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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명-우리 수필 평론(문학철학 시리즈 2)
저- 황필호
(서울대 문리대 종교학과 학사. 미국오클라호마대학 철학과 석. 박사. 서울대. 이화여대 강사 ,동국대 철학과 교수.. 한국 비교철학회 및 한국 종교철학회 회장 사단법인 생활철학연구회 회장 한국철학회 논리논술 대학원 원장)
출- 집문당(1997.5.10. 323쪽)
독정-2019. 9.3.화
· 황필호 저자는 이 책의 목표를
① 우리나라에 수필비평계가 탄생하고
② 가벼운 수필 뿐 아니라 무거운 수필이 등장하고
③ 무거운 수필의 한 종류인 철학수필이 시작되어야한다는 목표로 요약을 하였다.
·글에 대한 비판을 사람에 대한 비판과 동일시하지 말기를
. 수필로 쓴 수필론
①수필은 역설이다. 수필은 붓 가는 대로 쓰는 글이다 이것 저것 생각나는 대로, 말의 흐름을 따라서, 쓰고픈 대로 쓰는 글이다 그것은 어떤 사람이나 사상을 특별히 옹호하거나 비판하는 선전문이 아니며, 자신의 주장을 논리 정연하게 제시하는 논문이 아니며, 삶의 근본 문제를 다루는 시나 소설도 아니다. 그저 물결이 흐르는 대로 쓰는 글이다.
그러나 수필은 절대로 붓 가는 대로 쓰는 글이 아니다. 아름다운 형용사의 나열, 주관적 내면의 시시한 이야기들, 유염한 사상삭의 경구를 짜깁기한 글, 그런 것들은 절대로 수필이 될 수 없다. 아름답게 쓰기만 하면 수필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은 마치 어렵게만 쓰폄 철학 논문이 될 수 있다는 생각과 다름이 없다. 수필은 붓 사는 대로 쓰면서고 그 붓을 끌고 가는 보이지 않는 손의 지시를 받아야 한다.
수필은 자기 고백의 글이다, 그것은 ‘너’보다는 ‘나’의 이야기를 말하고, ‘우리’보다는 ‘나’에 대하여 더욱 높은 관심을 보인다. 이런 뜻에서 수필은 실존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변화무상한 세게 속에서 구차하다면 구차하게 살고 있는 자아에 대한 냉철한 성찰을 은연중에 폭로시킬 수밖에 없는 글이다. 그리하여 수필은 간혹 내가 존재하지 않으면 이 세계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극단적인 유심주의에 빠질 수도 있다.
그러나 수필은 ‘한 사람’에 대한 글이 아니라 ‘여러 사라들’에 대한 글이다. 자아의 독백이 독백으로 끝나는 글은 마치 메아리 없는 산울림과 같아서 수필의 경지로 오를 수 없다. 수필에 나오는 한 사람의 독백은 바로 다른 사람의 독백과 혼연일체가 되어야 한다. 수필의 독백은 다시 ‘대화의 독백’이 되어야 한다.
수필 대상은 작은 것들과 적은 것들이다. 아무렇게나 흩어진 나뭇잎, 아무도 돌보지 않는 산길, 몇 년 만에 우면히 만져 보는 인형, 이렇게 시작한 것들이 바로 수필의 대상이다. ‘인생이란 무엇인가’라고 시작하는 글은 수필이 될 수 없다. 그것은 숲을 본다는 미명 아래 나무를 보지 못하는 글일 뿐이다.
수필의 대상은 절대로 시시한 것들이 아니다. 수필의 올망졸망하고 쪼끄만 것들은 언제나 큰 것, 위대한 사건, 웅장한 심포니, 거목과 같이 우둑 솟은 사상 등을 쉽게 표현하는 수단일 뿐이다. 그것은 나무를 보되 나무에 집착하지 않고 숲을 보려는 글이며,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에 얽매이지 않고 달을 보려는 글이다.
수필은 아름다운 글이며 쉬운 글이다. 그것은 절대로 딱딱하지 않고 복잡하지 않아야 한다. 쓰기에 쉽고 읽기에 쉬워야 한다. 어려운 고전에 대한 필자의 해박한 지식을 과시하려는 글, 마치 삶을 완전히 해결한 양 큰 소리 치는 광신적인 종교인들의 글, 자신의 이데올로기를 교묘하게 선전하는 글, 이런 것들은 수필이 아니다. 수필은 완성의 글이 아니라 미완의 글이다.
