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흥경찰서 읍내지구대 4거리에 '길목장'이란 곳이 있습니다.
카페 이름에 왜 하필 '목장'을 붙였을까 의아해 하면서도 흔한 작은 카페라 생각하고 무심히 지나치곤 했습니다.
(이렇게 간판도 작고 인테리어도 요란하지 않아 주의깊게 찾지 않으면 지나치기 쉽습니다.)
우리마을에는 버스가 6시 30분, 9시 40분, 12시 30분, 18시 30분 이렇게 4차례 오는데, 주로 마을 어르신들이 이틀에 한 번 한의원에 침 맞으러 갈 때 이용합니다. 첫차를 타고 가서 1시간 30분 정도 한의원 밖에서 대기하다 한의원 문 열자마자 서둘러 침을 맞고 9시에 터미널에서 출발하는 두 번째 버스를 타고 돌아옵니다. 침 맞는 순위가 밀려 두 번째 버스를 놓치면 무척 힘들어집니다. 점심 때까지 하염없이 다음 버스를 기다리는 분도 계시고, 성미가 급하신 분은 30리 길을 걸어서 오시는 분도 계십니다. 농사일이 한가해진 겨울에도 사정은 마찬가지 입니다. 특히 캄캄한 새벽에 한의원 문밖에서 번호표 뽑아들고 떨고 계신 어르신들을 보면 죄없는 한의원을 괜실히 원망하게 됩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차를 몰고 읍내를 오가다 히치하이킹하는 어르신들을 모른채 할 수 없습니다. 무작정 차를 세우고 세탁비누를 사오라고 하시는 분도 계시고 식용유나 막걸리를 사오라는 분도 계십니다. 막무가내로 차 문을 열고 타시는 분도 계십니다.
한 번은 마을 어르신을 차에 태운 적이 있는데, 갑자기 "치즈가 뭐냐"고 물으면서, 아랫마을 목장집 아들 내외가 읍내에서 가게를 열고 치즈를 판다고 하더군요. 젓을 짜서 우유도 팔고, 요루르트도 만들어 판다고요. 어르신 말에 단번에 떠오른 곳이 '길목장'이었습니다. 뭔가 행복한 노동을 위한 상상의 일면을 보여줄 것 같은 예감에 검색해 보니 이런 기사가 나오더군요.
장흥군 낙농 2세대 청년, 수제 치즈 제조에 도전장
“ 인하대 생물공학 석사학위 받고 고향 내려 온 젊은 낙농인”
“2005년부터 각종 유가공 제조 교육받고 올해 10월부터 유제품 생산”
장흥군 낙농 2세대 청년이 수제 치즈와 요구르트 제조에 나서 눈길을 끌고 있다. 화제의 주인공은 장흥읍 성불리 길목장의 정찬섭(남, 41세)다. 정 씨는 지난 2003년 인천시 인하대학교 생물공학 석사학위를 마치고, 아내 김유진(여, 37세) 씨와 장흥에 귀농한 2세대 젊은 낙농인이다. 이들 부부는 젖소 목장에서 생산한 우유를 활용해 치즈, 요구르트, 버터 등을 제조·판매하는 ‘목장형 유가공 상품화 시범사업’을 전남농업기술원과 공동으로 추진하고 있다.
건강하고 맛있는 유제품을 만들기 위해 정 씨 부부는 2005년부터 각종 교육과 실습에 매진해 왔다. 2012년 한국국공립대학평생교육원 유제품가공기사를 취득한 것이 그 첫 단추였다. 이어 순천대학교, 농촌진흥청, 전남농업기술원 등에서 유가공 제조와 관련하여 100시간이 넘는 이론과 실습교육을 이수했다.
