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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소설의 槪要
(해방 후 1940년 후반부터 70년 중반까지 우리나라는 경제적 빈곤국으로 대부분의 국민들이 가난하게 살았다.
전국의 산골에는 끼니를 해결하기 위해 산지를 일구어 농사를 짓는 화전민들이 즐비했고 척박한 삶의 그늘이 만들어낸 도박과 아편은 소작농들의 삶을 더욱 피폐하게 만들었다.
보리고개라는 말이 나올 만큼 해마다 연례행사처럼 겪어야 했던 춘궁기( 春窮期 )는 이밥에 고깃국을 마음껏 먹는 것이 국가의 과제가 되는 동기가 된다.
지금의 시선으로 바라본다면 상상이 가지 않는 이야기지만 불과 7~80년 전 우리들의 자화상이었다.
이 이야기는 가난의 음지에서 풍요로운 작금에 이르기까지 당시를 살아간 凡人들이 만들어 내는 다양한 삶의 편린들을 한 편의 풍경화로 그려보려고 했다.
* 1~4편의 줄거리
((1950년대 후반, 소작농으로 남의 땅이나 부쳐먹으며 식구들 입에 간신히 풀칠을 하는 봉식은 아편중독자가 되어 사경을 헤매는 딱한 처지다
마을의 대 지주인 성부자 영감에게 잘 보이지 못한 탓으로 그동안 얻어 부치던 땅뙈기 마저 빼앗긴 봉식은 딸 언년을 넘보는 성영감의 탐욕에 분을 삭이다가 무능한 봉식의 처지를 안타깝게 여긴 딸 언년이 스스로 성영감의 후처로 들어가자 그 덕으로 괜찮은 땅뙈기를 얻어 그럭저럭 연명을 하지만 끈질긴 아편 중독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자책하다가 세상을 뜨고 만다.
봉식이 죽은 뒤 얼마 되지 않아 봉식의 처도 성영감의 노리개가 된 딸의 처지를 비관해 병을 얻어 눕게 되고 언년에게 하루라도 빨리 지옥 같은 이곳을 떠나라는 유언을 남긴 채 생을 마감한다.
언년을 후처로 맞아들인 성영감이 언년에게 집칸을 내어주고 언년 사이에 아들까지 얻었지만 언년은 성영감 처의 모진 구박에 시달린다.
안타까운 마음으로 이 모습을 바라보던 머슴 수삼이 언년에게 연모의 정을 품게 되고 바쁜 농번기를 틈타 언년에게 몰래 마련한 패물을 쥐어주며 도망을 가라고 한다.
수삼이 쥐어준 패물을 들고 도망을 친 언년이 타관 함바집에서 날일을 하며 지내다 공사판 인부인 태석의 눈에 들어 살림을 차리고 딸 은교를 낳지만 의처증에 술로 세월을 보내던 태석이 광산 매몰 사고로 사망하게 되고 학교 소풍을 갔던 은교마저 사고로 잃게 된다.
객지에서 얻은 인연을 모두 잃어버린 언년은 낙담하지만 두고 온 아들 학기를 만나야 한다는 일념으로 살았던 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분식집을 차려 재기를 하게 되고 그곳에서 자신을 객지로 보내준 수삼을 만나게 된다.
오랜 세월 수삼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언년은 버리고 간 아들이 고향에 살고 있다는 말을 듣고 수삼을 앞세워 살았던 마을에 찾아가지만 멀리서 바라본 아들이 불구의 몸이 된 것을 목격하게 된다.
그 모습에 충격을 받은 언년은 아들과의 만남을 위해 절치부심 돈 버는 일에 매달린다.
분식집에서 출발한 언년의 영업은 악착같은 언년의 노력으로 번듯한 식당을 차리게 되고 돈을 버는 대로 아들 학기를 위해 땅에 투자하여 살림을 늘려나간다.
불어난 자본을 바탕으로 큰 요릿집을 낸 언년의 사업은 날로 번창하여 근방은 물론 먼 곳까지 소문이 나고 그 일대의 요식업소로 자리를 잡지만 여러 성격의 사람들을 만나게 되면서 언년의 몸과 마음은 점점 지쳐간다.