그러나 수필의 내용은 절대로 쉬운 것이 아니다. 오히려 쉬운 것들을 통하여 어려운 것으로 인도하는 글이다. 그리하여 수필은 밀 한 톨을 가지고 천하를 논할 수도 있으며 겨자씨 한 알르 가지고 우주의 진리를 논할 수도 있다. 수필은 미완의 글이지만 언제나 완성을 지향하는 미완의 글이다.
수필은 붓 가는 대로 쓰는 글이면서도 붓 가는 대로만 놓아 둘 수 없는 글이다. 수필은 한 사람의 고백인 동시에 모든 사람의 고백이 되는 글이다. 수필의 대상은 작으면서도 크고 적으면서고 거대하다. 그리고 수필은 쉬우면서도 쉽지 않고 단순하면서도 복잡하다. 하나를 보고 열을 말하는 글이다. 수필은 역설이다.
② 수필이란 무엇인가<수필문학 소고>를 중심으로
수필의 본질적 속성
첫째, 수필은 경험적이기 때문에 그 소재는 평범한 일상생활일 수도 있다. 무심히 생활주의의 대상에. 혹은 회고와 추억에 부짖혀 스스로 붓을 잡지만 삶의 모든 측면이 수필의 소재가 될 수 있다. 수필이 쉽게 신변잡기로 빠질 수 있는 이유도 여기에 힜다.
둘째, 수필은 심경적이기 때문에 철저한 집필동기나 그것을 조리있게 설명하는 논리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셋째, 수필은 개성적이기 때문에 완성된 형식이 있을 수 없다.
아무 것에도 사로잡히지 않은 평정한 믿음으로 마치 먼 곳의 그리운 동무에게 심정을 말하듯이 붓을 잡아야 한다. 한가로운 기분을 지니면서도 진실된 마음으로 한 편의 문장을 쓸 때, 그것은 곳 수필이 될 것이다. 이것은 수필의 운명이요. 또한 성격이다.
수필의 이런 무형식상, 혹은 무정형성은 구체적으로 수필과 다른 종류의 글과 구별이 모호하고 경험적이며 심경적이며 개성적이다 그래서 수필은 무한한 소재의 다양성과 방법의 다변성과 형식의 다수성을 갖는다.
‘수필에는 ’무의식적 소성(素性)에서 피는 꽃 같은 미소‘인 유머가 있어야 하며, ’지혜와 총명의 샘‘과 같은 위트가 있어야 한다. 수필은 어떤 ’참고서를 구하거나 지식의 정돈‘을 요구하지는 않지만 반드시 ’‘탁마’의 세련과 각고의 노력의 결과로만 탄생될 수 있다. 왜? 김광섭은 그 이유를 한 마디로 “모든 눔학과 예술은 결국 사람에게서 생겨서 사람에게로 돌아가기 때문”이라 했다. 글이 사람이라기보다 사람이 글이라는 뜻이겠다. 결국 김광섭은 수필을 단순히 붓 사는 대로 쓰는 글이 아니라 진지하게 북사는 대로 쓰는 글이라 결론 내린다.
수필이야말로 가장 자연스럽게 인간성을 드러낼 수 있는 문학형식이여 이런 뜻에서 수필의 성격은 인간의 성격이며 인간의 삶은 수필의 심경에서 성숙된다.
지금까지 우리나라에서 발표된 가장 훌륭한 수필로 쓴 수필론의 작자는 본격 수필가인 긴짐섭이 아니라 시인 김광ㅅ버과 수필가라기보다는 시인인 피천득이다. 오늘날의 수필가들은 이 점에 대하여 부끄럽게 생각해야 할 것이다. (끝)
③ 수필의 독사성<붓 가느 대로 쓰는 글>을 중심으로
·첫째 수필은 누구든 쓸 수 있는 만민의 글이다. 타인의 예기를 그대로 옮겨 놓아도 훌륭한 수필이 될 수 있다. 이인로의 <월등사죽루죽기>가 이 경우다
둘째, 수필은 특별 형식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의 글이다. 시처럼 비유, 상징, 아이러니 등과 리듬에 새심하게 유의해야 하거나, 소설처럼 구성, 시점, 인물, 배경, 사건의 전개와 결과 갈등 등을 치밀하게 계산해야 할 필요도 없다. 소새, 제제, 주제에 제한이 없다. 실례로 수필에서는 방귀보다 더한 것이라도 작품화가 가능하다. 한바탕 웃게 만들어 방귀에 얽힌 어린 시절 추억, 그 시점 그리움이나 지금은 사라진 향토적 냄새들 특징들-에 대한 아쉬움으로 주제를 삼을 수도 있다. 보리밥이 사라지다시피 한 현대 생활에서는 그리 흔하게 접할 수 없는 것이 지독한 그 향수 내음이지만, 그에 얽힌 일화에는 삶을 살찌우던 인정과 해학이 얼마나 많이 담겨 있었던가.
