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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체는 무엇이든, 사람은 누구든 태어나자마자 늙고 병들어 죽음으로 가는 노정에 선다. 즉 우리 모두는 생로병사의 수레바퀴 아래 놓인다. 그 과정에서 우리의 몸은 약해지고 병들게 되어 있다. 극히 예외적인 탁월한 유전자를 타고 난, 아마도 확률상 탑0.0001퍼센트 정도의 킹왕짱 건강한 유전자를 물려받은 사람을 제외하고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사는 동안 이런저런 병이 든다. 병이 들면 우리는 병원에 가고 의사의 도움을 받는다. 의사를 찾아간 사람은 환자이다. 그런 관점에서 세상에는 의사와 환자—잠재적 환자를 포함하여—라는 두 종류의 입장만 존재한다. 누구나 일단 환자 입장이 되면 그에게 의사는 절대 권위자, 절대 권력자, 절대 갑의 권위를 가진 존재가 된다. 그래서 의사는 언제나 갑이고 환자—다시 말하지만 모든 사람은 현재 환자이거나 잠재적 환자이다—는 반드시 을일 수밖에 없다. 천하장사든 재벌이든 대통령이든 일단 환자가 되면 의사에게 을이 된다.
몸에 이상이 느껴져, 병원을 찾아가 검사를 받고 그 결과를 통보 받기 전에 우리는 천국과 지옥을 가르는 외줄을 타는 심정이 된다. 다리가 후들거리고 가슴속이 졸아들고 애간장이 타들어 간다. 흰 옷을 입은 의사가 생사를 가르는 판결을 내리는 판사가 된다. 환자에게는 의사가 자신의 생사여탈권을 가진 존재처럼 느껴진다. 환자는 먼저 의사의 표정을 눈치로 살피고 검사 결과에 대한 첫 마디 말을 하는 의사의 입술 모양이 어떻게 열리는지에 의식과 신경이 집중된다. 그의 표정이 밝은지 어두운지, 말문을 여는 그분의 입술 모양이 “정상”의 “ㅈ”으로 열리려는지 “글쎄요”의 “ㄱ”으로 열리려는지 그 순간 환자의 머릿속에는 하얀 회오리바람이 휘감아 돈다.
대부분의 경우 의사는 환자에게 그다지 친절하지 않다. 워낙 바쁘고 다루는 모든 상황이 첨예하고 심각한 것들이어서 신경이 날카로울 수밖에 없을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환자 입장에서는 의사의 그런 태도에 대해 불만이 생긴다. 이건 내가 직접 겪는 것이어서 비교적 잘 안다고 말할 수 있다. 환자인 나는 대학병원 대기실에 앉아서 초조하게 몇 십 분을, 때론 한두 시간을 기다렸다가—어떤 저명한 교수님을 뵈려면 예약이 밀려 몇 달을 기다리기도 한다—하나님 같은 교수님과 단 3분 대면하고 나온다. 나는 병원에 가기 전에 머릿속으로 의사를 만나면 자신의 증상을 어떤 말로 어떻게 표현해야 하는지 생각하고 또 생각한다. 그리고 대기실에서도 진료실로 호출되기 직전까지 어떤 표현이 자신의 증상을 가장 잘 나타내 줄 것인지 생각하고, 어떤 질문을 어떻게 해야 마음속 궁금증과 불안을 해소할 수 있을지 고민하고 또 고민하다가, 내 이름이 불리면 얼떨결에 진료실로 들어가 하얀 하나님 같은 의사 앞에서 막상 아무것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고 어떤 질문도 하지 못한 채 황황히 진료실에서 나오게 된다.
나의 병력이 남달리 거창한 건 아니지만, 그리고 여기에서 일일이 설명할 것도 못 되지만 하여튼 나는 의학의 도움이 없었다면 지금 살아서 이 글을 쓰고 있지 못할 것이 거의 확실하다. 나뿐만 아니라 지금 내 동년배들 중 아마 절반 이상은 현대 의학이 없다면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닐지도 모른다. 충수염에만 걸렸어도 죽었을 것이고, 온갖 세균성, 바이러스성 전염병에 추풍낙엽처럼 떨어졌을 것이다. 상당수는 갓난아이일 때 뭐가 뭔지 모르고 세상에서 사라졌을 것이다. 지금 우리나라 사람들의 평균 수명이 83.5년(2020년 기준, 남자 80.5년, 여자 86.4년)이란다. 1920년대만 해도 우리나라 사람의 평균수명은 30세 남짓이었다 한다. 이처럼 놀라운 장수의 비결에는 다른 여러 원인들도 있겠지만 그 주된 원인은 의학의 발달이다. 그러니 의사들은 나에게, 우리 모두에게 참으로 고마운 분들이다.
