 군웅(群雄)이 할거(割據)하고 특히 궁예, 견훤 등이 여러 차례 침략하므로 인해 나라의 기능이 완전히 마비되고 민심이 고려로 기울게 됨에 따라 935년 결국 고려 태조 왕건에게 항복‘ 양국(讓國)하고 말았다.
경순왕은 3명의 부인에게서 9명의 아들을 두고 있다.
즉 첫째 부인인 죽방부인 박씨(竹房夫人 朴氏)에서 후세인들이 마의태자(麻衣太子)라 일컫는 일(鎰)을 비롯해 둘째 황(鍠), 셋째 명종(鳴鐘)등 3남 1여를 두었다.
두 번째 부인은 고려 태조 왕건의 딸 낙랑공주(樂浪公主)로 경순왕이 고려 왕건(王建)에게 신라를 양국할 당시 정략적으로 혼인을 맺게 된 부인이다. 경순왕은 이처럼 낙랑공주를 아내로 맞고 정승(政丞)에 봉해졌으며 녹(祿) 1000석, 경주(慶州)의 8천호를 식읍(食邑)으로 하사받고 경주 사심관(事審官)으로 여생을 보냈다. 낙랑공주와의 사이에서 5남 2녀를 두었는데 ,첫째 은열(殷悅),둘째 석(錫), 셋째 건(鍵), 넷째 선(鐥), 다섯째 추(錘)가 그들이다. 그리고 별빈 안씨(別빈 安氏) 와의 사이에서도 아들 덕지 (德摯)를 두었다.
경순왕의 첫아들 마의태자(麻衣太子)로 더 잘 알려진 김일(金鎰)은 망국의 한을 품고 개골산(皆骨山,금강산)으로 입산(入山) 바위 옆에 움막을 치고 살며 베옷차림에 풀뿌리, 나무 열매를 먹으며 일생을 마쳤다. 그의 후손들은 오늘날 부안김씨(扶安金氏), 통천 김씨 등으로 명맥이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둘째 김황金鍠)은 부왕이 신라를 고려에 양도함에 따라 합천 해인사로 들어가 불법을 닦으며 스님(법명 : 梵空)으로 일생을 마치었다. 그러나 세속에 남겨놓은 아들김운발(金雲發)이 나주김씨(羅州金氏)로 파문을 형성, 지금까지 대를 이어오고 있다.
셋째아들 김명종(金鳴鐘)은 고려조정으로부터 영분공(永芬公)의 시호(諡號)를 받고 또 경주군(慶州君)에 봉(封)해 짐에 따라 비로소 경주김씨(慶州金氏)란 관향(貫鄕)이 정해지고 영분공파(永芬公派)란 파문(派)門)이 형성돼 내려오게 되었다.
넷째 아들 김은열(金殷說)은 고려 조정으로부터 대안군(大安君)으로 봉해졌으며 역시 관(貫)을 경주(慶州)로 삼아왔는데 그의 후손들이 지금까지 가장 번창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즉 그의 둘째 아들 김숙승(金叔承)은 안동김씨(安東金氏)로, 5세손 김봉기(金鳳麒)의 넷째 아들은 김녕김씨(金寧金氏)로 각각 분관했다.
다섯째 김석(金錫)은 의성김씨(義城金氏), 여섯째 김건(金鍵)은 강능김씨(江陵金氏), 관조가 되었으며 후손으로 내려가면서 영월김씨, 홍주김씨등으로 분관했다.
일곱째 김선(金鐥)은 언양김씨의 관조가 되고, 여덟째 김추(金錘)의 아들 김위용은 삼척김씨(三陟金氏), 김우(金佑)는 희천김씨, 아홉째 김덕지(金德摯)는 울산김씨(蔚山金氏) 관조가 되었다.
신라 김씨에서 다른 성(他姓)으로 갈려 간 성씨는 김행(幸)이 안동권씨(權氏)로, 김순식(順式)은 강능 왕씨(王氏)로 ,김궁예(弓裔)의 후손 김순백(珣白)은 광산 이씨(李氏)로, 세광은 감천문씨(文氏), 김은열의 13세손 김영규(金永奎)는 수성최씨(崔氏), 등으로 각각 개성(改姓)하였다.