셋째, 수필은 쓴 사람의 생활 모습, 생김새, 취미, 인간관계 등을 물론, 삶의 지식, 소망, 이상, 인생관까지도 그대로 나타나는 개성의 글이다. 이것은 비슷한 재로로 만든 음식이라는 그것을 만든 사람에 따라 그 맛이 달라지는 것과 흡사한 이치다. 이 개성은 글을 쓴 사람, 그 글만이 지닌 독특한 문체를 통해 잘 드러난다.
넷째, 수필은 단순한 개성의 글로 끝나지 않고 자기 자신을 깊이 반성하는 성찰의 글이다.
다섯째, 수필은 유머와 위트의 글이다. 유머는 익살이고 위트는 그때 그때의 상황에 따라 재빨리 발휘하는 재치를 뜻한다.
·소설가 최윤이 ‘살아있는 날의 축복’(이태동) 서평에서 쓴 수필관
쓰는 이의 삶에 대한 자유로운 사유와 내밀하고도 다채로운 정시의 정경을 맛보게 해주는 것이 진자 매력 아닐가. 자유롭기 때문에 아무렇게나 쓰기 쉽고 내면의 풍경을 보여 주기 전에 아무렇게나 벗어놓은 속옷처럼 안쓰러운 잡기로 흐리기 쉬운 함정 때문에 좋은 수필을 만나는 일이 흔지 않다. 글 쓰는 순간에 반쯤은 시인이 되고 반쯤은 철학자로 볌노하는 수필가의 잔잔한 사색의 파동을 따라가 보는 것은 얼마나 즐거운 일인가. 수필을 아무렇게나 쓸 수 없는 것은, 매순간의 삶에 예술적 호흡을 불어넣는 긴장된 감수성과 사유의 노력이 없이는 수필이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수필 장르가 글 쓰는 이의 인격체가 가장 가까이 다가간다고 말하는 것이리라.
④ 좋은 수필을 쓰려면(갓끈을 늘어뜨리고 하얀 도포자락만 펄럭인다 해소 모두 선비는 아니다)
첫째. 시간에 쫓기지 않는 여가의 작업으로 여백의 향기를 지녀야 한다.(묵혀가며 수정하라)
둘째, 깊이 생각하고 한 번 작성한 다음에는 그 문제에 몰두. 체험을 소재로 하여 쓰되 체험 그대로 쓰는 것이 아니라 승화시키고 형상화 시켜서 쓴 언어활동의 대표적 구조물이기 때문이다. (수필 한 편 쓸 계기가 마련되면 그 날부터 나의 생활은 거기에 집약되고 만다) “작가의 사상과 감정이 내부에서 걸러지고 삭혀져서 잘 익은 술처럼 향기를 내게 해야 한다.”
순간적 계시로 짧은 시간에 씌어졌다 하더라고 작가가 오랫동안 깊이 사색해 온 결과일 뿐이다. 오랫동안 사색과 연구해 온 뉴턴이 사과가 떨어지는 것을 보고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했듯이
셋째, 좋은 수필을 쓰려는 사람은 자신이 지금까지 사색한 것, 연구한 것, 연상한 것을 전부 쓰려 하지 말고 꼭 필요한 것 이외에는 아낌없이 가지치기를 하는 ‘버리는 기술의 달인’이 되어야 한다. 명수필은 필요한 내용을 전부 담은 것이 아나라 필요한 내용만 담은 것이다.
넷째. 남의 목소리가 아닌 나의 목소리로 다른 사람도 할 수 있는 말이 아닌 나만이 할 수 있는 말을 해야 한다. 누구는 “소재가 수필 한 편을 쓸 만큼 정리 되면 대강 순서를 정하고 액센츠트를 배치해 본다 .액센트란 나의 기교다. 이것이 없으면 죽은 글이다. 내가 아니면 못할 기가 막힌 소리를 군데군데 양념처럼 넣어야 한다.”고 한다.
사람마다 감각과 견해, 개성이 다르듯이 수필 또한 살마마다의 감각 따라, 견해 따라, 개성 따라 달라야 한다. 단지 변함없는 기준 하나가 필자만의 글이어야 한다. 그가 접유한 공간에서 그 말이 차지한 정감, 사유 등에 의하여 그가 축출해 낸 그 특유의 산물이어야 한다.
