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참모습의 본질
봄이 되면 나무들이 생기를 띠고 뿌리를 통해 가지마다 물을 전달하느라 바쁘다. 그때 가만히 나무 몸통을 보고 있으면 물이 올라가는 순환 때문에 짙은 색으로 변화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 물기운이 줄기를 타고 올라가면, 가지마다 솟아오른 몽우리들이 통통하게 물이 오르면서 피어날 준비를 한다. 만약 한 나뭇가지가 죽어버리면 생생하던 몽우리는 더 이상 부풀어 오르지 못하고 그 상태를 유지하다가 말라버린다.
두 갈래의 가지는 몽우리 안에 분명히 피어야 하는 잎사귀가 있었겠지만, 하나는 피고, 하나는 피지 못한 것이다. 몽우리가 피어난 것은 분명 뿌리로부터 물이 공급되고 그 가지가 물을 나를 수 있는 생기가 있었던 것이고, 하나는 뿌리로부터 올라오는 물을 몽우리까지 공급해야 하는 줄기가 생기를 잃어버린 것이다.
우리는 이 두 가지 경우에서 어느 쪽은 사실이고, 어느 쪽은 사실이 아니라고 할 수 있겠는가. 피어난 것과 피지 못한 것으로 몽우리가 가지고 있었던 본래의 진식(眞識) 자상(自相, 여래장식의 진상)이 달라지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래서 자각성취(自覺聖趣)의 입장이라는 것은 언제나 항상 같다. 그것이 피어나고 피어나지 않는 차이에 상관없이, 본래 머금고 있는 참모습은 언제나 변함없음을 아는 것이다. 그러니 돈오(頓悟)와 점수(漸修)가 가지고 있는 여래장은 똑같지만, 그것이 피어나게 하는 것은 인연의 법칙일 뿐, 어느 쪽을 옳고 그름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
남악 회양 선사는 마조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대가 심지법문(心地法門)을 듣는 것은 종자를 땅에 심는 것과 같고, 내가 법을 설하는 것은 하늘에서 비를 뿌리는 것과 같으니, 그대의 인연이 맞았으므로 도를 보게 될 것이다.” 이런 가르침으로 볼 때, 돈오의 법은 누구에게도 드러날 수는 없지만, 혹 드러났다 하더라도 드러난 그 잎사귀가 그 본질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 잎사귀가 아니라고 하여 몽우리에서 나오지 않았다고는 하지 못한다. 이처럼 ‘돈오의 법입니까? 점수의 법입니까?’라는 질문은 결과론적인 입장에서만 보려고 하는 치우친 관념일 뿐이다.
“이들은 점차로 이루어지는 것이지 결코 갑자기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네. 하지만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네.”
관점과 관념의 논리라는 것이 현식(現識)을 파악하는 데 인간에게 주어진 도구인 것은 맞지만, 관점과 관념은 수시로 변화하기 때문에 고정하여 의지하게 되면, 그 변화하는 순간에 수많은 번민이 나타나 우리에게 선택할 수 없는 선택권을 부여함으로써 자연스럽게 일어나고 사라지는 실체 없는 허상에 휩싸이게 된다.
참모습의 본질이 드러나는 것은 느릴 수도 있고, 빠를 수도 있지만, 어느 하나의 논리가 맞다거나 틀리다고 하는 것은 참모습의 본질을 무시하고 어느 특정한 하나의 방법으로 모든 것을 인식해 보려는 잘못된 관념이다. 설사 그것이 맞다 하더라도 다른 것을 틀리다고 할 수는 없다. 물론 법계일신(法界一身)에서 출발하여 사물의 본질을 나타낸다면, 분명 그것은 돈오돈수이다. 그러나 돈오점수라 하여 법계일신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한다면, 그것은 그렇지 않다. 돈오돈수와 돈오점수는 나[我]에 대한 정의가 어떻게 되는지에 따라 그 지향점은 완전히 달라진다. 나에 대한 정의가 같다면 두 가지는 같은 방향을 바라보겠지만, 나에 대한 정의가 다르다면 두 가지는 다른 방향을 보는 것이다. 그래서 돈오돈수가 옳은 것인가, 돈오점수가 옳은 것인가는 그 논의 자체가 무의미하다.
우리가 ‘나’라고 하는 ‘나’와 법계일신에서의 ‘나’는 같은가 다른가를 구별하는 그런 의미가 아니다. ‘나’라는 명칭은 같은 글자이지만, 그것이 지칭하는 곳은 완전히 다른 곳이다. 이 둘의 의미와 지칭이 다르다는 것을 분명히 알지 못하면, 어떤 개념으로 어떤 사물을 보고 판단하여 그것이 최고의 분석이 되고 다른 이에게 의미가 잘 전달되었다 하더라도, 그것은 그것을 전달한 것이 되지 못한다.
지휴 스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