이처럼 경순왕의 후손들은 천년이라는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여러 분파로 나눠지고 부침을 거듭하면서 우리나라 대성의 반열에 올라 오늘에 이르고 있다.
옥과면, 입면, 겸면, 오산면 지역에 살고 있는 경주김씨(慶州金氏)들은 대부분 김명종(金鳴鐘)의 후손들로 그의 봉직(封職)에 따라 크게 영분공파(永芬公派)라고도 부른다.
상기한 것처럼 김명종(金鳴鐘)의 두 형은 고려양국(高麗讓國)을 반대하며 모두 산으로 들어가고, 어머니인 죽방부인 박씨(竹房夫人 朴氏) 마저 금강산에 들어가 여승(법명: 頓道)이 되어 돈도암(頓道庵)을 창건, 수선(修禪)으로 생을 마쳤다. 그러나 김명종은 아버지인 경순왕의 뜻을 받들어 고려 조정으로 들어갔다. 그는 고려 조정으로부터 영분공(永芬公)의 시호(諡號)를 받고 또 경주군(慶州君)에 봉(封)해 젓다.
김명종의 6세손 김예겸(金禮謙)이 고려 때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으로 내중령(內中令)을 지냈고 ,그의 손자 김의진(金義珍)은 고려사학(私學) 12공도(公徒)의 하나인 양신공도(良愼公徒)를 육성하였으며 문종 때에는 참지정사(參知政事) 로 지공거(知貢擧)를 겸하여 인재등용에 공헌하고 평장사(平章事)를 역임했다.
김의진의 증손자 김영고 (金永固)는 무신의 난을 일으킨 정중부(鄭仲夫)와 이의방(李義方)을 재거하려 했던 인물이며, 김영고 (金永固)의 아들 김인경(金仁鏡)은 문무를 겸한 명신으로 고종 때 조충(趙沖)과 함께 강동성(江東城)에서 거란군 평정에 공을 세우고 벼슬이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에 이르렀으며 시문(詩文)과 예서(隸書)로 명망이 높았다.
김인경(金仁鏡)으로부터 4대 후손인 고손자(高孫子) (김명종의 16세손)대에 이어지면서 또 한 번 집안이 크게 중흥 기를 맞는다. 경주가문의 후손들은 후일 김인경의 후손으로써 고려말기를 살았던 고손자들을 중심으로 세계(世系)를 가지런히 정리 14개 파로 알기 쉽게 구분하고 있다. 이를 살펴보면
1,두계공파(杜溪公派 :김충유)
2,수은공파(樹隱公派 :김충한)
3,시어사공파(侍御史公派 :김충보)
4,참찬공파(參贊公派 :김충익)
5,밀직공파(密直公派 :김충원)
6,병판공파(兵判公派 :김남보)
7,판삼사사공파(判三司使 :김남비)
8,평장사공파(平章事公派 :김남길)
9,두암공파(兜菴公派 :김남귀)
10월성부원군파(月城府院君派 :김천서)
11,강릉공파(江陵公派 :김서/17세손)
12,참의공파(參議公派 :김생수)
13,부사공파(府使公派 :김상한)
14현감공파(縣監公派 :김정심)등이 있다.
이중 과거 옥과현(玉果懸)지역과 인연을 맺고 현재 옥과면 입면 겸면 삼기면 오산면 지역에 흩어져 거주하고 있는 경주 김씨들은 대부분 김충한(金沖漢)을 파계조(派系祖)로 한 수은공파(樹隱公派) 후손들이다.
2곡성과 경주김씨
과거 500여년 이상 옥과현 지역과 인연을 맺고 현재 옥과면, 입면, 겸면, 오산면, 지역에 흩어져 거주하고 있는 경주 김씨들은 대부분 김충한(金沖漢)을 파계조(派系祖)로 모시고 있는 후손들이다.
