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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이렇게 살았다 / 욥 7:1-7, 막 1:29-39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이며, 그를 믿는다는 것은 그를 본받아 그가 가르친대로, 그가 행하신대로 사는 사람이다. 독일말로 그리스도인을 크리스트라고 하는데 이는 그리스도란 말 그대로이다. 그리스도인을 그리스도라 함은 좀 지나친 표현일지 몰라도 그리스도의 사람이란 뜻이므로 그리스도가 시키는대로 그리스도에게 속한 사람, 그리스도를 위해서 사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라 하겠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그리스도를 배우는 사람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어떻게 사셨는가, 그의 지상생활이 어떠했는가 함을 그는 이렇게 살았다는 제목으로 말씀드리고자 한다. 예수님의 지상생활은 너무도 신비한 점이 많고, 또 너무도 경이적인 것이 많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생활을 배운다는 것은 그리스도와 같은 사람이 되지 아니하면 배우기가 곤란하다고 스스로 단념해 버리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결코 우리가 배우고 본받을 염두도 내지 못할만큼 신비스러운 일과 이해할 수 없는 일만 하신 분은 아니다. 그는 완전한 인격을 갖추신 분이며, 또 완전한 인간성을 갖추시고 우리와 똑같은 사람으로 우리 같은 사람들과 함께 사셨다. 그래서 우리가 그리스도를 배우고 본받는 일을 그의 생활을 자세히 알아보지도 않고 단념해 버릴 수는 없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된 일을 자랑으로 삼는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서 배울 것을 배우고 본받을 것을 본받아야 한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마가복음의 기록을 보면 예수님이 생활이 무엇보다 분주하신 생활이었음을 알 수 있다. 35절에 ‘새벽 아직도 밝기 전에 예수께서 일어나’, 32절에는 저물어 해 질 때까지 분주하게 일하신 예수님이었음을 보여준다. 그는 새벽 아직도 밝기 전부터 저녁 때까지 분주한 생활을 하신 분이다. 막 6:31절을 보면 ‘이는 오고 가는 사람이 많아 음식 먹을 겨를도 없음이라’고 하였다. 막 2장에서는 문 앞까지도 들어설 자리가 없을만큼 사람이 많이 모여 지붕을 뚫는 것 같은 비상한 방법을 쓰지 않으면 그를 보기가 힘들다고 했다. 막 3장에서는 예수님께서 호숫가에 계시면 거기에 사람들이 너무 많이 모여 복잡하기 때문에 무리가 에워싸 미는 것을 피하기 위하여 작은 배를 타고 계시지 않으면 안되었다. 또한 6:56절에는 그가 마을이나 도시나 촌이나 어느 곳을 돌아다니든지 그가 오셨다는 소문이 퍼지면 인근각처에서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5:24절에는 그가 길을 갈 때도 큰 무리가 따라가며 에워싸 밀었다고 했다. 예수님의 생활은 이렇게 새벽부터 저녁까지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생활이었다. 마가복음만 해도 이 많은 사람들을 무리들, 큰 무리들, 많은 무리들이라고 표현했다. 이 사람들의 수가 어떤 때는 4천, 어떤 때는 5천이나 되며, 그들 가운데는 먼데서 온 사람도 있었다고 했다. 눅 12:1절에는 그 무리의 수가 수 만명이 모여 서로 밟힐 만큼 되었다고 기록했다.
이러한 성서말씀들을 보면 예수님의 생활은 언제나 어디서나를 막론하고 사람들의 모임으로 둘러싸이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인다고 하는 것은 예수님 자신이 어느 곳을 가나 쉴새 없이 일을 하시는 분주한 분임을 보여준다. 오늘 우리들이 바쁘다, 분주하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사용한다. 심지어 너무 바빠서 집에서 기도나 성서를 볼 수도 없거니와 주일날 한시간 교회당에 나와 예배드리는 일까지 할 수 없다고 한다. 자기들 일이라면, 또는 체면 때문에, 자기들의 생각과 계획을 실천하기 위해서, 또한 새벽 6시에 여행을 위해 사람을 만날 약속을 했다면 6시 전부터 깨어서 준비하는 사람들이지만, 하루에 한번씩 하나님을 만나는 일에는 내가 너무 분주해서, 고단해서 할 수 없다는 대답이다. 많은 사람이 너무 분주한 생활을 하기 때문에 예수님처럼 식사할 겨를도 못가지고 잠잘 시간도 그다지 못가지고 무엇을 한다. 그렇지만 예수님이 분주하신 것과 우리들이 분주한 것과는 그 일의 성질상 큰 차이가 있다. 예수님은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주고 각종 병든 자를 고쳐주셨을 뿐만아니라 영혼의 상처까지도 치료해 주시느라고 예수님은 분주한 생활을 했다. 다시 말하면 다른 사람을 위하는 일 때문에 새벽부터 저녁까지 분주한 생활을 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 언제 한번 자기 자신의 일을 위하여 분주한 시간을 보냈다는 기록을 성서에서 찾을 수 있는가? 그의 생활은 철저하게 남을 위한 것이었다. 그는 진실로 남을 위해 사셨다가 남을 위해 분주한 생활을 하시다가 또 남을 위하여 생명을 바치신 분이다. 그는 언제나 남 도울 일을 피하지 아니하고 그런 일만 찾아서, 또 그런 일 하기를 즐기는 생활을 했다. 그런데 우리는 이렇게 남을 위하여 살아갈 수 있는가? 또 그렇게 살았는가? 그러나 예수님의 생활은 자기를 돌보느라 남에게 유익한 일을 거절하신 분도 아니다. 언제나 즐겁게 자가기 할 의무 이상으로 생각하시어 모든 사람들의 무거운 짐들을 벗겨 주시려고 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용감하게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할 수 있었다.
