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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속불가능 자본주의』의 저자 사이토 고헤이(이하 고헤이)는 어느 인터뷰에서 자신의 일상과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밝힌 바 있다. “학교 일이나 연구 말고 하는 일은? 사생활에서는 육아로 정신이 없다. 아이들과 놀거나 텃밭을 짓거나 여행을 가거나 한다. 앞으로 계획은? 일본어로는 올해 마르크스의 <자본> 입문서를 출간한다. 그 뒤 <지속 불가능 자본주의>에서 펼치지 못했던 화폐와 국가의 문제를 탈성장과 관련지어 생각해보려 한다.”(「경향신문」, 2022년 10월 6일자 기사 참고)
“인류 존속을 위해선 ‘격차’와 ‘환경’을 동시에 해결해야”한다고 주장하며 “‘마르크스 연구’에서 기후⋅경제 위기 해법 찾는” 고헤이의 인터뷰에서 ‘일상’과 앞으로의 ‘계획’에 대한 답변이 눈에 들어왔던 이유는 그가 ‘실제로’ 어떻게 살고 있는지,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가 궁금했기 때문일 것이다.
모든 이론이 자신만이 정답일 수 없듯이 맑스의 이론도 고헤이의 이론도 논쟁과 검증이 필요할 것이다. 하지만, 고헤이의 일상적인 삶은 따라하고 싶고, 권하고 싶은 삶이기도 하다. 육아, 텃밭 짓기와 같은 사람과 자연을 돌보는 노동, 여행(그에게 여행의 의미가 무엇인지 궁금하다), 자본주의의 문제에 대해 생각하고 연구하며 그 결과물을 책으로 쓰기.
만국의 노동자들, 청년에서부터 노년에 이르기까지 고헤이의 삶은 권장할 만 하다고 여긴다. 특히, 한국과 같은 경제수준과 학력수준을 가진 노동자들이라면 충분히 가능한 삶이라고 여긴다. 전문 연구자인 고헤이와 경제 여건에 따른 처지가 다르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노동자들이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가능한 만큼의 고헤이와 같은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자본론』을 자신의 눈으로 읽고 그에 대해 스스로 생각하며 동료들과 토론하고 자신의 언어로 써보는, 그리하여 마침내, 자신의 『자본론』을 쓰는 것은 우리의 삶을 규정하는 자본주의에 대해 알고 살아가며 다른 사회 더 나은 사회를 살아보기 위해 한 개인의 삶의 일부분으로서 중요한 작업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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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후위기와 코로나 팬데믹, 경제위기의 원인인 자본주의의 지속 불가능성에 대해 밝히는 고헤이의 자본주의에 대한 대책은 ‘속도’와 관련이 있다. ‘생명과 안전’보다 경제 성장을 우선하는 전 지구적인 개발과 파괴가 ‘위기’의 원인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인명이냐, 경제냐’ 하는 딜레마와 직면하면, 경기 악화를 이유로 근본적 문제 해결이 뒷전으로 밀린다”(지속278)는 것이다. 고헤이는 “대책을 늦출수록 더욱 큰 경제 손실이 발생한다. 물론 인명도 잃을 것”(지속278)이라고 쓰고 있다.