옥과현 지역 후손들에 의해 중시조(中始祖)로 받들어 모셔지고 있는 수은 김충한(樹隱 金冲漢)은 목은 이색, 포은 정몽주, 도은 이숭인, 야은 길재, 농은 민안부와 더불어 육은(六隱)으로 불리던 충신으로 고려 예의판서(禮儀判書)를 역임했다.
조선이 개국하고자 고려 신하로서 도리를 다하지 못하겠다며 두문동(杜門同)에 은거했던 72현중의 한사람이다. 후에 남원시 송동면 두신리 현 두곡(杜谷:壹谷)마을로 떠나와 마을 이름을 두문동과 같은 맥락의 ‘막을두(杜)’를 써서 두곡(杜谷)이라 명명하고 세상에 나오지 않았다. 그는 1395년 (태조 4년) ‘경죽김씨 세계서(慶州金氏 世系序)를 펼쳐내 경주김씨의 기원과 계대(系代)를 소상히 밝혔다. 이 세계서(世系序)는 현재 우리나라 족보학(族譜學) 발전의 귀중한 사료로 알려져 있으며, 그 목판본이 문화재로 등록되어 잇다.
김충한은 3남1녀를 남겼는데 3남(자, 승, 작)은 모두 벼슬길에 나가 현령, 부사, 직제학을 각각 역임하였으며, 그의 딸은 두문동에 같이 들어갔다 함께 남원 두곡으로 내려와 여생을 보낸 절친한 친구 신덕린(申德隣:고려 예의판서 역임, 그의 묘가 오산면 가곡리 5층석탑 근처에 자리 잡고 있다.치일재)의 아들 신포시(申包翅 : 신숙주,신말주의 祖父)에게 시집보내 고령신씨 가문과 인연을 맺게 된다.
김충한의 장남 김자(金滋)는 유윤(有潤 교리), 유간(有間 부사), 유직(有直 현령)유율(有栗)을 남겼다. 옥과 향교지(玉果 鄕校誌)에 따르면 옥과현(玉果懸)과 맨 처음 인연을 맺게 된 후손은 김자(金滋)의 둘째아들인 김유간(金有澗)으로 나타나 있다.
그는 1407년(태종 7년)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했으나 벼슬길에는 나가지 않았다. 그러나 나이 육순에 부모상을 연이어 당해 묘앞에 초막을 치고 시묘살이를 하는 가운데 병을 얻어 사경을 해매였으나 그 효심을 알았음인지 호랑이가 초막을 호위하고 사슴과 멧돼지 등 제사 지낼 제물을 간간히 가져다 주었다는 전설이 전해오는 인물이다. 이러한 사실이 조정에 알려져 참봉(參奉)과 함께 도사(都事), 담양부사(潭陽府使 :현 담양군에 행정구역상 부(府)가 설치된 시기는 1398년부터 1413년까지 15년간)직을 제수(除授)하였으나 취임하지는 않고 금강산에 들어가 유유자적(悠悠自適)하며 말년을 지내다가 70세에 눈을 감았다는 내용이 제단비문(祭壇碑文)에 전한다.
이러한 연유에서인지 현재 김유간의 묘는 경기도 광주에 있었다고 전하나 실전되어 알려지지 않고 있는 상태이다. 그가 어느 때 어떤 연유로 옥과 땅에 들어와 거주했는지 큰 아쉬움이 남지 않을 수 없다.
김유간의 아호(雅號)가 현석(玄石)인 까닭에 그 후손들은 모두 현석공파(玄石公派)라 칭하고 있다. 현재 곡성군 옥과면 주산리 산 85번지 경주김씨 재실인 금산재(金山齋) 뒤쪽에 제사만 지낼 수 있는 그의 단소(壇所)가 마련되어있다. 정작 옥과 쪽에서 경주김씨 선조 묘가 처음 나타난 것은 생, 몰, 연대 미상인 김유간의 손자 김사웅 (金士雄) 때부터이다.