· 전공분야에 대한 글만 써야한다는 발상은 무한한 창조적 능력을 무시하는 것이다. 마치 철학자. 종교인, 의사인 슈바이처 박사에게 철학을 논하지 말고 의사 노릇이나 해야 한다는 주장과 다름 없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시로 대표되는 문학을 역사학과 비교하면서, 역사는 사실을 기록하지만 문학은 사실을 알 수 있는 것을 기술하며, 또한 문학은 보편성을 지향한다는 점에서 역사학보다 더욱 철학적이라고 선언했다.
· 생황은 철학을 낳는다. 생활 가운데서 저항을 받고, 마찰을 일으키고, 갈등을 겪을 때 철학은 잉태된다. 생활이 없으면 철학도 없다. 학문으로서의 철학도 생활에서부터 나왔다 그것들이 체계화되어서 철학이라는 한 분야를 건설하였다. 따라서 철학은 생활의 부산물이다.
· 문학과 철학의 절대적 차이(김동욱)
첫째, 방법 측면에서 문학은 미코스에 뿌리를 둔다. 나아가 철학은 추상적이고 논리적인 방법을 사용하지만 문학은 철학보다 좀더 구체적이고 감각적인 방법을 사용한다. 이를 비타민과 시래기의 차이점으로 설명하고 있다.
-함유하고 있는 성분으로 치자면 비타민 알약이나 시래ㄱ디국이나 크게 다를 바 없다. 시들어버린 무청이나 배춧잎과 같은 것을 버리지 않고 말려두었다가 음식으로 만든 시래기국은 비타민 C가 많아 건강에도 좋다고 한다. 만약 비타민C와 시래기국 사이에 차이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맛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함유성분이 서로 똑같을지는 모르지만 비타민 알약에서는 시레기국에서 맛볼 수 있는 그 구수하고 감칠맛 나는 별미를 도저히 맛볼 수 없다. 철학이 비타민 알약처럼 삶에 대한 추상적 명제를 다룬다면, 문학은 시래기국처럼 삶에 대한 구체 맛을 보여준다.-한 마디로 철학이 논리를 방법으로 삼는다면 문학은 직관을 방법으로 삼는다는 것이며 차가운 철학이 머리에 호소한다면 문학은 뜨거운 가슴에 호소한다는 것이다. 진선미 중에서 철학은 진을 추구하고 윤리는 선을 추구하고, 문학은 미를 추구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삶이란 무엇, 나 어떻게 살 것인가 답을 추구하는 점에서 그들의 대상은 서로 같다.
· 철학적 에세이나 수상은 문학이 될 수 없는 이유
첫째, 지극히 논리적인 배려에만 충실한 건조한 문장이라 문장에 배어 있는 촉촉한 느낌의 미적 감흥을 맛으로 읽히는 언어예술이 나다.
둘째, 관념적 보편적으로 표착된 인간을 제재나 주제의 패턴으로 삼는 것이 보통인 데 대해 ,문학은 살아 있는 그대로의 인간, 특정한 환경 속에 살고 있는 그대로의 인간, 특정한 환경 속에 살고 있는 피가 통하는 인간이 대상이 된다.
철학 수필에서 상황 제시가 없는 글은 딱딱하고 재미가 없다. 실제 생활에서도, 구체적 체험에서 얻은 철학은 평생을 두고 오래 남지만, 책에서 읽은 철학적 지식은 그때뿐 곧 잊어진다. 그와 같이 중수필에서의 상황(예화) 제시는 철학의 씨앗을 잉태하는 모태 역할을 한다. 상황을 통해서 철학을 얻었을 때 그것은 가슴에도 울리고 바닥 깊은 곳에 남기도 한다.
감성=문학, 정서=문학 도식은 모든 문학이 감정적이고 정서적인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왜냐면 지성=문학, 논리=문학도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이다.
· 문학이 곧 감동이라는 말, 감동은 정서적일 수도 있고 지성적일 수도 있다. (예)
아내란 젊은 남자에게는 애인이요, 중년 남자에게는 동반자요. 늙은 남자에게는 간호사다(프란시스 베이컨)
아내와 자녀를 가진 남자는 행운의 인질이 된 사람이다.(프란시스 베이컨)
· 엄혜숙은 유안진의 이런 태도
-진실로 대단한 이은 세계 평화를 위해 일하는 이들보다 순간순간 지극히 작은 일도 소중히 여기는 평범하나 살맛나게 하는 이들이 아닐까?-유안진의 ‘부르고 싶은 이름’에서
가 현실의 모순들을 해소할 수 없다고 비판한다.