정 씨는 올해 10월 장흥읍에 공방 겸 판매장을 열고 본격적인 유제품 생산에 나섰다. 판매하는 유제품은 쿼터량 납품 이외의 남는 우유를 활용해 만든 수제 요구르트와 구워먹는 할루미치즈, 생치즈, 숙성치즈 등이다. 쿼터량 외 남는 우유는 보통 kg당 100 ~ 300원 수준에 판매되지만 이 우유를 이용해 수제치즈와 요구르트를 만들어 판매하면 Kg당 각 5천원과 7천원에 판매할 수 있다. 최소 10배 이상의 소득 창출 효과가 있는 것. 정 씨 부부는 앞으로 건강한 우유를 직접 생산하고, 이를 유제품으로 가공해 소비자에게 직접 전달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앞으로는 풀을 먹인 젖소에서 나오는 ‘그라스 페드 밀크(Grass-Fed Milk)’를 생산할 계획이다.
정찬섭 씨는 “건강한 유제품을 생산해 여러 단계의 유통과정 없이 소비자들에게 직접 공급하는 시스템을 갖출 것”이라며 “소비자는 믿을 수 있는 유제품을 먹고 생산자는 제 값을 받는 선순환을 만들고 싶다”고 말했다.
아시아경제, 2017.12.06
알만한 지인들에게 의견을 묻고 요구르트 사런 간 척 사전답사를 마치고 드뎌 청소년들과 길목장을 방문해 보기로 했습니다. 갑작스러운 방문 요청에도 사장님 김유진 씨는 "우리 지역 청소년이 온다는데 뭐든 해야지요"라며 흔쾌히 방문을 허락해 주었습니다. 보통은 사정을 해야 마지못해 허락해 주는 경우가 많은데 의외의 반응이었습니다. 뭔가 기대감이 생기더군요.
일이 쉽게 잘 풀린다 했더니 방문일에 원래 참석하기로 한 청소년 2명은 어디 딴 볼일 생겼다며 째고 나머지 2명만 함께 했습니다. 미리 O.T.를 갖고 질문할 내용도 정리하고 역할도 분담했습니다. 또 필기도구 따윈 안갖고 다닌 관계로 하나로마트에 들러 필기도구도 사서 챙겨줬습니다.
청소년들은 유진 씨가 내온 따끈한 유기농 우유와 스트링 치즈, 요구르트에 넣는 딸기는 잘 받아 먹으면서도, 글자는 단 한자도 적지 않더군요. 문방구에 기자수첩이 없어 하나로마트까지 가서 사준 필기도구가 무색하고 사장님 보기에도 민망했습니다. 그런데 단 한 순간도 사장님에게 시선을 떼지 않고 집중하더군요. 미리 계획한 질문은 잊어버리고 드닷 없는 그러나 적절한 질문들도 하고요. 학교에서 볼 수 없는 낯설은 모습이었습니다.
뭐지? 사장님이 추구하는 순환농업, 책임소비, 로컬푸드, 푸드마일리지, 그린캠페인 같은 얘기가 청소년들에게 그렇게 흥미로웠던걸까요? 아님 사장님의 따뜻한 환영과 세심한 관심, 은근한 열정과 확신, 솔직하면서도 당당하고 세련된 태도가 그의 얘기를 흥미롭도록 만든 것일까요? 추구하는 가치가 고스란히 반영된 유진 씨의 노동과 삶은 확실히 존경스러웠고 행복한 노동을 위한 상상의 문 하나를 열어줬습니다. 그러나 나에게는 유진 씨 얘기에 집중하는 청소년들의 눈빛이 깊은 인상을 남겼습니다. 아니 그렇게 만든 유진 씨의 뭔가 특별함이요.
유진 씨 부부는 기사에 나온대로 부모님의 젓소목장을 토대로 오랜 준비시간을 거쳐 작년부터 읍내에 길목장을 열었습니다. 부모님의 목장에 젓소 다섯 마리를 따로 키우고 있는데, 인공사료 대신 오염 없는 풀과 농작물을 먹이로 주고 살기 좋은 환경으로 가꾸고 스트레스 없도록 건강을 돌봅니다. 송아지는 2년을 키워 새끼를 낳으면 어미소가 되고 그때부터 우유를 짤 수 있다고 합니다. 그렇게 짠 우유와 그 우유로 만든 요구르트와 치즈를 만들어 판매합니다.