김유간은 세 명의 아들(일, 건, 상,)을 두었는데 큰 아들인 김일(金鎰)은 또 4명의 아들(사영, 사웅, 사호, 사걸)을 두었다. 김일의 큰 아들 사영은 후사가 없었으며 차남으로 별좌(別坐)벼슬에 있었던 김사웅(金士雄)의 묘소가 옥과면 배감리 마을 들어가는 입구에 자리 잡고 있다. 그의 후손들은 대부분 김사웅의 묘소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옥과 일대를 중심으로 뿌리를 내려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기 때문에 처음 옥과에 입향한 선조로 추측하기도 한다. 셋째인 김사호(金士豪)의 묘소는 순창군 풍산면에 자리 잡고 있으며 그의 후손들 역시 대부분 풍산면 일대에서 뿌리를 내리고 지금까지 거주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옥과 에서는 김사웅대에 이르러 이미 정착을 완료하고 그의 손자(구, 침, 요)와 증손자대에 이르러서는 상당히 후손들이 벌족 해져 중흥의 기틀을 맞이한 것으로 보여진다. ‘경주김씨 현석공파 세보’에 따르면 김유간의 후손들 중 생, 몰, 연대가 정확히 나와 있는 맨 위 선대는 김사웅의 장 손자인 김구(金玖 1519~1607년)로 지금으로부터 4백 년 전 인물이다.
집에 매화와 국화를 즐겨 가꾸어 호를 쌍향당(雙香堂)이라 칭하는 김구(金玖)는 경주김씨 가문에 있어서 상당히 중요한 중간자적 위치를 점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지역의 향토자료에도 학행(學行)이 뛰어난 인물로 묘사되어 있다. 백호 임제(白湖 林悌 1549~1587)가 쌍향당을 칭송한 시문(詩文)이 전한다. 후손들의 전언에 따르면 김구가 원래 살았던 곳은 옥과면 무창리 현재 금의리 마을 근처였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렇게 견주어 볼 때 경주김씨가 맨 처음 이거해 들어와 4~5대에 걸쳐 금의리에서 정착했던 것으로 예측된다. 즉, 옥과 지역에 세거를 펼치며 살아왔던 경주김씨들의 정신적인 고향은 금의리에 있다고 봐도 무방할 듯 싶다. 금의리는 자연마을 명으로 “쑥댕이”라고도 부른다. 이런 까닭에 그 후손들을 ‘쑥애(艾)’자를 써서 애당파(艾堂派)라고도 부르고 있다.
김구는 5남(익수, 극수, 득수, 정수, 순수)2녀를 남겼는데 둘째 아우인 김침(金琛)은 1남(취수) 셋째 아우인 김요(金瑤)는 3남(연수, 인수, 성수)을 각각 남겼다.
김구의 장남 김익수의 후손들은 입면 입석과 삼오리 등지에 그 후손들이 펄쳐저있다. 그는 중직으로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을 역임, 그 후손들은 동추공파(同樞公派)로 구분지어 부르고 차남 김극수(金克修 1561~1615)는 1590년 성균 생원시에 합격한 인물로 태인 허씨 가문의 도봉 허계(道峰 許繼 1527~?1561년 중사마시 합격)의 딸과 결혼 슬하에 아들 넷(홍기, 홍임, 홍서, 홍거)을 두었는데 그의 아들들의 활약으로 인해 옥과 지역에서 토호반열에 오를 개기를 더욱 공고히 한 것으로 여겨진다. 현재 그의 묘는 입면과 옥과면의 경계지역인 백련지 (일명 쌍방죽)위 야트막한 9만여 평의 경주김씨 세장산 가운데에 자리 잡고 있다.