-아무리 가장이 사들고 온 호떡 한 봉지나 고등어 한 두 마리에 흐뭇해하고 행복해 한다 해도 나날이 뛰어오르는 물가와 소시민의 저축으로는 따라잡을 수 없는 전세값과 집값은 누가, 어덯게 해결할 것인가> 그런 정치-경제적인 문제를 제기하면, 마치 세계평화 운운하고 떠벌리는 사람처럼 매도하는 것이 이 에세이의 기조다. 사회의 정치-경제적 구조, 가족 그리고 개인은 각각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다. 아무리 한 개인, 한 가족이 성실하게 살아간다 해도 사회 흐름과 무관하게 지낼 수는 없다. 그런데 개인의 성실성, 사람 사이의 잔정 따위가 전부인 양 강조됨으로써 “나만 성실하면 된다.”는 개인주의와 “우리 가족만 행복하게 잘 살면 된다.”는 가족 이데올로기가 암암리에 유포되는 것이다. 가족 사이의 작은 행복들도 중요하다. 하지만 그것을 지켜내기 위해서는 보다 큰 사회 구조도 함께 연관지어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
<피천득 론>
-이처럼 금아 수필인 피천득의 수필에 장세진은 피천득의 지나친 낙관주의의적 소시민적 안주욕, 민족정신이 결여된 이국 취미, 반민중적 역사의식을 공격했다.
첫째, 피천득은 지배 체제 수호 차원에서 교과서의 역량을 충실히 해온 셈이라고 말할 정도로 지나치게 낙관주의적이고 소시민적인 안주욕에 사로잡혀 있다.
수필이니까 유머나 위트 감각이 있어야 하고, 머리 무거운 주제가 아니더라도 괜찮다는 것은 지극히 위험한 생각일 수밖에 없다. 수필이 문학의 적자(嫡子)가 되기 위해서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여서는 안 된다. <인연>을 썼을 때 피천득은 64세로 무거운 주제 의식이 없는 일본여자와의 인연을 위해 “십 년쯤 미리 전쟁이 나고 그만큼 일찍 한국이 독립되었더라면‘하고 아쉬워하는 것이다. 호사취미 성향도 이런 낙관주의의 몫이다.하고 피천득은 반민중적 역사 의식을 가졌다고 비판한다. 그러나 수필은 정적 수필과 지적 수필, 서정수필과 이성수필, 가벼운 수필과 무거운 수필로 나눌 때 서정수필 자체가 모두 이데올로기적이거나 사회지향적일 필요는 없다. 그러므로 한국 수필의 문제점들을 서정수필의 대가인 금아 수필 자체에서 찾는 대신에 그의 수필이 우리나라 수필계에 끼친 영향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김진섭 론>
·프랑스의 일반 국민들도 그 해에 대학 입시에서 어떤 철학 문제가 출제되었느냐는 것에 대해 관심을 가져야 상식인으로 행세할 수 있으며, 철학을 전공하지 않는 지성인들은 출제된 문제를 가지고 당시 정치 상황과 교육 수준을 판단하고 있다. 참으로 부러운 일이다.
·김진섭은 “고도의지시과 관찰력을 구비한 살마이 방관자적 태도로 인생 사업을 관찰하여 거기서 느낀 감흥을 솔직히 고백‘하기만 하면 그것은 훌륭한 수필이 될 수 있다고 했다. 이정림은 김진섭의 수필이 가진 방관자적 관념주의를 예시하는 본보기로 그의 <주부송>을 들고 있다.
이글의 제목에는 송자가 붙어 있지만, 진정 주부의 사명은 빨래하고 밥 짓고 청소하고 옷을 만드는 것 밖에는 없을까. 그는 한 집안에서 주부가 담당하는 역할마저 이렇듯 관념 속에서 피상적으로밖에는 그려낼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 수필처럼 개체의 구체성이 결여된 글이 공감성을 얻기가 어렵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작품도 드물다.고 했지만 현재 대부분의 남성과 여성이 김진섭의 이런 논조에 침근한 공감대를 가진다. 다만 이런 글은 권선징악을 강조하는 훈계조 갈은 될 수 있어도 수필이 될 수 ㅇ벗으며 작가으 생활과 인생이 철저히 배제된 그의 글은 수필로서는 전혀 공감대를 형성할 수 없으리라는 뜻이겠다.
<김교신론>
· 정태시는 김교신의 수필집<샘영의 계단> 에 쓴 김교신론에서 이렇게 말했다.
-김교신은 신앙인이다. 그러나 그는 단순히 종교인아 아니다. 그의 신앙은 편협되지 않으며 그의 믿음은 선동적이 아니다. 그는 오직 성서로만 자신의 믿음과 사랑을 일깨운다.