자신의 요릿집에서 잔일을 하는 영순을 아들 학기의 짝으로 점찍은 언년이 쉬 말을 꺼내지 못하고 속앓이를 하는 것을 눈치챈 수삼은 영순이가 투전판을 기웃대는 이장 아들의 사촌 누이라는 것을 알고 판돈을 빌려주며 환심을 사게 되고 마침내 영순의 부친과 상견례를 하게 되지만 영순을 낳고 버린 부친은 혼사를 하려면 언년 재산의 반을 나누어 달라는 조건을 내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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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년 내내 신명이 날만한 일이라곤 설과 추석이 전부인 손바닥만 한 동네에 가마솥이 일곱개나 걸린 것은 동네가 생기고 나서 처음이라고 했다.
동네가 떠나가라 울려 퍼진 돼지 멱따는 소리가 반나절 가까이 이어지자 동네 사람들은 물론 이웃마을 사람들까지 몰려들었다.
"얼마나 대단한 잔치길레 돼지를 네 마리나 잡아 눕힌데? 오랜만에 목구멍에 낀 때를 벗기겠구먼."
"읍내 요릿집 사장이 며느리를 본다는 소문이 진짜였네. 절름발이 학기가 팔자가 피네 펴."
"샥시가 건넛마을 서당 훈장이 몰래 내지른 여식이라던데 무슨 낯짝으로 허락을 했데. 숭악한 영감이라고 소문이 났던데."
"그 나이가 되도록 거들떠보지도 않았다는데 애비는 무슨, 요릿집 사장이 재산이 많다니 자식 팔아서 덕이나 보자는 수작이지."
동네에서 방귀깨나 뀐다는 유지 잔치는 꿈에 떡맛보기여서 이참에 두둑하게 배를 채워보자는 객들이 사나흘 간 얻어걸리는 절호의 기회였다.
누가 장가를 가고 시집을 가는지, 누가 죽었는지는 대부분 관심밖이어서 밀주사발에 미끄덩거리는 돼지비게 몇 점만 있으면 그날은 종일 운수 대통한 날이었다.
게다가 거두미가 끝난 늦가을 날씨라면 삼삼오오 모인 동네 주당들의 술자리는 새벽이 무안할 지경이었다.
혼주나 상주가 제 아무리 자린고비여도 이때만큼은 호인이 되는지라 낯빛이 바뀌는 사나흘 동네 발걸음들이 춤을 추고 다녔다.
학기 잔치는 이틀이나 남았는데 마을 냇가에 몰려든 동내 총각들의 손놀림이 빨라졌다.
얼기설기 쌓아올린 돌무더기에 수레에 싣고 온 결박된 돼지를 올려놓자 악을 써대는 돼지의 붉으죽죽한 눈에서 불이 흘렀다.
돼지 배에 등걸을 걸치고 장정 두사람이 양쪽에서 힘껏 누르면 칼질이 능숙한 사람이 돼지 목에 들통을 받치고 목을 땄다.
최후의 발악을 해대는 돼지가 발버둥을 칠 때마다 선지가 쿨쿨 쏟아졌다.
참으로 끔찍한 장면이었지만 누구도 그렇게 여기지 않았다.
돼지가 내지르는 비명은 곧 배불리 먹고 즐길 수 있는 호가였다.
족히 사 나흘을 즐기려면 대량의 선지국이 필요했다.
동네에서 추렴한 가마솥중에는 여물을 끓이던 땟국물이 줄줄 흐르는 사랑채 가마솥도 보였다.
돼지를 잡기 무섭게 앞다리 뒷다리를 뺀 머리와 내장을 손질하여 썰어 넣고 시래기나 산나물을 푸짐하게 푼다음 선지를 쏟아붓고 장작을 아름으로 지폈다.
반나절 가마솥이 설설 끓으면 구수한 선짓국 냄새가 후미진 뒷깐까지 퍼졌다.
해걸이 고기끈이나 구경하던 촌로는 물론 아이들까지 줄달음을 친 건 물론이었다.
논바닥에 짚을 깔고 멍석 몇둘기가 깔리자 동네에서 술 깨나 푼다는 사내들이 몰려들었다.
누구네 집 밀주가 맛이 좋다더라, 쌀섬깨나 먹는 집이니 쌀로 빚은 곡주라는 둥의 입방아를 확인하는 자리가 거지반 없었던지라 품앗이로 담가준 술독을 여는 날이 곧 혼사에 초상이 나는 날이었다.