첫째아들 김홍기가 후사 없어 둘째 아들 홍임의 둘째아들(김이정)을 양자(養子)로 후계를 이었다. 후손들은 대부분 겸면 현정리 삼기면 월경리 옥과면 주산리 등지에 거주하고 있으며, 금의리 종가댁이라 하여 ‘애당파(艾堂派)‘ 또는 ‘옥당공파(玉堂公派)’라 구분지어 부르고 있다. 둘째아들 김홍임(金弘任 1588~1623)은 호가 주효당(主孝堂)으로 그의 후손들은 모두 ‘주효당파’로 분류해 부르고 있다. 묘가 오산면 선세리에 있으며 그가 옥과면 수리(水里:물안실)로 이거해 간 후 그의 후손들은 대부분 옥과면 수리에 거주학고 있다. 김홍임이 금의리에서 현 옥과면 수리 마을로 이거해간 까닭은 그때까지 수리마을에 누대에 걸쳐 터를 잡고 살아온 여산송씨(礪山宋氏)가문으로 장가를 들었기 때문이다. 당시의 사회 습관상 흔히 있었던 사위가 처가로 들어가 사는 혼인 풍습에서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수리 마을은 예로부터 ‘송씨 1000년, 김씨 1000년의 터’라는 전설이 내려오는 마을이다. 현재 수리마을에 살았던 송씨들은 모두 이거해 가고 후손들은 아무도 없다. 이러한 연유로 인해 1970년대 까지도 경주김씨 가문에서 김구의 장모(丈母)의 묘를 관리하여 왔었는데 현재는 묘마저 이거해 간 상태이다. 셋째 김홍서 (金弘緖 1620~1674)는 숙부인 김취수에게로 양자를 들어 후계를 이었다. 친부인 김극수에 이어 1648년 28세에 성균관 진사시(進士試)에 합격, 가문을 빛냈다. 또한 그는 1636년 청나라가 조선을 침공한 병자호란 당시 의병을 모아 창의(倡義), 의병을 이끌고 청주에 다다랐으나 이미 화의가 이루어졌다는 소식을 듣고 돌아왔던 충의지사이다. 그의 후손들을 창의공파(倡義公派)라 칭하며 겸면 괴정리, 신흥리등지에 많이 거주하고 있다. 넷째 김홍거(金弘擧 1604~1663) 그의 후손들을 ‘처사공파(處士公派)’라 구분해 부르며, 그 후손들은 입면 매월리, 흑석리, 오산 가곡리, 등지에 많이 거주하고 있다.
3,역사적 인물과 유물 유적
옥과면 수리를 중심으로 입면, 오산면, 겸면, 삼기면에 세계(世系)를 펼쳐 온 김유간(金有澗)의 후손 현석공파(玄石公派)는 현재 크게 네 갈래로 파계(派系)가 정리되어 있다.
즉 김충한(수은공파)--김자—김유간(현석공파)--김일(장남)--김사웅(차남)--김구(장남)--김극수(차남)--김홍기 (애당파), 김홍임(주효당파), 김홍서(창의공파), 김홍거(처사공파)
상기한 4개 파를 제외한 세계(世系)는 후손들이 이어지지 못해 도중에 결손 되기도 하고, 양자(養子)를 들여 대를 이어오기기도 했으나 대부분 경기도 용인군, 경상도 하동군, 통영군, 사천군등지로 이거 해 나가 곡성 관내에는 그 후손들의 수가 매우 미미한 형편이다.
경주김씨 현석공파 (玄石公派)를 연 김유간의 후손들로써 맨 처음 문과에 합격한 인물은 김유간의 둘째 아들(김건)의 장남인 손자 김윤해(金潤海 : 世宗朝에 合格, 鍾城 府使 역임)이다. 그는 조선시대 들어 옥과현의 맨 처음 문과 급제자로 기록되어 있다. 또한 그의 차남인 김응서(金應瑞 正5品 通德郞 역임)가 중종조(中宗朝)에 있었던 성균 생원시험에 등과(登科)하고 있다.
그러나 그의 후손들은 모두 타 지역으로 이거해 나가 현재 곡성지역에는 대부분 거주하고 있지 않는 것으로 알려져 본 고에서는 논외로 하고자 한다.