김교신은 오늘날 교회의 신앙은 죽었다면서 “이제 교회는 결코 그리스도의 지체도 아니요. 세상의 소금도 아니요. 외로운 영혼의 피난처조차도 됮 못한다, 그리고 교회가 하나의 수양소나 문화기관 이상이 되지 못한다. 내가 영생하기 위하여 내 가족과 내 민족이 살기 위하여 나나님을 부르는 것은 아무리 엸미있고 경건해도 신앙이 아니다. 그는 내 제산. 내 세력을 모르려는 것은 다 정도는 높을지는 몰라도 ‘나’표준 ‘인간’ 중심인데 변함 없다. 그리고 이것처럼 하나님이 미워하는 것은 없다. 죄란 살인 갈도를 가리킴이 아니요, 하나님을 거역하고 사람지 자기 중심이 되는 것이다.
김교신은 함흥 여고 교사, 서울 양정고보, 경기중에서 15년 교사샣활하며 젊은이들의 민족의식을 일깨운다. 일본에서 귀국한 후 함석헌, 송두용 등과 성서조선을 발행하다 1년간 감옥생활을 마치고 1943년 불기소 처분으로 출옥하여 교직과 전도 생활을 금지 당하고 1944년 흥남 일본 질소비료공장에 취직하여 3천여 명의 조선인 노동자들의 교육과 처우 개서을 위해 일하다 해방 3개월 전 발진티푸스 감염된 노동자를 간호하다 감염되어 44세로 생애를 끝낸다. 김교신은 최후로 “나의 40 평생에 처음으로 이 공장에서 민족을 내 체온 속에서 만나 보았오.”했다 그 체험은 선각작의 우울과 고독의 비애감으로부터 그를 구했을 것이다. 김교신의 사상은 한 마디로 조선산 기독교의 정신이다.
<이정림 론>
·이정림은 나는 왜 수필을 쓰는가라는 부제가 붙은 <엽서를 보내는 마음으로>라는 글에서 ‘타인에 대한 사랑과 자신의 구원’을 위해 수필을 쓰기 시작했다면서 자연에서보다 인간에게서 정과 아름다움을 찾으려고 노력한다고 했다. “언제부터인가. 계절이 바뀔 대마다 새로 나오는 과실로 술을 담는 취미를 갖게 되었는데 이런 취미를 갖게 된 것도 따지면, 나와 가까운 사람들이 한자리에 모여 앉아 정담을 나눌 때 그것을 마음의 방석처럼 쓰고자 함에서이다.면서 <흙>에서는 단순히 흙에 대한 사랑에 그치지 않고 오랫동안 흙과 더불어 살아온 어머니를 그리면서 ”대지는 여인이었다.“면서 큰 어머니를 회상한다. ”인간이 없는 글은 먹빛이 들어가지 않은 천연색 인쇄물과 같다.“내 수필은 자연에서보다 인간에게서 정과 아름다움을 찾으려고 노력한다. 인간에 대한 이 끈질긴 사라을 통해서 나는 구ㅜ언과 절망을 동시에 얻늗다. 환희하고 상처받고 후회하면서도, 관심은 그들은 빗겨갈 수가 없다. 그를은 바로 나 자신이기 때문이다.
·주제란 한 작가가 그 글을 쓰는 이유요 정신이요 사상이다. 개인이 자기 일기장에다 혼자만 읽는 글을 쓴다면 그 글에 주제가 있든 없든 문제 될 리 없지만 작가가 남이 보는 지면에 발표한다면 최소한 작가 정신으로 글을 써야 한다.