건넛마을 양조장이 떨구고 간 말들이 막걸리통이 군데군데 놓이고 투박한 사발들이 시커먼 소반에 놓이기 바쁘게 술잔이 돌아갔다.
과방에 누가 앉았다는 소문은 평소 그 사람의 됨됨이를 가름하는 자리였다.
그도 그럴것이 며칠 동안 이어지는 잔치의 성패가 순전히 과방을 지키는 사람의 눈썰미와 손질에 달렸는지라 과방에 앉은 사람의 말은 혼주나 상주라고 해도 간섭하지 않았다.
음식을 많이 내고 적게 내는 것이나 사람을 보아가며 접시를 내도 어느 누구도 시비를 걸지 않았다.
언년이 과방사람들에게 열쇠를 건네자 과방을 훔치는 눈길들이 바빠졌다.
나잇살이나 든 동네 어른들을 모시고 사는 며느리들이 특별대접을 받는 것은 가뭄에 콩나기라 고된 시집살이를 며칠간이라도 보상받는 유일한 기회가 과방에 앉는 일이었다.
잔치 음식으로 때를 때울 수 있는 데다 종일 시부모 그늘에서 벗어나는 명분 있는 일이었다.
입이 벌어진 학기가 동네를 쏘다니자 평소 학기를 업신여기던 사람들까지 눈웃음을 쳤다.
"굼벵이도 구르는 재주가 있다더니 저 놈 웃는 꼴이 딱 그 짝일세. 그놈의 재산이 좋기는 허네."
"별 수 있겠나. 명년에 땅뙈기라도 얻어 부치려면 일찌감치 눈도장을 받아야 지."
새신랑 학기는 자신이 잔치의 주인공이라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덮어놓고 웃기만 했다.
잔치를 도울 청년들에게 아들 학기를 도와주라고 수 차례 부탁을 건넨 언년은 내심 불안했다.
잔칫날 뜻하지 않은 일이라도 생기면 어쩌나 싶어서 여간 조심스럽지 않았지만 학기를 장가보낸다는 뿌듯한 마음이 들자 지금까지 견뎌온 고단한 날들이 모두 일어나 춤을 추는 것 같았다.
손주를 얻을 수 있는 복까지 주어진다면 여한이 없으리라.
잔칫집 주인공은 국수라 읍내 국수공장에서 들여온 국수다발이 족히 백개는 되었다.
선짓국을 끓이는 가마솥 옆으로 국수를 삶아 건지는 솥이 줄줄이 걸렸다.
날이 궂을 걸 대비해 학기가 사는 집 주변 대 여섯 채를 빌려 손님을 받기로 하고 동네에서 발이 빠른 청년들을 배치하고
과방에서 음식을 나르는 길마다 가마니를 뜯어 깔고 나자 잔치가 코앞으로 다가왔다.
언년이 일꾼들을 불러다 삶은 돼지고기와 술상을 내고 봉투를 건네니 일꾼들 표정이 박꽃처럼 피었다.
마을 기금을 내는 일은 지금까지 없었던 일이라 자수성가한 요릿집 사장이 배포 있게 돈을 쓴다는 소문이 삽시간에 퍼졌다.
영순 아비가 영순을 조용히 부른 건 잔치 전날 밤이었다.
마음에 내키진 않았으나 어찌됐든 육신의 아비니 거역할 수 없어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마지못해 마당을 들어서자 벼락같은 호통이 순영을 맞았다.
"내가 부른게 언젠데 이제야 기어들어 오는 거냐. 니 에미가 본시 그런 줄 안다만 그래도 상놈 집안은 아닌데 길바닥에 말똥 구르듯 산 게냐?"
"어떻게 부르셨어요?"
"내일이 혼사날이니 내 일러줄 말이 있어 불렀다. 아뭇소리 말고 내 시키는 대로 해야 한다."
"어떤..."
"내가 너를 그 집안으로 허락을 한 건 다 너를 위한 것이니 마음 단단하게 먹고 내가 하는 말 잘 새겨듣거라."
영순은 목구멍이 근질거려 토악질을 할 기분이었지만 명색이 혼삿날이라 오늘만 참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말씀하세요."
"신랑 놈이 덜 떨어지 놈이니 니 하기 달렸다. 그 집구석 손은 볼 생각도 하지 말거라. 무슨 영화를 보겠다고 대를 잇겠나."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말귀를 잘 알아들어야지. 세상에 손해 보는 장사치가 있더냐? 그 집구석이 돈냥깨나 있으니 해보는 소리다."
