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실공화국
- 와우아파트 붕괴
아파트가 주거형태의 주류로 자리잡기 전
50~70년대 서울은 단층 위주의 나지막한 스카이라인,
도로변의 상가와 상가 뒤 주택지역,
길인가 싶으면 막혀있고, 막혀있는가 싶으면 이어져있는
구불구불한 뒷골목,
판자로 다닥다닥 붙어있는 산동네로 설명되어집니다.
경제개발, 도시로의 인구 유입, 그에 따른 과밀현상,
주거면적의 제한.....
당연히도 아파트와 같은 인구를 대량으로 수용할 수 있는
대단위 건축물의 필요성이 커졌습니다.
정부에서는 도심의 골칫거리인 판자촌을 헐고
그 자리에 시민아파트를 짓고자 했으나 여의치 못했습니다.
당시 도시 개발의 가장 큰 장애물은 재정부족이었습니다.
이런 현실에서 하나의 해결책을 제시한 인물이
당시 서울시장이었던 김현옥이었습니다.
그는 토지구획정리사업이란 묘수를 찾아냅니다.
토지구획정리사업은 환지방식으로 이루어졌는데,
토지를 정부의 재정지출 없이 무상으로 수용한 후
정지(토지정리)된 토지를 되돌려주는 방식입니다.
되돌려줄 때는 40%의 감보율을 적용하여
일단의 공유지를 조성하였는데,
이렇게 조성된 토지를 체비지라 합니다.
체비지를 일반인에게 매각하여 정지비용을 대신하고,
나머지 토지에 도로와 공공시설을 설치하는 방식이었죠.
정부로서는 재정지출에 대한 부담이 적고
개발이익이 토지소유자들에게 귀속되어 수용방식에 비해 반발이 적었습니다.
이후 토지구획정리사업방식은
70년대 서울의 도시빈민가 재개발의 주된 방식이 됩니다.
김현옥 시장 당시 전수조사 결과
13만 6,650가구가 무허가건물로 집계되었습니다.
이 중 4만 6,650가구는 현지 개량하여 양성화하고,
나머지 9만가구는 철거하고 그 자리에 3년간
시민아파트 2,000개동을 짓겠다는
대대적인 시민아파트 건립 계획이 발표됩니다.
이 계획에 따라 1968년 6월 18일,
최초의 시민아파트단지인 금화시민아파트를 시작으로
1970년 시민아파트 건립계획이 중단되기 전까지
총 447동, 2만 가구분의 아파트가 건설되었습니다.
낙산시민아파트, 동숭시민아파트, 노량진시민아파트, 회현시민아파트 등도
이때 지어진 시민아파트입니다.
김현옥은 준장으로 예편한 군인출신으로
지휘봉을 잡고 전투지휘를 하듯 공무원들을 다그치는 모습으로 유명하여
불도저 김으로 불렸습니다.
청계천을 복개하여 광화문에서 동대문으로 이어진 대로를 놓고,
밤섬을 폭파하여 여의도 개발을 이끌어내고,
서울 최초의 지하도 세종로 지하도를 건설한 당사자입니다.
아이러니한 점은,
복개된 청계천은 후에 당시 이명박 시장에 의해 뜯겨지고,
폭파 직후 거대한 폭음과 함께 치몰했던 밤섬은
자연의 복원력으로 폭파 전보다 더 우람한 모습으로
물 위로 떠오른 일입니다.
<밤섬 폭파장면>
<침몰 이전보다 6배 커진 우람한 모습으로 융기한 밤섬의 현재 모습>
세종로 지하도는 우리에게는 광화문 지하도로 더 알려져있죠.
교보문고로 이어진, 광화문 네거리에 횡단보도가 없던 시절
대로를 건너다니던 유일한 통로
<준공 직후 세종로 지하도 입구 모습>
10월 1일 국군의 날 퍼레이드에 맞춰 공사를 강행한 결과
폭 17미터, 총길이 154미터, 640여 평에 달하는 지하도가
불과 5개월여 만에 완공됩니다. 그 뒤에 따라붙을 단어는,
부실시공!