사람들이 다른 사람을 위하여 하는 일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있기는 하지만 남을 위해 무엇을 한다고 할 때는 항상 이것을 해주면 그 댓가로 내게 무엇을 해주리라는 기대를 염두에 둔다. 무슨 일을 수고스럽게 해 주었는데 아무런 보답이 없을 때는 스스로 섭섭함을 가지고 다시는 그런 일을 하지 않으리라 다짐하기도 한다. 그러나 예수님이 남을 위해서 하신 경우에는 언제나 그것이 다른 사람을 위하는 일이기 때문에 하셨고, 자기를 위하는 동정이나 수고는 거절하셨다. 물론 사람들 가운데는 자기의 유익을 떠나서 남을 위하여 일하는 사람도 있다. 그런 사람은 참으로 예수님의 생활을 잘 본받는 그리스도인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자기의 시간과 수고와 물질을 남을 위해 사용하는 것을 거절한다. 여리고 도상에서 강도를 만나 죽어가는 불쌍한 사람의 신음소리를 듣고도 제사장이나 레위인처럼 얼굴을 돌리고 보지 않을 각오와 무엇을 해주지 않을 각오를 하고 사는 사람들이 많다.
기독교를 비웃고 반대한 유명한 사람 중 한 사람인 독일의 철학자로 니체라는 사람이 있다. 그는 기독교의 윤리, 곧 남을 도아주는 윤리, 불쌍한 사람을 위하여 무엇을 해주기를 권하고 장려하는 기독교의 윤리를 노예의 도덕이라고 하면서 약자의 윤리라고 했다. 그는 남을 도와주는 대신에 자기를 위한 일이라면 무엇이나 하라고 주장하였다. 심지어 우리가 길을 가다가 어떤 병약한 사람이 넘어지려고 하거든 그를 도와주고 불잡아 줄 생각 대신에 그를 밀어서 넘어뜨리라고 하였다. 왜냐하면 이렇게 남의 도움을 받아야만 하는 사람들은 하루라도 빨리 이 땅 위에서 없어져야만 건강한 사람만이 남을 것이다. 그리고 독일 민족이 세계에서 강한 민족이 되는 길은 이렇게 자기들 스스로 약자를 없애버리는데 있다고 하였다. 소위 강자의 철학, 전쟁이 철학이라고 하여 기독교가 연약한 사람을 동정하는 것을 한사코 반대했다. 그러나 이런 강자의 철학을 부르짖은 니체는 결코 강한 사람은 못되었다. 그는 결국 정신병에 걸렸고 또 자기 스스로 자기 목숨을 끊고 말았다. 우리는 남을 돕고 남을 위해서 무엇이나 해야 한다는 기독교의 윤리, 그리스도의 교훈, 그리스도가 사신 그 생활을 반대한 결과가 무엇인지 니체를 통하여 잘 알 수 있다. 그것은 그렇게 위하던 자기의 파멸인 동시에 남에게 악영향을 영원히 끼치는 것이다. 요즘 사람들의 생활은 너무도 이기적이고 너무도 개인적이다. 현대인은 궂은 일의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을 거론하지만 그밖의 모든 일에서는 오직 자기만 위하는 것이 현대인의 특징이다.
인도의 선교사 스탠리 존스는 인도의 어느 궁중 건물을 본 소감을 기록을 했다. 그 집은 밖으로 내다볼 수 있는 창문이란 하나도 없고, 천정과 벽과 바닥이 모두 거울로 만들어진 곳이다. 거기에 들어가는 사람은 위 아래 오른쪽 왼쪽 모든 곳에서 자기만 볼 수 있고, 자기 외에는 볼 수 없었다고 한다. 예수님의 남을 위하는 생활을 배우지 않는 사람은 이런 거울 집에서 사는 사람이다. 어느 편에서든지 자기만 보이고 자기만 보려고 애쓰는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밖을 내다볼 수 있는 창문 있는 방에 사는 사람이다. 그 창문으로 늘 밖을 내다보고 누가 내 힘을 요구하고, 누가 내 마음을 원하고, 누가 내 재물을 원하고, 누가 내 물건을 원하는지 항상 살피는 사람이다. 창문을 닫고 안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그 창밖을 나오셔서 언제나 그 어려운 사람들이 살아가는 그 거리로 나오셔서 이들을 고치시고 위로하시고 희망을 주고 어루만져 주신다. 우리는 창 밖을 내다보고 그 사람 참 딱하다, 불쌍하다는 동정의 말만 하는 것으로 그쳐서는 안된다. 우리는 고민하는 그들 곁으로 와야 하고, 그들의 손을 잡아야 하고, 그들과 아픔을 나누고, 콩 한쪽도 나누눈 남을 위하는 생각과 생활이 있어야만 비로소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의 자격을 갖는 것이다.