현재 곡성지역에 세거를 펄치고 있는 경주김씨 현석공파 선대들의 경우, 선조조(宣祖朝)에 들어서야 비로소 김극수(金克修 1561~1590년 생원시 합격)와 김홍서(金弘緖 1620~1674,1648년 진사시 합격) 부자가 생원과 진사 시험에 합격함으로써 경주김문(慶州金門)이 누대에 걸쳐 옥과 사람의 중추에 자리 잡을 수 있었던 계기가 된 것으로 보인다.
이들은 모두 선대인 쌍향당(雙香堂) 김구(金玖 1519~1607)가 면학의 터전을 애써 가꾸어 놓은 토양에서 자라난 결정체인 것으로 보인다.
당시 유교적 시대상에 따라 비록 초시에 불과 하였다고는 하나 생원, 진사에 합격하였다 함은 희귀성 상징성에 따라 나름대로 가문의 영광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이로 볼 때 현석 김유간이 곡성지역과 인연을 맺은 후 5~6대 후손들에 접어들어야 비로소 경주김씨 가문이 중흥기적 대문을 활짝 연 계기가 마련된 것 같다.
김구(金玖)는 백호 임제 (白湖 林悌 1549~1587 : 문장과 시가 뛰어난 당대의 명 문장가, 기생 황진이 묘에서 제사를 지내고 시 한수를 지은 것으로 유명하다. 예조정랑 역임)와도 절친한 사이였던 것 같다. 입면 내동마을 외가댁에서 젊은 시절은 보냈던 임제는 지척지간에 살고 있었던 김구를 자주 찾았을 것으로 유추된다. 김구가 학문을 연마하고 손님을 맞이했던 집을 쌍향당(雙香堂)이라 불렀다고 전해온다. 임제가 직접 쓴 쌍향당기(雙香堂記)에 의하면, “정원에 매화(梅花)와 국화(菊花)를 가꾸어 놓아 이 집을 이름하여 쌍향당(雙香堂)이라 불렀다.”고 적고 있다.
또한 김구를 쌍향처사(雙香處士)라 불렀던 임제는 매화와 국화의 향기가 선비의 풍취를 더욱 드높인 쌍향당을 칭송하는 시문(詩文)을 한수 남기고 있다.
옥과 지역에 세거를 정한 후 1590년 맨 처음 성균 생원시에 합격, 후세들에게 학풍을 물들인 김구의 차남 김극수(金克修 1561~1615)가 당시 옥과 지역에 자리매김한 토호세력 중 하나인 태인 허 씨 가문의 도봉 허계(道峰 許繼 중종조 생원 합격)의 딸과 혼사를 맺어 더욱 가문이 공고해질 기틀을 마련하고 있다. 그의 묘소는 전에 언급한 바와 같이 입면과 옥과면의 경계지역인 백련지(일명 쌍방죽) 위 비탈진 9만여 평의 경주김씨 세장산 (연산등 白蓮嶝)가운데에 자리 잡고 있으며 그를 제사 지내는 제각(祭閣)즉 ,연산재(蓮山齋)가 그의 묘소로부터 500m거리인 입면 연지리 마을에 자리 잡고 있다. 그는 슬하에 김홍기, 김홍임, 김홍서 김홍거등 아들 넷을 두었다.
*첫째인 김홍기는 일찍 유명을 달리해 김홍임의 둘째 아들(김이정)이 양자를 들어 종손의 대를 이었으며 애당파(艾堂派)또는 옥당공파(玉堂公派 :옥과의 별칭인 옥당골에 거주한 후손들 중 入玉果한 제일 종가 댁이라 하여 붙여진 명칭)라고 부르고 있다. 그의 후손들 중에는 김일승(전 삼기면 면장), 김일현 (재일 교포 일본 平成 회장), 김일웅(영진화학 대표), 김동식(전 경신여고 교감), 김채정(전 법무부 갱생보호소 과장, 재광 삼기 향우회장), 김태정(전 농협 지점장), 김효정(상공부 사무관), 김기정(특허청 사무관)등이 있다.