의사라는 직업은 인간의 생명에 직접 관여할 수 있는 능력과 전문성을 가진다는 점에서 더없이 중요하고 가치 있는 일이며, 따라서 의사는 존경받고 명예를 누리며, 윤택하고 안락한 생활을 보장받아 마땅하다. 그 일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높은 지적 능력과 예리한 감각, 정확한 판단력이 요구되는 전문직 중의 전문직이다. 따라서 어떤 학생이 의과대학에 입학하고 졸업하여 의사가 된다는 건 긍지와 자부심을 가질만한 장하고 자랑스러운 일이다. 인생 성공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서 자식이 의사가 되면 부모의 어깨가 으쓱해지고, 동네 사람들에게 자랑하고 싶은 심정이 되는 것도 충분히 이해할 만하다. 자식 농사를 잘 지은 것이다. 가문의 영광이기도 하다.
의사는 사람들을 의사와 비의사, 의사와 환자라는 이분법적 시각으로 구분하는 듯하다. 일단 의사라는 신분을 획득하게 되면 철옹성 같은 계급의식과 자기들 간의 연대의식을 가지게 된다. 의사가 되는 과정이 그런 의식을 형성하는 과정이다. 내가 의예과 학생들에게 교양영어 과목을 강의했던 1997년의 일이다. 그때 나는 40대 초반이었고 유학에서 돌아와 대학 강의를 갓 시작했던 시기였다. 예나 지금이나 의예과 학생들은 두뇌가 명석하고 학업 성적이 우수한 그야말로 우등생들이다. 나는 큰 기대를 가지고 그 학기 수업을 시작했다. 그런데 학기 초부터 수업 분위기가 다른 대학 다른 학과의 학생들과 완전히 달랐다. 그에 대해 길게 설명할 필요가 없다. 최악이었다. 아무도 수업을 들으려는 태도가 아니었다. 전혀 관심이 없었다. 잡담하고 어수선하고 심지어 왔다갔다 했다. 비록 알량하지만 교수인 나—비의사인 나—를 개무시했다. 여러 차례 주의를 주어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참다못해 나는 “이 호로00들”이라고 버럭 화를 내고 말았다.
의대 학생들 대부분은, 아마도 SKY대학교를 제외하고는, 자기가 다니는 대학교의 범주에 포함되는 걸 달가워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들은 대개 따로 “의과대학”이라는 범주를 마음에 들어하고 즐겨 사용한다. 같은 대학교의 다른 단과대학—인문대, 공과대, 자연대, 농과대, 사범대, 경영대, 법과대 등—학생들과 같은 차원에 놓이는 걸 싫어한다. 그들은 무슨무슨 대학교 학생이라기보다는 의과대학 학생으로 분류되기를 원한다. 그리고 그런 의식이 그들에게 일생 동안 지속된다. 일종의 철저한 선민의식이다. 선민의식은 타 집단에 대한 우월감이고 배타적 태도이며, 거기에는 자칫 멸시하는 태도가 깃들게 된다. 물론 예외는 있다. 인품이 훌륭한, 그 앞에서는 저절로 고개가 숙여지고 감사와 존경심이 우러나는 그런, 덕성을 갖춘 의사들도 있다. 그러나 예외는 소수의 경우이기 때문에 특수가 되고, 주류는 다수이기 때문에 보편이 된다. 보편적이라고까지는 할 수 없지만 일부 의사들은 환자를 얕잡아 보고 때론 윽박지르고 또 때론 은근히 겁을 주면서, 자신의 절대 권위를 확인하기 위한 대상으로, 때론 자기 화풀이 대상으로 여기며, 또 한편으로는 돈벌이 대상으로까지 여긴다. 내가 강의 했던 교양영어 수업을 들었던 의예과 학생들이 그런 의사가 되었을까봐 걱정된다.
오늘날 의사라는 직업이 특권적 지위와 경제적 풍요를 누리는 직군이라는 건 굳이 언급할 필요가 없다. 대학입시에서 이과 최고 성적을 가진 학생들의 소위 의대 쏠림 현상이 의사의 사회적 위상과 경제적 지위를 충분히 입증하고도 남는다. 그래서 나라의 산업 발전에 근간이 되는 다른 이공계 혹은 과학계 전공에 공부 잘하는 인재들이 지원하지 않아 나라의 미래가 어둡다고들 한다. 과거에도 의대는 최고 우수한 학생들만 들어가는 선망 받는 전공 분야였지만, 대략 20세기까지는 인재들의 의대 쏠림 현상이 지금처럼 심각하지 않았었다. 과학과 이공 분야에도 뛰어난 학생들이 지원했었다. 그러나 지금은 고등학교 이과의 최우수 학생들이 거의 무조건 의대—어느 대학교냐에 상관없이—에 들어가고 싶어 한다.
한 나라와 한 사회가 유지되거나 발전하는 과정에서 어떤 종류의 직군과 정부 사이에, 어떤 직군과 다른 직군 사이에 이해관계가 상충하기 마련이다. 그런 경우 서로 각 직군이 더 큰 이익이나 더 유리한 조건을 얻으려고 저항하고 투쟁한다. 화물연대나 교사노조, 간호사 노조, 전기노조, 철도노조, 농민연대 ... 등 수많은 직군들이 이해관계 때문에 정부와 마찰한다. 그런 경우 노동자들은 무엇보다도 자신이 직장을 잃게 될까봐 염려하여 투쟁 방식에 신중에 신중을 기한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의사와 관련된 협회 회원들은 투쟁의 첫머리에 집단 사직을 내건다. 자기들 스스로 직장을 관두겠다는 것이다. 그런 특이한 자신감과 용기는 어디에서 나오는 걸까? 현재 환자나 잠재적 환자라는 볼모가 없다면 그게 가능할까?