신앙은 결코 우리 생활의 치장이 아니라 우리 생할의 원동력이다. 신앙은 결코 한가한 사람들이 그 시간을 별다르게 향락하는 일종의 도박은 아니다. 이는 철저하게 우리가 살아가는 목적인 동시에 그 목적을 위한 방편이다. 신앙은 결코 죽은 다음에 나 하나만 천당가는 것을 준비하는 천당예약을 위한 공적이 아니다. 이는 어디까지나 현재 내 생명을 가지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수님이 그 몸소 보여주신 일을 실천해 보려고 노력하는 생활이다. 예수를 믿어도 그의 눈에 남은 없고 나만 있고, 또 의례 있어야 할 것도 고의로 없이하고서는 결코 신앙인이라 할 수 없다. 세상에서 누구보다도 그리스도인이 이기적인 일에서 떠나고개인주의적인 일에서 멀리하고, 어디를 가나 예수님을 본받는 생활을 해야 한다. 그래서 남을 위해 분주할 줄 알고, 남을 위해 무엇을 하겠다는 생각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 자신을 보나 다른 그리스도인을 보나 예수 믿는 사람이 너무도 이기적이고 너무도 개인주의적인 것을 어디서나 흔하게 본다. 참으로 예수님의 생활을 본받고 안받고의 표준은 이렇다. 남을 위하여 그가 내게 보답을 하고 대가를 지불할 수 있는 사람은 물론 내게 아무 것도 보답을 할 수 없는 어려운 사람에게로 관심을 갖고 돌보아주고 도와주는 일을 하는 것이다.
한가지 더 예수님을 본받아야 할 것은 이렇다. 그가 아침부터 저녁까지 남을 돕고 남을 위하는 일 때문에 분주했다. 그런데 그의 수고와 사랑의 목적이 다른 사람의 육적인 곧 세상적인 가치에 만족을 두고 하신 일은 아니다. 그의 생활에는 한가지 철칙이 있다. 남을 위하는 일을 하시되 언제나 육신만을 귀하게 여기거나 물질적인 생활을 최고로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항상 이 육의 생활의 가난 가운데서도 애써 구하고 찾아야 할 영적 생활의 풍부함을 더 높게 생각했다. 그래서 ‘사람이 빵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산다’라고 하셨다. 그는 또한 우리의 압박과 속박으로 구속과 부자유만이 찰조망처럼 쳐져있는 우리 육의 생활이라도 우리는 항상 영적 생활의 자유와 해방을 찾아야 할 것을 가르치고 권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고 하셨다. 우리가 육체의 병이 없이 튼튼하게 몇 백년이라도 사는 것을 원하지 않으시고 병들고 상한 육체를 어루만져 주시면서 ‘네가 다시 이런 죄를 범하여 다시 이런 질병이 네게 오지 않게 하라’고 죄라는 병균으로 죽게 된 사람이 영혼문제를 더 중요하게 생각하셨다. 그는 또한 우리의 육신의 생활이 세상에서 남을 명령할 수 있는 윗자리를 차지하고, 남을 부리고, 남을 다스리는 지위나 명에를 누리는 것을 권하거나 장려하지 않았다, 그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영광을 버리고 인간이 되시고, 남을 섬기는 종의 모습으로 손수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남을 섬기는 사람이 가장 머리되는 사람이라고 교훈하셨다.
예수님은 언제나 우리 영혼의 가치를 가장 높이 올리셨고, 우리 영적 생활이 행복과 자유와 평안을 위하여 분주하신 생활을 하셨다.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고 하신 그의 전도의 첫 외침은 인간들의 영혼의 자유를 선포하시는 말씀이었다. 하나님과만 대화하고, 그의 말씀을 기다리고, 그 말씀에 응답하고, 그의 뜻을 이루도록 만들어진 사람들의 영혼이 이 세상, 물질의 힘, 육적 향락, 명예심, 탐심, 시기, 교만, 허위 등 온갖 죄악의 세력에 얽매어 속박을 받고 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 영혼에게 구속과 속박을 주는 모든 세력을 없이하고 영적 만족과 평안을 주시고자 분주한 생활을 하셨다. 예수님이 생활은 분주했다. 그 분주는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니라 온전히 남을 위하다가 마지막에는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기까지 철저했다. 우리는 무엇 때문에 분주한 생활을 하고 있는가? 얼마나 남을 위하는 일로 분주한가? 다른 사람을 볼 수 없다면 우리는 예수님을 본받을 수도 없다. 예수님은 남을 위하시되 그들의 육의 문제를 위해서가 아니라 영의 문제를 위하였다. 영혼이 죽고 사는 문제에 최대의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영혼을 위하는 이 생활을 우리는 본받아야 겠다. 내 영혼뿐 아니라 내 자녀와 이웃들의 영혼에도 관심을 가지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란다. (1995-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