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을 공포에 떨게 한 아틸라도 더 무서운 ‘기후변화’에 떠밀려 왔다 공원국 -역사인류학자
경향신문 2019.04.23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904232150005&code=960100
거시(巨視) 세계사 연구는 기폭장치 수천 개가 서로 연결된 집적회로를 해체하는 일과 비슷하다. 세월과 무지의 덮개 탓에 서로 무관해 보이는 사건들이지만, 하나를 잘못 건드리면 전체가 폭발한다. 지구라는 인류의 터전에서는, A는 B를 촉발하고, 이어 B는 C를 촉발하고, C는 다시 A'의 뇌관을 건드린다. 다행히 우리는 이렇게 복잡한 회로를 헤쳐 나간 선인들의 선택 기준이 선악(善惡)이 아니라 생사(生死)였음을 점점 깨닫고 있다.
인간 사회를 추동한 힘은 분명 순백의 이타심과 선의는 아니었지만, 끝없는 탐욕과 살의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인간이 역사를 이끌어가기에, 마치 물리법칙처럼 분명한 사회적 법칙이 두 개 보인다. 작용반작용의 법칙과 확산의 법칙이다. 쇠를 때리는 순간 망치는 튀어 오르고, 쇠는 맞으면서 더 강해진다. 그리고 기압이 낮은 곳으로 바람이 불 듯 공백이 생기면 순식간에 사람이 밀려 들어온다. 역사 연구가 심화될수록 인류는 이 지구적인 연쇄반응의 무서움을 깊이 알아갈 것이다.
■ 떠남으로써 싸움을 막다
서력 91년, 후한의 장군 두헌(竇憲)은 남(南)흉노 선우 둔도하(屯屠河)의 요청에 응하여 강(羌)인 기병과 한나라 군대를 이끌고 알타이에서 북(北)흉노의 선우를 쳤다. 이때 흉노 측에서 참살된 이가 무려 1만3000명, 전투 전후로 투항한 이가 무려 81부 20만에 이르렀다고 한다. 한의 기병이 초원에서 성공했던 이유는 한때 흉노에 눌려 있던 동호 계열의 선비(鮮卑)와 오환(烏桓)이 이미 북흉노에 궤멸적인 타격을 주었기 때문이다. 북흉노의 시절은 이렇게 막을 내렸지만, 그중 핵심 집단은 알타이를 넘어가 천산산맥에서 흑해에 이르는 광대한 초원지대를 돌아다니며 여전히 제국의 후예 행세를 했다.
그로부터 10년 후 로마의 황제 트라야누스는 다뉴브강을 잇는 다리를 만들어 다키아(오늘날 루마니아)를 침공하여 제국의 판도를 최대로 넓혔다. 전쟁 포로 5만은 로마로 보내 검투사로 만들거나 노예로 팔아버리고, 그 땅에 로마 식민지를 세웠다. 다뉴브 하안에 들어선 식민도시들은 앞으로 로마의 번영을 지켜주는 철옹성이 될 듯했다. 감당하기 힘든 전비를 지출했지만 다행히 다키아는 황금 광산이 널린 땅이었다. 100년 전 로마의 첫 황제 옥타비아누스가 이집트에서 빼앗은 재물로 내전으로 황폐해진 제국을 재건했던 때처럼 이번에도 운이 따랐다. 게르만계 민족이 끊임없이 라인과 다뉴브에 걸친 기다란 국경을 넘어왔지만, 받아치고 매수하고 때로는 흡수하며 로마는 200년간 그럭저럭 버텨냈다.
하지만 4세기 중후반부터 훈(Hun)이라 불리는 집단이 동쪽에서 밀려올 때의 상황은 이전과는 완전히 달랐다. 겁에 질린 게르만계 민족들은 이 무서운 세력에 밀려 홍수처럼 강을 넘어와 정착할 땅을 요구했다. 죽이고 죽여도 밀려드는 이민족 이동의 홍수 속에 서로마 제국은 결국 익사하고 만다. 특히 훈의 마지막 우두머리 아틸라는 흉포함에 군사·외교적인 실력까지 갖춰 “신의 채찍”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가 만약 신방에서 갑자기 죽지 않았더라면 유럽의 역사가 어떻게 변했을지 모르는 일이다. 도대체 이들은 어디에 있다가 이렇게 갑자기 몰려든 것일까?
일단 로마, 그리스, 인도인은 이 유목민들을 훈이라 불렀고, 오아시스 상인들은 흉노를 훈이라 불렀으므로, 이들이 흉노 연합의 일원을 자임한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그런데 북흉노가 200년이 더 지난 지금 갑자기 동서 로마의 국경에 등장한 이유는 무엇인가. 근원은 분명 중국 변경이었지만, 시간과 논리의 간극을 먼저 메울 필요가 있겠다. 우선 당시의 상황을 정리해보자.