의료계와 정부 사이에 벌어지는 지금의 대립과 갈등의 실질적인 근원이 무엇인지 나와 같은 일반인은 잘 알지 못한다. 정부 측에서는 우리나라 고령인구 비중이 크게 늘어나는 20년쯤 후에는 의사 수가 절대 부족하게 될 것이므로 지금 의대 정원을 늘려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10대나 20대가 평균적으로 병원에 가는 횟수와 70대나 80대가 병원에 가는 횟수는 너무도 큰 차이가 난다. 80대 이상이 되면 대부분 병원에 의존해서 살아간다. 의료 수요가 크게 늘어날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그 문제에 대해 의사 측이 어떤 대책을 가졌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또 한 가지 문제는 의사 숫자의 문제가 아니라 분야별 불균형 문제다. 필수 의료 분야에는 의사 가뭄이 심각하고, 반면에 비교적 쉽게 큰돈을 벌 수 있는 분야에 개업의사 수가 홍수 상태이다. 거기에 수반되는 문제로 필수 의료 분야에 종사하는 의사들은 수가(酬價)가 턱없이 낮다고 주장한다. 또한 의사 측은 의대 정원의 대폭 증원에 따른 의학 교육의 질 저하 문제를 지적한다. 그러나 정부는 그럴 염려가 없다고 말한다. 의료 현실의 또 다른 문제는 환자의 대학병원 쏠림 현상, 특히 소위 서울의 빅파이브 병원 쏠림 현상이다. 중대질환이거나 가벼운 질환이거나 상관없이, 즉 암이거나 감기거나 간에, 환자들이 대학병원으로 몰린다. 게다가 이른바 ‘큰병’이 걸리면 전국 방방곡곡의 환자들이 ‘큰돈’ 들여서라도 서울의 소위 빅파이브 병원에 가서 치료 받아야 살 수 있고, 그렇지 않으면 불안하다는 생각이 우리나라의 모든 사람들에게 퍼져 있다. 그러다 보니 큰병 걸렸는데도 빅파이브 병원에 가지 못한 지방 사람들은 병든 것도 고통스러운데, 인생 패배자가 된 듯한 자괴감마저 든다.
그처럼 복잡한 문제들에 대한 원인과 해결책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히 뭔가 잘못되긴 잘못되었다. 의사 측은 그러한 문제들에 대해 정부가 세밀하게 정책을 세우고 의사 측과 협의하여 서두르지 말고 원만한 방식으로 해결해 나갈 것을 주장하는 듯하다. 한데 정부와 의사들과의 갈등을 대하는 일반 국민들은 그 문제에 대해 두 당사자들과는 좀 다른 차원에서 지지하거나 반대하는 것 같다. 보통사람들은 의료 서비스의 불편과 불평등에 불만이 있고 의사들의 특권 의식과 고압적 태도 때문에 마음속에 울분이 쌓여 있는듯하다. 그래서 대체로 정부 측 입장을 지지하는 듯하다. 환자는 의사가 천사나 성인군자이기를 바라는 게 아니다. 단지 의사가 환자 자신을 정중하게 대해주기를 바란다. 마음이 한없이 약해진 상태의 환자가 하늘같은 의사에게 기대하는 직업윤리는 정중하고 성실한 태도로 자신을 대해 달라는 것이다.
사회는 유기체여서 모든 직종 모든 직군이 긴밀하게 연결되어 상호작용하며 공생함으로써 유지된다. 생명 유지에 직접적이고 필수적인 기능을 담당하기는 농부나 군인이나 환경미화원이 의사에 못지않다. 강자가 약자를 멸시하고 약자에게 군림하고 으스대는 건 짐승들의 특성이다. 인간만이 약자를 배려할 수 있다. 약육강식은 정글의 법칙이다. 우리 인간이 그 단계를 벗어날 수 없다면 다수의 약자뿐만 아니라 군림하는 소수의 강자도 심지어 최강자도 결국은 불행하게 된다. 다른 짐승들과는 달리 인간은 의식과 감정을 가지고 있어서 오로지 자연 법칙에 지배받는 세상에 만족할 수도 평화로울 수도 없다. 인간은 부당한 상황에 분노하고 저항하고 싸운다.
첫댓글 어제 올린 글에 지나치게 감정적인 표현들이 들어 있어서 조금 고쳤습니다. 이 문제에 대해 몇몇 제 주변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눈 결과이기도 합니다.
앙리홍님께서 올리신 소중한 댓글이 제 원문 삭제와 함께 사라져 버렸습니다. 제가 그렇게 될 걸 알지 못했습니다. 사과드립니다. 가능하다면 고견을 다시 실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