支齋遺集 : 스승과 벗들의 삶을 담아낸 책 한 권 가끔 생각지도 않게 흥미롭거나 가치 있는 책을 만난다. 요사이 출간된 책에서도 때때로 그런 경험을 한다. 하지만 전혀 기대하지 않은 고서를 만나는 기쁨에 비할 바가 아니다. 필자처럼 고서를 다루는 사람에게는 그보다 더한 행운이 없다. 지재支齋 이희李熹의 초고본 문집 《지재유집支齋遺集》도 그런 기쁨을 가져다준 책이다.
지재의 문집을 만나다 저자인 이희1691~1733는 학계에 널리 알려진 인물이 아니다. 그의 문집 역시 33장밖에 되지 않는 적은 분량의 얄팍한 책 한 권이라 눈에 띄지도 않는다. 게다가 이는 국립중앙도서관에서 전하는 유일본이라 많은 이용자들의 관심을 끌기도 어렵다. 필자도 국립중앙도서관으로부터 고전 번역을 의뢰받기 전까지는 이 책의 존재조차 알지 못했다. 처음 접하게 된 문집이지만 훑어보자마자 바로 번역 의뢰를 수락했고 작업에 임했다. 그 이유는 초라한 외형으로도 감출 수 없는 풍성하고 의미 있는 내용 때문이었다. 다시 한 번 책은 거죽만으로 판단할 수 없고, 세상에는 예상과 다른 좋은 책이 곳곳에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되었다.
스승인 옥동의 서예론을 논하다 이 책에서 크게 흥미를 끈 주제가 두 가지 있었다. 무엇보다 눈길을 끌었던 것은 책의 맨 앞에 수록된 서예를 다룬 글 두 편이었다. 「양정 이군李君이 임서臨書한 종요鍾繇와 왕희지王羲之의 서첩 서문養靜李君臨書鍾王帖敍」과 「양정 이군의 6첩에 다시 서문을 쓰다重敍養靜六帖」이다. 글이 제법 길어서 책 전체 분량의 4분의 1쯤을 차지하는데 서예를 보는 웅숭깊은 식견이 담겨 있었다. 저자는 옥동玉洞 이서李漵1662~1723의 제자로서 서예에 대한 깊은 지식과 뛰어난 안목을 소유하고 있었다. 옥동은 한국 서예사에서 매우 높은 위치를 차지하는 명필이다. 조선 후기 서예의 흐름을 바꾸어 놓았다는 평가를 받는 옥동 서예론의 깊이를 이보다 또렷하게 밝혀놓은 글이 다시 있을까 싶다. 옥동의 서예론을 설명한 글은 서예를 이해하는 데 대단히 중요한 의미가 있다. 그러나 문집은 거기에만 그치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공부하는 자세에까지 확장하여 생각하고 읽어봐도 좋을 글이다. 당연히 필자 역시 이 부분에 시선이 꽂혔다.
완벽주의자였던 그의 스승, 옥동 너 나 할 것 없이 고금에 걸쳐 최고의 서예가로 종요鍾繇151~230와 왕희지王羲之303~361를 든다. 그들을 평가하여 보통 “글씨를 본받을 만하다可尙也”, “훌륭하게 여길 만하다可嘉也”라고 말해왔다. 사실 그들처럼 쓴다면 대가 축에 끼이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런데 옥동의 생각은 달랐다. ‘할 만하다’라는 의미의 ‘가可’를 ‘겨우 괜찮다’ 정도의 의미로 평가절하하였다.저 대가들을 “경지에 이르지 못하였다”라고 평한 것이다. ‘可’라는 표현은 두 가지 해석 모두 가능하지만 옥동은 서성書聖으로 불리는 서예의 대가들을 겨우 괜찮은 정도로 보았다. 이는 누가 봐도 서예 대가를 가볍게 여기고, 명성을 깎아내리려는 태도로 보인다. 과연 정말 그런 것일까? 옥동은 남다른 시각을 갖고 있었다. 대개 군자는 완벽함을 추구한다. 공자가 그런 태도를 지녔다. 공자는 훌륭하다고 인정받은 인물을 평가할 때도 전폭적으로 인정한 적이 없다. 가장 뛰어났던 수제자 안연顏淵에게도 그랬다고 한다. 성인의 경지에 이르지 못하고 단지 그 경지에 접근한 정도라면 온전히 인정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서예도 예외가 아니다. 완벽을 추구하는 군자라면 아무리 수준이 높아 보여도 “그 정도면 됐다”라고 말할 수 없다. “괜찮은 정도다”라고 하면서 더 완벽해지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래서 옥동은 가장 뛰어난 서예 수준에 도달하기 위해 대가들의 붓글씨를 “겨우 괜찮은 정도다”라고 평하고 늘 부족함을 느끼며 정진했던 것이다. 그는 스스로에게도 타인에게도 참으로 치열한 인내와 정진을 요구하였다. 그 치열함은 서예만이 아니라 많은 분야에서 동일하게 요구되었다. 때문에 이희의 문집을 보면 저자가 얼마나 그의 스승을 잘 이해하고 있었는지 드러난다. 스승과 제자 사이에 교감하고 있는 완벽함을 향한 갈구의 정신이 무서울 정도다.
