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3대 종교 가운데 하나인 천주교의 가장 높은 상징적 인물은 로마 교황이다. 그 가운데 1980년대에 재임하였던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재위기간 : 27년, 1978.10.~2005.4.) 성하(聖下)는 생전에 우리나라를 두 번이나 방문했다.
그는 시인이자 연극배우, 석공 출신이며, 첫 공산국가(폴란드) 태생에다 455년 만의 첫 비(非) 이탈리아계, 그리고 사상 최초의 슬라브계 교황이라는 ‘사상 최초’라는 수식어가 많이 따라붙는 교황이었다.
그런 그의 첫 번째 방문은 1984년 5월 3일부터 7일까지 4박 5일 일정으로 이루어졌다. 이때는 한국 천주교 전래 200주년 기념행사와 조선 후기에 천주교가 중국에서 조선으로 들어오는 과정에서 당시 조정으로부터 박해를 당해 순교한 김대건(金大建) 신부 등 103인에 대한 시성식(諡聖式)을 집례하기 위해서였다.
두 번째는 1989년 10월 7일부터 9일까지 2박 3일 일정으로 옛 여의도 광장에서 열린 「세계 성체(聖體)대회」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당시 총무처(현 행정안전부) 의정과에서 국가 의전행사의 실무를 총괄하던 필자는 두 번 모두 교황 성하를 영접하는 환영행사를 직접 담당하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 당시에는 까다로운 영접 절차로 인해 준비하는데 힘들어했지만 지금도 그 당시의 일에 남다른 자부심을 갖고 있다.
그의 방한과 관련해 우리 국민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준 것은 교황의 품위 있는 매너와 인자한 모습, 그리고 김포국제공항에서 거행된 첫 번째 환영식 때 가진 친구(親口) 의식이 아닌가 생각된다.
세계적 인물이라 거의 1년 전부터 준비에 착수
때는 전두환 대통령의 집권 초기인 1983년 9월이다. 우방국의 국빈을 초청하는 행사를 총괄하던 외무부(현 외교부) 의전장실로부터 해외 VIP가 우리나라를 방문할 계획이니 대책 회의에 참석해 달라는 연락을 받았다.
막상 회의에 참석해 설명을 들어보니 그다음 해인 5월경에 로마 교황이 우리나라를 방문할 계획이라고 하지 않는가. 아직도 8~9개월이라는 여유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너무 이른 시기에 관계기관 회의를 소집한 데 대해 관계기관 참석자들은 모두 불만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대부분의 일반 국빈들은 대략 2~3개월 정도 이전부터 준비에 착수하였고, 특별한 내용이 없으면 문서로 통보하는 것이 관행이었다. 이에 비하면 교황 방한의 경우는 아주 이례적이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상 주관부처인 외무부는 1년 전부터 교섭을 시작한 셈이다.
아무튼 이 회의에서는 외무부가 관례대로 국가적 차원에서 거행되는 공항 환영식과 환송식을 총무처가 담당해 달라는 요청을 하는 한편, 세계적 종교 지도자인 만큼 일반 국빈들과는 다소 다른 의식절차가 진행될 수 있다는 언질을 받았다.
엄숙하면서도 정중한 환영식 준비에 들어가
로마 교황이 우리나라를 방문하던 1980년대 당시에는 남북한이 국제사회에서 한 나라라도 더 우군(友軍)을 확보하기 위하여 치열하게 외교 전쟁을 벌이던 때였다. 따라서 대통령이 직접 공항에 나가 국빈을 영접하고, 또 배웅할 정도로 정성을 기울이는 것이 당시의 외교 현실이었다.
공항 환영식에는 당시 전두환 대통령을 비롯하여 3부요인, 외무부장관 등 관련 국무위원, 주한외교단 등의 다수가 참석하는 게 하나의 관행이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이례적으로 교황 방한이라는 행사의 특수성을 감안해 천주교의 김수환(金壽煥) 추기경을 비롯한 대주교와 주교단 전원을 초청하였다. 이에 더하여 멀리 필리핀의 정신적 지도자 「하이메 신」추기경까지도 특별히 참석했다.