준공 직후부터 물이 새어나와 벽면을 뜯어내야 했고,
13년 동안 입구 개축과 지하철공사 누수 등으로
거의 매일 보수공사가 이어졌습니다.
이때부터 슬레이트만큼이나 치명적인,
우리나라의 오랜 고질병이 된
부실시공이란 괴물이 똬리를 틀기 시작합니다.
1970년 4월 8일, 이른 새벽
와우산 꼭대기에 세워진 시민아파트 중 한 동이
굉음과 함께 붕괴합니다.
마치 다이너마이트로 폭파한 듯 기둥하나 남지 않고 폭삭 주저앉아버립니다.
입주 예정이었던 30가구 가운데 먼저 입주한 15가구 주민 중
33명이 압사로 숨졌고, 38명이 부상을 입었습니다.
무너진 잔해가 굴러 산 아래 있던 판잣집을 덮쳐 1명이 숨지고 2명이
부상을 당하는 추가적인 피해도 발생합니다.
<와우아파트 15동 기둥 하나 남아있지 않고 폭삭 주저앉은 모습>
어떻게 지은지 4개월밖에 안 된 아파트가 붕괴됐을까?
이 사건은 세계적인 이목을 끌었고,
우리나라는 국제사회에서 부실 공화국이란 낙인이 찍힙니다.
불도저식 행정과 부실시공이 원인이었습니다.
와우아파트는 1969년 6월 26일에 착공해 그해 12월 26일 완공됐으니
6층 19개동이 불과 6개월 만에 지어진 겁니다.
그것도 산꼭대기에.
비단 와우아파트뿐 아니라 김현옥 시장은
산꼭대기에 아파트를 즐겨 지었습니다.
그리고는 이름을 ‘서민 아파트’라고 지었습니다.
건설 공법도 시원찮은 시절에 산꼭대기에 아파트를 짓다보니
인명사고도 잦았습니다.
'왜 저런 가파른 곳에 아파트를 짓느냐'는 구청공무원의 질문에
김현옥 시장이 한 답변은 유명합니다.
"야 새끼들아. 높은 곳에 지어야 청와대에서 잘 보일 것 아냐!"
하기사 높은 건물이 없던 시절이었으니,
와우산 꼭대기에 지었던 와우아파트는
청와대에서 잘 보였을 겁니다.
그런데 와우아파트가 붕괴되면서 통치권자의 눈에 들려 했던
김현옥 시장의 야심도 한꺼번에 무너집니다.
와우아파트 붕괴는 예고된 재앙이었습니다.
1개 동에 1,200만원의 비용이 들어가야 했지만
경험 없는 업체가 계약을 따내 커미션만 챙기고
시공은 무허가 업체에 맡기는 과정에서
실제 건설비용은 1개동 660만원이었습니다.
무너진 15동의 설계상 건물 하중은 당 280㎏인데
실제 하중은 900㎏으로 당 600㎏ 이상 초과되어 있었습니다.
70도 경사진 산비탈에 세워진 와우아파트는
무게의 3/4을 차지하는 앞쪽에 기둥 7개만 박아서 기초를 삼았으며,
기둥 하나에 19mm 철근 70개가 들어가도록 설계됐는데
실제로는 5개밖에 쓰지 않았습니다.
시멘트는 넣는 시늉만 내어 콘크리트라기보다는
모래와 자갈의 반죽에 가까웠고,
기둥은 암반이 아닌 부토(敷土) 위에 깊이 2m로 세워졌습니다.
결국 해빙기인 4월에 지층이 내려앉아 건물이 무너지고 맙니다.
시공사인 대룡건설(주)이 맡은 제3공구 13동, 14동, 15동, 16동 중
15동은 무너지고, 나머지 3개동도 입주하기 전에 철거됩니다.
그리고 붕괴 초기 떠들썩했던 언론은 일제히 입을 닫습니다.
와우아파트 붕괴 사고는 부실시공이 원인이었지만
시민들은 아파트라는 건물 자체의 결함이 빚어낸 결과로 받아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