·이정림의 장애인의 문제를 묘사한 <천하와 낙엽>에서 성폭행 당한 여자가 자살로 더날 대 남자 수의를 입혀 보내는 사건을 보며 “육체보다 정신에 장애를 지니고 있느 사람과 육체보다 정신이 건장한 사람들 이원론적 대비로 현실을 명쾌하게 설명해보이나 단지 기능적 방법론적 표현일 뿐이다. 실제 우리 현실은 이원론의 테두를 벗어나 얽힌 실타래같은 현실을 사회수필가는 쉽게 접근하지 말아야 한다. 이정림의 사회수필은 사회적이기보다는 너무 개인적이다. 예로써 <나를 버린 사랑>에서 부하를 위해 영웅적 죽음을 택한 사령관을 예기하다가 갑자기 홀머너이들의 눈물겨운 자식 뒷바라지 예기로 끝을 맺고, 6.25 비극이라는 동일 주제와 소잴ㄹ 반복해서 상ㅇ한 <그 뜨겁던 6월>과 <6월과 복숭아<>도 개인적 감상으로 일관. 김채길은 ”이정림의 분노의 온화성은 그의 정의감에 한계선을 그으며 그의 사회 의식을 사회 인식을 인도주의의 차원에 멈추게 한다.“고 지적했다. 진정한 사회수필을 허정성에 바탕을 둔 사회성이 암시적으로 표현되는 글이다. 이정림의 <어느 아이를 위한 조사:박종철 군을 추념하며>글 말미에 재도의 개선보다 의식의 개선이 더 중요하다.”했는데 이런 발상은 개인 취향일 뿐 의식과 제도가 동시에 개혁되어야 한다는 사회과학적 시각이 결여된 입장이다. 의식 개혁이 우선하느냐. 제도 개혁이 우선하느냐. 혹은 양자 동시 개혁이냐가 초점이 아니라 진정한 페미니즘적 시각은 여성 차별의 원인을 남성과 여성의 의식 뿐 아니라 사회 제도의 개선에도 동시에 찾아야 한다. 이정림의 <남자 수의를 입고 떠난 당신>에서 그는 서른 한 살의 꽃다운 청춘을 자살로 끝낸 성폭행으로 자살한 한 여성위문제만 아니라며 “이 사회에는 또 어느 구석에 당신처럼 죽음보다 더한 고통에 시달리고 있는 여성이 있을지도 모른다. 이것이 어지 그들만의 개인적 비븍으로 돌릴 수 있는 문제이겠나?” 그동안의 개인주의적 감상에서 한 걸음 벗어난 이 것이 진정한 사회수필, 페미니즘 수필로 만든다
<김교신 론>-정태시
그는 신앙인이다 그러나 그ㄴ느 단순한 종교인이 아니다. 그의 신앙은 편협되지 않으며 그의 믿음은 선동적이 아니다. 그는 오직 성서로만 자신의 믿음과 사랑을 일깨운다.
패미니즘 수필의 백미 <무용한 흥분>을 중심으로
패미니즘 시각은 각기 상반되는 듯한 다음 세 명제를 동시에 받아들이는 입장이다.
첫째, 여성의 적은 남성이다.
둘째, 여성의 적은 여성이다.
셋째, 여성의 적은 사회다. 첫 번째 명제는 여성 차별의 주제가 남성임을 폭로하고, 두 번째 명제는 그 여성 차별을 그대로 유지시키는 주체는 바로 여성임을 폭로하고 세번 째 명제는 이런 여성 차별은 의식적인 차원 뿐만 아니라 구조적인 제도의 개선과 병행되어야 함을 나타낸다. 그래도 지성인들은 위 세 명제 중에 하나만 고집하며 요즘 혼란의 대상이 되는 패미니즘(여성 운동) 문학이나 예술은 첫 번째 명제만 외치는 실정이다.
<강호형 론>
강호형에게 글쓰기는 남들이 수없이 밟고 간 길을 터덜거리며 따라가기가 아니다. 숫눈밭에 첫발자국을 내는 것이다. 그것은 얼마쯤이건 다가가 누구든 눈 치우는 살마을 만나면 가던 길을 되집어 돌아온 작업이다. 그는 내린 눈송이보다 많을지도 모를 길 중에서 오직 ‘새 길 한 가닥’을 찾는 일이다.
· 강호형의 <봄이 오는 소리>는 우리에게 봄을 한아름 안겨줄 뿐, 봉에 얻을 추억을 입담 좋게 늘어놓고 있지 앟다. 그가 봄에 대한 설명을 하지 않고 봄을 온몸으로 끌어안고 있는 것은, 독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봄의 설명이 아니라 봄의 느낌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새삼 독자에게 작가가 봄을 설명해 줄 까닭이 어디 있겠는가. 그들은 작가보다 봄을 더 잘 알고 있다. 다만 작가는 봄을 잘 그려낼 뿐이다.
<우리집>은 “그 우리집이 지금은 팔당호에 잠기고 없다.” 마치 독자에게 “네가 이래도 감동을 받지 않을 수 있게니?”고 대들 듯이 이런 내용은 <고향>에도 그대로 재현되고 있다. 이런 기법은 ,덮어주기>에서도 볼 수 있다. 어린 아들 이야기를 하다가 마지막에 외통수를 둔다 “다만 세월이 훨씬 지난 어느날, 오늘 내게 담요를 덮어주었듯이 나의 무덤에 잔디 이 불을 덮어 주며 이별을 아쉬워할 아들의 모습을 상상해 볼 뿐이다.”독자는 여기서 꼼작 할 수 없다. 모파상은 단연의 재미는 깜짝 끝내기에 있다. 전혀 의심치 않았던 살마이 범이능로 나오고, 전혀 상상 모했던 장면이 마지막에 벌어지는 깜짝 쇼에 있다. 강호형의 일부 수필은 이런 깜작 쇼가 아니라 직격탄이거나 외통수다. 얄밉도록 철저하게 샂ㄴ 준비를 한 것 <부부>를 보면 ‘벤치에 앉은 아내 곁으로 갔다. 변명 따위는 하지 않기로 했다. 뭐라고 놀리든 다 받아울 참이었다. 그런데 한참을 지나도 아내는 말이 없다. 웬일인가 싶어 돌아보니 아내의 눈에는 눈물이 고여 있었다.“
독자는 할 말을 잊는다. 눈물이 앞을 가린다. 김서령은 <부부>를 ‘가슴에 따스한 물이 스며 드는 글’이라 칭찬했다. 그러나 우리는 평생을 살아온 아내의 가슴이 고인 찬물도 잊지 말아야 한다. 현실은 따스한 가슴보다는 명철한 머리를 필요로 할 때가 너무나 많다.