그리고 행사 실무요원으로서 평소 김포공항 부근에 위치한 실업계 고등학교 학생들이 참여하던 관례를 깨고 이례적으로 천주교 계열 재단인 중구 명동의 계성여고 학생 약 1,000명이 여고 합창단으로 참여하고, 교황께 환영의 꽃다발을 드릴 화동(花童)도 평소 종로구 대학로의 서울대사범대학 부설 초등학교 학생 가운데 선발하던 관례를 깨고 「천주교 환영준비위원회」의 추천을 받아 여자 어린이 한 명을 선발하는 등 행사 준비에 임했다.
공항 환영식은 물론 김포공항에서 광화문에 이르는 주요 가로에는 태극기와 교황청 깃발을 게양하는 등 어느 행사보다도 대내외의 뜨거운 관심 속에 준비를 차근차근 진행하였다.
가장 어려웠던 ‘친구’(親口) 의식 준비
그런데 환영식 준비에 어려운 문제 하나에 부닥쳤다. 문제가 된 것은 바로 ‘친구’(親口)라는 의식이었다. 아직까지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이 친구 의식이란 무엇일까?
외무부와 천주교 측의 설명에 따르면, 우리나라를 처음으로 방문하면서 교황께서 ‘창조주를 찬미하고, 과거 순교를 당한 이 땅에 경의를 표하는 의식’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탑승한 항공기의 트랩을 내려온 뒤 처음으로 마주치는 것은 한국의 포근한 흙이 아닌 딱딱한 공항 활주로가 아닌가. 이 딱딱한 활주로 위에 하는 것이 과연 합당한 것일까 하는 고민이 시작되었다. 이 방안을 해결하기 위하여 관계기관 회의도 여러 차례 열었으나 속 시원한 묘안이 떠오르지 않았다.
여기에서 막바지로 논의된 방안은 크게 두 가지였다. 첫째는 공항 활주로의 두꺼운 아스팔트를 가로세로 각 1m 길이의 면적에 흙이 나올 때까지 파낸 다음 그 빈 공간에 부드러운 흙으로 채워 넣자는 것이었다. 둘째는 1회용 행사를 위하여 안전이 생명인 공항 활주로에 손상을 입히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으므로 해당 지점 바닥 면을 소방 살수차로 깨끗하게 물청소한 후 실시하면 무난하지 않겠냐는 것이다.
이리하여 논란을 거듭한 끝에 최종적으로는 후자 방법을 채택하기로 결정이 났다. 해당 지점은 교황께서 모든 일정을 마치고 이 땅을 떠날 때까지 특별공간으로 관리하였음은 두말할 나위 없다.
특유의 인자한 모습으로 트랩에 모습을 드러내다
공항행사 준비에 몰두하다 보니 어느덧 환영식 날인 1984년 5월 3일이 다가왔다. 처음으로 우리나라를 찾은 교황의 탑승기가 5월의 따스한 봄 날씨 속에 김포국제공항 상공에 모습을 드러냈다.
탑승기가 지정된 위치에 멈추고 얼마 지나자 교황이 트랩에 나와 특유의 인자한 모습으로 환영객들을 향해 반갑게 두 손을 들어 답례하였다. 외무부 의전장(儀典長)과 주한 교황청 대사의 기내 영접을 받아 얼굴에 미소를 띠며 트랩에 나타난 것이었다.
▲「요한 바오로 2세」가 공항에 도착해 트랩에서 두 손을 들어 환영나온 인사들에게 답례하고 있다.
한 발 한 발 조심스레 트랩을 내려와 지면에 첫발을 디딘 후 교황은 여태까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친구’의식을 진행하였다. 교황은 경건하게 무릎을 꿇고, 두 팔을 땅에 짚고 엎드려 활주로 땅에 입을 맞췄다.
우리 대한민국의 영토에 처음 입맞춤한 것이다. 고통과 시련의 땅에 평화와 화해를 갈구하는 의미가 담겨있다고 한다. 모두가 이 모습을 숨죽이며 지켜보았다.
이 광경을 직접 취재하던 기자들도 일시에 발걸음을 멈추었고, 보도진들의 셔터 누르는 소리가 한동안 요란했다.
활주로 바닥을 향해 허리를 굽혔을 때 교황 머리 위에 가볍게 눌러쓴 둥근 모양의 ‘흰색 모자’가 혹시나 바닥으로 떨어지면 어쩌나 하고 조마조마했던 기억이 지금도 새롭다.
▲ 교황 요한 바오로2세가 김포국제공항에 첫발을 내디딘 후 허리를 굽혀 ‘친구(親口)’의식을 진행하고 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