저는 우유와 치즈는 먹지 않아 맛의 차이를 잘 모르겠지만, 요구르트는 한 번 길목장 것을 먹으면 다른 요구르트는 먹지 않게 되더군요. 여름에 딴 블루베리를 냉동해 두었다가 요구르트에 넣어서 매일 아침 먹는데, 길목장 것을 먹어 본 후로는 마트에 나온 요구르트는 더 이상 안 먹고 있습니다. 한 병을 사서 덜어 먹는데 3일 정도 먹습니다. 친구들이 집에 놀러오면 아침으로 길목장 요구르트를 덜어 줍니다. 열이면 열 모두 돌아갈 때 길목장에 들러 한 병씩 통째로 마시고 가더군요. 해장 한다고요.
우유 생산량이 많지 않으니 판매량도 많지 않습니다. 그래도 적자는 아니라고 하니 다행입니다. 오염되지 않는 풀을 구하기 어려워 비싼 가격을 주고 구입하는데 이게 가장 큰 애로점입니다. 흙이 있는 곳이면 어디서나 자라는 것이 풀인데 오염되지 않은 풀을 구하려면 수입에 의존해야 할 정도라고 합니다. 마을에서 자란 풀을 소가 먹고 소의 배설물로 농사를 짓고 수확물을 다시 소와 나눠먹고 이러면 좋을텐데 말입니다. 말은 참 간단하고 쉬운데 참 어렵고 복잡한 일인 듯 합니다. 농촌의 관행농을 설득할 수도 비난할 수도 없습니다. 도시의 오염과 농촌으로의 확산은 정말 어디서 어떻게 답을 찾아야 할 지 모르겠습니다.
유진 씨는 '로컬푸드와 책임소비'에서 그 답을 구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길목장'은 '길 목장'이라고 불러도 되고 '길목 장'이라고 불러도 됩니다. '길목 장'이라 부를 땐 '길목에 친구들과 함께 펼친 난장'이란 의미인데, 유진 씨의 꿈이 잘 표현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유진 씨는 길목장을 통해 순환농업과 로컬푸드를 실현하고 또 함께 할 친구들을 찾아 관계를 맺고 그런 관계가 널리 퍼져나가면 언젠가 길목에 친구들과 난장을 펼치고 싶다고 합니다. 그래서 길목장이 생산하는 모든 제품의 브렌드는 '도깨비풀'입니다. 숲에서 소 먹일 풀을 베어 등에 지고 오시는 시아버지 몸이 도깨비풀씨로 뒤덮인 것을 보고 지은 이름입니다. 도깨비풀처럼 길목장의 생각이 사람들을 통해 널리 퍼졌으면 하는 바램을 담고 있다고 합니다.
환경적으로 부담을 줄이는 방법으로 로컬푸드를 생산하는 사람들, 가격이 조금 더 비싸더라도 로컬푸드를 사는 책임소비를 실현하는 사람들이 모두 유진 씨의 친구입니다. 어린이도 좋고 청소년이어도 좋고 남자도 좋고 여자도 좋고 모두 친구가 될 수 있습니다. 저와 제 친구들 그리고 이번에 함께 탐방한 청소년들도 이미 친구가 되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른 아침부터 저녁까지 젓을 짜고 가공하고 판매하느라 바쁘고 힘들지만, 유진 씨는 장흥으로 시집 온 게 태어나서 제일 잘한 일이며 시골에서 사는 것이 가장 확실한 스펙이고 자랑이랍니다. 그런 그가 펴쳐나갈 난장이 곧 이뤄지길 바라며 응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