*주효당파(主孝堂派)의 시조인 김홍임(金弘任 1588~1623)의 후손들은 대부분 옥과면 수리 마을에 자자일촌을 이루며 거주하고 있다. 김홍임의 묘소는 오산면 선세리 작산(鵲山) 자락에 자리 잡고 있으며 선세리 마을에 그의 재각인 작산재(鵲山齋)가 있다. 그가 옥과면 수리로 이거해간 후 그의 후손들은 대부분 옥과면 수리(물안실)에 거주하고 있다. 그의 후손 중 학행이 뛰어난 월계 김진(月溪 金縉)이 있으며 김진의 재각 월산재(月山齋) 1963건립)가 수리 마을 앞에 자리 잡고 있다.후손들중 김진호(전 옥과향교 전교), 김정욱(전 옥과 향교 전교), 김경욱(전 초등학교 교감), 김태영(전 광주 풍향동 새마을 금고 이사장), 김정수(서울시 환경보호과장), 김태훈(서울 현대증권 삼성지점장), 김태학(아시아나 항공 정비과장), 김영준(서울 지방법원 동부지원 근무), 김용욱(서울 강북구 의회의원), 김희창(변호사), 김순자(공인회계사),등이 김홍임의 후손들이다.
*김홍서(金弘瑞 1620~1674)가 숙부인 김취수에게로 양자를 들어 후계를 이었다.
친부인 김극수에 이어 1648년 28세에 성균관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했다. 또한 그는 앞에서 언급한대로 1636년 청나라가 조선을 침공한 병자호란 당시 의병을 모아 창의, 의병을 이끌고 청주에 다다랐으나 이미 화의가 이루어졌다는 소식을 듣고 돌아왔던 충의지사이다. 그의 후손들을 창의공파라 칭하며 겸면 괴정리 신훙리 등지에 많이 거주하고 있다. 후손으로 김성희 (전 입면 초등학교 교장) 김창희(전 초등학교교장) 김진우(전 초등학교 교장) 김문희(전 도로공사 순천지사장)등이 있다.
*김홍거(金弘擧 1604~1663)의 후손들을 처사공파(처사공파)라 구분 해 부르며 그 후손들은 입면 매월리 흑석리 오산 가곡리 등지에 많이 거주하고 있다. 후손들로는 김주환(곡성군청 과장), 김경욱(한학자) 김상욱(포항공대 교수) 김종인 (전 전남 교육위원)등이 있다.
옥과 지역의 경주 김씨들의 최고 상징적인 선대배향 공간은 금산재(金山齋)이다. 금산재는 옥과면 배감리 마을로 들어가는 초입에 자리 잡고 있는데 옥과의 진산인 설산으로부터 동쪽으로 흘러내린 산자락에 맺힌 금당산 옥녀봉 하단에 자리 잡고 있다. 금산재 입구에 ‘현석효자비(玄石孝子碑)’가 자리 잡고 있으며, 금산재 뒤쪽에 현석 김유간의 제사를 지내는 단소(壇所)가 마련되어 있다. 금산재 주변에는 그의 후손 김사웅(金士雄), 김희(金熹) 김구(金玖)등의 묘소가 자리 잡고 있다.
4, 경주김씨와 곡성종회
곡성군 옥과면 수리를 중심으로 입면, 오산면, 겸면, 삼기면에 세계(세계)를 펼쳐 온 김유간의 후손 “현석공파(현석공파)”들은 비록 후대에 내려 오면서 애당파, 주효당파, 창의공파, 처사공파로 나뉘어 후손들의 갈레를 파악하고 있으나 각 존파간에 각별한 교류가 여타 성씨들 못지않게 끈끈한 것 같다.
이들은 네 파계가 나뉘지기 직전의 선대를 받들어 성균생원공파라는 고리를 또하나 형성, 전체 문중을 대표하게 하는 지혜를 발휘하고 있다.
현석공파 대종중 위토답으로 32정보의 산과 4,000여평의 논이 있으며, 성균공파 위토답으로 옥과면과 입면 사이를 잇는 백련지 위쪽에 세장산 8,203평에 6홀의 골프장을 기안레저에 위탁 신설하여(2009~2011) “옥과CC”로 허가받아 영업중이다.