북흉노가 몽골 고원에서 쫓겨나자 그 공백을 선비 부락 연맹이 채웠지만, 연맹은 이내 붕괴했다. 연맹이 붕괴하자 탁발, 우문 등 일부 씨족은 고비 남쪽을 향해 이동했고, 유연(柔然) 부족이 여러 선비 세력을 규합해 유목국가를 세웠다. 대거 남하한 남흉노는 중원의 내란을 이용해 한족의 진(晉) 왕조를 남쪽으로 쫓아내고 화북에 나라(漢->趙)를 세운다. 이어 흉노 외에도 온갖 유목민 출신 모험가들이 화북에서 군소국을 세우니 이른바 오호십육국(五胡十六國)이다. 이것이 대략 4세기 중국 변경의 지형이었다.
우리는 앞서 진(秦)이 오르도스에서 흉노를 밀어내면서 결국 월지(月氏)가 머나먼 이동을 시작한 것을 보았다. 유목사회에서 피정복 부족은 새로운 우두머리를 재빨리 인정하는 것이 보통이지만 새 땅을 찾아 떠나는 경우도 많다. 예컨대 금에 밀린 카라 키타이는 멀리 중앙아시아에서 셀주크 투르크를 밀어내고 나라를 세웠고, 토르구트 몽골은 내란을 피해 볼가 초원으로 옮겼다.
서방에서 훈이 등장하던 시기 모용(慕容) 선비의 토욕혼(吐谷渾)이 요하 일대에서 저 멀리 서쪽 청해(靑海) 일대로 이동한 원인이 <진서(晉書)>에 기록되어 있다. 토욕혼은 모용부의 승계자 모용외의 배다른 형으로 따로 1700가를 거느리고 있었다. 하루는 토욕혼 부의 말과 모용외 부의 말이 싸워 모용외가 형을 나무랐다. “선공(아버지)께서 따로 봉분해주셨는데, 어찌 멀리 거하지 않고 말끼리 싸우게 하시오.”
토욕혼이 대답했다. “말은 축생이니 싸우는 것이 본성인데 어찌 사람에게 화를 내십니까? 멀리 떨어지는 건 쉽습니다. 내 응당 만리 떨어진 곳으로 가리다.”
유목사회의 피정복 부족은 새 땅을 찾아 떠나는 경우 많아 이동기에 밀려온 유목민들은 생존 위해 야만적이고 잔인해져
이렇듯 혼란기에는 겨우 몇천을 거느린 작은 부족도 충분히 장거리 이동을 할 수 있다. 대외 투쟁이 격렬한 시점에 계승 분쟁이 벌어지면 부족이 멸망할 것이므로 토욕혼은 떠남으로써 싸움을 막고자 했다. 두 부락의 말이 서로 싸웠다는 것은 남쪽으로 내려온 유목 부락들 사이의 거리가 그만큼 좁았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물론 토욕혼이 기련산 일대로 들어갔을 때, 원래 거기 있던 강인들과 소월지 일파는 또 어디론가로 떠나야 했을 것이다. ■ 거대한 이동을 몰고 온 기후변화
이동기에 밀려온 유목민이야말로 가장 야만적이고 잔인하다. 생존을 위해 그들에게 필요한 이는 아틸라와 같은 전사다. 인도의 고전 쉬라우타 제의(祭儀)의 정점인 마제(馬祭·아쉬바메드하)는 독특한 사전 절차를 따른다. 연초면 연말에 희생될 종마를 풀어주고 그 말이 가는 곳마다 군주의 호위병들이 따르며 가로막는 부족이 있으면 무조건 싸운다. 싸움에 도덕적인 설명은 필요 없다. 자신의 말이 돌아다니는 범위 안에는 누구도 들어오지 말라는 경고다. 바꿔 말하면 양측의 말이 서로 싸울 거리에 있다는 것은 서로 충분한 공간을 두지 못했다는 뜻이다. 서방에서 아틸라는 신의 채찍이었겠지만 그 또한 밀려서 서쪽으로 갔을 것이다. 그들을 밀어낸 요인은 정치와 자연환경의 복합물이었던 듯하다.
이동한 지역의 토착부족들은 또 어디론가 떠나는 연쇄 이동 훈족을 피해 밀려온 게르만족에 결국 서로마의 멸망까지 이어져
유연이 몽골 고원을 차지했지만, 똑같은 유목민 출신들이 세운 데다 하루가 멀다하고 서로 싸우며 전투 기술을 익힌 남쪽 나라들은 유연을 무서워하지 않았다. 특히 훗날 화북 전체를 통일하는 북위(北魏)는 수시로 북방으로 원정하여 유연이 감히 넘볼 틈을 주지 않았다. 국가를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다양한 자원을 중국에서 얻지 못할 때, 눈을 돌릴 곳은 서쪽 반건조 지대의 오아시스들이다. 유연은 서쪽으로 눈을 돌렸고 걸림돌이 되는 세력을 밀어냈다.