“잘 끝나는 것은 모두 좋다.”는 세익스피어 말처럼 끝줄이 좋다.
그리고 그는 느낌표를 거의 쓰지 않는다. 독자는 아무 감동도 받이 않았는데 저자가 먼저 감동하는 것은 무대에 올라 눈물을 흘리는 철없는 배우와 같다. 그는 이성보다 감성, 논리보다 직관, 머리보다 가슴으로 글을 쓰며 그의 글은 감동을 준다.
·유명한 사상가이 경구를 짜깁기한 글, 그런 것들은 절대로 수필이 될 수 없다.
<황필호 론>-강호형 평
수필은 역설이다는 글을 쓴 황필호는 수필관과 실제로 쓴 글 사이에 많은 차이점이 있다. 그가 지향하고자 하느 수필인가. 당지 일반적 수필관을 나나낸 것이가
예문)
① 수필은 붓가는 대로 쓰는 글이다. 자신의 주장을 논리정연하게 제시하려는 논문이 아니며 삶의 근본문제를 다루는 시라 소설도 아니다.- 그의 수필 만큼 자진의 주장을 논리정연하게 펼쳐보이는 글도 드물며 그의 글은 대체로 소논문적이다.
② 아름다운 형용사의 나열, 주관적 내면의 시기산 이야기들, 유명 사상가의 경구를 자집기한 글 그런 것들은 절대로 수필이 될 수 ㅇ벗다.-그의 글에서는 유명 사상가의 경구가 너무 많이 인용될 뿐 아니라, 그것도 이글 저 글에서 수없이 중복되어 나온다.
③ 수필은 자기 고백의 글이다 너의 이야기보다 나의 이야기를 마하고 우리에 대한 관심보다 나에 대하여 더욱 높은 관심을 보인다.-그의 글은 자기 고백적이 아니라 객관적 사유를 바탕으로 나의 이야기보다는 너의 이야기를 나에 대한 관심보다는 우리에 대한 관심을 주로 보이고 있다.
④ 수필 대상은 작은 것들과 적은 것들이다. 인생이란 무엇인가하고 시작하는 글은 수필이 될 수 없다. -그의 글은 시시한 대상으로부터 시작되지 않으며 인생이란 무엇인가와 같은 크고 보편적 주제를 연역적으로 풀어나간다.
⑤ 수필은 아름다운글이며 쉬운 글이다. 절대로 딱딱하지 않고 복잡하지 않아야 한다.-그의 글은 쉽지도 부드럽지도 않다. 중수필에 경문장이며, 강건체와 건조체를 사용한다.
⑥ 수필은 완성의 글이 아니라 미완의 글이다-문학수필은 여운으로서 감동을 자아내는ㄴ데, 그의 수필은 분명하고도 선명하게 해답을 제시함으로써 교훈적이고 강단적인 수필이 되고 만다.
박흥배가 논한 황필호 론
수필은 큰 문제보다 생활 주변에 대한 애정의 시선이 깔린 서정이 그 본질이 되어야 하며 서정을 서사의 문제로 폭을 확대 승화시킬 수 있는 작가의 역량이 절대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또 그 역량은 수필가의 삶이 철학에서 인도되어야 하며, 그런 수필과 철학의 만남이 가장 바람직한 글쓰기의 형태일 것이다. 철학이 없는 삶은 물질적 삶이라는 공식이 우리 문학인에게 어쩌면 가장 필요한 것이다.·
어느 세계적 학술 대회에서 <문학이란 무엇인가>주제로 며칠 동안 회의를 했다 결론은
“문학이라는 것은 이렇다고 정의할 수가 없다는 것이었고, 확실한 것은 문학이라는 것이 우리 세상에 있다. 이것은 확실하다. 그러나 문학은 이것이다 하고 정의할 수는 없다.”
고 결론이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