격동의 비사를 담다 다음으로 문집의 흥미로운 주제는 조선 후기 정치적 격동기의 비사祕史다. 1722년 노론老論이 경종을 시해하려 한다는 목호룡睦虎龍의 고발로 인해 노론 대신들이 죽임을 당하고 세력의 다수가 축출되는 사건이 벌어졌다. 다음 해에 이 고변반역 행위를 고발한 것이 무고로 판명되어 목호룡 편에 섰던 소론과 남인이 대거 몰락한 사건이 바로 신임옥사辛壬獄事다. 큰 정치적 사건으로 저자를 비롯한 젊은 남인 관료들이 축출되었다. 이희 역시 이에 포함되어 있었다. 이때 함께 축출된 일군의 지식인들이 바로 이중환李重煥, 강박姜樸, 강필신姜必愼, 이인복李仁復이었다. 그들은 허목許穆을 영수로 추종하는 남인의 벽파 문외파門外派에 속하는 청년들이었다.
그들 가운데 주목할 인물이 바로 이중환으로, 그 유명한 저작 《택리지擇里志》의 저자이다. 이중환은 목호룡의 배후 세력으로 몰려 여섯 차례에 걸쳐 모진 고문을 당하였다. 극형에 처해질 위기에 몰렸으나 극적으로 섬으로 유배되는 데 그쳤고 몇 년 뒤에는 무사히 풀려났다. 하지만 이로써 그의 정치적 생명은 완전히 끝나버렸다. 그는 평생을 방랑하며 지내다 말년에 《택리지》를 저술하였는 데, 이후 《택리지》는 엄청난 인기를 누렸고 다양한 분야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정작 이 책의 저술과 저자에 관한 상세한 기록은 거의 남아 있지 않았는데, 이희의 문집에 신임옥사를 전후한 시기의 이들 청년문사, 그중에서도 이중환의 행적이 흥미롭게 기록되어 있다. 바로 「백하록과 수창집 서문白下錄酬唱錄序」이다. 그들 동인同人들이 시사詩社를 결성하고 서로 창수한 시집에 붙인 서문이다. 가뭄에 단비 같은 소중한 기록이다.
이중환을 비롯한 관료들은 1721년 윤6월 백련봉白蓮峰현재 서울시 서대문구 남가좌동 스위스그랜드호텔 뒷산 아래에 있는 정토사淨土寺에서 시사를 결성하였다. 연사蓮社 또는 정토시사淨土詩社, 매사梅社, 서천매사西泉梅社란 이름으로도 불렸다. 이 시사를 거점으로 시를 주고 받으며 정치와 문학을 논하던 이들에게 신임옥사의 화란이 닥쳐왔다, 서문에는 다음과 같이 정황을 기록하고 있다. 그 당시에 청담이중환의 호은 전부(前部) 낭중(郎中, 병조정랑) 벼슬을 하고 있었고, 신재(이인복)의 호는 전(前) 시랑(侍郞, 형조참의) 벼슬을 하고 있었다. 그해 겨울 나라에 큰 변고가 발생하였다. 우리들은 산반(散班, 실직이 없는 관료)으로 급히 궁궐 앞으로 달려가 엎드려 재차 상소를 올렸다. 신재는 또 소사구(少司寇, 형조참의)로 상소를 올려 정국을 논쟁하되, 먼저 핵심 인물을 제거하고 이어서 시사(時事)를 크게 변경해야 재앙이 끝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런데 우리들은 직언(直言) 탓에 당시 권력을 잡고 있던 사람들에게 미움을 샀다. 신재는 지방 고을 수령을 자청해서 떠났다. 청담은 성품이 뻣뻣하고 깨끗하여 아첨과 비방을 싫어했기에 특히 미움을 받았다. 그러다가 올해 모함을 받아 앞일을 예측하기 힘들었는데 비로소 풀려났다.
옥사가 벌어지자 이들은 매우 강경하게 노론 측에 항거하였고, 특히 뻣뻣한 성품을 지닌 이중환이 타협을 거부하다가 큰 곤경에 처했음을 말해준다. 실제로 이 사건에서 이중환은 처형의 위기를 겨우 모면하였다.
①지은이가 15세 때 지은 「소쩍새 노래」.이 밖에도 문집에는 10대 때부터 시를 잘 지었던지은이의 몇몇 작품이 담겨 있다. ②서예론을 설파한 「양정 이군이 임서한 종요와왕희지의 서첩 서문」. 문집 첫 번째 장에 실려 있다. |
잊힐 뻔했던 이야기를 후대에 전하다 이중환의 청년기 행적을 이처럼 인상적으로 보여주는 자료는 다른 곳에서 확인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 문집은 정치적으로나 문학적으로나 귀중한 의미를 지닌다. 저자는 29세 때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장령 등의 청요직과 지방 현감을 지냈다. 관료로서 미래가 기대되었으나 43세의 젊은 나이로 임지에서 사망하였다. 학계에 이름난 저자는 아니지만, 이 작은 문집이 사라졌다면 그의 스승과 벗들이 일구어놓은 예술과 파란의 삶도 역사의 물결 속에서 잊혔을 것이다. 국립중앙도서관은 《지재유집》이 수록한 잡체시雜體詩에서는 훌륭한 작품성이 보이고, 운문성 산문인 「지연부紙鳶賦」라는 글에서는 사물을 관찰하는 안목과 감수성이 돋보인다고 평가했다
글. 안대회 성균관대 한문학과 교수 연세대학교에서 국어국문학을 전공하였고, 같은 대학원에서 석사,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성균관대학교 한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며 2015년 1월부터 현재까지 성균관대학교 출판부장을 맡고 있다. 2012년 4월부터 2014년 4월까지 문화재청 천연기념물분과 문화재 전문위원으로 활동하기도 했으며 저서로는 《고전산문산책》, 《정조의 비밀편지》, 《완역정본 북학의》, 《주영편》 등이 있다. [출처] 지재유집|작성자 오늘의 도서관 naver blog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