고헤이는 늦은 대책도 문제지만 빠른 대책도 문제라고 주장한다. 2020년 중국, 유럽 각국, 한국이 코로나 위기에 빠르게 대응하는 과정에서 국가폭력이 발생했다는 것이다. “국가권력을 휘둘러 위에서 억누르는 방식”, “도시를 봉쇄하고 사람들의 행동을 규제·감시하여 지시를 따르지 않는 사람들은 엄중하게 처벌한 것”, “개인의 사생활 노출을 감내하며 디지털 기술을 활용해서 감염 확대를 방지”한 것, “위기가 심각해질수록 국가의 강한 개입과 규제를 전문가들이 요청하며, 사람들 역시 자유의 제약을 받아들인다는 것”이다.(지속279)
고헤이는 늦든, 빠르든 위기의 시대에는 최종적으로 국가권력이 노골적으로 나설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한다. 고헤이는 그 이유를 ‘신자유주의’에서 찾는다. “1980년대 이후 신자유주의가 사회의 온갖 관계를 상품화하고, 상호 부조하던 관계마저 화폐⋅상품 관계로 바꿔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가 그런 변화에 너무 익숙해진 탓에 상호부조의 요령도 상대를 헤아리는 마음가짐도 몽땅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위기에 직면해 불안해지면 사람들은 이웃이 아닌 국가에 의존하게 되었다. 위기가 심각할수록 국가의 강력한 개입 없이는 자신의 생활을 꾸리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지속281)
고헤이의 주장은 수십 년에 걸쳐 진행된 ‘자본독재국가권력의 전 지구화’라는 오늘에 대한 진단을 연상시킨다. 자본주의 생산방식의 과정이자 결과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는 ‘사회의 온갖 관계를 상품화함으로써 상호부조의 요령도 상대를 헤아리는 마음가짐도 잃어버렸다는 것’은 신자유주의가 자본독재를 가속화 한 결과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위기에 직면해 불안해지면 사람들은 이웃이 아닌 국가에 의존하게 되었다’, ‘위기가 심각할수록 국가의 강력한 개입 없이는 자신의 생활을 꾸리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라는 주장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위기가 닥쳤을 때, 사람들이 이웃이 아닌 국가에 의존하는 것, 국가의 강력한 개입을 요구하는 것이 문제인가, 국가의 개입이 폭력을 야기하는 것이 문제인가.
만일, ‘상호부조 할 이웃공동체’가 건재해서 위기에 대처할 수 있다면 위기에서 국가에 대한 의존도가 높지 않을 것이고, 국가의 강력한 개입과 폭력은 발생하지 않을 것이라고 고헤이의 주장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국가에 의존하더라도 국가가 강력하게 개입하더라도 국가폭력은 발생하지 않는 그런 국가라면 문제가 될 것이 없다고 주장할 수 있을까.
그러한 가정들 앞에 놓인 오늘의 지구 현실은 이웃공동체도 非자본독재국가도 그 존재감이 미미하다는 것이다. 그러한 현실 앞에서 이웃공동체의 복원과 ‘노동자국가’와 같은 非자본독재국가를 ‘지금, 여기’에서부터 지구 곳곳에 세워가야 한다는 결과에 도달하게 된다. 노동자정치와 같은 방식을 통해 이웃공동체를 복원해 나가면서 ‘노동자국가’를 세워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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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의 현실 앞에서 고헤이가 도달한 결과는 ‘감속주의deaccelerationism’를 통한 ‘탈성장 코뮤니즘’이다. 고헤이가 감속주의를 주장하는 가장 큰 이유는 ‘생산력 지상주의’ 때문이다. 경제성장을 위해서 무분별하게 자연을 개발하고 파괴한다는 것이다. 그의 주장이 생산력증대와 개발 자체를 반대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생산력증대는 자본주의의 필연적인 발전법칙이라는 점에서 그 자체를 반대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닌 것이다. 생산력을 증대시키되 ‘열린 기술’을 통해 무분별하게 자연을 파괴하지 않는 생산 방식을 주장하는 것이고 그것의 핵심이 생산력 발전의 속도를 늦추는 ‘감속주의’인 것이다.
그는 감속주의가 자본주의 생산방식의 속성인 ‘가속주의accelerationism’에 反한다는 점에서, 즉, 감속으로는 자본주의 생산력 발전의 속도를 맞출 수 없다는 점에서 자본주의에 반대하면서도 자본주의가 몰락하도록 내버려 두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연의 물질대사에 적합한 생산방식을 주장하는 것이다. 그러한 감속주의적인 생산방식이 자본주의의 몰락을 막으면서도 지속가능한 사회로 전환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탈성장 코뮤니즘’은 그가 주장하는 생산방식의 사회인 것이다.