"이미 많은 재물을 받으셨는데 혼사를 앞두고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세요. 그 건 사람 도리가 아니지요."
"아비 말을 귓등으로 듣는 거냐? 네가 뭘 안다고 말 대답이냐."
"그러시면 제 혼사를 왜 치르세요."
"네가 보다시피 번듯한 혼사도 아니고 팔려가는 거나 진배 없는데 그렇다면 손익 계산이 분명해야 하지 않겠느냐."
"그럼 , 어떡하라는 말씀이세요."
"아까 말했지 않느냐. 그 놈이 사내구실을 할 것 같지도 않고 시에미 짜리도 알고 있을테니 그 집구석 손 볼 생각은 아예 하지 말라는 말이다. 그래야 훗날을 도모하지 않겠느냐."
"무슨 그런 말씀을 하세요. 제가 좋아서 가는 것이니 제 일은 제가 알아서 하겠으니 심려치 마세요."
담배꼬가리를 댓돌에 탁탁 털던 영감이 당차게 말하는 영순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시앗의 배였지만 인물이 반반하고 몸이 육덕져서 한때 품에 안았던 용미댁을 그대로 빼다 박은 모습이었다.
비록 한때 욕심을 채우고 댓바람에 내다 버릴 여인은 아니었지만 본처의 성질이 포악한지라 딴에는 글줄깨나 읽었다는 자존심으로 오랍뜨리 전지 한 필지와 가락지 몇 개를 던져 준걸로 퉁을 쳤지만 그래도 몇 번 품었던 욕정에 달빛 그윽한 밤이면 삼삼하니 눈에 밟히는 여인이었다.
그러나 영악하다고 소문이 난 영순 아비는 용미댁이 배가 불러오고 산달이 가까워 오도록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소문에는 용미댁이 떡두꺼비 같은 아들을 낳기라도 하면 팔자가 달라질지 모른다고 수군거렸지만 후처살이를 한 초산댁은 설령 아들을 낳는다고 해도 그 흉악한 영감이 마음을 바꾸지 않을 거니 엄한 애를 낳아서 아비 없는 후레자식을 만들지 말고 부자라도 삶아 먹고 애를 떨구라고 했다.
엎어놓은 바가지 배를 떠안고 다니던 용미댁이 색시골 비탈길에서 내리 구른 건 동짓달 초하루 날이었다.
신내림을 받은 초산댁이 그날이 손이 덜 타는 날이니 애가 떨어져도 큰 탈이 없을 거라고 귀띔을 하기도 했지만 이미 초설이 내린지라 누가 보더라도 손가락질은 받지 않겠다는 나름의 속셈이 선 까닭이었다.
색시골은 곳간 쥐 드나들 듯 다닌지라 눈을 감고도 다닐 판이라 적당한 곳에 나가 자빠지면 될 일이었다.
이른 새벽에 고무신을 신고 색시골로 올라간 용미댁은 턱이 높고 아래는 판판하여 굴러도 크게 다치지 않을 곳을 골라 두 눈을 감고 냅다 미끄럼을 탔다.
쭈르르 둔덕 아래로 미끄러진 용미댁이 다래나무줄기에 몸이 감기면서 산 옆으로 난 개굴창에 쑤셔 박혔다.
반사적으로 배를 잡아 보았지만 얼른 일어설 수가 없었다.
다리가 부러졌는지 오른쪽 종아리에서 피가 흥건하게 흘러나오고 다리가 끊질 듯이 아파서 왼쪽 다리에 힘을 주어 간신히 기어 나왔지만 두 팔로 나무줄기를 잡고도 일어설 수가 없었다.
용미댁이 색시골에서 넘어져서 다리가 부러졌다는 소문이 나자 초산댁이 불나게 쫓아왔다.
"아니, 이 사람아 제대로 해야지. 등신같이 하라는 건 안 하고 엉뚱한 다리를 분질르나. 참 딱한 사람이네. 그거 내가 시켰다고 절대로 말하지 말게."
용미댁은 속에서 주먹 같은 욕이 올라왔지만 어찌 됐든 시키는 대로 한 건 본인이니 눈을 꾹 감고 분을 삼키는 수밖에 없었다.