수은공파 대제는 음력 3월 5일, 현석공파 대제는 3월 6일, 성균생원공파 대제는 3월 7일로 연이어 열리고 있으며 각 계파별로 대제날 모여 정기 총회를 열고 있다.
종중 규약에 따르면 후손들에 대한 효행표창과 장학사업을 펼치기로 되어 있으나 아직 여건이 성숙되지 않아 실행에 옮기지는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김태공 2015년 받은글
첫댓글 성실이란 최선을 다하는 것이며 최선을 다함은 그 과정을 즐길수
있어야 되겠으며 성공할 수 있는 좋은 꿈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고통스러운 과정일지라도 내 마음안에 있는 나침판이 되어
길을 찾아 나가는 과정으로 행복이 찾아오게 되는 것이라봅니다.
삶의 성실하지 못하면 그 어떤것도 이루어질 수 없으며 자신에게도
단점이 될 뿐 장점은 될수 없고 그 어디 어떠한곳에 있더라도 성실이
근본이 되어야 함을 느껴 봅니다.
쉼없이 달려온 2019년 기해년이 오늘 그 마지막 역에 도착했습니다.
여기까지 오느라 모두 다 수고했습니다. 고생많으셨습니다.
이젠 지고 온 무거운 짐은 모두 내려놓고 다른 새 짐을 지셔야겠지요.
2020년엔 가벼운 짐으로 가볍게 출발하는 한해가 되셨으면 좋겠습니다.
새해엔 소망하시는 것 이루시는 뜻깊은 해가 되셨으면 합니다.
새해 복 듬뿍 받으시고 아픔이 없는 건강한 해가 되십시요.
경자년 올해는 나의 기쁨이요
너의 즐거움 뿐이다
지나간 과거는 모두 아름답게 여기고
앞으로 오는 미래의 시간표마다
아름다운 행복의 꿈을 그려 놓고
매일 동그라미 치며 사는 삶으로
인생의 즐거움이 넘치게 하소서.....!
존경하는 존중 회원님,
지혜 있는 사람은 지혜로 해결하려 합니다.
힘이 많은 사람은 힘으로 해결하러 합니다.
저마다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 하려고 하느냐가 바로 "그가 어떤 사람인가" 를 결정짓는다고 합니다,
가장 현명한 해결은, 돈, 힘, 지혜, 중에서 지혜가 가장 좋은 방법이 아닐련지요,
오늘도 지혜로운 하루 되시길 기원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98tFGsVaneM&t=252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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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youtube.com/watch?v=BmXR-KZKSkM&t=813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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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youtube.com/watch?v=_z0LLrjNLEA&t=259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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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youtube.com/watch?v=qqWGDZ8PohE&t=748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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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사공 장남 중하할아버지 수백에서 대가끊어져 옥당공 서자 장남 진수
처사공 양자들어옴 자식 많이 낯아 대를 이어 가다가 처사공 장자 다시원이치
옥당공으로 감으로 처사공 대는 끝어진 상태입니다
처사공할아버지후손이 6형제인데요 3형제 3파만 제사에 참여하는데
1남번째 중하할아버지 손은 끝어져 가짜들이 들어옴 지금 중하파 어떤분은
가곡문중은 들어온 붙이기라해서 제가 그말 책임질수있냐고 항의하였음
3남 쪽은 잘모르겠으나 항열이 높은 어떤사람은 문중에서 회장직을 2개나 하고있음
현석공 카톡방에 그분이 가짜붙이기라고 어떤종원이 그사람
올린 족보 대다수보고있는 카톡방에 올리면 당사자가 항의를하며 아니다고 반론을 해야 하는데
못한것을 보면 당사자가 붙이기 들어온사람으로 인정하는것 처사3남 간부가 붙이기
들어온사람이면 여기문중도 확실한 후손인지 아닌지 족보 확인필요
5오남 가곡문중 12대중화할아버지 후손 많이 피를이어받은 참
후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