<북사·서역전>에 키다라(寄多羅)라는 민족이 유연에 밀려 박트리아로 들어갔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유연이 천산 넘어 산악지대에 있는 키다라를 압박한 것은 시르다리아와 아무다리아의 거대한 오아시스에 접근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이때가 바로 훈이 서방 압박을 개시하던 시기였다. 이어 역시 월지의 지파인 에프탈이 같은 길을 따라 내려가 다시 키다라를 멸망시킨다. 그리고 이때는 아틸라가 로마를 풍전등화로 몰아넣던 시기다. 이제 훈이 서쪽으로 이동한 정치적인 원인은 대략 밝혀졌다. 서쪽의 키다라-에프탈과 동쪽의 유연이 천산 서부의 오아시스를 두고 경합한다면 그사이에 다른 집단이 끼어들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때마침 서남쪽에는 노쇠한 파르티아 대신 호전적인 사산 왕조가 들어서 유목민의 서남진을 가로막고 있었다. 여기서도 키다라-에프탈은 다시 사산왕조와 경쟁하거나 연합하며 다른 유목민들이 남쪽 오아시스로 접근하는 것을 막는 방벽이 되었다. 그러니 나머지 유목 부족들은 오아시스 도시들에 대한 접근권을 상실한 채 서쪽으로 길을 틀었을 것이고, 이 물결에 훈도 휩쓸렸을 것이다.
하지만 유연-키다라/에프탈에 의한 오아시스 접근권 차단만으로 노도와 같은 유목민들의 이동이 다 설명되지 않는 듯하다. 비록 작지만 교역을 할 도시들은 상기의 강적 권역 밖에도 있었다. 서쪽의 부에 이끌렸던 것일까?
훈족이 서쪽으로 이동한 것엔 극단적 가뭄도 작용했을 가능성 최근 시리아의 난민 문제도 일차적인 이유는 내전이지만 더 깊은 곳엔 기후변화가 요인
오래전부터 서방 학자들은 3~4세기 이상 고온을 로마 변경의 민족 이동 원인의 하나로 보고 연구해왔다. 그러나 기온과 강수량은 해마다 편차가 대단히 크고, 또한 내륙 아시아의 기후변화를 관측한 자료도 부족했다. 그러던 차에 근래 중국 청해성 둘란(都蘭)-울란(烏蘭)에서 2000년 이상 된 향나무 나이테를 통해 본 강수량 추정 자료가 등장해서 주목을 끌었다.
결론은 서력 338년에서 377년까지 40년 동안 이 지역에 극단적인 가뭄이 있었다는 것이다. (구체적인 내용은 마이클 매코믹(Michael McCormick) 외, “Climate Change during and after the Roman Empire: Reconstructing the Past from Scientific and Historical Evidence”, Journal of Interdisciplinary History, xliii:2 (Autumn, 2012)참고). 이 나무가 서 있는 지대가 바로 한때 월지인이 살았던 초원 언저리다.
훈은 375년 무렵 볼가강을 넘어 동유럽으로 들어간다. 천산과 알타이 일대의 상황이 이와 비슷했다면, 이 엄청난 가뭄은 충분히 민족 이동의 원인이 될 수 있다. 전체적으로 유목민들은 좀 더 습한 남방으로 향했을 것이고, 남쪽으로 접근할 수 없는 이들은 유럽을 선택했을 것이다. 아직 가정에 불과하고 훨씬 많은 자료가 쌓여야 판단할 수 있겠지만, 정치적인 상황과 자연재해가 동시에 닥쳐와서 훈이 서쪽으로 밀려갔다면, 이 무자비한 신의 채찍에게 약간의 연민을 품을 수 있을 듯하다.
그런데 로마 변경은 왜 그렇게 쉽게 뚫렸을까? 다뉴브나 라인 국경은 마치 동방의 장성처럼 날카롭고 단단했지만 그만큼 얇았다. 훈이 다가올 때 다뉴브를 건너 로마로 피란 온 이들도 있고 칼을 들고 새 땅을 뺏으러 온 이들도 있지만, 강 건너의 엄청난 인민이 훈의 편에 붙어버렸다. 카이사르부터 시작하여 무자비한 살육과 회유를 병행하며 식민지를 만들었지만, 그 결과 라인과 다뉴브 일대의 완충지대가 사라져버린 셈이다. 이곳이 완충지대로 남았다면 한때 갈리아인들이 게르만에 맞섰듯이, 삼림지대의 자유민들은 처음부터 훈에 맞서 싸웠을 것이다.
3년 전 터키 남부 시리아 난민촌 가까이서 이미 아내를 둘 둔 어떤 아랍인에게 직접 들은 이야기다. “1000달러면 (난민촌에서) 가장 젊고 예쁜 여자를 마음대로 살 수 있어. 돈을 모아 살 거야.”
터키는 품이 넓어 언어도 통하지 않는 100만 이상의 난민을 받아들였다. 돈으로 동족을 사겠다는 친구가 밉살스러웠지만, 누군가는 난민촌을 나서면서 그에게 고마워할지도 모르겠다. 그들이 고향을 떠난 일차적인 이유는 내전이지만, 깊은 곳에는 기후변화라는 더 무서운 요인이 숨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