고헤이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20세기의 마르크스주의는 만년기 마르크스의 도달점에 눈길을 주지 않으며 사회주의만 실현되면 노동자들이 기술과 과학을 자유롭게 이용하여 자연적 제약도 뛰어넘을 수 있다고 낙관했다. 기술로 ‘물질대사의 균열’을 메울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런 생산력 지상주의는 잘못된 것이며 마르크스가 만년에 했던 생각과도 다르다. 지금껏 진보사관에 속박되어 있었던 마르크스의 [자본]을 ‘탈성장 코뮤니즘’이라는 입장에서 다시 읽을 필요가 있다.”(지속296)
위기의 현실에 직면한 오늘 고헤이는 ‘탈성장 코뮤니즘’이라는 자신의 입장에서 『자본』을 다시 읽을 필요성을 제기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필요성에 대한 인식이 고헤이만의 것은 아닐 것이며, 다시 읽은 결과가 ‘탈성장 코뮤니즘’이어야 할 이유도 없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자본』을 다시 읽고 논쟁하며 위기에 대한 해법을 찾아간다는 사실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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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헤이는 ‘탈성장 코뮤니즘’의 구상을 크게 다섯 가지로 정리한다. “‘사용가치 경제로 전환’, ‘노동 시간 단축’, ‘획일적인 분업 폐지’, ‘생산 과정 민주화’, ‘필수 노동 중시’”가 그것이다. 고헤이는 자신이 주장하는 바의 핵심을 다음과 같이 밝힌다. “경제 성장을 감속하는 만큼 탈 성장 코뮤니즘이 지속 가능한 경제로 전환을 촉진한다”, “감속은 가속밖에 하지 못하는 자본주의의 천적”이기 때문에 “끝없이 이윤을 추구하는 자본주의에서는 자연의 순환과 속도를 맞출 생산이 불가능하다”, 그러니 “‘가속주의accelerationism'가 아닌 ’감속주의deaccelerationism'야말로 혁명적인 것이다.(지속297)
고헤이가 구상하는 ‘탈성장 코뮤니즘’에 대체로 동의하면서도 의문들은 있다. 그런데, 그 의문들은 한 가지로 수렴된다. ‘누가, 어떻게’ ‘탈성장 코뮤니즘’을 실현할 것인가라는 것이다. “‘사회적 소유‘를 실현해 생산수단을 ’커먼‘으로서 민주적으로 관리해야 한다”(지속307)거나, “이익보다 보람과 상호부조를 우선하”(지속306)는 ’노동자협동조합‘이라는 표현들에서 고헤이가 생각하는 ’누가, 어떻게‘에 대한 해답을 찾을 수 있다.
그럼에도, ‘누가, 어떻게’에 대한 의문이 계속 찾아드는 것은 앞서도 언급했듯이 ‘자본독재국가권력’이 지배하는 전 지구적인 현실 때문일 것이다. ‘생산수단’을 누가 ‘사회적 소유’로 실현할 것이며, ‘커먼’으로서 민주적으로 관리할 것인가. 성장지상주의의 ‘자본주의 생산방식’에 의해 굴러가는 전 지구적인 ‘자본독재국가권력’이 자발적으로 생산수단을 사회적 소유로, 커먼으로서 민주적으로 관리할 일은 없을 것이다. 자본주의 생산방식에 내재한 법칙이 아닌 것이다.
그럼에도, 전 지구적인 요구와 요청을 통해서 생산수단을 사회적 소유로 전환하여 ‘커먼’으로서 민주적으로 관리하려 노력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럴 경우에도 ‘주체’는 누구인지 묻게 된다. ‘자본독재국가권력’에 의해 직접적으로 고통 받고 있는 노동자들이 국가의 성격을 ‘노동자국가’로 전환하지 않는 한, 그러한 요구와 요청이 거부되거나 자본가계급의 이윤 증식에 방해가 되지 않는 한에서의 ‘사회적 소유’에 그치기 십상일 것이다.
‘노동자협동조합’의 경우에도 ‘자본독재국가권력’의 지배가 전 지구적이라는 점에서 글로벌 동맹 권력을 그대로 둔 채 ‘보람 있는 상호부조’가 언제까지 얼마나 지속되고 확장될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생산수단의 ‘사회적 소유’와 ‘노동자협동조합’을 확장하려는 노력이 무의미할 리 없을 것이다. 다만, 그러한 노력과 함께, 그러한 노력을 통해서도 ‘노동자국가’로 국가의 성격을 전환시켜 갈 수 있어야 할 것이다.(영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