며칠 뒤, 다리를 매달고 있는 용미댁에 마을에서 입이 싸기로 소문난 구멍가게 장 씨가 불쑥 들이닥쳤다.
"좀 괜찮수? 그래도 용하이. 뱃속에 든 애가 보통 놈이 아닌가 벼, 초산댁이 그러던데 용한 애가 난다고 하더라고.
신 내린 사람이 하는 말이니 보통 애가 아닌 게 분명하겠구먼."
빌어먹은 년.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거리, 나를 천치 바보로 아는구나 싶은 용미댁은 다리가 낫는 대로 이년을 찾아가 요절은 내리라 이를 갈아 부쳤다.
막달이 지났지만 어찌 된 일인지 용미댁은 몸을 풀지 못하고 사경을 헤매고 있었다.
처지를 아는지라 이를 딱하게 여긴 포목상을 하는 고씨가 수시로 찾아와 진맥을 하고 침을 놓는 등 애를 썼으나 허사였다.
한약방을 하던 부친의 업을 잇지 못하고 장돌뱅이로 떠돌다 그래도 재복이 있어 부친이 남기고 간 전지를 팔아 동네 복판에 포목상을 냈지만 연이은 혼사 실패로 가세가 기울어 가고 있었다.
고씨가 용미댁을 찾는 것은 다른 마음을 먹은 것이니 이참에 꼬인 팔자를 고쳐보는 것도 후사를 위해 해볼 만한 장사라는 말을 수 차례 들었지만 당장의 처지가 한심하여 귓등으로 흘려듣다가 아침저녁으로 찾아와 진맥을 하는 고씨의 정성에 용미댁은 흔들리고 있었다.
"부자가 망해도 3년은 먹고 산다는데 생긴 건 고무래 같이 생겼어도 밥은 굶기지 않을 테니 마음을 바꿔 보라고."
그날그날 날품으로 끼니를 잇던 용미댁이 뱃속 영순아비가 쥐여준 논 닷 마지기를 내어 놓은 건 천신만고 끝에 딸 영순을 낳고 백일도 지나지 않아서였다.
고씨가 마음을 내 보이면 내 먹을 건 있으니 빌붙어 살 사람이 아니라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영순을 낳고 혼절하여 생사를 오가던 때에 옆에서 지켜준 고씨를 외면하는 건 도리가 아니라는 생각에 고씨 마음을 받아들이기로 마음먹었지만 영순 아비에게 당한 수모를 또다시 겪지 않을까 싶어 고씨 앞에 당당하고 싶었다.
"용미댁이 고씨집으로 들어간다고 하는구먼. 보통 고집이 아니더니 고씨가 그리도 찍어 대더니 결국은 넘어 가는구먼 "
"찌울기로 말하면 고씨지. 돼지 본때보고 잡아먹는 건 아니지만 서두 용미댁 같은 훤칠한 여자가 개떡같이 생긴 고씨에게 가당키나 하겠어."
"고것도 고씨 복이지. 하지만 좋지만은 않을 끼여. 두 사람만 좋다고 되겄어? 고씨 애들이 넷이니 용미댁 딸까지 들이면 볼만하갔구먼."
동네 사람들 입방아가 봄바람에 꽃잎 날리듯 하던 때에 용미댁과 고씨가 합방을 했다.
포목상 문을 닫고 참깨 들깨를 볶는다는 이바구가 동네를 돌았다.
합가를 한지 두 어 달이 지났지만 돼지마리나 잡고 술이라도 거하게 내라는 닦달이 꼬리를 물자 참다못한 용미댁이 나섰다.
이제 막 걸음마를 시작한 영순을 둘춰업은 용미댁이 읍내에 나가 잔칫거리를 마련해 오자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고씨가 성질을 내며 가로막았다.
"나한테 왔으면 내를 따라야지 누구 맘대로 잔치를 한다고 나서나. 고 따우로 하려고 내 집에 왔나?"
뜻밖이었다.
고씨 체면을 살려주려고 한 일이라 내심 인정을 받고 싶었는데 간장종지만 한 눈을 부릅뜬 고씨는 생사를 오가던 때에 옆에 있어준 사람의 모습이 아니었다.
용미댁이 마련한 장거리를 사랑채에 쑤셔 박은 고씨가 널빤지를 대고 대못을 치자 이를 지켜보던 고씨 아들이 짐승 같은 소리를 지르며 고씨에게 달려들었다.
6부로...